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건축을 신화화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했는데요.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서 더 공감할 수 있으셨을 듯합니다. 유걸 선생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당시 유걸 선생님은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의 설계 감리로 오셨고,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 사무실로 사용하셨어요. 유 선생님의 첫 직원이 제 선배여서 미국에서 오신 분이라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 우리는 도면에 연필심을 갈아서 바탕칠(빽칠)을 하던 때였어요. 콘크리트 단면을 그리면 회색 톤이 필요했는데, 손으로 도면을 그리던 시절이라 도면을 뒤집어 칠했죠. 연필심 가루를 휴지에 털어 마스킹 테이프(Masking Tape)로 감아 그걸로 음영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선배가 사무실에 레트라셋(Letraset)이라는 도구가 있다고 자랑했어요. 레터링(Lettering)도 손으로 쓰지 않고 판막이로 작업한다고요. 또, 미국에서 도트 마스킹 테이프(dot masking tape)를 가져와 도면에 붙여서 작업도 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죠.
신문물이었네요.
삼청동 사무실에서 유걸 선생님을 만났는데, 텍사스 농장주처럼 보였어요(웃음). 저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유걸 선생님과 꽤 오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은 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셔서 좋은 분이라는 인상이 남았어요. 이후 졸업 논문을 쓰던 중, 그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후배가 직원을 뽑는다고 알려줘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인터뷰 후에 함께 일하게 되었죠.
유걸 선생님은 건축도 인상적이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어른이시죠.
정말 신사(Gentleman)셨어요.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시고, 저를 "김정임 씨"라고 불러주셨어요. 사무실에는 직급이 없었고,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평적인 체제로 일했어요. 연차가 많은 분들도 서로 "씨"라고 부르며 일했죠. 사무실에서는 그래픽 스탠다드(graphic standard) 같은 자료를 늘 펴놓고 이야기했어요. 제 눈에도 업그레이드된 사무실 같았어요. 모형을 만들 때는 손잡이(Handrail) 같은 것은 1대 1로 만들게 하셨어요. 그때 보고 배운 덕분인지, 지금도 손으로 1대 1로 그려보거나 만들어보게 하거든요. 그런 문화는 한국 사무실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정말 좋았어요.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서 첫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었나요?
첫 프로젝트는 밀알학교였던 것 같아요. 밀알학교는 1차 납품이 된 상태였는데, 아트리움(atrium)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어요. 아트리움은 평면과 단면 모두 사선형이라 모든 축열의 철골 부재(steel member) 단면 형상이 다 달랐어요. 제가 맡아서 그 부분을 구조 사무실과 의논해서 해결했어요.
밀알학교 아트리움의 경우는 전체 유리로 된 밝고 개방된 공간인데요. 이종건 교수님은 비판적인 비평을 하기도 하셨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굉장히 과감한 공간이었어요. 실무를 담당하실 때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아트리움(Atrium) 공간의 경우 큰 공간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어요. 처음 그 공간을 봤을 때, 특수학교라는 특성을 살려서 주된 이동 동선을 램프(Ramp)로 처리한 것이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당시에는 실제 구현된 대형 아트리움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고 형태적으로 적절한 사선을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공간에 사선을 하나 놓는 순간, 거기서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한다고요. 그러니까 직교 좌표 체계에 이질적인 것 - 사선이나 곡선이 투입됐을 때, 거기서부터 어떤 생각이나 스토리가 풀려간다는 말이었어요. 지금도 맞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공간을 설계할 때 안무가처럼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저도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인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설계할 때는 공간보다 시간적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계절이나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그림자 길이 등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애월 펼쳐진 집'을 설계할 때도,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쉬러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어요. 어떤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총합이 건물이 되는 거죠. 공간에 대한 상상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유걸 선생님이 만들어내는 사선의 움직임에 대해 영향을 받으셨지만, 실제로 독립해서 만드신 건축물은 정갈한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요. 유걸 선생님의 영향과 자신의 관심사가 어떻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좋아하는 공간은 보이드(Void; 빈 공간)와 같은 입체적인 공간이에요. 크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이렇게도 갈 수 있고 저렇게도 갈 수 있는 동선과 시선이 교차하는 공간에 있을 때 살짝 흥분도 되고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작은 공간을 설계할 때도 정해진 동선을 만드는 것을 피하는 편이에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죠. 공간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자유롭게 내 의지로 선택해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또 선생님이 설계하신 공간은 빛으로 충만한 공간인데, 저는 어둑한 공간도 좋아해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내가 있는 곳이 어둑한데 밖이 밝은 공간감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림자에 관심이 많죠.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건물의 입면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든지,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면서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절을 좋아해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예요. 태양 고도가 옆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길어지는데, 여름의 햇빛 그림자는 진하지만 가을이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빛깔이 옅어져요. 그런 그림자와 빛의 변화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좋아해요.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죠.
선생님은 명료하고 가감 없이 표현하시는데, 저는 명료함에 매력을 느끼지만, 성격은 애매모호한 편이에요. 모든 것이 명료하고 확실한 것보다는 불확실성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설계를 하면서 마감(Deadline)이 있고 그에 맞춰 프로세스(Process)를 진행하려면 어느 시점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사실 불명료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직원들과 의사소통을 많이 해요. 저도 계속 변화하는 존재이고 생각도 변화하기 때문에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하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시도해 보는 것이 회사(서로 아키텍츠)와 저의 방식이에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유걸 선생님 사무실을 잠깐 닫으신 시기가 있었어요.
1997년에 사무실에 일이 거의 없어 닫아야겠다고 하셨어요. 미안하다고 하셨죠. 서혜림 선생님이 연락해 주셔서 1997년 9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일했어요. 그러다 신혼 때 잠깐 쉬고 있는데, 유걸 선생님이 미국에서 전화하셨어요.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Millennium Community Center)라는 일산의 큰 교회 프로젝트가 있다고요. 선생님이 서울에 직접 나올 수 없으니, 스케치를 팩스(Fax)로 보내주면 제가 CAD로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교회와 협의했어요. 그렇게 권문성 교수님 사무실에 책상을 하나 얻어 시작한 게 1999년 아이아크(IARC)의 전신이었죠.
아이아크에서 일하며 유걸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실무를 하다 보면 유걸 선생님이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흡수하게 되잖아요. 생각해 보면 그때는 오히려 독립해서 일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어요. 실장으로 일하다 아이아크에서 처음 파트너 제안을 받았을 때도 '해보지, 뭐. 나한테 그런 역량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품고 시작했어요. 박인수 소장님이 처음에 대표가 되셨고, 다음에 제가 파트너가 되었고 하태석 씨가 와서 새 파트너가 되었죠.
어느 날 젊은 의뢰인이 협의하고 갔는데, 전화로 회의 때 말하지 못한 불만을 얘기했어요. 유걸 선생님께 전달했더니 웃으시면서 앞으로 김정임 씨가 그분을 만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의뢰인을 따로 만나고 독립적으로 일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카이스트 프로젝트도 어느 날 선생님이 제안한 방향과 제가 다르게 얘기했는데, 선생님이 혼자 알아서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죠.
자신의 건축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 같네요.
배제대학교에 건물을 지을 때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는데, 선생님이 교회를 맡고 제가 유아교육센터(하워드 관)를 기획 설계해서 공모전에 당선되었어요. 그 두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건축은 선생님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땅의 형상도 달랐지만, 선생님의 교회는 정문에서 들어가면 경사진 언덕의 중심에 자리했어요. 교회의 용적(Volume)이 작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캠퍼스 안에서 중심 시설로 커 보이게 하려는 전략을 취하셨어요.
유아교육센터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물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들어가고 위에는 유아교육학과 강의실이 있었어요. 대지는 테니스장에 있던 곳이었는데, 서향이고 뒤에 작은 야산이 있었어요. 그래서 캠퍼스 안에서 뒷산의 실루엣이 가려지지 않도록, 건물을 납작 엎드린 형태로 설계했는데, 선생님과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또 다른 계기는 유엔 빌리지에 빌라(Villa)를 짓는 프로젝트였어요. 선생님은 오브제 같은 건물을 설계했어요. 빌라 시장은 선분양이 잘 안 되는데 개발사에서 선분양을 시도했다가 잘 안되어서 그 땅을 잘 아는 아이아크에 다시 설계를 의뢰했어요. 다만 유걸 선생님이 설계하지 않는 조건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대단하신 분이죠. 본인이 하시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유 선생님은 저에게 설계를 맡기셨어요. 쿨하게 설계 두 번 하고 설계비 두 번 받으니 좋다 하셨죠.
라테라스 한남(La Terrasse Hannam)인가요?
맞아요. 저는 그때 오브제로서의 건축이 아닌 땅과 하나로 어우러진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의사결정자인 부회장님이 여성이라 저에게 힘이 많이 실렸던 것 같아요. 임원들이나 현장 소장이 저를 꼭 회의에 오라고 했어요. 제가 있으면 대화가 잘 풀렸거든요. 여성 의뢰인이 많아져야 여성 건축가가 더 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성 의뢰인과 일을 많이 해봤는데, 확실히 대화가 달라요.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요?
기본적으로 쓰는 용어가 다른 것 같아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대화해도 서로 잘 알아듣고, 그 흐름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대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남성 의뢰인과 대화할 때는 프레젠테이션 구성을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정리해요. 반면, 여성 의뢰인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섞어가며 대화해요. 회의가 길어질 수 있지만 분위기가 좋고 잘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아크 사무실의 파트너 시스템은 당시 한국에서는 드문 사례였어요. 개별 건축가의 크레딧을 표기하고 기회를 준다는 게 인상적이었죠. 파트너 체제는 어떠셨나요?
당시에는 그런 예가 별로 없었죠. 다른 건축가분들도 그런 시스템 만들고 싶어서 물어오신 적도 있어요. 선생님은 권위적이지 않고 열린 분위기를 만들어주셨어요. 비판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털어버릴 수 있었죠. 파트너 시스템은 돈과 크레딧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재정은 한 주머니로 관리하고, 수주 시 인센티브(Incentive)를 주는 방식이었어요.
크레딧은 명확하게 하셨죠. 대형 사무실에서 본인이 디자인하지 않은 프로젝트인데도 대표이사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비판하셨어요. 건축가는 자신의 설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시스템이라고 하셨죠.
선생님은 항상 아이아크(IARC)라는 이름보다 ’유걸‘ 또는 ’김정임‘이라는 건축가의 이름이 가장 전면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매우 앞선 생각이라고 느꼈어요. 칭찬이든 비판이든 개인이 직접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건축가로서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나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나요?
어떤 점에서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어요. 지금도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려면 의뢰인을 직접 만나게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의뢰인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할만하다 싶은 사람에게 맡기죠. 그래서 김인철 소장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1~2년 차 직원이었던 저에게 의뢰인을 직접 만나게 하셨다는 것이요.
그리고 저 나름대로 파트너에 대한 경쟁심도 있고 더 좋은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운영되면 건강한 시스템이 되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파트너 시스템은 경영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아이아크에서 처음 크레딧을 달았던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배재대 유아교육센터인 하워드 관을 먼저하고 서울스퀘어를 하게 됐어요.
서울스퀘어는 지명공모전에 참여했는데, 정림건축과 컨소시엄으로 참여했어요. 제가 디자인 총괄이었고 선생님은 그 일에 완전히 빠지셨어요. 그때 제가 서른여섯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해요. 겁도 없이 해보겠다고 했어요. 다행히 정림 건축에서 실무적으로 든든하게 받쳐 주셔서 디자인 총괄을 하면서 인허가도 같이 뛰어다녔어요.
소장님에게 서울스퀘어는 상징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해요. 보통 젊은 건축가들은 작은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규모를 키워가는 방식으로 성장하잖아요. 그런데 소장님은 서울스퀘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금융사나 시행사처럼 거대 자본의 의뢰인을 상대로 하는 프로젝트라서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차이를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공공의 일이냐 민간의 일이냐는 분류는 있지만, 프로젝트 규모로 일을 나누는 생각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큰 것도 할 수 있고 작은 것도 할 수 있죠. 사실 뭘 몰라서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 의뢰인도 개인이나 학교 관계자, 장로님을 만나는 정도였어요.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해본 것도 유아교육센터가 처음이었고요.
서울스퀘어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이후, 일주일에 두 번씩 프레젠테이션했어요. 스케줄이 정말 빠듯했어요. 9월에 당선되었고, 그다음 해 3월부터 착공을 시작해야 했어요. 규모가 큰 프로젝트인데 그 안에 인허가까지 모두 받아야 했죠.
그런데 대수선 인허가가 틀어졌어요. 3월에 착공을 시작했는데, 계획이 바뀌면서 4월 25일에 발주처가 대회의실에서 대수선 포기 선언을 했어요. 대수선은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수선으로 전환한 거죠. 수선 범위 안에서는 미관지구라서 외관도 바꾸면 안 되고, 슬라브(Slab)를 뚫는 것도 안 되고, 마감재만 바꾸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구조 보강과 내진 설계를 하고, 기계 설비 등을 모두 바꾸어서 프라임 빌딩(Prime Building)을 목표로 했던 계획을 A급 임대 빌딩으로 전환하면서 프로젝트를 다시 설정했어요.
그때 너무 속상했어요. 아이아크가 이름을 걸고 하는데,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인테리어 콘셉트(Concept)와 전체 방향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자청했어요. 의뢰인들에게 "일단 수선 설계는 진행하고,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시면 프라임 빌딩의 이미지를 만들어갈 방법을 연구해 프레젠테이션하겠습니다."라고 했죠. 의뢰인들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어요.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허락받은 날이 6월 13일이었어요.
그때는 구체적인 디자인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건축법상 인허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접근할지를 설명했어요. 원래는 서울스퀘어 앞 대지 경계선까지 약 1.2m 정도의 폭이 남는데, 거기에 이중 표피(Double Skin)를 만드는 계획이었어요. 그 안에 블라인드(Blind)를 사선으로 설치하여 픽셀(Pixel)처럼 표현하는 거죠. '서울 캔버스(Canvas)'라는 개념으로 설계 공모할 때부터 있었어요. 처음에 1m x 1m x 1m 큐브의 대각선으로 블라인드를 설치해서, 이 블라인드가 펴졌다 접혔다 하면서 빛을 가리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큰 픽셀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 수 있는 개념이었어요. 그걸 실행할 수 없게 되어서, 이를 미디어 아트(Media art)로 전환하고 건물 전체에 아트워크(Artwork)를 적용하기로 했어요.
스위스 취리히의 '카우 컬처(Cow Culture)'라는 페스티벌을 참고했어요. 이 페스티벌은 도시의 활기를 보여주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예요. 반제품 소 조각을 시에서 신청자들에게 나눠주고, 신청자들이 각자 창의적으로 꾸미는 방식이었어요.
이런 사례를 통해 도시 전체에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 아트워크(Artwork)를 활용한 로비 디자인(conceptual lobby design) 3개를 개념적으로 디자인해서 보여줬어요.
결과적으로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날은 잊혀지지 않아요. 6월 13일 해가 질 무렵, 창문을 열고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성취감과 희열은 지금까지도 저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그런 성취감은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일이 아니고서는요. 그날은 정말 저에게 화양연화 같은 날이었어요.
그때쯤 의뢰인들은 저와 함께 서울시장, 부시장, 중구청장을 만나고, 대표님, 이사님, 정림의 실장님과 함께 똘똘 뭉쳐 다녔어요.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쌓였어요.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주처에서 "건축가가 하자는 대로 다 해라"라고 하셨고, 한미글로벌(Hanmi Global)의 CM(Construction Management) 단장님이신 양대룡 단장님은 저에게 "대표님은 디자인만 하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산이 정해져 있었고, 공사비를 내고 견적을 낼 시간도 없었어요. 디자인을 바로바로 해야 했고, 예산과 기간은 CM에서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해주셨어요. 의뢰인이 저에게 거의 모든 전권을 일임해 주셨던 것 같아요. 발주처에서 사람을 쓸 줄 알았던 거죠. 그리고 저는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며 최선을 다해 일을 해냈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 성장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부동산시장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건축적 가치를 이해시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언어로 설득했을지 궁금했어요.
서울스퀘어의 의뢰인은 대학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전공하신 분이었어요. 그분이 오히려 예술적인 것을 요구했어요. 로비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트렌디한(Trendy) 것은 금방 질린다고 하셨죠. 그렇다고 디자인이 너무 고리타분해도 안 된다고 하셨어요. 10년 뒤에도 괜찮은 디자인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해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어요. 로비의 경우 재료를 디테일하게 쓰지는 못했지만, 공간의 구조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의 무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체 사업비가 1조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큰 사업을 진두지휘해서 이끌어가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협의해야 할 주체도 많고요. 그 과정에서 얻으신 것과 겪은 어려움과 같은 경험이 궁금해요.
건축가는 코디네이터(coordinate) 하는 일이 반 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재미를 느낀 게 일산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예요. 6년 차에 PM(Project Manager)을 맡았는데, 그때도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미국에 있는 구조 엔지니어와 구조를 협업했는데, 교포인 고창범 씨였어요. 선생님도 저도 "왜 못하겠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모르면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 복잡한 일을 코디네이트 하는 것이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기저기서 얘기를 듣고 물어보면서 조정하는 과정에서 많이 신이 났어요. 서울스퀘어 프로젝트를 할 때도요. 소방부터 토목까지 다양한 분야의 컨설턴트(Consultant)가 많았는데, 그걸 진두지휘하며 조율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한 선배가 나중에 "너는 대기업에 가서 큰 프로젝트를 하면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대신 큰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는 디자인 완성도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죠.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일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스퀘어가 그렇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의뢰인이 저를 신뢰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의뢰인과 정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미국에서 온 회사라서 전문가를 쓰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아요. 일단 신뢰를 해주고 책임을 확실히 맡기는(assign responsibility) 거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다는 걸 아셨던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밤잠을 못 자면서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참 신기했어요. 그래서 좋은 의뢰인과 일한 경험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두려울 게 없으셨겠네요.
네, 이후 그런 규모의 프로젝트는 없었고 서로아키텍츠를 오픈한 다음 삼성전자 우면 R&D 디자인 센터를 설계할 때도 규모는 컸어요. 우리가 조율한 건 건축이 아니라 인테리어 쪽이긴 했지만, 그때도 협의 주체는 많았죠. 설계사인 삼우(Samoo Architects & Engineers)를 포함해서 삼우 CM(Construction Management), 삼성물산 등 엄청 많은 사람과 조율했어요.
아이아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서울스퀘어 외에 소장님에게 의미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명동 성당 공모전 설계예요. 유걸 선생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다른 의미로,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겠죠. 명동 성당이 높은 곳에 있어서, 선생님이 데크(deck)를 놓는 아이디어를 내셨어요. 그리고 그 레벨에서 데크 위까지 올라가는 방법을 제가 제안했어요. 그런 것들을 서로 토론하면서 어떤 게 좋을지 고민했죠. 약간 선생님과 경쟁하는 느낌으로 늘 일했던 것 같아요.
밀레니움 커뮤니티 센터나 구미동 빌라, 방일하우스라고 불렸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그 프로젝트는 선생님이 큰 방향을 잡아주셨고, 그다음부터는 제가 주도해서 했어요. 그때도 의뢰인을 직접 만났던 기억이 나요. 젊은 개발자(developer)였는데, 여러 오피스 프로젝트의 초석이 그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한번은 의뢰인과 가구를 구매해야 했는데, 의뢰인에게 제안했어요. 제가 가구를 고르면, 그 가구점을 통해 직접 구매하라고 했죠. 저는 시간에 대한 보수만 받겠다고 했어요. 그때 가구를 보러 다니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때 저는 그냥 실장이었는데, 오리지널(Original) 가구를 직접 고르고 사고 싶었거든요. 가구점, 인사동, 남대문시장 등을 다니며 앤틱(antique) 가구 등을 사서 현장에 날랐어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죠. 커튼부터 가구까지 혼자서 다 했어요.
인테리어의 중요한 부분을 경험하신 거네요.
맞아요.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물어물어 패브릭(fabric) 하시는 분을 소개받고 협의하면서 약 1억 정도의 예산으로 꾸몄는데, 해본 적 없는 저에게 맡긴 의뢰인도 재미있고 저도 웃겼죠.
서울스퀘어 프로젝트 이후 제일기획에서 저를 지명해서 로비 디자인(Lobby Design)을 했어요. 처음에는 로비로 시작했는데, 일정상 오피스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이지만 해보겠다고 했어요. 겁도 없이 아이아크에서 하던 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는데, 임원에게 엄청나게 혼났어요. 제일기획에서는 프레젠테이션을 얼마나 잘하겠어요. 2주 줄 테니 다시 해오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 지적받으셨나요?
렌더링(Rendering)도 거칠고 PT의 포맷(Format)도 문제였어요. 제일기획은 그런 프레젠테이션을 하지 않거든요. 제일기획 직원 한 명이 주말에 와서 레이아웃(Layout)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줬어요. 그때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어요.
중요한 경험이네요. 소장님이 하셨던 많은 프로젝트가 기업이나 금융(financing) 분야 의뢰인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경제적 가치가 우선인 의뢰인들에게 건축 언어를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든 부분이잖아요.
맞아요, 상대하는 법을 배웠죠. 제일기획에 계신 분에게서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어요. 테이블(table)은 읽으라고 넣는 게 아니다. 한쪽에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고 테이블의 중요한 점만 요약해서 텍스트로 작성하는 것을 배웠어요.
이후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과 일할 때 그들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분들은 시간이 1분 1초가 아까운 분들이거든요. 프레젠테이션도 굉장히 요약해서 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의사결정 페이지(decision page)를 반드시 넣어서 "우리가 A, B, C, D에 대한 의사결정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에게 배우신 거네요.
삼단 논법(three-step logic) 같은 것, 모든 것은 3, 3, 3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많은 분으로부터 그런 것을 전수받았죠.
저희가 기업과 일할 때 디자인 프로세스 중 하나로 인터뷰를 꼭 해요. 반드시 임원과 1대1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인터뷰 내용은 의뢰한 회사에도 주지 않아요. 자기 회사에 대해 비판 의견도 있어서 절대 비밀로 하죠. 그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회사 운영이나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웠어요.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참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고요.
독립 후 오피스 프로젝트들이 이어졌는데, 물론 건축적인 해결도 필요하지만, 이 오피스 프로그램은 인테리어 기반이잖아요. 앞서 구미동 빌라에서 가구나 패브릭을 다뤄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직접 발로 뛰며 경험한 것들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케일의 변주도 큰데 그걸 어떻게 다루었을지 궁금해요.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아요. 패브릭(fabric)도 만져보고 의자의 역사도 공부하고, 그러다 보니 업계에 계신 분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야에는 여성이 많잖아요. 건축계에는 남자들이 많아서 수다 떨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약간 교집합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쉬운 건 내부 공간이 너무 중요한데, 건축에서는 인테리어를 낮춰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당시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건축가가 해선 안 되는 일 같은 느낌으로요. 그런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너무 중요하고, 또 재미있었어요.
그때는 인테리어를 장식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죠.
그래서 사실 두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인테리어로 시작하는 것이 저에게 불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 사람은 여자니까 인테리어 잘하지"라는 식으로 인식될 수 있어서, 저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아이아크(IAAC)에서 그런 일들을 하면서 이게 나의 강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건축가들이 인테리어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서울스퀘어(Seoul Square) 프로젝트를 할 때 건축 프레젠테이션과 인테리어 프레젠테이션을 하잖아요. 건축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우리는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렇게 하고, 이런 법규나 기술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한다"라고 의사결정자들을 금방 설득하죠. 그런데 인테리어에서는 "이러면 어떨까요? 저러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제안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의사결정자들이 고민하면서 감각과 취향의 문제로 들어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의사결정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들이 인테리어를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제가 원하는 것을 설득하고 나면 나머지 취향의 문제로 들어가도 오히려 상관이 없어요. 그런 경우에는 의뢰인이 좋은 대로 선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건축가들이 하면 마감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간의 구조를 바꾸고,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고, 사용 패턴(Pattern)을 바꾸는 문제로 접근할 수 있어요. 저는 그런 부분에 더 흥미가 있었죠. 그때는 약간 전략적 사고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인테리어'라고 하지 말고 '오피스 플래닝(Office Planning)'이라는 서비스 이름을 짓자고 했어요. 이건 새로운 서비스라서 고객들이 예산을 깎지 않더라고요.
좋은 전략이네요.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의뢰자인데 기업이 오피스에 돈을 투자할 때는 주로 돈을 많이 벌었을 때예요. 그래서 그들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죠. 이 비용은 감가상각(Depreciation)으로 5년 동안 분산된 비용으로 생각하니까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어요.
예를 들어 건축 설계 단가(Design Fee)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하는 건 시장의 단가를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피스 인테리어도 대충 얼마인지 감이 있으니까요. 비교 견적서도 받죠. 그런데 오피스 플래닝의 경우에는 비교 견적서가 없어요. 그래서 괜찮은 사업 모델이라고 판단했어요. 건축가도 이런 일을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제일기획 프로젝트를 할 때부터 갖고 있었죠.
간혹 건축가가 인테리어를 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어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건축을 다룰 때 놓치는 부분도 있거든요. 종종 그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의 몸에 대한 이해가 어렵거나 당장 공간이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소장님의 작업에서는 균형감이 느껴져요. 그런 경험이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성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집안일을 다 하잖아요. 공간을 직접 사용하고 청소를 하니까요. 유지 관리가 잘 되려면 어떤 점을 신경 써야 하는지 알게 돼요. 설계에 100%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기준으로 판단해요. 어떤 경우에는 디자인이 우선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유지 관리가 더 중요해요. 나중에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려면, 디자인이 덜 예쁘더라도 그런 선택을 하죠. 건축을 준공까지 가는 과정에서 판단의 구석구석에 제 생활 감각이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건축가가 생활의 감각이 체화되어 있어야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외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열었을 때 건물이 사랑받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건물 사용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도시적인 측면에서도 말씀을 하신 것 같아서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건물이 사랑받아야 오래 살아남는다고 생각해요. 오래 살아남는 건물은 친환경적 건축이죠. 멋진 건축물이라서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사용하기 좋고 관리가 잘 되는 건물이 오래 살아남는 거예요. 관리가 잘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사랑해야 가능하고, 관리하기 쉽다는 면도 있죠.
사랑받는 건물이란 어떤 건물일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건물을 지었을 때 주변이 더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만 좋은 게 아니라,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멀리서 보는 사람들, 동네 사람들에게도 좋은 건물이 되어야 사랑받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직원들에게도 항상 그걸 잊지 말고, 우리가 어떤 포인트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 생각하자고 이야기해요.
생활에 대한 감각이라는 표현도 너무 좋습니다.
유걸 선생님의 영향이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늘 집의 중심이 부엌이라고 하셨어요. 삼청동 시절에 선생님이 타일 패턴(Tile Pattern)을 디자인하셨던 게 기억나요. 코너에 욕조를 넣고 두 단 정도 올라가게 했는데, 타일이 복잡하게 시공됐어요. 선생님이 그 타일 패턴을 직접 디자인하시고 도면을 그리셨죠. 선생님은 집에서 가장 자랑할 곳이 화장실과 부엌이라고 하셨어요. 가장 비싼 기구가 들어가니까 그 공간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고요.
2012년에 서로아키텍츠를 설립하셨어요. 독립을 결정하게 된 어떤 계기나 동기가 있으셨나요?
유걸 선생님은 저에게 부모님 같은 큰 우산이었어요. 늘 거기에 기대고 뒷배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스스로 '나가서 혼자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라고 자문해 봤어요. 그게 없이도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나갈 때는 '몇 년 해보다가 아니면 말지'라는 심정이었어요.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제게 특별한 배경이나 훌륭한 네트워크가 없었거든요.
아이아크는 좋은 직원들 풀(Pool)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죠. 여기서 파트너로 나이 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독립을 안 해본 걸 후회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지인이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했던 일보다 안 했던 일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한다는 책의 한 구절을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결국 ‘한번 나가서 해보고 아니면 말지 뭐’ 이런 생각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고요. 3개월만 쉬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 쉬는 동안 한 사무실을 보는 순간 여기다 싶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독립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독립하면서 제일기획을 함께 했던 친구가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독립했는데, 5개의 제안서를 작업했어요. 가장 될 것 같던 제안은 안 되고 가장 안 될 것 같던 삼성 프로젝트가 성사되면서 사업이 시작되었어요.
진행 임진영
정리 윤솔희, 송주하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인터뷰 ③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