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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ㅣ 수졸당 (守拙堂), 승효상
1986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수근 선생께서 남기신 말씀으로 나는 공간설계사무소를 3년간 이끈 적이 있다. 선생이 부재에도 선생의 건축을 계속할 수 있다며 분투하였지만 늘 허무할 수밖에 없었고 끝내 선생이 남기신 울타리에서 나오고 만 때가 1989년 말이었다. 15년간 선생의 문하에서 익힌 건축의 방법은 너무도 내게 익숙한 것이었어도 그걸 확인해줄 이가 없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내 건축을 찾겠다고 독립한 나는 내 건축을 전혀 몰랐고 심지어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만큼 15년은 김수근건축에 철저히 동화되어 내 신체가 되기까지 한 족쇄였지 않았을까?
내 건축을 찾기까지 아득한 방황과 결렬한 자아 부정 등의 과정을 통해 신음하듯 뱉은 게 ‘빈자의 미학’이라는 용어였다. 선언이라고 해도 된다. 그때까지 내 모든 지난날들을 용광로에 넣어 녹여 겨우 추출한 단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업한 게 수졸당이다.
그 이후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물론 대단히 많은 작업을 그사이에 마쳤으며 여전히 건축의 현장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그간의 세월은 실패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과도하게 말하면 내가 작업한 건축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기억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작업이 이 수졸당이다. 내가 지금 얼마만큼 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하며, 그럴 정도로 수졸당은 내 건축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1993년에 완공되어 28년간 삶의 때를 묻힌 수졸당이 처음으로 대청소를 하여 원형을 다시 찾았다. 그 사이에 지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라 주변은 죄다 상업용의 시설로 변했지만, 이 집의 주인인 유홍준 교수는 그 세찬 상업주의에 저항하였고 이제는 이른바 ‘현대의 유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믿기로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을 이 땅 위에 서서 우리가 살았던 기억을 이으며 전하게 된다. 수졸당은 그래서 이미 역사며 문화의 한 부분일 거다.
아랫글은 수졸당을 지은 직후인 1993년에 쓴 것이다.
오랜 도시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수없이 많은 건축물이 이 땅을 빼곡히 메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건축이 여전히 세계의 건축과 괴리를 느끼게 하고 있음과 한국문화의 중심에서도 멀리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른 몇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 구조를 지배한 잘못된 정치행태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더불어 균형 잡히지 못한 부의 축적에만 몰두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가치가 왜곡된 그런 사회에서 빚어지는 건축의 모습은, 더 높이 만, 더 크게만, 더욱 위엄 있게 만 보이기 위한 것들에 더욱 큰 관심을 두게 하였고, 그 결과 그 속에서의 삶의 의미는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갑자기 축적된 부가 헛된 장식과 구호에 쏟아 부어진 결과, 거리를 메운 건축은 찬란하되 껍데기뿐이었고 화려하되 졸부의 헛된 욕망을 나타내는데 만 골몰하였음에 우리의 삶은 자꾸만 일그러지고 또한 박제될 그러한 위험에 처해 있음도 아울러 직시해야 한다.
우리네 조선의 선비들이 빚은 도시와 건축은 어떻게 저토록 높은 격조와 품위를 가졌었나. 그것의 바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욕정보다는 이성에 더욱 큰 가치를 둔 청빈의 정신이었을 터이며, 그의 위에선 선비정신은 조선 500년을 지탱케 하며 우리의 뿌리가 되어 있음을 다시 기억해 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자기의 땅보다는 남의 것을 더 채워주려 하고, 더 작은 땅을 점유하려 하며 그것도 남과 같이 쓰기를 원하는 그런 염치와 절제의 건축을, 사회와 고립된 높은 벽체로 싸인 그림 같은 집이 아니라 이웃과 연결된 보다 낮은 그런 집을, 육신이 편안하기보다는 정신이 맑기를 원하며 육체를 왜소화시키는 기능적인 집보다는 오히려 반 기능적이어서 삶 자체가 진솔해지는 그런 공간을,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고 스스로를 반추시키는 배경이 되는 그런 지적 벽면을, 이제 우리의 도시에 다시 세워야 함을 믿는다. 이 아름다운 산하와 반만년 역사를 이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 저런 못난 건축 속에서 그 질을 보장받을 수 없다.
세기말을 앞둔 지금, 그러한 일그러진 편린과 대립해야 하는 우리의 정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것은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이 된다. 보잘것없는 집'이라는 뜻의 이 집은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를 위한 집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유 교수는 한국 미술사에 남다른 식견을 가진 미술평론가이며, 또 그는 민중의 삶에 애착을 가진 지성이다. 그는 나에게 설계를 의뢰하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고 한다.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대한 불신 등이 그러한 망설임의 대부분이었는데 이를테면 비싼 것, 편하지 않은 것 등이 그것이다. 유 교수는 이러한 것이 선입 관념일 수 있음을 알고 나에게 이런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설계를 의뢰하였으며 동시에 나의 건축적 의지에 결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고,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가치가 우선된 토지, 주거 정책으로 인하여 크게 잘못된 주택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주택을 사용에 대한 관념보다 소유개념을 더욱 중시한다는 것으로 그 결과 집 속의 공간이나 그 속에서의 삶보다는 집을 구성하는 벽체와 지붕의 모양 등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얻어진 주거형식이라는 것이 주어진 필지에 높은 담을 쌓고 자기를 보호받기 위해 그 담 위에 철조망을 또 두르고 그 속에 아파트처럼 기능적인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은 부분은 `저 푸른 초원'을 즐기기 위해 잔디 깔고 나무 심는 그러한 것인데, 이러한 집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이웃이 있을 턱이 없고, 가족의 아이덴티티가 있을 수 없으며, 더불어 개인의 프라이버시 또한 오히려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와지붕 시대 이후의 참다운 주거문화를 실현해 본 적이 없으며 오로지 주택이 가족 신분에 대한 상징으로서 여겨져 온 결과 껍데기만 있는 졸부의 주거문화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집 장사와 개발업자들에게 상당 부분 있지만, 그렇다 하여 건축가들의 책임 또한 면하기 어렵다.
내가 이 집을 설계하면서 가진 의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시 도시주택의 전형을 만들 수 없을 것인가. 주택은 도시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나. 주택에서 삶의 형태와 공간의 형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주택은 기능적이어야 하나. 이 시대는 어떤 주거형식을 요구하는가. 이 집이 완성되면서 이러한 의문문이 얼마만큼 그 해답을 구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취한 몇몇은 요즘 나의 건축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는 빈자의 미학에 대한 구체적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그 성취는 대부분 유 교수가 전적으로 건축가를 신뢰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며 그와 설계와 시공 기간 중 내내 나눈 여러 이야기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1993.
글 승효상 사진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