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