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오픈하우스서울 ST송은 빌딩, 헤르조그&드 뫼롱+정림건축 10월 13일 4:00PM
제4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오픈하우스서울 주한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사티+매스스터디스 10월 13일 2:00PM
SPECIAL 서울 산책 오픈하우스서울 2023 올해의 주제는 <서울산책>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도시에서 녹지는 귀한 그늘을 선사하곤 한다. 도시의 녹음은 미기후의 열기를 식혀주는 중요한 자산이면서 도심의 자연환경으로 우리에게 휴식을 위한 장소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서울의 공원과 정원, 광장은 충분한 걸까? 바라보는 숲이 아니라 우리가 거닐 수 있는 녹지와 정원은 접근 가능한 도심에 충분할까? 오픈하우스서울은 산책하는 서울을 꿈꾸고 제안하며, 서울에 조성된 공원과 녹지를 소개한다. 도시를 함께 산책하며 조경과 건축, 도시 환경을 포괄하는 도시의 여백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산책하고 사유하고 멈춰 쉬는 서울을 꿈꾸며, 잘 디자인된 서울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제4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오픈하우스서울 부암동 주택, 최두남 10월 8일 3:00PM
SPECIAL 오늘에 담은 우리 땅의 풍경, 조경가 정영선 ③ 특별히 좋아하는 식물이 있으신가요? 상황에 따라 하는 거지, 내가 좋아한다고 하는 건 없어요. 사우스케이프는 밑에 고사리 심고, 햇볕 들어오는 데는 아주 알싸한 향기가 나는 우리나라 야생나무 심고, 밑에 꽃 좀 심고 이끼 낀 돌 놓고 그랬죠.   선생님의 정원에는 이끼가 자주 등장해요. 이끼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야생 식물도 그렇고요. 좋아하죠. 조경을 하면 옥상, 물속, 실내, 그늘진 곳, 바람 부는 곳, 바위 위 등 온갖 곳에 할 수 있잖아요? 상황도 전통적인 것, 현대적인 것,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고요. 그에 상응하는 재료를 찾는 건데, 우리나라 조경의 주재료는 식물, 물, 돌 이 세 가지에요. 그 세 가지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잘 이용할 줄 알아야 해요. 식물이라는 게 소나무 하나 안다고 되는 게 아니고, 왜 이 소나무인지, 저 경우에는 왜 저 소나무인지를 알아야 하죠.   한국 전통 조경의 재해석은 중요한 이슈가 아닐까 싶어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 서구적인 영향을 받아 디자인하는 것을 마다하진 않겠어요. 그런데도 이 땅, 우리 정서에 맞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 모든 게 다이내믹하고 극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사는 공간은 좀 조용해도 되잖아요. 왜 우리나라가 아파트 공화국이 됐는지, 아파트 조경도 좀 바꿔보자고 죽을 고생을 하는데 잘 안 되네요.   희원에서도 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셨는데요. 전통적인 한국 정원은 장소마다 다 달라요. 희원도 곰곰이 보면 우리나라 전통기법이 다 들어가 있어요. 담이라든가, 포장이라든가, 공간 구성이나 공간 전개의 기승전결이라든가, 앞뜰과 뒤뜰이라든가, 이걸 연결하는 문제라든가, 못의 형태, 돌의 형태라든가, 장독대라든가, 모든 전통이 들어 있지만, 언뜻 보면 또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이 들죠. 이 시대에 맞게 살짝 바꾸는 거죠. 샛강도 그렇지만, 결국 원풍경 살리자는 거죠. 그런데 지금 한강 주변의 공원들은 공원이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해요. 우리 고유의 경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초기에 한국 전통 조경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요. 당시에는 일본 조경에 대한 영향도 남아있을 듯하고 한국 전통 조경에 관한 연구도 깊지 않았을 듯합니다. 초창기 조경 잡지들에도 나와 있을 거예요. 1960년대 후반,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고 여러 산업단지를 만들고 문화재를 복원하고 새마을운동을 하려고 보니까 가장 필요한 게 조경이었던 거죠. 하지만 당시 조경이란 말도 없었고, 개념적으로는 ‘가꾸는 것’이란 말이죠. 당시 정부에서 미국에 있던 오희영이라는 분을 불러왔어요. 조경 공부를 신 분인데 비서관으로 초대했어요. 고속도로를 어떻게 만들지, 문화재에는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 고속도로에서 토사가 쏟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박 대통령이 손으로 스케치하고 메모로 지시하곤 했어요. 경주 불국사, 이순신 장군 성역화, 경주의 보문단지 등을 한다고 할 때 한국적인 걸 해야 하는데 한국 정원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있기야 있었겠죠. 나는 애당초 토박이이고 토속적이지만, 책은 <서양 조경>을 가장 먼저 썼어요. 역사를 알아야 디자인이 되니까, 학생들 교재를 위해 서양조경사를 강의했던 것을 책으로 냈죠. 서양 조경은 그렇게 공부하면 되는데, 한국 조경은 열악했어요. 몇몇 교수가 쓴 책과 논문뿐이었죠. 현장을 둘러보면 매우 필요한 요소인 건 분명한데, 막상 자료를 찾아보면 아무도 디자인과 공사에 연결될 만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 거예요. ‘고종 몇 년에 무슨 나무를 심었다’ 밖에 없지, 왜 그 나무를 심어야 하고, 어디다 심으면 어떻게 되는지 디자인과는 결합을 못 하는 거예요. 한국 정원의 고리타분한 것만 있었죠. 창덕궁 후원에서 인턴으로 있을 때도 자료를 찾아보면 연대별 나열만 있어서 그래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대학 재직 시절에 학생들 끌고 혹은 혼자서 정처 없이 다녔어요. 정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지, 내 눈으로 보면서 느끼는 게 중요한지, 막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어요. ‘내가 답을 찾겠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돌아다닌 거예요. 아주 기본적인 정보야 어딘가에서 읽었겠지만. 가령 <춘향가>에 나오는 나무나 꽃, 사임당의 <초충도> 등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동양화, 소설, 타령, 시를 대충 섭렵하고 그다음 정처 없이 다녔어요. 초기에는 다른 사람의 여행기도 안 읽었어요. 그 무렵 광주사태부터 시작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죽고 사는 데 정신이 없던 때라 여행기도 거의 없었죠. 그렇게 진주에서 시작해서 법정 스님 계시는 송광사까지 걸어서 다녔어요.   답사를 다니신 건가요? 혼자서도 가고, 학생과도 다녔죠. 하염없이 걸었어요. 진주에서 시작해서 법정 스님 계시던 절까지 한 사나흘 걸려 걸어가면서 우리나라 전통 정원들, 마을들 다 보았어요. 남해 쪽도 그렇게 한번 걷고, 경주부터 동해 따라 청간정(靑澗亭)까지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고 지나가는 차도 얻어타기도 했어요. 아버지와 갈 때는 자동차로 한번 가고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나 혼자 하루 묵고 가다가 또 하루 묵고 하면서 걷고 했죠. 그렇게 보고 다녀야지 한 장소 갔다 오는 거로는 안 돼요.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나라 경관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축, 즉 정자에요. 정자가 놓인 위치를 잘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어떤 경치를 보고자 했는지, 왜 그 자리에 했는지 알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다 보러 다녔죠. 그 시절에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어요. 더러 있긴 했지만요. 그러다가 보길도를 다니면서는 나름의 글을 써야겠다 싶었어요. 왜냐면 기존과 같은 연도별 나열은 학생들이 알 수 없잖아요. 디자인에 도움도 안 되고요. 그래서 본 대로 느낀 대로 쓰기 시작했어요. 윤선도의 경우 왜 부영동에 갔고 시에서 어떻게 묘사됐는지 등등 연관 지으면서 현장을 봤죠. 그러면서 우리나라 경관의 특수성, 세계 경관과 다른 독특한 점, 특히 일본, 중국과 완전히 다른 이유 등을 정리했죠.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천천히 체득하는 방법이에요. 그게 서서히 디자인으로 풀리도록 했죠.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이셨을 것 같아요. 대학교수 시절인가요? 대학원부터 시작해서 교수 시절, 직장에 있을 때도 관련만 있으면 뛰어가고 했으니까요. <환경과 조경> 기자 하면서 차 타고 일주도 하고 많이 다녔어요. 대학원 논문도 우리나라 정자가 어떤 유형으로 어떤 경관 속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 그것이 시가나 문학, 그림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살펴봤죠. 논문이야 졸업을 위한 거라 방대하게 공부한 것에 비해서 표현은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그때도 욕심은 ‘언젠가는 정자에 관해 책을 쓰리라’ 했어요. 여러 사람이 글을 써서 찾아보면 여전히 우리 경관에 대한 해석은 못 하는 것 같아요. 왜 그 자리에, 무엇 때문에 정자가 있는가까지는 되는데, 그 이상은 안 되더라고요. 소쇄원은 뱀들이 부글부글 나올 때 청주대학교 학생들을 데려가서 정확하게 측량도 하면서 왜 이렇게 자리 잡았나를 공부하곤 했죠.   그렇게 직접 답사를 다니며 느끼신 한국 경관의 특징 혹은 인상 깊은 장면이 있을까요? 꼭 지켜내고 싶다 하는 것이요. 지켜야 하는 건 우리나라 산천이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디자인 없이 밋밋한 것 같지만 어딘가 사람 감칠맛이 꼴깍 넘어가게 하는 한 수가 있어요. 바느질도 그렇고 옷고름이나 수 한 뜸, 보자기, 도자기도 그렇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름답기보다 뭔가 하나 사람을 휘어잡는 요소가 있어요. 집터, 정자 터, 집 배치, 시퀀스나 마을을 이루는 풍경, 더 나아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지은 정자 위치, 정자 주변 정리, 정자에서 바라본 조망 등에서 기가 막힌 장면들이 나와요. 나도 우리나라에서 조경하려면 이걸 한국적인 것으로 현대화 해야겠구나 했어요.   접근하는 태도가 달랐을 것 같아요. 내 나름대로 한 거죠. 역사학자가 아니니까 학술적인 연구보다도 조경 설계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경관은 이런 이유로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좋은 정자 위로 고속철도, 고속도로, 고가, 다리가 지나가고, 가게가 들어서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역할을 잘 해야 하는지를 느끼죠. 영국 정원, 프랑스 정원 다 멋있죠. 하지만 그건 우리 땅과 안 맞거든요. 그래서 고민하는 것은 ‘이 좁고 가난하고 척박한 개발도상국에서 죽어도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이죠.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면 하나도 못 남길 것 같더라고요. 죽어도 반드시 남기자 하는 마음으로 설계실에서는 한국 정원만의 요소, 한국만의 경관구성 요소를 재현하려고 노력해요. 문헌상에 나오는 식물, 동양화에 나오는 수묵화의 표현기법 같은 것을 땅에 그대로 표현해 보고 ‘아, 아, 아’ 하는 거죠.   선생님이 작업하신 조경을 보면 항상 힘을 많이 빼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굉장히 섬세하게 설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사계절이 지나 바뀌는 풍경들요. 제가 관심을 가진 게 우리나 환경에 잘 맞게 자라는 우리나라 식물들, 풀들, 그리고 더불어 돌 자체예요. 미국이나 영국, 일본 돌 놓는 거 보면 너무 재미없더라고요. 아마 내가 돌 놓는 방식을 보고 사람들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에 맞게 가장 자연스럽게 놓는 거예요. 예를 들어, 느릅바위는 어떻게 흘러서 어떻게 놓이나, 큰 암반은 어떻게 있나, 소쇄원은 돌을 어떻게 처리했나, 돌을 어떤 형식으로 했나 등 계속 보고 다니니 입력이 되고 그걸 소화하는 거죠. 사람들은 내가 아마도 전생에 석공이었나보다 해요. (웃음)   돌에 대한 애착은 어린 시절 경험에서 왔다고 들었어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경산 과수원 언덕을 보고 자라서 그래요. 언덕 정상부에 집을 ㄱ 자로 짓고 능선 따라 사과밭이 있어서 아래에서 올라가게끔 되어 있었어요. 그 계단 따라 올라가 보면 가장 밖에 방앗간이 있는 마당이 있었죠. 그 과수원 이름이 칠암 과수원이었어요. 기억 속 어린 시절 고향 집 주변에 큰 거석들이 7개 있었어요. 과수원 아래에도 마당에도요. 사촌들은 나더러 ‘네가 어려서 그 돌들이 거대해 보였겠지’라고 하는데 절대로 아니에요. 책상보다 큰 바위들이 항상 마음에 있는 거예요. 큰 바위 밑 샘터 옆에 하얀 백합 몇 송이가 피고 있었어요. 그 샘에서는 빨래도 못 해요. 산꼭대기라 물이 귀해서 설거지도 그 물로는 못하게 해서 밖에서 길러왔어요. 고목은 바위 뒤로 흘러가게끔 되어 있었고요. 그걸로 시를 쓴 것이 백일장에 당선되기도 했죠. 그런 이미지들 때문에 지금까지도 바위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바위와 잘 어울리는 식물이 무언지, 어떻게 하면 한 장면에서 영감을 줄 수 있을지 하는 태도로 살아요. 조경이라는 게 사람에게 영감의 원천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어야지, 그냥 예쁘장하게 빨갛고 노랗게 늘어놓으면 어떻겠어요.   선생님 정원에서는 항상 익숙한데 알지 못했던 한국의 풍경, 나무, 꽃, 풀과 이끼의 종류들을 만나요. 선생님이 쓰시는 식재가 알게 모르게 어릴 때 우리가 기억했던 풍경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어릴 때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선교사 학교에서 다녔어요. 집은 선교사 남자 학교의 사택에 살았고, 여학교도 선교사가 지은 학교여서 매우 아름다운 미국 선교사 집 풍경이었어요. 그때 심은 꽃들은 전부 튤립, 수선화 같은 외국 꽃들이었어요. 그때 실컷 보고 또 실컷 심었죠. 우리 집에도 어떤 때는 튤립 만발하고, 어떤 때는 다른 꽃이 만발해서 동네 사람들이 꽃만 있는 집으로 알았거든요. 단지 거기서 벗어나 시골 고향집에 가면 나무만큼 큰 바위들이 일곱 덩어리가 과수원 여기저기 있고, 밑에 장독대가 있고, 과수원에 물 주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고, 그 밑에 우리가 밥 먹는 마당이 있었죠. 올라가는 계단길이나 바위 밑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심은 꽃 한두 포기가 나에게는 그렇게 시적인 영감을 줄 수가 없어요. 언덕 꼭대기가 집 마당이고 산 따라 내려가면서 전부 사과밭인데 사과꽃이 만발해서 마당에 쫙 깔리면 그렇게 눈물이 나요. 돌을 사랑하게 되고, 바위를 사랑하게 되고, 정원의 바위를 가장 중요시하는 계기도 거기서 시작되었죠. 조금만 심는 것도요.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영향을 뼈저리게 물려받은 거지.   시대마다 유행이나 흐름이란 게 있잖아요. 초기에 조경에 대해 사람들이 떠올린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었을 텐데,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셨는지 궁금해요. 그때는 아무거나 다 통할 때였어요. 피차가 모르니까. (웃음) 그런데 오늘도 예술의전당에 했던 초기 작품을 보니 당시 치열하게 노력했구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글쎄… 시대의 흐름이라… 외국책을 보며 노력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내 스타일 대로 갔어요. 그 시대는 상당히 많은 개발 드라이브가 있었잖아요. 나는 한 박자 늦추는 것에 많이 치중한 거 같아요. 인기는 좀 없을 수 있었겠지만요. 아시아 선수촌과 공원을 할 때도 건축가나 여러 사람은 조각이나 이상한 형태를 하는데, 나는 ‘아니다, 아파트에 사람이 사는데 소위 종합운동장은 시끄럽고 올림픽대로도 있으니 무조건 3m 높이의 산을 만들고 소나무 숲을 만들겠다’하니 시장부터 놀라는 거죠. 올림픽공원 할 때는 큰 나무를 다 배수도 안 되는 저지대에 갖다 놓아서 몽촌토성 주변 나무들은 3년 차에 다 죽었어요. 저지대라 뿌리가 물에 닿는 거예요. 안된다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공사 기간만 생각하고 나무는 소중하게 생각 안 해요. 그런 과정에서 무엇이 우리나라 경관과 어울리고, 실현 가능한지를 궁리한 거죠. 그 과정에서 공무원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중요해요. 설득의 기술이 필요하죠. 도면을 아무리 잘 만들어가도 소용없고, 무언가 하나 탁 던져주는 게 있어야 하는데, 내가 했던 말들이 비교적 잘 먹혔던 거 같아요. 지금 말로는 콘셉트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자연 한 토막, 이미지 하나를 왜 살려야 하느냐를 이야기 한 거죠. 요즘 사람에게는 안 먹힐 수 있겠죠. 외국 스타일이 아니니까.   선생님은 말 그대로 디자이너시네요. 지금에 와서 이야기하니 쉽지, 실제 설득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성심성의껏 열심히, 학술적으로도 파고들어 가려는 노력이 은연중에 비쳤겠죠. 건축가나 사무실에 파트너로 일하던 사람들도 도와줬고요. 그러다가 공공의 일을 선유도 공원, 그리고 여의도 샛강까지 하고 서초 예술의전당 등 이것저것 다 했어요. 또 전국 수목원들은 국립식물원부터 시작해 완도수목원까지 얼추 하게 됐죠.   정원, 공원, 광장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광장, 공원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옛날에 광장이라고 하지 않고 넓은 마당이 있었죠. 그 마당이 더 확대되면 광장이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광장 개념이 어설퍼요. 우리는 광장 문화가 없으니까요. 작은 도시나 큰 도시나 제대로 된 광장이 없고 그냥 대공원, 보통 공원, 소공원 혹은 정원적인 공간이 있죠. 문제는 공원마다 성격이 있어야 하고, 위치에 따라서 달라야 하고, 주변에 있는 건축과 도시 환경에 따라서 달라야 하는데 모든 공원, 정원이 한결같은 거예요. 그 지역의 특성을 살릴 생각을 눈곱만큼도 안 한 해요. 나중에 가보면 똑같은 방식으로 풀어버려요. 지역 주민이 요구하니까 어린이 놀이 시설, 운동 시설, 하다못해 좋은 자연을 보존해야 할 자리에 배드민턴장 만들고, 뚱딴지같은 일을 많이 해요. 우리나라는 공원이나 정원이나, 좋은 경관 속에서 명상하거나 혼자 자유롭게 거니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공원은 그냥 공짜로 운동하는 곳으로만 생각하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서울은 산책할 곳이 많아요. 역사적인 코스 혹은 선교사 시절의 코스 혹은 사라진 공간들 등등 주제를 정해서 개발하고 스토리텔링 해서 다닐 곳이 너무 많아요. 커피숍이나 만들고 세련된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로만 생각하면 문제예요. 서촌의 역사, 북촌의 역사 얼마나 이야깃거리 많아요. 그 옛날 북촌할 때 난리를 치면서 유지했던 게 지금은 다 없어져 버렸어요. 북촌이 북촌답지 않아서 어떤 때는 좀 화가 나죠.   조경이란 단어에 대한 협소한 인식과도 맞물려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계속 경관을 얘기하고 도시의 풍경을 얘기하는데, 대부분 조경은 마당 꾸미는 정도로 생각하잖아요. 먼저 서울의 경관을 자세히 보고 '남산은 왜 아름다운가?', '남산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인왕산은 왜 아름답고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렸을 때 뭘 그렸느냐'를 봐야죠. 인왕산은 지금도 어디서나 보이고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의 바위산도 그냥 보이는데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끔 설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지금 없는 거예요. 계속 사람들은 "거기다 꽃나무 갖다 심으면 된다. 무궁화 심으면 된다."라고 하는 식인데 나무는 더 안 심어도 돼요. 그냥 풀이면 어때. 원래 있던 나무를 잘 가꾸면 되는 건데요. 역사적인 유래를 일일이 써 붙이기 어려우면 좋은 가이드들을 훈련해서 가이드를 따라 함께 다니게 한다든지 하면 좋겠죠. 잘 배우신 퇴직한 분들을 데리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우리나라의 역사라든지. 일제 하의 항일 정신이라든지, 6.25 후에 얼마나 참담했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고쳤는지, 그 과정을 직접 코스로 돌아볼 수 있잖아요.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서, 한강을 따라 그 아름다움을 한번 봅시다’해서 한강 상류까지 따라가 볼 수도 있고요. 어떤 주제를 가지고 경관에 초점을 두든, 역사적인 사실에 초점을 두든 만들 수 있어요. 공직자들이 업적을 남기려고 있는 나무 없애고 다시 심는 거보다도 오히려 지금 어떻게 해설하고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를 생각해야 해요.   지금 후배들에게 설득의 기술에 관해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최선을 다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도면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 마음에 들기보다 의뢰인의 요구를 보고, 장소에 맞는 좋은 정원이나, 좋은 공원, 좋은 어떤 도시 설계를 하기 위해서 외국 작품만 들여다보지 말고요. 공부는 해도 끝이 없어요.   최근에 성수 디올 프로젝트나 북촌 설화수의 집도 그렇고 선생님이 만드신 공간이 젊은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있잖아요. 디올이라든가 설화수의 집, 도산공원 앞 사우스케이프의 작은 정원도 대성공했죠. 프랑스 크리스챤 디올의 정원 풍경에 한국 풍경을 살짝 가미했어요. 외국 것과 우리 것이 잘 융합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설화수의 집은 제품에 쓰이는 원료만 가지고 이렇게 예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선생님이 만드는 한국적인 풍경들이 젊은이들의 감성까지 건드리는 것 같아요.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시나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은연중에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안목이 있을 거잖아요. 지금 내 집 정원에 외래종은 10%도 안 돼요. 우리나라 풀과 나무로도 이만큼 예뻐지는데 굳이 외국 것을 할 필요는 없어요. 내 것을 알고 난 후에 외래종을 다루어야 하는데, 너무 천편일률적인 꽃을 심으면 빨리 싫증 날 거라고요.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정원이 그래 왔어요. 예를 들어,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집 정원에서 잔치한 이야기라든지. 나무 심고 꽃 심고 가꾸던 이야기라든지요. 그때 꽃이라는 게 고작해야 작약이나 난이었겠지. 외래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나라 종을 먼저 쓰고 이해하면서 조화롭게 함께 써야 하는데, 지금은 극과 극으로 가잖아요.   경춘선 숲길을 가장 애정하는 프로젝트로 꼽으셨는데요. 어떤 장소로 바뀌길 원하셨는지요. 경춘선 전에 광주에서 철도를 없애고 공원화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서 거기도 꽃 심는 대신 그냥 풀만 두고 걷게 하자 했는데, 지금은 다 바뀌었을 거예요. 그때부터 '철도가 앞으로 이렇게 못 쓰게 되는 곳이 많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마침 경춘선 프로젝트가 나왔어요. 내가 맡은 게 시골 쪽인데, 그동안 기차가 지나다니면서 그곳 아파트 주민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어요. 그래서 이곳은 최대한 아파트 주민들이 쓸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생각했어요. 아파트와 격리하지 말고, 있는 나무만 약간 놔두고 아파트 쪽에 담도 거의 안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그다음 철도가 있던 곳을 사람들이 쓰게 하고 밭이나 꽃이나 과일나무를 심어서 화사한 계절미를 느끼게 하고 싶었죠. 경춘선 역 쪽은 그 옛날 군대 갔던 사람들의 추억도 있으니 문화시설로 하되, 너무 요란하지 않게 하자 했는데 뜻대로 안 되더라고요. 다만 기를 쓰고 고집한 게 이곳은 아파트 주민이 주인이지, 서울에서 커피 사 마시러 오는 사람이 주인은 아니라고 했어요. 커피숍은 제발 그만하자고요. 나도 커피를 좋아하지만, 너무 커피숍만 있어요. 그 근처에 사는 어린이 중에 늘 아침저녁으로 그 둑길을, 그 녹지 속을 거닐다가, 제2의 하이데거나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분들도 늘 산책하다가 영감을 얻듯 말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머물거나 쉴 수 있는 공공장소가 없어서 커피숍들만 늘어가는 것 같아요. 꼭 커피숍이 있어야 하나 싶죠. 예를 들어 주말장이 열린다든가, 외국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기 집 텃밭에서 키운 것을 파는 행사를 한다든가, 그런 행사가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중심으로 달라지겠죠. 그래서 공원 자체가 쉴 공간을 제공해야 하는데, 쉬는 방식이 꼭 커피여야 하느냐, 꼭 운동만 해야 되느냐는 거죠.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잖아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외국의 많은 도시 공원 혹은 도시 광장의 가이드를 어떻게 하는지, 지역 사회 문화를 어떻게 가이드하는지 하나씩 배워야 해요. 우리나라 인구가 고령화되다 보니,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봉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죠. 산책하는 도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울은 산책할 데가 지천이죠. 강을 따라 오가면 대단히 좋은데, 강에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나무만 심어 놓고 잔디밭, 놀이 시설, 텐트 치는 곳만 있죠. 아니면 운동하는 자리나 주차장뿐이고요. 결국, 한강을 따라 한강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꾸려 놓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반 고흐는 늘 밖에 나가 산책하면서 동네를 그렸잖아요. 그곳에서는 그림 그린 자리에 고흐 그림 사본을 놓아둬요.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면 알아서 산책하는 거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요. 기념관 짓는다, 뭐다 난리 피우지 않아요. 우리나라 같으면 "여기는 옛날에 어떤 선비가 시를 짓던 정자가 있던 터입니다. 여기는 누가 정자를 넣고 그림을 그리고 쉬었던 자리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안내만 해두면 지나가면서 배를 타고 가다 가도 "그렇구나!" 알게 되죠. 그걸 또 요란하게 만들까 봐 말을 못 하겠어요.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할 수 있고 또 내게서 배운 후배들이 일할 때 바라는 건, 아무리 세상이 달나라를 가고 과학과 경제가 발달하더라도, 여기는 한국이고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하는 거죠. 우리나라는 경치가 좋은 나라고, 국토의 80%가 산이고, 동해, 서해, 남해가 전혀 다른 형태의 바다가 있는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나라였다고요. 끊임없는 전란과 개발 드라이브에 많이 시달렸지만 그래도 우리의 원풍경은 이런 아름다움과 멋진 것을 담고 있었으니까 더는 그걸 잃지 않고 지속할 수 있게끔 하자는 거죠. “어떤 나무를 심어라, 꽃을 심어라, 이게 조경이다."하고 예쁜 꽃밭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 방안으로 우리 경관을 잘 보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갈까. 우리 땅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보존해야 할 거 보존하고 가꾸어가야 한다는 거죠. 저는 그걸 연구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니까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SPECIAL 오늘에 담은 우리 땅의 풍경, 조경가 정영선 ② 선유도 공원은 차별화된 도시공원을 선보였던 프로젝트였는데요. 선유도 공원 설계 당선이 1999년일 거에요. 첫날 가보니 여긴 이대로 보존하는 게 사는 길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지고 그 옛날의 기억이 녹색으로 덮인 선유도가 좋겠다 생각해서 최소한만 손댔어요. 대신 섬의 모양이 배와 같으니, 갑판을 오르락내리락하듯 옛 물탱크를 이용한 정원을 만들었죠. 공모전에 당선된 후 서울시에서 발표하라고 불렀어요. 서울시장, 부시장 비롯해 서울시 모든 국장, 담당 관계자가 앉아 있었어요. 그때 강홍빈 교수가 너무나 고마웠죠. 첫 마디가 “이거 작품 됩니다. 일체 손대지 말고 정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하세요” 하니까 공무원들이 입도 벙끗 못한 거예요. 나한테 할 말이 있냐기에, ‘설계한 후 공사 과정에서 건축가나 조경가가 감리해야 합니다. 특히 리뉴얼은 매우 복잡해요’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든든하게 방어를 해주셨죠. 그런데 서울시 조직에서 공정관리, 중간시찰 등을 오면 우리는 매일 낙제인 거예요. 전쟁터니까. 갖은 욕을 다 먹었어요.   선유도는 이제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됐어요. 막 문을 열었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문 열기 이틀 전에 갔어요. 들어가려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상한 공원을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 싶어서요. 그전에 이 공원은 특수하니 자원봉사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자원봉사자 100명 정도 뽑아달라 해서 그들에게 환경 교육을 하고 재생이 무언지를 미주알고주알 알려줬어요. 장소마다 여기서는 이런 얘기, 저기선 저런 얘기들을 막 설명해줬죠. 그렇게 교육을 해놔도 나중에 가보면 그 사람들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웃음) 문을 여는 날 또 갔죠. 테이프 끊고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데크를 달리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위험한데, 아이고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자원봉사자들 교육을 했는데, 아무도 안된다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지르고 다녔어요. ‘시간의 정원’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 풀고 앉은 이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강변이나 다른 곳으로 가시라, 여기는 환경을 교육하는 환경공원이다’라고 했죠. 그렇게 네 번쯤 나가서 악역을 자처해 소리 지르고 다니니까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후에는 ‘조용히 있기 좋습니다’, ‘기도하기 좋습니다’ 하고 전화가 와요. 그래서 괜찮았나보다 했죠.   시간이 흐를수록 선유도 공원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아요. 말 마요. 심사 때는 조경 심사위원과 교수들이 ‘왜 고급 타일을 쓰지 않았느냐’ ‘왜 페인트를 칠하지 않았느냐’ 말들이 많았어요. 설명할 때도 ‘한 백 년 후에는 이곳이 녹색 덩어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 시기에 수변 공간을 개선하고 공원도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여의도 샛강 설계를 그 무렵에 했어요. 거기도 웃지 못할 일이 있어요. 지금 모습은 두 번째 리뉴얼인데, 처음 리뉴얼에서는 데크 만들고 수로 만들고 버드나무 살리는 일들을 했어요. 한강 관리소에서 주차장과 체육공원 만들려는 걸 샛강을 그렇게 보존하면 안 된다고 내가 고집을 피웠어요. 설계비를 안 받아도 좋으니 그 돈으로 여러 생태학자를 데리고 소신껏 고쳐보겠다고 했죠. 자문비 1천만 원을 만들어주시더라고요. 곤충 생태학, 뱀 생태학자, 식물 생태학자 등 모두 매일 앉아 조사했어요. 그때는 홍수로 피해 본다고 버드나무도 다 베어낼 때였어요. 하도 홍수 이야기를 해서, 마침 생태조경 일인자인 세계적인 조경가가 한국에 와있어서 그분을 한강에 모시고 갔죠. "여기에 생태공원을 하고 싶은데 정말 홍수의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봐주세요.” 했더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담당 공무원을 끌고 샛강에 가서 ‘풀이 눕는다’라는 시도 읽어주고, 물에 대한 시도 읽어주면서 "여보세요. 여기가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랬죠. 홍수가 오면 한강에 물이 넘치는 게 당연하잖아요? 데크 떠내려가면 내가 새로 해드린다고 큰소리쳤거든요. 다행히 홍수가 와도 말짱해요. 오히려 고민한 것은 모기였어요. 습지를 만들면 모기가 생길 텐데 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할 줄 알았어요. 또 그땐 갈대숲, 보리밭, 억새 숲에서 성범죄가 많이 일어날 때였어요. 나는 억새도 남겨놨거든요. 뱀 나오면 어쩌나, 범죄가 일어나면 어쩌나 어찌나 걱정되던지. 그런데 아파트 주민들이 살살 산책을 나오더라고요. 공사가 끝날 무렵 아파트 가격이 올랐어요. 사람들에게 물으니, ‘집 앞에 이렇게 자연스러운 공원이 생기는데 누가 마다하겠어요’ 하더라고요. 여전히 서울시 심의위원들은 감사 때 나를 불러서 이게 무슨 공원이냐며 난리였죠. 그래도 시민들이 좋아하니 얼마나 좋아요.   여의도 샛강 프로젝트는 수변공간이 달라진 계기를 만든 것 같아요. 당시 생태학자들과 매일 방에 모여 토론했어요. 지금도 모니터링 하고 있거든요. 2차도 우리가 했지만, 리뉴얼하면서 이상한 다리, 시설들, 야외무대 등이 들어가는 바람에 마음에 안 들어요. 여기까지가 공공프로젝트를 맹렬하게 하던 시기예요.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와 공공프로젝트를 이어오다가 개인과 기업의 프로젝트를 주로 하게 되셨는데요. 희원이 그 전환점이 아닐까 싶어요. 어느 순간 공공프로젝트 하나 마무리하는 데까지 너무 지치는 거예요.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삼성과 관련을 맺게 됐어요. 옛 자연농원, 지금의 에버랜드 설계실에 제자가 있었는데, 한국적인 것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당시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 조경의 역사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한국 조경의 차이를 동시에 가르쳤거든요. 그 제자가 찾아와서 의뢰한 게 그 무렵 자연농원 개조였고, <희원>의 전신이던 시절 한국적인 정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나에게 딱 맞았죠. 그때부터 한국 정원을 많이 하게 됐어요. <희원>을 하면서 서세옥 선생 등 한국화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의견 교환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희원>을 개관하기 전에 이건희 회장님이 시찰을 왔어요. 당시 회장님 지시서가 따로 있었는데, 사실 조경에 실제 반영된 것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같이 다니며, ‘호수에 폭포 만들자 한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건너편 산에 자전거 도로도 만들라고 하셨는데 영빈관이나 희원에서 바라보는 산이니 그런 걸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이 벚나무, 단풍나무 많이 심으라고 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여서 그대로 했습니다.’ 등등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니 ‘인간 컴퓨터네’ 하시더라고요. (웃음)   프레젠테이션 기술이 뛰어나셨네요. 간부들은 우황청심환 먹고 회장님 앞에 가곤 하더라고요. 나야 그럴 건 없었죠.   <희원>이야말로 한국 정원의 정수를 담기 위한 작업이었는데요. 선생님에게도 중요한 프로젝트였을 것 같아요. 그룹의 사모님들이나 여러 인사가 내가 만든 정원을 보니 괜찮아 보였나 봐요. 그래서 연수원 고치는 일, 사옥 고치는 일, 산 하나 만들고 소나무 숲 만드는 일 등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 마음에 그래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향수 내지는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느닷없이 빌딩이 들어서고 개발만 하니까. 아시안게임이며 올림픽이며 엑스포며 하면서 수준이 높아지고, 조경이란 개념이 없다가 제대로 하니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 거죠. 마침 대전 엑스포나 올림픽, 여러 사옥, 코엑스 등 전부 우리가 했으니까, 각기 다른 상황이지만 꽤 한국적이라는 느낌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렇게 기업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좋은 후원자가 많이 생겼죠.   선생님이 원 없이 디자인하고 보여줄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군요. 의뢰인 대부분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하셨으니까요. 불만도 품지 않으셨고요. 그 와중에 안목이 까다로운 분도 있었어요. 의뢰인이자 선생이죠. 더 간결하면 좋겠다, 색이 복잡하다, 이건 필요 없다 등등 정확하게 집어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지금 아름지기 이사장. 나에게는 영원한 멘토이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죠. 점잖지만, 당신이 하는 일에는 치열해요. 나는 그 치열함이 아주 좋아요. 한번은 별장을 만드시는데 나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거에요. 그래서 ‘한강 물이 굽이 들어오는 걸 봐야 하니 마치 섬에 있는 것처럼 하고, 여긴 정자가 들어오면 좋은데 법적으로는 지을 수 없으니 바라보는 공간을 이렇게 만들고’ 등등 이야기했더니 마음에 무척 드니 그대로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생각도 억지로 해내려고 하면 안 될 텐데, 오랜 기간 좌충우돌하면서 돌아다니고 혼자 책으로 공부하면서 정리 안 된 채 쌓여있던 게 디자인하면서 하나하나 풀렸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글로 써서 자랑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지금도 나는 내가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계속 원고만 쌓이는 거예요. (웃음)   그 외에 애착을 갖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개인 프로젝트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사우스케이프>죠. 건축하는 조민석 씨가 나를 추천했겠죠. 현장 다녀와서 의뢰인에 보고하는데, 이상한 꽃이나 나무를 심기보다는 남해 풍경을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잔디 위주로 갔으면 좋겠다 했죠. ‘다음 회의 때 샘플을 보여드릴게요’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계약이 됐어요. 디자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하지 않고 단지 내가 지나치게 이상하게 쓸까 싶으면 딴지 걸 정도로 절제된 분이에요. 너무나 해맑고 즐겁게 매일 맛있는 거 먹으면서 했죠. 그 작품 아주 마음에 들어요.   사우스케이프의 동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했어요. 원래 산을 깎아 한쪽은 호텔, 한쪽은 클럽하우스를 지은 거거든요. 남은 돌이 으스러진 걸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해서 ‘그건 아니죠. 계속 부스러질 텐데, 거대한 암석정원으로 만들게요’ 했어요. 정원이라기보다 남해나 동해 바닷가 벼랑 끝에 잘 피는 해국 같은 거 심고, 풀 나오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날아온 소나무 씨앗이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어떻게 변할지 천천히 두고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사우스케이프 공사팀과 제주도에서 나와 함께 했던 파트너 팀과 같이 부스러진 돌을 다 골라냈죠. 조개 캘 때 쓰는 날카로운 공구로 큰 바위들 틈 사이를 다 긁어내고 좋은 흙을 메워 넣고 식물을 심은 거죠. 갯가에 피는 들국화를 심었어요. 다듬고 디자인된 공간이라는 걸 느끼게 하려고 마치 물이 흘러내려 고인 것처럼 연못을 만들고 나무도 심고 한 거죠. 야생에 맞는 식물을 심었어요. 섬에서 바람에 시달린 거 같은 나무요. 거기에 관상수를 심을 건 아니죠. 가능한 한 자연을 잘 볼 수 있게 산 정상에서 이 지붕선을 살려야 했어요. 그러니 나무를 복잡하게 살릴 수도 없고, 이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연상, 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연상을 할 수 있도록 흔들리는 풀을 심겠다고 했어요. 나무도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바닷바람 맞고 자란 나무를 갖다 놓은 거죠. 근처에는 흰 꽃만 심어놨는데, 요새는 당신들이 꽃을 나보다 더 얌전하게 잘 심어놔서 칭찬해주고 왔죠. (웃음)   문학소녀여서 그런지 나무나 풀을 설명하실 때도 시적이에요. 그래야 설득이 되지, 수목 이름만 나열해 놓으면 안 되죠.   선생님이 풍경을 시처럼 바라본다는 의미겠네요. 그렇죠. 문학이든 그림이든 옛 고사이든 전설이든 그런 것에서 적절한 인용을 슬그머니 하는 거죠. 내가 긴장해서 보고하면 그 공모전은 항상 떨어져요. 즉석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웃음) 미리 준비해서 설명하면 입력이 안 되더라고요. 의뢰인들을 보면 현장에서 내가 느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유리하겠다는 감이 딱 와요.   타고나신 건가요, 아니면 사회 생활하시면서 길러진 걸까요? 나는 대인관계가 굉장히 어눌해요. 일단 사람들을 별로 안 만나요. 굉장히 폐쇄적인 사람이에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동창회다 계다 조경 관계다, 그 많은 모임에 일절 안 나가요. 나갈 시간도 없고, 나가서 할 말도 없고요. 세상사에 어눌한 사람이라 아직 평생 사우나, 찜질방, 노래방도 한 번 안 가봤어요. 노래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참 궁금해. (웃음) 지금은 프로젝트가 많이 끝났는데, 건축이라면 보수할 일이 있어서 몇 년에 한 번 볼 수 있겠지만 우리는 하도 자주 바뀌니까요. ‘나무가 죽었습니다, 태풍이 와서 아니면 눈이 와서 가지가 부러졌습니다’ 등등 별 상황이 다 벌어지니까 그 생각하기 바빠요.   끊임없이 돌봐주어야 하는군요. 안 해줄 수 없으니까, 의뢰인들도 좋아하죠. 또 특별한 날 손 봐달라고 하면 나도 흔쾌히 봐주고요. 그러니 스스로 너무 힘들어지죠.   건축가와 협업을 많이 하셨어요.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에서 늘 선생님의 조경을 만나게 돼요. 열심히 하니까 행운이 온 것 같아요. 승효상 선생이나 아모레퍼시픽 프로젝트로 김종규 선생과 협업을 해왔죠. 승효상 선생과 중국 가서 한 일도 있어요. 아모레퍼시픽의 첫 인연은 김종규 선생과 알바로 시자 선생의 용인기술연구소를 하면서였어요.   구릉도 선생님이 만드신 건가요? 그럼요, 내가 한 거죠. 그냥 자연인 줄 알았죠? 옛날에는 국민학교 교정처럼 축구장 하나, 운동장 하나, 주차장 하나 이렇게 있었죠. 초기 리뉴얼 과정에서 알바로 시자 선생이 건축하고 주변 조경 설계를 내가 맡았어요. 아무리 봐도 실내체육관도 있는데 운동장이며 축구장이 꼭 필요한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회장님에게 다 없애고 완만한 구릉을 만들겠다 하고 모형을 만들어 갔어요. 시자 선생도 회장님도 좋다고 해서 고쳤죠. 시자 선생도 공식적으로 내게 고맙다고 하고, 연수원 관계자들도 고맙다 했죠. 그렇게 흙을 드러내며 연수원 지형(land form)을 다시 만들었죠. 공사 기간은 촉박한데 심지어 땅은 너무 척박해서 식물이 살기 좋은 흙으로 못 만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본 콘셉트는 잘 살리고 건물 주변도 하나씩 다 고쳤어요. 이후 이니스프리, 오설록 등을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고, 용산의 신사옥도 하게 됐죠. 회장님은 그 프로젝트들이 비슷한 거 같지만 또 다 다르다는 걸 아세요. 내가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건축에 맞게, 작가에게 맞게 간다는 걸 아시죠. 사람들도 느끼겠죠.   용인 기술연구소에서 건축가와의 협업은 어떠셨나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알바로 시자 사무실의 협력 건축가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그냥 자갈만 깔라고 하는데, 자갈만 깔면 여직원들은 하이힐 신고 못 다니잖아요. 그 고집도 못 말리겠더라고요. 그가 곡선으로 잔디만 깔라고 고집을 피우는 걸 나도 ‘아이고 모르겠다.’ 하면서 자작나무를 심었어요. 나중에 빼라고 하면 빼지 뭐, 이러면서. 결국은 좋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상층부의 굵직한 매스감이 저층부의 조경과 만나면서 아늑한 중정을 만들고 있어요. 좋은 느낌이었어요. 그게 없으면 맛이 없죠. 시자 선생의 건축은 참 철학적이에요. 주변의 경관을 어떻게 건축에 끌어들일지 귀신같이 알아요. 신의 한 수를 쓰시는 분이죠. 그런데도 내가 조경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그걸 다 납득하세요. 경관을 건축에 끌어들이는 방식이나 경관과 매치시키는 방식은 그동안 내가 만난 세상의 건축가 중에 최고라고 봐요. 그래서 그분을 참 좋아해요. 서로가 고집불통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웃음)   알바로 시자의 건축은 힘도 있지만, 또 굉장히 절제되어 있는데요. 선생님은 그런 공간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해요. 그렇게 철학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고, 시자 선생이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됐어요. 그래도 최소한의 파운데이션 플랜팅(foundation planting)은 있어야 한다고, 그냥 잔디나 자갈밭은 아니지 않느냐며 설득했어요. 근무하는 사람이 창 너머로 살랑거리는 나무 이파리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든지, 이 터가 아주 오래된 터이니 선대 회장 때부터 쓰던 나무 한 그루를 갖다 놓아서, 예부터 있던 터에 이 건물이 들어서는 거라든지 내 나름의 스토리를 만든 거죠. 그 과정에서 시자 선생은 다 좋다고 했는데, 시자의 협력 건축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담당 직원은 죽을 고생을 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의 직원들은 어느 면에서나 건축의 형태가 잘 드러나도록 하지, 내가 벽에 그림자 효과를 내겠다, 숲을 끌어내겠다 하는 건 먹혀들어 가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나대로 고집을 피웠죠. (웃음) 적당한 선에서 절충을 해요.   외부에서 들어와 중정이 펼쳐졌을 때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없었다면 너무나도 건축적인 공간에 당신이 만든 가구에, 카페트에, 조명에, 책상에 너무 하잖아요? (웃음) 한 예로 제주도 주택은 가장 제주도답게 하려고 해안 파도가 부딪히는 곳에 원래 살던 식물 같은 풀을 넣고 물을 만들었어요. 내가 봐도 좋더라고요. 돈을 엄청나게 들인 정원도 아니거든요. 돌을 깐다든가 쌓는다든가 하지도 않았고 나무도 근처 바닷가에 있는 것들을 가져다 둔 거예요. 그런데도 좋아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화장품과 관련한 식물의 모든 것을 담은 장소잖아요.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 듯해요. 당시 화장품 공장을 오산에 옮긴다 해서 봤더니 공장을 하나 놓고 지금 원료식물원과 연못이 있는 자리에 직원들이 쓸 운동장을 만들어 놨더라고요. 앞에 다른 상가와 공장들이 보이는 길가를 녹지로 가리도록 설계해달라고 왔더라고요. 회장님에게 바로 전화했죠. "회장님, 제가 직접 전화드려서 죄송한데, 제가 여기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땅 다 제게 주세요. 내가 정원으로 다 만들랍니다." 그랬더니, "그러세요." 해요. 무엇을 하려 하냐고 물어서 "축구장은 실내 체육관이 있으니 없어도 되고 다른 곳에도 해도 됩니다. 저는 식물원 만들고 싶어요.” 하니 "그러세요." 하더라고요. 아모레퍼시픽 일을 하면서 화장품 원료를 다 뒤져보니까, 한방 원료도 있고 우리나라 풀도 있고 꽃도 있고 곡식도 있고 우리나라 전국의 나무가 다 있고 외국 꽃과 나무도 있었어요. 여기 쓰이는 화장품 원료를 뽑아 놓은 자료가 이만큼 쌓였죠. 미리미리 공부해놓은 거예요. 기절초풍할 정도로 정열을 쏟았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식물원이에요. 그냥 식물원이라 하면 애매하니까 진짜 화장품 원료만 가지고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화장품의 보습이냐, 분이냐 이런 기능에 따른 분류도 하려고 했는데, 그럼 기업의 비밀이 노출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정보는 우리만 알자고 했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다니는데, 그게 하나하나 화장품의 보습제가 되고 미백제가 되는 원료예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긍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온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다들 온실이 원료를 재배하고 번식하는 정도로 생각해서, 건축가가 공장건축보다 온실이 높아지면 이상하다고 반대하더라고요. 일리는 있지요. 공장 건물도 벽돌로 나지막하게 만들었는데 온실이 느닷없이 높아지면 이상하겠죠. 재료만 기르는 거면 낮아져도 되지만 손님들에게 보여줄 온실이라 큰 나무들도 안에 넣어야 했어요. 이걸 높일 방법을 찾는 거구나 싶어서 땅을 한 2m 팠어요. 아래쪽에다가 휴식 공간 만들고 식물도 아래쪽에 두어서 높이를 높이지 않고 해결해 드렸죠. 아이고, 머리 쓰느라고 고생했어요.   정원에 영업 비밀이 다 숨어 있는 거네요. 원료식물원이 기업의 정체성을 정원에 담았다면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전혀 다른 콘텍스트인데요. 아마 관공서였으면 지금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안쪽이나 중정의 백합나무나 튤립나무(백합나무과) 같은 값싼 나무는 못 쓰게 했을 거예요. 그 나무를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옛날 김수근 선생이 대학로에 건물 지으실 때 백합나무를 썼고, 지금도 가보면 한 그루 남아있는데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고요. 그 옛날에는 월동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걸 김수근 선생이 꿋꿋하게 밀고 나갔고, 또 잘 살아남아서 건축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아느냐고 했죠. 원래는 담당자들이 소나무 심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여기도 저기도 다 소나무인데 현대적인 건물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이 나무 한 가지만 쓰겠다고 고집을 피웠죠. 말이 쉽지 그 고집을 관철하기도 힘들었지 않겠어요. 자꾸 다양한 나무를 심으라고 했으니까요. 다음으로 어려운 건 큰 키의 오래된 나무를 구하는 거였어요. 이식하면 잘 죽으니까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 공사 기간이 몇 년 남아있으니 미리 계약하고 뿌리내리게 해서 죽지 않게 하자는 거였어요. 밭을 미리 하나 사서 몇 년에 걸쳐 가꾸는 거예요. 삼신한테 빌 듯이 잘 커 달라고 빌면서 하자 없이 가져다 옮긴 거죠. 건물 중간의 옥상정원 봤나요? 그것도 근사하죠? 그건 단풍나무예요. 내가 단풍 중에서도 다관형을 쓰겠다고 했어요. 다관은 밑에서부터 가지가 많이 올라온 것을 말하거든요. 그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굵어져요. 엄청나게 헤매다가 서해 당진 쪽에서 찾았어요. 단풍이 있는 밭을 사서 최소한 1년 반 전에 뿌리를 돌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구해다 만든 거예요.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에 있는 정원은 허공에 뜬 도심 정원이잖아요. 접근 방법도 달랐을 것 같아요. 정원의 형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치퍼필드 쪽에서도 일단 곡선으로 해놓고 큰 남산 소나무 하나 심고 잔디를 심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큰 나무는 살 수가 없다, 하자가 생겨도 감당을 못한다고 계속 이야기했는데도 바뀌지 않아서 몇 년에 걸쳐 싸웠죠. 나는 단풍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어요. 두 번째, 나무가 하나로 되어 있으면 금방 죽을 수 있어요. 단풍은 가지 하나가 죽어도 트렁크가 많이 나와 있으니 표가 안 나거든요. 한 그루만 심어도 여러 그루를 심은 효과가 나요. 불과 몇 그루여도 서늘한 공기를 만들 수 있어서 직원들이 쉴 수 있고요. 이 큰 공간에 소나무 몇 개 심는다고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미군 부대나 남산의 유사한 나무 흐름이 무슨 효과를 보겠어요? 나도 고집 많이 피웠죠. 우리 박성진 소장이 엄청나게 고생했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조경은 생육을 다룬다는 점이 중요하네요. 그렇죠. 조경이라는 게 건축 재료와 비교한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루는 거잖아요. 내 순간에서 영원히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변화가 주변 환경으로 인해 순리적으로 변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니까요. 두 번째로는 나무나 꽃과 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그걸 살게 하는 흙도 살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걸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흙이라는 게 살아 있는 거니 어떻게 보살피고 조합해야 하는지, 해당 나무와 환경에 맞게 어떤 조건을 형성해야 하는지 관심이 없잖아요.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또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매 순간 변화한다는 변화성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꽃 피고 단풍 지는 정도만 알죠. 하지만 버드나무가 2월에 이미 노란 빛을 띠면서 주변 공기가 노랗게 색이 변한다는 건 몰라요. 어떤 나무는 싹이 틀 때 반짝거리고 어떤 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쑥 하고 싹이 올라오고, 봄날의 변화에서 시작해, 바람 불 때는 어떤지, 더위에는 이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을에는 어떻게 단풍이 드는지 모르죠. 심지어 겨울에 잎이 떨어졌을 때 남아있는 가지의 구조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심다 보면 나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주지 않는 거죠. 여러 가지를 섞어 놓으면 조화도 안 되잖아요. 요즘 짓는 아파트의 조경이나 공원을 보면 온갖 나무를 빽빽이 심어 놔요. 그 모습이 1년 내내 어떨지는 생각을 못 해요. 그냥 꽃이 예쁘니까 심는 거지. 이 나무를 심으면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새가 오고, 어떤 색의 변화가 있고, 각 나무가 어떤 계절성을 갖는지 알려고 하지 않아요. 옛사람들은 청아한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대나무를 심고, 달빛을 맞이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또 뛰어노는 개구리를 보기 위해 연꽃을 심었어요. 신사임당의 <초충도>처럼 꽃 하나 그리면 거기 곁들여지는 벌레들, 날아오는 나비 등을 맞게끔 신경 썼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런 게 없어요. 어떤 새가 오고 어떤 분위기가 될 것인지. 그 나무로 인해 오는 변화나 움직임을 보지도 못하고 못 하는 거죠.   또 조경이 변화성만 강조할 수 없잖아요? 건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죠. 내 나름대로는 밤잠 안 자고 정확한 게 떠오를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생각해요. 가령 저 건물에 남산의 소나무를 가져왔을 때 지형을 건축, 주변 환경과 어떻게 잘 맞게 할지를 생각해요. 기본적인 태도나 형태랄까, 정신이랄까. 물론 금방 생각날 때도 있지만요. 땅과 건축이 만날 때 건축가는 땅을 평편한 지반으로 보지만, 내 경우에는 지형을 만들면 좋겠다 하면서 건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죠. 나 역시 시대적인 흐름에 대해서 왜 관심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지나 보니 그걸 따라야 할 명분이 없더라고요. 훌륭한 건축을 가보면 다 그 환경, 그 건축에 맞는 거지, 건축 따로 조경 따로 놀지 않아요. 외국 조경가들과 만나서도 이야기해보면, 무엇보다 조경은 건축 없는 공간이 없으니 건축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해요. 공원을 설계할 때도 가장 초기에 여기에 가장 잘 맞는 건축가는 누구일까 생각해요. 초기에는 선유도 전부터 조성룡 선생께 소신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늘 맞게 해주셨고요. 조성룡 선생이 내 잔소리 듣기 싫다며 우리 사무실 소장들과 일하려고 해서, 내가 배반했다고 웃으며 놀리지만요. (웃음) 건축가와 대화가 안 되면 일이 안 되더라고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건축가를 설득하겠다고 조경이 뭐 별나다고 잘난 척하다 보면 절대로 설득 못 해요. 허심탄회하게 해야죠. 작전상 일부러 일자무식한 할머니처럼 나갈 때도 있어요. 그러면 말려 들어오죠. (웃음)   ‘설득의 기술’이라는 책을 내셔야 할 거 같아요. (웃음) 의뢰인에게 보고할 때의 태도, 건축가에게 처음 만나 안을 설명할 때 태도가 다 다르고 모두 중요하죠. 오희영 선생님 나를 두고 한 얘기가 있어요. 내가 모든 사람의 의견에 대해 다 알겠다고, 잘 반영하겠다고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대요. 그런데 결국 자기 뜻대로 다 하더래요. 그걸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니까. 그건 내가 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거죠.   무엇보다 건축가와 협업은 계획 초반부터 같이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참 좋겠는데, 건축가 대부분 건물을 지으면서 조경가를 찾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참 얄미워요. 아주 오랫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특히나 조경 설계비가 건축이나 시공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거든요. 그럼, 사람 시달리는 거 말도 못 하죠. 조경은 사실 수익이 마이너스에요. 그런데도 그렇게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결국, 둘 다 땅을 다루기 때문에 서로 간의 이해가 중요하겠어요. 건축은 도시계획, 어반디자인을 이해해야 하죠. 그리고 땅을 단단한 지반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땅을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로 보니까요. 도시도 그렇잖아요. 박완서 소설처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하는 거죠. 그런 걸 다 감안해줘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공간에 어떤 개성을 불어넣을 것인가, 어떤 성격을 줄 것인가, 어떤 풍경으로 연출할 것인가 하는 건 매 건 달라야 해요. 한국 정원이라는 하나의 이름이지만 놓이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요. 모든 건축도 건축가가 다르고 도심이다 근교다 서울이다 지방이다 등 모든 건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서 그에 따라 조경도 달라야 하죠. 보통 어떻게 조경을 할지는 땅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이 나요. 다만 그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합리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찾는 거예요. 나 혼자서만 진땀 뻘뻘 흘리는 거죠. 아직은 우리 사회가 너무나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게 나는 싫어요. 이상하게 해놓은 것 뒷수습하려면 아주 머리가 지끈해요. 지금도 그런 일이 많고요. 재미있는 건, 내가 아는 의뢰인들은 내가 한 것인지 아닌지 다 알아봐요.   여러 장르를 다루지만, 어쨌거나 나는 한국 사람이고 여긴 한국이니, 우리나라 민족 정서와 우리 땅에 맞는 것이면 좋겠다 싶어요. 공공 건축이고 공공 조경이고, 도시고 농촌이고, 정리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품격을 찾는 것, 한국적인 것을 현대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다이나믹함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현대에 나라가 너무 바뀌다 보니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죽고 나면 정말로 전통이 없어질 거예요. 그래서 더 아등바등 하나 봐요. 그렇다고 옛것을 그대로 남기는 건 이 시대에 안 통하잖아요. 그래서 돌 하나라도 고심해서 놓는 건데, 다들 그게 좋은 건 알면서 안 하더라고요. 좋으면 실현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인터뷰 임진영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③으로 이어집니다.  
제4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오픈하우스서울 대양역사관, 스티븐 홀+이인호 10월 7일 11:00AM
제4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오픈하우스서울 대양역사관, 스티븐 홀+이인호 10월 7일 9:30AM
SPECIAL 오늘에 담은 우리 땅의 풍경, 조경가 정영선 ① 한국적인 풍경을 우리 시대에 구현하며 한국 조경의 고유한 정서를 펼쳐 온 조경가 정영선은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熙園)’, 선유도 공원, 경춘선 숲길 등 서울의 주요한 수변 공간, 공원, 녹지 등을 구현해 왔다. 1941년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란 정영선은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주부생활> 기자로 활동하다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로 입학한다. 1980년 조경기술사를 취득한 최초 여성 기술자이기도 하다. 청주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조경 설계 현장으로 복귀한 후 1987년 조경설계 서안을 설립해 본격적인 조경 작업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조경가 정영선은 이 시기 국토 곳곳을 걸으며 우리 땅의 꽃, 풀, 나무 등을 조사하면서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한국의 경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땅의 고유한 풍경에 대해, 그리고 한국 조경의 고유한 정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 고민하고 실천해온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의 꽃과 식재가 어우러진 소박함과 평온함이 담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정영선은 서울이 옛 도시 한양의 경관 – 옛 그림과 시에 남아 있는 한강 풍경을 회복하는 비전을 말한다. 조경계의 거장이자 한국 조경의 굵직한 행보를 만들어 온 조경가 정영선은 지난 9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조경가협회가 수여하는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이번 오픈하우스서울 특집에서는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과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가 꿈꾸는 서울의 경관을 나누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도시의 공원, 광장, 정원에 주목하고 그 여백의 가치를 알리며, 도시 공간에서 녹지의 역할과 중요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출생연도를 여쭤봐도 될까요? 41년생이에요. 팔순을 넘겼어요. 지금 작업한다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 많을 거예요. (웃음) 영국이나 미국에는 80살 넘도록 작업하는 유명한 여류 조경가들이 있어요.   선생님 작업이 벌써 5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왜 이토록 미친 듯이 달려왔는지 싶어요.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두 가지가 큰 주류를 이뤄요. 하나는 간과했던 공공 건축과 공공 조경에 대한 것이에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 전통을 현대화하고 이 시대에 맞게끔 한국 정원의 원형을 찾고 복원하는 것, 이건 꿈에서도 소원이에요. 그 외에 식물에 관심을 두다 보니, 우리나라에 중요한 국도립 수목원, 식물원, 개인식물원 프로젝트들. 다음으로 골프장, 리조트 기타 등등 민간 프로젝트, 끝으로 개인 정원들이 있죠. 다음으로 협업 프로젝트가 있어요. 건축이 주가 될 때도 있고, 조경이 주가 될 때도 있는데, 건축가와 파트너로서 긴밀하게 작업한 것도 분류해볼 수 있어요. 초기에는 조성룡 선생과 작업한 게 아주 많고, 가끔이지만 그 시대 우규승 선생하고 긴밀한 협업이 있었죠. 최근 십여 년 이상은 승효상 선생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나를 믿고 맡겼죠. 아모레퍼시픽과도 일을 많이 하는데 외국 건축가도 있고 한국 건축가도 있지만, 김종규 선생이 같이 일을 해서 호흡이 잘 맞았어요. 요새는 혈기 있고 아이디어 있는 조민석 선생과도 여럿 했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중요한데, 조경 작업은 설계 과정을 시각화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도면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내가 왜 이렇게 바빠졌냐 하면 설계로 그쳐서는 작업이 안 되더라고요. 할 수 없이 어지간한 것은 직접 시공을 해버려요. 건축은 비 새거나 리노베이션을 하는 게 아니면 부를 일이 없잖아요. 하지만 조경은 끝없이 가야 해요. 왜냐면 생명체잖아요.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내 스케치대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는 안 되니까 삭신이 고달파요. 오늘 오래간만에 작업복 벗고 사무실에 앉은 거예요. (웃음)   강남 도심치고는 사무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요. 자리를 잘 잡으신 것 같아요. 지하에 모델실이 있고 2, 3층을 쓰고 있는데 가난한 사무실이에요. 건축은 그래도 규모가 있지만, 조경은 절대로 돈 버는 회사가 아니잖아요.   조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농과대를 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가 가져오신 달력의 스위스 풍경을 보면서였죠. 6·25 때 황폐해진 산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는데, 수풀이 가득한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서울대 농과대를 졸업하셨어요. 농과대를 들어가게 된 이유가 있나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경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뜻밖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옛날에는 특채라는 시험제도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대구에서 교사였는데, 집이 가난하니 특채 장학생으로 경북대 영문과에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문학소녀였거든요. 처음 내가 농과대 가겠다고 하니까 엄마가 학교 선생 월급으로는 안 된다고, 서울 못 보낸다고 난리 치셨죠. 그런데 아버님이 박목월 선생님과 친했어요. 피란 때 아버님과 같은 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하셔서 늘 편지를 주고받으셨는데, 내가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했나 봐요.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시집을 우리 학교에 내 이름으로 소포를 보내서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어요. 아버님이나 박목월 시인은 내가 문학을 하기 바라셨어요. 내가 그때 대구에서는 글도 잘 쓰고 상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했거든요. 그래도 서울대 농과대에 가고 싶다고 법석을 치니, 박목월 선생이 ‘오히려 문과대 가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남학생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받아라(웃음)’ 하셔서 아버지도 허락하셨어요. 박목월 선생은 그 이후에도 내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셨나요? 농과대 갓 졸업했을 때는 관련 직장인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에 있었어요. 임시직이지만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는데도 성에 안 차더라고요. 그러던 중 <주부생활> 기자 모집에 붙고 나서 박목월 선생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죠. 그랬더니 서울에 있는 댁으로 오라 하시더라고요. 찾아갔더니 약속을 하라고 하세요. ‘술 마시고 말고 남자들과 담배 피지 말라고. (웃음)’ 아마도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셨겠지. 나야 그런 데 원래 관심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은 ‘글을 써라, 신춘문예 시도해라’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나도 이미 관심이 없었고요. 농과대에서도 중요한 상을 받았거든요. 그 시절에 서울대학교 주관하는 신춘문예가 있었는데, 평론에는 이어령 선생이, 시는 내가 상을 탔어요. 지금까지도 작가 아닌 사람이 상을 받은 건 나밖에 없을 거예요.   기자 생활은 어떠셨나요? 잡지사 기자 시절, <주부생활> 2호부터 패션, 육아, 주택 등 여러 가지를 담당했어요. 당시 <주부생활>에서 주택 부분은 황무지였는데, 내가 주택과 정원을 맡겠다고 했어요. 집이라곤 문화주택밖에 없을 때, 우리나라 주택의 중요성을 살려야 한다 해서 원색화보를 만들었어요. 그때 고생은 말도 못 해요. 지금은 돌아가신 나상기 건축가의 건축 사진 찍을 때, 집에서 쿠션, 도자기 같은 소품을 다 가져오셨어요. 그런 법석을 치면서 일했죠. 윤덕원, 나상기와 같은 건축가를 만나고, 김수근, 김중업 사무실에 젊은 여자가 벌벌 떨면서 찾아가 인사하며 한 2년 기사를 썼죠. 그렇게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환경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우연의 일치에요. 서울대 미대 교수님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환경대학원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어요. 놀라서 마감 날짜를 보니 내일모레인 거예요. 그래서 꼴찌로 등록했어요. 대학원에 가니 교수도 나보다 나이 어렸어요. 이광노 교수는 출석 부를 때 ‘언니’라고 했으니까. 농과대를 간 것은 박목월 선생님 덕분에, 환경대학원은 그 화가 선생님 덕분에 가게 됐어요. 또 잡지사 시절 윤덕원, 김석철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그 시기가 밑거름이 되어 주었죠. 잘은 모르지만, 그 옛날 문화주택을 취재하며 공부했어요.   나상기 선생님은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직접 만나서 취재하신 거네요. 맞아요. 그때 그 노란 집의 실내장식을 위해 주인 허락 받고 나상기 선생님과 내가 서로 소품을 가져와서 장식했던 기억이 나요. 윤덕원 선생님은 주택에 대한 글을 많이 써 주셨죠.   인연이 정말 많으셨네요. 내 인생에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어요. 가장 무서웠던 사람이 김수근 선생. 매우 근엄하신 분이었고, 사진도 찍지 못했죠. 인간미가 있었던 건 김중업 선생이었고, 윤덕원 선생님은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노력하셨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데, 옛날엔 카레라이스가 뭔지도 모르고 대학을 갔어요. 당시 <주부생활>에서 육아 담당 기자였는데 소아과 선생인가 산부인과 의사인가 인터뷰하면서 너무 쑥스러운 거예요. 출산하는 곳에 가서 사진기자가 사진 찍고 나는 부끄러워서 안절부절하고. 그런데 그 여자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워커힐 호텔에 가서 카레라이스를 사줬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웃음) 김남조 선생님도 생각나요. 굉장히 어려운 시절에 잡지사 기자 하면서 조경을 공부한다고 작심하는 중에 아버지 친구가 청담동에 사셔서 거기 작은 하숙방을 얻어주셨거든요. 거기 살 때 매일 김남조 선생님과 굴다리를 건너며 다녔어요. 그 선생님이 참 정이 많았어요.   서울대 환경대학원도 처음 설립되고 당시 조경학과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였는데요. 우리나라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들어온 것은 미우나 고우나 박정희 시대 때 국토를 개발하면서 보존과 조경에 관심을 가져서예요. 청와대에서 조경직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경학과가 생겼어요. 한국종합조경공사라는 걸 만들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조경학과 석사과정을 만들고 다음 해 서울대, 영남대 등에 한꺼번에 조경과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교수가 없다 보니 환경대학원 졸업생을 어지간하면 교수로 보냈어요. 2년간 조경 공부해서 무슨 교수를 하겠어요. 어쨌든 초기에는 정부의 조경 관련 일 - 가령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설계하는 일 등을 모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들이 각 대학의 연구프로젝트, 설계사무실 등으로 갔어요. 그때 조경설계사무실이 두어 개 있을 때죠.   선생님의 대학원 시절이 궁금해요. 조경이 배우고 싶으셔서 가셨잖아요. 학교에서는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주간 야간 수업이 있었어요. 야간은 직장, 공무원 중심으로 했는데 교수들이 모두 외부에서 오니까 주야간이 섞여서 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야간 직장인 학생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거예요. 가장 연장자인 셈이죠. 이광노 선생이 굉장히 열심히 조경과 건축의 관계를 잘 가르치셨고, 교통계의 선생님은 우릴 데리고 중요한 전시도 다니며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문리대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러 오시고, 시청각 내지는 디자인 관련해 김청자라는 서울대 미대 교수가 오시고, 항공사진 판독 가르치는 분, 지역개발 가르치는 분도 오셨어요. 내부적으로는 도시계획과 통계, 도시경제학만 가르치는 분만 계셨죠. 그러다 보니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우리 산림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해서 농과대를 갔는데, 정원보다 더 큰 이야기들이 많으니 정신없이 재밌었죠. 그때 학교에서 환경대학원 앞으로 조경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어요. 대통령의 숙원사업인 경주보문단지 관광특화사업으로, 경주 안에 있는 불국사 일대를 성역화 하는 일을 조경과에 의뢰한 거예요. 교수님들이 심사하고 학생들에게 안을 내라고 했는데, 내 안이 덜컥 된 거예요. 우리끼리 간단하게 팀 짜서 한 거였어요. 공대 건축과 나온 사람들은 엄청 신경질이 났을 거예요. (웃음)   지금 하버드 GSD도 도시, 건축, 조경 세 분야가 하나로 통합된 방식이잖아요. 이른 시기였지만 당시에도 통합된 장이 있었네요. 교수도 그렇게 뽑아 놓으니, 나무를 어떻게 심으라고 알려주는 수업은 없었어요. 알아서들 공부하는 거에요. 각자 자기 바람 대로요. 인생마다 고비가 있지만, 나는 돈의 운은 없었지만, 사람 운은 있었던 것 같아요. 졸업하기 전에 원하는 곳에 가서 일하는 실습 기간이 몇 달 있었어요. 대부분 한국종합조경공사 설계사무실에 가서 설계하고 돈을 벌었는데, 나 혼자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 갔어요. 담당 과장이 유명한 문화재 전문위원이었어요. 그분이 나를 보더니 뭘 하고 싶냐는 거에요. 그래서 ‘한국 정원을 알고 싶은데, 책도 없고 있어도 중국 일본 책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창덕궁 후원이라는 한국 정원이 있는데 왜 책이 없는지 알고 싶다’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실습을 창덕궁 후원만 하고 싶냐 해서, ‘설명 붙여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 다닐게요.’ 했어요   창덕궁 후원은 비공개 장소가 아니었나요? 그때는 오히려 자유롭게 다닐 때에요. 커피 한 포트 들고 아침부터 나가서 밤까지 있다 왔어요. 못 들어가는 곳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 데나 다녔어요. 그때 기록도 더 많이 찾고 설명도 들었다면 좋았을걸. 주변머리가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것도 싫고, 잘난 척하면서 ‘느낌이 중요해’ 이러며 다녔죠.   그때 경험이 정말 중요했겠어요. 그게 살이 되고 피가 된 거죠.   대학원 졸업 후에는 청주대 교수로 부임하셨어요. 교수 생활은 어떠셨나요? 교수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환경대학원 졸업하고 본의 아니게 다들 교수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청주대학교의 학장이 조경과를 세우고 싶다고 서울대에 찾아왔어요. 학교에서 나를 소개했죠. 그런데, 당시 청주대가 한수 이남(한강 이남)의 최고 사학인데, 그때까지 여자 교수는 한 명도 없었던 거에요. 갔더니 수십 명의 남자 교수가 가득한데, 내 방도 없을뿐더러 여교수용 화장실도 없고, 숨이 턱턱 막히는 거예요. 웃지 못할 일도 많았죠.   그래도 청주대학교 환경대학원 원장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나를 아껴주셨어요. ‘고루한 충청도 늙은 교수 사이에 여자는 당신 하나인데 처신 잘 못 하면 여자 조경가들이 취직할 곳이 하나도 없다, 당신 태도에 달려 있다’ 하면서 청주에서 공중목욕탕도 가지 말고 학생이나 교수와 술자리도 하지 말아라, 청주 시내에서 집도 사지 말아라, 몇 년 동안은 먼 곳에서 통근해라 등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주의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도 조경학과가 학교 미화에 필요하잖아요. 학교 정원을 고쳐야 하니까. 가자마자 이사장도, 충청도 지사도 너무 좋아했죠. 우리나라 최초 공원묘지 기본계획을 세우라고 해서 밤새고 코피 흘려가며 학생들과 충청북도 시범공원묘지 기본계획을 세웠어요. 지사가 붓글씨로 쓴 긴긴 편지를 가지고 본인 대신 보사부 장관에게 보고하라고 했죠. 그래서 설명을 하고 예산을 따와서 그 공원묘지를 정말 잘 만들었어요. 학교생활 하면서 밤새는 걸 일로 삼았죠. 충청 지사가 틈만 나면 나를 칭찬하니까 공무원도 학교에서도 꼼짝을 못했어요.   최초로 여성 기술사 자격증을 따셨어요. 마흔 넘어 뒤늦게 결혼을 했어요. 신랑은 서울로 옮기면 모를까 충청도에서 교수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도 속으로는 설계가 선생보다 낫겠다 싶었죠. 당시에는 기술사자격증이 있으면 사무소를 차릴 수 있어서 재직 중에 자격증을 땄는데, 그게 여자로서 최초예요. 우리나라 여러 분야의 기술사 중 그 해에만 여자 기술사가 세 명이 나왔어요. 국토에서 내가, 그리고 금속공예와 식품공예가 각 한 명씩이었는데, 당시 나만 신문에 인터뷰를 해서 유명세를 치렀죠. 그렇게 종합기술사가 필요한 종합조경 관련 회사에서 몇 년 일하다가, 개인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도 나라에서 기술사를 양성하고, 조경 분야에서는 종합조경공사가 생기고, 기술사가 한 열 몇 명이 넘으니 그 사람들이 사무실을 차릴 수 있게 해줬죠. 나도 독립해 나와 사무실을 차리게 됐고요.   초기에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를 많이 하셨어요. 고비마다 참 많은 사람, 엉뚱한 곳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어요. 대명건설 일을 할 때부터 지도교수이자 당시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오희영 선생과 같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줬어요. 그 무렵 1983~ 85년 때부터 이후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 올림픽, 대전 엑스포 등이 연이어 치러졌잖아요. 이때만 하더라도 조경은 호황기로 봐도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거의 내가 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기 위해 아시아선수촌을 만들고 종합운동장을 리뉴얼 할 때 공모전에서 조성룡 선생님이 당선되고 조경 파트너로 나를 택한 거예요. 그래서 선수촌과 아시아공원 조경을 만들었어요. 그때도 사무실 넓은 테이블에서 주야로 일을 했는데, 그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원을 도면 작업한 거예요. 그전에는 없었죠. 남서울 대공원의 경우 외국에서 해왔으니까요. 국내에서 조경을 위해 청사진을 굽고 식자 따 붙이는 걸 처음 보니까 공원과, 녹지과 등 여러 공무원이 와서 ‘나무는 언제 심는 거예요?’, ‘잣나무 좀 심어주세요’라고 말하는 식이었죠. 제발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신기하고 걱정되니까 매일 오는 거예요. 아시아선수촌과 아시아공원 설계 납품 때 너무 과로해서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어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염보현 시장께서 너무 바쁘니까, 종일 기다리다 자정에 보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보고 받는 분이 나를 참 예뻐하고 좋아하셨어요. 눈 껌뻑껌뻑하시면서 종합운동장 앞도 고쳐달라, 뭐도 해달라 해서 그때 일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한전 사옥 프로젝트도 그 시기에 진행하신 건가요? 그렇죠. 그 과정에 강남에 한전 사옥을 짓기 시작했는데 엄이건축이 설계했어요. 건물 소개를 하면서 사람으로 치면 이게 누운 거고 앉은 거라면서 사람에 빗대어 소개하더라고요. 면적도 엄청나게 크고요. 설계를 보니 도저히 내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대명건설 이사로 있을 때인데, 당시 한전의 박 회장이 설계해보라고 해서 하룻밤 만에 해갔어요.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한국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담을 없앨 겁니다.” 했죠. 당시로써는 한전 같은 국가기관이 담을 없앤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이곳이 예전에 사하촌이기 때문에 얕은 산자락을 만들어 소나무만 심을게요”라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시는 거예요. 화장실, 시계탑 다 안 넣겠다고 했는데 다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서 큰 성공을 거뒀죠. 방송에도 나왔어요.   그렇게 작품들이 제대로 나오면서 조성룡 선생님과 몇 개를 더 준비했어요. 대전 엑스포, 올림픽이죠. 대전 엑스포도 삼우설계와 공모전으로 당선됐는데, 저는 우리나라 엑스포이니 우리 풍경을 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안압지처럼 큰 연못을 재현해서 한국 정원을 넣겠다 했죠. 올림픽 때는 올림픽선수촌과 기자촌에 우규승 선생이 당선됐잖아요? 당연히 나를 파트너로 택하셨는데, 그때 아파트는 상여 나가는 게 문제였어요. 세상 참 많이 변했죠. 지금이야 장례식장이 따로 다 있으니 문제없지만, 그때는 문상 오면 아파트 주차장에 텐트 치고 밤새 사람들이 술 마시고 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아파트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당 개념이 들어가야 한다 싶었어요. 그래서 올림픽선수촌에는 빈 공간을, 아시아선수촌에는 앞에 전면부를 넓게 만들었어요. 아이들도 놀이터를 따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광장이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경조사가 있으면 거기서 행사하면 되고요. 그래서 넓혔죠. 당시로는 새로운 개념을 넣은 거예요.   조성룡 선생과는 아시아공원을 비롯해 일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고, 올림픽선수촌에서는 우승규 선생님과 죽이 잘 맞아 사다리꼴 마당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연석을 많이 쓰라고 압력을 넣고, 나는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야단법석했죠. 그런데 내가 졌어요. 기자촌에만 조금 쓰고 선수촌에는 못 들어오게 했어요. 어쨌든 건축가의 콘셉트를 지키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아파트 조경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이후에도 관 중심의 중요한 일들이 들어왔어요. 1993년부터 대전 엑스포를 하고, 1998, 99년부터 2002년 월드컵 준비를 했어요. 쉴새 없이 했죠.   예술의 전당에도 참여하셨는데, 그때는 언제였나요? 전두환 씨가 대통령 되고 난 다음이에요. 그때 이북의 유명한 공연을 해야 하니 지하철이 들어올 수 있는 지하실을 만들고 위에 포장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두환 당시 대통령 본인이 준공 테이프를 끊어야 하니 다음 해 2월까지 끝내야 하는 거예요. 한겨울에도 조경 공사를 해야 해서 텐트 치고 벌벌 떨면서 했죠. 탱크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하라고 하니까. 설계는 김석철 선생이 했는데, 그분은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설득력이 좋았어요. 그 일이 성사되는 데까지 문화공보부 장관이 세 번은 바뀌었을 것에요. 그들 생각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마지막 장관이 ‘죽어도 한국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라고 해서, 김석철 선생이 버티다 버티다 지금의 ‘갓’ 형태가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국립국악원과 예술의전당 사이에 장터를 하나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장터를 어떻게 만들겠어요. 할 수 없이 전국을 다니며 장터의 구조를 파악했어요. 그래서 여긴 사물놀이나 문화 바자 간단하게 하고 쉼터 정도로 한다고 하자. 성균관대 교수가 열심히 디자인을 도와주어서 예술의 전당도 무사히 마쳤죠. 장관, 자문교수, 심의위원이 매번 바뀌어 안도 매번 바뀌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했어요. 게다가 그때 공공미술품에 대한 중요성이 알려지고 논의가 많아서 건축물 미술 작품을 많이 만들던 때였어요. 소위 환경 조각을 넣어야 하는데, 회의가 끝이 안 나는 거예요. 한 대학교수는 다른 대학 출신 조각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죠. 도저히 끝이 안 나길래 내가 폭포를 제안해서 공공미술품 없이 진행됐어요. 고생 많이 했어요. 그 와중에 예술의전당이 길가에 있다 보니 소음이 관건이었어요. 그래서 녹지를 충분히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겠다고 했어요. 나는 시중과 다른 양식으로 조경을 하다 보니 우면산 자락의 연못에서 국악공연도 하고 장터도 열었죠. 국립국악원은 내가 손본 뒤 너무 많이 바꿔버렸어요. 예술의전당도 장사한다고 모조리 바꾸고 개관 전에는 느닷없이 서예관이 용도를 바꿔 들어가고. 말도 말아요.   정말 즉흥적이었네요.                                                                 그 당시는 그렇게 일했어요. 그런데 문화공보부 장관이 여러 번 바뀌면서 이상하게 장관마다 나와 코드가 맞았어요. 가장 마지막 장관은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신랑이었어요. 진작 얘기했으면 고생 안 했을 텐데. (웃음)   우리나라 초기 국가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것은, 국가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라 국가 주도인데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시스템도 공존해요. 굉장히 복합적인 상황인 것 같아요. 맞아요. 한 작품이 동시상영관 같았어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