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