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풍경을 우리 시대에 구현하며 한국 조경의 고유한 정서를 펼쳐 온 조경가 정영선은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熙園)’, 선유도 공원, 경춘선 숲길 등 서울의 주요한 수변 공간, 공원, 녹지 등을 구현해 왔다.
1941년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란 정영선은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주부생활> 기자로 활동하다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로 입학한다. 1980년 조경기술사를 취득한 최초 여성 기술자이기도 하다. 청주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조경 설계 현장으로 복귀한 후 1987년 조경설계 서안을 설립해 본격적인 조경 작업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조경가 정영선은 이 시기 국토 곳곳을 걸으며 우리 땅의 꽃, 풀, 나무 등을 조사하면서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한국의 경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땅의 고유한 풍경에 대해, 그리고 한국 조경의 고유한 정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 고민하고 실천해온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의 꽃과 식재가 어우러진 소박함과 평온함이 담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정영선은 서울이 옛 도시 한양의 경관 – 옛 그림과 시에 남아 있는 한강 풍경을 회복하는 비전을 말한다.
조경계의 거장이자 한국 조경의 굵직한 행보를 만들어 온 조경가 정영선은 지난 9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조경가협회가 수여하는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이번 오픈하우스서울 특집에서는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과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가 꿈꾸는 서울의 경관을 나누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도시의 공원, 광장, 정원에 주목하고 그 여백의 가치를 알리며, 도시 공간에서 녹지의 역할과 중요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출생연도를 여쭤봐도 될까요?
41년생이에요. 팔순을 넘겼어요. 지금 작업한다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 많을 거예요. (웃음) 영국이나 미국에는 80살 넘도록 작업하는 유명한 여류 조경가들이 있어요.
선생님 작업이 벌써 5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왜 이토록 미친 듯이 달려왔는지 싶어요.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두 가지가 큰 주류를 이뤄요. 하나는 간과했던 공공 건축과 공공 조경에 대한 것이에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 전통을 현대화하고 이 시대에 맞게끔 한국 정원의 원형을 찾고 복원하는 것, 이건 꿈에서도 소원이에요. 그 외에 식물에 관심을 두다 보니, 우리나라에 중요한 국도립 수목원, 식물원, 개인식물원 프로젝트들. 다음으로 골프장, 리조트 기타 등등 민간 프로젝트, 끝으로 개인 정원들이 있죠.
다음으로 협업 프로젝트가 있어요. 건축이 주가 될 때도 있고, 조경이 주가 될 때도 있는데, 건축가와 파트너로서 긴밀하게 작업한 것도 분류해볼 수 있어요. 초기에는 조성룡 선생과 작업한 게 아주 많고, 가끔이지만 그 시대 우규승 선생하고 긴밀한 협업이 있었죠. 최근 십여 년 이상은 승효상 선생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나를 믿고 맡겼죠. 아모레퍼시픽과도 일을 많이 하는데 외국 건축가도 있고 한국 건축가도 있지만, 김종규 선생이 같이 일을 해서 호흡이 잘 맞았어요. 요새는 혈기 있고 아이디어 있는 조민석 선생과도 여럿 했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중요한데, 조경 작업은 설계 과정을 시각화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도면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내가 왜 이렇게 바빠졌냐 하면 설계로 그쳐서는 작업이 안 되더라고요. 할 수 없이 어지간한 것은 직접 시공을 해버려요. 건축은 비 새거나 리노베이션을 하는 게 아니면 부를 일이 없잖아요. 하지만 조경은 끝없이 가야 해요. 왜냐면 생명체잖아요.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내 스케치대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는 안 되니까 삭신이 고달파요. 오늘 오래간만에 작업복 벗고 사무실에 앉은 거예요. (웃음)
강남 도심치고는 사무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요. 자리를 잘 잡으신 것 같아요.
지하에 모델실이 있고 2, 3층을 쓰고 있는데 가난한 사무실이에요. 건축은 그래도 규모가 있지만, 조경은 절대로 돈 버는 회사가 아니잖아요.
조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농과대를 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가 가져오신 달력의 스위스 풍경을 보면서였죠. 6·25 때 황폐해진 산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는데, 수풀이 가득한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서울대 농과대를 졸업하셨어요. 농과대를 들어가게 된 이유가 있나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경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뜻밖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옛날에는 특채라는 시험제도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대구에서 교사였는데, 집이 가난하니 특채 장학생으로 경북대 영문과에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문학소녀였거든요. 처음 내가 농과대 가겠다고 하니까 엄마가 학교 선생 월급으로는 안 된다고, 서울 못 보낸다고 난리 치셨죠.
그런데 아버님이 박목월 선생님과 친했어요. 피란 때 아버님과 같은 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하셔서 늘 편지를 주고받으셨는데, 내가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했나 봐요.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시집을 우리 학교에 내 이름으로 소포를 보내서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어요. 아버님이나 박목월 시인은 내가 문학을 하기 바라셨어요. 내가 그때 대구에서는 글도 잘 쓰고 상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했거든요.
그래도 서울대 농과대에 가고 싶다고 법석을 치니, 박목월 선생이 ‘오히려 문과대 가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남학생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받아라(웃음)’ 하셔서 아버지도 허락하셨어요. 박목월 선생은 그 이후에도 내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셨나요?
농과대 갓 졸업했을 때는 관련 직장인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에 있었어요. 임시직이지만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는데도 성에 안 차더라고요. 그러던 중 <주부생활> 기자 모집에 붙고 나서 박목월 선생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죠. 그랬더니 서울에 있는 댁으로 오라 하시더라고요. 찾아갔더니 약속을 하라고 하세요. ‘술 마시고 말고 남자들과 담배 피지 말라고. (웃음)’ 아마도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셨겠지. 나야 그런 데 원래 관심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은 ‘글을 써라, 신춘문예 시도해라’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나도 이미 관심이 없었고요. 농과대에서도 중요한 상을 받았거든요. 그 시절에 서울대학교 주관하는 신춘문예가 있었는데, 평론에는 이어령 선생이, 시는 내가 상을 탔어요. 지금까지도 작가 아닌 사람이 상을 받은 건 나밖에 없을 거예요.
기자 생활은 어떠셨나요?
잡지사 기자 시절, <주부생활> 2호부터 패션, 육아, 주택 등 여러 가지를 담당했어요. 당시 <주부생활>에서 주택 부분은 황무지였는데, 내가 주택과 정원을 맡겠다고 했어요. 집이라곤 문화주택밖에 없을 때, 우리나라 주택의 중요성을 살려야 한다 해서 원색화보를 만들었어요. 그때 고생은 말도 못 해요. 지금은 돌아가신 나상기 건축가의 건축 사진 찍을 때, 집에서 쿠션, 도자기 같은 소품을 다 가져오셨어요. 그런 법석을 치면서 일했죠. 윤덕원, 나상기와 같은 건축가를 만나고, 김수근, 김중업 사무실에 젊은 여자가 벌벌 떨면서 찾아가 인사하며 한 2년 기사를 썼죠.
그렇게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환경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우연의 일치에요. 서울대 미대 교수님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환경대학원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어요. 놀라서 마감 날짜를 보니 내일모레인 거예요. 그래서 꼴찌로 등록했어요. 대학원에 가니 교수도 나보다 나이 어렸어요. 이광노 교수는 출석 부를 때 ‘언니’라고 했으니까.
농과대를 간 것은 박목월 선생님 덕분에, 환경대학원은 그 화가 선생님 덕분에 가게 됐어요. 또 잡지사 시절 윤덕원, 김석철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그 시기가 밑거름이 되어 주었죠. 잘은 모르지만, 그 옛날 문화주택을 취재하며 공부했어요.
나상기 선생님은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직접 만나서 취재하신 거네요.
맞아요. 그때 그 노란 집의 실내장식을 위해 주인 허락 받고 나상기 선생님과 내가 서로 소품을 가져와서 장식했던 기억이 나요. 윤덕원 선생님은 주택에 대한 글을 많이 써 주셨죠.
인연이 정말 많으셨네요.
내 인생에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어요. 가장 무서웠던 사람이 김수근 선생. 매우 근엄하신 분이었고, 사진도 찍지 못했죠. 인간미가 있었던 건 김중업 선생이었고, 윤덕원 선생님은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노력하셨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데, 옛날엔 카레라이스가 뭔지도 모르고 대학을 갔어요. 당시 <주부생활>에서 육아 담당 기자였는데 소아과 선생인가 산부인과 의사인가 인터뷰하면서 너무 쑥스러운 거예요. 출산하는 곳에 가서 사진기자가 사진 찍고 나는 부끄러워서 안절부절하고. 그런데 그 여자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워커힐 호텔에 가서 카레라이스를 사줬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웃음)
김남조 선생님도 생각나요. 굉장히 어려운 시절에 잡지사 기자 하면서 조경을 공부한다고 작심하는 중에 아버지 친구가 청담동에 사셔서 거기 작은 하숙방을 얻어주셨거든요. 거기 살 때 매일 김남조 선생님과 굴다리를 건너며 다녔어요. 그 선생님이 참 정이 많았어요.
서울대 환경대학원도 처음 설립되고 당시 조경학과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였는데요.
우리나라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들어온 것은 미우나 고우나 박정희 시대 때 국토를 개발하면서 보존과 조경에 관심을 가져서예요. 청와대에서 조경직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경학과가 생겼어요. 한국종합조경공사라는 걸 만들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조경학과 석사과정을 만들고 다음 해 서울대, 영남대 등에 한꺼번에 조경과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교수가 없다 보니 환경대학원 졸업생을 어지간하면 교수로 보냈어요. 2년간 조경 공부해서 무슨 교수를 하겠어요.
어쨌든 초기에는 정부의 조경 관련 일 - 가령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설계하는 일 등을 모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들이 각 대학의 연구프로젝트, 설계사무실 등으로 갔어요. 그때 조경설계사무실이 두어 개 있을 때죠.
선생님의 대학원 시절이 궁금해요. 조경이 배우고 싶으셔서 가셨잖아요. 학교에서는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주간 야간 수업이 있었어요. 야간은 직장, 공무원 중심으로 했는데 교수들이 모두 외부에서 오니까 주야간이 섞여서 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야간 직장인 학생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거예요. 가장 연장자인 셈이죠. 이광노 선생이 굉장히 열심히 조경과 건축의 관계를 잘 가르치셨고, 교통계의 선생님은 우릴 데리고 중요한 전시도 다니며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문리대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러 오시고, 시청각 내지는 디자인 관련해 김청자라는 서울대 미대 교수가 오시고, 항공사진 판독 가르치는 분, 지역개발 가르치는 분도 오셨어요. 내부적으로는 도시계획과 통계, 도시경제학만 가르치는 분만 계셨죠. 그러다 보니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우리 산림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해서 농과대를 갔는데, 정원보다 더 큰 이야기들이 많으니 정신없이 재밌었죠.
그때 학교에서 환경대학원 앞으로 조경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어요. 대통령의 숙원사업인 경주보문단지 관광특화사업으로, 경주 안에 있는 불국사 일대를 성역화 하는 일을 조경과에 의뢰한 거예요. 교수님들이 심사하고 학생들에게 안을 내라고 했는데, 내 안이 덜컥 된 거예요. 우리끼리 간단하게 팀 짜서 한 거였어요. 공대 건축과 나온 사람들은 엄청 신경질이 났을 거예요. (웃음)
지금 하버드 GSD도 도시, 건축, 조경 세 분야가 하나로 통합된 방식이잖아요. 이른 시기였지만 당시에도 통합된 장이 있었네요.
교수도 그렇게 뽑아 놓으니, 나무를 어떻게 심으라고 알려주는 수업은 없었어요. 알아서들 공부하는 거에요. 각자 자기 바람 대로요.
인생마다 고비가 있지만, 나는 돈의 운은 없었지만, 사람 운은 있었던 것 같아요. 졸업하기 전에 원하는 곳에 가서 일하는 실습 기간이 몇 달 있었어요. 대부분 한국종합조경공사 설계사무실에 가서 설계하고 돈을 벌었는데, 나 혼자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 갔어요. 담당 과장이 유명한 문화재 전문위원이었어요. 그분이 나를 보더니 뭘 하고 싶냐는 거에요. 그래서 ‘한국 정원을 알고 싶은데, 책도 없고 있어도 중국 일본 책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창덕궁 후원이라는 한국 정원이 있는데 왜 책이 없는지 알고 싶다’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실습을 창덕궁 후원만 하고 싶냐 해서, ‘설명 붙여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 다닐게요.’ 했어요
창덕궁 후원은 비공개 장소가 아니었나요?
그때는 오히려 자유롭게 다닐 때에요. 커피 한 포트 들고 아침부터 나가서 밤까지 있다 왔어요. 못 들어가는 곳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 데나 다녔어요. 그때 기록도 더 많이 찾고 설명도 들었다면 좋았을걸. 주변머리가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것도 싫고, 잘난 척하면서 ‘느낌이 중요해’ 이러며 다녔죠.
그때 경험이 정말 중요했겠어요.
그게 살이 되고 피가 된 거죠.
대학원 졸업 후에는 청주대 교수로 부임하셨어요. 교수 생활은 어떠셨나요?
교수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환경대학원 졸업하고 본의 아니게 다들 교수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청주대학교의 학장이 조경과를 세우고 싶다고 서울대에 찾아왔어요. 학교에서 나를 소개했죠. 그런데, 당시 청주대가 한수 이남(한강 이남)의 최고 사학인데, 그때까지 여자 교수는 한 명도 없었던 거에요. 갔더니 수십 명의 남자 교수가 가득한데, 내 방도 없을뿐더러 여교수용 화장실도 없고, 숨이 턱턱 막히는 거예요. 웃지 못할 일도 많았죠.
그래도 청주대학교 환경대학원 원장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나를 아껴주셨어요. ‘고루한 충청도 늙은 교수 사이에 여자는 당신 하나인데 처신 잘 못 하면 여자 조경가들이 취직할 곳이 하나도 없다, 당신 태도에 달려 있다’ 하면서 청주에서 공중목욕탕도 가지 말고 학생이나 교수와 술자리도 하지 말아라, 청주 시내에서 집도 사지 말아라, 몇 년 동안은 먼 곳에서 통근해라 등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주의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도 조경학과가 학교 미화에 필요하잖아요. 학교 정원을 고쳐야 하니까. 가자마자 이사장도, 충청도 지사도 너무 좋아했죠. 우리나라 최초 공원묘지 기본계획을 세우라고 해서 밤새고 코피 흘려가며 학생들과 충청북도 시범공원묘지 기본계획을 세웠어요. 지사가 붓글씨로 쓴 긴긴 편지를 가지고 본인 대신 보사부 장관에게 보고하라고 했죠. 그래서 설명을 하고 예산을 따와서 그 공원묘지를 정말 잘 만들었어요. 학교생활 하면서 밤새는 걸 일로 삼았죠. 충청 지사가 틈만 나면 나를 칭찬하니까 공무원도 학교에서도 꼼짝을 못했어요.
최초로 여성 기술사 자격증을 따셨어요.
마흔 넘어 뒤늦게 결혼을 했어요. 신랑은 서울로 옮기면 모를까 충청도에서 교수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도 속으로는 설계가 선생보다 낫겠다 싶었죠. 당시에는 기술사자격증이 있으면 사무소를 차릴 수 있어서 재직 중에 자격증을 땄는데, 그게 여자로서 최초예요. 우리나라 여러 분야의 기술사 중 그 해에만 여자 기술사가 세 명이 나왔어요. 국토에서 내가, 그리고 금속공예와 식품공예가 각 한 명씩이었는데, 당시 나만 신문에 인터뷰를 해서 유명세를 치렀죠.
그렇게 종합기술사가 필요한 종합조경 관련 회사에서 몇 년 일하다가, 개인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도 나라에서 기술사를 양성하고, 조경 분야에서는 종합조경공사가 생기고, 기술사가 한 열 몇 명이 넘으니 그 사람들이 사무실을 차릴 수 있게 해줬죠. 나도 독립해 나와 사무실을 차리게 됐고요.
초기에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를 많이 하셨어요.
고비마다 참 많은 사람, 엉뚱한 곳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어요. 대명건설 일을 할 때부터 지도교수이자 당시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오희영 선생과 같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줬어요.
그 무렵 1983~ 85년 때부터 이후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 올림픽, 대전 엑스포 등이 연이어 치러졌잖아요. 이때만 하더라도 조경은 호황기로 봐도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거의 내가 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기 위해 아시아선수촌을 만들고 종합운동장을 리뉴얼 할 때 공모전에서 조성룡 선생님이 당선되고 조경 파트너로 나를 택한 거예요. 그래서 선수촌과 아시아공원 조경을 만들었어요.
그때도 사무실 넓은 테이블에서 주야로 일을 했는데, 그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원을 도면 작업한 거예요. 그전에는 없었죠. 남서울 대공원의 경우 외국에서 해왔으니까요. 국내에서 조경을 위해 청사진을 굽고 식자 따 붙이는 걸 처음 보니까 공원과, 녹지과 등 여러 공무원이 와서 ‘나무는 언제 심는 거예요?’, ‘잣나무 좀 심어주세요’라고 말하는 식이었죠. 제발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신기하고 걱정되니까 매일 오는 거예요. 아시아선수촌과 아시아공원 설계 납품 때 너무 과로해서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어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염보현 시장께서 너무 바쁘니까, 종일 기다리다 자정에 보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보고 받는 분이 나를 참 예뻐하고 좋아하셨어요. 눈 껌뻑껌뻑하시면서 종합운동장 앞도 고쳐달라, 뭐도 해달라 해서 그때 일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한전 사옥 프로젝트도 그 시기에 진행하신 건가요?
그렇죠. 그 과정에 강남에 한전 사옥을 짓기 시작했는데 엄이건축이 설계했어요. 건물 소개를 하면서 사람으로 치면 이게 누운 거고 앉은 거라면서 사람에 빗대어 소개하더라고요. 면적도 엄청나게 크고요. 설계를 보니 도저히 내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대명건설 이사로 있을 때인데, 당시 한전의 박 회장이 설계해보라고 해서 하룻밤 만에 해갔어요.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한국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담을 없앨 겁니다.” 했죠. 당시로써는 한전 같은 국가기관이 담을 없앤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이곳이 예전에 사하촌이기 때문에 얕은 산자락을 만들어 소나무만 심을게요”라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시는 거예요. 화장실, 시계탑 다 안 넣겠다고 했는데 다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서 큰 성공을 거뒀죠. 방송에도 나왔어요.
그렇게 작품들이 제대로 나오면서 조성룡 선생님과 몇 개를 더 준비했어요. 대전 엑스포, 올림픽이죠. 대전 엑스포도 삼우설계와 공모전으로 당선됐는데, 저는 우리나라 엑스포이니 우리 풍경을 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안압지처럼 큰 연못을 재현해서 한국 정원을 넣겠다 했죠.
올림픽 때는 올림픽선수촌과 기자촌에 우규승 선생이 당선됐잖아요? 당연히 나를 파트너로 택하셨는데, 그때 아파트는 상여 나가는 게 문제였어요. 세상 참 많이 변했죠. 지금이야 장례식장이 따로 다 있으니 문제없지만, 그때는 문상 오면 아파트 주차장에 텐트 치고 밤새 사람들이 술 마시고 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아파트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당 개념이 들어가야 한다 싶었어요. 그래서 올림픽선수촌에는 빈 공간을, 아시아선수촌에는 앞에 전면부를 넓게 만들었어요. 아이들도 놀이터를 따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광장이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경조사가 있으면 거기서 행사하면 되고요. 그래서 넓혔죠. 당시로는 새로운 개념을 넣은 거예요.
조성룡 선생과는 아시아공원을 비롯해 일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고, 올림픽선수촌에서는 우승규 선생님과 죽이 잘 맞아 사다리꼴 마당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연석을 많이 쓰라고 압력을 넣고, 나는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야단법석했죠. 그런데 내가 졌어요. 기자촌에만 조금 쓰고 선수촌에는 못 들어오게 했어요. 어쨌든 건축가의 콘셉트를 지키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아파트 조경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이후에도 관 중심의 중요한 일들이 들어왔어요. 1993년부터 대전 엑스포를 하고, 1998, 99년부터 2002년 월드컵 준비를 했어요. 쉴새 없이 했죠.
예술의 전당에도 참여하셨는데, 그때는 언제였나요?
전두환 씨가 대통령 되고 난 다음이에요. 그때 이북의 유명한 공연을 해야 하니 지하철이 들어올 수 있는 지하실을 만들고 위에 포장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두환 당시 대통령 본인이 준공 테이프를 끊어야 하니 다음 해 2월까지 끝내야 하는 거예요. 한겨울에도 조경 공사를 해야 해서 텐트 치고 벌벌 떨면서 했죠. 탱크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하라고 하니까.
설계는 김석철 선생이 했는데, 그분은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설득력이 좋았어요. 그 일이 성사되는 데까지 문화공보부 장관이 세 번은 바뀌었을 것에요. 그들 생각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마지막 장관이 ‘죽어도 한국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라고 해서, 김석철 선생이 버티다 버티다 지금의 ‘갓’ 형태가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국립국악원과 예술의전당 사이에 장터를 하나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장터를 어떻게 만들겠어요. 할 수 없이 전국을 다니며 장터의 구조를 파악했어요. 그래서 여긴 사물놀이나 문화 바자 간단하게 하고 쉼터 정도로 한다고 하자. 성균관대 교수가 열심히 디자인을 도와주어서 예술의 전당도 무사히 마쳤죠. 장관, 자문교수, 심의위원이 매번 바뀌어 안도 매번 바뀌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했어요.
게다가 그때 공공미술품에 대한 중요성이 알려지고 논의가 많아서 건축물 미술 작품을 많이 만들던 때였어요. 소위 환경 조각을 넣어야 하는데, 회의가 끝이 안 나는 거예요. 한 대학교수는 다른 대학 출신 조각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죠. 도저히 끝이 안 나길래 내가 폭포를 제안해서 공공미술품 없이 진행됐어요. 고생 많이 했어요.
그 와중에 예술의전당이 길가에 있다 보니 소음이 관건이었어요. 그래서 녹지를 충분히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겠다고 했어요. 나는 시중과 다른 양식으로 조경을 하다 보니 우면산 자락의 연못에서 국악공연도 하고 장터도 열었죠. 국립국악원은 내가 손본 뒤 너무 많이 바꿔버렸어요. 예술의전당도 장사한다고 모조리 바꾸고 개관 전에는 느닷없이 서예관이 용도를 바꿔 들어가고. 말도 말아요.
정말 즉흥적이었네요.
그 당시는 그렇게 일했어요. 그런데 문화공보부 장관이 여러 번 바뀌면서 이상하게 장관마다 나와 코드가 맞았어요. 가장 마지막 장관은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신랑이었어요. 진작 얘기했으면 고생 안 했을 텐데. (웃음)
우리나라 초기 국가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것은, 국가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라 국가 주도인데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시스템도 공존해요. 굉장히 복합적인 상황인 것 같아요.
맞아요. 한 작품이 동시상영관 같았어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