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서울대 IBK커뮤니케이션센터, 사범교육협력센터, 버들골 풍산마당

보이드 아키텍트

IBK커뮤니케이션센터

IBK커뮤니케이션센터는 캠퍼스학생들의 원할한 소통을 위한 미디어컨텐츠를 제작하고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한 허브시설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에따라 시설이 위치할 사이트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1년에 걸쳐 사이트를 찾는 캠퍼스위원회가 진행되었고 결국 학생들의 동아리시설과 각종 공연을 위한 퍼포먼스 연습실 등을 갖추고 있는 기존의 두레문예관과 인접한 경사지로 결정이 되었다. 이곳은 캠퍼스 초입에 위치하여 관악산 전망을 갖춘 비교적 훼손되지 않은 느슨한 캠퍼스의 여백으로서, 비워있음 그 자체로 충분히 역할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정형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가로들이 입체적으로 교차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메인도로에서 너무 가까운 곳이어서 건물이 들어설 경우 캠퍼스초입의 느슨함을 침범하는 결과를 초래할까 우려되기도 했다. 건물은 대운동장 스탠드의 높은 둔덕을 기대고 인접건물의 열을 맞춰 관악산의 열린 풍경을 조우하는 포즈를 취하고, 기존의 입체적 가로를 그대로 건물 내외부로 끌어들여와 여러형태의 소통공간이 교차하는 콘크리트 플랫폼을 건물의 형태적 코드로 드러냈다. 이에 건물내부의 이벤트마당에서는 여러 활동들을 담는 입체적 플랫폼들이 집중되고 교차되도록 하여 적극적인 소통의 마당이 펼쳐지도록 유도했다. 외관은 건물을 둘러싼 자연풍광에 순응하기 위해 적삼목루버를 설치하고 서향일사를 제어하도록 루버방향을 다양하게 하여 따뜻한 미디어 서킷(media circuit)의 이미지로 읽히길 희망했다. 또한 내부공간에서도 적삼목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자연풍광이 그대로 공간인테리어 분위기를 장악하도록 했다.

비워도 좋을 땅에 채움이, 의미없이 교차되던 학생들의 흐름을 잡아주고 부딪히게 만들어, 앞으로 긍정적인 소통의 보금자리로 작동하길 희망해본다.


사범교육협력센터

사범대학은 가운데 중정을 끼고있는 ‘ㄷ’자 형태의 저층클러스터에 조그만 강의동이 붙어있는 초기 70년대의 캠퍼스구성개념이 잘 보존된 곳이었다. 관악캠퍼스의 끝자락에 위치해 한적하고 평안했던 사범대학에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밀’의 바람이 불게 됐다. 사범교육협력센터는 한켠의 강의동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기존건물대비 6배의 연면적을 요구하고 있어 사범대학 전체클러스터의 새로운 얼굴로서의 위상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캠퍼스중심가로와 녹색의 여백을 사이에 두고 폐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존의 클러스터방식에서 벗어나 캠퍼스중심가로와의 적극적인 조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우선 기존 여백의 자리에 2개층 높이로 열린 옥외 플로팅플라자를 마련하여 사라진 여백의 풍경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저층부의 북카페, 인터넷플라자 등으로 이루어진 퍼브릭공간을 외부와 소통시키고 주변의 녹색풍경을 적극적으로 담기위해 투명한 유리매스로 구성하고 여기에 중심가로로부터 연계된 플로팅플라자가 자연스럽게 관입하여 내부중정까지 이어지는 동선의 흐름을 유도하였다. 하부조직의 얼개와 분리되어 상부에 떠있는 금속재질의 매스는 캠퍼스 전체를 조망하고 원경의 관악산을 적극적으로 담는 모습으로 휘어져 있다.

재편가능하도록 소프트한 하부 공간구조는 결국 과밀한 도시 구조 속에서도 건물이 존속하는 동안 변화하는 주변과 호흡하며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유기적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작은 실험이 되었다. 다만 생경한 모습으로 떠있는 공중의 매스는 과거의 균질성에 도전하는 모습이 아니라 캠퍼스의 긍정적인 활력소로서 지속적으로 작동하길 바래본다.


버들골 풍산마당

서울대학교 캠퍼스의 중심에서 각 단과대학 사이로 이어진 가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관악산의 산세가 한 숨 쉬어가듯 만들어놓은 완만한 지형의 들판이 나타난다.

캠퍼스 중심으로부터의 동선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동시에 기숙사와 후문을 통한 접근에서는 또 다른 출발점으로서, 아래에 펼쳐진 캠퍼스와 이어지는 버들골 영역은 캠퍼스와 관악산 사이의 경계부에 여백으로 남겨진 채, 한 켠에 자리 잡은 기존의 노천 강당과 함께 학내 구성원이나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집단적 또는 개별적인 기억의 장소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도림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저류조가 들어서게 되며 기존의 노천극장이 철거되었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야외공연장에 대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로 검토하기 시작된 신축계획은, 이 후 건축가와 조경전문가가 개입된 기본계획연구를 거치며 버들골 전체 영역을 대상으로 한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기존 버들골 영역과의 조화를 고려해 건축물과 객석의 규모는 다른 비슷한 성격의 공연장에 비해 소규모로 설정되었으며, 캠퍼스 가로와 이어지며 레벨이 가장 낮은, 버들골의 한쪽 가장자리로 그 위치가 결정되어 넓게 펼쳐진 기존 공간구조를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관람영역의 계획에서도 적용되어, 주변 지형의 완만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스탠드로 이어지도록 지형을 조정함으로써 인공적인 스탠드 부분만이 아닌 버들골 전체로 그 영역으로 확장 되도록 하였고, 무대영역 또한 재조정된 지형의 흐름이 아래에서부터 연결되는 캠퍼스 가로와 만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움푹한 여백을 이용하여 배치하였다.

버들골의 완만한 지형위로 드리워진 메인 매스는 서측으로부터의 일사와 캠퍼스로의 소음을 제어함과 동시에, 관악산을 마주하도록 자리잡은 야외무대와 그 앞으로 펼쳐진 객석으로부터 연장된 버들골 전체 영역을 보듬을 수 있게 하였으며, 캠퍼스 중심에서 이어지는 가로의 와 관악산과의 사이에 새로운 장소를 드러내도록 하였다.

카페와 무대지원시설 등의 프로그램이 배치된 메인매스 내부의 공간은 외부의 비정형스킨이 전면의 진입광장과 버들골로 열린 투명한 스크린을 거쳐 내부로 이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진 흐름은 Hall 중앙에 위치한 계단을 통해 2층과 객석을 거쳐 다시 버들골의 지형으로 연결되도록 계획하여 전체적인 순환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우리주변에 늘 있던 것이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 학창시절의 어느 순간에 늘 접하면서도 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드러내고자 할 때의 조심스러움으로 접근했던 작업이,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갈 기억 속에서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남길 기대해 본다.


글 보이드건축  사진 김재윤 
이규상, 장기욱

건축가 이규상(좌)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원 환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주)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쌓았으며 구가건축연구소 파트너를 거쳐 희림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했다. 2004년 (주)void architects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있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가 장기욱(우)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원 환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주)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쌓았다. 이화여대 건축학과에 강의를 하고 있으며 서울시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void architects 건축사사무소의 공동 대표로, 분당 율동주거, 원주우체국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06 KAI신인건축가상과 2010 서울시 건축상 신인건축가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보이드건축의 대표작으로 서울대학교 기초사범교육협력센터, 서울대학교 IBK 커뮤니케이션 센터, 서울대학교 버들골 풍산마당이 있으며, 2011 서울시 건축상 대상, 2012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신인건축가상, 2014 대한민국 우수시설학교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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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Yourself 번사창, 가이드 이연경 번사창은 1884년(고종 21)에 건축된 기기국 무기고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 중 대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물의 내력이 알려졌다. 조선 말기 군대의 근대화를 위해 근대화된 무기 제조와 군사훈련 제도를 마련하던 시기, 무기를 제작하던 기기국 소속의  검은 회색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맞배 지붕으로 올렸으며 문은 아치를 틀었다. 특히 건물에 붉은 벽돌로 견치형의 띠를 두르거나 측면문에 띠를 넣어 장식하였다. 벽돌과 목조 방식의 기붕이 결합한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 ‘번사’(飜莎)라는 말의 뜻은 흙으로 만든 주형에 금속용액을 부어 주조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시대 세균실험실로 쓰이다가 광복 후 중앙방역연구소, 정부 수립 후에는 국립사회복지연구원으로 쓰이다가 1970년 한국은행 소유로 되어 있으며, 1982년 서울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최근 금융연수원 부지조시 중 번사창과 길이와 폭이 같은 ‘쌍둥이’ 건물 터가 발굴되어 관련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제공 참고문헌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OpenHouse 동화고등학교 삼각학교, 네임리스건축 네임리스건축(나은중, 유소래)이 남양주시 동화고등학교에 설계한 새 건물로, 그동안 답습되어 온 무미건조한 학교 건물의 전형을 과감히 깨트렸다. 삼각형 모양은 기존 캠퍼스에 일반적인 일자형 긴 학교 건물을 추가해서는 시야와 동선이 답답하게 막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결정이다. 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은 각각 대지에 있던 옹벽의 경계선, 부정형 운동장을 반듯하게 만들어 줄 경계선, 중학교에 열린 마당을 만들어 줄 경계선을 따라 정했다. 건물 공간의 핵심은 하늘로 열린 삼각형 중정이다. 중정 주변으로 보이드 공간을 둠으로써 2, 3층이 하나의 열린 공간이 되고, 이를 통해 삭막한 복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수직 루버가 달린 투명한 유리 입면은 운동장으로부터 빛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불필요한 시선은 적절히 차단해준다.  사진 노경
OpenHouse 콩두, 민경식 한식레스토랑 콩두 자리는 경운궁(덕수궁)의 일부로 인수대비 집무실 터로 알려져있다.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이 설립되면서 그 원형을 잃었으며 한국전쟁 때 방송국 자리는 모두 타 없어지고 개인소유지의 땅이 되었다. 이후 한옥이 지어져 요리옥, 고급한정식집으로 변모했다가 이십 여 년전 소유권이 바뀌면서 교회 연수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옥의 형태는 입구쪽 11평만 남아있으며, 20년 넘게 폐가로 버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자료제공: 콩두)   ‘콩두’는  ‘콩’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숙성 시켜 만든  ‘장’을 기본으로 한 한국음식에 서양의 코스 개념을 접목시켜 새로운 스타일의 한식을 선보이는 한식 레스토랑이다. 건축가 민경식은 한식 레스토랑의 이미지에 맞춰 기존 한옥이 갖고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살리고 낡은 건물을 최대한 복원하는 것으로 디자인 초안을 잡았다. 여기에 전통의 아름다움과 건축의 거친 미학의 믹스 앤 매치(mix & match)를 콘셉트로 잡아 설계했다. 건물은 입구쪽 한옥부터 내부 공간까지 길로 낮게 뻗어 있는데, 이 단점을 한옥 특유의 물흐르듯 막힘 없는 공간의 특성으로 살려내어 전체적인 공간의 틀을 잡았다. 건물의 중심에는 천막 아트리움을 두어 한옥 창호지를 통해 드러오는 부드러운 햇살의 느낌을 살려내고 있다. 건물의 복도뿐만 아니라 열린 천장(open ceiling)과 맞닿은 창을 두어 공간에 입체적인 풍경을 선사하고자 했다. 이곳은 2층 테라스와 연결되어 계절에 따른 하늘의 변화와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한말, 근대에 이르는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내력이 깊은 터에 그 의미를 더하고 가꾸려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지가 반영된 곳이다.   사진 김종오
OpenHouse 서울스퀘어, 김정임 서울역에 도착해 마주하는 거대한 빌딩, 옛 대우센터빌딩은 서울의 첫 인상을 결정하던 상징적인 건물이다. 1970-80년대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의 이미지는 고도로 성장하는 한국 경제를 상징했다. 1977년 준공된 대우센터빌딩은 4만평 규모, 23층 높이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매머드 오피스 센터로 꼽혔다. 당시 신문에서는 높이 118m의 대우센터빌딩이 삼일빌딩과 비슷한 높이이나 건축면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의 본사건물에서 소유주가 바뀐 후 대우센터빌딩은 2008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09년 서울스퀘어로 재탄생했다. 건축가 김정임이 설계한 서울스퀘어 리노베이션은 기존 대우센터빌딩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과 인지도의 강점, 외관 디자인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에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엘리베이터 코어로 나뉘어있던 로비 공간의 위계를 없애고 새로운 곡면을 만들어내고 천정 디자인에 힘을 실어 로비를 도시 광장과 같이 활기찬 공간이 되도록 설계했다. 특히 외관디자인의 경우, 상징적인 건축물의 외관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새로운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고심했는데, 입면적이 넓은 건물 전면이 갖는 육중함을 줄이고 도시 환경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서울캔버스’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4만 2천개의 발광다이오드(LED) 소자를 설치해 줄리앙 오피의 “People walking”, 양만기의 “미메시스 스케이프” 등 다양한 영상 작품이 투영되는 미디어 캔버스를 만든 것이다. 외관뿐 아니라 실내에 비치된 론아라드의 “Desk and Sphere,”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등 수많은 예술작품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공간그룹의 창립자 김수근(1931~1986)선생의 지하아케이드 벽돌벽면과 북서측 선큰 정원도 보존하였으며, 이러한 시간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서울스퀘어의 예술적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서울스퀘어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친환경빌딩으로 거듭나, 국내 리노베이션 오피스빌딩 최초로 LEED 최상위 등급인 플래티넘 등급을 획득했다.  지난해 TV드라마 <미생>의 배경이 되어 직장인의 애환과 치열한 오피스 현장을 서울스퀘어의 곳곳에서 담아내면서 다시 한번 오피스 공간의 상징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현재 서울시가 도시재생 차원에서 진행하는 7017프로젝트의 국제공모전 등으로 인하여 그 건축적 가치를 재조명 받고 있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역 일대와 석양이 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서울스퀘어의 명소를 이번 오픈하우스서울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한다.  사진 박영채, 김용관 김정임 서로아키텍츠의 대표로 마스터플랜과 건축 설계, 인테리어 디자인, 공간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서울스퀘어(구.대우빌딩) 리노베이션, 제일기획 본사 리뉴얼, 배재대 하워드관, 네티션닷컴사옥과 라테라스 한남, 삼성동 테이크원 빌딩 외 다수의 인테리어 프로젝트가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건축학부와 대학원을 마쳤으며 배재대 하워드관으로 2011년, 라테라스 한남으로 2013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PUBLIC CONNECTION with Seoul Architecture Festival 후암동 NOOK, 김승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후암동 일식주택을 리노베이션한 건물로, 아주 좁은 골목 안을 유심히 살펴야 비로소 산비탈 축대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역 건너편 남산 자락에 8평짜리 대지 위에 총면적 13평 규모로 대수선한 초소형 건축물이다. 건축가 김승회는 80여 년 동안 여러 번 덮어 씌워진 세월의 두께를 조심스레 걷어내고, 허약해진 구조를 튼튼하게 보강하고, 새 주인이 필요에 맞게 최소한의 변형만 가했다. 리모델링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원형 복원에 가까운 작업을 거쳐 건축주의 작은 사랑방으로 거듭났다. 허름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던 옛날 집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건축주 이호영 교수의 안목과 취향도 큰 역할을 했다. 낡고 누추한 것에 스민 숨어 있는 가치를 감지하고, 그 보존의 의미와 가치에 공감한 건축주는 이 집의 특별한 공간을 여러 사람과 함께 공유하며 에어비앤비로도 운영하고 있다. 사진 김재경
OPENHOUSE 반계 윤웅렬의 별서, 김봉렬 반계 윤웅렬 별서는 구한말 윤웅렬이 지은 별장이다. 반계 윤웅렬은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부대신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다. 슬하에는 전주 이씨와의 사이에 좌옹 윤치호, 김정순과의 사이에 남포 윤치왕과 윤치창 3형제를 두었다. 1904년 여름동안 서울지역에 성행하던 성홍열이 10월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자 이를 피해 지내기 위해 창의문 밖 경승지로 손꼽히던 부암동에 조성한 여름 별장이다. 뒤편의 조적조 건물을 별장으로 지었는데,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셋째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1977년 서울시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건축물 외에 바위, 연못, 소폭포가 문화재로 추가 지정되면서 별서정원의 주요 구성요소들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별장의 건축적, 조경적 요소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집이다. 윤웅렬 별장은 1944년까지 셋째아들 윤치창의 소유였으나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80년대 말부터는 도쿄에 거주하는 집주인이 주로 세를 놓아 집이 망가지는 시초가 되었다. 이후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되던 이 집을 개인이 소유하게 되면서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사랑채는 마당을 모두 덮어 거실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원형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건물은 공기가 통하지 않아 썩고 있었으며 마당의 연못은 쓰레기 투기장이 되어버렸다. 이 집을 보수하는데 가장 큰 난제는 서울시 지정문화재라는 점이었다.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원칙으로 하므로 생활에 필요한 변형과 상충되었는데 그에 따른 가장 큰 설계의 기준은 외관은 유지하되, 내부는 편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단열을 해결해야 했는데, 한식 창호는 기밀성이 떨어져 단열성능이 거의 없으므로 내부에 한식 시스템창호를 새로 개발하여 설치하였다. 원래 이 집에 없던 화장실과 주방 등 위생설비는 건물의 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편리한 위치를 선정하여 실내로 들였다. 안채-사랑채-문간채로 분리된 각 건물을 신발을 신지 않고 연결되도록 하였으며 협소한 건물 규모에 맞는 가구에 대해서도 고민하였다.   글, 사진 온지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