INTERVIEW

건축, 포용과 조율의 커뮤니케이션

건축가 김정임 ③

삼성전자 R&D 센터, 김정임 사진_신경섭
SK D&D, 김정임 사진_신경섭
SK 가스, 김정임 사진_신경섭
SK가스 본사 업무 공간, 사진_노경
SK 캐미칼, 김정임 사진_신경섭
오피스 프로젝트는 소장님의 포트폴리오에서 한 카테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독립 후 첫 프로젝트가 삼성전자 오피스 공간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였는데, 어떻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나요?
제일기획 프로젝트 때문에 일을 수주하게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오피스 프로젝트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입해서 직접 의사결정자들과 만나고, 프레젠테이션도 자주 해야 해요. 처음부터 일반적인 오피스 인테리어(Office Interior)가 아니라 기업 철학(Corporate Philosophy)이나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가 녹아든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마케팅했어요. 그 때문에 대표님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면서 진행해야 해서 공력이 많이 들어요. 패브릭이나 팬트레이(Pen tray) 폭으로도 컴플레인이 있을 수 있어서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한두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진이 빠져서 한동안은 돌아보지 않게 되죠.
 
제일기획 프로젝트는 아이아크(IAAC)에서 있을 때 맡아 독립하면서 일을 진행하신 건가요?
회사에 들어온 일을 맡았다기보다 제가 수주를 해서 진행했어요. 저의 사업 분야 같은 것이었죠. 어떻게 보면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 거죠. 독립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저의 성향과도 잘 맞고, 일도 재미있고, 설계비도 괜찮았기 때문에 건축과 오피스 플래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기를 원했어요.
일이 시작되면서는 브랜디드 오피스(Branded Office)로 진행했어요. 그래서 삼성전자의 경우 기업 로고(Logo)의 앵글(Angle), 형태, 색상 같은 것을 가지고 그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스토리 라인(Story Line)을 엮어주고 그것으로 디자인을 진행했어요.
 
초기 오피스 플래닝 영역은 가구 배치나 가구 디자인 영역에 가까웠는데요. 구글로 대표되는 재미(Fun)있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나 가구의 효율적인 배치, 활용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룬 것 같아요. 2010년 네이버 사옥 그린팩토리가 등장하면서 스토리텔링이 강화되었고요. 당시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차별화했는지 궁금합니다.
삼성전자 브랜디드 오피스 디자인은 2012년 겨울부터 2013년에 걸쳐서 했는데, 해외 사례를 많이 참조했어요. 겐슬러 리포트(Gensler Report)나 외국 회사들의 사례를 공부하며 스토리를 풀어나가야 했어요. 칼럼들을 보고 오피스 트렌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공부하면서 디자인을 시작했죠.
지금은 스토리텔링에 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는 한창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스퀘어 프로젝트에서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시작했는데, 로비 공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리서치할 때 곧 환승센터가 생긴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서, 환승센터가 생기면 차량 속도가 느려지고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광장과 연결되어 움직일 거로 생각했어요.
그 움직임의 에너지가 서울스퀘어의 로비와 서울역 광장(Plaza)을 연결하면서 연장된다고 보고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시작했어요. 예전 대우빌딩이 굉장히 엄격하고(Rigid) 남성적이며 권위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이미지로 바꾸고자 했어요. 그래서 곡선이라는 요소를 도입했죠.
또 서울스퀘어는 폭이 100m인데, 새로 신축하려면 10층 이상부터 폭이 50m를 넘지 못하도록 법이 바뀌었어요. 중앙우체국 같은 디자인이 나오게 된 배경이죠. 마케팅 포인트는 건물 3개쯤 합쳐진 정도로 한 층 바닥이 넓다는 장점이었어요. 보통 큰 회사들이 몇 개 층을 임대하는데, 층으로 나뉘면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기존 엘리베이터 코어가 3개로 나뉘어 있는데, 3개 건물의 발이 내려와 있는 도시의 광장 같은 것으로 해석했어요. 로비 천장을 하늘처럼 깊이(Depth)가 있는 공간을 표현해 보고 싶어서 구조 라인을 활용해 삼각형 패턴(Triangle Pattern)을 만들었어요. 이 패턴을 곳곳에 응용해서 벽면에 루버(Louver)로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보면 이게 다 연결된 패턴이라는 느낌을 주게끔 공간을 스토리로 풀어갔어요.
 
제일기획 프로젝트에서도 처음에 로비 공모 설계를 할 때 약간의 스토리텔링을 했어요. '빙산의 일각(Tip of the Iceberg)'이 콘셉트였어요. 제일기획의 웹사이트를 보니 '아이디어 엔지니어링(Idea Engineering)'이라는 말을 강조하더라고요. 하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엔지니어링하는 기술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신들의 본체는 위에서 일하는 공간이고, 이 로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했어요. 로비에 빙산의 일각(Tip of the Iceberg)을 노출해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당선된 이후에는 의뢰인의 요구가 바뀌어서 '천 개의 창'이라는 콘셉트로 다시 디자인했어요. 제일기획의 영문명이 'Cheil Communications'이니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직원 개개인이 대중과 소통하는 하나의 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 개'라는 숫자는 들루즈(Deleuze)의 '천 개의 고원'에서 상징적으로 가져왔죠. 그래서 로비에 창이 많이 모여 있는 벽(Wall)을 만들고, 그들의 컬러 팔레트(Color Palette)에 빛이 흐르는 콘셉트를 제안했어요. 이를 바탕으로 ‘아이디어 생태계’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오피스를 디자인했어요. 이렇게 스토리와 공간을 엮어나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삼성전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며 일하는 방식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당시 국제적인 오피스 트렌드는 집중과 소통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어요. 예전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책상에서 일하고, 위에서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성실한 직원의 모습이었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집단지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어요. 2010년대 초반에 이런 인식이 막 시작되었고, 협업과 소통을 통해 공동의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수직적인 조직이 아닌 수평적인 조직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였죠.
우리는 이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과 의사결정 방식을 고민했어요. 예전에는 부장이 가장 많은 알고, 그다음이 차장, 과장이었어요. 평사원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평사원이 부장보다 더 많이 아는 분야도 있어요. 이를 클라우드처럼 접속해 함께 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죠. 지금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신선한 개념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조직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고민하며 공간을 설계했어요.
 
이후 SK D&D에서는 더 적극적인 오피스 플래닝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개방형 오피스를 시작으로 제일기획, 삼성, 그리고 SK D&D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당시 한 기업에 예약 좌석제를 제안했는데, 책상을 없애면 애사심이 줄어들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2018년에 SK D&D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그분들이 이미 자율좌석제 개념을 알고 있었고, 이를 도입하는 데 긍정적이었어요. 그래서 사용 공간을 절약할 수 있었어요.
사흘 정도 현장을 관찰하고 조사했는데, SK D&D는 전문가들이 모인 조직이라 아침에는 사무실이 꽉 차 있다가 점심 이후에는 절반 이상 자리를 비우더라고요. 이를 활용해 부동산 임대료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모든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고, 60%나 80%만 준비해도 된다는 데이터를 조사해(Survey) 제시했어요. 카페, 오픈 미팅 등 공용공간 비중을 늘려 다 왔을 때는 어디에든 앉을 수 있게 하고요.
건축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지만, 오피스 플래닝 프로젝트는 의뢰가 오면 그때그때 재미있게 해보면서, 회사의 공간을 만들고, 조직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오피스 공간을 설명하며 덴마크 건축가 얀 겔(Jan Gehl)의 소프트 바운더리(soft boundary)에 대해서 언급하셨어요. 건축뿐만 아니라 오피스 공간에서도 공간 흐름에서 중간 영역을 만드는 걸 고민하신 것 같아요.
우면동 삼성 디자인 센터 때 많이 제안했던 것도 소프트 바운더리에 대한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피스 플래닝은 집중과 소통이 중요해요. 보통 오피스는 집중해서 일하는 워크스테이션(workstation) 공간과 공식 소통을 위한 회의실, 그 두 개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집단지성을 기대하려면 사람들이 친해지는 게 상당히 중요하죠. 회사의 자산에 암묵적 지식이라는 게 있어요. 서류나 회의록에 남겨진 게 아니라, 선배가 후배에게 "이렇게 일하면 더 좋아"라고 알려주는 것들이에요. 문제는 이게 관리가 안 되는 자산인 거예요. 결국 구성원들끼리 친해져야 돼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너 요새 무슨 일 하니?",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하면 “그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이런 소통이 업무 효율에 중요하다는 거죠. 예전엔 이런 부분이 관리자 레벨(Level)의 관리 대상이 아니었지만, 이제 직원들이 조금 더 우연한 만남을 자주 갖게 하고, 서로 자주 만나게 해서 그런 지식이 많이 교환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업무 공간 사이사이에 중간 영역이 있으면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잠깐 간식을 먹고, 회의도 할 수 있어요.
칸막이 오피스가 오픈오피스(open office)로 변하고, 아일랜드와 같은 중간 영역들이 중간중간에 배치되면서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예요. 우리 회사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경영상의 문제나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죠. 예전에는 밀실에서 임원들끼리만 나누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일반 직원들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회사를 이해하고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돼요.
반면, 개방형 오피스는 소음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질 수 있어요. 이를 위해 자기만의 공간으로 잠깐 들어가 집중 업무를 하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어요. 옛날과 개념이 달라진 거죠. 저희도 기본적으로는 오픈오피스를 구성하고, 계속 업무 환경을 개발해 나갔어요.
가장 최근 프로젝트인 SK케미칼(Chemical) 같은 경우에는 오픈오피스지만 중간중간 작은 기능실 덩어리를 배치하여 시선을 차단해 줘서 조금 아늑한 느낌을 느낄 수 있게 했어요. 시선을 다 트는 것으로 시각적인 스트레스를 줄 수 있기 때문에요. 청각적으로는 열려 있죠.
코로나를 겪으면서 1인 집중실과 2~3인 정도가 모여서 할 수 있는 작은 회의실이나 화상 회의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어요. 요즘 줌 미팅을 많이 하니까 2인용 미팅실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오피스에 대한 요구도 그때그때 수용하면서 많이 개발되었어요.
 
중간 영역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저희가 개발한 개념은 많이 언급하는 사사분면(quadrant)과 관련이 있어요. 'I'와 'We', 'Own'과 'Share‘가 키워드죠. 과거에는 “내('I')가 'Own'하는 내 워크스테이션”과 “우리('We')가 'Share'하는 회의실”, 이 두 가지 공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죠. 하지만 이제 오피스를 하나의 생활 공간으로 보고, 이 4사분면을 잘 채워주는 균형 잡힌 디자인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를 채워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어요. 직원들 간의 세미나나 학습 프로그램도 지속해서 개발하고 있어요. 겐슬러 리포트에서 본 것처럼, 포커스(Focus) 업무 공간, 소셜라이즈(Socialize) 공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공간 등을 컬러 코드(Color Code)로 구분해 적절한 비율로 배치해요. 오피스 내에서 학습(Learn)이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해서 학습(Learning) 공간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러한 공간들을 잘 조합하여 두 가지 큰 공간 사이에 중간 영역들을 만들어주고,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 제안했어요.
 
오피스 브랜드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는데, 이 과정에서 무엇을 고민하셨나요?
물론 모든 분이 그렇지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인테리어를 감각적인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어떤 색을 칠할지 고민하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것들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되어버리면 의사결정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의사결정자가 "나는 핑크색이 싫은데"라고 말하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인테리어를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 지금도 의뢰가 들어올 때, 취향과 감각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공간이라면, 저는 거절해요. 저보다 훨씬 잘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저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집중해요. 단순히 공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문제를 느끼고 그 방향을 새롭게 혁신하고 싶거나, 새로운 업무수행 방식을 공간에 적용하고 싶어 하는 경우, 공간 전문가로서 그 아이디어를 공간에 구현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놓았어요. 일을 할 때는 이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고 최소 4개월 정도는 작업해야 한다고 설명하죠. 고객분들도 이 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야 한다고요. 그런 조건으로 많은 일을 진행해 왔어요. 그 과정을 논리적인 프로세스로 만들어서 설득되면, 말미에 결정되는 취향과 감각의 문제는 의뢰인의 의견을 많이 수용할 수 있다고 봐요.
 
제일기획이나 삼성전자 프로젝트도 흥미롭지만, SK D&D에서 특히 선명한 색깔이 드러난 것 같아요. 어떤 제안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프레젠테이션에서 키워드를 제시했어요. 먼저 회사가 가진 키워드가 있어요. 디벨로퍼(developer)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발견해 내는 사람이라고 해요. 밸류 크리에이터(value creator) 같은 역할이죠. 또 조직 자체가 수평적이에요. 다른 회사에서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들이 이직해서 일하는 성격이 많더라고요. 당시엔 부동산뿐만 아니라 에너지 분야도 개발하고 있었어요. 굉장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었죠. 처음부터 의뢰인은 자신들이 디벨로퍼이니 D&D 오피스 공간이 오피스 모델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만드는 거예요. 워크라이프(work-life)가 바뀌고 근무 환경과 업무 공간의 기능이 변하고, 개인도 변하는 상황을 고려했어요. 그래서 '오피스 얼라이브(Office Alive)'라는 개념을 정리해 제안했어요.
큰 공간으로 옮기면서 의뢰인이 고민했던 부분도 있어요. 잘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중정이 있고, N동과 S동으로 나뉜 구조였어요. 각 공간에 문이 있어서 출입할 때 태그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고요. 대표이사님은 ’중정이 무슨 한탄강도 아닌데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어요. 3층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직원이 더 늘어날 예정이라 4층 일부도 빌려 둔 상태였고요. 그 상황에서 자율적인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셔서 이걸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해 고민했어요.
특히 건물에 방문했을 때 중정이라는 공간이 너무 적막했어요. 좀 더 활력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했죠. 입체적인 공간을 좋아하니 어떻게 하면 그런 공간을 만들어줄까 싶어서 소통하는 공간으로, 구성원 개인의 취향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제안했어요. 그게 오피스 얼라이브(Office Alive)였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간을 바꾸셨나요?
먼저 평면을 재배치하고 다양성을 구현하는 작업을 했어요. 1, 2층은 공용 공간이고, 3층부터 D&D 오피스, 그 위는 SK 가스 사업 부문이 썼었죠. 전체 도면을 살펴보니, 1, 2층과 4층의 화장실 위치가 달라서 2층에 있는 샤프트에서 배관 라인을 가져오면 화장실 위치를 바꿀 수 있었어요. 엘리베이터 코어에 화장실을 붙이고 원래 화장실이  있던 'ㅁ'자의 단변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간(Attracter)을 두자고 생각했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상황에 관한 판단으로 해법을 제시한 거죠. 우리가 중간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에요.
의뢰인은 복도까지 활용해서 협업의 공간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어요. 복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방에서 방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제안하고 기존 복도를 소통과 교류의 공간을 만들었어요. 우리가 중간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에요.
 
자율 좌석제도 도입해서 시간제로 예약해 사용할 수 있게 했어요. 예상 구성원 210명 대비 83%를 확보하고, 예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핫데스크(Hot-desk)를 포함, 총 234석을 두어 추가적인 인원 변동에 대응할 수 있었죠. 디지털 환경이 발달해서 QR 코드를 찍어서 좌석을 쉽게 예약할 수 있는 앱도 개발되었고요. 공간이 예약 방식으로 바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하게 돼요. 자기 주도적으로 될 수 있죠
의뢰인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혼자 있고 싶은 걸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기존의 규격화된 공간이 아니라 다이버스 모멘트(Diverse Moment)를 수용하는 공간을 제안했어요. 예약 좌석제의 지원시설들도 필요해요. 락커(Locker)나, 옷을 걸 수 있는 수납장(Closet) 같은 것들요.
 
자율 좌석제(Free Seating) 하는 김에 다양한 좌석을 만들고 업무에 맞게 골라서 쓰게 하는 게 더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옮겨 다니는 이유를 더 부여해 주자고요. 그 사람들의 업무를 분석해서 6가지 업무 모드(Work Mode)를 도출했어요. 개인이 혼자 집중해서 하는 것, 팀이 간단한 협의를 해가면서 같이 집중 업무를 하는 것, 만남과 회의를 하는 것, 협업과 미팅(Meeting), 일과 휴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 임원의 경우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것 등등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기존 화장실이 있던 공용부에 계단식 좌석을 만들었어요. 의자를 놓으면 강사 자리를 중심으로 몇십 명이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게 했어요. 말 그대로 라운드 어바웃(Round About)을 만들어준 거예요.
기존 건물에서 너무 튀지 않도록 중정의 재료(Material)나 분위기를 일부 유지해서 한 건물이라는 느낌을 주고자 했어요. 그러고 나니 공간에 활력(Vitality)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협업하면서 움직임이 많이 보였어요. 나중에 인원이 많아졌는데도 3층만 사용해 2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후 SK 가스와 SK케미칼 프로젝트까지 연속적으로 진행하면서 나름대로 논리의 틀을 짜서 설득해 나갔어요. SK의 최창원 부회장님이 SK 경제연구소를 같이 운영하시는데, 인문학적 소양이 높으셔서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셨어요.
 
최근 여러 사옥에서 오피스 공간의 아이덴티티(Office Identity)가 인테리어 영역에서 건축 영역으로 확장된 걸 느끼고 있어요.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설계한 테크노플렉스(Technoplex)나 니켄세케이의 HD현대 사옥, 마곡지구에 있는 여러 R&D 사옥의 경우, 층간 구분 없이 열린 대규모 중심부가 등장하고 있어요. 층과 층 사이에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가 발생한다는 의미기도 하고, 층을 넘어서 강렬한 시각적, 공간적 확장을 경험하게 되어요.
노먼 포스터의 공간은 가보지 못했지만, 공간을 받아들이는 태도, 일하는 방식, 조직 문화가 영국과 다를 수 있어요. 사회가 바뀌면서 공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맞아요. 지금 세대들은 옛날처럼 일하지 않아요.
기존 오피스를 바꾸는 데도 여러 이슈가 있었어요. 예약 좌석제 같은 경우 임대 면적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경영진들이 구성원들에게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하는 거죠. 공간을 바꾸는 것은 좋은 인재를 채용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해요.
 
공간 구성뿐만 아니라 소프트한 장치(Soft Features)까지 많이 고려하고 계시는데요. 건축가로서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심리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서, 오피스 내의 위계나 조직 변화 등을 많이 고려하고 있어요. 앞서 말했듯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그런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요구(Needs)뿐만 아니라 숨겨진 이야기들까지 고려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흥미로워요.
 
사용자 리서치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다이내믹스(Dynamics)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단순히 공간적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작동하는 다이내믹스죠. 어떤 경우, 의뢰인 쪽에서 공간의 분리와 위계를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섞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단면상에서 섞이지 않는 듯하면서 섞이는 공간 콘셉트(Concept)로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초기부터 드러나지 않더라도 공간적으로 차별이나 차이를 섞어낼 수 있는 중간 영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용자도 인지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부분들이죠. 일반인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는 공간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게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사회에 있는 갈등을 공간적으로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구성원의 인터뷰와 설문조사가 흥미로워요. 그 조직을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방식인 것 같아요.
권위를 와해시키거나 반목과 질시를 덜 느끼게 하는 장치가 존재하지 않을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중간 영역에서 작용하지 않을까 기대하죠. 중간 영역과 모호한 부분들을 만들어주면 그곳에서 다양한 행위가 발생해요. 소프트 바운더리(Soft Boundary)는 이런 부분이에요. 공간 속에서 그런 걸 만들어주려고 많이 노력해 왔어요.
 
SK 가스 프로젝트에서는 디자인이 좀 더 강조된 것 같아요.
오픈오피스(Open Office)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에요. 보안이 중요하고 연구직이 많은 조직이라면, 그 조직 문화에 맞는 오피스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누구나 개방형 오피스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는데, SK 가스가 그런 경우였어요. *B2C가 아닌 *B2B 사업이에요. 가스 시설은 국가 보안시설 같아서 조직도 굉장히 엄격(Rigid)하더라고요.
자율 좌석제를 도입할 계획이었지만, 대표님은 층과 층을 오가는 자율 좌석제는 하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층마다 거의 비슷하게 설계되었고, 마지막 한 층만 조금 다른 프로그램이 들어갔어요.
보안이나 조직의 보수적인 성격이 중요한 경우에는 조직의 성격에 맞춰서 진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SK 가스 프로젝트는 디자인적인 요소가 더 많이 반영되었어요. '우리가 무엇을 디자인할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의뢰인이 기존 구조를 뚫고 계단을 만들고 싶어 하셔서 계단 디자인에 큰 노력을 기울였어요. 부재 사이즈(Member Size)를 줄이기 위해 영국제 강재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30% 정도 줄일 수 있었어요. 계단과 천장 디자인(Ceiling Design)에 많은 투자를 했어요.

*"B2C"는"Business to Consumer"의 약자로, 기업이 소비자에게 직접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
*"B2B"는"Business to Business"의 약자로, 기업이 다른 기업에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
 

미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프로젝트였네요. 오피스 플래닝을 반복하면서 고민도 있으셨나요?
개인적인 고민은 하나의 영역을 깊게 파면 경쟁력이 생길 것 같긴 한데, 저는 성향상 다양한 일을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학교, 노인 요양시설, 오피스, 주택, 근린생활시설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직원들도 흥미롭다고 해요. 우리의 큰 장점이라고요.
대신 힘들다고 하죠. 매번 다른 일을 하고, 법규도 달라지니까요. 많은 설계회사가 다양한 일을 하지만, 우리는 노인 시설과 오피스 같은 조금 특별한 시설을 다루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완전히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지 못하는 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떡하겠어요. 제가 그런 사람인 걸요.
 
여러 오피스를 진행하시면서 오피스 공간에 관한 생각도 깊어지셨을 것 같아요. 오피스 공간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지 정리된 생각이 있을까요?
오피스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 관점에서 공간을 설계하는 것이라로 생각해요. 잘못하면 공급자 마인드로 접근하기 쉽거든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특정한 한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요.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때 어떤 공간이 있으면 좋을지를 더 많이 생각해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우면 디자인 센터 프로젝트를 할 때, 여러 디자이너나 임원분들을 만났어요. 그때 그분들이 일상은 너무 고달프지만, 로비 공간에 들어가면 근사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또 매주 수요일마다 임원 회의를 위해 시제품을 준비해야 했는데, 극도의 긴장감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 공간을 꼭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임원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그분들의 고충을 이해하면서 그런 것을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요.
집 안에서도 화장실, 방, 거실 등 다양한 공간이 있듯이, 업무 공간에도 우리의 상황이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영진으로서는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고, 비용과 직결되기 때문에 저도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해요. 그런 여지(margin)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디자이너들은 경영자로부터 일을 받지만, 실제로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구성원들의 생활을 파악하고 잘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는 것이 좋은 설계가 아닐지 생각해요.
 
소장님에게 사무실은 단지 일하는 공간이 아니네요.
그렇죠. 사는 공간이죠. 학교도 사무실도 우리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살아가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를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꿈담(Dream Talk) 프로젝트 이야기를 해볼게요. 초등학교 공간을 개선한 꿈담 프로젝트는 워낙 의미 있는 프로젝트인데요. 2017년부터 시작해 많은 건축가가 교육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꿈담 프로젝트에 어떻게 참여하셨는지, 당시 고민했던 부분이 궁금해요.
학교 공간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제 아이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참관 수업을 갔는데,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방문한 거잖아요. 가보니 거의 바뀐 게 없더라고요. 조금 더 깔끔해지고 교실의 밀도가 낮아진 정도였고, 큰 변화는 없었어요. 그동안 학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건축가로서 그동안 뭘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오피스(office) 일을 하다 보니 학교와 오피스가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명이 함께 생산적인 지적 활동을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집과는 다르잖아요. 학교를 개선하는 데 오피스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개소를 한 후 2013년쯤 교육청 공모전을 참여했어요. 점수표가 나중에 공개됐는데, 교육청에서 나오신 분이 우리 안에 대해 항목별로 ’양양양양‘을 주셨어요. 장벽이 높구나 싶었죠. 우리 새로운 공간을 제안했지만, 그분들은 관리 입장에서 본 것 같아요.
그러다 서울대 강의 중 김승회 교수님과 이야기하다가 서울시 교육청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셔서 너무 좋다고 했어요. 교육청에서 연락이 와서 20명 정도 건축가를 모아서 꿈담 프로젝트 총괄 역할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엄청나게 일이 많았어요. 설계비는 수의계약 범위인 2천만 원 안에서 감리까지 하는 조건이라 책임감 있게 잘 해주실 분들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첫 해 장영철, 신호섭 소장님 등 쟁쟁하신 분들을 모았어요. 설계비도 적은데 프로젝트를 잘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집이나 회사에 가까운 학교를 매칭시켜야겠다고 생각했죠.
 
학교에서 특별히 요청한 사항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학교에서 필요한 공간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분들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뭘 요구해야 할지 모르셨어요. 3월에 시작해서 6월 말까지 완료해야 했고, 조달청 발주 기간을 빼고 여름방학 동안 공사를 진행하려면 시간이 촉박했어요. 그래서 각 학교의 물리적 현황을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각자가 디자인한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어요.
저는 학교라는 시설이 건축가의 예술혼을 불태우면서 자신만의 유니크(Unique)한 걸 만드는 시설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범용적으로 좋은 것을 개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디자인 아이디어를 공유하자고 제안했더니, 모두 동의했어요. 매달 서너 번 정도 모여 각자가 맡은 학교의 특수 상황이나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첫해에는 교육청 담당자와 학교, 건축가 사이에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걸 다 조정해야 했죠.
 
교육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간에 어떻게 담아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주로 1~2학년 교실을 대상으로 토탈디자인 개념으로 진행했어요. 교육청에서 준 지침이었고, 장학사님이 오셔서 요즘 초등학교 수업이 이렇게 진행된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공간은 똑같았지만, 수업의 내용은 매우 바뀌었더라고요. 그냥 교실에 앉아서 수업받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기어다니고, 만들고, 몸으로 표현하고, 다양한 수업들이 진행되어서 그게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줬어요.
당시 선생님들도 건축가를 만난 게 처음이라, 기능적인 요구들만 있었어요. 라커룸이 너무 작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제가 맡았던 학교 같은 경우는 교실 배식을 하는데, 배식차(meal cart)가 복도에 굴러다니고 있어서 위험해 보였어요. 그걸 해결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교육 콘텐츠나 교육 방식이 바뀐 것에 대한 영감과 학교에서의 실질적인 요구를 종합해서, 건축가가 창의적으로 첫 해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건축가들끼리 공유했던 키워드들은 무엇이었나요? 각자 현장에 대응하는 방식이겠지만, 교육 공간에 대해서 제안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학교라는 공간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정서적, 신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에요. 그런데 획일적인 공간밖에 없고, 관찰당하는 구조예요. 그때 사용자 참여 디자인(User Participatory Design)이라는 게 처음 나왔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시켰더니, 비밀의 방 같은 것도 그리고 침대를 그리는 예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그 나이에 4~5시간을 앉아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생각했어요. 어느 정도 숨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거죠.
선생님들도 그런 고충을 이야기했어요. 예를 들어 빠른 아이와 느린 아이들이 있는데 빨리 끝낸 아이들을 그 자리에 얌전히 앉혀두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그럴 때 저기 가 있으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보려면 볼 수도 있고 아이들 입장에서도 적절히 차폐된 공간을 원했어요. 그런 중간 영역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했어요.
 
또 이상한 건 가장 뛰기 좋게 생긴 복도를 만들어놓고 뛰지 말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걸 깨주고 싶은 느낌이 있었어요. 교실과 복도 사이에 배식대를 만들기도 했어요. 작은 부분이지만,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사용하면서 교실 안과 밖이 사실은 딱딱한 경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이런 게 소프트 바운더리(Soft Boundary)였죠.
 
말씀하신 것처럼 학교에서는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과 사회 분위기상 책임 소재에 대한 강박도 큽니다. 교육 공간이 관리 공간으로 인식되는 부분에서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이 가장 어려웠어요. 어떤 프로젝트는 부분 철거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지만, 총괄하는 건축가로서 일하는 3년 동안 관계자분들을 교육하러 다녔어요. 교육청, 교장, 일반 교사 연수 등에 가서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했어요. 이제는 공급자 위주가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관리나 안전 문제가 정말로 그래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기 때문에 관성으로 받아들이는 건지, 정말 안전하지 않은 건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죠.
물론 안전은 중요해요. 요즘 학부모 민원도 많으니까 충분히 이해하죠. 하지만 안전은 사회 전체적으로 안전해져야 해요. 다른 사회 안전도보다 학교 공간의 안전도가 높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요.
 
교육과 디자인을 병행하면서 정말 힘들었지만, 첫해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어요. 다음 해부터는 새로운 건축가분들이 오셨어요. 처음엔 20개였는데 그다음 해에 40여 프로젝트가, 그다음 해는 90여 개가 됐어요. 교장 선생님, 담당 교육청 직원, 건축가를 모아놓고 큰 강당에서 1차 연도의 시행착오도 이야기하고 어떻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할지 계속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요. 그게 발전해서 그린스마트 미래학교(Green Smart Future School)라는 개념이 생겼어요. 그 용어가 생기기 전에 시범 사업을 제가 맡았고, 그 결과물이 이후 사례로 활용되었어요. 교육 공간을 새롭게 만드는 데 나름 앞서 나가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앞서 사무 공간과 교육 공간을 비슷하다고 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사무 공간에서 개선하려는 부분과 교육 공간에서 바꾸고자 하는 부분이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유사점은 조직이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모여서 지적 활동을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간의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조직 내 개인이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어요. 그 개인들을 들여다보고 드러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아요.
인터뷰나 설문조사를 통해 사용자 의견을 수집했어요. 아이들, 선생님, 그리고 경우에 따라 학부모 설문조사까지 진행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림을 그려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했어요.
 
첫해 폭발적이었다고 하셨는데, ’꿈담 프로젝트를 통해 크게 변화한 부분도 있었나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교육청 공무원들과 함께 힘들게 20개 학교를 다 돌았어요. 그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교실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것이었어요. 선생님들의 표정도 좋아지셨죠.
처음에는 "우리가 수업하려면 이런 공간이 필요해요"라고 말씀을 못 하셨지만, 공간이 바뀌고 나니 “여기서 이런 수업을 하면 좋겠네"라는 아이디어가 생긴다는 거예요. 학부모님들도 와서 너무 좋아하시고, 학교 참여율도 굉장히 높아졌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교육의 3주체라고 하는 학생, 학부모, 교육자(선생님)들이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함께 대화하는 계기가 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교육 공간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게 정말 중요하죠.
 
소장님의 대표 프로젝트인 원효초등학교도 인상적이에요.
세 번째 해에 한 프로젝트였어요. 꿈담 프로젝트로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인데, 개방적이고 아이디어를 잘 받아들이시는 분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어요. 교육청 공무원분들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원효초 이야기를 해요. 공간의 패러다임(paradigm) 자체를 바꾼 너무 좋은 사례라고요.
 
무엇을 바꾸고자 하셨나요?
그 공간의 특수성이 있었어요. 본동이 있고 1학년 교실이 별동에 지하 1층과 2층에 나뉘어 있었어요. 1층은 영어 회화 교실 같은 공동 공간으로 쓰였고, 지하 2층에는 돌봄 교실이 있었어요. 3개의 교실이 있었고요. 복도가 통과 동선이 아니어서 1학년들만 쓰는 공간이었죠.
선생님이 "저희도 다락방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라고 하셔서 마지막 교실의 복도 앞을 그렇게 만들어도 좋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이 공간을 다른 반 아이들도 공유하면 좋겠다 싶었죠. 또 교실 안에 책걸상을 놓고도 여유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두 아이디어를 합쳐서 교실을 뒤로 밀어 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전체를 하나의 러닝 클러스터(Learning Cluster)라는 개념으로 제안한 거죠.
아이들이 개별적으로 놀던 걸 모여서 같이 놀게 하고, 다락방을 고려했던 곳을 넓혀서 2층짜리 작은 도서관 같은 걸 만들어줄 수 있겠더라고요. 개별 교실을 나열해서 통합 러닝 존(Learning Zone)으로 변환하고, 전체 러닝 존의 입구에만 문을 달아서 하나의 클러스터로 만들자고 했어요. 공유할 수 있게요. 이렇게 되면 모든 문을 열 수 있어요.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하셨어요. 이 공간에서는 만약 한 선생님이 구연동화를 하시면 그 반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도 함께할 수 있어요. 또 다른 선생님이 미술을 잘 하시면 모여서 미술 수업을 하고 다른 선생님은 보조역할을 할 수 있어요. 일종의 공유 경제인 거죠. 지붕을 만들어 공간적인 영역을 만들어주고, 바닥에는 패턴을 넣어서 바닥 놀이도 할 수 있게 해주고, 책상도 디자인했어요.
2층은 상황이 달라서 똑같은 설계를 적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교실이 2개 있는데, 복도와 가운데 공간을 같이 이용하게 해서 마무리했죠. 두 교실의 사이를 공유하게 만들어서 코너가 'ㄱ'자로 열리게 했어요. 여기에도 계단을 올라가서 벽을 막아 다락같이 만들어주고, 슬라이딩(sliding)으로 열 수 있게 벽을 만들었어요. 문을 닫으면 칠판이 되고, 접이식(folding)으로 열리고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해요. 선생님과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공간이 바뀐 후 반응은 어땠나요?
준공 후 막 방문했을 때 마침 중간 놀이 시간이었어요. 경계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막 뛰어다니면서 노는데, 그 시끄러움이 말도 못 했어요. 너무 시끄러워서 걱정했죠.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한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를 하고 계셨어요. 준공 후 3개월 후에 방문했더니 그 선생님이 저를 붙잡고 정말 고맙다고 하셨어요. 교사 생활 30여 년 동안 이렇게 아이들이 행복해하고 발표도 잘하는 경우가 없었다고요. 기존 학교 구조도 이렇게 바꿀 수 있구나 하면서 좋은 사례가 되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오피스나 꿈담 프로젝트는 오래 머무는 공간이에요. 이런 일상의 공간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오랜 시간 머무는 공간이니까 다양함이 있어야 하고, 공간의 균형과 기능적인 공간의 조화가 필요하죠. 그리고 유연한 공간 - 공간에 여지를 주고, 중간 영역을 만들어야 해요. 앞으로는 손가락장갑 같은 공간이 아니라 손모아장갑 같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곤 해요. 현대 사회가 빠르게 변하니까 프로그램에 너무 딱 맞는 공간을 만드는 게 맞나 싶어요. 그러면 공간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 같아요.
구성원들이 보내는 시간을 생각하면서도 조직이 사용하는 공간의 성격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중심 공간이 중요하고, 가능하면 입체적이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중심 공간을 만들고자 해요. 구성원들이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도시의 광장 같은 공간이 필요해요.
마곡하늬중학교의 공간도 그런 역할을 해요. 아이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사생대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죠. 하늬중학교 준공식 때 큰 계단 공간에 손님들을 앉히고, 복도로 둘러싸인 실내광장에서 행사를 했어요. 마지막에 아이들이 소망을 적은 종이학을 위에서 날리는 장면이 감동적이었어요. 종이학들이 날아오는 걸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입체적인 공간이 구현된 게 정말 좋았어요.
이 공간은 제가 좋아하는 헤르만 헤스버거(Herman Hertzberger)의 아폴로 스쿨(Apollo School)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그곳은 로비 같기도 하고, 행사가 열리기도 하며, 아이들이 여러 층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원효초나 동답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같은 공간 안에서도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눈을 맞출 수 있는 게 중요해요.
입체적 사고(3D Thinking)란 여러 각도에서 대상을 보는 거죠. 몸으로 체화된 게 사고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런 공간에서 경험을 쌓길 바라요. 요즘 아파트처럼 평면적인 공간에서는 입체적 사고를 하기 어려우니, 이런 공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죠.
 
경계 없는 공간, 중간 영역은 오피스,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에 필요한 공간이 아닐까 싶네요.
지금 사회는 제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사회보다 많이 나뉘어 있어요. 질시, 반목, 갈등도 많아요. 도시 공간도 그래요. 어렸을 때는 한 동네에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자랐어요.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던 거죠. 지금은 '시설 사회'(Institutional Society)라고 하잖아요. 다 경계를 지어서 가둬놓기 때문에 이해도가 없고, 그래서 무서워해요.
경계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경계가 경직된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거로 생각해요. 그런 것들은 몸으로 경험했을 때 인식이 생긴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런 경험을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하게 하고 싶어요.
 
원효초의 경우 복도 바깥에 수납공간을 만들어서 학급 도서를 공유하게 하는 것도 그런 경험의 일환이에요. 해마다 예산이 나오면, 똑같은 책 3권을 살 예산으로 다른 책 3권을 사서 공유해요. 그러면 아이들이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공유할수록 적은 돈으로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유의 장점을 알게 해주면, 아이들이 커서도 거부감 없이 좋은 공유 아이디어를 많이 낼 거예요.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게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건축가는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제안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진행 임진영 정리 윤솔희, 송주하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④ 로 이어집니다.
 
원효초등학교 꿈담 프로젝트, 김정임 사진_신경섭
원효초등학교 꿈담 프로젝트, 김정임 사진_신경섭
원효초등학교 꿈담 프로젝트, 김정임 사진_신경섭
원효초등학교 꿈담 프로젝트, 김정임 사진_신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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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기록화작업 | 3D Scan VR 하우스오브레퓨즈의 시간, 테크캡슐 × 서로아키텍츠 영상 공개일 2024년 11월 1일(금) 웹 VR 바로가기 하우스오브레퓨즈의 공간은 공사가 중단된 이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의 세월을 함께 공생해 온 존재들을 그대로 존중한다. 건축가 김정임(서로아키텍츠)은 중단된 시점의 구조체, 그 구조체에 뿌리를 내린 생명체, 그리고 다시 발견되기까지의 풍화 과정을 섬세하게 발굴하고, 이 작은 생태계에 매료되었던 의뢰인의 흥분을 차분하게 도닥여준다. 테크캡슐는 하우스오브레퓨즈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성에 주목하여 공간에 덧입혀져 왔던 사연의 단서를 태동하는 현재 진행형의 생명력으로 재해석한다.    글 테크캡슐  총괄: 황지은 연출: 정동구 기획: 이다영 촬영: 이택수, 이정민  VR 웹퍼블리싱: 신종혁, 이용현 테크캡슐 테크캡슐은 공간 정보 기반 미디어 콘텐츠 창작 그룹이다.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이 협업하여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록, 연구, 콘텐츠를 하나의 캡슐에 담아 제공한다. 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간 자산을 디지털 기법으로 축적하고 유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단순한 공간 기록과 재현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간적 과제를 발굴하고 장소의 맥락을 깊이 연구하여 입체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새로운 공간 수요와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술의 혁신을 창출하는 순환 가치를 실천한다. 오픈하우스서울과는 지리적, 시간적, 감각적 영역을 확장하고 재구성하여 우리 도시 환경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탐험하고자 한다.  테크캡슐 techcapsule.kr 테크캡슐 유튜브 채널 youtube.com 하우스오브레퓨즈 - 더하기와 빼기의 건축 오래된 것을 새로운 요구에 맞게 고쳐달라는 일은 언제나 반가운 제안이다.  대상물은 제주 중산간의 2차선 도로변에 20여년 간 버려져 있던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스파와 음식점을 하려고 짓다 만 것이라고 한다. 지붕과 프레임만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은 그 너머의 숲과 중첩되어 깊은 공간감을 만들고, 세월의 풍화를 겪은 흔적들과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지우며 파고든 식물들이 얽혀 그 자체로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랜 봉인이 해제된 비밀의 공간을 탐색하며 매료되는 한 편, 어떻게 이 멋짐을 훼손하지 않으며 완성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건축주는 딱 맞는 느낌의 ’하우스오브레퓨즈 House of Refuge’라는 프로젝트 이름과 함께 지하에 전시 및 공연, 지상에는 간단한 식음을 위한 공간이라는 열려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기간과 공사비가 타이트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구조물이 갖고 있는 아우라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시작은 지하에 있던 나무 한그루였다. 원래 장비반입을 위해 슬래브를 뚫어놓은 곳인데 나무씨가 날아들어 자라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한 구석에서 마주한, 연하게 스며든 빛을 받고 있는 여린 나무에서는 태고적 야생같은 신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 공간을 잘 살려 주동선의 흐름에 엮을 수 있도록 계획을 시작하였다. 새롭게 배치한 주차장에서부터의 진입동선과 전시를 관람한 진출 동선이 연속적인 시퀀스를 이루며, 사용자들이 이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벤트와 풍경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슬래브를 뚫고 계단을 삽입하여 입체적 연결 공간들을 만들었다. 주진입홀은 도로에서 인지가 잘 되도록 단순한 형태의 반투명 박공 매스로 계획하고 기존 구조물의 주출입구 캐노피를 철거한 부분에는 2층 슬래브의 1/4원형 라인을 살린 뾰족한 타원 모양(pointed elipse shape)의 철골프레임으로 만든 정원구조물을 삽입하였다. 철골의 단단한 선과 나무의 부드러운 선의 대비를 통해 독특한 풍경을 연출, 1층과 2층 테라스를 묶어주는 중심 요소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지붕과 프레임이 먼저 읽히는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적정 면적의 기능공간을 구조프레임 뒤로 삽입하고 그 외의 공간은 지붕이 있는 외부공간으로 처리하였다. 그 밖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기존 공간의 볼륨에 맞게 기능을 재배치하며 계획해 나갔다. 높은 층고를 갖고 있는 기계전기실을 전시공간으로 만들고 기계전기실을 낮은 쪽에 잘 조정해 넣는 일 같은. 처음에 마음먹은 최소한의 개입은 이렇게 더하기와 빼기의 균형을 맞춰가며 완성되었다. 이 곳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도피처(house of refuge)로서 총체적 경험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기 위해선 고정물인 건축은 배경이 되고 변화물인 주변자연과 콘텐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관전시로 기획된 에릭오 감독의 레트로스펙티브 인 제주Retrospective in Jeju와 연수당 신준호 대표가 공들인 정원들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건축은 거들뿐’이란 말이 실감난다. 감사한 일이다. 글 (주)서로아키텍츠 사진 진효숙 (주)서로아키텍츠 seoroarchitects.com
VISIT YOURSELF 넘은들공원 책쉼터, 김정임 넘은들공원은 양천구 신정동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넘은들은 넓은 들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게 빼곡하게 들어찬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작은 동산같이 오뚝하게 놓여있다. 농구코트, 몇 가지 운동기구, 파고라 등 최소의 시설만이 있는 공원은 어둡고 노후화되어 지역주민들 이용이 저조하였다고 한다. 양천구에서는 '건강한 동네 숲'이라는 테마로 수목의 식생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편안한 산책로 조성, 운동공간 개선 사업 등과 함께 화장실과 쉼터가 결합한 건축물을 짓기로 하고 우리에게 설계의뢰를 하였다.  처음 대지를 방문했을 때 방치되어 오히려 야생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넓지 않은 공원이기에 최대한 지금의 자연 숲 같은 느낌을 살리고 건축물은 진입부 계단 옆 경사지에 최소화하여 짓기로 하였다. 몇 개의 대안을 검토한 후 농구코트 레벨에 화장실을 두고 기존 계단을 올라간 레벨에 쉼터와 관리실을 배치하였다. 볼륨이 작아 보이도록 두 개의 기능을 엇갈려 배치하고 박공지붕을 씌워 숲속의 오두막집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사방에 창을 두어 낮에는 책쉼터 내부로 공원의 풍경이 들어오게 하고 저녁에는 은은한 빛이 공원을 밝혀주도록 계획하여 따뜻하게 주위를 밝히는 커다란 등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넘은들공원 책쉼터는 전체면적이 40평, 책쉼터 면적은 약 70㎡(21평)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건축물이지만 개관 후 2,000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지역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참여와 사랑을 끌어내고 있다. 설계과정에서 서울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와 박새가 서식하고 있다는 이야길 듣고 건축물을 주변부에 앉히기로 하였는데, 부디 그들이 그 맘을 알아주어 계속 살고 있길 바란다.  글 김정임 사진 진효숙 서로아키텍츠 seoroarchitects.com/ 넘은들공원 책쉼터 주소 서울 양천구 남부순환로 634 개관 화-일 10:00 ~ 19:00 휴관 월요일, 공휴일 웹사이트 cafe.naver.com/ycbook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