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엔 어떠셨나요? 즐겨 찾던 관심사가 있으셨나요?
이렇게 모으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문화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 고궁 가는 것도 좋아했고, 골동품을 보러 황학시장부터 장안평도 다녔죠. 걷는 걸 좋아했어요. 특별히 갈 데가 없었으니까요. 데이트를 해도 한창 5시간씩 걷다 보면 종로에서 올라와서 성대 쪽으로 돌아 광화문으로 오면 서울 한 바퀴를 다 돌아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어느 동네에 계셨던 건가요?
처음에 용산구에 살다가 동대문구 쪽에도 살았어요. 젊을 때 놀던 곳은 대부분 명동이나 종로였죠. 종로 2가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 명동에는 필하모니 음악 감상실, 그리고 을지로에 타임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아주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 감상실을 좋아했어요. 음악을 좋아했다기보다도 친구들이나 여자친구들을 사귀면 아는 척하고 데리고 가고 무게 잡는다고 다녔던 것 같아요.(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벽제 가마터에 도자기를 구우러 가셨던 게 흥미로워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만드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항상 좋아했어요. 수업 시간에도 항상 책상 밑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도자기도 좋아하고 골동품도 좋아하고 가구도 좋아하긴 했는데, 그걸 진지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친구가 도예를 하는 게 계기가 되었어요. 친구 따라 가보니 그곳이 조용하고 좋더라고요. 흙을 만지는 게 좋았고요.
대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실망스러웠죠. 기껏 만들어서 가마 속에 넣었는데 완전히 다른 게 나오는 거예요. 가로 세로로, 30%가 줄어드니까. 면적으로 보면 0.7×0.7, 49%가 되잖아요. 거기에 또 높이를 0.7로 곱하면 부피는 3분의 1로 줄어드는 거죠. 깜짝 놀랐죠. 요즘은 전기나 가스 가마를 사용해서 일관성이 있지만, 옛날에 장작으로 땔 때는 그야말로 불이 어떻게 휘몰아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불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도자기가 휘기도 하고 색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유약이 안 녹는다든지 하니, 너무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컨트롤도 안되고 기껏 꺼내 보니까 결과물도 그렇고요. 산에 가만히 앉아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리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건축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건축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인가요?
사실 그 당시에 건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어요. 1970년대 후반 정도였는데, 교보빌딩이 지어졌고 그곳에 맛있는 스파게티집이 생겼어요. 큰 서점과 음식, 잘 지은 건물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죠.
그러면서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졌는데 오픈할 때 전시를 했어요. 그때 도면을 보게 되었어요. 청사진 도면이 두껍게 있는데, 뭔가 알아보지 못하게 그려져 있는 게 있어 보였어요.(웃음) 이걸 가지고 건물을 짓는구나,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은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세종문화회관이 처음에 지어졌을 때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너무 투박하고 무겁다’, ‘경복궁 앞에 그렇게 무거운 게 들어가야 하나’라는 이야기들도 나왔죠. 저는 어쨌든 그게 좋아 보이고, 대단해 보였어요. 도면으로 시작해서 건물이 되는 과정이 궁금했어요. 건축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고, 건축과를 가서 뭔지 한번 보고 싶었어요. 예술적이고 만드는 것이 중요한 건지, 엔지니어링을 잘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만드는 것,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교육받다 보니 흥미로웠어요. 엔지니어링을 굳이 많이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천직이라고 생각했죠.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왜 바로 유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성장한 1960~70년대는 우리나라가 많이 개방되지 못했었던 때죠. 70년대를 지나면서 유신을 겪었지만 저는 잘 몰랐어요. 선생님들이나 과외선생님들이 이야기해주는 것만 듣고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면서 통제된 사회 속에서 자라게 되었죠.
1970년대 후반, 80년대는 그야말로 격변기였어요. ‘국풍’이라는 문화 운동 같은 걸 국가적인 차원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죠. 그게 바로 저희 세대였어요.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도 친한 친구들이었고,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친구들도 있어서 같이 언쟁도 하고…….통제된 사회에 있으면서 더 자유로운 곳에 가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되었어요.
미국 대학을 선택할 이유도 독특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따라 몬태나대학을 선택하셨어요. 왜 그 소설이 동기가 되었을까요?
누구나 그런 기억 몇 개는 가지고 있을 것 같아요. 무시해도 될 만큼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자신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렇기 때문에 작업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일들이죠.
저에게 그중 하나는 당시 청계천 헌책방이었어요. 지나다가 들어가서 집은 책이 마크 트웨인의 『What is man』이었는데, 한글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어요. 당시엔 『톰 소여의 모험』을 쓴 그 마크 트웨인인지도 몰랐어요. 인간을 너무나 비관적으로 그린 책인데,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란 없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결국 자기를 위한 선택이고 결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질문을 던졌어요. 어떻게 보면 약간 괴롭다고 해야 하나, ‘저게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인간이나 인생을 훨씬 더 아름답게 긍정적이라고 바라보고 행복하게 자란 편이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궁금했죠.
어쨌든 그분의 소설이 좋아서 도대체 어릴 때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자라고 살았을지 궁금했어요. 이왕 가는 거면 그 지역에 가보고 싶었죠.
나중에는 스스로 어느 정도 답을 얻게 되었던 것 같아요. 『What is man』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적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고 그 이면에 감성적인 면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그 책을 읽고서 10년, 15년 건축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이성과 감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원 졸업 논문 때 한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도 감성적인 부분을 다루고자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몬태나 지역을 맞닥뜨렸을 때,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몬태나대학은 완전히 허허벌판 시골 같은 곳이었죠. 등록금이 저렴하고 공부하기 편할 것 같아서 그곳에서 2년 정도 영어도 익히고 공부한 다음에, 대도시의 큰 학교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워낙 날씨도 좋은 주립대학이다 보니 학교 시설도 잘되어 있었어요. 어느 날 하늘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몬태나에서 2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도 학교를 옮기는 걸 추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죠.
몬태나 지역에서 마주한 창고나 농업 시설들을 보면서 강렬한 감흥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지역의 풍경에서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래도 몬태나대학은 미국으로 치면 깡촌의 지방대죠. 시골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왔을 때 같이 흑백사진을 찍으러 여러 마을을 다녔던 기억도 나고, 그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농촌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건물도 형식보다는 최소한의 재료로 스마트하게 지었어요. 옛날에 지었던 우리나라 건물들도 담백하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실용적으로 지었잖아요. 서구의 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설들이었기 때문에 감명받고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 활발했던 국제 담론도 현장에서 접할 수 있었을 듯해요.
몬태나에 처음 갔을 때 선배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책을 보여줬어요. 저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누군지 몰랐어요. 너무 딱딱하고 형식에 치우친 것 같아 재미없다고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면서 ‘네가 뭘 안다고’하며 저를 아주 싫어하더라고요.(웃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멋있다고 보여줬는데 건축을 시작도 안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요.(웃음)
당시의 건축 스타일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저뿐 아니라 친구들도 그런 경향이 딱딱하다는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에 꼭 얽매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오고 1980년대에 디컨스트럭티비즘이 나오는 등 경직된 것을 새롭게 해체하는 형식도 나왔죠. 그야말로 프랭크 로이드의 딱딱함을 깨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 나왔을 때 거기에 다 동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캐나다 시골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건물의 아름다움과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런 형식을 깨든지 다른 형태가 필요해서 덧붙이듯 만들었을 때, 그 자체가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해 준 적 있었어요. 저는 그 말에 공감했어요. 우리가 공부하던 1980년대가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 건축이 나오기 훨씬 전인데, 경험이 없고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시골의 건물을 보고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직도 기억하는 그때의 장면들이 있으신가요?
랜드스케이프, 그곳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건물들이 편안하게 있는 게 좋았죠. 형식적으로는 굉장히 달라요. 우리나라 사찰이나 마을은 작은 조각들로 되어서 랜드스케이프에 스며들듯이 들어가는데, 몬태나는 형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서 있고 그게 풍광과 더불어서 가게 되죠. 형식은 아주 다르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풍광이 하나가 되어서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것 또한 매우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