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보편적이고 특수한 건축분투기 ②,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첫 당선작인 대전차방호시설까지 몇 개의 공모전에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열 몇 개였던 것 같다. 2015년에 둘이서 거의 한 달 반 정도 간격을 두고 공모를 했다. 2014년 그해만 9개 정도 한 것 같다. 그중 단 하나가 당선되었다. 2015년 즈음 공공건축가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설계비 1억 원 미만의 프로젝트는 지명 공모전을 했다. 선정위원회에서 젊은 신진 그룹 5팀을 선정했고 거기에 운 좋게 지명되었다. 금액을 떠나서 프로그램이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너무 하고 싶었고, 바라던 대로 당선이 됐다. 우리에게는 큰일이었다. 서울시에서 연락을 받고 너무 좋아서 조그만 사무실 책상을 쳤을 정도였다.   대전차 방호기지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유종수 벙커에 담긴 히스토리가 있다. 군사시설을 위장하기 위해 시민 아파트가 있었고 그게 무너져서 철거해 폐허처럼 남아 있다. 그곳을 다시 창작 공간을 만드는 재생 사업이었다. 건축하면서 벙커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접해보기 힘들 것 같았다. 군사시설이니까. 최근 DMZ 안에 있는 군사시설도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프로젝트로 진행된 건 대전차 방호기지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선유도공원 프로젝트나 김광수 선생님이 설계한 소각장(아트벙커 B39)이 산업시설이라면, 군사시설이 문화시설로 리모델링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차이점도 있는가? 김빈 실제 군 작전 시설의 경우 그 자체가 너무 낯설고 특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현장 설명회 때 또 한 번 더 공간에서 보고 느끼는 게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았다고 하니, 복합적인 느낌을 받았다. 유종수 이게 벙커였다는 걸 느낀 것은 두께 1m짜리 방호벽을 봤을 때다. 서울시에서도 벽을 보존하길 원했다. 나머지 건물은 안전 등급이 2등급이어서 대부분 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벽을 존치하고 나머지를 건드려보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현장 답사 때는 방호벽을 일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쓰레기 더미 창고에 잡초가 무성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선 후 착공하면서 쓰레기를 다 걷어내니 그때 이 골조들이 다 살아나더라. ‘여기가 대전차 기지였구나!’ 싶을 정도로 방호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벙커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종수 이곳에 벙커가 필요했던 이유는 서북부 전선에서 서울에 진입하기 위한 루트이기 때문이다. 옛날 ‘다락원 터’라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68년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들어오면서 1969년부터 서울 요새화 작업 진행되어 이런 벙커를 만들었다. 서북부 쪽으로 도봉구, 경기 고양시 일산 쪽의 유진상가도 같은 배경이다. 나중에 건물을 무너뜨려서 막겠다는 의도다. 유진상가가 지어질 당시 건물을 보면 길게 장벽처럼 만들었는데 대전차도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도봉구 지역의 군사작전 지도를 보면 아파트 5개 동이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서는 1층 벙커 전체가 다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파트만 5동처럼 보였던 거다. 결국, 이 구조물은 도봉산과 수락산 전체를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아파트는 철거가 된 것인가? 김빈 항공사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 시점이 있다. 1999까지 건물이 있었는데, 2006년 사진을 보면 아파트가 없어진다. 1층만 남겨놓고 2004년에 철거가 됐다. 그리고 길이 없다가 2009년에 창포원이라는 공원이 조성되면서 길이 생긴다. 그때 길이 연장되면서 아파트 절반 정도가 잘려나갔다.   설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무엇인가. 김빈 그 길에 5개 동의 아파트가 있었다. 1층은 쭉 연결되고 2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고 3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다. 밖에서는 2개나 3개, 5개짜리 동으로 보이는 건물인데, 안에서는 하나로 쭉 연결돼 있다는 걸 데이터로 알고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긴 건물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접근했다. 250m가 수평으로 누워 있는 긴 건물이다. 그래서 이 평평한 수평 건물 그리고 장벽을 만들고 있는 서울과 의정부의 경계라는 포인트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무엇을 남기고 혹은 없애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앞부분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와 누워있는 건물의 관계도 고려한 것인가? 김빈 타워는 원래 함께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군사시설이 문화 창작 시설로 변모하지만, 40% 정도의 공간은 국방부가 여전히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말은 평상시에는 문화시설이지만 유사시에는 군사시설이 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군부대의 의견이 중요했다.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군부대와 계속 협의를 했고, 군부대 의견이 계속 반영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군부대와 협의하는 중에 인근 군부대에서 일정 높이의 관측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총알을 방어할 수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하나 올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관측소를 만들되, 평상시에는 전망대처럼 쓸 수 있도록 시작했다. 진행 중에 관측소가 필요 없게 되어 온전히 전망대로 바뀌었다. 건축적인 관계보다는 여러 발주처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수직 타워이다.   첫 번째 당선작이자 첫 번째 공공 프로젝트이다. 현실의 공공 건축 프로세스가 어렵진 않았는지. 유종수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도봉구 측에서 저희 안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지지해주었다. 김빈 공공 프로세스는 원래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하지 않은가. 공공 프로젝트마다 특별한 점이 있는데 대전차 기지에서 다른 점은 군부대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저희가 직접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도봉구청에서 잘 정리해 주시기는 했는데, 함께 협의할 부분이 많았다. 또 이 사업은 서울시가 먼저 추진한 것이 아니라, 2014년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민추진단이 있었다. 시민들이 모여서 이곳을 어떻게 해보자고 계속 제안해서 서울시가 수락한 거라서, 서울시민추진단과도 협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러 주체와 이해관계가 있다는 게 달랐던 점이고 어렵다면 어려운 점이었다.   보통 공공건축물은 기획 단계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바뀌어 어려움을 겪는다. 프로그램은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프로그램은 정해지지 않았다. 공모전 지침에는 예시만 있었고 저희가 제안하게 돼 있었다. 공모전에서 중요했던 것은 앞서 말한 1m 두께의 방호벽이었다. 방호벽을 무조건 존속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프로그램은 창작 공간, 공방, 시민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큰 틀에서 주어졌다. 공방, 세미나실, 카페, 사무실 그다음에 군사시설로 작전 지휘소가 구석에 있다. 무엇보다 이 구조물 하나뿐만 아니라,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어서 공원도시계획시설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설 면적을 조정하면서 대전차 기지 리모델링의 면적이 많이 늘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때 주어진 원래 대전차 기지 면적을 거의 유지했던 것 같다. 김빈 모형에서 검은색 ‘ㄷ’자로 되어 있는 부분이 군사시설이다. 실제 탱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ㄷ’자들은 무조건 군사시설로 써야 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를 창작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게 출발점이었다.   협의 주체가 많다는 건 원하는 목적이나 방향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각기 다른 주체들과 협의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군부대는 사실 기능적이다. 지금 이 시설의 목적이 무엇이든 적이 침투했을 때 탱크가 들어가고 방어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군부대와 협의하면서 결정된 부분이 많다. 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반영해야 했다. 그런 건 괜찮다. 언제 군부대와 협의를 해보겠나?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빈 서울서진학교 인터뷰할 때 그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나요?”라고. 사실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공공 건축은 당연히 협의해가야 하는 스트레스가 있다. 특별히 점이라면 군부대처럼 보수적이고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다른 부분이었다.   당선 후 완공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설계를 한 1년 정도 했다. 시공은 2015년부터 2017년 초반까지 한 것 같다. 리모델링 건물이 항상 그렇듯, 이곳도 기존 도면이 없었다. 그래서 실측하면서 철거하고, 또 현장에서 보나 계단을 살려야겠다는 요구가 있어서 현장에서 설계가 바뀐 부분이 있었다. 철거하면서 발견된 것도 있었다. 구조물 밑에 있던 연결 통로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철거 중 발견해서 살려내고자 했다.     대전차 기지 당선 이후, 어떤 공모전을 진행했는가. 김빈 많이 했다. 2015년에 대전차 기지 공모전 이후 2016년만 해도 한 달에 하나씩 공모전에 참여했다. 떨어진 것도 있었는데 그 중 당선된 것이 양남시장이었다. 계획 설계까지 다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사이 입상을 하나 하고 그렇게 계속해왔다.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를 포함해서 개선된 공모전 제도가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제한된 인원을 지명 공모전을 진행한 것, 서울시에서 선정한 심사위원이 실무를 하는 건축가 위주로 포진되었던 것, 또 제출물을 간소화해준 것이 괜찮았다.   공공 건축 실현 과정의 어려움을 꼽는다면 운영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공모전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다. 기획 따로, 운영 따로, 설계 따로 진행되면서 프로그램이나 요구사항이 계속 바뀐다. 기획, 운영, 주체가 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공공 건축의 의사결정 과정을 대하는 건축가의 태도가 궁금하다. 김빈 세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처음부터 건물 지을 때까지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건축가밖에 없다. 말씀하신 대로 중간에 담당자도 바뀌고 기획한 사람도 다르고, 시공자는 설계 후에 참여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게 우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발주처에 그 사실을 인지시켜드리고자, 필요할 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끝까지 이걸 진행하니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라고. 그런 근거로 이야기하면 많이 도움이 된다. 신선한 발상이다. 김빈 물론 훨씬 더 에둘러서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인식을 환기시키는 거다. 유종수 그렇지만, 저희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서울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의 각 구 지자체도 있고 SH 같은 지방 공기업도 있는데, 그래도 이곳은 건축가의 당선안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지방은 더 보수적이고 아직 인식도 부족한 것 같아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주로 줄다리기를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유종수 오늘도 설계의도 구현법 때문에 계약이나 과업의 조건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공무원은 당연히 법적 기준을 가지고 접근한다. 제도가 처음 시행될 때 시행착오를 겪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접근하는 태도가 너무 갑을 관계로 접근한다.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항목도 넣어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도 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한 번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해서 일부는 수정되기도 하지만, 또 발주처 입장에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 부분이 행정 프로세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유종수 건축을 해본 기술직은 대화가 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보통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일반 보직 순환제로 일한다. 그래서 더 힘든 부분이 있다. 건물이 설계하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행정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그것도 태도의 문제일 수 있는데, 당연히 공무원은 내부 논리가 있다. 감사도 생각해야 하고 시스템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결국 결과물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게 맞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사실 건물이 어떻게 지어지든지 상관없다는 공무원이 의외로 많다. 건물이 좋다 아니다 보다 행정적인 절차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건물을 짓는 것이니, 프로젝트가 제대로 지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전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행정적인 절차를 바꾼다고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그런 대전제가 공유된다면 보직이 중간에 바뀌어도 그대로 가면 된다.   공공건축물을 설계할 때 건축가로서 두 분의 목표도 있을 텐데, 무엇을 어디까지 이루고 싶다는 목표나 얻고자 하는 바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공공 건축도 시스템이 다른 것뿐이지 하나의 프로젝트다. 물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가야 한다는 과정은 짜여 있다. 민간 프로젝트는 모호한 경우가 많고 오히려 클라이언트 한두 명에 휘둘리기도 한다. 공공 건축은 그래도 여러 사람이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목표가 어느 정도 구체화하여 있다. 그래서 그 구체화한 목표에 동의하면 저희도 맞춰 가는 게 기본적인 코드다. 결국, 프로젝트이니까, 그 안에서 멋있고 좋은 건물을 만들어내는 거다. 공공 건축의 다른 점이라면 그냥 저에게 주어졌을 때의 바탕, 기준이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그 외에 저희 생각은 크게 차이가 없다. 유종수 공공 건축은 그 범위가 넓어서 선택의 기회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저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었다. 당선작 중 다 완공하지는 못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로그램이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민간 프로젝트를 할 때 한 프로그램을 잘해놓으면 같은 프로그램이 계속 들어오곤 한다. 예를 들어 체육관을 잘 지어 놓으면 체육관만 설계하거나, 주택을 하면 주택만 계속 들어오거나, 4~5층 근린생활시설이 홍보가 잘 되면 그런 프로젝트만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수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거꾸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었다. 김빈 확률은 좀 낮지만, 선택권은 있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볼 수 있다. 공공 건축끼리도 다르고, 민간건축끼리도 다르다. 의뢰인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려 한다.   건축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거나 갈등이 노출될 때 어떻게 해결하는 편인가?    김빈 할 때까지 한다. 끝까지 최대한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안 되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수긍한다. 그 프로젝트를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종수 당선되든 수의 계약으로 하든, 그런 부분은 다 수행했던 것 같다. 협의 과정에서 서로 맞춰 가면서 밀고 당기면서 끝까지 갔다. 다만 시범사업으로 당선된 양남시장 같은 경우는 공모할 때부터 기본 설계까지 하는 게 조건이었다. 조합의 요구와 관의 사정으로 중지되었다가 새 조합이 들어서서 다시 시작되었을 때, 조합에서 원래 안 대신 일반적인 주상복합 건물로 설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면 저희는 안 하겠다고 했다. 김빈 그렇게 극단적으로 사업이 접히는 경우가 아니면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산으로 가다가 그래도 산 중턱까지 못 가게 하는 과정인 거다. 그래도 수도권 발주처들은 대체로 건축가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셨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도 있었지만, 조정 가능한 상황에서 대응했고 갈등이 아주 심한 경험은 별로 없다.   이치훈 소장님이 말한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결과물’이라는 표현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공공 프로젝트의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건축가의 전략은 무엇인가? 김빈 우리가 책임진다. 건축가가 책임진다. 돌아보면 그런 전략이 있었다. 그냥 잘 만들려고 한 거다. 유종수 발주처가 공공일 때는 어쨌든 확보한 예산이기 때문에 그들도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큼 설계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율을 잘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것은 설계 기간 안에 끝내는 것과 공사비 문제가 가장 크고, 바꿔 달라는 요청은 잘 설명을 하면 대부분 이해한다. 또 공공 프로젝트는 보고 절차가 많아서 윗선의 의견이 나왔을 때 잘 반영해주면 대부분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김빈 생각을 해보면 책임 회피 시스템을 돌파하는 전략이 있다기보다, 저희가 조율을 잘했던 것 같다. 공무원 설득을 잘했거나. 그래서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요구사항은 있지만, 공모전 당선안은 또 공모전 안대로 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많이 흔들 생각을 안 하기도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소소하게 바뀌는 것은 저희가 대안을 제시하든가 아니면 더 좋게 제안하는 식으로 풀었다. 그게 방법이라는 방법이다. 유종수 공모전 안이 완전할 수 없고, 의견을 들어보면 맞는 것도 있다. 그것이 또 바꿀 기회라고 생각한다. 서울서진학교의 중정 같은 경우도 사실 처음에 식당으로 계획했는데, 심의 때 나왔던 의견을 받아들여서 북카페로 만들었다. 의견을 반영해서 그런 디자인이 나온 것이어서, 꼭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힘들긴 하지만, 그건 민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올해는 민간 프로젝트밖에 없는데 민간도 힘들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픈하우스서울 2022>의 주제가 공공 건축이지만, 저희의 태도 자체는 민간과 공공을 구별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건축을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이라고 생각한다.   공공 공간에서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코어건축의 여러 공공 프로젝트는 자체의 완결성을 잘 이루고 있다. 설계할 때 포기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도 궁금하다. 김빈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보편성이다. 어차피 디자인은 주관적이고 다양한 시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공공 건축에서는 보편성을 절대 놓을 수 없다. 그 보편성이 흔히 말하는 동선일 수도 있고 공간의 사이즈, 스케일일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기 시작하면 서진학교의 넓은 복도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들여다보려 애를 쓴다. 사실 코어건축의 프로젝트를 보고 심미적인 질문을 하면 대답을 잘 못 하겠다. 왜 그런 형태가 나왔는지 물어보면, 미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만큼 필요하고 그렇게 곡선을 두어야 내부가 좋아지니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드릴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말씀하신 대로 공공 건축은 행정, 운영이 모두 익명의 주체들이다. 또 당선 후에 많은 경우 예산이나 조건도 바뀐다. 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기 완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김빈 참 힘들고 어렵다. 주변 건축가와 이야기해봐도 공공 건축을 하면 다 힘들어한다. 다만 그 힘들어하는 지점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저희는 이 정도 힘든 상황은 어느 작업에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접근하는 편이다.   행정적인 어려움을 대하는 자아와 건축가로서 자아를 분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요구에는 이렇게 대응하지만 나는 이렇게 만들 거야’라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닐까? 유종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면 그들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이견이 없다. 김빈 발주처 담당자도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선의로 하는 거다.  물론 진짜 화가 나면 싸우기도 하는데, 결국 그분들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접점을 잘 찾아가면서 풀었던 것 같다. 힘들기는 하지만 해결을 해내야지 어떻게 하겠나.   결국, 어떻게 하면 공공 건축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일 것 같다.   유종수 많은 건축가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명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어디에 맞춰야 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짜깁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계속 좋아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다만 법이 구체화하면 좋겠다. 설계의도 구현법도 아직 구체적인 시행령이 없어서 국토교통부와 건축사협회에서 협의하고 조절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구체화하면 어려움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공공 건축 공모전을 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발주처에 계속 의사 표현을 하는 이유도 이걸 관철하겠다기 보다는 담당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도 있다.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담당자가 알아야 다음 사람이 프로젝트를 했을 때 조금이라도 변한다고 생각한다. 건축가들도 발주처에서 요구하는 것에 그냥 사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의견을 내야 한다. 저희는 의사 표현을 하면 늘 발주처에서 ‘너희는 왜 유난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건축가들이 현장에서 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들은 사실 일반 수의 계약으로 하는 프로젝트도 많다. 이렇게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을 제대로 하려는 건축가는 천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들도 같은 설계 방식으로 보이는 거다. 너무 다르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설계안을 잘 마무리하더라도 시공 입찰 방식은 또 다른 영역이다. 규정되지 않은 재료를 쓰기 힘들 때도있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가는지 궁금하다. 김빈 시공사 입찰이야 운을 바랄 수밖에 없다. 재료는 시스템적으로 제한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전제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재료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기술위원회를 연다든가, 자재 선정위원회를 열어서 선정하는 절차도 있다. 발주처와 협의가 잘 되면 발주처가 건축가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조달청 시스템에 있는 제품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시스템은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다. 시공사나 감리사가 알아서 제안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타이밍이 되면 샘플을 들고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샘플 시공도 가능하다. 그러면서 재료도 바꾸고 페인트 샘플 색상도 여러 개 칠해본다. 필요하면 계속 부탁하고 요청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 구현해 왔던 것 같다.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③로 이어집니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별한 건축분투기 ①,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올해 건축가특집은 공공 건축에 주목하는 주제에 맞추어 공공 프로젝트의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코어건축(유종수, 김빈)을 소개한다. 코어건축의 대표작인 서울서진학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풍부한 표정을 지닌 학교 공간은 오랜 시간 이어진 지역의 사회적 갈등을 위로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일반 학교 건축에서도 보기 힘든 팟(POD), 넓은 복도와 중정, 다채로운 재료가 만드는 공간은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에게도, 지역 주민들에게도 건축이 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의 방식으로 그러나 특별한 건축을 풀어내 온 코어건축의 작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공공 건축 영역에서 공모전에 참여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이를 건축가의 의도대로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의뢰인과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민간 시장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다. 최저 입찰과 조달청 시스템 안에서 비현실적인 일정과 기획의 부재를 만나게 되면, 설계안의 의도와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몇 배의 노력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코어건축은 이 고단한 공공 영역에서 공모전이라는 진검 승부로 프로젝트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건축 원칙을 지키며 공공 건축의 다양성을 만들어오고 있다.   대전차방호시설을 리노베이션해 예술창작공간과 문화공간으로 바꾼 평화문화진지, 공진초등학교를 개, 증축해 가장 보통의 특수학교를 만들어낸 서울서진학교, 한강 공원의 전망을 바라보는 한강 공원 양화지구 매점, 한강 수난구조대를 위한 광나루 119 수난구조대, 주변 대형 건축물 사이에서 분절된 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까지, 코어건축은 공공 건축의 질적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들만의 건축 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진행된 서울서진학교 영상과 함께 코어건축이 진행한 6개의 공공 건축을 만나보며, 인터뷰를 통해 공공 건축에 개입하는 건축가의 태도와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두 분이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하다. 유종수 태어난 곳은 곡성이라는 시골이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섬진강 17번 국도가 근처에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집은 툇마루가 있는 허름한 세 칸짜리 시골 농가 주택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루에서 안개 낀 강이 보이고 산도 보이고, 두루미가 날아가던 기억이 있다. 건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그런 곳에서 보내서인지 정서적으로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김빈 아버지가 토목 분야에서 일하셨다. 동남아, 중동 건설 붐일 때 해외 현장 소장으로 발령이 나셨다. 그래서 태국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은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6살에 한국에 와서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강남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어릴 적 기억은 완전히 다르다. 도로 옆에 바나나 나무가 있고 나무에 칼 꽂기를 하며 놀곤 했다.   서울의 초기 아파트 단지는 동간 거리도 멀고 나무도 크게 자라서 지금과 다른 풍경이었을 것 같다. 김빈 완전히 다르다. 주차장은 공공재 개념이었다. 차가 한 집에 한 대도 없을 때였으니까. 보통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장까지 녹지가 있는데, 그 단지에 사는 몇 가족이 어쩌다 한 번씩 녹지 앞 통로에서 놀곤 했다. 엄마들이 옆에서 수다 떨고 우리는 또래끼리 거기서 놀면, 그게 너무 좋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아파트 단지 앞 공간이 커뮤니티 공간이었던 셈이다.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         유종수 건축을 좋아했다거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대학을 가면서 건축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오히려 건설 쪽에 가까운 이미지로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타고난 능력이나 손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설계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료를 찾아보고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며 체득했던 것 같다. 지금도 건축을 배우면서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4.3그룹 선생님들이 SA(서울건축학교)를 꾸려 활동했고, 경기대 전문대학원이 생기면서 설계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해외 건축가들이 방한해서 강의도 많이 했고, 그런 것을 통해서 건축에 재미를 붙였다. 김빈 자신의 전공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저도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 지레 아들도 재주가 있겠거니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한번은 식사 자리에서 ‘건축과라는 게 있다. 한번 생각해봐라’ 이 정도로 말씀하셨다. 중학교 때쯤인데,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단단히 박혀서 슬슬 관심을 두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진로를 좀 더 다양하게 고민해 볼 걸 그랬다.(웃음)   유종수 소장님은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다니셨는데, 심화한 건축 교육이 막 시도하던 시기였다. 유걸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모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2002년에 입학했는데,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가기 전에 SA를 다녔다. 좋은 건축을 배우고 싶어서 이곳저곳 찾아보다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도 알게 되었다. 경기대 전문대학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SA는 정규 학교는 아니었지만, 실무를 하시는 선생님이 많았다. SA를 한 학기 다니다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 그만두고, 이후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걸 보고 찾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유걸 선생님이 계셨다. 또 그때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내세운 게 ‘실용’이었다. 다른 방향을 지향하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 첫해에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을 선택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전문대학원에 그전에도 좋아했던 김헌 선생님이 오셨고, 비슷한 시기에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하셔서 세 분을 경희대에서 만났다. 이후 매스스터디스에서 조민석 소장님을 만나 10년 가까이 실무를 한 것까지, 이분들을 만난 게 지금까지 건축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유걸 선생님이나 김헌 선생님, 김찬중 교수님은 어떤 면이 좋으셨나.  유종수 4.3 그룹 선생님들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게 있는데, 유걸 선생님은 연배가 훨씬 높지만,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 같다. 건축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업 시대의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앞으로의 건축, 건축가는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대공간이 가지는 힘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결이 달랐다. 김헌 선생님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저는 경희대 건축대학원의 첫 번째 졸업생, 첫 제자였다. 건축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김헌 선생님은 정신적인 지주 같은 존재였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해서 연 첫 스튜디오에 참여했는데, 항상 시스템을 강조했다. 학생들이 말랑말랑하게 사고하고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고 지도해 주셨던 것이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대학원 건물도 유걸 선생님이 직접 설계하셨는데 사용할 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아주 좋았다. 이런 걸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원래 있는 건물의 공간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비 오면 천장에서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 공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은 자기 영역을 만들곤 하는데, 유걸 선생님은 다 열어놓았다. 심지어 강의실도 반투명하게 열린 공간을 만들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전혀 다른 환경을 접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김빈 소장님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다니셨다. 건축 교육의 붐이 일어날 때 학교가 주목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개성 있게 활동하는 연세대 출신 건축가가 굉장히 많다. 김빈 그게 신기하긴 하다. 저는 처음부터 건축과는 아니었다. 토목과를 졸업하고 다시 건축과에 들어가서 선후배를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다. 첫 설계 수업을 김광수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그게 저에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처음 배운 설계 수업에서 공간 스터디를 하는 데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첫 단추를 잘 끼운 것 같고, 그 인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김광수 선생님 권유로 참여했던 게 <SA 강경 워크숍>이었다.   SA 워크숍은 당대 건축가가 총출동하던 워크숍이었다. 분위기는 어땠나?  김빈 워크숍이 스튜디오 별로 움직이니까 결국 6~7명의 학생과 김광수 선생님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워크숍이 끝나고 학교 체육관 강당을 빌려서 결과물을 펼쳐 놓았는데, 기억에 남는 건 무대 위에 튜터들이 걸터앉아 이야기하던 장면이었다. 당시 가장 잘나가는 건축가들이 모여 있는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그 사진을 남기지 않은 게 지금도 아쉽다. 아무튼, 보통 건축은 건물만 생각하는데, 도시를 탐험한다는 것도 처음이었고, 낯설고 적응하기 힘든 면도 있었지만 재미있었다. 도시에 대한 주제, 목적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강경은 일본강점기 때 잘나가던 수로 수상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던 곳인데, 현대에는 완전히 박제된 도시로 남아있다. 그런데 도시 구조는 여전히 살아있는 게 흥미로웠다. 거기에 학생들을 데려다 놓으니, 기발한 것도 나오고 말도 안 되는 것도 나오고 재미있었다.   저는 계보와 좌표에 관심이 많아서 그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고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온 기록이 아닐까 싶어서다. 두 분은 또 매스스터디스의 초창기를 함께 하셨다. 언제 들어가셨나? 김빈 제가 2003년도 후반, 유 소장님은 2004년도 중반 정도였다. 첫 회사를 나와서 잠깐 쉬고 있을 때 김헌 선생님 소개로 다니게 되었다. 직원이 3명 정도였던 완전 초창기였다. 매스스터디스에 큰일이 들어오기 시작한 2004년 초부터 사람을 많이 뽑았는데, 유 소장님도 김헌 선생님 소개로 합류하게 되었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첫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 김빈 헤이리 주택들 – 이끼집하고 비틀린 집(Torque House), 너와를 붙인 깍여진 집(Chipped House) 로 시작했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의 계획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계획안을 만드는 과정에 처음 참여했는데, 일반적인 아파트나 주상복합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처음 계획안부터 재밌고 신선했다. 당시 시행사 프로젝트를 그렇게 접근하고 또 충분히 사업성 있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는 작업량이 엄청나서 도면을 쌓으면 사람 키가 훌쩍 넘는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유종수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축 자체도 어려웠고, 저층부와 상부 주거 타입도 아주 많아서 스터디도 많이 필요했다. 거기에 적용할 시스템도 처음 해보는 게 많았다. 또 규모가 커지니 컨설팅 회사들이 아주 많았다. 그것들을 건축가가 어떻게 핸들링 해야 하는지, 설계부터 공사 현장까지 참여하면서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조민석 소장님이 보여주신 태도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한 인터뷰를 보았다. ‘이것은 일이고 우리는 프로고 여긴 학교가 아니다’라는 멘트도 언급했는데, 매스스터디스의 시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매스스터디스의 실무는 저에게도 중요하지만, 독립해서 활동하다 보니 그냥 저희가 하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입견을 주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매스스터디스에서의 실무는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나 건축에 올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계획할 때부터 치밀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 건물을 짓다 보면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데, 그때마다 유연하게 잘 풀어가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김빈 늘 조민석 소장님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유종수 소장님과 비슷하다. 건축 프로젝트 하나에 끊임없이 집중하고 매달려야 하는데, 사실 힘든 일이다. 한편으로는 기준이 너무 명확해서 편한 것도 있다. 집중해서 일하면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힘들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명확한 건축적 아이디어를 지키면서 시행사나 여러 사업체와 협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빈 조민석 소장님은 굉장히 유연하다. 지키고자 하는 것도 분명하지만, 관계자분들과 대화를 굉장히 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민석 선생님이 해준 명언들이 있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태도인데, ‘가려운 데를 긁어줘야지, 아픈 데를 긁어주면 안 된다.‘라는 거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나 에스트레뉴 같은 경우 시행사가 있었지만, 건축가 안을 존중해줬다. 그러면 둘 다 원래 계획안대로 지어졌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처음에 제안했던 안에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상황에 유연함이 있는 것 같다. 발주처나 건축주가 엄청난 시간을 들인 일을 변경하자고 하면 저희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 발전시켜 좋은 안으로 만들기 위한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 같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실무를 쌓는 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유종수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저는 지금도 부족한 것 같지만 말이다. 퇴사한다고 했을 때 조 소장님이 같이 밥을 먹으며 해준 얘기가 있었다. 나가서 뭐 할 거냐고 물으셨다. 김빈 소장님과 같이 사무실을 하기로 한 상태에서 나왔는데, 뭘 할지는 모르겠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어떻게든 버텨라. 뭐든 하고 싶으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네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위해서 신문팔이를 하더라도 버텨라’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말들이 아직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독립하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김빈 제가 먼저 나왔는데, 우스갯소리로 ‘여기서 운을 다했구나, 내 시대는 끝나가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맨땅에 헤딩 한번 해봐야겠다 했다. ‘정 힘들면 또 취직하면 되지’라고 가볍게 나왔다. 필운동에서 사무실을 열었고, 종종 유종수 소장님을 볼 때마다 열심히 설득했다.(웃음)   할 만큼 했다는 건 내 것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나? 김빈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무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가 보였고,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해도 결국 비슷할 것 같았다. 내 것을 하겠다기 보다는 그냥 해보지 뭐 이런 마음이었다. 대단한 건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간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했다. 만만치 않았는데 맨몸으로 버텼다. 유종수 저희는 서로 회사 다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 술친구 중 한 명이었다. 마흔에 사무실을 열었는데, 그 나이 정도면 건축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직장에서 계속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그곳에서 얼마나 더 확장성이 있을지 고민하는 때인 것 같다. 한편으로 훨씬 젊은 사람들이 자기 건축을 하는 걸 보고 가능성을 봤던 것 같다. 언젠가 해야 할 거라면 지금이 적정한 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 소장님이 먼저 상을 차려놨기 때문에 저는 그냥 숟가락만 얹었다. . 김빈 책상하고 의자 하나밖에 없었다.(웃음)   2010년 즈음만 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성장할 만한 건축 시장이 없었다. 처음 독립해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셨나? 김빈 당연히 저희처럼 일천한 사람들이 일을 따는 유일한 방법은 공모전이다. 처음 시작은 다 비슷하다. 매스스터디스의 인연으로 속초에 조그마한 주택을 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민간 프로젝트가 바로 <상상가>였다. 그다음은 공모전을 시작했다. 유종수 보통 독립을 하면 지인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 하지만 저희는 사실 그런 게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공모전이었다. 2014년 2월에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3개월 동안 준비한 공모전이 운 좋게 2등으로 입상했다. 이렇게 계속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 떨어졌다. 저희가 공모전을 많이 참여했는데, 어떻게 보면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다. 선배 건축가들이 공모가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조금씩 마련해 주셨다. 정책과 우리의 시기가 운 좋게 맞았던 것 같다.   당시 공공 건축가 제도가 시작되고, 공모전 제도가 시스템을 갖춰가는 시점이었다. 공모전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문턱이 조금 낮아졌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복합적이다. 공공건축가 제도나 지명 공모전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사 과정이 공정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모전 내용이나 심사위원, 지침을 보았을 때 공정하게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있다. 그런 신호를 계속 주어야 규모가 작은 설계사무소도 덤벼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시스템이 정비되면서 제출물도 간소화되는 추세였다. 공모전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다.   그런데도 공모전은 당선이 보장되지 않는다. 공모전을 계속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조율했나? 김빈 초창기와 지금은 조금 다르다. 대전차방호시설 공모전에 처음 당선됐을 당시에는 공모전 선택할 때 프로젝트를 가릴 단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통장 잔고가 없으니까. 다만 공모전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라든가, 심사위원 정도는 당연히 본다. 그렇다고 ‘이번엔 좀 쉬어 갈까?’ 이런 여유는 없었다. 뭐든 공모전이 나오면 계속 도전을 해야 하는데, 그걸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 유종수 당선된 것도 있지만 입상을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앞으로 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서 희망 고문이 된다. 그런 것 때문에 계속 공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민간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허가 직전까지 갔다가 멈추고, 민간 공모에 당선되어도 계약 후 진행이 안 되는 것을 겪어보니까, 민간으로 안 되나 공공 공모전으로 안 되나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거구나 싶었다. 김빈 하다가 지칠 만 하면 한 번씩 입상을 하고 어쩌다가 당선도 되고. 그러다 보니 공모전이 나름대로 일을 따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거다. 설계사무소마다 경험이 다를 텐데 저희는 운이 좋았는지 공모전을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쪽으로 자꾸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공모전 첫 당선 프로젝트가 평화문화진지: 대전차방호시설 리모델링이었다. 이 공모전은 해봐야겠다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 김빈 그것도 시스템 덕분이다. 설계비 1억 이하 프로젝트는 공공건축가 중에서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공정함도 그렇고 참여할 사람들을 지명한 것도 시스템화되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선 프로젝트가 너무 특이하잖은가? 대전차방호시설은 그냥 구경하기도 힘든 시설인데, 그걸 바꾼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또 당시에는 8천~ 9천만 원의 설계비도 저희에게는 귀한 돈이어서 지원했다. 물론 리모델링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누구나 흥미를 느꼈을 것 같다.   코어건축사사무소의 웹사이트에 소개된 프로젝트를 보면 당선작보다 2등작이 더 많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도전하고 어느 정도 비율로 당선되셨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작년 서울시건축상 대상을 받아서 올해 건축문화제에서 특별전을 했다. 전시하면서 그동안 공공 공모전에 지원했던 폴더를 다 열어봤더니 한 90개 정도가 되더라. 김빈 2014년부터 시작했으니까 만 9년이 되어간다. 2019년과 2020년이 가장 많았다. 유종수 그때 아마 15개에서 20개 정도의 공모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말은 거의 한 달에 한 개의 공모에 참여했다는 거다. 물론 두 팀으로 나눠서 했지만.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지치기도 했다. 적정한 기간을 두고 당선이 되면 좋은데, 사실 공모는 언제 당선될지 모른다. 재작년처럼 1월부터 10월까지 당선되지 않다가 11월부터 동시에 3곳이 당선되는 바람에 올해는 공모를 거의 안 하기도 했다.   90개 정도 되는 공모전에서 당선된 것은 몇 개인가? 유종수 당선은 한 10개 전후인 것 같다. 지어진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납품까지 했는데 발주처 상황으로 잠시 멈춘 것도 있다. 김빈 당선율로 보면 10% 정도다.   절차가 간소해졌다고 하더라도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공모전인데 어렵진 않았나? 공모전에 주력하면서 내부에서 가진 원칙이나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간소해졌다는 건 상대적인 거다. 간소해졌다는 게 간단해졌다는 건 아니니 에너지는 많이 써야 한다. 유종수 지금은 저희만 일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같이 일한다. 가능하면 직원들이 공모전만 하기보다,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현장까지 온전하게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공모뿐만 아니라 교육청의 ‘꿈담 교실’이나 ‘찾아가는 동사무소’도 참여했는데, 가능하면 처음 입사한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작을수록 다루기 쉬우니까. 공모전을 할 때 일단 좋은 공모전인가를 먼저 판단하고,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시작한다. 방향을 잡고 직원들이 작업하면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다. 제출물도 비효율적인 것은 제외하려 한다.   2015년부터 서울시 공모전 제도도 꾸준히 개선됐다. 다른 도시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공공 건축에 대한 제도가 초창기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지, 여전히 어려움으로 꼽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유종수 처음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프로젝트 서울>이라는 웹사이트도 만들었지만, 그때는 서울시 기획과에서 주관했다. 그러다가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고 도시공간개선단이 생기면서 서울시에서 공공 건축을 전체적으로 주관하며 공모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공모전이 공개되고 심사위원도 공개되고 전자화 문서로 간소화시키는 등 제도를 잘 만드신 것 같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공모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빈 기본적으로 서울시의 방향, 지자체별로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는 큰 흐름이 있고, 그 덕분인지 건축가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건축가의 의견이 조금씩 반영되고 있다. 공모전은 결국 공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는 관행적으로 받던 자료도 간소화하려 하고 공모의 기획 단계에서 건축가들의 참여가 많아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어서 저희가 편해지는 것 같다.   제출물이 많은 큰 규모의 공모전도 참여하나? 김빈 공모전을 고를 때 규모가 크거나 제출물이 많은 것보다, 공정함에 대한 의심이 있다. 공모전을 하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데 우리가 한 노력을 공정하게 심사받지 못한다면 안타까우니까. 규모가 큰데 괜찮을 것 같다 싶으면 당연히 덤벼든다.   공공 건축은 사업의 목적과 풀어내야 할 숙제도 분명하고 사업의 종류도 다양하다. 주어진 조건이 흥미롭거나 인상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유종수 대전차기지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시 스케이트 광장, 양남시장도 그렇다. 지어지지 않았지만, 낙산전망대도 있었다. 이번 오픈하우스서울에서 소개하는 한강 변 플로팅 건물처럼 장소적인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저희는 프로그램이 특수한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김빈 공공이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민간사업에서는 잘 접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다 그런 성격이다. 한강에 떠오르는 건축물을 언제 해보겠나.   공간지에 이치훈 소장님의 비평이 흥미로웠다. 기념비성을 가지면서도 과하지 않는 특성을 언급했다. 공모전의 전략으로도 유리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건축 유형이나 형식에서 디자인 전략이 있는지, 어떻게 그 균형감을 찾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저희에게 균형감은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다 하고 싶은 바이고 그래서 어떤 때는 2등 안이 더 좋은 안이라고도 한다. 저희는 둘이 함께 작업하기 때문에 그 균형감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프로젝트를 할 때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다. 직원들과도 함께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왜 좋고 안 좋은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합리적인 걸 찾아가려고 할 때 항상 김빈 소장님이 균형을 잡고 잘 유도해 준다. 기념비성이나 유형은 각 프로젝트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김빈 공공 건축이고 공모전이니까 사실 보편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르게 말하면 합리성일 수도 있고 보편성일 수도 있고, 편리성, 효율성 등이 담보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매스스터디스에서 배운 게 아닐까 싶다. 보편성의 끈, 합리적인 것을 놓지 않는 분이었다. 더구나 공공은 합리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형태가 어떻게 보이든 간에 일반적인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쓴다.   민간 건축과 비교해도 설계한 공공 프로젝트 대부분, 건축물의 캐릭터가 선명하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유 소장님 말씀하신 거로 설명이 될 것 같다. 결국, 민간이든 공공이든 ‘건축은 똑같다’라는 대전제가 있다. 민간, 공공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이 달라서 대응은 달리 하지만, 그래도 건축은 보편성, 합리성, 재료나 볼륨, 동선과 공간을 짤 때도 결국 그냥 건축인 거다.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설계하다 보면 벽돌 건물도 나오고 철판 건물도 나오는 거다. 그냥 건축으로 접근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OHS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영상 2022 2022 김중업건축박물관 특별전시, <미디어 아키텍쳐: 김중업, 건축예술로 이어지다> 2022 김중업건축박물관 특별전시 <미디어 아키텍쳐: 김중업, 건축예술로 이어지다>는 김중업(1922~1988)의 건축예술 세계를 디지털미디어와 미래기술로 새롭게 해석한 국내 최초의 건축 실감 콘텐츠 전시이다. 김중업은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1세대 건축가로 주한 프랑스대사관,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등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예술로서의 건축관을 국내에 정착시키고자 한 선구자이다. 올해 건축가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김중업 건축의 과거, 현재, 미래를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 콘텐츠 제작 및 체험존 조성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전시는 크게 4개 주제로 나누어 김중업건축박물관 특별전시관 1·2층에서 전시된다. 1부 「주한 프랑스대사관, 미디어를 만나다」에서는 김중업의 대표 건축인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미디어파사드, 3D 모형 프로젝션 맵핑 기술 등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2부 「김중업 건축, 현대예술로 이어지다」에서는 현대예술로 재해석된 김중업의 제주대학교 본관, 삼일빌딩,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을 공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다. 3부 「다큐멘터리 김중업, 건축예술로 나아가다」와 4부 「건축과 도시, 미래를 꿈꾸다」는 ‘인터렉티브’를 적용한 체험존으로, 관람객이 직접 능동적으로 참여형 영상기술을 체험하며 김중업 대표 건축물의 색, 재질 등을 변화시키는 등 자신만의 미래 도시를 완성할 수 있다. 다양한 현대 예술과 미래기술로 연출된 이번 전시를 통하여 김중업이 추구했던 건축예술과 향후 우리 건축이 나아갈 길을 공명(共鳴)해보고자 한다.   글 사진 김중업건축박물관 김중업건축박물관 바로가기
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영상 2022 3부 사라진 원본 • 재현의 방법, (구)제주대학교 본관 제도적인 보호장치가 없는 현대 건축 유산은 언제든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구조적인 한계, 시대적 요구, 기능의 변화 앞에서 현대 건축 유산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구)제주대학교 본관은 구조적 수명이 다했다는 명분으로 철거된 대표적인 김중업의 건축 유산이다. 잃어버린 건축물의 가치는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최근 잇따른 현대 건축물들의 철거 결정은 현대 건축 유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사라진 건축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미 사라진 (구)제주대학교 본관의 건축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건축 유산의 가치와 상징성, 축적된 도시의 기억에 대한 상실감, 미래 유산에 대한 보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나아가 원본 없는 건축이 복제와 복원, 재현을 통해 어떻게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을지,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재현의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터뷰 정인하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수 박정현 건축비평가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소장 권민호 작가 * 7월 21일 (목) 공개
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영상 2022 2부 산업유산의 활용, (구)유유산업 안양공장(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1960년대의 산업시설인 (구)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의 안양공장은 전후 한국의 산업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 군이다. 당대 대표적인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에 참여해, ‘산업건축’이라는 유형에 합리적인 태도와 조형적인 접근을 실현한 건물이기도 하다. 기능성이 강조되는 산업건축물에 ‘구조적인 합리성과 조형적인 낭만성’을 담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중초사지 당간지주, 고려 시대의 안양사 터 위에 세워진 (구)유유산업 안양공장은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개발 시기의 산업유산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으로 조성하면서 산업건축 유산의 활용을 보여준 문화적인 가치도 담고 있다. 전후 공업화와 근대화가 본격화되던 한국에서 김중업의 초기작인 (구)유유산업 안양공장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또한 산업건축 유산이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 국내 최초의 건축가 박물관으로 활용되면서 어떤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인터뷰 안창모 경기대학교 교수 * 6월 30일 (목) 공개
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영상 2022 1부 복원과 확장, 주한 프랑스대사관 도시 안의 또 다른 영토인 대사관은 휴식을 위한 집이자, 일하는 사무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교류 공간이다. 대사관의 건축은 한 나라의 문화를 최전선에서 대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김중업의 대표작인 프랑스대사관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한국성에 대한 고민이 만나 꽃을 피운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와 한국의 건축 문화가 만났다는 점에서 대사관의 의미와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르 코르뷔지에와 한국성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김중업이 한국적 모더니즘을 실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며 지어진 프랑스대사관은 구조적인 보강과 대사관의 업무 공간 확보를 위해 리모델링과 증축을 진행 중이다. 사티와 매스스터디스의 설계로 진행되는 이번 리모델링과 증축은 일부 변형된 지붕 등을 복원해 김중업의 초기 설계안을 살리는 동시에 기존 건축물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기능을 확장하여 오늘의 가능성을 담는다.   인터뷰  필립 르포르 주한 프랑스대사 배형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6월 9일 (목) 공개
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영상 2022 김중업 건축, 오늘을 만나다, 김중업건축박물관 x 오픈하우스서울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디어 아키텍쳐: 김중업, 건축예술로 이어지다> 전시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김중업 건축, 오늘을 만나다> 3부작 영상이 6월 9일부터 선보입니다.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오픈하우스서울이 공동 기획한 이번 영상은 김중업의 건축을 미디어 매체로 재해석하는 전시의 연장선에서 김중업 건축의 오늘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원형을 회복하고 새로운 기능을 확보하려 리모델링과 증축을 진행하고 있는 주한 프랑스대사관, 산업시설에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구)유유산업 안양공장(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구조적 수명을 다했다는 명분으로 사라진 (구)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은 김중업의 건축 유산이 어떻게 수명을 이어갈지,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이를 통해 건축가 김중업의 낭만성이 드러나는 1950~60년대 건축물이 우리 도시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쓰임이 변화하는 도시에서 김중업의 건축은 보존되거나 새로운 기능을 담고 확장하고 변형되거나 소멸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중업 건축의 원형과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 건축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부 복원과 확장, 주한 프랑스대사관 필립 르포르 대사(주한 프랑스대사관)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 6월 9일 (목) 공개   2부 산업유산의 활용, (구)유유산업 안양공장(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안창모 교수(경기대) 6월 30일 (목) 공개   3부 사라진 원본 • 재현의 방법, (구)제주대학교 본관 정인하 교수(한양대 에리카) 황두진 건축가 박정현 건축비평가 권민호 작가 7월 21일 (목) 공개   ▶ 김중업건축박물관 공식 유튜브 채널 바로가기
FILM 영상 ㅣ 디파이사옥, 정재헌 오픈하우스서울×기린그림 소통 & 공간 브랜드 스페이스의 시대에 기업의 이미지가 담긴 공간의 메시지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성장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업 디파이의 비전을 공간에 담아내는 일이 첫 번째 과제였다. 젊은 CEO와 더 젊은 20대 사원들이 열정을 쏟아 꿈을 이뤄가는 곳, 디파이는 새로움을 열망하며 현재를 넘어서고 싶어 한다. 창조적인 이들의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커뮤니케이션. 이들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모든 사람과 소통하길 원한다. 시각과 청각, 촉감이 살아있는 소통의 공간, 누구나 편하게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디파이다.    연결과 경계 강남의 조용한 주거지역에 있는 디파이 사옥은 정면에는 고층 아파트가 장벽처럼 서 있고, 비슷한 규모의 건물들이 대지를 둘러싸고 있다. 곳곳에 들어선 근린생활시설 건물들이 주택가 거리에 새로운 활력을 만들고 있다. 디파이 사옥은 거리와 소통하면서도 안정감을 주기 위해 저층부는 열고, 인접 건물과는 두꺼운 벽으로 강한 경계를 만들었다. 대신 1층 라운지를 반 층 올리는 스플릿 플로어(split floor)로 계획하여 내부공간을 시각적으로 보호하면서 동시에 지하 공간으로 빛이 흘러가도록 했다. 중정으로 확장된 1층 라운지는 수직·수평의 동선과 내·외부의 시선이 한번에 관통하는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다. 분주한 움직임이 이뤄지는 장소의 특성상 자칫 산만하기 쉽지만, 여유 있는 공간의 크기와 분리된 시선의 방향, 그리고 자연의 생기가 어우러져 만남과 휴식을 위한 장소로 잘 사용되고 있다.    보이드와 단면 인터넷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현실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늘 모니터 앞에 있는 일상에서 잠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계절과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이 누구보다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내부공간(solid)보다 외부공간(void)을 먼저 디자인했다. 하늘로 열린 중정을 안쪽에 배치하여 각 층의 내부공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연결했다. 중정의 빛은 선큰 가든으로 이어진 빛의 벽을 타고 지하 공간으로 전해진다. 층고를 높이고, 최대한 개방감을 확보한 지하 공간에 흘러내리는 빛줄기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공간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벽과 볼륨 3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은 빛과 자연이 움직이는 감성의 공간이다. 중정의 ‘벽’은 시선 차단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정제된 풍경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창’으로 계획되었다. 사옥의 모든 공간에서 벽은 그 자체로 빛과 하늘이 연출하는 ‘미디어’로 시시각각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의도적으로 두껍게 디자인된 벽은 볼륨으로 느껴질 만큼 무겁고 단단하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입면이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경험되는 또 다른 입면이 된다.   사람과 마음 체화된 마음 이론(theory of embodied mind)에서 사람의 마음은 몸과 몸을 감싸고 있는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몸의 감각과 움직임이 영향을 받고, 이를 통해 생각과 감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피스’의 기본 개념은 이제 ‘기능’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고, ‘몸’의 편리함에서 ‘마음’의 편안함으로 확장되고 있다. 오피스는 이제 업무공간이 아니라 ‘집’과 같은 따뜻한 생활공간이 되어야 한다.   글 정재헌 사진 윤준환 
FILM 영상ㅣ고안된 장식들, 윤한진, 한승재, 한양규 고안된 장식들 A Model of Sporadic Thoughts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요구사항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작은집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어요. 다행이도 음악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땅을 서울에서 구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이장소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으로 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이길 바래요. 그래도 수압은 좀 신경 써주세요.”   틈틈이 노트에 써놓은 글 들을 엮어 단편집을 만드는 소설가의 마음으로 녹번동주택을 작업하고 있다.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모으고 작은 스케치들을 합쳐보는 과정만 있는, 부분이 부분 일 뿐 전체가 없는 그야말로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에서 출발해 대지를 읽고 형태를 만드는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내게는 실험이다.  냉철하고 치밀한 두뇌, 야망 가득한 눈빛은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건축의 이미지 박공지붕, 네모난 창, 낮은 울타리, 그리고 나무 한 그루. 어릴 적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만약 내가 유치원 미술 시간에 그린 ‘집’의 드로잉이 남아 있다면, 분명 그 집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혹은 당신도 그렸을 법한 바로 그 집이었을 것이다. 빨간 지붕에 뻐꾸기창. 혹시라도 마당 한가운데 그린 나무의 가지가 잎이 없이 앙상하다면 평소 외로운 아이로 낙인찍혔을 바로 그 집. 그 이미지. 집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집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애써 보기도 했었다. 그 이미지는 감옥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기소침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희대의 천재 건축가가 아닌 평범한 교육을 받은 보통의 인간임을 받아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발버둥에도 여지없이 똥이 되고야 마는 스케치와 모델들을 보면서 내가 똥을 그렸던가. 아닌데 집을 그렸는데. 그럼 역시 집 같지 않은 집은 똥이다. 완벽한 삼단논법이 완성되고 나서야 겨우 이 번뇌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지는 4학년 3반 녹번동 주택은 우리 집의 이미지, 그 원형을 되짚어 본 작업이었다. 내 친구 정락이네 집에는 주물대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잘 정리된 조경수들과 함께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큰 개들이 뒹굴었고 대문보다 더 큰 거실 창은 마당으로 열려 있었다. 이건 뭐랄까. 나에겐 판타지. 판타지의 전형. 어릴 적 내가 살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하던 전방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다. 전방에는 담배 냄새가 났고 시시껄렁한 양아치 삼촌들이 내 꼬추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잽싸게 통과해야만 했다. 다시 외부로 나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똘이(레쉬+삽살이) 집과 수돗가가 계단참에 있었고 차례로 작은 등나무 파고라와 녹슨 그네가 있던 우리 집. 진짜 집의 기억. 나는 창녕 영산 출신이지만 서울 녹번동에선 고향의 냄새가 났다. 대지의 두 면에 접한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작은 대문이 있지만 변하는 건 없다. 개의치 않고 또다시 좁은 길이 이어진다. 좁은 길은 계단을 지나면 축축한 바닥이 된다. 작업실 유리창에 손바닥 지문을 남기면서 2층까지 난 외부계단으로 올라가면 비로소 거실이 나오는 진짜 집의 이미지.    맥락 안의 건축 오래된 토지를 상대할 때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다리 꼬지 말 것이며 삿대질도 조심할 것. 오랜 세월 동안 덧붙여진 법규들이며 작은 오차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5m 이상의 막다른 골목길은 도로선을 후퇴하게 만든다거나,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옆집은 경계를 한참이나 넘어와 있다거나, 점점 높아진 도로의 레벨로 집이 아래로 내려가게 됐다거나 하는 작은 사건들 말이다. 이렇듯 시간은 경계를 뭉퉁하게 만든다. 담장에 기대 노각을 파는 노인, 벽과 도로경계선 사이를 마당 삼아 화단을 가꾸는 다가구 빌라, 주차금지 표지판을 대신하는 무거운 화분들, 뭉퉁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담장 밖의 사람들 새로운 사람들이 경계에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 크고 작은 틈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녹번동 주택은 옆집이 넘어와 쓸 수가 없는 1m 폭의 틈이 생기고야 말았다. 나는 이 틈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마당도 아닌 길도 아닌 이 틈은 옆집 건물의 모서리에서 정확히 한 뼘 떨어져 있다. 고양이도 지나갈라치면 뺨이 좌우로 댕겨지는 작은 틈이지만 옆집이 허물어 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막다른 골목을 연결해주는 동네 길이 될 것이다. 의뢰인에게 부디 이 틈을 마당에 편입하지 마시고 이대로 두시면 좋겠다고 간곡히 요청을 드렸다.  녹번동 주택은 양쪽에 두 개의 인접 대지가 있는데 한쪽은 이미 침범을 한 상태이니 담장을 허물고 다시 세우기로 합의가 됐고 반대편 대지의 담장은 아슬아슬하게 경계면에 걸쳐져 있어 존치하고 새로운 담장을 덧씌우기로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옆집 담장의 높이라든가 재료 같은 것들이 여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데 옆집 담장의 안면이 집의 겉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존의 낮은 담장을 여전히 뭉퉁한 경계로 남겨 두기로 했다. 기존 담장과 한 몸이 되는 두툼하고 낮은 담장을 만들어 담의 윗면을 이웃과 공유할 수 있도록.    빛의 언어 나는 17살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이후 15년간 반지하와 북향집을 전전하며 궁색한 생활을 하였는데 매번 이사를 할 때마다 자연광 한줄기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자취방에선 한줄기 정도의 빛의 영광은 누릴 수 있었는데, 하루 중 단 몇 분뿐이었지만 폭 3cm의 직선의 광선이 방안을 드리울 때면 웃통을 벗고 마른 몸 구석구석 비추는 일광욕 시간을 가졌다. 그제야 보이는 안 보이는 것들. 떠도는 먼지며 걸레받이 틈의 개미집들같이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것들의 존재들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연주의자들이 직선에 대한 혐오를 얘기해도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억오천만 킬로미터를 직선거리로 7분 만에 날라와 방구석 개미집까지 비추는 대자연의 언어, 그것이 파동이든 입자든 뭐든 간에 직선인 것이다.   온화한 덩어리 대지는 남서 방향에 넓은 변을 맞대고 있다. 오전에 동쪽에서 비추는 조광을 짧은 변에서 짧은 시간 받아들이고 남에서 서로 넘어가는 동안 긴 시간 일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태양을 바라보고 여러 개의 창문을 내 모든 공간에 온종일 빛이 집안 내부를 드리우는 것을 상상하니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직선이 마음에 걸린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배려 없는 속사포의 직설을 종일 듣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빛의 변화가 은유적이었으면 좋겠다. 직선의 그림자가 공간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온화한 빛의 덩어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북쪽의 파사드는 기능 없이 독립적으로 서 있는 벽이다. 남쪽에서 쏟아지는 속사포의 빛을 머금었다가 집 내부로 옮겨주는 역할만 할 뿐 다른 기능은 없다. 파사드 안쪽 면에서 집은 속살을 온전히 다 보여준다. 커튼월 방식으로 시공된 깊이가 없는 얇은 유리 한 장으로 벽과 대면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니 커튼이 필요 없다. 마치 넓은 dry area를 둔 지하와도 같다. 벽에 부딪히고 산란한 빛은 파동은 사라지고 질량만 남아 집안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마치 새벽에 아내 몰래 끓여 먹은 라면 냄새가 아침에도 다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광활한 자연을 대하는 이 집의 자세이다.   밤의 표면과 장식된 빛 검은 밤이 찾아오고 하나둘 전등이 켜지면 치부는 비로소 드러난다. 자연광의 따뜻한 색온도로 모든 게 용서되는 낮이 지나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벽체 위에 날 선 조명이 떨어지는 밤이 오면 은혜로운 낮에 숨어있던 실수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의 시간이다. 무자비한 상대에게 전부를 밝히는 실수를 하지 말자. 어두움이 묻은 밤의 벽면은, 표면은,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이 다. 빛이 내려앉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공간을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필요한 지점마다 바닥에 내려앉는 불빛, 새어나오는 불빛, 좁고 깊은 천장의 슬라브 구멍에서 나와 바닥 일부를 비추는 불빛, 얕고 긴 틈에서 나오는 옅은 불빛. ‘선생님. 그런 조명은 어디서 파나요?’ 마우스와 키보드를 내려놓고 우리는 기꺼이 목수가 되기로 하였다.   글 윤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