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공원은 차별화된 도시공원을 선보였던 프로젝트였는데요.
선유도 공원 설계 당선이 1999년일 거에요. 첫날 가보니 여긴 이대로 보존하는 게 사는 길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지고 그 옛날의 기억이 녹색으로 덮인 선유도가 좋겠다 생각해서 최소한만 손댔어요. 대신 섬의 모양이 배와 같으니, 갑판을 오르락내리락하듯 옛 물탱크를 이용한 정원을 만들었죠.
공모전에 당선된 후 서울시에서 발표하라고 불렀어요. 서울시장, 부시장 비롯해 서울시 모든 국장, 담당 관계자가 앉아 있었어요. 그때 강홍빈 교수가 너무나 고마웠죠. 첫 마디가 “이거 작품 됩니다. 일체 손대지 말고 정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하세요” 하니까 공무원들이 입도 벙끗 못한 거예요. 나한테 할 말이 있냐기에, ‘설계한 후 공사 과정에서 건축가나 조경가가 감리해야 합니다. 특히 리뉴얼은 매우 복잡해요’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든든하게 방어를 해주셨죠. 그런데 서울시 조직에서 공정관리, 중간시찰 등을 오면 우리는 매일 낙제인 거예요. 전쟁터니까. 갖은 욕을 다 먹었어요.
선유도는 이제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됐어요. 막 문을 열었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문 열기 이틀 전에 갔어요. 들어가려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상한 공원을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 싶어서요. 그전에 이 공원은 특수하니 자원봉사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자원봉사자 100명 정도 뽑아달라 해서 그들에게 환경 교육을 하고 재생이 무언지를 미주알고주알 알려줬어요. 장소마다 여기서는 이런 얘기, 저기선 저런 얘기들을 막 설명해줬죠. 그렇게 교육을 해놔도 나중에 가보면 그 사람들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웃음)
문을 여는 날 또 갔죠. 테이프 끊고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데크를 달리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위험한데, 아이고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자원봉사자들 교육을 했는데, 아무도 안된다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지르고 다녔어요.
‘시간의 정원’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 풀고 앉은 이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강변이나 다른 곳으로 가시라, 여기는 환경을 교육하는 환경공원이다’라고 했죠. 그렇게 네 번쯤 나가서 악역을 자처해 소리 지르고 다니니까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후에는 ‘조용히 있기 좋습니다’, ‘기도하기 좋습니다’ 하고 전화가 와요. 그래서 괜찮았나보다 했죠.
시간이 흐를수록 선유도 공원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아요.
말 마요. 심사 때는 조경 심사위원과 교수들이 ‘왜 고급 타일을 쓰지 않았느냐’ ‘왜 페인트를 칠하지 않았느냐’ 말들이 많았어요. 설명할 때도 ‘한 백 년 후에는 이곳이 녹색 덩어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 시기에 수변 공간을 개선하고 공원도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여의도 샛강 설계를 그 무렵에 했어요. 거기도 웃지 못할 일이 있어요. 지금 모습은 두 번째 리뉴얼인데, 처음 리뉴얼에서는 데크 만들고 수로 만들고 버드나무 살리는 일들을 했어요. 한강 관리소에서 주차장과 체육공원 만들려는 걸 샛강을 그렇게 보존하면 안 된다고 내가 고집을 피웠어요. 설계비를 안 받아도 좋으니 그 돈으로 여러 생태학자를 데리고 소신껏 고쳐보겠다고 했죠. 자문비 1천만 원을 만들어주시더라고요. 곤충 생태학, 뱀 생태학자, 식물 생태학자 등 모두 매일 앉아 조사했어요.
그때는 홍수로 피해 본다고 버드나무도 다 베어낼 때였어요. 하도 홍수 이야기를 해서, 마침 생태조경 일인자인 세계적인 조경가가 한국에 와있어서 그분을 한강에 모시고 갔죠. "여기에 생태공원을 하고 싶은데 정말 홍수의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봐주세요.” 했더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담당 공무원을 끌고 샛강에 가서 ‘풀이 눕는다’라는 시도 읽어주고, 물에 대한 시도 읽어주면서 "여보세요. 여기가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랬죠. 홍수가 오면 한강에 물이 넘치는 게 당연하잖아요? 데크 떠내려가면 내가 새로 해드린다고 큰소리쳤거든요. 다행히 홍수가 와도 말짱해요.
오히려 고민한 것은 모기였어요. 습지를 만들면 모기가 생길 텐데 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할 줄 알았어요. 또 그땐 갈대숲, 보리밭, 억새 숲에서 성범죄가 많이 일어날 때였어요. 나는 억새도 남겨놨거든요. 뱀 나오면 어쩌나, 범죄가 일어나면 어쩌나 어찌나 걱정되던지. 그런데 아파트 주민들이 살살 산책을 나오더라고요. 공사가 끝날 무렵 아파트 가격이 올랐어요. 사람들에게 물으니, ‘집 앞에 이렇게 자연스러운 공원이 생기는데 누가 마다하겠어요’ 하더라고요.
여전히 서울시 심의위원들은 감사 때 나를 불러서 이게 무슨 공원이냐며 난리였죠. 그래도 시민들이 좋아하니 얼마나 좋아요.
여의도 샛강 프로젝트는 수변공간이 달라진 계기를 만든 것 같아요.
당시 생태학자들과 매일 방에 모여 토론했어요. 지금도 모니터링 하고 있거든요. 2차도 우리가 했지만, 리뉴얼하면서 이상한 다리, 시설들, 야외무대 등이 들어가는 바람에 마음에 안 들어요. 여기까지가 공공프로젝트를 맹렬하게 하던 시기예요.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와 공공프로젝트를 이어오다가 개인과 기업의 프로젝트를 주로 하게 되셨는데요. 희원이 그 전환점이 아닐까 싶어요.
어느 순간 공공프로젝트 하나 마무리하는 데까지 너무 지치는 거예요.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삼성과 관련을 맺게 됐어요. 옛 자연농원, 지금의 에버랜드 설계실에 제자가 있었는데, 한국적인 것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당시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 조경의 역사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한국 조경의 차이를 동시에 가르쳤거든요. 그 제자가 찾아와서 의뢰한 게 그 무렵 자연농원 개조였고, <희원>의 전신이던 시절 한국적인 정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나에게 딱 맞았죠. 그때부터 한국 정원을 많이 하게 됐어요. <희원>을 하면서 서세옥 선생 등 한국화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의견 교환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희원>을 개관하기 전에 이건희 회장님이 시찰을 왔어요. 당시 회장님 지시서가 따로 있었는데, 사실 조경에 실제 반영된 것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같이 다니며, ‘호수에 폭포 만들자 한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건너편 산에 자전거 도로도 만들라고 하셨는데 영빈관이나 희원에서 바라보는 산이니 그런 걸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이 벚나무, 단풍나무 많이 심으라고 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여서 그대로 했습니다.’ 등등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니 ‘인간 컴퓨터네’ 하시더라고요. (웃음)
프레젠테이션 기술이 뛰어나셨네요.
간부들은 우황청심환 먹고 회장님 앞에 가곤 하더라고요. 나야 그럴 건 없었죠.
<희원>이야말로 한국 정원의 정수를 담기 위한 작업이었는데요. 선생님에게도 중요한 프로젝트였을 것 같아요.
그룹의 사모님들이나 여러 인사가 내가 만든 정원을 보니 괜찮아 보였나 봐요. 그래서 연수원 고치는 일, 사옥 고치는 일, 산 하나 만들고 소나무 숲 만드는 일 등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 마음에 그래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향수 내지는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느닷없이 빌딩이 들어서고 개발만 하니까.
아시안게임이며 올림픽이며 엑스포며 하면서 수준이 높아지고, 조경이란 개념이 없다가 제대로 하니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 거죠. 마침 대전 엑스포나 올림픽, 여러 사옥, 코엑스 등 전부 우리가 했으니까, 각기 다른 상황이지만 꽤 한국적이라는 느낌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렇게 기업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좋은 후원자가 많이 생겼죠.
선생님이 원 없이 디자인하고 보여줄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군요.
의뢰인 대부분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하셨으니까요. 불만도 품지 않으셨고요. 그 와중에 안목이 까다로운 분도 있었어요. 의뢰인이자 선생이죠. 더 간결하면 좋겠다, 색이 복잡하다, 이건 필요 없다 등등 정확하게 집어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지금 아름지기 이사장. 나에게는 영원한 멘토이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죠. 점잖지만, 당신이 하는 일에는 치열해요. 나는 그 치열함이 아주 좋아요. 한번은 별장을 만드시는데 나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거에요. 그래서 ‘한강 물이 굽이 들어오는 걸 봐야 하니 마치 섬에 있는 것처럼 하고, 여긴 정자가 들어오면 좋은데 법적으로는 지을 수 없으니 바라보는 공간을 이렇게 만들고’ 등등 이야기했더니 마음에 무척 드니 그대로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생각도 억지로 해내려고 하면 안 될 텐데, 오랜 기간 좌충우돌하면서 돌아다니고 혼자 책으로 공부하면서 정리 안 된 채 쌓여있던 게 디자인하면서 하나하나 풀렸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글로 써서 자랑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지금도 나는 내가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계속 원고만 쌓이는 거예요. (웃음)
그 외에 애착을 갖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개인 프로젝트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사우스케이프>죠. 건축하는 조민석 씨가 나를 추천했겠죠. 현장 다녀와서 의뢰인에 보고하는데, 이상한 꽃이나 나무를 심기보다는 남해 풍경을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잔디 위주로 갔으면 좋겠다 했죠. ‘다음 회의 때 샘플을 보여드릴게요’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계약이 됐어요. 디자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하지 않고 단지 내가 지나치게 이상하게 쓸까 싶으면 딴지 걸 정도로 절제된 분이에요. 너무나 해맑고 즐겁게 매일 맛있는 거 먹으면서 했죠. 그 작품 아주 마음에 들어요.
사우스케이프의 동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했어요.
원래 산을 깎아 한쪽은 호텔, 한쪽은 클럽하우스를 지은 거거든요. 남은 돌이 으스러진 걸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해서 ‘그건 아니죠. 계속 부스러질 텐데, 거대한 암석정원으로 만들게요’ 했어요. 정원이라기보다 남해나 동해 바닷가 벼랑 끝에 잘 피는 해국 같은 거 심고, 풀 나오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날아온 소나무 씨앗이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어떻게 변할지 천천히 두고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사우스케이프 공사팀과 제주도에서 나와 함께 했던 파트너 팀과 같이 부스러진 돌을 다 골라냈죠. 조개 캘 때 쓰는 날카로운 공구로 큰 바위들 틈 사이를 다 긁어내고 좋은 흙을 메워 넣고 식물을 심은 거죠. 갯가에 피는 들국화를 심었어요. 다듬고 디자인된 공간이라는 걸 느끼게 하려고 마치 물이 흘러내려 고인 것처럼 연못을 만들고 나무도 심고 한 거죠. 야생에 맞는 식물을 심었어요. 섬에서 바람에 시달린 거 같은 나무요. 거기에 관상수를 심을 건 아니죠.
가능한 한 자연을 잘 볼 수 있게 산 정상에서 이 지붕선을 살려야 했어요. 그러니 나무를 복잡하게 살릴 수도 없고, 이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연상, 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연상을 할 수 있도록 흔들리는 풀을 심겠다고 했어요. 나무도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바닷바람 맞고 자란 나무를 갖다 놓은 거죠. 근처에는 흰 꽃만 심어놨는데, 요새는 당신들이 꽃을 나보다 더 얌전하게 잘 심어놔서 칭찬해주고 왔죠. (웃음)
문학소녀여서 그런지 나무나 풀을 설명하실 때도 시적이에요.
그래야 설득이 되지, 수목 이름만 나열해 놓으면 안 되죠.
선생님이 풍경을 시처럼 바라본다는 의미겠네요.
그렇죠. 문학이든 그림이든 옛 고사이든 전설이든 그런 것에서 적절한 인용을 슬그머니 하는 거죠. 내가 긴장해서 보고하면 그 공모전은 항상 떨어져요. 즉석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웃음) 미리 준비해서 설명하면 입력이 안 되더라고요. 의뢰인들을 보면 현장에서 내가 느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유리하겠다는 감이 딱 와요.
타고나신 건가요, 아니면 사회 생활하시면서 길러진 걸까요?
나는 대인관계가 굉장히 어눌해요. 일단 사람들을 별로 안 만나요. 굉장히 폐쇄적인 사람이에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동창회다 계다 조경 관계다, 그 많은 모임에 일절 안 나가요. 나갈 시간도 없고, 나가서 할 말도 없고요. 세상사에 어눌한 사람이라 아직 평생 사우나, 찜질방, 노래방도 한 번 안 가봤어요. 노래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참 궁금해. (웃음)
지금은 프로젝트가 많이 끝났는데, 건축이라면 보수할 일이 있어서 몇 년에 한 번 볼 수 있겠지만 우리는 하도 자주 바뀌니까요. ‘나무가 죽었습니다, 태풍이 와서 아니면 눈이 와서 가지가 부러졌습니다’ 등등 별 상황이 다 벌어지니까 그 생각하기 바빠요.
끊임없이 돌봐주어야 하는군요.
안 해줄 수 없으니까, 의뢰인들도 좋아하죠. 또 특별한 날 손 봐달라고 하면 나도 흔쾌히 봐주고요. 그러니 스스로 너무 힘들어지죠.
건축가와 협업을 많이 하셨어요.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에서 늘 선생님의 조경을 만나게 돼요.
열심히 하니까 행운이 온 것 같아요. 승효상 선생이나 아모레퍼시픽 프로젝트로 김종규 선생과 협업을 해왔죠. 승효상 선생과 중국 가서 한 일도 있어요. 아모레퍼시픽의 첫 인연은 김종규 선생과 알바로 시자 선생의 용인기술연구소를 하면서였어요.
구릉도 선생님이 만드신 건가요?
그럼요, 내가 한 거죠. 그냥 자연인 줄 알았죠? 옛날에는 국민학교 교정처럼 축구장 하나, 운동장 하나, 주차장 하나 이렇게 있었죠. 초기 리뉴얼 과정에서 알바로 시자 선생이 건축하고 주변 조경 설계를 내가 맡았어요. 아무리 봐도 실내체육관도 있는데 운동장이며 축구장이 꼭 필요한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회장님에게 다 없애고 완만한 구릉을 만들겠다 하고 모형을 만들어 갔어요. 시자 선생도 회장님도 좋다고 해서 고쳤죠. 시자 선생도 공식적으로 내게 고맙다고 하고, 연수원 관계자들도 고맙다 했죠. 그렇게 흙을 드러내며 연수원 지형(land form)을 다시 만들었죠. 공사 기간은 촉박한데 심지어 땅은 너무 척박해서 식물이 살기 좋은 흙으로 못 만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본 콘셉트는 잘 살리고 건물 주변도 하나씩 다 고쳤어요.
이후 이니스프리, 오설록 등을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고, 용산의 신사옥도 하게 됐죠. 회장님은 그 프로젝트들이 비슷한 거 같지만 또 다 다르다는 걸 아세요. 내가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건축에 맞게, 작가에게 맞게 간다는 걸 아시죠. 사람들도 느끼겠죠.
용인 기술연구소에서 건축가와의 협업은 어떠셨나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알바로 시자 사무실의 협력 건축가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그냥 자갈만 깔라고 하는데, 자갈만 깔면 여직원들은 하이힐 신고 못 다니잖아요. 그 고집도 못 말리겠더라고요. 그가 곡선으로 잔디만 깔라고 고집을 피우는 걸 나도 ‘아이고 모르겠다.’ 하면서 자작나무를 심었어요. 나중에 빼라고 하면 빼지 뭐, 이러면서. 결국은 좋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상층부의 굵직한 매스감이 저층부의 조경과 만나면서 아늑한 중정을 만들고 있어요. 좋은 느낌이었어요.
그게 없으면 맛이 없죠. 시자 선생의 건축은 참 철학적이에요. 주변의 경관을 어떻게 건축에 끌어들일지 귀신같이 알아요. 신의 한 수를 쓰시는 분이죠. 그런데도 내가 조경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그걸 다 납득하세요. 경관을 건축에 끌어들이는 방식이나 경관과 매치시키는 방식은 그동안 내가 만난 세상의 건축가 중에 최고라고 봐요. 그래서 그분을 참 좋아해요. 서로가 고집불통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웃음)
알바로 시자의 건축은 힘도 있지만, 또 굉장히 절제되어 있는데요. 선생님은 그런 공간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해요.
그렇게 철학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고, 시자 선생이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됐어요. 그래도 최소한의 파운데이션 플랜팅(foundation planting)은 있어야 한다고, 그냥 잔디나 자갈밭은 아니지 않느냐며 설득했어요. 근무하는 사람이 창 너머로 살랑거리는 나무 이파리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든지, 이 터가 아주 오래된 터이니 선대 회장 때부터 쓰던 나무 한 그루를 갖다 놓아서, 예부터 있던 터에 이 건물이 들어서는 거라든지 내 나름의 스토리를 만든 거죠.
그 과정에서 시자 선생은 다 좋다고 했는데, 시자의 협력 건축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담당 직원은 죽을 고생을 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의 직원들은 어느 면에서나 건축의 형태가 잘 드러나도록 하지, 내가 벽에 그림자 효과를 내겠다, 숲을 끌어내겠다 하는 건 먹혀들어 가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나대로 고집을 피웠죠. (웃음) 적당한 선에서 절충을 해요.
외부에서 들어와 중정이 펼쳐졌을 때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없었다면 너무나도 건축적인 공간에 당신이 만든 가구에, 카페트에, 조명에, 책상에 너무 하잖아요? (웃음) 한 예로 제주도 주택은 가장 제주도답게 하려고 해안 파도가 부딪히는 곳에 원래 살던 식물 같은 풀을 넣고 물을 만들었어요. 내가 봐도 좋더라고요. 돈을 엄청나게 들인 정원도 아니거든요. 돌을 깐다든가 쌓는다든가 하지도 않았고 나무도 근처 바닷가에 있는 것들을 가져다 둔 거예요. 그런데도 좋아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은 화장품과 관련한 식물의 모든 것을 담은 장소잖아요.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 듯해요.
당시 화장품 공장을 오산에 옮긴다 해서 봤더니 공장을 하나 놓고 지금 원료식물원과 연못이 있는 자리에 직원들이 쓸 운동장을 만들어 놨더라고요. 앞에 다른 상가와 공장들이 보이는 길가를 녹지로 가리도록 설계해달라고 왔더라고요.
회장님에게 바로 전화했죠. "회장님, 제가 직접 전화드려서 죄송한데, 제가 여기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땅 다 제게 주세요. 내가 정원으로 다 만들랍니다." 그랬더니, "그러세요." 해요. 무엇을 하려 하냐고 물어서 "축구장은 실내 체육관이 있으니 없어도 되고 다른 곳에도 해도 됩니다. 저는 식물원 만들고 싶어요.” 하니 "그러세요." 하더라고요.
아모레퍼시픽 일을 하면서 화장품 원료를 다 뒤져보니까, 한방 원료도 있고 우리나라 풀도 있고 꽃도 있고 곡식도 있고 우리나라 전국의 나무가 다 있고 외국 꽃과 나무도 있었어요. 여기 쓰이는 화장품 원료를 뽑아 놓은 자료가 이만큼 쌓였죠. 미리미리 공부해놓은 거예요. 기절초풍할 정도로 정열을 쏟았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식물원이에요.
그냥 식물원이라 하면 애매하니까 진짜 화장품 원료만 가지고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화장품의 보습이냐, 분이냐 이런 기능에 따른 분류도 하려고 했는데, 그럼 기업의 비밀이 노출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정보는 우리만 알자고 했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다니는데, 그게 하나하나 화장품의 보습제가 되고 미백제가 되는 원료예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긍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온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다들 온실이 원료를 재배하고 번식하는 정도로 생각해서, 건축가가 공장건축보다 온실이 높아지면 이상하다고 반대하더라고요. 일리는 있지요. 공장 건물도 벽돌로 나지막하게 만들었는데 온실이 느닷없이 높아지면 이상하겠죠. 재료만 기르는 거면 낮아져도 되지만 손님들에게 보여줄 온실이라 큰 나무들도 안에 넣어야 했어요. 이걸 높일 방법을 찾는 거구나 싶어서 땅을 한 2m 팠어요. 아래쪽에다가 휴식 공간 만들고 식물도 아래쪽에 두어서 높이를 높이지 않고 해결해 드렸죠. 아이고, 머리 쓰느라고 고생했어요.
정원에 영업 비밀이 다 숨어 있는 거네요. 원료식물원이 기업의 정체성을 정원에 담았다면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전혀 다른 콘텍스트인데요.
아마 관공서였으면 지금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안쪽이나 중정의 백합나무나 튤립나무(백합나무과) 같은 값싼 나무는 못 쓰게 했을 거예요. 그 나무를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옛날 김수근 선생이 대학로에 건물 지으실 때 백합나무를 썼고, 지금도 가보면 한 그루 남아있는데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고요. 그 옛날에는 월동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걸 김수근 선생이 꿋꿋하게 밀고 나갔고, 또 잘 살아남아서 건축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아느냐고 했죠.
원래는 담당자들이 소나무 심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여기도 저기도 다 소나무인데 현대적인 건물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이 나무 한 가지만 쓰겠다고 고집을 피웠죠. 말이 쉽지 그 고집을 관철하기도 힘들었지 않겠어요. 자꾸 다양한 나무를 심으라고 했으니까요.
다음으로 어려운 건 큰 키의 오래된 나무를 구하는 거였어요. 이식하면 잘 죽으니까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 공사 기간이 몇 년 남아있으니 미리 계약하고 뿌리내리게 해서 죽지 않게 하자는 거였어요. 밭을 미리 하나 사서 몇 년에 걸쳐 가꾸는 거예요. 삼신한테 빌 듯이 잘 커 달라고 빌면서 하자 없이 가져다 옮긴 거죠.
건물 중간의 옥상정원 봤나요? 그것도 근사하죠? 그건 단풍나무예요. 내가 단풍 중에서도 다관형을 쓰겠다고 했어요. 다관은 밑에서부터 가지가 많이 올라온 것을 말하거든요. 그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굵어져요. 엄청나게 헤매다가 서해 당진 쪽에서 찾았어요. 단풍이 있는 밭을 사서 최소한 1년 반 전에 뿌리를 돌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구해다 만든 거예요.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에 있는 정원은 허공에 뜬 도심 정원이잖아요. 접근 방법도 달랐을 것 같아요.
정원의 형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치퍼필드 쪽에서도 일단 곡선으로 해놓고 큰 남산 소나무 하나 심고 잔디를 심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큰 나무는 살 수가 없다, 하자가 생겨도 감당을 못한다고 계속 이야기했는데도 바뀌지 않아서 몇 년에 걸쳐 싸웠죠. 나는 단풍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어요.
두 번째, 나무가 하나로 되어 있으면 금방 죽을 수 있어요. 단풍은 가지 하나가 죽어도 트렁크가 많이 나와 있으니 표가 안 나거든요. 한 그루만 심어도 여러 그루를 심은 효과가 나요. 불과 몇 그루여도 서늘한 공기를 만들 수 있어서 직원들이 쉴 수 있고요. 이 큰 공간에 소나무 몇 개 심는다고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미군 부대나 남산의 유사한 나무 흐름이 무슨 효과를 보겠어요? 나도 고집 많이 피웠죠. 우리 박성진 소장이 엄청나게 고생했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조경은 생육을 다룬다는 점이 중요하네요.
그렇죠. 조경이라는 게 건축 재료와 비교한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루는 거잖아요. 내 순간에서 영원히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변화가 주변 환경으로 인해 순리적으로 변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니까요.
두 번째로는 나무나 꽃과 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그걸 살게 하는 흙도 살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걸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흙이라는 게 살아 있는 거니 어떻게 보살피고 조합해야 하는지, 해당 나무와 환경에 맞게 어떤 조건을 형성해야 하는지 관심이 없잖아요.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또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매 순간 변화한다는 변화성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꽃 피고 단풍 지는 정도만 알죠. 하지만 버드나무가 2월에 이미 노란 빛을 띠면서 주변 공기가 노랗게 색이 변한다는 건 몰라요. 어떤 나무는 싹이 틀 때 반짝거리고 어떤 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쑥 하고 싹이 올라오고, 봄날의 변화에서 시작해, 바람 불 때는 어떤지, 더위에는 이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을에는 어떻게 단풍이 드는지 모르죠. 심지어 겨울에 잎이 떨어졌을 때 남아있는 가지의 구조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심다 보면 나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주지 않는 거죠. 여러 가지를 섞어 놓으면 조화도 안 되잖아요. 요즘 짓는 아파트의 조경이나 공원을 보면 온갖 나무를 빽빽이 심어 놔요. 그 모습이 1년 내내 어떨지는 생각을 못 해요. 그냥 꽃이 예쁘니까 심는 거지. 이 나무를 심으면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새가 오고, 어떤 색의 변화가 있고, 각 나무가 어떤 계절성을 갖는지 알려고 하지 않아요.
옛사람들은 청아한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대나무를 심고, 달빛을 맞이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또 뛰어노는 개구리를 보기 위해 연꽃을 심었어요. 신사임당의 <초충도>처럼 꽃 하나 그리면 거기 곁들여지는 벌레들, 날아오는 나비 등을 맞게끔 신경 썼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런 게 없어요. 어떤 새가 오고 어떤 분위기가 될 것인지. 그 나무로 인해 오는 변화나 움직임을 보지도 못하고 못 하는 거죠.
또 조경이 변화성만 강조할 수 없잖아요? 건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죠. 내 나름대로는 밤잠 안 자고 정확한 게 떠오를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생각해요. 가령 저 건물에 남산의 소나무를 가져왔을 때 지형을 건축, 주변 환경과 어떻게 잘 맞게 할지를 생각해요. 기본적인 태도나 형태랄까, 정신이랄까. 물론 금방 생각날 때도 있지만요.
땅과 건축이 만날 때 건축가는 땅을 평편한 지반으로 보지만, 내 경우에는 지형을 만들면 좋겠다 하면서 건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죠. 나 역시 시대적인 흐름에 대해서 왜 관심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지나 보니 그걸 따라야 할 명분이 없더라고요.
훌륭한 건축을 가보면 다 그 환경, 그 건축에 맞는 거지, 건축 따로 조경 따로 놀지 않아요. 외국 조경가들과 만나서도 이야기해보면, 무엇보다 조경은 건축 없는 공간이 없으니 건축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해요. 공원을 설계할 때도 가장 초기에 여기에 가장 잘 맞는 건축가는 누구일까 생각해요. 초기에는 선유도 전부터 조성룡 선생께 소신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늘 맞게 해주셨고요. 조성룡 선생이 내 잔소리 듣기 싫다며 우리 사무실 소장들과 일하려고 해서, 내가 배반했다고 웃으며 놀리지만요. (웃음)
건축가와 대화가 안 되면 일이 안 되더라고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건축가를 설득하겠다고 조경이 뭐 별나다고 잘난 척하다 보면 절대로 설득 못 해요. 허심탄회하게 해야죠. 작전상 일부러 일자무식한 할머니처럼 나갈 때도 있어요. 그러면 말려 들어오죠. (웃음)
‘설득의 기술’이라는 책을 내셔야 할 거 같아요. (웃음)
의뢰인에게 보고할 때의 태도, 건축가에게 처음 만나 안을 설명할 때 태도가 다 다르고 모두 중요하죠. 오희영 선생님 나를 두고 한 얘기가 있어요. 내가 모든 사람의 의견에 대해 다 알겠다고, 잘 반영하겠다고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대요. 그런데 결국 자기 뜻대로 다 하더래요. 그걸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니까. 그건 내가 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거죠.
무엇보다 건축가와 협업은 계획 초반부터 같이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참 좋겠는데, 건축가 대부분 건물을 지으면서 조경가를 찾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참 얄미워요. 아주 오랫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특히나 조경 설계비가 건축이나 시공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거든요. 그럼, 사람 시달리는 거 말도 못 하죠. 조경은 사실 수익이 마이너스에요. 그런데도 그렇게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결국, 둘 다 땅을 다루기 때문에 서로 간의 이해가 중요하겠어요.
건축은 도시계획, 어반디자인을 이해해야 하죠. 그리고 땅을 단단한 지반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땅을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로 보니까요. 도시도 그렇잖아요. 박완서 소설처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하는 거죠. 그런 걸 다 감안해줘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공간에 어떤 개성을 불어넣을 것인가, 어떤 성격을 줄 것인가, 어떤 풍경으로 연출할 것인가 하는 건 매 건 달라야 해요. 한국 정원이라는 하나의 이름이지만 놓이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요. 모든 건축도 건축가가 다르고 도심이다 근교다 서울이다 지방이다 등 모든 건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서 그에 따라 조경도 달라야 하죠.
보통 어떻게 조경을 할지는 땅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이 나요. 다만 그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합리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찾는 거예요. 나 혼자서만 진땀 뻘뻘 흘리는 거죠. 아직은 우리 사회가 너무나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게 나는 싫어요. 이상하게 해놓은 것 뒷수습하려면 아주 머리가 지끈해요. 지금도 그런 일이 많고요. 재미있는 건, 내가 아는 의뢰인들은 내가 한 것인지 아닌지 다 알아봐요.
여러 장르를 다루지만, 어쨌거나 나는 한국 사람이고 여긴 한국이니, 우리나라 민족 정서와 우리 땅에 맞는 것이면 좋겠다 싶어요. 공공 건축이고 공공 조경이고, 도시고 농촌이고, 정리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품격을 찾는 것, 한국적인 것을 현대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다이나믹함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현대에 나라가 너무 바뀌다 보니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죽고 나면 정말로 전통이 없어질 거예요. 그래서 더 아등바등 하나 봐요. 그렇다고 옛것을 그대로 남기는 건 이 시대에 안 통하잖아요. 그래서 돌 하나라도 고심해서 놓는 건데, 다들 그게 좋은 건 알면서 안 하더라고요. 좋으면 실현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인터뷰 임진영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