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STUDIO [무료] (주)민워크샵 건축사사무소, 민우식 10월 26일 3:00PM
OPENHOUSE 코오롱 원앤온리타워, 모포시스 + 해안건축 10월 26일 2:30PM
SPECIAL 건축, 포용과 조율의 커뮤니케이션, 건축가 김정임 ② 앞서 건축을 신화화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했는데요.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서 더 공감할 수 있으셨을 듯합니다. 유걸 선생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당시 유걸 선생님은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의 설계 감리로 오셨고,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 사무실로 사용하셨어요. 유 선생님의 첫 직원이 제 선배여서 미국에서 오신 분이라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 우리는 도면에 연필심을 갈아서 바탕칠(빽칠)을 하던 때였어요. 콘크리트 단면을 그리면 회색 톤이 필요했는데, 손으로 도면을 그리던 시절이라 도면을 뒤집어 칠했죠. 연필심 가루를 휴지에 털어 마스킹 테이프(Masking Tape)로 감아 그걸로 음영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선배가 사무실에 레트라셋(Letraset)이라는 도구가 있다고 자랑했어요. 레터링(Lettering)도 손으로 쓰지 않고 판막이로 작업한다고요. 또, 미국에서 도트 마스킹 테이프(dot masking tape)를 가져와 도면에 붙여서 작업도 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죠.   신문물이었네요. 삼청동 사무실에서 유걸 선생님을 만났는데, 텍사스 농장주처럼 보였어요(웃음). 저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유걸 선생님과 꽤 오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은 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셔서 좋은 분이라는 인상이 남았어요. 이후 졸업 논문을 쓰던 중, 그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후배가 직원을 뽑는다고 알려줘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인터뷰 후에 함께 일하게 되었죠.   유걸 선생님은 건축도 인상적이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어른이시죠. 정말 신사(Gentleman)셨어요.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시고, 저를 "김정임 씨"라고 불러주셨어요. 사무실에는 직급이 없었고,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평적인 체제로 일했어요. 연차가 많은 분들도 서로 "씨"라고 부르며 일했죠. 사무실에서는 그래픽 스탠다드(graphic standard) 같은 자료를 늘 펴놓고 이야기했어요. 제 눈에도 업그레이드된 사무실 같았어요. 모형을 만들 때는 손잡이(Handrail) 같은 것은 1대 1로 만들게 하셨어요. 그때 보고 배운 덕분인지, 지금도 손으로 1대 1로 그려보거나 만들어보게 하거든요. 그런 문화는 한국 사무실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정말 좋았어요.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서 첫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었나요? 첫 프로젝트는 밀알학교였던 것 같아요. 밀알학교는 1차 납품이 된 상태였는데, 아트리움(atrium)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어요. 아트리움은 평면과 단면 모두 사선형이라 모든 축열의 철골 부재(steel member) 단면 형상이 다 달랐어요. 제가 맡아서 그 부분을 구조 사무실과 의논해서 해결했어요.   밀알학교 아트리움의 경우는 전체 유리로 된 밝고 개방된 공간인데요. 이종건 교수님은 비판적인 비평을 하기도 하셨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굉장히 과감한 공간이었어요. 실무를 담당하실 때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아트리움(Atrium) 공간의 경우 큰 공간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어요. 처음 그 공간을 봤을 때, 특수학교라는 특성을 살려서 주된 이동 동선을 램프(Ramp)로 처리한 것이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당시에는 실제 구현된 대형 아트리움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고 형태적으로 적절한 사선을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공간에 사선을 하나 놓는 순간, 거기서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한다고요. 그러니까 직교 좌표 체계에 이질적인 것 - 사선이나 곡선이 투입됐을 때, 거기서부터 어떤 생각이나 스토리가 풀려간다는 말이었어요. 지금도 맞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공간을 설계할 때 안무가처럼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저도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인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설계할 때는 공간보다 시간적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계절이나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그림자 길이 등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애월 펼쳐진 집'을 설계할 때도,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쉬러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어요. 어떤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총합이 건물이 되는 거죠. 공간에 대한 상상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유걸 선생님이 만들어내는 사선의 움직임에 대해 영향을 받으셨지만, 실제로 독립해서 만드신 건축물은 정갈한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요. 유걸 선생님의 영향과 자신의 관심사가 어떻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좋아하는 공간은 보이드(Void; 빈 공간)와 같은 입체적인 공간이에요. 크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이렇게도 갈 수 있고 저렇게도 갈 수 있는 동선과 시선이 교차하는 공간에 있을 때 살짝 흥분도 되고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작은 공간을 설계할 때도 정해진 동선을 만드는 것을 피하는 편이에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죠. 공간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자유롭게 내 의지로 선택해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또 선생님이 설계하신 공간은 빛으로 충만한 공간인데, 저는 어둑한 공간도 좋아해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내가 있는 곳이 어둑한데 밖이 밝은 공간감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림자에 관심이 많죠.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건물의 입면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든지,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면서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절을 좋아해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예요. 태양 고도가 옆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길어지는데, 여름의 햇빛 그림자는 진하지만 가을이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빛깔이 옅어져요. 그런 그림자와 빛의 변화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좋아해요.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죠. 선생님은 명료하고 가감 없이 표현하시는데, 저는 명료함에 매력을 느끼지만, 성격은 애매모호한 편이에요. 모든 것이 명료하고 확실한 것보다는 불확실성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설계를 하면서 마감(Deadline)이 있고 그에 맞춰 프로세스(Process)를 진행하려면 어느 시점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사실 불명료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직원들과 의사소통을 많이 해요. 저도 계속 변화하는 존재이고 생각도 변화하기 때문에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하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시도해 보는 것이 회사(서로 아키텍츠)와 저의 방식이에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유걸 선생님 사무실을 잠깐 닫으신 시기가 있었어요. 1997년에 사무실에 일이 거의 없어 닫아야겠다고 하셨어요. 미안하다고 하셨죠. 서혜림 선생님이 연락해 주셔서 1997년 9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일했어요. 그러다 신혼 때 잠깐 쉬고 있는데, 유걸 선생님이 미국에서 전화하셨어요.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Millennium Community Center)라는 일산의 큰 교회 프로젝트가 있다고요. 선생님이 서울에 직접 나올 수 없으니, 스케치를 팩스(Fax)로 보내주면 제가 CAD로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교회와 협의했어요. 그렇게 권문성 교수님 사무실에 책상을 하나 얻어 시작한 게 1999년 아이아크(IARC)의 전신이었죠.   아이아크에서 일하며 유걸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실무를 하다 보면 유걸 선생님이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흡수하게 되잖아요. 생각해 보면 그때는 오히려 독립해서 일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어요. 실장으로 일하다 아이아크에서 처음 파트너 제안을 받았을 때도 '해보지, 뭐. 나한테 그런 역량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품고 시작했어요. 박인수 소장님이 처음에 대표가 되셨고, 다음에 제가 파트너가 되었고 하태석 씨가 와서 새 파트너가 되었죠. 어느 날 젊은 의뢰인이 협의하고 갔는데, 전화로 회의 때 말하지 못한 불만을 얘기했어요. 유걸 선생님께 전달했더니 웃으시면서 앞으로 김정임 씨가 그분을 만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의뢰인을 따로 만나고 독립적으로 일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카이스트 프로젝트도 어느 날 선생님이 제안한 방향과 제가 다르게 얘기했는데, 선생님이 혼자 알아서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죠.   자신의 건축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 같네요. 배제대학교에 건물을 지을 때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는데, 선생님이 교회를 맡고 제가 유아교육센터(하워드 관)를 기획 설계해서 공모전에 당선되었어요. 그 두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건축은 선생님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땅의 형상도 달랐지만, 선생님의 교회는 정문에서 들어가면 경사진 언덕의 중심에 자리했어요. 교회의 용적(Volume)이 작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캠퍼스 안에서 중심 시설로 커 보이게 하려는 전략을 취하셨어요. 유아교육센터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물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들어가고 위에는 유아교육학과 강의실이 있었어요. 대지는 테니스장에 있던 곳이었는데, 서향이고 뒤에 작은 야산이 있었어요. 그래서 캠퍼스 안에서 뒷산의 실루엣이 가려지지 않도록, 건물을 납작 엎드린 형태로 설계했는데, 선생님과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또 다른 계기는 유엔 빌리지에 빌라(Villa)를 짓는 프로젝트였어요. 선생님은 오브제 같은 건물을 설계했어요. 빌라 시장은 선분양이 잘 안 되는데 개발사에서 선분양을 시도했다가 잘 안되어서 그 땅을 잘 아는 아이아크에 다시 설계를 의뢰했어요. 다만 유걸 선생님이 설계하지 않는 조건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대단하신 분이죠. 본인이 하시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유 선생님은 저에게 설계를 맡기셨어요. 쿨하게 설계 두 번 하고 설계비 두 번 받으니 좋다 하셨죠.   라테라스 한남(La Terrasse Hannam)인가요? 맞아요. 저는 그때 오브제로서의 건축이 아닌 땅과 하나로 어우러진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의사결정자인 부회장님이 여성이라 저에게 힘이 많이 실렸던 것 같아요. 임원들이나 현장 소장이 저를 꼭 회의에 오라고 했어요. 제가 있으면 대화가 잘 풀렸거든요. 여성 의뢰인이 많아져야 여성 건축가가 더 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성 의뢰인과 일을 많이 해봤는데, 확실히 대화가 달라요.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요? 기본적으로 쓰는 용어가 다른 것 같아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대화해도 서로 잘 알아듣고, 그 흐름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대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남성 의뢰인과 대화할 때는 프레젠테이션 구성을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정리해요. 반면, 여성 의뢰인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섞어가며 대화해요. 회의가 길어질 수 있지만 분위기가 좋고 잘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아크 사무실의 파트너 시스템은 당시 한국에서는 드문 사례였어요. 개별 건축가의 크레딧을 표기하고 기회를 준다는 게 인상적이었죠. 파트너 체제는 어떠셨나요? 당시에는 그런 예가 별로 없었죠. 다른 건축가분들도 그런 시스템 만들고 싶어서 물어오신 적도 있어요. 선생님은 권위적이지 않고 열린 분위기를 만들어주셨어요. 비판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털어버릴 수 있었죠. 파트너 시스템은 돈과 크레딧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재정은 한 주머니로 관리하고, 수주 시 인센티브(Incentive)를 주는 방식이었어요. 크레딧은 명확하게 하셨죠. 대형 사무실에서 본인이 디자인하지 않은 프로젝트인데도 대표이사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비판하셨어요. 건축가는 자신의 설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시스템이라고 하셨죠. 선생님은 항상 아이아크(IARC)라는 이름보다 ’유걸‘ 또는 ’김정임‘이라는 건축가의 이름이 가장 전면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매우 앞선 생각이라고 느꼈어요. 칭찬이든 비판이든 개인이 직접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건축가로서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나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나요? 어떤 점에서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어요. 지금도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려면 의뢰인을 직접 만나게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의뢰인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할만하다 싶은 사람에게 맡기죠. 그래서 김인철 소장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1~2년 차 직원이었던 저에게 의뢰인을 직접 만나게 하셨다는 것이요. 그리고 저 나름대로 파트너에 대한 경쟁심도 있고 더 좋은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운영되면 건강한 시스템이 되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파트너 시스템은 경영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아이아크에서 처음 크레딧을 달았던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배재대 유아교육센터인 하워드 관을 먼저하고 서울스퀘어를 하게 됐어요. 서울스퀘어는 지명공모전에 참여했는데, 정림건축과 컨소시엄으로 참여했어요. 제가 디자인 총괄이었고 선생님은 그 일에 완전히 빠지셨어요. 그때 제가 서른여섯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해요. 겁도 없이 해보겠다고 했어요. 다행히 정림 건축에서 실무적으로 든든하게 받쳐 주셔서 디자인 총괄을 하면서 인허가도 같이 뛰어다녔어요.   소장님에게 서울스퀘어는 상징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해요. 보통 젊은 건축가들은 작은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규모를 키워가는 방식으로 성장하잖아요. 그런데 소장님은 서울스퀘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금융사나 시행사처럼 거대 자본의 의뢰인을 상대로 하는 프로젝트라서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차이를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공공의 일이냐 민간의 일이냐는 분류는 있지만, 프로젝트 규모로 일을 나누는 생각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큰 것도 할 수 있고 작은 것도 할 수 있죠. 사실 뭘 몰라서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 의뢰인도 개인이나 학교 관계자, 장로님을 만나는 정도였어요.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해본 것도 유아교육센터가 처음이었고요.   서울스퀘어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이후, 일주일에 두 번씩 프레젠테이션했어요. 스케줄이 정말 빠듯했어요. 9월에 당선되었고, 그다음 해 3월부터 착공을 시작해야 했어요. 규모가 큰 프로젝트인데 그 안에 인허가까지 모두 받아야 했죠. 그런데 대수선 인허가가 틀어졌어요. 3월에 착공을 시작했는데, 계획이 바뀌면서 4월 25일에 발주처가 대회의실에서 대수선 포기 선언을 했어요. 대수선은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수선으로 전환한 거죠. 수선 범위 안에서는 미관지구라서 외관도 바꾸면 안 되고, 슬라브(Slab)를 뚫는 것도 안 되고, 마감재만 바꾸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구조 보강과 내진 설계를 하고, 기계 설비 등을 모두 바꾸어서 프라임 빌딩(Prime Building)을 목표로 했던 계획을 A급 임대 빌딩으로 전환하면서 프로젝트를 다시 설정했어요.   그때 너무 속상했어요. 아이아크가 이름을 걸고 하는데,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인테리어 콘셉트(Concept)와 전체 방향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자청했어요. 의뢰인들에게 "일단 수선 설계는 진행하고,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시면 프라임 빌딩의 이미지를 만들어갈 방법을 연구해 프레젠테이션하겠습니다."라고 했죠. 의뢰인들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어요.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허락받은 날이 6월 13일이었어요.   그때는 구체적인 디자인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건축법상 인허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접근할지를 설명했어요. 원래는 서울스퀘어 앞 대지 경계선까지 약 1.2m 정도의 폭이 남는데, 거기에 이중 표피(Double Skin)를 만드는 계획이었어요. 그 안에 블라인드(Blind)를 사선으로 설치하여 픽셀(Pixel)처럼 표현하는 거죠. '서울 캔버스(Canvas)'라는 개념으로 설계 공모할 때부터 있었어요. 처음에 1m x 1m x 1m 큐브의 대각선으로 블라인드를 설치해서, 이 블라인드가 펴졌다 접혔다 하면서 빛을 가리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큰 픽셀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 수 있는 개념이었어요. 그걸 실행할 수 없게 되어서, 이를 미디어 아트(Media art)로 전환하고 건물 전체에 아트워크(Artwork)를 적용하기로 했어요. 스위스 취리히의 '카우 컬처(Cow Culture)'라는 페스티벌을 참고했어요. 이 페스티벌은 도시의 활기를 보여주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예요. 반제품 소 조각을 시에서 신청자들에게 나눠주고, 신청자들이 각자 창의적으로 꾸미는 방식이었어요. 이런 사례를 통해 도시 전체에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 아트워크(Artwork)를 활용한 로비 디자인(conceptual lobby design) 3개를 개념적으로 디자인해서 보여줬어요. 결과적으로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날은 잊혀지지 않아요. 6월 13일 해가 질 무렵, 창문을 열고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성취감과 희열은 지금까지도 저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그런 성취감은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일이 아니고서는요. 그날은 정말 저에게 화양연화 같은 날이었어요.   그때쯤 의뢰인들은 저와 함께 서울시장, 부시장, 중구청장을 만나고, 대표님, 이사님, 정림의 실장님과 함께 똘똘 뭉쳐 다녔어요.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쌓였어요.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주처에서 "건축가가 하자는 대로 다 해라"라고 하셨고, 한미글로벌(Hanmi Global)의 CM(Construction Management) 단장님이신 양대룡 단장님은 저에게 "대표님은 디자인만 하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산이 정해져 있었고, 공사비를 내고 견적을 낼 시간도 없었어요. 디자인을 바로바로 해야 했고, 예산과 기간은 CM에서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해주셨어요. 의뢰인이 저에게 거의 모든 전권을 일임해 주셨던 것 같아요. 발주처에서 사람을 쓸 줄 알았던 거죠. 그리고 저는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며 최선을 다해 일을 해냈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 성장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부동산시장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건축적 가치를 이해시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언어로 설득했을지 궁금했어요. 서울스퀘어의 의뢰인은 대학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전공하신 분이었어요. 그분이 오히려 예술적인 것을 요구했어요. 로비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트렌디한(Trendy) 것은 금방 질린다고 하셨죠. 그렇다고 디자인이 너무 고리타분해도 안 된다고 하셨어요. 10년 뒤에도 괜찮은 디자인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해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어요. 로비의 경우 재료를 디테일하게 쓰지는 못했지만, 공간의 구조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의 무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체 사업비가 1조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큰 사업을 진두지휘해서 이끌어가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협의해야 할 주체도 많고요. 그 과정에서 얻으신 것과 겪은 어려움과 같은 경험이 궁금해요. 건축가는 코디네이터(coordinate) 하는 일이 반 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재미를 느낀 게 일산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예요. 6년 차에 PM(Project Manager)을 맡았는데, 그때도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미국에 있는 구조 엔지니어와 구조를 협업했는데, 교포인 고창범 씨였어요. 선생님도 저도 "왜 못하겠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모르면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 복잡한 일을 코디네이트 하는 것이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기저기서 얘기를 듣고 물어보면서 조정하는 과정에서 많이 신이 났어요. 서울스퀘어 프로젝트를 할 때도요. 소방부터 토목까지 다양한 분야의 컨설턴트(Consultant)가 많았는데, 그걸 진두지휘하며 조율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한 선배가 나중에 "너는 대기업에 가서 큰 프로젝트를 하면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대신 큰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는 디자인 완성도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죠.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일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스퀘어가 그렇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의뢰인이 저를 신뢰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의뢰인과 정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미국에서 온 회사라서 전문가를 쓰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아요. 일단 신뢰를 해주고 책임을 확실히 맡기는(assign responsibility) 거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다는 걸 아셨던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밤잠을 못 자면서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참 신기했어요. 그래서 좋은 의뢰인과 일한 경험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두려울 게 없으셨겠네요. 네, 이후 그런 규모의 프로젝트는 없었고 서로아키텍츠를 오픈한 다음 삼성전자 우면 R&D 디자인 센터를 설계할 때도 규모는 컸어요. 우리가 조율한 건 건축이 아니라 인테리어 쪽이긴 했지만, 그때도 협의 주체는 많았죠. 설계사인 삼우(Samoo Architects & Engineers)를 포함해서 삼우 CM(Construction Management), 삼성물산 등 엄청 많은 사람과 조율했어요.   아이아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서울스퀘어 외에 소장님에게 의미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명동 성당 공모전 설계예요. 유걸 선생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다른 의미로,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겠죠. 명동 성당이 높은 곳에 있어서, 선생님이 데크(deck)를 놓는 아이디어를 내셨어요. 그리고 그 레벨에서 데크 위까지 올라가는 방법을 제가 제안했어요. 그런 것들을 서로 토론하면서 어떤 게 좋을지 고민했죠. 약간 선생님과 경쟁하는 느낌으로 늘 일했던 것 같아요.   밀레니움 커뮤니티 센터나 구미동 빌라, 방일하우스라고 불렸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그 프로젝트는 선생님이 큰 방향을 잡아주셨고, 그다음부터는 제가 주도해서 했어요. 그때도 의뢰인을 직접 만났던 기억이 나요. 젊은 개발자(developer)였는데, 여러 오피스 프로젝트의 초석이 그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한번은 의뢰인과 가구를 구매해야 했는데, 의뢰인에게 제안했어요. 제가 가구를 고르면, 그 가구점을 통해 직접 구매하라고 했죠. 저는 시간에 대한 보수만 받겠다고 했어요. 그때 가구를 보러 다니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때 저는 그냥 실장이었는데, 오리지널(Original) 가구를 직접 고르고 사고 싶었거든요. 가구점, 인사동, 남대문시장 등을 다니며 앤틱(antique) 가구 등을 사서 현장에 날랐어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죠. 커튼부터 가구까지 혼자서 다 했어요.   인테리어의 중요한 부분을 경험하신 거네요. 맞아요.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물어물어 패브릭(fabric) 하시는 분을 소개받고 협의하면서 약 1억 정도의 예산으로 꾸몄는데, 해본 적 없는 저에게 맡긴 의뢰인도 재미있고 저도 웃겼죠. 서울스퀘어 프로젝트 이후 제일기획에서 저를 지명해서 로비 디자인(Lobby Design)을 했어요. 처음에는 로비로 시작했는데, 일정상 오피스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이지만 해보겠다고 했어요. 겁도 없이 아이아크에서 하던 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는데, 임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요. 제일기획에서는 프레젠테이션을 얼마나 잘하겠어요. 2주 줄 테니 다시 해오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 지적받으셨나요? 렌더링(Rendering)도 거칠고 PT의 포맷(Format)도 문제였어요. 제일기획은 그런 프레젠테이션을 하지 않거든요. 제일기획 직원 한 명이 주말에 와서 레이아웃(Layout)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줬어요. 그때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어요.   중요한 경험이네요. 소장님이 하셨던 많은 프로젝트가 기업이나 금융(financing) 분야 의뢰인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경제적 가치가 우선인 의뢰인들에게 건축 언어를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든 부분이잖아요. 맞아요, 상대하는 법을 배웠죠. 제일기획에 계신 분에게서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어요. 테이블(table)은 읽으라고 넣는 게 아니다. 한쪽에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고 테이블의 중요한 점만 요약해서 텍스트로 작성하는 것을 배웠어요. 이후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과 일할 때 그들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분들은 시간이 1분 1초가 아까운 분들이거든요. 프레젠테이션도 굉장히 요약해서 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의사결정 페이지(decision page)를 반드시 넣어서 "우리가 A, B, C, D에 대한 의사결정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에게 배우신 거네요. 삼단 논법(three-step logic) 같은 것, 모든 것은 3, 3, 3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많은 분으로부터 그런 것을 전수받았죠. 저희가 기업과 일할 때 디자인 프로세스 중 하나로 인터뷰를 꼭 해요. 반드시 임원과 1대1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인터뷰 내용은 의뢰한 회사에도 주지 않아요. 자기 회사에 대해 비판 의견도 있어서 절대 비밀로 하죠. 그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회사 운영이나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웠어요.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참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고요.   독립 후 오피스 프로젝트들이 이어졌는데, 물론 건축적인 해결도 필요하지만, 이 오피스 프로그램은 인테리어 기반이잖아요. 앞서 구미동 빌라에서 가구나 패브릭을 다뤄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직접 발로 뛰며 경험한 것들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케일의 변주도 큰데 그걸 어떻게 다루었을지 궁금해요.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아요. 패브릭(fabric)도 만져보고 의자의 역사도 공부하고, 그러다 보니 업계에 계신 분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야에는 여성이 많잖아요. 건축계에는 남자들이 많아서 수다 떨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약간 교집합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쉬운 건 내부 공간이 너무 중요한데, 건축에서는 인테리어를 낮춰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당시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건축가가 해선 안 되는 일 같은 느낌으로요. 그런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너무 중요하고, 또 재미있었어요.   그때는 인테리어를 장식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죠. 그래서 사실 두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인테리어로 시작하는 것이 저에게 불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 사람은 여자니까 인테리어 잘하지"라는 식으로 인식될 수 있어서, 저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아이아크(IAAC)에서 그런 일들을 하면서 이게 나의 강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건축가들이 인테리어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서울스퀘어(Seoul Square) 프로젝트를 할 때 건축 프레젠테이션과 인테리어 프레젠테이션을 하잖아요. 건축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우리는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렇게 하고, 이런 법규나 기술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한다"라고 의사결정자들을 금방 설득하죠. 그런데 인테리어에서는 "이러면 어떨까요? 저러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제안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의사결정자들이 고민하면서 감각과 취향의 문제로 들어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의사결정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들이 인테리어를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제가 원하는 것을 설득하고 나면 나머지 취향의 문제로 들어가도 오히려 상관이 없어요. 그런 경우에는 의뢰인이 좋은 대로 선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건축가들이 하면 마감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간의 구조를 바꾸고,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고, 사용 패턴(Pattern)을 바꾸는 문제로 접근할 수 있어요. 저는 그런 부분에 더 흥미가 있었죠. 그때는 약간 전략적 사고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인테리어'라고 하지 말고 '오피스 플래닝(Office Planning)'이라는 서비스 이름을 짓자고 했어요. 이건 새로운 서비스라서 고객들이 예산을 깎지 않더라고요.   좋은 전략이네요.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의뢰자인데 기업이 오피스에 돈을 투자할 때는 주로 돈을 많이 벌었을 때예요. 그래서 그들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죠. 이 비용은 감가상각(Depreciation)으로 5년 동안 분산된 비용으로 생각하니까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어요. 예를 들어 건축 설계 단가(Design Fee)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하는 건 시장의 단가를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피스 인테리어도 대충 얼마인지 감이 있으니까요. 비교 견적서도 받죠. 그런데 오피스 플래닝의 경우에는 비교 견적서가 없어요. 그래서 괜찮은 사업 모델이라고 판단했어요. 건축가도 이런 일을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제일기획 프로젝트를 할 때부터 갖고 있었죠.   간혹 건축가가 인테리어를 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어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건축을 다룰 때 놓치는 부분도 있거든요. 종종 그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의 몸에 대한 이해가 어렵거나 당장 공간이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소장님의 작업에서는 균형감이 느껴져요. 그런 경험이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성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집안일을 다 하잖아요. 공간을 직접 사용하고 청소를 하니까요. 유지 관리가 잘 되려면 어떤 점을 신경 써야 하는지 알게 돼요. 설계에 100%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기준으로 판단해요. 어떤 경우에는 디자인이 우선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유지 관리가 더 중요해요. 나중에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려면, 디자인이 덜 예쁘더라도 그런 선택을 하죠. 건축을 준공까지 가는 과정에서 판단의 구석구석에 제 생활 감각이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건축가가 생활의 감각이 체화되어 있어야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외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열었을 때 건물이 사랑받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건물 사용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도시적인 측면에서도 말씀을 하신 것 같아서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건물이 사랑받아야 오래 살아남는다고 생각해요. 오래 살아남는 건물은 친환경적 건축이죠. 멋진 건축물이라서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사용하기 좋고 관리가 잘 되는 건물이 오래 살아남는 거예요. 관리가 잘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사랑해야 가능하고, 관리하기 쉽다는 면도 있죠. 사랑받는 건물이란 어떤 건물일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건물을 지었을 때 주변이 더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만 좋은 게 아니라,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멀리서 보는 사람들, 동네 사람들에게도 좋은 건물이 되어야 사랑받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직원들에게도 항상 그걸 잊지 말고, 우리가 어떤 포인트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 생각하자고 이야기해요.   생활에 대한 감각이라는 표현도 너무 좋습니다. 유걸 선생님의 영향이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늘 집의 중심이 부엌이라고 하셨어요. 삼청동 시절에 선생님이 타일 패턴(Tile Pattern)을 디자인하셨던 게 기억나요. 코너에 욕조를 넣고 두 단 정도 올라가게 했는데, 타일이 복잡하게 시공됐어요. 선생님이 그 타일 패턴을 직접 디자인하시고 도면을 그리셨죠. 선생님은 집에서 가장 자랑할 곳이 화장실과 부엌이라고 하셨어요. 가장 비싼 기구가 들어가니까 그 공간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고요.   2012년에 서로아키텍츠를 설립하셨어요. 독립을 결정하게 된 어떤 계기나 동기가 있으셨나요? 유걸 선생님은 저에게 부모님 같은 큰 우산이었어요. 늘 거기에 기대고 뒷배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스스로 '나가서 혼자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라고 자문해 봤어요. 그게 없이도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나갈 때는 '몇 년 해보다가 아니면 말지'라는 심정이었어요.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제게 특별한 배경이나 훌륭한 네트워크가 없었거든요. 아이아크는 좋은 직원들 풀(Pool)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죠. 여기서 파트너로 나이 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독립을 안 해본 걸 후회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지인이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했던 일보다 안 했던 일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한다는 책의 한 구절을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결국 ‘한번 나가서 해보고 아니면 말지 뭐’ 이런 생각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고요. 3개월만 쉬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 쉬는 동안 한 사무실을 보는 순간 여기다 싶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독립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독립하면서 제일기획을 함께 했던 친구가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독립했는데, 5개의 제안서를 작업했어요. 가장 될 것 같던 제안은 안 되고 가장 안 될 것 같던 삼성 프로젝트가 성사되면서 사업이 시작되었어요.     진행 임진영 정리 윤솔희, 송주하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③ 으로 이어집니다.    
SPECIAL 건축, 포용과 조율의 커뮤니케이션, 건축가 김정임 ① 올해 주제는 <일상의 공간, 위로의 도시>입니다. 집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들, 일하는 사무실이나 학교,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도시 공간을 주목하려 하는데요. 김정임 소장님께서도 사무실, 학교, 사옥 등 프로젝트를 설계해 오시면서 일상의 공간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듯해요. 일상의 건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어요. 이슬아 작가의 『깨끗한 존경』이라는 인터뷰집이에요. CBS 방송국 정혜윤 PD와 인터뷰 후 이슬아 작가가 쓴 글에, 집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저녁 시간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나와요. 저도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돼요. 제가 지금 누리는 것 중에 스스로 한 것이 얼마나 되겠어요. 교육열 높은 부모님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아 잘 성장했고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만나면서 그 덕분에 살아온 거예요. 단지 운이 나빠서 그걸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래서 공공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을 더 확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 건축가도 중요하지만, 의사결정자도 중요해요. 어느 시대든 권력 집단은 늘 있으니까요.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항상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의사결정자에 따라 건축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일상의 건축이라고 할 때, 그 일상은 다수(majority)가 가진 일상이에요. 그걸 모두 똑같이 적용하는 건 불가능해도, 되도록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쪽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일상이라는 말 안에서도 차이가 큰 일상들이죠.   사무실, 학교, 공공시설들과 같은 일상의 건축은 오히려 방치되기 쉽고 기능만 따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소장님이 하셨던 프로젝트를 보면,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 보여요. 일상에서 차별화를 가져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서울스퀘어를 할 때도 그런 부분을 고민해서 ‘말하는 건축’, ‘반응하는 건축’을 생각했어요. 건축이 사람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울스퀘어를 대수선할 때도 기존 대우빌딩이 갖고 있는 일방향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을 바꾸고 싶었어요. 쌍방향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남성적이라면 여성적으로,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로 바꾸고 싶었어요. 건축이 갖고 있는 태도나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사실 건축에는 "너는 여기 들어오지 못한다"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있어요. 삼성전자 프로젝트에서도 보안 시설이었지만 모든 경계가 면이나 선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어요. 입구 게이트(Security Point)가 있을 때 시각적, 청각적, 신체적으로 경계가 입체적으로 겹치면(Overlap)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몸은 여기까지지만 시각적으로 더 멀리 볼 수 있고, 멀리 볼 수 없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시도해 봤어요. 그래서 외부 블라인드 재료인 PVC(Polyvinyl Chloride)를 사용해 갤러리 같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타공이 있는 부드러운 모기장 같은 재질로 소리는 들리게 했어요. 세미나도 할 수 있고, 문을 달아서 태그(Tag)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반투명하게 보이고 소리도 들리게 했어요.   소장님 유년 시절의 환경이 궁금해요. 나고 자란 곳은 서울인가요? 네, 수유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유리 산 밑에 주택 단지를 만들어 중산층이 살게 했어요.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그 동네 출신들을 많이 만났어요. 당시 수유동은 개발된 지역과 미개발 지역이 함께 있었어요. 어렸을 때는 마을 앞 공터에 있는 동그란 콘크리트 흄관에서 놀았죠. 4.19 묘지 입구 같은 곳에서 버찌를 따 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마을에 빨래터도 있었어요. 50년 전이니, 옛날이죠.   기억나는 환경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던 때 잠실 단지가 완공됐고, 수유리에 모여 살다가 강남 개발로 대이동이 있었어요. 베이비붐 세대 끝자락이라 초등학교가 17반이었고, 오전 오후 2부제로 한 반에 70~80명씩 있었어요. 밖에서 진력나게 놀았고, 엄마가 저녁 먹을 때 부르면 집에 들어갔어요.   살던 곳은 일반 주택이었나요? 주택이었고, 전세로 여러 번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국민주택에서도 살았고, 좁은 골목에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에서도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시절에는 노란색 초록색 *포니가 아니라 *브리사 택시 같은 것들이 다녔고, 길에 차도 거의 없었어요. 버스 외에는 1호선 전철만 있었죠. 아버지가 화가셨는데, 마침 벽제 장흥 쪽에 화가들이 예술인 마을을 만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그 근처 땅을 사서 집을 짓기 시작해서 2학년 때 이사 갔어요. 아래층은 살림집, 2층은 아버지 화실이었어요. 그 집에서 1999년에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포니 택시: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포니는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 *브리사 택시: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한 브리사   아버지의 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진으로는 웅장해 보이기도 하고 제법 잘 지은 집처럼 보여요.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셨기 때문에 로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 집을 지었을 때 유럽의 성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그때 주변은 다 논바닥이어서 지금은 걸어가면 꽤 먼 거리였는데도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집이 보였어요. 그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 논밭 사이로 걸어가서 집에 갔어요. 그렇게 집을 지은 후로 그 동네가 조금씩 발전했어요.   소장님에게 그 집이 큰 의미가 있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 땅을 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옆에 500년 된 경기도 지정 보호수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정 보호수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지을 수도 없고, 나중에 팔더라도 가치가 떨어졌을 땅인데, 아버지는 오히려 좋게 보셨어요. 은행나무 주변 몇 미터 내에서는 불이 잘 나지 않고, 좋은 기운이 있다고요. 은행나무로 약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그 집에 살았기 때문에 추억이 유난히 많아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종교나 여러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특히 중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밤이 있어요. 모두가 잠든 시간, 공부를 하다가 밤에 혼자 밖에 나갔을 때 반딧불이 있었고 은하수가 보였고 별이 빛났어요. 마당에 나가서 서 있었는데, 은행나무와 제가 딱 마주하게 되었어요. 마음속이 충만한 느낌이었어요. 그때는 그 느낌을 표현할 단어를 몰랐는데, 우주와 연결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나이에 왜 그런 걸 느꼈을까 싶기도 해요. 그날 밤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불자(Natural Born Buddhist)인 것 같아요. 종교는 없지만, 불교적인 교리가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저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불교를 깊게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해보고 싶어요. 과학 서적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교양서 수준에서 현대 물리학이 불교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걸 느껴요. 우주의 탄생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순환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과학적 지식 없이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나이 때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 시절의 섬세한 감성이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을 것 같아요.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 시절 저희 오빠는 대학교 2학년이었어요. 1982년, 광주 사태 직후였죠. 오빠는 철학책을 많이 읽었고, 저는 어린 마음에 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어요. 그때 오빠가 "정임아, 너 같은 생각을 한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있었어.”라고 했죠. 오빠는 우주의 모든 것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해 줬지만, 그때부터 스피노자가 뇌리에 깊이 남았어요. 그래서 저는 건축이라는 특정 직업을 좋아해서 파고들기보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태어나는지 궁금증을 갖고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요즘은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요. 그래서 건축에도 그런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네덜란드의 합리주의 철학자로, 그의 저서 "윤리학(Ethica)"에서 신과 자연, 인간의 자유와 윤리적 삶에 대한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했습니다.   최근 아버님의 전시를 열기도 하셨는데요. 아버님의 작품 세계와 영향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어느 집이든 가정사가 있겠지만, 저는 참 행운아였어요. 아이들의 교육은 아빠가 얼마나 개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엄마들은 기본적으로 다 열정적이니까요. 운이 좋았던 것은 아버지가 지적 욕구가 엄청나셨고, 90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과 신문에서 본 어려운 외국 이름까지 모두 기억하셨어요. 타고 나신 성향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셔서 집에 계속 계셨고 저희도 그게 나름 불만이었어요. 아버지가 엄격하셔서 모든 것을 예의 바르게 해야 했고 규율이 엄격했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그게 엄청난 것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아침 식사 중에 아버지는 책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처럼 기억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듣기 싫고 빨리 먹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중간에 끊고 나가면 아버지는 버릇없다고 혼을 내셨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들이 무의식중에 저에게 깊이 박혔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이기도 했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쯤 별을 보며 "저 별은 지금 없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저 별은 이미 폭발해서 없어졌을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런 이야기가 세상의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많이 심어주었어요. 얼마 전 제주도에 갔다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멕시코(Mexico) 소설을 읽었어요. *라우라 에스키벨(Laura Esquivel)이 쓴 책인데, 20대에 영화를 먼저 봤어요. 요리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주인공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만든 요리를 먹으면 사람들이 울면서 토하기도 하고, 사랑이 가득 찬 요리를 먹으면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요리를 구성하는 작은 물질들이 만드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맛이라는 게 과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을 거라고요.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가 분자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요. 저는 그런 걸 믿어요.   최근에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생기론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이라는 이론을 만드신 분이에요. 생기론적 유물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거예요. 일본 과학자가 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라는 책도 바이러스가 생명체인지 무생물인지 경계가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저는 이런 물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 건축도 ‘물질의 재배치’라고 생각해요. 지구상의 모든 물질이 계속 돌고 도는 거잖아요. 제인 베넷의 책을 읽고 건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죠.   * 라우라 에스키벨(Laura Esquivel): 멕시코의 유명한 작가. 그녀는 1989년에 출간된 소설 『Como agua para chocolate』 (한국어 제목: 『초콜릿처럼 뜨거운 사랑』)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멕시코 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와 마법적 사실주의가 결합한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물을 오브제(Object)로 보지 않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대상으로 보시는 거군요. 맞아요. 우리는 시각화(Visualize)된 사람들이잖아요. 사실 물리학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으로 그 이론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해요. 최근에 비타민(Vitamin) 광고 중에 사람 모양을 만들어진 빨갛고 노란 입자(Particle)가 걸어 다니는 광고를 봤어요. 저는 그게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아요. 그 입자들 사이에 경계가 있겠나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물을 볼 때 경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디든지 다 통해서 다니는 거죠. 우리가 사람과 손을 잡을 때도 분명히 오가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실제로 초미세먼지가 몸을 침투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 게 재미있어요. 너와 나도 경계가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물질은 조밀했다가 성글었다가 다시 조밀해지는 것일 뿐, 결국 모든 것이 다 통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그런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도 경계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읽었던 과학책 중 하나에 멋진 문구가 있었는데, 결국 제 몸은 원자(Atom)와 분자(Molecule)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이들이 한 번도 이런 모양으로 모여 있었던 적은 없다는 거예요. 죽음은 해체되었다가 다시 누군가에게로 가서 다른 형태로 모이는 것이고, 이 모양으로 모였던 것은 처음이라는 거죠. 모였다가 해체되었다를 반복할 뿐이고요.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작가의 『다정한 서술자』라는 책이 있어요. 그분의 글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몸 중에 인간 세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43%밖에 안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라는 거죠. 나머지는 미생물 같은 것들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몸은 어떻게 보면 공화국 같은 거라고 해요.   그래서 나라는 자아가 단일체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이야기와 만나는 것 같아요. 부처는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싶어요. 근대에서 말하는 자아라는 게 사실은 오해된 개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냥 물질의 조합일 뿐인 것 같아요. 저는 유물론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요즘은 물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정림학생건축상 심사위원을 하면서 지구의 환경이나 친환경에 대해 다루게 되었어요. 건축가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물질의 재배치와 순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는 지구상의 물질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생태적 태도죠. 지구상의 물질 총합을 생각했을 때 총합은 늘 같은 거거든요. 그 안에서 물질이 형상과 성질을 바꾸면서 순환하는 체계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부수고 사용하는 것들도 순환 체계 안에서 파악해야 해요. 친환경 건축의 방향 중에 이런 기본 개념이 많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도 물질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죠. 건축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어렵지만, 건축산업에서도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보여요. 건축에서 건축 폐기물 처리비를 높이면 사람들이 새로 짓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할 거예요. 정치적으로 그런 것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정치와 얽히고설켜 가는 문제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지구에서는 그런 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아요. 그래서 리모델링(Remodeling) 설계가 들어오면 마음이 편해요. 지하를 깊게 파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요. 건축과 분리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물질에 관심을 가지면서 노력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요. 의뢰인이 오면 리모델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제안하고요.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아버님 덕분에 공간지를 많이 접하셨다고 하셨는데, 건축과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건축과는 정보 없이 선택하기 어려운 분야일 텐데 어떠셨나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미술을 시키고 싶어 하셨지만, 제가 흥미가 없었어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이과를 가는 것을 보고 이과를 선택했어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간지를 보면서 건축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기뻐하셔서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어요.   1980년대 교육 환경에서 연세대학교는 공학 분야가 강했는데, 건축과에 들어갔을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토목공학과에는 여자가 없었지만, 건축과에는 94명 중 14명이 여자였어요. 연세대가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였고, 건축과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제가 1학년 때는 1987년이었어요. 수업이 거의 없었고, 민주화 운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학교 안에는 '백골단'이라고 부르는 사복경찰들이 있었고, 연대에서 전대협 모임을 했기 때문에 교문을 막고 학생증 검사를 했어요. '페퍼 포그(Pepper Fog)'나 수류탄도 쏘는 상황이었어요.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을 새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1학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학년 때 수업보다는 민선주 선생님이 오셔서 조형 실기를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나요. 또 당시 아이엠 페이(I.M. Pei) 사무실에 계셨던 선생님이 기억에 남아요. 앞가르마에 단발머리, 흰 블라우스와 검정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으셨는데, 정말 멋있었어요. 거의 우상이었죠. 1학년 겨울방학 때 '형'이라는 서클(Club)에 가입했어요. 조민석, 김광수, 이소진, 조재원, 신혜원 등이 그 서클 출신이에요. 서클은 한 학년에 10명 안팎의 회원이 있었고, 2, 3, 4학년이 함께 활동했어요. 매주 두 번 모여서 과제를 하고, 역사책을 읽고 토론했어요. 서클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당시 교육 환경이 설계 위주의 커리큘럼(Curriculum)을 잘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서클을 통해 더 많이 배우셨을 것 같아요. 그때는 2, 3, 4학년이 제도판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설계를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홍대 앞 차고 같은 곳을 개조해 작업실로 사용했어요. 선배들이 작업실을 물려주고, 후배들이 돕는 시스템이었죠. 강사 선생님들이 거의 없었고, 정 교수님들이 94명을 3개 스튜디오(Studio)로 나누어 가르쳤어요. 수업보다는 작업실에서 선배들과 함께 모형을 만들고 배우는 시간이 많았어요.   당시 어떤 건축의 흐름을 접하고 흡수하셨나요? 그때는 책 아저씨들이 가져오는 해적판 A+U(A+U, Architecture and Urbanism)를 보면서 접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프랭크 게리(Frank Gehry)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저는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A+U의 해적판에서 에로 사리넨에 관한 글을 다 읽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책은 지금도 찾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에로 사리넨의 도시가 나오는 영화 '콜럼버스(Columbus)'도 정말 좋았어요.   * 유명한 핀란드계 미국인 건축가다. 그는 20세기 중반의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유기적이고 조각적인 형태의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뉴욕의 TWA 터미널,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그리고 예일 대학교의 아이스하키 경기장인 인걸스 링크 등이 있다.   에로 사리넨의 어떤 면이 좋으셨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MIT 채플(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Chapel)을 동그랗게 설계한 작품이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다양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매우 시적이었고요. 특히 농기계 회사 프로젝트에서 산화 강판(Corten steel)을 사용하여 녹슨 느낌을 준 입면 디자인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디자인은 농기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건축이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와 연결된 생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또 산화 강판을 사용한 입면 디자인이 현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와 비슷한 개념으로 새롭게 느껴졌어요. 워싱턴에 있는 조각 같은 오브제(Object)도 기억에 남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있어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관련된 기념비도 수직적이지 않고 독창적인 디자인이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아버지인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도 핀란드에서 이민 온 건축가였는데 대를 이어 다양한 건축 아이디어를 펼쳐 보이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부정과 한발 늦게 한국에 도착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도입되던 시기였어요. 실체를 명확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고 교육 환경도 좋지 않아 정보에 대한 갈증이 컸을 것 같아요. 그 시기는 제가 지적 욕구가 폭발하던 때였어요. 프랭크 게리(Frank Gehry),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드로잉,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구조주의(Structuralism),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책을 읽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도 읽었어요. 선배들도 그런 책을 읽게 했고, 이해하지 못해도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 시기에는 지적 허영이 필요했고,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이 너무 좋았어요. 가장 좋았던 것은 제 주변에 재능 있고 발랄하며 멋진 분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던 것 같아요.   4년을 채우고 바로 졸업하셨나요? 그렇죠, 그때는 군대가 아니면 휴학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대학원을 갔던 것 같아요. 공부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졸업 후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빡빡해서 학창 시절을 더 누리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건축 전문대학원이 없었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은 이론과 논문을 쓰는 곳이었어요. 저는 건축 역사 이론 연구실에서 김성우 교수님의 수요 세미나에 참여했어요. 좋은 건축가나 이론가분들을 모셔서 세미나를 했고, 그때 배형민 교수님을 처음 뵈었어요. 미국에서 막 오셨을 때였고, 저는 팬이 되었죠.   그때 강의를 하셨나요? 처음에는 배형민 교수님이 세미나에 오셔서 강의하셨고, 그 후 한 학기 동안 김성우 교수님과 함께 배형민 교수님, 임석재 교수님이 번갈아 가며 건축 역사를 강의하셨어요. 그때 임석재 교수님은 귀국하신 직후였고, 강의 전에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칠판에 연보를 그리며 판서를 하셨죠. 반면에 배형민 교수님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슬라이드를 보여주시며 야사(野史)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서 매번 배형민 교수님 오시기 전에 음료를 사서 교탁 앞에 놓아두곤 했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선생님, 이거 정임이가 사다 놓은 거예요."라고 말해서 부끄러워하곤 했죠.   이론적으로 갈증을 느끼던 시절에 김성우 교수님과 배형민 교수님, 임석재 교수님의 강연은 정말 강렬한 자극이 되었겠네요. 그때 강의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톰 울프(Tom Wolfe)라는 소설가가 쓴 『프롬 바우하우스 투 아워하우스(From Bauhaus to Our House)』라는 책이에요. 번역서는 『바우하우스에서 현대 건축까지』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은 야사와 뒷이야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그로피우스가 유럽에서 피난 와서 하버드 학장을 할 때 프랭크 게리와 만났던 이야기나, 그로피우스의 별명이 '화이트 프린스'였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에서 '촌 농부' 같은 이미지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 교수님이 케네스 프램튼 책도 읽히셔서 읽었죠. 그때 그 책을 읽지 않았으면 언제 읽었을까 싶어요. 사회에 나와서는 읽을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요.   김인철 소장님의 아르키움에서 첫 실무를 하셨어요. 아르키움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대학교 3학년 때 건축사협회 공모전에서 3등 상을 받았어요. 시상식에 갔는데, 김인철 소장님이 건축상을 받으러 오셨어요. 그때 일본 갤러리 마에서 하는 김인철, 김기석, 조성룡 선생님의 전시 포스터를 봤어요. 한국 건축가가 일본에서 전시하는 게 처음이라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졸업 후에 그분 사무실에 들어가고 싶었죠. 지원해서 들어갔는데, 김인철 소장님이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계획을 맡겨주시고, 경신교회 의뢰인(Client)을 소개해 주셨어요. 신입사원도 계획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선배들이 건축물이 지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음에 소장님 방에 가서 스케치(Sketch)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1~2년 차였는데, 김 소장님이 저에게 큰일을 맡기신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1~2년 차에 직접 설계한다는 게 겁이 나진 않으셨나요? 오히려 요즘 겁이 많아진 것 같아요. 서울스퀘어(Seoul Square)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정말 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를 그렇게 키우셨나 봐요.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일이든 처음 하는 것에 대해 겁이 없었어요. 인테리어를 해본 적이 없어도 '뭐든지 다 처음이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걱정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걸 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도 없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그런 성향이 옛날보다 없어지는 게 아쉬워요.   첫 시작부터 열린 기회를 많이 받으셨네요. 저는 지금까지 함께 일했던 소장님 세 분께 정말 감사해요. 좋은 분들과 일할 수 있었고, 저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던 분들과 함께해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김인철 소장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신다는 거예요. 용답동 사무실에서 선생님 방에 올라갔더니 컴퓨터를 켜놓고 뭔가를 하고 계셨어요. "뭘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3D를 배우고 계신 거예요. 배우려 해보는데 재밌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3D 맥스(3D Max) 같은 거였을 거예요. 계속 새로운 걸 습득하고 본인이 직접 하시려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1989년 해외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봇물 터지듯 유학을 가던 시기였어요. 유학을 선택하지 않고 실무를 선택했을 때, 아쉬움이나 혹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당연히 갈증이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생활비와 학비를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생각은 약간 콤플렉스(Complex)가 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하지만, 주변에 저만 빼고 모두 유학을 다녀온 것 같아요. 건축 교육이 예전보다 좋아졌고, 요즘 젊은 건축가 중에는 유학을 가지 않은 분들도 많아요. 한국의 교육 수준이 그만큼 향상되었기 때문이에요. 외국 생활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멀리 떨어져서 우리나라를 보면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얼마 전 나은중 소장님이 준 책을 보다가, 용어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는 수업 이야기를 보고 부러웠어요. 교육적으로 외국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Liberal) 부분이 있고,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런 교육을 받았다면 사고가 더 유연했을 것 같아요.    반대로 현장에서 실무로 체득한 경험이 김정임 소장님의 강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르키움에서 2년 정도 일하신 건가요? 1년 반 동안 아르키움에 있다가 6개월 대학원 준비를 했고,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 바로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어요. 아르키움에 있었던 시기는 4.3 그룹의 태동기였어요. 그래서 2층 소장님 방 앞 긴 테이블에 늘 4.3 그룹 모임이 열렸어요. 저는 그런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장님이 허락해 주셔서 4.3 그룹 모임이 있을 때 맨 뒤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계속 듣곤 했어요. 그때부터 승효상 소장님 같은 분들이 저를 얼굴로는 알고 계셨던 거죠. 한번은 조성룡 소장님 사무실 오프닝에서 김영섭 소장님이 조언해 주셨는데, 40대가 될 때까지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40대가 되면 희소가치가 있어서 잘 풀린다고요. 그 이야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지금도 젊은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줘요. 40대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4.3그룹 소장님들과 접점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스스로 갈증을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4.3그룹 세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에게 건축은 신앙에 가까웠지만, 소장님은 건축을 신화로 바라보지 않는데 어떠셨나요? 맞아요. 건축은 절대 목적물이 아니고, 수단일 뿐이에요. 직업에서 얻는 어려움과 멋짐은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어서 그 어려움과 멋짐을 알고 있는 것뿐이지, 다른 직업도 똑같은 어려움과 멋짐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가들이 유달리 직업적 자부심이 강한 것에는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계 안에 갇혀서 생각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불리한 점도 있어요. 저는 한 번도 '덕질(Fandom)‘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건축이 유일한 덕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 깊게 빠져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 성향이니까 받아들이지만, 때로는 아쉬울 때도 있어요.   반대로 얘기하면, 자기 세계에 대한 객관화가 잘 된다는 의미 같아요. 그렇죠. 저에 대한 객관화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에요. 기본적으로 주변과 반대 입장을 생각해 보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건축에 대해 유난 떠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아요.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게 스스로 신기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태도가 오히려 지속할 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 것 같아요. 일을 하면서 상처도 덜 받았던 것 같아요. 상처받는 일이 있었을 때도 털고 계속할 수 있었고 자기 회복력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보통 학창 시절에 건축이 전부인 것처럼 배우다가 현실에 절망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건축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진지하면 현실을 이겨내기 힘들어져요. 저는 절망을 덜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깊이 파고들고 스타성 있는 것도 필요하고, 건축의 가치를 말씀해 주시는 것도 필요해요. 건축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든 일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저 같은 건축가도 있다고 생각해요.   진행 임진영 정리 윤솔희, 송주하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② 로 이어집니다.   
COLLABORATION 테크캡슐 테크캡슐   테크캡슐은 공간 정보 기반 미디어 콘텐츠 창작 그룹이다.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이 협업하여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록, 연구, 콘텐츠를 하나의 캡슐에 담아 제공한다. 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간 자산을 디지털 기법으로 축적하고 유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단순한 공간 기록과 재현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간적 과제를 발굴하고 장소의 맥락을 깊이 연구하여 입체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새로운 공간 수요와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술의 혁신을 창출하는 순환 가치를 실천한다. 오픈하우스서울과는 지리적, 시간적, 감각적 영역을 확장하고 재구성하여 우리 도시 환경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탐험하고자 한다.  테크캡슐 웹사이트 techcapsule.kr 테크캡슐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TechCapsuleKR
COLLABORATION 정림건축문화재단 정림건축문화재단 정림건축문화재단은 한국 건축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과 건축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건축문화의 균형 있는 매개자로서 건축·문화·예술계와 폭넓게 협력하며 미디어, 교육, 공동체주거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인 건축가 초대석 <등장하는 건축가들>, 중견 건축가 심층 인터뷰 <중간점검>, 공공건축 당선작의 실현과 운영을 살피는 <당선작들 안녕하십니까>, 건축 분야 북토크 프로그램 <원맨원북> 등의 상설 포럼을 비롯하여, ‘건축을 통한 교육’이라는 모토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건축적 사고를 돕는 <건축학교>와 건축 전시 실무를 교육하는 <건축큐레이팅워크숍>, 근미래 한국의 도시와 건축을 대학생들과 함께 그려보는 <정림학생건축상>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산되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건축신문>으로 기록하여 공유하고 있습니다.   재단 홈페이지  http://junglim.org 건축신문  http://architecture-newspaper.com 건축학교  http://archschool.org 포럼시리즈  http://forumnforum.com 정림학생건축상  http://junglimaward.com
SPECIAL 양천공원 책쉼터, 김정임 처음 해야 할 일은 공원 안에 집을 앉힐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야외공연장 무대 구조물을 개조하여 어린이놀이터로 만든 장소 옆에 자리를 잡아 비슷한 기능을 묶어주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집을 앉힐 터에는 듬성듬성 몇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수형이 예쁜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나무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계획을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 예전부터 그곳에 있는 것들의 존재를 다 수용하며 집을 앉히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감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나무 그늘 아래 둘러앉을 수 있는 외부공간을 만들고 서쪽의 놀이터와 동쪽 잔디밭의 둥근 선형을 그대로 가져와 집을 앉혔다. 먼저 있었던 존재들 사이를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가 집이 앉은 모양새이다.  부지에 있던 1.2m 정도의 레벨 차이는 내부에서 그대로 경사로로 연결하여 아래 레벨은 카페와 어우러져 차 한잔하면서 책 읽는 공간으로, 위 레벨에는 어린이를 위한 도서를 두어 조용하고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또한, 레벨 차를 이용해 몇 단의 계단식 좌석을 만들었는데 그 앞쪽의 잔디밭을 향한 외벽은 폴딩 도어를 설치해 계절 좋은 날은 열어서 작은 음악회나 영화상영 등 공원과 연계된 다양한 이벤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도서관을 설계할 때 예전에는 서재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거실 같은 분위기의 공간으로 만드는 추세이다. 양천공원 책쉼터도 개방된 하나의 공간으로 계획하여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실 같은 분위기가 되길 바라며 계획하였다. 공간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느낌을 주기 위해 구조 부재를 별도로 배치하지 않고 중앙의 커피스탠드와 원형 보이드를 이용하였다. 커피스탠드는 지붕 전체 하중을 지지하는 중심 역할을 하도록 콘크리트 구조물로 계획하고, 두 개의 원형 보이드 경계에는 책장과 결합한 스틸 플레이트를 설치하여 끝부분의 처짐을 받게 하였다. 140평 규모의 단층 건물은 녹음이 우거졌을 때나 잎을 떨군 후 짙은 색의 나뭇가지들이 돋보일 수 있는 배경이 되도록 아이보리색 벽돌로 마감하였다. 놀이터와 책쉼터 사이에는 두께 9mm 철판을 가느다란 원형 기둥으로 받친 간결한 형태의 캐노피를 만들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그리고 함께 온 어른들이 쉴 수 있는 그늘 공간을 두었다. 건축물과 주변 환경이 엮여서 하나의 장소로서 기능하며 다양한 사용풍경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공원과 도서관은 참 잘 어울린다. 개관 후 거기서 일하시는 사서 선생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이 참 좋다는 얘길 해주셨다. 생각해보니 궂은날 건물 안의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며 공원을 바라보는 기분이 꽤 괜찮을 것 같다. 서울시에서는 혹한기나 혹서기에도 공원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공원 안에 쉼터 만들기 사업을 계속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생활 SOC 사업이고 공간복지를 구현하는 일인데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동네에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많이 있다는 건 모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고 이를 설계할 기회를 얻게 된 건 건축가에게도 무척 보람된 일이었다.  글 김정임 사진 노경 서로아키텍츠 seoroarchitects.com/ 양천공원 책쉼터 장소 서울시 양천구 목동동로 111 양천공원 책쉼터 개관 화-일 10:00 ~ 19:00 휴관 월요일 및 공휴일 이용요금 무료  문의 010-9809-0596 홈페이지 ycpark.modoo.at  
SPECIAL 넘은들공원 책쉼터, 김정임 넘은들공원은 양천구 신정동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넘은들은 넓은 들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게 빼곡하게 들어찬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작은 동산같이 오뚝하게 놓여있다. 농구코트, 몇 가지 운동기구, 파고라 등 최소의 시설만이 있는 공원은 어둡고 노후화되어 지역주민들 이용이 저조하였다고 한다. 양천구에서는 '건강한 동네 숲'이라는 테마로 수목의 식생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편안한 산책로 조성, 운동공간 개선 사업 등과 함께 화장실과 쉼터가 결합한 건축물을 짓기로 하고 우리에게 설계의뢰를 하였다.  처음 대지를 방문했을 때 방치되어 오히려 야생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넓지 않은 공원이기에 최대한 지금의 자연 숲 같은 느낌을 살리고 건축물은 진입부 계단 옆 경사지에 최소화하여 짓기로 하였다. 몇 개의 대안을 검토한 후 농구코트 레벨에 화장실을 두고 기존 계단을 올라간 레벨에 쉼터와 관리실을 배치하였다. 볼륨이 작아 보이도록 두 개의 기능을 엇갈려 배치하고 박공지붕을 씌워 숲속의 오두막집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사방에 창을 두어 낮에는 책쉼터 내부로 공원의 풍경이 들어오게 하고 저녁에는 은은한 빛이 공원을 밝혀주도록 계획하여 따뜻하게 주위를 밝히는 커다란 등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넘은들공원 책쉼터는 전체면적이 40평, 책쉼터 면적은 약 70㎡(21평)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건축물이지만 개관 후 2,000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지역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참여와 사랑을 끌어내고 있다. 설계과정에서 서울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와 박새가 서식하고 있다는 이야길 듣고 건축물을 주변부에 앉히기로 하였는데, 부디 그들이 그 맘을 알아주어 계속 살고 있길 바란다.  글 김정임 사진 진효숙 서로아키텍츠 seoroarchitects.com/ 넘은들공원 책쉼터 주소 서울 양천구 남부순환로 634 개관 화-일 10:00 ~ 19:00 휴관 월요일, 공휴일 웹사이트 cafe.naver.com/ycbookcafe
SPECIAL 살롱 드 파리, 박정환, 송상헌 파리공원은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된 공원으로, 외부 공간에 최초로 조형성을 중시한 조경디자인이 적용된 도시 근린공원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시설의 노후화와 주민 요구에 의한 부분 변경으로 인해 기념적인 의미는 퇴색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퇴색된 공원의 기념적 의미를 되살리고, 상징성과 일상성이 공존하는 도심 속 문화 공간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된 살롱 드 파리는 근대적 디자인과 조경사의 가치를 건축 언어로 완성하여, 건물을 형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미니멀한 디자인 언어를 바탕으로 주변과 어울리게 하고자 했다. 파리공원의 기존 축과 태극을 상징하는 중첩된 원형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배치를 하고,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어 소통할 수 있도록 가벼운 구조와 투명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이는 파리공원의 자연경관과 이벤트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융통성과 확장성을 갖게 하여 프로그램의 유연성에 대응하는 것으로, 주민들의 휴식 공간만이 아닌 카페, 전시, 교육 등이 가능한 다목적 주민 커뮤니티 공간의 역할을 위한 것이다.   잔디마당 방향으로는 피봇 도어를 설치하여 개방감 있는 입면을 계획하고, 필요에 따라 피봇 도어를 열어 확장 가능하게 함으로서 다양한 행사와 연계되는 유기적 공간으로 계획하였다.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테라스 공간은 목재 루버를 활용한 캐노피를 통해 정제된 빛을 받아들이게 되며, 자연 요소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대지의 레벨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벽은 건축 요소의 일부로 작용하며, 캐노피 아래 벤치를 두어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내부 공간은 가구 배치 변화를 통해 전시, 카페, 교육 등의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또한, 천장에 레일링 시스템을 도입하여 다양한 형태의 전시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살롱 드 파리는 문화체험과 전시, 주민들의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가변형 공간으로 소통과 교류의 장이 될 것이며, 주민들과 지나온 시간을 넘어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글 박정환, 송상헌 사진 신경섭  심플렉스건축사사무소 http://simplexarchitecture.com 살롱 드 파리 주소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동로 363 개관 화 - 일 10:00~19:00  휴관 월요일, 법정 공휴일 이용요금 무료  문의 010-9688-0596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parispark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