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④

정치권의 프러포즈를 계속 거절하셨지만,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셨어요.

그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면 남에게 통제되고 싶지 않아요. 그때가 막 50대로 넘어갈 때예요. 농담처럼 ‘Turn-50’를 맞으면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세웠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성 전문가’의 상황과 관련되기도 해요. 여성 전문가로서 40대 중반이 넘고 나면 다들 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와요.

첫째는 오퍼레이션 방식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어요. 뭐냐 하면, 이른바 큰 프로젝트들을 빅 피쉬(Big fish)들이 장악하면서 여성 전문가들을 거북해하는 성향이 있어요. 자기들이 쓰고 싶을 때만 여성 전문가들을 쓰려는 성향이랄까요. 좀 만만하게 쓰고 싶은 심리겠죠? 현실이에요. 그런 현상을 넘어선다는 게 무척 어려워요. 빅 피쉬로 일하려면 사업 오퍼레이션이 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도시건축계에서는.

그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 주문자에게 엮이는 게 싫으니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하는 길로 가야 하나. 투자를 좀 해서 마련해 놓으면 밥벌이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죠. 세 번 째는 공공 영역 활동 쪽으로 더 나갈까? 공공 영역의 활동 제안은 나름 끊임없이 받아 왔으니까요. 이 세 가지 시나리오를 놓고 몇 년 동안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등장한 거예요.

참여정부에는 이래저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 촛불혁명 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렇듯이요.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돈 쓰면서는 못하겠다는 거였어요. 다른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사람들과 노는 것도 잘하고, 정책도 잘 알고, 정치 프로세스도 잘 알고 다 좋은데, 돈으로 얽히는 건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하는 방식이 너무 싫었어요. 그때 마침 공영선거에 관한 법이 생겼고 선거 자금이나 정치 자금에 대해서도 좀 더 투명해졌고, 제안도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거죠.

 

무엇보다 2007년 건축기본법을 만든 것은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자문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건축기본법’과 ‘아우리(건축도시공간연구소, auri)’를 만들었어요. 이건 인정해줘야 해요. 건축계 역사상 이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그때 사협회에서 상을 준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런 업적은 좀 널리 알려주세요. (웃음)

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에게 위원장 역할이 올 거라 생각을 못 했어요. 그때가 정치권에 들어가자마자 지역구 용산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말하자면 야인으로 있을 때였죠. 사람들은 제가 그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 자리에 앉았을 거라 여기기도 하는데,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돼요. 자리가 저를 찾아와서 맞으면 하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 청와대에 있는 어떤 분이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그 이유도 들어보니, 당시 국토부에서 별로 마땅찮은 사람들을 위원장으로 자꾸 추천했었는데, 보다 못해 어느 날 “김진애 어때요?”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갑자기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서, ‘이 사람이 하면 되겠다’ 했다더라고요. (웃음) 제가 국토부에서 악명이 높은 편이죠. 성격도 강하고 발언도 세고, 이미 정치권에 들어가 있고 해서요. 위원장 지명됐을 때 국장이 찾아와서 설명하는데, 자주 안 나오셔도 된다고 해서 “아니 매일 나갈 거 아니면 뭣 하러 위원장을 해요? 다른 할일 없어요.” 했어요. (웃음)

그렇게 위원장을 2년 반 했어요.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전문가들이 많은 안들을 짜놨어요. 다들 연구원과 기본법을 만드는 게 소원이더라고요. 과제 리스트를 죽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거라서 자신이 없다, 열심히는 해보겠다고 했죠. 결국은 두 과제를 다 성사시켰어요. 첫해는 아우리(ARUI)를 만들었고, 두 번째 해에는 건축기본법 만들었으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제 노력도 있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서거 10주기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그렇네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전문가로서도 믿어줬지만,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믿어줬어요. 개인적으로 가깝거나 그러진 않았고 그저 몇 번 위원회를 통해 보고했을 뿐인데, 노무현 대통령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사 못 시켰을 거예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만들 때는 국회 예산을 따야 하는 거라 총리실에서 난리였지요. 당시 예산 책정 때문에 언론에서도 비난받고,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부탁하러 찾아가면 “연구소 만들면 당신이 소장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지원할까 봐 숙덕거리더라고요. “내가 만든 기관에 장으로 가겠소?”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질렸죠. 초대 연구소장으로 얼마 전 돌아가신 온영태 교수가 역할을 하였는데, 정말 다행이었어요. 저와 철학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국책연구소에 관한 법 개정이 힘들어서, 국토연구원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했는데 나름 역할과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운영은 별도로 하고 있지만, 독립기관이 되면 좋겠는데, 언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도시’가 들어간다는 거로 또 건축계에서 반대하고 난리였어요.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사협회장, 건축가협회장, 청년건축가협회장 등등 평소에는 만나지도 않는 협회장들과 여러 번 모여서 설득하고 엮는 일을 했어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죠. ‘도시’가 들어가는 걸 굉장히 반대했지만, 결국 ‘도시공간’으로 들어갔어요. 건축의 외연을 얼마나 키우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위원장직을 맡은 동안에는 열심히 설득했지요.

 

건축기본법은 건축 문화의 기틀을 만드는 일이었는데요. 그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건축기본법 만드는 과정은 거의 기적이었어요. 그건 정말 노무현 대통령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국토부, 산자부, 문화부, 기재부 등등 관련 부처들이 다 반대했어요. 국토부는 이 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서 국토부의 위상이 낮아진다고 하고, 문화부는 건축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산자부는 자신들의 디자인 산업 영역이 줄어든다고 반발하고, 기재부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는 부분을 지적하며 소극적이고, 하나같이 반대했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하다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할 수 없다. 대통령 보고를 잡아라’ 했어요.대통령 보고를 잡으려면 적어도 한 달 반 전부터 스케줄을 확정해놓아야 해요. 날짜를 잡아 놓고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잡힌 거예요. 대통령이 평양에 가시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보고회가 취소된 거예요. ‘아 이제 건축기본법은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서 7월경에 일본 출장을 가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전화해서 남북정상회담이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고 하더라고요. 한 열흘밖에 안 남아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준비해서 보고하게 된 거예요. 

그 보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산자부, 문화부, 국토부 장관 등을 모두 불러서 딱 짚어서 얘기했어요.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국토부가 뛰어야 국회에서 띄울 수 있어요. 강길부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는데, 상임위에서 심사하는 법안 소위가 있어요. 검토 과정에서 국토부 차관이 나와서 지원해줘야 될까 말까 하거든요. 그 차관이 지금 세종시 시장인 이춘희 차관이었어요. 후에 이춘희 차관이 만나면 막 놀리더군요. 그때 국회에서 여러 상임위원회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랬는데, 김진애 박사가 막 뛰라고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서 헉헉대며 다녔다고요. (웃음) 뭐가 하나 이루어지려면 이렇게 여러 가지가 맞아야 하는 거예요.

위원장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건축물에 대한 건축가 지원 자체보다는 발주법을 바꿔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 기재부하고도 꽤 논쟁이 붙었는데, 그래서인지 국토부 사람들이 저를 썩 괜찮아했어요. 대개 국토부는 기재부에 항상 당하는 편이거든요. 국토부에서 처음으로 “김진애가 악명이 높았는데, 일하는 거 보니 우리를 괴롭히는 악녀만은 아니었어”라고 했다고 해요. (웃음)

그때 또 다른 이슈는 건축기본법 상에서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만들어놨는데 국토부가 국토부 산하로 하자는 거예요. 국토부 산하가 되면 한계가 뚜렷하다고 하니, 그럼 총리실 산하로 하자고 하기도 했고요. 대통령 직속으로 해 놔야 여러 장관이 들어와서 위원회 효과가 높아질 수 있어요.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처가 행자부, 문화부, 산자부, 기재부이고, 외교부는 외교공관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중요했고 농수산부도 필요했죠. 그래서 몇 개 부처 장관을 당연직 위원으로 포함했죠.

사실 건축기본법이 걸치지 않은 곳은 없어요. 2007년 말에 이 법이 통과됐을 때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난 건축계를 위해서 앞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 그랬었죠. (웃음) 역사에 남을 이 두 가지 일을 해놨으니 이제 알아서 하라는 생각이었죠. 물론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사안으로 도움 요청이 오긴 하지만요.

 

건축기본법 입법으로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됐잖아요? 건축정책위원회는 이명박 정부에서 처음 만들어졌어요. 그때는 이명박 대통령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서 외곽에서 나름 힘을 썼는데, 다행히 대통령이 보고를 받자마자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였다”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정책위원회가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이 많아요.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4대강 사업 등 정권 차원의 사업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봤었는지 존재감이 미미했고요. 박근혜 정권 때 임명된 김석철 위원장이 대통령 첫 보고 자리에서 학교건축 혁신에 대해 보고를 했는데 전혀 씨도 안 먹혔었다고 해요. 그 이후엔 대통령 보고조차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담당 부서인 국토부에서도 탐탁잖아 했었다고요. 정권이 어떤 성향인지 파악해서 원하는 부분도 어느 정도 맞춰주고 필요한 혁신도 병행 추진하는 전략이 필요했을 텐데, 그게 쉬운 과제는 아니죠.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이전의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원해서 아예 대통령실에 만든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물론 아주 단순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관심이었죠. ‘아니, 우린 돈도 꽤 쓰는데, 건축은 왜 이런가?’, ‘좋은 건축물도 꽤 많아진 것 같은데 도시는 또 왜 이런가?’ 매우 평범한 시민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만든 거예요. 근데 아주 건강한 문제의식이죠. 노무현 대통령이 참 흥미로운 성격인 게, 특정한 건축물의 설계를 잘하고 말고는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제도 혁신에는 눈이 막 반짝반짝했어요. 그런 태도가 정책을 대하는 바른 태도이죠.

대통령마다 성격이 다 달라요. 이왕 대통령위원회를 했으면 그 성격에 맞는 걸 하면서, 그중에 건축계가 하고 싶은 것,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끼워서 보고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되어버리기 일쑤지요. 박근혜 대통령 때는 첫 보고 이후 한 번도 보고를 못 했다고 해요. 위원회를 국토부로 내려보내기까지 했고요. 자꾸 없애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건축기본법에 명시해놨기 때문에 없애지는 못해요. 그래서 입법이 중요한 거예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혹시 위원회를 없애버릴지도 모른다는 설이 돌았는데, 승효상 위원장이 있으니 큰 걱정 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건축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좀 곤란해요. 외연을 넓히라고 만든 것이고, 국민의 입장에서 건축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안심을 시켜주는 정책이 되어야지, 훌륭한 건축물을 짓게 하려고 건축정책위원회가 있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싶어요.

 

건축의 도시적인 관점을 확장한 건 긍정적인 부분인데, 최근 많은 도시 계획 프로젝트에 건축가가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서울시의 도시 정책에도 건축가가 많이 투입되고 공공건축가 제도도 자리 잡고 있고요.

공공건축가 제도가 생긴 것이 바로 건축기본법에 써놓은 “민간전문가 참여”, 이 조항 하나 덕분이에요. 법의 문장 하나가 그렇게 위력이 있는 거예요. 그 조항을 근거로 공공건축가 제도를 만든 거고, 가장 잘 활용한 데가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죠.

공공건축가는 일단은 가능성이 많은 제도예요. 서울시가 잘 활용했는데 이 제도는 좋은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스타 마케팅이에요.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건축의 강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해요. 전 세계적으로 스타 건축가를 마케팅하는 이유는 결국 분양이 잘 되게, 사업 잘되게 하기 위해서잖아요. 이왕이면 기업 이미지도 높이고 잘 팔기 위한 거죠.

서울시나 지자체들도 어떤 점에서는 마찬가지예요. 시장의 이미지를 높이고, 시정에 ‘이건 어떤 건축가가 설계했다’라고 홍보하는 의도가 작동되지요. 실제로 젊은 건축가들, 공공건축가 제도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더 생기니까 좋은 점도 있기는 하지만, 발주 방식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도 하죠. ‘공공건축가, 공공조경가라는 이름 붙여 놓고 설계비 제대로 안 주고 일하는 것 아니냐? 설계비 제대로 주고 일하나?’ 하는 의문도 생기지요. 플러스마이너스 효과가 다 있는 거예요.

 

결국, 중요한 건 민간 전문가인 건축가들이 정책 부분의 윗단계, 초기 기획 단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디자인 마케팅하는 데에만 쓰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쉽지 않은 거죠. 이 정도라도 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중 몇 사람은 정책 의사 결정 하는 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면 되겠죠. 건축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려있어요. 안 되면 ‘만년 을’로만 멈추게 되죠. 원래 건축가의 근본적인 속성은 ‘을’이예요. 주문자의 의견을 잘 해석해서 기가 막히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에요. 그러나 그런 역할에만 만족하면 영원히 ‘도구적인 을’로만 머물 수도 있어요. 정책 결정, 기획 단계, 의사 결정 단계에서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되어야 하지요.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요? 가끔 걱정되기도 하지만요.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쓰셨던 책에서 인간과 사회참여, 행위 등에 대해 발언하셨어요. 정치를 통해서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문가로서 위원회 참여 등을 통해 공공 활동을 했을 때나, 현실 정치권에 들어가서 활동했을 때나, 국회의원 할 때나 지금이나 저는 달라진 게 별로 없어요. 항상 철학이 같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다만 국회의원일 때는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위원장일 때는 위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있고, 또 야인일 때는 야인인 대로 할 수 있는 게 다를 뿐이죠. 자리에 따라 좀 더 영향력이 있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차이일 뿐이죠.

국회의원이 되면 못 하게 되는 일도 많다는 단점이 있어요. 활동 영역이 작아져요. 그 말인즉슨 갑자기 299명 중의 한 명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혐오 집단에 포함돼요. “나름 괜찮은 집단에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나를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국회의원이 되니 갑자기 혐오 집단에 포함됐다”라고 이야기했더니 국회의원들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김진애는 재미, 능력, 쓸모도 있으나 너무 솔직해서 좀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라고요. (웃음)

 

박사님이 빛났던 순간은 4대강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현장에 계실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박사님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을 수도 있겠지만, 전문성을 가진 국회의원의 힘을 보여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문재인 대통령이 야인일 때 어느 자리에서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국회의원이라며 독려하더라고요. 국회의원 되니까 가장 좋은 것은 9명이나 되는 직원들 월급을 나라에서 주는 것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직원 월급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만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커졌어요.

국회의원직이라는 게 그 정도의 파워가 있는지 몰랐어요. 다른 게 아니라, 국회의원은 어떤 현장이든 갈 수 있어요. 게다가 안보에 관련된 게 아니라면 어떤 정보든지 접근할 수 있어요. 제가 꽤 현장성이 강한 사람이지만 그 많은 4대강 사업 현장에 갔던 이유 중 하나는 밝히기 위해서 뿐만도 아니고 현장에 가야 문제가 보인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제가 가야 문이 열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어요. 국회의원이 가야 문이 열리고, 자료를 얻어낼 수가 있어요. 이게 국회의원직의 핵심이죠. 그래서 그렇게 현장에 간 거예요.

솔직히 속으로는 힘이 들어 죽을 뻔했어요. 전국을 도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보여주기식으로 하는 행사들도 많잖아요? 어디 갈 때마다 정당 고위직들이 제가 가서 설명해주길 원하는 수요도 많아서 아주 피곤했지요. 장담하건대, 너무 많이 아는 건 짐이에요. 알면 눈에 보이니까.

국회의원 첫 1년을 지내자 어떤 기자가 저에 관해 기사를 썼더라고요. ‘국회 프레스 룸에 제가 몇십 번 왔다, 그 때마다 설명 패널을 들고 왔다’ 하면서 아예 횟수까지 조목조목 써놨더라고요. 국회의원 특권 중 하나가 프레스룸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나 기자 못 만나잖아요. 국회 기자실에 가서 브리핑하면 기사가 될 수 있고 기사화되면 그나마 국민에게 알릴 수 있지요. 물론 언론사에 따라 기사화 방향이 다르지만요.

국회의원 시절에 한동안 좌절에도 빠졌었어요. 힘도 들거니와 4대강 사업 반대해봤자 뭐해요. 결과는 똑같은데. 여당은 그저 강행만 하고, 야당은 반대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국회 과정에서 타협하는 행태가 좌절되더라고요. 제가 좌절에 빠지자 한 보좌관이 저에게 그랬어요. ‘반대를 통해서 잘못되는 것을 멈출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입니다’라고요. 감동하였고 또 힘을 낼 수 있었죠.

저는 18대 국회의원 비례대표인데, 바로 당선되지 못하고 1년 반쯤 지나서 승계해서 들어갔어요. 만약 2008년 초기부터 시작했더라면 4대강 사업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전문적이기도 하거니와 국민에게 설명을 잘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죠. 그런데 제가 들어갔을 즈음에는 민주당에서 이제 게임 끝났다는 분위기였어요. 할 수 없다, 그냥 넘어가 주자는 분위기였을 때 제가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났던 거예요. 초선에 비례밖에 안 되는 사람이, 간사도 안 시켜 준다고 해서 다른 의원을 간사 만들고, 자료도 직접 만들어서 공급하곤 했지요. 그래도 문제를 지적하고 이슈를 살려내는 게 국회의원의 역할인 거죠.

 

의정 활동에서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것인가요?

건축도시연구소와 건축기본법 만든 것 외에 제가 공적 활동으로 자랑하는 게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국회의원 김진애 하면 4대강 사업 진실 파헤치기를 떠올리지만,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했던 거고요. 사실 국회의원 하면서 대부분은 힘들기만 하고 보람이 없었는데, 임기 마지막에 드디어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바로 ‘뉴타운 출구법’ 만들 때예요. 과장하자면,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뉴타운 출구법은 절대로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필요한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뉴타운 관련해서는 한쪽에서는 도시환경 정비법, 다른 한쪽에는 뉴타운 촉진법이라는 게 있었어요. 뉴타운이 문제라는 건 여야건 정부건 국민 모두 다 깨닫게 됐었잖아요? 그래서 그때 국토부와 여당에서 무슨 안을 냈냐 하면, 두 법을 합쳐서 새로운 법을 만드는 걸 제안했어요. 문제는 민주당 의원들 포함해서 대부분 그 제안을 좋게 봤던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 두 법을 합쳐 다시 새로운 법을 만들면 발효시키는데 2년 이상이 걸려요. 당장 뉴타운 문제로 고생하는 주민들에게는 문제를 연기하는 외에는 별 효과가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실상이 이러저러하니 새로운 법은 안 된다고 하면서, 뉴타운촉진법은 궁극적으로는 폐기하거나 아니면 필요할 때만 제한적으로 쓰도록 하고, 도시환경 정비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바꿔서 ‘뉴타운 출구’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아주 중요한 정책 사안이었기 때문에 당내에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어요. 그런데 저는 위원장을 맡을 군번은 아니었고, 당에서 어느 의원을 위원장으로 지명했는데, 그 의원이 불행히도 개발 지향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어요. 고민하다가 원내대표에게 제안해서 덕망이 높은 이미경 의원으로 바꾸게 만들었지요. (웃음) 그런 상황에서는 내부 정치도 필요한 거예요.

특위 회의를 하는데, 위원 대부분이 ‘김진애 위원의 우려와 제안을 잘 알겠는데, 국토부가 저렇게 새 법을 만들겠다는데 과연 당신이 제안하는 방식으로 통하겠느냐, 만약 안 되면 책임지겠냐’ 이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책임지겠다고 거듭거듭 설명했죠. 논의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하니까. 그러자 이미경 위원장이 “김진애 그만 좀 해!”하면서 화를 낼 정도로 제가 집요했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건축기본법이야 통과 못 하면 또 추진하면 되지만, 뉴타운 출구 법안은 수많은 사람의 생활이 걸려있는 법안이었으니까요. 국회에서 씨름하는 동안에도 국회 밖에서는 주민단체, 조합, 시민단체 등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마침 국토위 법안 소위의 위원장이 민주당 소속이었어요. 하도 난상토론이 되니까 법안 소위 위원장이 여당 의원 한 사람과 저, 둘을 지정해서 최종 타결해오라고 했어요. 둘이 온종일 앉아서 관련 제안 법 50여 개를 검토하면서, 이를테면 딜을 한 거예요. 물론 뉴타운 출구법이 제가 원하는 대로 다 되지는 못했지만, 출구법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이었지요. 그때가 저의 국회의원 시간 중에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속을 끓였던 것 중 하나가 뉴타운 출구 방안이 필요하다는 서울시도 국토부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때 박원순 시장을 찾아가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뉴타운 출구법이 제정되고 난 후에 박원순 시장이 받아서 제대로 시행을 해서 다행이지요. 박원순 시장이 뉴타운 출구의 모든 공적을 가져가셨지만, 국회 안에서 제가 했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자부해요. 본 회의에서 통과되고 난 후에, 그동안 조마조마해 하셨던 이미경 위원장이 ‘김진애 정말 집요하다.’ 하면서 등을 토닥거려주셨어요. 집요함이 필요할 때는 집요해야 해요.

 

당시 건축, 도시 분야에서 법과 제도에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는 건 든든한 부분이었어요.

당연해요. 누군가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예요. 그 분야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믿음이 가지요.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이슈가 있어서 국회의원들을 찾아가면, 대개 아는 정으로 지원해주는 거지 저간의 정책 상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기는 해요. 제가 저간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반대한 법, 관련 분야의 비판을 받은 것도 있어요.

 

반대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경기본법. 조경가들이 조경기본법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명박 정부가 특히 4대강 사업하면서 조경사업을 많이 벌여서 분야가 굉장히 커졌죠. 그래서인지 조경 분야에서 조경기본법을 건축기본법처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에게 설명도 많이 하고 후원도 해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명확히 말했었지요. ‘미안하다. 그런데 내 철학은 이렇게 분야를 따로따로 기본법 만드는 건 아니다. 건축기본법의 큰 틀 안에 조경 분야가 들어와야 한다. 엮어주는 역할이 조경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제가 평소에 조경 분야를 존중하고 그 본연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한 편인데도, 법안을 반대하자 조경 분야 쪽에서 저를 심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건축 패권주의에 빠졌다고요. 뭐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조경기본법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분야가 다시 더 쪼개지니까요. 그래서 건축정책위원회의 운영에 더 큰 역할을 바라게 되지요. 조경 분야 전문가와 과제가 일부 포함되어 있기는 있지만, 위원회는 더 큰 아우름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건축정책위원회는 절대적으로 산업계를 끌어들여야 해요. 선진화위원회 위원장 할 때 가장 애쓴 게 발주 방식 개선에 관련된 것이었어요. 발주 방식을 바꿔야 진짜 혁신이 일어나거든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더 해야죠. 건축정책위원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다음 인터뷰 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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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④ 정치권의 프러포즈를 계속 거절하셨지만,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셨어요. 그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면 남에게 통제되고 싶지 않아요. 그때가 막 50대로 넘어갈 때예요. 농담처럼 ‘Turn-50’를 맞으면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세웠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성 전문가’의 상황과 관련되기도 해요. 여성 전문가로서 40대 중반이 넘고 나면 다들 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와요. 첫째는 오퍼레이션 방식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어요. 뭐냐 하면, 이른바 큰 프로젝트들을 빅 피쉬(Big fish)들이 장악하면서 여성 전문가들을 거북해하는 성향이 있어요. 자기들이 쓰고 싶을 때만 여성 전문가들을 쓰려는 성향이랄까요. 좀 만만하게 쓰고 싶은 심리겠죠? 현실이에요. 그런 현상을 넘어선다는 게 무척 어려워요. 빅 피쉬로 일하려면 사업 오퍼레이션이 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도시건축계에서는. 그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 주문자에게 엮이는 게 싫으니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하는 길로 가야 하나. 투자를 좀 해서 마련해 놓으면 밥벌이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죠. 세 번 째는 공공 영역 활동 쪽으로 더 나갈까? 공공 영역의 활동 제안은 나름 끊임없이 받아 왔으니까요. 이 세 가지 시나리오를 놓고 몇 년 동안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등장한 거예요. 참여정부에는 이래저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 촛불혁명 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렇듯이요.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돈 쓰면서는 못하겠다는 거였어요. 다른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사람들과 노는 것도 잘하고, 정책도 잘 알고, 정치 프로세스도 잘 알고 다 좋은데, 돈으로 얽히는 건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하는 방식이 너무 싫었어요. 그때 마침 공영선거에 관한 법이 생겼고 선거 자금이나 정치 자금에 대해서도 좀 더 투명해졌고, 제안도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거죠.   무엇보다 2007년 건축기본법을 만든 것은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자문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건축기본법’과 ‘아우리(건축도시공간연구소, auri)’를 만들었어요. 이건 인정해줘야 해요. 건축계 역사상 이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그때 사협회에서 상을 준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런 업적은 좀 널리 알려주세요. (웃음) 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에게 위원장 역할이 올 거라 생각을 못 했어요. 그때가 정치권에 들어가자마자 지역구 용산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말하자면 야인으로 있을 때였죠. 사람들은 제가 그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 자리에 앉았을 거라 여기기도 하는데,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돼요. 자리가 저를 찾아와서 맞으면 하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 청와대에 있는 어떤 분이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그 이유도 들어보니, 당시 국토부에서 별로 마땅찮은 사람들을 위원장으로 자꾸 추천했었는데, 보다 못해 어느 날 “김진애 어때요?”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갑자기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서, ‘이 사람이 하면 되겠다’ 했다더라고요. (웃음) 제가 국토부에서 악명이 높은 편이죠. 성격도 강하고 발언도 세고, 이미 정치권에 들어가 있고 해서요. 위원장 지명됐을 때 국장이 찾아와서 설명하는데, 자주 안 나오셔도 된다고 해서 “아니 매일 나갈 거 아니면 뭣 하러 위원장을 해요? 다른 할일 없어요.” 했어요. (웃음) 그렇게 위원장을 2년 반 했어요.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전문가들이 많은 안들을 짜놨어요. 다들 연구원과 기본법을 만드는 게 소원이더라고요. 과제 리스트를 죽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거라서 자신이 없다, 열심히는 해보겠다고 했죠. 결국은 두 과제를 다 성사시켰어요. 첫해는 아우리(ARUI)를 만들었고, 두 번째 해에는 건축기본법 만들었으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제 노력도 있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서거 10주기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그렇네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전문가로서도 믿어줬지만,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믿어줬어요. 개인적으로 가깝거나 그러진 않았고 그저 몇 번 위원회를 통해 보고했을 뿐인데, 노무현 대통령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사 못 시켰을 거예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만들 때는 국회 예산을 따야 하는 거라 총리실에서 난리였지요. 당시 예산 책정 때문에 언론에서도 비난받고,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부탁하러 찾아가면 “연구소 만들면 당신이 소장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지원할까 봐 숙덕거리더라고요. “내가 만든 기관에 장으로 가겠소?”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질렸죠. 초대 연구소장으로 얼마 전 돌아가신 온영태 교수가 역할을 하였는데, 정말 다행이었어요. 저와 철학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국책연구소에 관한 법 개정이 힘들어서, 국토연구원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했는데 나름 역할과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운영은 별도로 하고 있지만, 독립기관이 되면 좋겠는데, 언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도시’가 들어간다는 거로 또 건축계에서 반대하고 난리였어요.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사협회장, 건축가협회장, 청년건축가협회장 등등 평소에는 만나지도 않는 협회장들과 여러 번 모여서 설득하고 엮는 일을 했어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죠. ‘도시’가 들어가는 걸 굉장히 반대했지만, 결국 ‘도시공간’으로 들어갔어요. 건축의 외연을 얼마나 키우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위원장직을 맡은 동안에는 열심히 설득했지요.   건축기본법은 건축 문화의 기틀을 만드는 일이었는데요. 그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건축기본법 만드는 과정은 거의 기적이었어요. 그건 정말 노무현 대통령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국토부, 산자부, 문화부, 기재부 등등 관련 부처들이 다 반대했어요. 국토부는 이 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서 국토부의 위상이 낮아진다고 하고, 문화부는 건축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산자부는 자신들의 디자인 산업 영역이 줄어든다고 반발하고, 기재부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는 부분을 지적하며 소극적이고, 하나같이 반대했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하다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할 수 없다. 대통령 보고를 잡아라’ 했어요.대통령 보고를 잡으려면 적어도 한 달 반 전부터 스케줄을 확정해놓아야 해요. 날짜를 잡아 놓고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잡힌 거예요. 대통령이 평양에 가시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보고회가 취소된 거예요. ‘아 이제 건축기본법은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서 7월경에 일본 출장을 가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전화해서 남북정상회담이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고 하더라고요. 한 열흘밖에 안 남아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준비해서 보고하게 된 거예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② 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① 지난 2018년 5월, 김진애 박사를 만났다. 그가 2000년에 설계했던 인사동길에서다. 검은 전벽돌 바닥과 골목을 상징했던 많은 장치는 사라졌고 인사동길의 성격도 달라졌지만, 석물과 간판, 골목길 안의 이야기들은 이제 인사동길의 일부가 되었다. 표구방과 필방 대신 호객을 위한 입간판과 플랜카드가 내걸린 인사동길 사이로, 김진애 박사의 힘 있는 목소리가 흘렀다. 서울대 공대의 유일한 여학생, 도시건축가, 기획자, 편집자이자 발행인, <타임>지 선정 차세대 리더 100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까지, 김진애 박사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전문가로서 폭넓은 행보를 보여준다. 도시와 건축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가 보여준 연구와 설계, 그리고 전시와 출판도 의미 있지만, 건축기본법과 건축도시공간연구소를 만든 것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국회의원으로서 4대강 곳곳을 누비며 전문가의 역할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성 전문가의 아카이빙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김진애 박사가 던진 방향은 명확했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강조하기보다 전문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것. “전문가의 역할은 왜 필요한가? 또 그런 역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 앞길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가?” 건축계의 영웅적 서사와 과잉된 자아를 비판하면서도, 인터뷰 곳곳에는 건축이 외연을 넓혀 더 넓은 세계와 만나길 바라는 바람이 묻어 있었다. 건축과 도시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말했던 ‘자라기 시리즈’는 이제 한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가 되고 성장해 시민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건축이지만, 세상을 향해 큰 걸음을 걸어온 그의 세상은 도시를 넘어 사회와 전방위로 만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인사동길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라디오 애청자들, 그의 책을 좋아한 팬들이 악수를 청해왔다. “요즘은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야 성공을 한 거예요. (웃음)” 전문가의 엄격함은 종종 까칠함처럼 보이지만, 그런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김진애 박사의 필살기는 ‘귀여움’이다. 여전히, 지금도 김진애 박사는 인생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Special 한남동 이기남 주택, 김중업 10월 27일 4:00PM
Special 춘원당, 황두진 *춘원당한방박물관(춘원당한의원 신관 5층)은 전시 기간 중 상시 방문 가능합니다.  개관 10주년 특별전 <춘원당(春園堂) 이야기_평양에서 종로까지>  2018년 9월 17일~12월 31일 개관 시간: 월화수금 9:30-18:00, 목토 9:30-12:30, 일요일 법정공휴일 휴관 공식홈페이지 http://www.cwdmuseum.com/ 오래된 것이 새 것을 잉태하다: 춘원당한의원 신관 나와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거대하고 오래된 도시 서울에서 일하는 건축가들이다. 이것은 우리를 여러가지 도전적인 상황에 놓이게 한다. 오래된 것과의 조우는 필연적이다. 오래된 것 중에는 그냥 낡아서 사라지려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있다. 다 버릴 수도 없고 다 취할 수도 없다. 동시에 이 도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라고 요구해온다. 이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경기를 하면서 규칙을 알아나가는, 그런 상황과도 같다. 춘원당한의원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돈의동과 낙원동 일대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창자가 꼬이고 얽혀있는 곳이다. 공사용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절대폭 미만의 도로들, 남녀 혹은 남남이 드나드는 모텔들, 한 그릇에 불과 2-3천원 남짓한 냉면을 파는 싸구려 음식점들, 그리고 한 때 종삼으로 불렸던 쇠락한 윤락가의 자취 이 이 지역을 구성한다. 종로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계가 갑자기 이삼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서울 느와르(Seoul Noir)의 배경이 되고도 남을 지역이다. 이 지역의 역사는 깊다. 동으로는 종묘의 담장이 버티고 서 있고 서로는 파고다 공원이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남쪽을 향해 나 있는 큰 길, 즉 돈화문로의 바로 옆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의 하나인 셈이다. 춘원당한의원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이었다. 1847년 평북 박천에서 시작되어 7대째 내려오고 있는 이 유서 깊은 한의원은 ‘서울 구도심을 지킨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져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새로 지어지는 춘원당한의원 신관이 이 지역의 미래가치를 담았으면 한다는 희망 또한 이야기했다. 주변의 폐쇄적인 건물들과 대비되는, 투명하고 개방적인 건물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정식 명칭이 ‘춘원당한의원박물관’인 신관은 그 이름처럼 복합적인 건물로서 계획되었다. 이것은 한의학의 정기신론(精氣神論)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즉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며 약을 달이는 공간이 사람 몸의 정(精)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공연, 강의 및 전시 등 다양한 행사를 경험할 수 있는 지하의 문화공간은 기(氣)를 키워주고, 춘원당의 역사 및 한방의학의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은 신(神)을 고양하기 위한 공간에 해당한다.  2017년에는 5층 정면 테라스 부분에 전시장이 증축되었다. 이 모든 시설은 환자를 포함한 방문객들에게 공개되며, 건물 내의 각 부분에 혼재되어 분포한다. 각 시설로의 접근은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진다. 건물 정면의 완만한 계단은 2층의 진료 대기실로 연결되며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서 2층까지만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를 따로 설치하였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내방객은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되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와 주계단을 통해 건물의 각 부분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하의 문화공간은 별도의 외부계단을 통해서도 연결되어 건물의 나머지 부분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밖에도 후면도로를 이용하여 배달차량이 드나드는 등 건물은 주변 지역과 다양한 접점을 통해 연결된다. 재료적인 측면에서 춘원당한의원 신관은 역시 한방의 기본정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급적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처음부터 있었다. 건물의 내외부는 현무암과 송판널 노출 콘크리트, 목재, 그리고 유리로 마감되었고 금속은 무광 스테인레스와 아연도금마감으로 처리했다. 즉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천연재료로 약을 짓는 한방의 기본 정신을 건축에 담고자 한 것이다.  설계과정의 초반에는 한의원의 운영체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기존 본관 3층의 탕전실(약 달이는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시설을 신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진료실이 확장될 예정이었다. 그것은 기계적이면서도 동시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구도심이라는 도시의 뱃속에 자리 잡은 창자였다. 춘원당한의원은 이 시설의 발명특허까지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린 스케치에서부터 이 탕전실은 신관의 설계를 풀어가는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마침 북향 대지여서 직사일광으로 인한 문제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이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었던 기존의 탕전기를 시각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수 많은 기술적 협의와 시각적 조율을 필요로 했다. 우리는 이 기계를 통해 어떤 시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건물 안에서 약을 준비하고 달이는 과정이 거리 풍경의 일부로서 드러나는 새로운 개념의 한의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춘원당한의원 신관은 우리가 그 동안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일련의 서울 구도심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복잡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무거운 작업이다. 구도심이라는 콘텍스트, 그리고 유서 깊은 한의원이라는 기능이 더해져 ‘오래된 것이 새 것을 잉태한다’라는 건축가로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할수 있는 기회였다. 사이트(site)와 프로그램(program)은 건축창작의 영원한 두 대척점이다. 양뱡향으로부터 같은 주제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던 이 흔치 않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에 감사한다.  글 황두진  사진 박영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www.djharch.com 황두진 건축가 황두진은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했다. 그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건축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하여 유럽을 순회한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 건축전>에 참여했고 동 전시회의 전시디자인을 맡아 새로운 개념의 건축 전시를 보여준 바 있다. 주요 작업으로 Won & Won 63.5,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한국관, 춘원당, 엘주택, 휘닉스 스프링스, 가회헌, 한강교량보행자시설(한남, 잠실, 동작), 갤러리 아트사이드, 웨스트빌리지, 열린책들 등이 있다.  저서로는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반비, 2017), <황두진-다공성·구축술·시스템>(열린집, 2016),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메디치미디어, 2015),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해냄, 2005), <한옥이 돌아왔다>(공간사, 2006) 등이 있다. 대한민국 한옥공모전 올해의 한옥 대상(목경헌, 2016), 서울특별시건축상 우수상(원앤원 63.5, 2015), 대한민국공공디자인대상 대상(통인시장 아트게이트, 2012), 서울특별시건축상 우수상(더 웨스트 빌리지, 2012), 대한민국 한옥공모전 올해의 한옥 대상(엘주택, 2011),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상 공동수상 (북촌 한옥, 2009),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집운헌, 2009),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가회헌, 2007)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건축 춘원당한의원박물관 설계 담당 김수현, 임하정, 박의진 위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153-1외 6필지 지역 지구 일반상업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 주요 용도 문화 및 집회시설 및 제1종근린생활시설(한의원 및 한방박물관) 대지면적 626.58 ㎡ 건축면적 373.74 ㎡ 연면적 1882.52 ㎡ 건폐율 59.65% 용적률 232.28% 규모 지상6층/지하1층 주차대수 10대 구조방식 철근콘크리트조 내부 마감 송판널노출콘크리트, 무늬목, 투명에폭시도장, 원목마루, 타일 외부 마감 현무암, 복층유리, 적삼목 구조설계 단구조 기계설비 보우기술공사 전기설비 신한전설 시공 장학건설(건축)+장학디자인(인테리어) 설계 기간 2007. 1~2007. 5 시공 기간 2007. 4~2008. 9 건축주 윤영석 탕전기설계 및 제작 청산 ENG 박물관 자문 쇳대박물관 박물관 전시대 제작 최가철물점 일반가구제작 모티브 사인 및 그래픽 투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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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House 준오 아카데미, 켄민성진 10월 21일 3: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