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제는 <일상의 공간, 위로의 도시>입니다. 집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들, 일하는 사무실이나 학교,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도시 공간을 주목하려 하는데요. 김정임 소장님께서도 사무실, 학교, 사옥 등 프로젝트를 설계해 오시면서 일상의 공간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듯해요.
일상의 건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어요. 이슬아 작가의 『깨끗한 존경』이라는 인터뷰집이에요. CBS 방송국 정혜윤 PD와 인터뷰 후 이슬아 작가가 쓴 글에, 집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저녁 시간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나와요. 저도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돼요.
제가 지금 누리는 것 중에 스스로 한 것이 얼마나 되겠어요. 교육열 높은 부모님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아 잘 성장했고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만나면서 그 덕분에 살아온 거예요. 단지 운이 나빠서 그걸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래서 공공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을 더 확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 건축가도 중요하지만, 의사결정자도 중요해요. 어느 시대든 권력 집단은 늘 있으니까요.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항상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의사결정자에 따라 건축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일상의 건축이라고 할 때, 그 일상은 다수(majority)가 가진 일상이에요. 그걸 모두 똑같이 적용하는 건 불가능해도, 되도록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쪽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일상이라는 말 안에서도 차이가 큰 일상들이죠.
사무실, 학교, 공공시설들과 같은 일상의 건축은 오히려 방치되기 쉽고 기능만 따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소장님이 하셨던 프로젝트를 보면,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 보여요. 일상에서 차별화를 가져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서울스퀘어를 할 때도 그런 부분을 고민해서 ‘말하는 건축’, ‘반응하는 건축’을 생각했어요. 건축이 사람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울스퀘어를 대수선할 때도 기존 대우빌딩이 갖고 있는 일방향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을 바꾸고 싶었어요. 쌍방향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남성적이라면 여성적으로,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로 바꾸고 싶었어요. 건축이 갖고 있는 태도나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사실 건축에는 "너는 여기 들어오지 못한다"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있어요.
삼성전자 프로젝트에서도 보안 시설이었지만 모든 경계가 면이나 선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어요. 입구 게이트(Security Point)가 있을 때 시각적, 청각적, 신체적으로 경계가 입체적으로 겹치면(Overlap)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몸은 여기까지지만 시각적으로 더 멀리 볼 수 있고, 멀리 볼 수 없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시도해 봤어요. 그래서 외부 블라인드 재료인 PVC(Polyvinyl Chloride)를 사용해 갤러리 같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타공이 있는 부드러운 모기장 같은 재질로 소리는 들리게 했어요. 세미나도 할 수 있고, 문을 달아서 태그(Tag)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반투명하게 보이고 소리도 들리게 했어요.
소장님 유년 시절의 환경이 궁금해요. 나고 자란 곳은 서울인가요?
네, 수유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유리 산 밑에 주택 단지를 만들어 중산층이 살게 했어요.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그 동네 출신들을 많이 만났어요. 당시 수유동은 개발된 지역과 미개발 지역이 함께 있었어요. 어렸을 때는 마을 앞 공터에 있는 동그란 콘크리트 흄관에서 놀았죠. 4.19 묘지 입구 같은 곳에서 버찌를 따 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마을에 빨래터도 있었어요. 50년 전이니, 옛날이죠.
기억나는 환경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던 때 잠실 단지가 완공됐고, 수유리에 모여 살다가 강남 개발로 대이동이 있었어요. 베이비붐 세대 끝자락이라 초등학교가 17반이었고, 오전 오후 2부제로 한 반에 70~80명씩 있었어요. 밖에서 진력나게 놀았고, 엄마가 저녁 먹을 때 부르면 집에 들어갔어요.
살던 곳은 일반 주택이었나요?
주택이었고, 전세로 여러 번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국민주택에서도 살았고, 좁은 골목에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에서도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시절에는 노란색 초록색 *포니가 아니라 *브리사 택시 같은 것들이 다녔고, 길에 차도 거의 없었어요. 버스 외에는 1호선 전철만 있었죠.
아버지가 화가셨는데, 마침 벽제 장흥 쪽에 화가들이 예술인 마을을 만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그 근처 땅을 사서 집을 짓기 시작해서 2학년 때 이사 갔어요. 아래층은 살림집, 2층은 아버지 화실이었어요. 그 집에서 1999년에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포니 택시: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포니는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
*브리사 택시: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한 브리사
아버지의 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진으로는 웅장해 보이기도 하고 제법 잘 지은 집처럼 보여요.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셨기 때문에 로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 집을 지었을 때 유럽의 성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그때 주변은 다 논바닥이어서 지금은 걸어가면 꽤 먼 거리였는데도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집이 보였어요. 그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 논밭 사이로 걸어가서 집에 갔어요. 그렇게 집을 지은 후로 그 동네가 조금씩 발전했어요.
소장님에게 그 집이 큰 의미가 있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 땅을 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옆에 500년 된 경기도 지정 보호수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정 보호수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지을 수도 없고, 나중에 팔더라도 가치가 떨어졌을 땅인데, 아버지는 오히려 좋게 보셨어요. 은행나무 주변 몇 미터 내에서는 불이 잘 나지 않고, 좋은 기운이 있다고요. 은행나무로 약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그 집에 살았기 때문에 추억이 유난히 많아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종교나 여러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특히 중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밤이 있어요. 모두가 잠든 시간, 공부를 하다가 밤에 혼자 밖에 나갔을 때 반딧불이 있었고 은하수가 보였고 별이 빛났어요.
마당에 나가서 서 있었는데, 은행나무와 제가 딱 마주하게 되었어요. 마음속이 충만한 느낌이었어요. 그때는 그 느낌을 표현할 단어를 몰랐는데, 우주와 연결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나이에 왜 그런 걸 느꼈을까 싶기도 해요. 그날 밤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불자(Natural Born Buddhist)인 것 같아요. 종교는 없지만, 불교적인 교리가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저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불교를 깊게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해보고 싶어요. 과학 서적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교양서 수준에서 현대 물리학이 불교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걸 느껴요. 우주의 탄생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순환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과학적 지식 없이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나이 때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 시절의 섬세한 감성이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을 것 같아요.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 시절 저희 오빠는 대학교 2학년이었어요. 1982년, 광주 사태 직후였죠. 오빠는 철학책을 많이 읽었고, 저는 어린 마음에 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어요. 그때 오빠가 "정임아, 너 같은 생각을 한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있었어.”라고 했죠. 오빠는 우주의 모든 것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해 줬지만, 그때부터 스피노자가 뇌리에 깊이 남았어요.
그래서 저는 건축이라는 특정 직업을 좋아해서 파고들기보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태어나는지 궁금증을 갖고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요즘은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요. 그래서 건축에도 그런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네덜란드의 합리주의 철학자로, 그의 저서 "윤리학(Ethica)"에서 신과 자연, 인간의 자유와 윤리적 삶에 대한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했습니다.
최근 아버님의 전시를 열기도 하셨는데요. 아버님의 작품 세계와 영향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어느 집이든 가정사가 있겠지만, 저는 참 행운아였어요. 아이들의 교육은 아빠가 얼마나 개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엄마들은 기본적으로 다 열정적이니까요. 운이 좋았던 것은 아버지가 지적 욕구가 엄청나셨고, 90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과 신문에서 본 어려운 외국 이름까지 모두 기억하셨어요. 타고 나신 성향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셔서 집에 계속 계셨고 저희도 그게 나름 불만이었어요. 아버지가 엄격하셔서 모든 것을 예의 바르게 해야 했고 규율이 엄격했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그게 엄청난 것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아침 식사 중에 아버지는 책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처럼 기억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듣기 싫고 빨리 먹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중간에 끊고 나가면 아버지는 버릇없다고 혼을 내셨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들이 무의식중에 저에게 깊이 박혔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이기도 했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쯤 별을 보며 "저 별은 지금 없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저 별은 이미 폭발해서 없어졌을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런 이야기가 세상의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많이 심어주었어요. 얼마 전 제주도에 갔다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멕시코(Mexico) 소설을 읽었어요. *라우라 에스키벨(Laura Esquivel)이 쓴 책인데, 20대에 영화를 먼저 봤어요. 요리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주인공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만든 요리를 먹으면 사람들이 울면서 토하기도 하고, 사랑이 가득 찬 요리를 먹으면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요리를 구성하는 작은 물질들이 만드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맛이라는 게 과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을 거라고요.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가 분자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요. 저는 그런 걸 믿어요.
최근에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생기론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이라는 이론을 만드신 분이에요. 생기론적 유물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거예요. 일본 과학자가 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라는 책도 바이러스가 생명체인지 무생물인지 경계가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저는 이런 물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 건축도 ‘물질의 재배치’라고 생각해요. 지구상의 모든 물질이 계속 돌고 도는 거잖아요. 제인 베넷의 책을 읽고 건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죠.
* 라우라 에스키벨(Laura Esquivel): 멕시코의 유명한 작가. 그녀는 1989년에 출간된 소설 『Como agua para chocolate』 (한국어 제목: 『초콜릿처럼 뜨거운 사랑』)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멕시코 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와 마법적 사실주의가 결합한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물을 오브제(Object)로 보지 않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대상으로 보시는 거군요.
맞아요. 우리는 시각화(Visualize)된 사람들이잖아요. 사실 물리학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으로 그 이론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해요. 최근에 비타민(Vitamin) 광고 중에 사람 모양을 만들어진 빨갛고 노란 입자(Particle)가 걸어 다니는 광고를 봤어요. 저는 그게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아요. 그 입자들 사이에 경계가 있겠나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물을 볼 때 경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디든지 다 통해서 다니는 거죠. 우리가 사람과 손을 잡을 때도 분명히 오가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실제로 초미세먼지가 몸을 침투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 게 재미있어요. 너와 나도 경계가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물질은 조밀했다가 성글었다가 다시 조밀해지는 것일 뿐, 결국 모든 것이 다 통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그런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도 경계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읽었던 과학책 중 하나에 멋진 문구가 있었는데, 결국 제 몸은 원자(Atom)와 분자(Molecule)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이들이 한 번도 이런 모양으로 모여 있었던 적은 없다는 거예요. 죽음은 해체되었다가 다시 누군가에게로 가서 다른 형태로 모이는 것이고, 이 모양으로 모였던 것은 처음이라는 거죠. 모였다가 해체되었다를 반복할 뿐이고요.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작가의 『다정한 서술자』라는 책이 있어요. 그분의 글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몸 중에 인간 세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43%밖에 안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라는 거죠. 나머지는 미생물 같은 것들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몸은 어떻게 보면 공화국 같은 거라고 해요.
그래서 나라는 자아가 단일체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이야기와 만나는 것 같아요. 부처는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싶어요. 근대에서 말하는 자아라는 게 사실은 오해된 개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냥 물질의 조합일 뿐인 것 같아요. 저는 유물론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요즘은 물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정림학생건축상 심사위원을 하면서 지구의 환경이나 친환경에 대해 다루게 되었어요. 건축가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물질의 재배치와 순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는 지구상의 물질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생태적 태도죠. 지구상의 물질 총합을 생각했을 때 총합은 늘 같은 거거든요. 그 안에서 물질이 형상과 성질을 바꾸면서 순환하는 체계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부수고 사용하는 것들도 순환 체계 안에서 파악해야 해요. 친환경 건축의 방향 중에 이런 기본 개념이 많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도 물질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죠. 건축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어렵지만, 건축산업에서도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보여요.
건축에서 건축 폐기물 처리비를 높이면 사람들이 새로 짓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할 거예요. 정치적으로 그런 것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정치와 얽히고설켜 가는 문제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지구에서는 그런 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아요. 그래서 리모델링(Remodeling) 설계가 들어오면 마음이 편해요. 지하를 깊게 파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요.
건축과 분리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물질에 관심을 가지면서 노력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요. 의뢰인이 오면 리모델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제안하고요.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아버님 덕분에 공간지를 많이 접하셨다고 하셨는데, 건축과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건축과는 정보 없이 선택하기 어려운 분야일 텐데 어떠셨나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미술을 시키고 싶어 하셨지만, 제가 흥미가 없었어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이과를 가는 것을 보고 이과를 선택했어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간지를 보면서 건축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기뻐하셔서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어요.
1980년대 교육 환경에서 연세대학교는 공학 분야가 강했는데, 건축과에 들어갔을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토목공학과에는 여자가 없었지만, 건축과에는 94명 중 14명이 여자였어요. 연세대가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였고, 건축과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제가 1학년 때는 1987년이었어요. 수업이 거의 없었고, 민주화 운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학교 안에는 '백골단'이라고 부르는 사복경찰들이 있었고, 연대에서 전대협 모임을 했기 때문에 교문을 막고 학생증 검사를 했어요. '페퍼 포그(Pepper Fog)'나 수류탄도 쏘는 상황이었어요.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을 새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1학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학년 때 수업보다는 민선주 선생님이 오셔서 조형 실기를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나요. 또 당시 아이엠 페이(I.M. Pei) 사무실에 계셨던 선생님이 기억에 남아요. 앞가르마에 단발머리, 흰 블라우스와 검정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으셨는데, 정말 멋있었어요. 거의 우상이었죠.
1학년 겨울방학 때 '형'이라는 서클(Club)에 가입했어요. 조민석, 김광수, 이소진, 조재원, 신혜원 등이 그 서클 출신이에요. 서클은 한 학년에 10명 안팎의 회원이 있었고, 2, 3, 4학년이 함께 활동했어요. 매주 두 번 모여서 과제를 하고, 역사책을 읽고 토론했어요. 서클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당시 교육 환경이 설계 위주의 커리큘럼(Curriculum)을 잘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서클을 통해 더 많이 배우셨을 것 같아요.
그때는 2, 3, 4학년이 제도판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설계를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홍대 앞 차고 같은 곳을 개조해 작업실로 사용했어요. 선배들이 작업실을 물려주고, 후배들이 돕는 시스템이었죠. 강사 선생님들이 거의 없었고, 정 교수님들이 94명을 3개 스튜디오(Studio)로 나누어 가르쳤어요. 수업보다는 작업실에서 선배들과 함께 모형을 만들고 배우는 시간이 많았어요.
당시 어떤 건축의 흐름을 접하고 흡수하셨나요?
그때는 책 아저씨들이 가져오는 해적판 A+U(A+U, Architecture and Urbanism)를 보면서 접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프랭크 게리(Frank Gehry)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저는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A+U의 해적판에서 에로 사리넨에 관한 글을 다 읽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책은 지금도 찾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에로 사리넨의 도시가 나오는 영화 '콜럼버스(Columbus)'도 정말 좋았어요.
* 유명한 핀란드계 미국인 건축가다. 그는 20세기 중반의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유기적이고 조각적인 형태의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뉴욕의 TWA 터미널,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그리고 예일 대학교의 아이스하키 경기장인 인걸스 링크 등이 있다.
에로 사리넨의 어떤 면이 좋으셨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MIT 채플(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Chapel)을 동그랗게 설계한 작품이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다양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매우 시적이었고요. 특히 농기계 회사 프로젝트에서 산화 강판(Corten steel)을 사용하여 녹슨 느낌을 준 입면 디자인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디자인은 농기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건축이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와 연결된 생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또 산화 강판을 사용한 입면 디자인이 현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와 비슷한 개념으로 새롭게 느껴졌어요. 워싱턴에 있는 조각 같은 오브제(Object)도 기억에 남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있어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관련된 기념비도 수직적이지 않고 독창적인 디자인이었어요. 에로 사리넨의 아버지인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도 핀란드에서 이민 온 건축가였는데 대를 이어 다양한 건축 아이디어를 펼쳐 보이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부정과 한발 늦게 한국에 도착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도입되던 시기였어요. 실체를 명확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고 교육 환경도 좋지 않아 정보에 대한 갈증이 컸을 것 같아요.
그 시기는 제가 지적 욕구가 폭발하던 때였어요. 프랭크 게리(Frank Gehry),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드로잉,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구조주의(Structuralism),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책을 읽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도 읽었어요. 선배들도 그런 책을 읽게 했고, 이해하지 못해도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 시기에는 지적 허영이 필요했고,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이 너무 좋았어요.
가장 좋았던 것은 제 주변에 재능 있고 발랄하며 멋진 분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던 것 같아요.
4년을 채우고 바로 졸업하셨나요?
그렇죠, 그때는 군대가 아니면 휴학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대학원을 갔던 것 같아요. 공부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졸업 후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빡빡해서 학창 시절을 더 누리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건축 전문대학원이 없었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은 이론과 논문을 쓰는 곳이었어요. 저는 건축 역사 이론 연구실에서 김성우 교수님의 수요 세미나에 참여했어요. 좋은 건축가나 이론가분들을 모셔서 세미나를 했고, 그때 배형민 교수님을 처음 뵈었어요. 미국에서 막 오셨을 때였고, 저는 팬이 되었죠.
그때 강의를 하셨나요?
처음에는 배형민 교수님이 세미나에 오셔서 강의하셨고, 그 후 한 학기 동안 김성우 교수님과 함께 배형민 교수님, 임석재 교수님이 번갈아 가며 건축 역사를 강의하셨어요. 그때 임석재 교수님은 귀국하신 직후였고, 강의 전에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칠판에 연보를 그리며 판서를 하셨죠. 반면에 배형민 교수님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슬라이드를 보여주시며 야사(野史)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서 매번 배형민 교수님 오시기 전에 음료를 사서 교탁 앞에 놓아두곤 했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선생님, 이거 정임이가 사다 놓은 거예요."라고 말해서 부끄러워하곤 했죠.
이론적으로 갈증을 느끼던 시절에 김성우 교수님과 배형민 교수님, 임석재 교수님의 강연은 정말 강렬한 자극이 되었겠네요.
그때 강의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톰 울프(Tom Wolfe)라는 소설가가 쓴 『프롬 바우하우스 투 아워하우스(From Bauhaus to Our House)』라는 책이에요. 번역서는 『바우하우스에서 현대 건축까지』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은 야사와 뒷이야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그로피우스가 유럽에서 피난 와서 하버드 학장을 할 때 프랭크 게리와 만났던 이야기나, 그로피우스의 별명이 '화이트 프린스'였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에서 '촌 농부' 같은 이미지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 교수님이 케네스 프램튼 책도 읽히셔서 읽었죠. 그때 그 책을 읽지 않았으면 언제 읽었을까 싶어요. 사회에 나와서는 읽을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요.
김인철 소장님의 아르키움에서 첫 실무를 하셨어요. 아르키움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대학교 3학년 때 건축사협회 공모전에서 3등 상을 받았어요. 시상식에 갔는데, 김인철 소장님이 건축상을 받으러 오셨어요. 그때 일본 갤러리 마에서 하는 김인철, 김기석, 조성룡 선생님의 전시 포스터를 봤어요. 한국 건축가가 일본에서 전시하는 게 처음이라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졸업 후에 그분 사무실에 들어가고 싶었죠.
지원해서 들어갔는데, 김인철 소장님이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계획을 맡겨주시고, 경신교회 의뢰인(Client)을 소개해 주셨어요. 신입사원도 계획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선배들이 건축물이 지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음에 소장님 방에 가서 스케치(Sketch)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1~2년 차였는데, 김 소장님이 저에게 큰일을 맡기신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1~2년 차에 직접 설계한다는 게 겁이 나진 않으셨나요?
오히려 요즘 겁이 많아진 것 같아요. 서울스퀘어(Seoul Square)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정말 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를 그렇게 키우셨나 봐요.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일이든 처음 하는 것에 대해 겁이 없었어요. 인테리어를 해본 적이 없어도 '뭐든지 다 처음이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걱정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걸 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도 없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그런 성향이 옛날보다 없어지는 게 아쉬워요.
첫 시작부터 열린 기회를 많이 받으셨네요.
저는 지금까지 함께 일했던 소장님 세 분께 정말 감사해요. 좋은 분들과 일할 수 있었고, 저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던 분들과 함께해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김인철 소장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신다는 거예요. 용답동 사무실에서 선생님 방에 올라갔더니 컴퓨터를 켜놓고 뭔가를 하고 계셨어요. "뭘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3D를 배우고 계신 거예요. 배우려 해보는데 재밌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3D 맥스(3D Max) 같은 거였을 거예요. 계속 새로운 걸 습득하고 본인이 직접 하시려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1989년 해외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봇물 터지듯 유학을 가던 시기였어요. 유학을 선택하지 않고 실무를 선택했을 때, 아쉬움이나 혹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당연히 갈증이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생활비와 학비를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생각은 약간 콤플렉스(Complex)가 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하지만, 주변에 저만 빼고 모두 유학을 다녀온 것 같아요.
건축 교육이 예전보다 좋아졌고, 요즘 젊은 건축가 중에는 유학을 가지 않은 분들도 많아요. 한국의 교육 수준이 그만큼 향상되었기 때문이에요. 외국 생활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멀리 떨어져서 우리나라를 보면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얼마 전 나은중 소장님이 준 책을 보다가, 용어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는 수업 이야기를 보고 부러웠어요.
교육적으로 외국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Liberal) 부분이 있고,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런 교육을 받았다면 사고가 더 유연했을 것 같아요.
반대로 현장에서 실무로 체득한 경험이 김정임 소장님의 강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르키움에서 2년 정도 일하신 건가요?
1년 반 동안 아르키움에 있다가 6개월 대학원 준비를 했고,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 바로 유걸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어요. 아르키움에 있었던 시기는 4.3 그룹의 태동기였어요. 그래서 2층 소장님 방 앞 긴 테이블에 늘 4.3 그룹 모임이 열렸어요. 저는 그런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장님이 허락해 주셔서 4.3 그룹 모임이 있을 때 맨 뒤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계속 듣곤 했어요. 그때부터 승효상 소장님 같은 분들이 저를 얼굴로는 알고 계셨던 거죠.
한번은 조성룡 소장님 사무실 오프닝에서 김영섭 소장님이 조언해 주셨는데, 40대가 될 때까지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40대가 되면 희소가치가 있어서 잘 풀린다고요. 그 이야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지금도 젊은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줘요. 40대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4.3그룹 소장님들과 접점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스스로 갈증을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4.3그룹 세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에게 건축은 신앙에 가까웠지만, 소장님은 건축을 신화로 바라보지 않는데 어떠셨나요?
맞아요. 건축은 절대 목적물이 아니고, 수단일 뿐이에요. 직업에서 얻는 어려움과 멋짐은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어서 그 어려움과 멋짐을 알고 있는 것뿐이지, 다른 직업도 똑같은 어려움과 멋짐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가들이 유달리 직업적 자부심이 강한 것에는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계 안에 갇혀서 생각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불리한 점도 있어요. 저는 한 번도 '덕질(Fandom)‘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건축이 유일한 덕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 깊게 빠져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 성향이니까 받아들이지만, 때로는 아쉬울 때도 있어요.
반대로 얘기하면, 자기 세계에 대한 객관화가 잘 된다는 의미 같아요.
그렇죠. 저에 대한 객관화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에요. 기본적으로 주변과 반대 입장을 생각해 보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건축에 대해 유난 떠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아요.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게 스스로 신기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태도가 오히려 지속할 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 것 같아요. 일을 하면서 상처도 덜 받았던 것 같아요. 상처받는 일이 있었을 때도 털고 계속할 수 있었고 자기 회복력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보통 학창 시절에 건축이 전부인 것처럼 배우다가 현실에 절망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건축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진지하면 현실을 이겨내기 힘들어져요.
저는 절망을 덜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깊이 파고들고 스타성 있는 것도 필요하고, 건축의 가치를 말씀해 주시는 것도 필요해요. 건축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든 일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저 같은 건축가도 있다고 생각해요.
진행 임진영
정리 윤솔희, 송주하
사진 텍스처온텍스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