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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원아키텍츠 스튜디오

최욱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세계관의 접점에서 ‘그라운드스케이프’라는 주제를 풀어내고 있는 건축가 최욱의 사무실은 절제와 명상의 공간을 담고 있다. 서울 대신동에 자리한 건물의 3-5층을 리노베이션한 사무실은 전면에는 이화여대 캠퍼스의 풍경이, 후면에는 연세대 동문 쪽 산이 펼쳐져있다. 이 풍경을 고스란히 끌어들이기 위해 커다란 통창을 설치했으며, 내부에는 유리, 철, 콘크리트 같은 최소한의 재료로 절제된 공간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건축에서 지속적으로 장소성을 만드는 저층부에 주목해 발전해온 건축가 최욱의 바닥에 대한 관심은 곧 내외부 공간을 어떻게 잇는가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외부의 풍경을 껴안기 위해 바닥을 연장하고 정교하게 빛을 다루는 그의 건축 이야기를 원오원 아키텍스의 공간에서 들어본다. 

Map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559 원오원아키텍스
건축가최욱
위치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559 원오원아키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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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 건축가 최욱 ③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한걸음 만이라도 앞으로 나가자라는 표현을 인용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한걸음씩 20년 동안 내실에 충실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태도의 문제일 텐데, 제가 처음부터 그런 태도를 갖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릴 때는 마음이 급하고 자기가 잘난 줄 알잖아요. 선언적인 뭔가를 통해서 이뤄내고 싶어 하죠. 그런데 건축도 나라와 시대마다 정의가 달라지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건축이 스위스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을 리 없잖아요. 한국의 상황을 보면 선언적으로 해서 될 나라가 아닐 것 같아요. 혹은 사회 계층상 그게 불리해요. 정치가들이 선언해서 나아가는 것과 달리, 건축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사회가 잘 용인해주지 않아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편하기도 하고 불균형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순진하게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서 될 사회가 아니더라고. 만프레도 타푸리 수업의 청강생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너희들은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할거래. 그래서 건축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할거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거래요. 그런데 절대 안된대요. 이제 자본주의가 진행되면 건축으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대. 자본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은 혁명이 부재하는 사회고, 건축가들은 영원히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구요. 다만, 우리 지식인의 역할은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훌륭한 질문을 통해서 사회에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어요. 해석할 머리는 부족해도, 그 말은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진행이 되면 프로파간다를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어요. 내가 본 한국적 상황과 내 자신의 능력, 잘 안 되는데 이 상황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합쳐져서 그냥 한 발자국씩 사무실 사람들이랑 술마시면서 재미있게, 즐겁게 나가자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한걸음은 철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정도의 것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쌓여온 모습이 한국 사회 안에서 건축가가 추구할 수 있는 롤 모델처럼 된 것 같아요. 건축물은 하나씩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건축가의 작업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 좋은 훈련이더라고요. 이번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서 소장님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봐주시면 내가 시간 낭비를 안 한 거니까 다행이죠.   지금까지 외부 인터뷰를 거의 안 하셨잖아요. 말이 앞서는 게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축적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건가요.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고민했던 건 있었어요. 건축이라는 게 시대의 생각과 사회를 반영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내가 볼 때 1990년대 상황은 형태를 만드는 걸로 보였어요. 소위 말해 디자인 스쿨이죠. 학생들이 ‘엘크로키’를 보고 있더라구. 어떻게 보면 위험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사회가 쓰레기통이나 오합지졸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생각을 가르치지 않고 눈으로 본 것으로 손재주를 가르치는 것, 대부분의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교육을 받고 왔을 거구요. 그래서 나중에 내 작업이 쌓이면 담론이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정도가 되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일 거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건 작업이 쌓여야 가능하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는 소장님이 한국에 막 돌아와서 서울건축학교에 참여했을 때의 시기를 다루고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분들은 나름의 한계와 책임, 무게를 가지고 살아오신 거잖아요. 선언하고 화두를 던지며 인문학적 어휘는 난무하는데 그것이 건축적인 형식으로 연결되지 못한 한계가 있던 시기이구요. 소장님이 목격한 한국 현실에 대해 말을 아끼신 걸까요? 그분들은 선비였기 때문에 선언적으로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는 그분들을 선비로 안 봐주고 격하시켜서 봤을 거예요. 그에 대한 간극이 있었을 것 같아요. 우선 저는 건축지에 프로젝트를 많이 소개하지 않았잖아요. 우리 사무실 작업이 그 당시 분위기에서 보면 포토제닉하지가 않아요. 포토제닉하다는 것은 시각적인 정보만 원하는 거예요. 사진은 눈과 거의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건축은 귀를 막고 냄새를 막고 시각으로 보면 안 읽혀요. 특히 한국건축 공간은 제가 보기에 시각적인 체계의 건축이 아니예요. 느낌을 감지하는 것이 건축이죠. 눈으로 본다는 건 건축에서 소실점이 하나인 투시도 관점에서야 제대로 나오는데, 소점이 다양해지면 잘 안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건축 잡지라는 게 한국건축을 못 읽게끔 되어 있어요. 소실점이 하나인 투시도를 원하는 거예요. 잡지가 시각적인 정보를 원할 때 그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잡지가 비평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읽지도 보지도 못하는데, 껍데기만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20년 정도 매체, 전문지에 거의 작업을 소개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기록용으로 직접 책을 만들어 내고, 발언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전에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건축지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죠. 그 말은 오히려 한 사회의 저널의 수준은 건축가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편견일 수 있어요. 그래도 그 말의 배경과 의도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탈리아 잡지 중에 카사벨라, 도무스가 있잖아요. 둘 다 역사가 있고 훌륭한 잡지이기도 하지만, 똑같은 작품을 카사벨라에 낼 때와 도무스에 낼 때와 달라요. 드로잉도 달라. 혹은 편집한 사람들이 다시 그릴 지언정. 도면은 단순히 악보인데, 그 악보가 매체를 탈 때에는 작품이 된다고. 매체가 그것을 선별할 수 있는 눈이 없으면 그 매체는 번역기, 복사기 밖에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배운 많은 선생님들이 카사벨라같은 저널을 담당했기 때문에, 저널리즘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라는 그분들의 노력을 봤죠. 한국에서는 복사기로 잡지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지.   사무실을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원칙과 태도가 보여요. 사무실 환경도 계속 좋아지고 있구요. 사무실 환경을 좋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직원들이 즐거워야겠다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그 다음으로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에서는 건축가에 대한 상(figure)이 없다는 것. 유럽사회에서는 건축가가 사회적인 오피니언 리더잖아요. 사회적 리더인 힘있는 정치가들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고, 한 국가의 경제력을 좌지우지해요. 한국에서는 그런 조건이 안 되죠. 건축가에 대한 상이 없기 때문에, 건축주들이 갑을 관계로 대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상황이 정말 싫어요. 직원들이 이 장소에서 잘 대접을 받는 걸 내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건축주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 이유가 가장 큰 거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건축가의 상을 잘 만들어야 되고, 그걸 강요하거나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결국 건축을 하듯이 건축가의 상도 만들어내려는 거죠.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기존 건축가의 상이 고착화되어 있던 걸 흐트러뜨릴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역할에 원오원도 일조를 해야죠. 내가 인터뷰하는 목적은 직원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서예요.     결국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이신건가요? 그렇죠. 결과적으로는 체계화해야 하는 거구요. 제 경우 스스로 경도된 이론도 없고 스타일도 없어요. 다 버렸고 해체했거든. 논리적인 판단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였죠. 내가 이론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것을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앞서 말했듯이 언어에 대한 생각 때문이에요. 우리 피 속에는 상형문자가 들어가 있는데, 알파벳 문자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다고 생각해서 말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몇 개의 작업을 만들면서 서서히 대충의 느낌을 가진 작업은 만들어졌어요. 그걸 직원들한테 ‘해봐’라고 커뮤니케이션할 수는 없잖아요.     내부에서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축가의 생각을 발언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유럽건축가들은 이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실천이 따라가는 게 자연스러워요. 이론이 더 중요하거든.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동양은 좀 달라요. 실현된 것 속에 사고가 있어요. 그 사고는 성숙된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거지. 사고가 앞서면 동양에서는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동양의 철학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서양과 다르죠. 피터 줌터와 같은 경우, 알파벳 문자로 동양 글쓰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만약 발언한다면) 좀 더 작업을 진행시킨 다음에 작업이 이미지가 되어서 따라가는 글이 되어야겠죠. 이거 하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지가 있고 그걸 해석하는 글을 같이 보면서 이래서 이렇구나하는. 좀 더 상호작용이 되면 우리의 건축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이야기하면 좋을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건축가의 상은 아직 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10년 전보다는 건축에 대한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사회에서 건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늘어났지만 여전히 건축을 미술품처럼 대하는 분위기는 아쉬워요. 그 이상으로 사회에 개입하고 전하는 메시지도 있을텐데요. 매체를 탄다는 것은 대중의 속성을 충족시켜줄 단계도 필요하잖아요.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더 진정한 것을 발견하는 길을 터주고, 대중들과 친숙해질 과정이 필요하죠. 건축을 작품을 보는 시각으로 대중매체에 소개되는 것은 중간 과정인거 같아요.   건축가의 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의 사회적 역할도 생각하신 바가 있나요? 내가 사회적인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가파도 프로젝트나 시장 공관 리노베이션이나, 백남준 기념관 등이 다 관 프로젝트거든요. 한국에서는 그 정도 조건에서 좋은 공간이 나오기 힘들잖아요. 이런 공공프로젝트를 통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공공에 최대한 좋은 공간을 돌려주는 것, 그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파도 프로젝트는 건물 하나 짓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기획 프로젝트죠? 가파도의 경우는 약간 건축가로서의 의무감이 있어요. 건축가들이 집짓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일들을 조금씩 하고 있거든. 건축가로서 공공에 기여하는 것은 도의적인 거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단체에 가입해서 사회적인 공헌을 하고. 나는 그런 걸 못하고 싫어하니까,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경우 우리의 헌신이 많이 필요하죠. 또 하나는 제도적으로 좋은 퀼리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요. 정부 입찰이라는 게 도면의 내용이 아니라 도면의 두께만 보고 입찰하니 시스템 자체가 근본적으로 좋은 작업이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이에요. 그 시스템에서 좋은 작업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개인적인 노력, 봉사 혹은 경제적인 희생까지 감수해야 되는 거거든요. 버틸 수 있는 정도에서는 감수하는 게 우리 역할이다 싶어요. 그렇게 한번 기준이 생기면 누군가 따라하겠죠. 한 번 실현된 현상이 있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절차에 대한 문제도 살펴볼테고 제도가 바뀌겠죠. 가파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예요. 불가능한 프로젝트인데 셋업이 되면, 앞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어요. 좋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법을 바꿔 볼까하며 움직이게 되겠죠. 그런 기대치에 대한 소망이 있죠.   공공프로젝트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했나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힘들었죠. 그런데 우리만 고생한 것은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또 예를 들어 골대 안에 공을 99개 정도는 넣을 수 있어야 눈감고 60개 정도 넣을 거 아니에요. 70개도 못넣는 사람이 눈감으면 반도 못 넣는 거죠. 우리가 공공을 통해 보여준 게 80점이라고 치면, 평상시에는 그 뒤에는 99개를 넣고 있다는 거죠.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드리자면 소장님의 프로젝트는 하이 퀼리티 작업이 많은데 평당 단가나 예산 규모에서 크게 차이가 나잖아요. 그 차이나는 예산의 간극을 공공건축물에서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해요. 결국 관에서 나온 돈이기 때문에 피나는 노력으로 때우는 거죠. 헌신이죠.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조건이나 상황에서 일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인내, 노력, 헌신이 없으면 이뤄지지 않아죠. 주어진 돈은 똑같고 나머지는 다 땀일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비싼 건축, 많은 돈을 들여야 좋은 퀼리티가 나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맞죠. 좀 다른 이야기인데, 시대적으로 보면 철을 다루는 분들은 손으로 만들어내잖아요. 이런 건축은 앞으로 못하게 되어 있어요. 북유럽 건축이 점점 공업생산품, 규격품이 되잖아요. 분쟁을 피하고 산업 경쟁에 맞춰야하고 감리 문제와 같은 이유와 관련이 있거든. 우리는 한국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데, 우리 입장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예요. 우리가 하는 건축이 비싸게 보일 지라도, 서양같으면 10배의 돈을 들여도 못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싼 가격에 좋은 퀼리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설계비도 많이 안 받거든. 표준으로 받는다구요. 외국 건축가들은 천문학적인 설계비를 요구할 거라고. 우리 건축주들에겐 행운인거죠. 그런데 한국도 얼마 안 남았어요. 이 사회가 더 산업화되면 이것도 못해낼  거예요. 그래서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거죠, 약간 더 노력한다면 한국에서도 공공에서 좋은 퀼리티의 작업을 볼 수 있어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지 보고 경험해봤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안 나와도 낭비 안하고 80% 까지는 끌고 갈 수 있는 거지.   프로패셔널로서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만족시키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건축가로서 한국의 건축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가장 고민스러워요. 나라마다 건축가의 개념이 다 달라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한국에서 건축을 잘 못 하잖아요. 대화방식이 틀린 거죠. 한국의 건축주들은 건축가라는 사람을 문화적으로 대해 본적이 없어요.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건축가가 어떤 영역인지 잘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새로운 직종이에요. 그럼에도 또 지역 색이 다 있어요. 새로운 건축가의 탄생을 한국에서 인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건축가가 되어야 커뮤니케이션이 빠를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잘 해석해서 결과를 만들어내죠. 대신 고통을 받는 대리모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분들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집장수들은 당신들의 생각을 잘 이해 못해요. 자기 멋대로 짓는 거지. 유럽 건축가나 그곳에서 배운 건축가들은 자기 건축을 하는 거고. 유럽에서는 그게 통하거든.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 그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택한 방법은 내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생각을 잘 받아들인다, 그게 우선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회에 누가 안 되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건축적으로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 숙제로 남는 거죠. 그 입장을 양보하면 프로페셔널이 아닌 거고, 다만 나름대로 해석한 건축적 과제, 도시 문제, 역사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만나게 하는 거죠. 그것을 건축주에게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요. 내 숙제지.   한국 사회는 건축가라는 역할과 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과정조차 없었으니까요. 내 보스는 김병현 선생님이었는데, 한국에 와보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발전을 했대요. 그런데 “사람들의 문화적인 인식은 떠날 때와 진배없소” 그러더라고. “사람들이 선생님하면서 스케치 하나 주고 가래요. 근데 건축이 그렇게 만들어 지는게 아니지 않소”라고 하면서 너무 낙담하시는 거야. 사람들은 김병현 선생님이 기분이 나면 그냥 슥 그려서 건축이 나오는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고통에서 나오는 거거든. 대리모 이야기도 김병현 선생님이 하신 거예요.   서울건축학교에서 소장님의 젊은 시기를 함께 하셨는데, 앞서 말했던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를 보시고 개인적인 감회는 어떤가요? 저는 좋았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말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않는다’. ‘기억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 말한 기억만 역사가 된다구요. 교육단체같은 활동들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첫 번째 기회이고 모아놓고 말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죠. 전시에 드러난 것 외에도 무수히 다른 것이 있을 거라구요. 부족하지만 한번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어요. 적어도 외국 사람들이 한국 건축에 대해 어떤 맥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훌륭한 거 같아요. 이런 계기로 누군가가 관심을 두고 논문을 쓴다면 귀중한 일이지. 많은 논문들이 자기도 모르는 내용을 적어요. 논문은 그 학생의 지적인 상상력을 표현하지만, 그 상상력이 현실을 통해서 분석되어야 자료가 되고 논문이죠. 그게 쌓이면 역사적인 아카이브가 되는 거거든. 최근 목천재단이나 이런 전시를 통해 미시적인 아카이빙을 하는데, 중요한 일이죠. 그렇게 사회가 구축화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전시가 굉장히 훌륭한 거죠. 빅데이터 분야의 손길영씨가 말한 꼰대의 정의가 있어요. 개인이 극복해야 될 과제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래. 왜냐면 사람은 항상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잖아요.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은 자신의 기억에 매몰되고, 사회는 점점 빨리 변하는데 개인의 기억으로 사회를 습득하는 순간 자신이 뒤쳐진다는 거죠. 기억을 버려야 한대. 아니면 사회의 시스템에 맞춰 오픈마인드가 되어서 계속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자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극히 일부였던 자신의 좋은 시절을 착각해서 꼰대가 되어간다는 거지. 그건 진화론적으로도 맞아요. 개인보다 사회가 월등히 빨리 변하거든. 지금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큐레이터나 함께 한 학자들이 한 계층을 이루면서 갈 거예요. 개개인으로 보면 덜 성장한 부분이 있어도 연대를 하면 다 채워져요. 그래서 사회가 굴러가는 거거든. 사회라는 게 거대한 생명체라는 거죠. 그래서 경직되어 있거나, 남의 이론에 몰두되어 있는 것은 위험한 거죠. 건축계에도 시각이 고정된 분위기가 꽤 있잖아요. OHS   진행 임진영, 최춘웅 사진 정유진  다음 인터뷰 ④가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와이드건축 55호 건축가 최욱 특집
OPENSTUDIO 원오원아키텍츠 스튜디오, 최욱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세계관의 접점에서 ‘그라운드스케이프’라는 주제를 풀어내고 있는 건축가 최욱의 사무실은 절제와 명상의 공간을 담고 있다. 서울 대신동에 자리한 건물의 3-5층을 리노베이션한 사무실은 전면에는 이화여대 캠퍼스의 풍경이, 후면에는 연세대 동문 쪽 산이 펼쳐져있다. 이 풍경을 고스란히 끌어들이기 위해 커다란 통창을 설치했으며, 내부에는 유리, 철, 콘크리트 같은 최소한의 재료로 절제된 공간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건축에서 지속적으로 장소성을 만드는 저층부에 주목해 발전해온 건축가 최욱의 바닥에 대한 관심은 곧 내외부 공간을 어떻게 잇는가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외부의 풍경을 껴안기 위해 바닥을 연장하고 정교하게 빛을 다루는 그의 건축 이야기를 원오원 아키텍스의 공간에서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