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 스케치, 김찬중 제공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건축가 김수근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어머니가 공간화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김수근 소장님을 만났어요. 소장님이 직접 사무실을 구경시켜 줬는데, 설계실 풍경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땐 제도판이 있었잖아요? 경사진 책상이 주는 긴장감 같은 게 강렬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화판을 책상에 괴어놓고 한동안 그렇게 썼죠.
 
그런 환경에 노출된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여러 가지 자극을 받는데, 그때의 감수성은 놀랍고 신기한 거예요. 중요한 건 노출되고 따라 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제도판을 보고 와서 집에 화판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극은 없어지는 거죠. 마침 화판도 있겠다, 펜 통에 목탄 같은 것도 꽂혀있으니 해보는 거죠. 어머니 화실이 설계실의 환경과 비슷했어요.
또 동네 친구 집에 가면 플라스틱 통에 구멍 있는 템플레이트, 컴퍼스가 종류별로 엄청 많았어요. 그게 만들어내는 비쥬얼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집에 가면 컴퍼스로 그리기만 했어요. 그 친구 아버지가 우리나라 그래픽 디자이너 1세대인 서울대학교 김교만 교수님이었어요. 굉장히 신망받는 분이었죠. 그분의 작업을 생각해보면 컴퍼스를 많이 썼겠다 싶어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가장 큰 영향은 어머니가 아닐까 싶어요. 누드 크로키를 그리셨던 분이기 때문에 인체의 곡면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어머니와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건,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은 랜드스케이프다”라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계셨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여자의 몸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 앉은 촌부의 몸에 많은 게 담겨 있다고 보셨죠. 누드를 성적인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삶이 몸에 맞춰지는 것이고, 살아온 모습이 경이로운 거라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의 누드모델을 많이 했고요.
저에겐 굉장히 자유로웠는데 세상은 자유롭지 못했죠. 불편한 진실이었던 거고 지금도 완전히 자연스럽지만은 않아요. 지금도 누드화 하나만으로 전시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고집 짱이었죠.(웃음) 아버지가 꺾을 수도 없고 꺾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화가였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화가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 좀 더 밀착된 게 있었어요. 내가 궁금해하면 “너도 옆에서 그려봐”하고 옆에 종이를 깔아 준다든지 했죠. 어머니랑 있을 때는 눈치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동차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요?
묘한 게 도시와 차는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2학년 때 벨기에에서 살았던 친구 집에 놀러 갔어요. 유럽에 살았으니 집에 BMW, 벤츠, 아우디 같은 자동차 브로셔가 많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완전히 매료된 거예요. 내가 알던 차와 전혀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부터는 화교가 운영하는 명동의 책방에 가서 <car and drive>, <car styling> 같은 류의 일본 잡지를 사 왔어요. 그때 자동차를 디자인으로 접하게 된 계기였죠. ‘clay model’ 깎는 모습도 잡지를 통해 봤고요. 어린 시절, 모터쇼, 미래에 관한 얘기를 담은 콘셉트 카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어요.
나름 상당한 지식을 쌓았는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울산 현대자동차에 계신 친구를 졸라서 울산 현대자동차 엔지니링 센터에 보름 동안 머물 정도였어요.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 디자이너 아저씨들을 놀라게 했죠. 그러면서 친해졌어요. ‘커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거예요’라고 했는데,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그 꿈을 접게 한 것도 결국 그 디자이너 아저씨들이었어요. 그래도 그분들이 너무 멋있었어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셨던 거네요.
고등학교 때 그런 꿈을 꾸었고 잠시 건축을 잊었어요. 차는 항상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건축은 만화에 나오는 미래도시가 전부였고 <공간> 지에서도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건축에 관심이 있었지만, 자동차가 훨씬 강렬했어요. 대학은 건축과로 갔지만 어떤 유전자가 남아있는 거예요. 가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도 있고요. 그래서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의하고 의견을 듣는 데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웃음)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은 어떻게 다르다고 느꼈나요?
정말 이상하지만, 자동차는 왠지 이 세상 물건 같지 않았어요.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비율과 선의 총체적인 세팅, 감성, 광채가 감동적이었어요. 한번은 건축도 디자인 분야도 아닌 분이 말씀하셨어요. 잘은 몰라도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일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요. 디자이너는 하루하루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바꾸지만, 건축은 이것저것 다 해보고 오랫동안 영글어서 산모의 고통을 겪은 후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 같다고요. ‘매일의 고통, 지속성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건축의 사이클이 너무 길어요. 그런 부분이 상당히 부담되고요. 디자인은 사이클이 빠르니까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데, 건축은 긴 호흡 뒤에 나오는 결과라 더 선호했던 것 같아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려 했으나 대학 진학 때 아버지가 반대하셨다고 하셨어요.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고, 그때 고민이 많았어요.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산디과가 미대 안에 있어서였어요. 대신 건축과를 가면 건설사 사장이 되는 줄 아셨죠. 실제로 건축가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고 조금 싫어하시기는 했어요. 지금 건축가 지망 학생들이 저에게 상담하는 내용이 그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금융 분야로 가거나 변호사, 의사가 되면 억대 연봉이란 비교가 저희 때부터 시작한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때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이 150만 원이었는데 저는 한 달에 70만 원 받았거든요. 물론 지금은 두 배까지 차이는 안 나지만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선택하게 계기가 있나요?
당시에는 사실 정보랄 것이 없었어요. 그저 컷트라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학교 분위기를 보는 정도였어요. 저희 때 첫 선지원 후시험제를 시행했어요.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지고 재수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는 좀 더 안전하게 지원하게 되었죠.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가 건축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학교 환경 자체에는 실망이 컸어요. 그 당시 건축과에서 설계 전공 분위기는 좋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건축학과와 공학과로 분리되면서 훨씬 디자인 지향적인 분위기지만요.
 
당시 고려대 건축공학과는 공학 분야가 주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학창시절 제도판은 보통 1인당 1개씩 부여되는데 설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는 3개를 사용했어요. 학교 내 설계실에 여유가 많았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작업실 문화도 거의 없었고요.
주변에 건축 설계에 관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을 것 같아요.
보통 1학년 때는 제도 수업만 하는데, 갑자기 혼자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건축사협회 주관의 학생공모전으로 주제가 <신접살림을 위한 단독주택>이었어요. 설계를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리던 가닥은 있고, 규모가 작아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모형 없이 90x180 크기의 패널 1개 제출하는 것이었어요. 3월에 입학하여 4월에 공모안을 제출한 거니까 무모했죠.(웃음) 당시 배운 것이 나무 그리기뿐이었는데도요. 그래서 나무가 엄청 많은 집을 그렸어요.(웃음)
당시에는 스프레이 풀이 있다는 것도 몰라서 딱풀로 붙이다가 다 써버린 거에요.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해서 밥풀로 붙였어요.(웃음) 종이에 밥풀이 뚫고 나오고 아주 장관이었어요. 그렇게 5개 정도의 그림을 패널에 붙였어요. 그걸 들고 서초동 건축사협회 앞에 가보니 전국의 건축과 학생들이 인산인해였어요. 너무 놀랐죠. 그때 ‘시다(보조)’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어요. 한 패널에 ‘시다’ 여럿이 붙어서 마무리하고 레터링 글자를 붙이고 있고, 옆에서 군복 입은 사람이 심각하게 무게 잡으며 지시하고 있고요. 저는 레터링도 모르니 글씨를 직접 써서 제출했는데, 내 패널이 시각적으로 얼마나 뒤떨어지는지 보게 되니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게다가 혼자 왔으니까요. 너무 창피해서 패널을 신문지와 테이프로 붙여서 가리고 접수 줄에 섰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선배들이 저를 발견한 거예요. 제가 제출하는 거라고 하니 형 셋이 와서 구경했죠. 접수할 때 신문지는 뜯어서 제출하라고 하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밥풀로 막 붙인 제 패널을 본 접수자가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더니, 내년엔 잘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심사위원도 아니고 접수하는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였으니.(웃음)
 
창피했지만, 1학년짜리가 작품을 내러 왔더라고 학교에 소문이 났어요. 졸업한 선배들 귀까지 들어가서, 어느 날 대학원 실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졸업한 선배들이 쭉 앉아서 “얘가 걔야?”하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하는 말은 “너 용기도 대단하다”였어요. 이런 열정이 있는 후배라면 작업실을 만들 수 있겠다 해서 당시 200만 원을 주면서 작업실을 만들라고 했죠. 공모전은 떨어졌지만 작업실을 만들 후원금을 받게 된 거예요. 그 돈으로 제기시장 안의 작은 재봉 공장을 전세로 얻어, 건축과 3명을 더 모아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선배들이 리뷰도 해주고요.
 
그 계기로 건축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거네요.
선배들과 많이 싸웠어요.(웃음) 싸움이라기보다는 건축에 대한 토의 혹은 논쟁이었어요. 2학년 1학기 때 주택설계를 했는데, 집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선배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죠.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모여서 나름 심각했던 거죠. 아무래도 설계에 너무 소외된 지역에 있다 보니, 설계하겠다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밀도 있게 했어요.
그때 책도 많이 읽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터 아이젠만이 쓴 책이었는데, 모르는 단어를 형광펜으로 그어보니 나중엔 눈이 부셔서 책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웃음) 당시 고대 철학과 다니던 중학교 동창에게 물어보니, 그 책에는 6개의 학문이 혼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기호학, 논리학, 언어학, 현상학, 구조주의 등… 그에 대한 기본 소양이 없으면 읽을 수 없대요. 이 책을 쓴 건축가는 그것에 대해 알기 때문에 책을 쓴 것이니, 건축가라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친구와 각 분야의 인문서들을 읽고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그 친구의 도움으로 밀도 있게 공부하면서 피터 아이젠만의 글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론서들을 읽으며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요.
설계에 관하여 동기들과 의견을 나누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대학원 형들과 많이 교류했어요. 그 와중에 피터 아이젠만의 논리적 싸움에 대한 배움이 있었고, 큰 힘이 되었어요. 누가 더 논리적일 수 있느냐의 게임으로 볼 때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저는 작업에서 공격당하는 처지이었고,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름의 사고체계를 만들기 시작했죠.
 
학교 수업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작업실을 통해 채워졌을 것 같아요. 책이나 정보는 어떤 방식으로 얻었나요? 
앞서 말했던 철학과 친구의 도움이 컸어요. 그리고 잡지 아티클을 보면 인용문과 각주가 쭉 나오니, 그중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을 골랐어요. 주말이면 교보에 가서 다양한 분야를 둘러보며 도움 될 것 같은 책들을 골랐고요. 그때 아내와 연애할 때인데, 우스갯소리로 만약 우리가 대학 때 헤어졌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데이트 비용을 무조건 책에 써서였을 것이라 말해요. 그 정도로 책을 많이 샀어요.
 
그 당시 해외의 건축 흐름을 파악할 수 있던 매체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판단하자는 주의에요. 작가의 관점을 보는 편이에요. 사람과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거기에 동화되게 돼요. 책도 집중해서 보면 그에 대한 지적 보상을 스스로 만들게 되면서 그편이 되요. 제가 생각하는 독서의 위험성이란 다 읽고 나면 추종의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보고, ‘내 생각은 이래’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독서습관에는 그런 경향이 별로 없어요. 읽고 정리하는 것이 무슨 공부겠어요. 내 생각은 어떻고, 네 생각과 차이는 어떻고 가 중요하지. 한국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해 강박적이지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은 어떤 면에 매료되었나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을 읽고 나서, 그처럼 사고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모든 건축의 원리는 1부터 100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피터 아이젠만은 벽돌 한 장도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내가 그리는 1cm의 선으로 인해 큰 재화와 노동력이 낭비되거나 비상식적인 상황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이 조심스러웠어요. 피터 아이젠만이 말하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공공성에 관한 부분이라기보다는, 건축가의 시점에서 미학적인 이유만으로 만들어내는 무책임함에 대한 경고였어요. 그렇기에 설계 전체나 부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곧 건축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게 피터 아이젠만의 논조였죠.
하우스 텐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보자면 집이 설계되는 모든 과정에 이유가 구문처럼 분석되어 있었어요. 왜 창이 이곳에 뚫려야 하고, 슬래브가 어디까지 나고 등등….당시 그 책이 지적으로 보였고, 저에게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그 사람이 겪어야 할 불편함보다는 건축가의 책임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그 두 영역을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것에 영향을 받고, 심취했었죠.
그런데 피터 아이젠만도 건축 실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본인의 이론으로 학계에서는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지만, 실제 영역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변하기 시작해요. 다른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저처럼 그를 맹신하던 사람은 그 변화를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피터 아이젠만이 엑스트라 콘텍스트(Extra context)라는 키워드를 들고나오더라고요. 계속 똑같은 것이 반복되고 있을 때 생뚱맞음이 들어오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며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글쓰기의 방법론 중 하나로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를 합리화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변절자로 보이기 시작했죠.(웃음)
 
그걸 인지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1994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너무 실망스러워서 피터 아이젠만이게 편지를 쓰려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으니.(웃음)
아무튼, 그 뒤로 ‘랭귀지(language)’가 가진 함정에 대해 주의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는 매너리즘이고, 하나는 변절이에요. 피터 아이젠만의 경우 자기 언어를 이론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논리(logic)를 이야기하지만, 나중에는 논리를 제외한 모든 게 다 있더라고요.(웃음) 반면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는 변절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어요. 매너리즘이지만 사람들은 그 매너리즘으로 인한 브랜드를 사고 싶어 하죠. 물론 모든 환경을 하나의 언어로 푼다는 것은 여전히 의구심이 들지만요. 어쨌건 건축 언어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었어요.
 
말씀하신 ‘랭귀지’라는 것은 건축에서 어휘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고체계의 근원적 방향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첫 번째가 강해요. ‘랭귀지’란 곧 사람들이 지각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어요. 저 역시 사고하는 방식 체계와 결과물은 다르지만, 매 프로젝트마다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고체계를 랭귀지라 한다면 저도 강한 랭귀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표현되는 현상에 관한 것으로 보자면 작업 안에서 각각 카테고리가 있어요. 이 프로젝트는 ‘어떤 카테고리로 일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각 작업이 다른 성향으로 가게 돼요.
피터 아이젠만을 계기로 무언가를 추종하기보다는 다양한 정보들을 펼쳐두고 공통적인 속성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자기 생각으로 소화하고 말하는 게 중요하겠어요.
지금의 사회 현상도 그래요. 정보는 많아요. 진짜 뉴스도 많고 가짜 뉴스도 많아요. 그런데 결국 본인의 판단이 가장 중요해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조선일보 혹은 딴지일보가 하는 말을 100% 진실이라고 믿고 살 것인가죠. 자기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살든, 중요한 것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넓은 스펙트럼에서 각자의 논조를 파악하고 공통 사실만을 사실(fact)로 보고 나머지는 주장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내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앞서 말했듯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동요되어 버리거나 자신만의 의견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저는 아침마다 한 시간 정도를 브라우징하는 데에 쓰는데, 모든 종류의 뉴스 채널을 모아서 간략히 보고 나서 그러죠. “에잇, 거지 같은!(웃음)”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TOP LIST
SPECIAL 01 우란문화재단, 김찬중 2019년 10월 18일 5:00PM
OpenStudio 더_시스템 랩, 김찬중 2019년 10월 18일 6:30PM
SPECIAL 01 PLACE 1, 김찬중 2019년 10월 19일 2:00PM
SPECIAL 01 서울식물원_온실, 김찬중 2019년 10월 20일 2: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