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영상ㅣ고안된 장식들, 윤한진, 한승재, 한양규
고안된 장식들 A Model of Sporadic Thoughts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요구사항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작은집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어요. 다행이도 음악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땅을 서울에서 구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이장소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으로 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이길 바래요. 그래도 수압은 좀 신경 써주세요.”
틈틈이 노트에 써놓은 글 들을 엮어 단편집을 만드는 소설가의 마음으로 녹번동주택을 작업하고 있다.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모으고 작은 스케치들을 합쳐보는 과정만 있는, 부분이 부분 일 뿐 전체가 없는 그야말로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에서 출발해 대지를 읽고 형태를 만드는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내게는 실험이다. 냉철하고 치밀한 두뇌, 야망 가득한 눈빛은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건축의 이미지
박공지붕, 네모난 창, 낮은 울타리, 그리고 나무 한 그루. 어릴 적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만약 내가 유치원 미술 시간에 그린 ‘집’의 드로잉이 남아 있다면, 분명 그 집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혹은 당신도 그렸을 법한 바로 그 집이었을 것이다. 빨간 지붕에 뻐꾸기창. 혹시라도 마당 한가운데 그린 나무의 가지가 잎이 없이 앙상하다면 평소 외로운 아이로 낙인찍혔을 바로 그 집. 그 이미지. 집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집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애써 보기도 했었다. 그 이미지는 감옥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기소침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희대의 천재 건축가가 아닌 평범한 교육을 받은 보통의 인간임을 받아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발버둥에도 여지없이 똥이 되고야 마는 스케치와 모델들을 보면서 내가 똥을 그렸던가. 아닌데 집을 그렸는데. 그럼 역시 집 같지 않은 집은 똥이다. 완벽한 삼단논법이 완성되고 나서야 겨우 이 번뇌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지는 4학년 3반
녹번동 주택은 우리 집의 이미지, 그 원형을 되짚어 본 작업이었다. 내 친구 정락이네 집에는 주물대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잘 정리된 조경수들과 함께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큰 개들이 뒹굴었고 대문보다 더 큰 거실 창은 마당으로 열려 있었다. 이건 뭐랄까. 나에겐 판타지. 판타지의 전형. 어릴 적 내가 살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하던 전방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다. 전방에는 담배 냄새가 났고 시시껄렁한 양아치 삼촌들이 내 꼬추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잽싸게 통과해야만 했다. 다시 외부로 나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똘이(레쉬+삽살이) 집과 수돗가가 계단참에 있었고 차례로 작은 등나무 파고라와 녹슨 그네가 있던 우리 집. 진짜 집의 기억. 나는 창녕 영산 출신이지만 서울 녹번동에선 고향의 냄새가 났다.
대지의 두 면에 접한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작은 대문이 있지만 변하는 건 없다. 개의치 않고 또다시 좁은 길이 이어진다. 좁은 길은 계단을 지나면 축축한 바닥이 된다. 작업실 유리창에 손바닥 지문을 남기면서 2층까지 난 외부계단으로 올라가면 비로소 거실이 나오는 진짜 집의 이미지.
맥락 안의 건축
오래된 토지를 상대할 때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다리 꼬지 말 것이며 삿대질도 조심할 것. 오랜 세월 동안 덧붙여진 법규들이며 작은 오차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5m 이상의 막다른 골목길은 도로선을 후퇴하게 만든다거나,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옆집은 경계를 한참이나 넘어와 있다거나, 점점 높아진 도로의 레벨로 집이 아래로 내려가게 됐다거나 하는 작은 사건들 말이다. 이렇듯 시간은 경계를 뭉퉁하게 만든다. 담장에 기대 노각을 파는 노인, 벽과 도로경계선 사이를 마당 삼아 화단을 가꾸는 다가구 빌라, 주차금지 표지판을 대신하는 무거운 화분들, 뭉퉁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담장 밖의 사람들
새로운 사람들이 경계에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 크고 작은 틈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녹번동 주택은 옆집이 넘어와 쓸 수가 없는 1m 폭의 틈이 생기고야 말았다. 나는 이 틈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마당도 아닌 길도 아닌 이 틈은 옆집 건물의 모서리에서 정확히 한 뼘 떨어져 있다. 고양이도 지나갈라치면 뺨이 좌우로 댕겨지는 작은 틈이지만 옆집이 허물어 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막다른 골목을 연결해주는 동네 길이 될 것이다. 의뢰인에게 부디 이 틈을 마당에 편입하지 마시고 이대로 두시면 좋겠다고 간곡히 요청을 드렸다.
녹번동 주택은 양쪽에 두 개의 인접 대지가 있는데 한쪽은 이미 침범을 한 상태이니 담장을 허물고 다시 세우기로 합의가 됐고 반대편 대지의 담장은 아슬아슬하게 경계면에 걸쳐져 있어 존치하고 새로운 담장을 덧씌우기로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옆집 담장의 높이라든가 재료 같은 것들이 여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데 옆집 담장의 안면이 집의 겉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존의 낮은 담장을 여전히 뭉퉁한 경계로 남겨 두기로 했다. 기존 담장과 한 몸이 되는 두툼하고 낮은 담장을 만들어 담의 윗면을 이웃과 공유할 수 있도록.
빛의 언어
나는 17살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이후 15년간 반지하와 북향집을 전전하며 궁색한 생활을 하였는데 매번 이사를 할 때마다 자연광 한줄기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자취방에선 한줄기 정도의 빛의 영광은 누릴 수 있었는데, 하루 중 단 몇 분뿐이었지만 폭 3cm의 직선의 광선이 방안을 드리울 때면 웃통을 벗고 마른 몸 구석구석 비추는 일광욕 시간을 가졌다. 그제야 보이는 안 보이는 것들. 떠도는 먼지며 걸레받이 틈의 개미집들같이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것들의 존재들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연주의자들이 직선에 대한 혐오를 얘기해도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억오천만 킬로미터를 직선거리로 7분 만에 날라와 방구석 개미집까지 비추는 대자연의 언어, 그것이 파동이든 입자든 뭐든 간에 직선인 것이다.
온화한 덩어리
대지는 남서 방향에 넓은 변을 맞대고 있다. 오전에 동쪽에서 비추는 조광을 짧은 변에서 짧은 시간 받아들이고 남에서 서로 넘어가는 동안 긴 시간 일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태양을 바라보고 여러 개의 창문을 내 모든 공간에 온종일 빛이 집안 내부를 드리우는 것을 상상하니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직선이 마음에 걸린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배려 없는 속사포의 직설을 종일 듣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빛의 변화가 은유적이었으면 좋겠다. 직선의 그림자가 공간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온화한 빛의 덩어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북쪽의 파사드는 기능 없이 독립적으로 서 있는 벽이다. 남쪽에서 쏟아지는 속사포의 빛을 머금었다가 집 내부로 옮겨주는 역할만 할 뿐 다른 기능은 없다. 파사드 안쪽 면에서 집은 속살을 온전히 다 보여준다. 커튼월 방식으로 시공된 깊이가 없는 얇은 유리 한 장으로 벽과 대면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니 커튼이 필요 없다. 마치 넓은 dry area를 둔 지하와도 같다. 벽에 부딪히고 산란한 빛은 파동은 사라지고 질량만 남아 집안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마치 새벽에 아내 몰래 끓여 먹은 라면 냄새가 아침에도 다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광활한 자연을 대하는 이 집의 자세이다.
밤의 표면과 장식된 빛
검은 밤이 찾아오고 하나둘 전등이 켜지면 치부는 비로소 드러난다. 자연광의 따뜻한 색온도로 모든 게 용서되는 낮이 지나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벽체 위에 날 선 조명이 떨어지는 밤이 오면 은혜로운 낮에 숨어있던 실수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의 시간이다. 무자비한 상대에게 전부를 밝히는 실수를 하지 말자. 어두움이 묻은 밤의 벽면은, 표면은,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이 다. 빛이 내려앉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공간을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필요한 지점마다 바닥에 내려앉는 불빛, 새어나오는 불빛, 좁고 깊은 천장의 슬라브 구멍에서 나와 바닥 일부를 비추는 불빛, 얕고 긴 틈에서 나오는 옅은 불빛.
‘선생님. 그런 조명은 어디서 파나요?’
마우스와 키보드를 내려놓고 우리는 기꺼이 목수가 되기로 하였다.
글 윤한진
FILM
영상 ㅣ 수졸당 (守拙堂), 승효상
1986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수근 선생께서 남기신 말씀으로 나는 공간설계사무소를 3년간 이끈 적이 있다. 선생이 부재에도 선생의 건축을 계속할 수 있다며 분투하였지만 늘 허무할 수밖에 없었고 끝내 선생이 남기신 울타리에서 나오고 만 때가 1989년 말이었다. 15년간 선생의 문하에서 익힌 건축의 방법은 너무도 내게 익숙한 것이었어도 그걸 확인해줄 이가 없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내 건축을 찾겠다고 독립한 나는 내 건축을 전혀 몰랐고 심지어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만큼 15년은 김수근건축에 철저히 동화되어 내 신체가 되기까지 한 족쇄였지 않았을까?
내 건축을 찾기까지 아득한 방황과 결렬한 자아 부정 등의 과정을 통해 신음하듯 뱉은 게 ‘빈자의 미학’이라는 용어였다. 선언이라고 해도 된다. 그때까지 내 모든 지난날들을 용광로에 넣어 녹여 겨우 추출한 단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업한 게 수졸당이다.
그 이후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물론 대단히 많은 작업을 그사이에 마쳤으며 여전히 건축의 현장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그간의 세월은 실패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과도하게 말하면 내가 작업한 건축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기억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작업이 이 수졸당이다. 내가 지금 얼마만큼 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하며, 그럴 정도로 수졸당은 내 건축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1993년에 완공되어 28년간 삶의 때를 묻힌 수졸당이 처음으로 대청소를 하여 원형을 다시 찾았다. 그 사이에 지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라 주변은 죄다 상업용의 시설로 변했지만, 이 집의 주인인 유홍준 교수는 그 세찬 상업주의에 저항하였고 이제는 이른바 ‘현대의 유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믿기로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을 이 땅 위에 서서 우리가 살았던 기억을 이으며 전하게 된다. 수졸당은 그래서 이미 역사며 문화의 한 부분일 거다.
아랫글은 수졸당을 지은 직후인 1993년에 쓴 것이다.
오랜 도시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수없이 많은 건축물이 이 땅을 빼곡히 메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건축이 여전히 세계의 건축과 괴리를 느끼게 하고 있음과 한국문화의 중심에서도 멀리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른 몇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 구조를 지배한 잘못된 정치행태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더불어 균형 잡히지 못한 부의 축적에만 몰두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가치가 왜곡된 그런 사회에서 빚어지는 건축의 모습은, 더 높이 만, 더 크게만, 더욱 위엄 있게 만 보이기 위한 것들에 더욱 큰 관심을 두게 하였고, 그 결과 그 속에서의 삶의 의미는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갑자기 축적된 부가 헛된 장식과 구호에 쏟아 부어진 결과, 거리를 메운 건축은 찬란하되 껍데기뿐이었고 화려하되 졸부의 헛된 욕망을 나타내는데 만 골몰하였음에 우리의 삶은 자꾸만 일그러지고 또한 박제될 그러한 위험에 처해 있음도 아울러 직시해야 한다.
우리네 조선의 선비들이 빚은 도시와 건축은 어떻게 저토록 높은 격조와 품위를 가졌었나. 그것의 바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욕정보다는 이성에 더욱 큰 가치를 둔 청빈의 정신이었을 터이며, 그의 위에선 선비정신은 조선 500년을 지탱케 하며 우리의 뿌리가 되어 있음을 다시 기억해 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자기의 땅보다는 남의 것을 더 채워주려 하고, 더 작은 땅을 점유하려 하며 그것도 남과 같이 쓰기를 원하는 그런 염치와 절제의 건축을, 사회와 고립된 높은 벽체로 싸인 그림 같은 집이 아니라 이웃과 연결된 보다 낮은 그런 집을, 육신이 편안하기보다는 정신이 맑기를 원하며 육체를 왜소화시키는 기능적인 집보다는 오히려 반 기능적이어서 삶 자체가 진솔해지는 그런 공간을,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고 스스로를 반추시키는 배경이 되는 그런 지적 벽면을, 이제 우리의 도시에 다시 세워야 함을 믿는다. 이 아름다운 산하와 반만년 역사를 이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 저런 못난 건축 속에서 그 질을 보장받을 수 없다.
세기말을 앞둔 지금, 그러한 일그러진 편린과 대립해야 하는 우리의 정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것은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이 된다. 보잘것없는 집'이라는 뜻의 이 집은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를 위한 집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유 교수는 한국 미술사에 남다른 식견을 가진 미술평론가이며, 또 그는 민중의 삶에 애착을 가진 지성이다. 그는 나에게 설계를 의뢰하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고 한다.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대한 불신 등이 그러한 망설임의 대부분이었는데 이를테면 비싼 것, 편하지 않은 것 등이 그것이다. 유 교수는 이러한 것이 선입 관념일 수 있음을 알고 나에게 이런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설계를 의뢰하였으며 동시에 나의 건축적 의지에 결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고,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가치가 우선된 토지, 주거 정책으로 인하여 크게 잘못된 주택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주택을 사용에 대한 관념보다 소유개념을 더욱 중시한다는 것으로 그 결과 집 속의 공간이나 그 속에서의 삶보다는 집을 구성하는 벽체와 지붕의 모양 등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얻어진 주거형식이라는 것이 주어진 필지에 높은 담을 쌓고 자기를 보호받기 위해 그 담 위에 철조망을 또 두르고 그 속에 아파트처럼 기능적인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은 부분은 `저 푸른 초원'을 즐기기 위해 잔디 깔고 나무 심는 그러한 것인데, 이러한 집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이웃이 있을 턱이 없고, 가족의 아이덴티티가 있을 수 없으며, 더불어 개인의 프라이버시 또한 오히려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와지붕 시대 이후의 참다운 주거문화를 실현해 본 적이 없으며 오로지 주택이 가족 신분에 대한 상징으로서 여겨져 온 결과 껍데기만 있는 졸부의 주거문화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집 장사와 개발업자들에게 상당 부분 있지만, 그렇다 하여 건축가들의 책임 또한 면하기 어렵다.
내가 이 집을 설계하면서 가진 의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시 도시주택의 전형을 만들 수 없을 것인가. 주택은 도시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나. 주택에서 삶의 형태와 공간의 형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주택은 기능적이어야 하나. 이 시대는 어떤 주거형식을 요구하는가. 이 집이 완성되면서 이러한 의문문이 얼마만큼 그 해답을 구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취한 몇몇은 요즘 나의 건축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는 빈자의 미학에 대한 구체적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그 성취는 대부분 유 교수가 전적으로 건축가를 신뢰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며 그와 설계와 시공 기간 중 내내 나눈 여러 이야기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1993.
글 승효상 사진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