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 스케치, 김찬중 제공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건축가 김수근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어머니가 공간화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김수근 소장님을 만났어요. 소장님이 직접 사무실을 구경시켜 줬는데, 설계실 풍경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땐 제도판이 있었잖아요? 경사진 책상이 주는 긴장감 같은 게 강렬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화판을 책상에 괴어놓고 한동안 그렇게 썼죠.
 
그런 환경에 노출된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여러 가지 자극을 받는데, 그때의 감수성은 놀랍고 신기한 거예요. 중요한 건 노출되고 따라 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제도판을 보고 와서 집에 화판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극은 없어지는 거죠. 마침 화판도 있겠다, 펜 통에 목탄 같은 것도 꽂혀있으니 해보는 거죠. 어머니 화실이 설계실의 환경과 비슷했어요.
또 동네 친구 집에 가면 플라스틱 통에 구멍 있는 템플레이트, 컴퍼스가 종류별로 엄청 많았어요. 그게 만들어내는 비쥬얼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집에 가면 컴퍼스로 그리기만 했어요. 그 친구 아버지가 우리나라 그래픽 디자이너 1세대인 서울대학교 김교만 교수님이었어요. 굉장히 신망받는 분이었죠. 그분의 작업을 생각해보면 컴퍼스를 많이 썼겠다 싶어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가장 큰 영향은 어머니가 아닐까 싶어요. 누드 크로키를 그리셨던 분이기 때문에 인체의 곡면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어머니와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건,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은 랜드스케이프다”라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계셨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여자의 몸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 앉은 촌부의 몸에 많은 게 담겨 있다고 보셨죠. 누드를 성적인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삶이 몸에 맞춰지는 것이고, 살아온 모습이 경이로운 거라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의 누드모델을 많이 했고요.
저에겐 굉장히 자유로웠는데 세상은 자유롭지 못했죠. 불편한 진실이었던 거고 지금도 완전히 자연스럽지만은 않아요. 지금도 누드화 하나만으로 전시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고집 짱이었죠.(웃음) 아버지가 꺾을 수도 없고 꺾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화가였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화가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 좀 더 밀착된 게 있었어요. 내가 궁금해하면 “너도 옆에서 그려봐”하고 옆에 종이를 깔아 준다든지 했죠. 어머니랑 있을 때는 눈치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동차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요?
묘한 게 도시와 차는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2학년 때 벨기에에서 살았던 친구 집에 놀러 갔어요. 유럽에 살았으니 집에 BMW, 벤츠, 아우디 같은 자동차 브로셔가 많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완전히 매료된 거예요. 내가 알던 차와 전혀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부터는 화교가 운영하는 명동의 책방에 가서 <car and drive>, <car styling> 같은 류의 일본 잡지를 사 왔어요. 그때 자동차를 디자인으로 접하게 된 계기였죠. ‘clay model’ 깎는 모습도 잡지를 통해 봤고요. 어린 시절, 모터쇼, 미래에 관한 얘기를 담은 콘셉트 카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어요.
나름 상당한 지식을 쌓았는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울산 현대자동차에 계신 친구를 졸라서 울산 현대자동차 엔지니링 센터에 보름 동안 머물 정도였어요.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 디자이너 아저씨들을 놀라게 했죠. 그러면서 친해졌어요. ‘커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거예요’라고 했는데,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그 꿈을 접게 한 것도 결국 그 디자이너 아저씨들이었어요. 그래도 그분들이 너무 멋있었어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셨던 거네요.
고등학교 때 그런 꿈을 꾸었고 잠시 건축을 잊었어요. 차는 항상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건축은 만화에 나오는 미래도시가 전부였고 <공간> 지에서도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건축에 관심이 있었지만, 자동차가 훨씬 강렬했어요. 대학은 건축과로 갔지만 어떤 유전자가 남아있는 거예요. 가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도 있고요. 그래서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의하고 의견을 듣는 데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웃음)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은 어떻게 다르다고 느꼈나요?
정말 이상하지만, 자동차는 왠지 이 세상 물건 같지 않았어요.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비율과 선의 총체적인 세팅, 감성, 광채가 감동적이었어요. 한번은 건축도 디자인 분야도 아닌 분이 말씀하셨어요. 잘은 몰라도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일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요. 디자이너는 하루하루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바꾸지만, 건축은 이것저것 다 해보고 오랫동안 영글어서 산모의 고통을 겪은 후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 같다고요. ‘매일의 고통, 지속성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건축의 사이클이 너무 길어요. 그런 부분이 상당히 부담되고요. 디자인은 사이클이 빠르니까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데, 건축은 긴 호흡 뒤에 나오는 결과라 더 선호했던 것 같아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려 했으나 대학 진학 때 아버지가 반대하셨다고 하셨어요.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고, 그때 고민이 많았어요.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산디과가 미대 안에 있어서였어요. 대신 건축과를 가면 건설사 사장이 되는 줄 아셨죠. 실제로 건축가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고 조금 싫어하시기는 했어요. 지금 건축가 지망 학생들이 저에게 상담하는 내용이 그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금융 분야로 가거나 변호사, 의사가 되면 억대 연봉이란 비교가 저희 때부터 시작한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때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이 150만 원이었는데 저는 한 달에 70만 원 받았거든요. 물론 지금은 두 배까지 차이는 안 나지만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선택하게 계기가 있나요?
당시에는 사실 정보랄 것이 없었어요. 그저 컷트라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학교 분위기를 보는 정도였어요. 저희 때 첫 선지원 후시험제를 시행했어요.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지고 재수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는 좀 더 안전하게 지원하게 되었죠.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가 건축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학교 환경 자체에는 실망이 컸어요. 그 당시 건축과에서 설계 전공 분위기는 좋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건축학과와 공학과로 분리되면서 훨씬 디자인 지향적인 분위기지만요.
 
당시 고려대 건축공학과는 공학 분야가 주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학창시절 제도판은 보통 1인당 1개씩 부여되는데 설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는 3개를 사용했어요. 학교 내 설계실에 여유가 많았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작업실 문화도 거의 없었고요.
주변에 건축 설계에 관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을 것 같아요.
보통 1학년 때는 제도 수업만 하는데, 갑자기 혼자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건축사협회 주관의 학생공모전으로 주제가 <신접살림을 위한 단독주택>이었어요. 설계를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리던 가닥은 있고, 규모가 작아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모형 없이 90x180 크기의 패널 1개 제출하는 것이었어요. 3월에 입학하여 4월에 공모안을 제출한 거니까 무모했죠.(웃음) 당시 배운 것이 나무 그리기뿐이었는데도요. 그래서 나무가 엄청 많은 집을 그렸어요.(웃음)
당시에는 스프레이 풀이 있다는 것도 몰라서 딱풀로 붙이다가 다 써버린 거에요.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해서 밥풀로 붙였어요.(웃음) 종이에 밥풀이 뚫고 나오고 아주 장관이었어요. 그렇게 5개 정도의 그림을 패널에 붙였어요. 그걸 들고 서초동 건축사협회 앞에 가보니 전국의 건축과 학생들이 인산인해였어요. 너무 놀랐죠. 그때 ‘시다(보조)’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어요. 한 패널에 ‘시다’ 여럿이 붙어서 마무리하고 레터링 글자를 붙이고 있고, 옆에서 군복 입은 사람이 심각하게 무게 잡으며 지시하고 있고요. 저는 레터링도 모르니 글씨를 직접 써서 제출했는데, 내 패널이 시각적으로 얼마나 뒤떨어지는지 보게 되니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게다가 혼자 왔으니까요. 너무 창피해서 패널을 신문지와 테이프로 붙여서 가리고 접수 줄에 섰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선배들이 저를 발견한 거예요. 제가 제출하는 거라고 하니 형 셋이 와서 구경했죠. 접수할 때 신문지는 뜯어서 제출하라고 하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밥풀로 막 붙인 제 패널을 본 접수자가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더니, 내년엔 잘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심사위원도 아니고 접수하는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였으니.(웃음)
 
창피했지만, 1학년짜리가 작품을 내러 왔더라고 학교에 소문이 났어요. 졸업한 선배들 귀까지 들어가서, 어느 날 대학원 실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졸업한 선배들이 쭉 앉아서 “얘가 걔야?”하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하는 말은 “너 용기도 대단하다”였어요. 이런 열정이 있는 후배라면 작업실을 만들 수 있겠다 해서 당시 200만 원을 주면서 작업실을 만들라고 했죠. 공모전은 떨어졌지만 작업실을 만들 후원금을 받게 된 거예요. 그 돈으로 제기시장 안의 작은 재봉 공장을 전세로 얻어, 건축과 3명을 더 모아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선배들이 리뷰도 해주고요.
 
그 계기로 건축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거네요.
선배들과 많이 싸웠어요.(웃음) 싸움이라기보다는 건축에 대한 토의 혹은 논쟁이었어요. 2학년 1학기 때 주택설계를 했는데, 집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선배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죠.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모여서 나름 심각했던 거죠. 아무래도 설계에 너무 소외된 지역에 있다 보니, 설계하겠다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밀도 있게 했어요.
그때 책도 많이 읽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터 아이젠만이 쓴 책이었는데, 모르는 단어를 형광펜으로 그어보니 나중엔 눈이 부셔서 책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웃음) 당시 고대 철학과 다니던 중학교 동창에게 물어보니, 그 책에는 6개의 학문이 혼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기호학, 논리학, 언어학, 현상학, 구조주의 등… 그에 대한 기본 소양이 없으면 읽을 수 없대요. 이 책을 쓴 건축가는 그것에 대해 알기 때문에 책을 쓴 것이니, 건축가라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친구와 각 분야의 인문서들을 읽고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그 친구의 도움으로 밀도 있게 공부하면서 피터 아이젠만의 글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론서들을 읽으며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요.
설계에 관하여 동기들과 의견을 나누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대학원 형들과 많이 교류했어요. 그 와중에 피터 아이젠만의 논리적 싸움에 대한 배움이 있었고, 큰 힘이 되었어요. 누가 더 논리적일 수 있느냐의 게임으로 볼 때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저는 작업에서 공격당하는 처지이었고,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름의 사고체계를 만들기 시작했죠.
 
학교 수업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작업실을 통해 채워졌을 것 같아요. 책이나 정보는 어떤 방식으로 얻었나요? 
앞서 말했던 철학과 친구의 도움이 컸어요. 그리고 잡지 아티클을 보면 인용문과 각주가 쭉 나오니, 그중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을 골랐어요. 주말이면 교보에 가서 다양한 분야를 둘러보며 도움 될 것 같은 책들을 골랐고요. 그때 아내와 연애할 때인데, 우스갯소리로 만약 우리가 대학 때 헤어졌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데이트 비용을 무조건 책에 써서였을 것이라 말해요. 그 정도로 책을 많이 샀어요.
 
그 당시 해외의 건축 흐름을 파악할 수 있던 매체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판단하자는 주의에요. 작가의 관점을 보는 편이에요. 사람과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거기에 동화되게 돼요. 책도 집중해서 보면 그에 대한 지적 보상을 스스로 만들게 되면서 그편이 되요. 제가 생각하는 독서의 위험성이란 다 읽고 나면 추종의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보고, ‘내 생각은 이래’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독서습관에는 그런 경향이 별로 없어요. 읽고 정리하는 것이 무슨 공부겠어요. 내 생각은 어떻고, 네 생각과 차이는 어떻고 가 중요하지. 한국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해 강박적이지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은 어떤 면에 매료되었나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을 읽고 나서, 그처럼 사고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모든 건축의 원리는 1부터 100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피터 아이젠만은 벽돌 한 장도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내가 그리는 1cm의 선으로 인해 큰 재화와 노동력이 낭비되거나 비상식적인 상황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이 조심스러웠어요. 피터 아이젠만이 말하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공공성에 관한 부분이라기보다는, 건축가의 시점에서 미학적인 이유만으로 만들어내는 무책임함에 대한 경고였어요. 그렇기에 설계 전체나 부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곧 건축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게 피터 아이젠만의 논조였죠.
하우스 텐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보자면 집이 설계되는 모든 과정에 이유가 구문처럼 분석되어 있었어요. 왜 창이 이곳에 뚫려야 하고, 슬래브가 어디까지 나고 등등….당시 그 책이 지적으로 보였고, 저에게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그 사람이 겪어야 할 불편함보다는 건축가의 책임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그 두 영역을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것에 영향을 받고, 심취했었죠.
그런데 피터 아이젠만도 건축 실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본인의 이론으로 학계에서는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지만, 실제 영역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변하기 시작해요. 다른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저처럼 그를 맹신하던 사람은 그 변화를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피터 아이젠만이 엑스트라 콘텍스트(Extra context)라는 키워드를 들고나오더라고요. 계속 똑같은 것이 반복되고 있을 때 생뚱맞음이 들어오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며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글쓰기의 방법론 중 하나로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를 합리화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변절자로 보이기 시작했죠.(웃음)
 
그걸 인지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1994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너무 실망스러워서 피터 아이젠만이게 편지를 쓰려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으니.(웃음)
아무튼, 그 뒤로 ‘랭귀지(language)’가 가진 함정에 대해 주의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는 매너리즘이고, 하나는 변절이에요. 피터 아이젠만의 경우 자기 언어를 이론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논리(logic)를 이야기하지만, 나중에는 논리를 제외한 모든 게 다 있더라고요.(웃음) 반면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는 변절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어요. 매너리즘이지만 사람들은 그 매너리즘으로 인한 브랜드를 사고 싶어 하죠. 물론 모든 환경을 하나의 언어로 푼다는 것은 여전히 의구심이 들지만요. 어쨌건 건축 언어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었어요.
 
말씀하신 ‘랭귀지’라는 것은 건축에서 어휘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고체계의 근원적 방향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첫 번째가 강해요. ‘랭귀지’란 곧 사람들이 지각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어요. 저 역시 사고하는 방식 체계와 결과물은 다르지만, 매 프로젝트마다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고체계를 랭귀지라 한다면 저도 강한 랭귀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표현되는 현상에 관한 것으로 보자면 작업 안에서 각각 카테고리가 있어요. 이 프로젝트는 ‘어떤 카테고리로 일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각 작업이 다른 성향으로 가게 돼요.
피터 아이젠만을 계기로 무언가를 추종하기보다는 다양한 정보들을 펼쳐두고 공통적인 속성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자기 생각으로 소화하고 말하는 게 중요하겠어요.
지금의 사회 현상도 그래요. 정보는 많아요. 진짜 뉴스도 많고 가짜 뉴스도 많아요. 그런데 결국 본인의 판단이 가장 중요해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조선일보 혹은 딴지일보가 하는 말을 100% 진실이라고 믿고 살 것인가죠. 자기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살든, 중요한 것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넓은 스펙트럼에서 각자의 논조를 파악하고 공통 사실만을 사실(fact)로 보고 나머지는 주장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내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앞서 말했듯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동요되어 버리거나 자신만의 의견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저는 아침마다 한 시간 정도를 브라우징하는 데에 쓰는데, 모든 종류의 뉴스 채널을 모아서 간략히 보고 나서 그러죠. “에잇, 거지 같은!(웃음)”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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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③ 이론적 배경의 출발점은 피터 아이젠만이었지만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pton)의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글은 언제 처음 접했나요?   한국에서 대학생 때 아티클로 접했던 것 같아요. 책으로 접한 것은 1997년~98년 정도였고요.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하게 된 계기도 ‘버내큘러 아키텍쳐’에 대한 케네스 프램튼의 내용이 많은 영향을 줬어요. 케네스 프램튼은 책에서 동서양 건축의 비교,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소재와 소재의 결부 방식, 중국이나 일본의 목공예 결부 방식이 어떤 식으로 환경을 구축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해요. 그가 말하고 있는 논리는 텍토닉인데, 피터 아이젠만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인문, 사회, 과학적인 컨텍스트로 폭이 더 넓어졌다고 느꼈죠. 피터 아이젠만이 건축가 사고의 논리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케네스의 책에 와서는 더 확장된 느낌이었달까요. 그런 부분에 매료되었어요. 구축의 논리를 역사적으로 다루기도 하고요. 그래서 직접 스위스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환경이 설계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역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계신가요? 지역성은 수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최근 VR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지역성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운영하는 방법과 관계에 대한 학습, 그리고 우리 지역 사회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좋은 모델의 재현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쓰타야처럼 해달라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러나 그 어떤 모델도 한국에서 현지와 똑같이 성공할 수는 없어요. 일본인의 직장 문화와 그들이 갖는 취미 세계, 종업원들의 큐레이션 능력, 그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다는 것 등이 함께 작용해야 하는 거죠. 그저 상품과 음식, 책만 꽂힌 공간이 생겨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는 상태여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 걸까? 한국의 쓰타야는 결국 다른 것이어야 해요. 쓰타야를 통해 인사이트는 얻을 수는 있어도, 수출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라고 봐요. 모든 게 글로벌해지더라도 지역성은 생존력이 클 거라고 봐요.   건축적인 측면에서 지역성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가 될 수 있다고 보나요?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까요? 지역성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예요. 지역성을 만드는 인자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가 문제예요. 지역성의 가장 직접적인 개념으로는 프로젝트의 특수 상황, 특히 발주처의 상황에 대한 맥락이 있어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발주처의 상황보다는 건축가의 입장에 치우쳐 있어요. 예를 들면 프로젝트의 정의를 지나치게 지형적 관계성에 두죠. 갤러리를 절벽이 있는 대지에 최대한 어우러지게 만들겠다는 것처럼요. 그런 판단 이전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건축주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다음에 지형 등을 고려하는 거고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비용의 문제가 먼저 고려가 되지 않는다면 작업이 완성되기 힘들어질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의뢰인에 대한 고려를 비즈니스적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것이 인문학적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해요. 파트너쉽을 가진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기란 너무 힘든 일이에요. 비용만 주면서 원하는 대로 만들라고 하는 의뢰인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건축가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지는 않아요. 따라서 건축가는 설득해야 하죠. 그들을 이해시키고 끌고 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람들의 고민은 직접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건축가가 들여야 하는 노력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죠.   그저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겠네요. 그렇죠.   귀국 후 진행한 대표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대학교수로 왔지만, 당시 한국의 시장이나 상황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요. 그때는 일단 너무 몰랐어요.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거의 없다가,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나마 ‘교수’가 약간의 보증수표로 작동하는 시장은 아주 작아요. 또 저와 일을 하긴 하지만 교수 타이틀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리기도 쉽지 않죠. 이건 당사자들의 인식 문제예요. 정말 심한 사람들은 업체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냐면 자신이 상대하는 건축가가 명성이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식의 말들을 하는 사람도 있죠. 이런 갈등이 제가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의 실무 경험이었어요. 업체 취급하거나, 선생 취급하거나. 당시 저는 35살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나이였고, 스스로 증명해내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첫 프로젝트는 주로 서울시의 일들이었어요.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였어요. 짧은 설계, 시공 기간, 적은 예산으로 많은 수의 보행자 터널을 리노베이션해야 하는 미션이었는데요. ‘싸고 빠르게’를 원하는 한국 시장에 산업 재료로 문제를 해결한 첫 번째 프로젝트였습니다. 과정은 어땠나요? 갈등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시간이 매우 부족해서 디자인 검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던 상황을 극도로 단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인지하거나 인정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졌달까요. 성공적인 마감 이후부터는 ‘정말 빠른 시간 안에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인지로 시장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제가 따로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일정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왔거나, 문제도 매우 단순하고 목표는 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이라는 식의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대부분은 담당 건축가가 있었다가 발주처의 의견 확정이 미뤄지면서 버려진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경우가 많았죠.   산업 재료인 폴리카보네이트 모듈은 교수님의 관심사와도 부합했겠지만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 상황에서 절묘한 한 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80m짜리 터널 안에 타일이나 벽돌, 도장 외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도장보다 더 빠른 속도의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습식 대신 건식으로 가야 한다고 정했죠. 건식 재료는 곧 조립식일 테니, 조립식의 개념을 생각했고. 처음엔 재활용 폐자재도 생각해보고 요구르트병 수천, 수만 개의 가격을 알아보기도 했어요. 공산품을 찍어내는 과정을 알아보다가 폴리카보네이트가 가장 흔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물론 건축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 재료였어요. 건식 연결부를 생각하면 요소(component)가 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또 서도호 씨의 작업도 영향을 미쳤죠. 밀도(density)에 대해 의미 있게 생각해요. 밀도가 만들어 내는 강력한 텍스쳐같은 것들요. 큰 것 하나를 만들긴 힘들지만 작은 걸 여러 개 만들기는 쉬우니까요. 제 작업을 발표할 때도 서도호 씨의 작업에 대해 많이 언급해요.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건축 재료로 사용된 적이 없어서 제작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쉽지는 않은데, 당시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없었기에 제가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유학을 다녀오고 나니 유학을 가지 않았던 친구들의 경력이 훨씬 높더라고요. 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니, 표준 디테일에 관한 게임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차라리 디테일을 만들자는 생각이었어요. 어쨌건 디테일의 본질은 물이 새지 않는 것이니까. 표준 디테일보다 더 경제적인 해법을 찾게 되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게 제 지론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무실은 표준 디테일이 없어요. 그때그때 풀어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죠. 보통 대형설계사무소는 계단, 난간 등의 디테일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계속 만들어요. 최근 되어서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내부 의견이 있지만 디테일 재활용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조금 더 진보된 방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매번 새로운 디테일을 만들지만 우리의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기간과 예산을 단축했는지 궁금해요. 합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 같은 경우 시공까지 일주일에 하나씩 마감했던 것 같아요. 원래 주어진 기간은 좀 더 길었지만요. 개소당 예산이 6억 원이었는데 2억씩 예산을 절감해서 20억을 절약했죠. 서울시가 매우 좋아했어요.   슬프게도 시간과 예산은 한국 시장의 핵심처럼 보여요. 그래서 아쉬워요. 시간과 예산이 우리의 가치처럼 되는 것이 매우 아쉬워요. 컨버전스, 협업의 의미에서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나라는 협업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작동했을 때 얼마나 상승효과가 있을지가 의문이에요. 능력 있는 뛰어난 개인들이 모여서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을 해내지는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더 빠르고 더 싸게’를 외치는 한국 사회에서 산업적 생산 방식이 두각을 나타낸 것 같아요. 특히나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처럼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인상적인 건 문제 해결에 대한 추가 비용을 청구했다는 부분이었어요. 빠른 배송을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한다는 페덱스(Fedex)를 예로 들었던 것도 흥미롭고요. 건축이라는 분야가 제값을 청구할 수 있는, 비용에 합당한 지점을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도 문제 해결 비용을 더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과감한 태도였을 것 같아요. 제가 건축을 해나가는 방향 자체가 일반적인 건축 수련 방식과는 굉장히 달랐어요. 저는 표준 디테일을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마찬가지로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타당한 지점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용기를 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한 것일 뿐이죠. 만약 제가 설계 조직이나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에요. 한울건축에서 실무 할 때나 미국에서의 실무는 의뢰인과 발주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구체화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그 때문에 발주처와 건축가, 그것이 돌아가는 기류와 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저에게 있을 리 만무했어요. 페덱스를 생각해보세요. 목적지에 빨리 배송해 주기 때문에 비싸요. 그러니까 빠르면 비용을 더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상대방은 황당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본인들도 워낙 급했던 상황인 만큼, 저에게 약속(기한)을 지키지 못할 것에 대비해 페널티를 걸더라고요. 하지만 기한은 지켰고, 그렇게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죠. 너무 많이 알면 못 하는 것들이 있어요. 지식(knowledge)이라면 고민을 더 했을 테지만, 정보(information)가 많은 상황은 두려움만 커지는 것일 수 있어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학교에서 졸업 설계반 학생들의 면담을 한 적이 있어요. 설계를 잘하던 친구였는데,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건축 설계사무소에 취직하게 되면 연봉 얼마를 받게 되는데, 그 연봉으로는 결혼할 상대도 맞벌이를 해야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고민이었어요. 문제는 그 기준점이 높고요. 아기가 태어나면 영어유치원에도 보낼 수 없고 백화점에서 장을 보기에도 터무니없을 거라는 거죠. 저는 그 친구에게 설계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어요. 당신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라고요. 생각해 보면, 선배들도 정말 너무 하기 싫은 일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굳이 후배에게 자신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겠어요. 말하는 뉘앙스와는 별개로, 그 이면에는 본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자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사람은 프로그램한 대로 살아갈 수 없어요. 본인들이 예측하는 것만큼 인생이 단순하게 흘러가지는 않아요.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체크하며 넘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니까. 결론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갖고 있다면 용기를 잃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지식화하고 현명하게 체득하느냐가 관건일 거예요. 저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예측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어요. 그저 내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살게 되겠지라고만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지금의 환경이 다른 것같아요. 예전엔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는 시대였고, 지금은 그마저도 불투명한 시대이니까요.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지만 본질의 문제를 생각하면 판단하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에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오케이’예요. 그러나 50대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힘들었더라도, 그 때 디자인을 할 걸’이라는 후회가 남아있게 된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지 않을까요? 어떠한 사회에 살아가던 간에, 결국 본인의 가치 판단 문제예요.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금전적인) 부분에 비중을 둘 것인가. 이런 말에 지금 공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건축가가 문제 해결 비용을 청구하고 합리적으로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인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만큼 건축가가 리스크를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맞아요. 게다가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힘들어지기도 해요. 계약금보다 더한 피해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해요. 물론 지금까지는 큰 피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요. 또 손해를 감수하고 감행한 경우도 있어요. 예전같았으면 그 정도면 사무실이 뒤집어 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규모도 커져서 크게 무리가는 상황이 오지는 않아요. 사람이 어떻게 매번 안타만 칠 수 없잖아요. 다만 타율이 너무 낮아지면 곤란하니까 일정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인 것같아요.   폴리카보네이트 마감을 활용한 이후, ‘모델하우스계의 황태자’라는 표현도 들었다고 했어요. 임시로 만들었다 부수는 모델하우스에 새로운 재질 선택, 입면 스터디, 모듈화하는 방식 등 산업 생산 방식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싶어요. 잘 맞아 떨어졌어요. 그리고 모델하우스는 저에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실험을 할 기회를 준 셈이었어요. 보통 모델하우스의 경우 3~4개월 내로 마무리되어요. 일반적인 주택의 경우에는 설계에서 결과까지 1년이 넘게 걸리는데, 빠른 시간 내에 그것보다 큰 규모의 프로젝트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파빌리온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실험에 대한 부담도 적었고요.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 내에 매니징한다든지, 운영방식에 대해서까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프로젝트들이었어요.   모델하우스를 통해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재료에 대한 스터디와 제작 방식, 운반을 고려한 사이즈- 예를 들면 트럭에 실릴 수 있느냐-까지 고려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재료에 대한 실험은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또, 이러한 시도에 흥미가 사라진 시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가장 경계했던 것은 매너리즘이에요. 공장 산업 방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다양하나, 건축에 적용 가능한 스케일에서 보자면 몰드 작업이 주를 이뤄요. 사출, 프레스 등의 방식은 건축 스케일에서 적용할만한 기계 사이즈도 없었어요. 따라서 몰드 작업을 주축으로 했기 때문에 그건 자신이 있어요. 이제는 형태만 봐도 몰드 작업이 가능하겠다, 아니겠다를 파일 수정 없이 진행하게 되어요. 몰드가 우리의 노하우가 된거죠. 다만 빠른 완성을 요구할 때에 몰드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로 인해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것이 아닌지 고민했어요. 물론 조금 더 확산적으로 사고해서 더 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정도 했으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오픈소스로 돌리자는 이야기도 스태프들과 나누는 중이에요.   모델하우스 이후에는 새로운 방식을 테스트하기 위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침 전시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전시를 통해 실험 대상을 정했죠. 전시 준비는 건축보다 훨씬 더 개념적이거나 시론적인 부분에 대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가 또다른 중요한 시기였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필두로 FRP라는 물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그 외의 전시를 통해서도 절곡기계 사용, 미디어 관련 실험을 했어요. 항상 전시는 일종의 테스트베드가 되어주었죠. 예를 들면 현대백화점 어린이책미술관 설계에 FRP를 적용했더니 훨씬 부드럽게 해결되었고요. 하나은행 PLACE 1의 부분 몰드로 모두 FRP가 사용되었어요. 금호미술관 전시에서는 절곡기계 사용을 실험했는데 아직 설계에 직접 적용해보지는 않았어요. 입면 구조(façade structure)를 스틸로 만드려는 시도인데, 전시 준비 과정이 데이터화되어 이후 실무에서 물성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더라고요.   건축에 적용할만한 산업재의 규격이 많지 않다는 것이 건축과 일반 산업과의 차이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주는 지점인 것같아요.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산업방식에 대한 관심이 결국 그것을 전환하는 지점을 만난게 된것이 아닌가 싶어요. 건축에서 컴포넌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학생 때도 크리틱을 받을 떄 제 작업을 두고 ‘kit & part’ 라고 정의를 내리더라고요. 하나은행 PLACE 1 프로젝트까지는 부품 제작 공정과 같은 그동안의 맥락과 함께 했었고, 한남동 빌딩이나 폴스미스의 경우도 건물은 일체화되었지만 작업의 공정상으로는 부분적으로 같은 매락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울릉도 코스모스(kosmos)호텔 프로젝트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일체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울릉도는 물리적 상황을 반영하여 한번에 구축했죠.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고 외피에만 집중을 하는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직원들은 ‘껍데기 건축’이라고 폄하했다며 울분을 토해냈지만 정작 저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제 반응은 ‘나 껍데기 좋아하는데(웃음)’ 정도였어요. 뭐 어때? 껍데기라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캐쥬얼하게 반응했죠. 직원들은 조금 억울해 했지만요. 어쨌든 비판을 불식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울릉도의 경우는 결과물로 이야기했다고 생각해요. 그 상황에서 최적화된 시스템은 한번에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이었기에 선택했을 뿐이지만요.   건축 담론을 이야기할 때에, 저도 들으면서 ‘진짜 어렵다, 나도 어려운데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싶어요. ‘왜 이렇게 건축이 어려워졌을까’에 대해 생각해요. 어짜피 건축은 짓기 위해 어려워야 하는 것이지, 보고 반응하는 데 어려울 필요는 없다고 봐요. 물론 콘크리트 벽 하나만으로도 심오한 인사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해요. 도슨트는 그것을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갖지만,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겠죠. 그래도 내면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사이트를 주는 건축이라면 그건 예술의 경지라고 생각해요. 건축도 그럴 수 있지만, 건축이 기본적으로 갖는 역할은 예술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건축의 본질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그 이외는 본질이 아니죠.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④에서 이어집니다.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② 대학 시절에 선경스튜디오도 참여하셨는데요. 설계에 대한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해준 곳이 아닐까 싶어요. 선경스튜디오는 설계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어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참여했는데, 당시 구성원들은 다들 개성이 강했어요. 저는 소위 정통 건축 교육이나 선배가 있는 작업실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 저는 야생에서 온 사람이었고요. 정체성이 강한 친구들이었기에 많은 자극도 되고 부러웠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고대 다니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면학 분위기를 부러워했으나, 동시에 그 한계, 패턴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다들 졸업 후에 개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지만, 학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있었어요. 패널 디자인도 책에서 나온 형식이 많았고요. 정보가 곧 스킬로 정착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객관적 정보를 얻는 데에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길찾기를 하게 되었어요. 전환점이 되었죠.   한울건축에서 2년의 실무 후에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한울건축의 스타일도 체계적이고 사무적인 틀을 가진 곳이 아닌가 싶어요. 집중도에 관해서는 어느 곳보다 세고 밀도가 매우 높았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성관 소장님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디테일, 비례, 전통적인 건축의 판단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퀄리티가 매우 높았어요. 오히려 첫 직장으로써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대신 새벽 3~4시 퇴근은 기본이었어요. 사람들이 못 견디고 나가기도 하는데, 진정성 하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버드(GS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색이 없다는 점이 컸어요. 5곳에 지원해서 4개 대학에 붙었는데, 색이 너무 강한 학교는 고민이 됐어요. 예를 들면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당시 그레그 린을 필두로 프리 폼(free form)이 유행하고 있었고, 엔지니어링 기반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MIT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일은 실용주의 노선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데 GSD는 강사(instructor)도 다양했고 이렇다 할만한 색깔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 ‘학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막상 가보니 색은 있더라고요. GSD는 리더 양성소예요. 리더십 양성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서 경쟁이 매우 심했어요. 정치나 헤게모니같은 것도 있고요. 단순히 디자인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실무에서 겪게 될 싸움의 마이크로 버전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유학 시절,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스 맨(‘this’ man)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어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세세하게 만든 모형과 도면으로 보여주었다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실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말로 하는 설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결과물을 실체 과다로 받아들였어요. 일단 물량에 놀라워했죠. 개별적인 컴포넌트들을 만들어서 프로세스대로 하나씩 끼워가며 설명하곤 했죠. 보통 핀업이라 하면, 학생당 한 개 정도인데 저는 핀업룸을 도배하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 갔어요. 양도 그렇지만 제 모델은 훨씬 더 많은 전달력이 있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거든요. 지금도 사무실에서 3D작업을 많이 해요. 보여줄 장면(scene)도 많이 잡고요.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확신을 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우리는 조감도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하는 시점이 아니니까. 그래서 눈높이에서 투시도를 많이 만들어서 설계와 경험을 체크하고 건물을 미리 다 지어본다는 생각을 해요. 실체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마이크로센터, 홈디포, 제 언어적 한계, 이 3가지의 융복합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컴포넌트가 명확해야 했고, 컴포넌트들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체계까지 모두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받은 거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라는 일반 상점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흥미로워요. 유학생 시절, 너무 외로웠어요. 홈디포를 구경하거나 마이크로센터에 가서 부품을 사고 컴퓨터를 분해하고 새로 조립하기를 반복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컴퓨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겐 컴포넌트였고, 계속 그것으로 놀다 보니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죠.   ‘홈디포(The Home Depot)’는 건축, 조경에 관련된 하드웨어를 파는 창고형 마트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종류의 건물도 홈디포에 있는 상품으로 다 지을 수 있다”라는 게 이 마트가 표방하는 바죠. 홈디포에서 모든 것들이 부품화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며, 결국 건물도 하나의 거대한 조립 체계라는 것을 느꼈어요. 요소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 – 이건 피터 아이젠만의 영향이지만 -가 저로 하여금 설계와 프로세스의 단계적 과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무실에서도 너무 멋진 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아요. 최단 시간에 이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동선을 잡으라는 식의 요청을 할 때는 있어요. 발주처에 설명할 때도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막연히 말하지 않게 되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 타당성을 갖고 말하게 돼요. 이런 관점들이 그때 만들어졌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를 통해 건축이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반대로 실제 건축 산업은 워낙 보수적이죠. 그 때문에 건축에 적용 가능하기 위해 부딪혔던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건축은 선발 산업이 아니라 후발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종합 산업이죠. 종합 예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는 예술이 산업이던 때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예술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죠. 물론 지금의 산업은 그때와는 다른 산업이고요. 건축이 후발 산업이라는 의미는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에요. 건축은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부품들이 다른 분야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축에 통합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건축에서 유리 접합부를 개스킷(gasket)으로 막는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음과 빗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해법이 건축에 적용된 거예요. 건축은 시대의 주력산업에서 파생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건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찾으려고 한다면 많이 힘들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을 생각하고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하다 보면, 5~10년 뒤에는 건축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해요. 즉, 다른 산업에서 안정성을 인정받고 검증된 것이 건축에 합쳐지게 되는 거죠. 주력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는 건축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해요. 건축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앞당길 수는 없지만, 건축은 후발 산업인 대신 종합산업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한국에선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모더니즘 신화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모더니즘은 정치적인 상황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건축 자체로 말하기보다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쟁 이후였고. 사회주도세력 중 정치적 신념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부분들이 녹아 들어갔던 거죠. 여전히 지금도 그때의 잔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집권당이 바뀌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거나 사라져버린다거나.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건축물이 의미하는 게 크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바꾸고 싶어 하는데,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토목, 건축, 환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부분에 건축가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사실 건축은 누군가 자본을 대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다 보니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성향에 건축이 편향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다’라고 투쟁하면 더는 일을 주지 않겠죠. 그러면 건축을 실제로 구현하지 못하는 페이퍼 아키텍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건축주가 신념보다 공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공성도 요즘은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은 미학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이나 개념일 수도 있어요. 여러 방법을 통해 공공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공공의 사람들이 바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편협하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 자체로 공공재의 성격을 피할 수 없어서 다양한 사고와 실험의 적용에 높은 가치가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많이 받는 포퓰리즘적 방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요.   건축계를 지배하는 신화적 시각에서는 컴포넌트와 조립식 시스템을 통해 건축을 산업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볍다고 비판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전의 건축은 철학적 사고와 연동된 체계이거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표현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주냐 아니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우리나라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인 것 같고요. 건축은 쉽게 이야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고뇌하고 어렵고 고차원의 문제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요.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SPECIAL 건축가 김찬중 오픈하우스서울 2019 올해의 건축가 특집은 건축가 김찬중을 만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메이킹과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콤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 2019에서는 건축가 김찬중의 대표작을 방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스페셜 이슈를 준비했다. 건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인터뷰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OpenHouse 가로골목 + MCM M:AZIT OpenHouse KHVatec OpenHouse 구 폴 스미스 플래그쉽 스토어 (현 헤리티크뉴욕) OpenHouse 우란문화재단  OpenHouse PLACE 1 OpenHouse 서울식물원 온실  OpenStudio 더_시스템 랩 오픈스튜디오   
OPENHOUSE 약현성당, E. 코스트 신부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 중림동 약현성당은 1893년에 축성된 한국의 첫 벽돌조 서 양식 성당건축물이다. 명동성당의 축소판이자 시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약현성당의평면 구성은 삼량식으로, 줄지어 늘어선 기둥의 아치와 천장에 의해 중심부(네이브)와 측량(아일)의 구분에 내부에서 뚜렷하지만 외부에서는 낮은 단층 지붕으로 되어 구분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정면 중앙에 돌출된 정방형 종탑 하부에 주출입구가 있으며 좌우 양축에 부출입구가 출되어 있다. 고딕적 요소가 극히 적은 바실리카식 벽돌조 건물이지만 최초의 서양식 교회건축이자 본격적인 벽돌조 건물로 건축사적인 의의가 크며, 명동성당과 함께 아름다운 근대 성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글, 사진 OHS  E. 코스트 신부 (Eugene Jean George Coste, 한국명 고의선) 184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코스트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홍콩, 만주, 일본을 거쳐 1885년 처음 조선에 입국하였다. 코스트 신부가 입국한 이듬해인 1886년(고종 23)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부들의 활동이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코스트 신부는 조선에 들어와 조선교구 당가부(경리와 건축 담당 부서)의 일을 맡았으며, 성서 등을 보급하고 여러 천주교 건물의 설계와 건축을 담당하였다. 코스트 신부의 주요 건축물은 명동 사도회관(1890), 약현성당(1892), 명동성당(1898), 원효로 예수성심성당(1902)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사제관, 수녀원, 고아원 등을 신축했고 모두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화강석을 사용했다. 대표작인 약현과 명동성당은 성당 건축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약현성당 http://www.yakhyeon.or.kr/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아서 딕슨, 김원 9월 25일 1:15PM
OPENHOUSE 가회동 백인제 가옥 서울시 민속문화제 제22호인 백인제가옥은 종로구 북촌(가회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1913년 건립된 근대 한옥으로 지난 2009년 서울시가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유족으로부터 인수 후 보수공사를 거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건축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 연출한 역사가옥박물관이다. 전통한옥과 다르게 사랑채와 안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건축재료로 압록강 흑송,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안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된 특징이 있는 일제강점기 대형(2,460㎡) 한옥으로 북촌에서 유일하게 실내까지 관람이 가능한 가옥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 글 사진 서울시 제공 장소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7길 16(가회동) 이용시간 09:00~18:00 (입장마감 17:30)  ※ 자유관람시 외부 관람만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1월 1일 관람인원 안내해설 1회 15명, 자유관람 동시관람객 100명 이용요금 무료 예약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시스템(http://yeyak.seoul.go.kr) 이용 및 현장접수 병행(문의 724-0200, 0232) 홈페이지 링크 
SPECIAL 대학의 원형을 만나다 오픈하우스서울 2019의 두 번째 스페셜 테마는 대학 캠퍼스의 원형이다. 서울에 자리 잡은 대학 캠퍼스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시대정신에 따라 지식의 공간이 어떻게 보급되고 정립됐는지, 구체적인 건축물의 역사를 통해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외국 선교회가 세운 후 한국 대학 건축의 전형이 되어온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여성 교육의 산실이자 새로운 도심 캠퍼스의 지평을 확장한 이화여자대학교 신촌캠퍼스, 식민지 경영정책에 맞춘 농업학교에서 오늘날 도시학을 중점으로 특화된 교육기관으로 거듭난 서울시립대학교 전농동 캠퍼스, 군사 정권시기 국내 주요 건축가들의 건축물을 통해 캠퍼스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했던 태릉 육군사관학교 등 한국 고등교육기관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었으며 오늘의 캠퍼스로 자리 잡았는지 살펴본다.   Tour 김수근, 김중업, 김종성, 이광노의 육군사관학교 ∣ 진행 정인하 교수 Tour 서울시립대학교, 근현대 100년을 걷다. ∣ 진행 박철수 교수 Tour 한국 여성 주체성의 시공간적 확장, 이화여자대학교 ∣ 진행 강미선 교수 Tour 연세대학교, 기독교 사학에서 만나는 대학 캠퍼스의 전형 ∣ 진행 이연경 박사   OpenHouse 연세대학교 법인본부, 최문규 OpenHouse 서울시립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최문규 OpenHouse 선벽원(善甓苑), 이충기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아서 딕슨, 김원 9월 24일 2: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