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건축사사무소

유현준

2017년 10월 29일 2:00P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54길 27, 4층
예약금 10,000원 결제 후 참석 시 환불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부교수이자 (주)유현준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가 유현준은 해외에서 다양한 실무를 익히고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건축가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Modernism: A Hybrid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ulture」, 「52 9 12」, 「현대건축의 흐름」, 「모더니즘 동서양 문화의 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저서를 통해 건축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있다. 2009 젊은 건축가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으며, 최근 서울시 보라매공원 내의 환경미화원들을 위한 근로환경 시설을 완공해 새로운 유형의 공공시설을 제안하였다. 조선일보에서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중앙선데이에서 ‘유현준의 도시와 건축’ 컬럼으로 매주 경쾌하고 쉬운 비유를 통해 건축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유현준건축사사무소
http://www.hyunjoonyoo.com


유현준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자 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인 유현준 교수는 하버드, MIT, 연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리처드 마이어의 사무소에서 실무를 했다. 젊은건축가상, 김수근건축상프리뷰상,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Map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54길 27, 4층
건축가유현준
일시2017년 10월 29일 2:00PM
위치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54길 27, 4층
집합 장소유현준 건축사사무소 건물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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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② 과학적 합리주의와 모더니즘   대학원 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나요? 「근대건축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형태적 표현」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지금 제 건축에 대한 의식의 심층이 깔린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레이어도 있지만 가장 바닥에는 ‘과학 기술’이 있어요. 공예적인 건축이나 맥락적인 건축도 다 유효하고 좋을 수는 있는데, 적어도 저에게는 과학 기술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이론은 아니어도 논문을 쓰면서 이것저것 정리했는데, 합리주의라는 게 합리주의 그 자체(과학과 기술)가 있고, 건축으로 들어올 때는 건축가의 해석을 거치잖아요. 그래서 구조 엔지니어와 아키텍트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과학적 합리주의가 건축의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건축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문제가 있으며 건축가는 어떻게 조율해왔는지를 보자는 게 제 논문 주제였어요 당시 지도 교수님은 누구셨나요? 이광노 교수님이셨는데, 당시 교수님은 반대하셨어요. 실측 논문을 쓰거나, 근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원하셨죠. 지도 교수님 말을 안 들어가면서 주제를 정한 건데, 만약 그때 그런 논문을 썼다면 건축가가 안 됐을 확률이 높아요. 앞서 얘기했지만, 건축과에 온 이유도 ‘뭘 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였으니까요. 교수님도 지도 교수의 권한으로 제가 하려는 걸 못하게 하시는 스타일도 아니었고요. 대학원 때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한 거네요. 유학은 군대 이후 다녀오신 건가요? 네. 군대 가기 전에 6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서울시가 밀라노 트리엔날레에 초대받았는데,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전시에 최초로 초대받은 경우였어요.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주택공사 주택연구소로 갔고, 그 담당자가 김진애 박사님이었어요. 이분이 제 사회생활 최초의 보스시죠. 표현이 이상하지만, 보스가 똑똑할 때 겪는 걸 다 겪어봤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분이 일 처리 능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니까 많이 배웠죠. 학교는 마쳤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지금이야 근사한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김진애 박사님이 면접 때 원도를 들고 오라고 해서 둘둘 말아 가져갔죠. ‘내일부터 나와요’라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습니다’라며 구석에 가서 일했어요. 집이 멀기도 하니까요. 그날부터 야근했죠. (웃음) 입대 전날까지 야근하다가 술 한잔하고 심야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입대한 기억이 납니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 바로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건축에 갔죠. 당시 밀라노 트리엔날레의 한국관 주제가 ‘서울’이었잖아요.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것이나 진행 과정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택공사가 강남구에 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그 일대가 완전히 재건축되었는데, 지하철 학동역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 옆으로 AID 아파트 단지 안의 시범 주택 몇 동 중 하나가 사무실이었어요. 당시엔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업 환경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 강홍빈 박사님이 주택공사 연구소 소장이셨고 그분을 비롯해 여러 석학 밑에서 일한 것도 좋았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양질의 자료를 접해봤던 것이에요. 서울시 항공사진을 무제한으로 봤으니까요.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더라고요. 지금이야 건축계에 소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그때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형성된 때가 아니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다른 논리로 만들어진 강남과 강북, 서울이 성장해온 과정 등을 놀랍게 봤죠. 사대문 안에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피부로 느낀 것 같아요. 다음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까였어요. 그러한 생각들을 전시 도판에 담으면서 소위 전시라는 물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경험했죠. 그때 경험이 이후 <메가시티> 전시 기획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전시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유치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내용을 요약하고 생략하고 강조하다 보면, 현실의 미묘한 결을 전시에 다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전시의 가장 큰 과제는 최대한 명쾌하게 사람들에게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왜곡이 있고 유치할 수밖에 없구나, 책과 전시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리고 전시 하나에 정말 많은 분야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시 도판과 보고서는 안그라픽스에서 했어요. 자료 리서치에는 최종현(한양대) 교수님이 참여하셨고요. 보고서를 보면 제가 한 기초 스케치가 몇 개 있어요. 같이 일했던 팀 중에 더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외에도 상명대 백명진 교수님, 우규승 선생님 등 많은 분을 만나고 코멘트를 들으면서 배웠죠. 건국대 정태용 교수, 경기대 이영범 교수가 동기로 같이 들어가서 일했고요. 당시 주택공사 직원이었고 우리 팀을 지원해주신 현 토문건축 정경상 소장님, 그리고 주공에 계신 다른 분들이 계셨어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팀에 참여하셨다는 건 흥미로워요. 김진애 박사님도 그 전시가 이후 ‘서울포럼’을 설립하는데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거든요. 서울에 대해 확실히 접하셨을 것 같아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서울 역사의 대강을 훑어본 계기이고, 나중에 제가 더 깊이 관심 두게 된 단초가 됐죠.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예일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잘 모르고 갔죠.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원래는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쓰러지셔서 유학 갈 돈이 없었어요. 유학을 하러 가는 유일한 길은 국비 유학생 시험을 보는 것이었어요. 학생 때 두 번 시험을 봤는데 둘 다 1차는 되고 2차는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하고 서울건축에 다니던 어느 날 깨달았어요. 건축가가 되기 위한 디자인 교육의 기본량이 있는데 제게 그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유학을 가야겠다 하고 세 번째 국비 유학생 시험에 붙었어요. 1년 조금 넘게 회사 생활을 즐겁게 했지만 “죄송합니다”하고 나왔죠. 처음에는 유학 준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몰랐어요. 정보전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당시엔 좋은 학교라는 데는 다 지원했어요. 학교 특성도 모르고요. 더구나 예일은 한국 학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이 학교가 뭐 하는지도 몰랐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예일대학을 다니셨던 것은 알았어요. 한국에서는 이미 저명하셨고 대가셨으니 그 정도나 되어야 갈 수 있겠구나 했었죠.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예일에 합격해 당연히 좋았죠. 대학마다 그 시기의 학풍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예일에서는 어떠셨나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예일대학은 미국 대학 중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이 오래 가는 학교 중 하나였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이게 뭐지?’ 했어요. 당시 학장이 토마스 비비인데 이 사람은 미국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실무가 중 하나였어요. 드미트리 포르피리오스(Demetri Porphyrios)나 크리어 형제(Leon & Rob Krier)가 와서 강연하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논문 주제도 그렇고 서울건축 김종성 선생님께 불의 세례를 받아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한국에서 나름 모던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교육이라는 게 이런 거다, 다 겪어보자 했어요. 그래서 장식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모던은 예일에서 교육받으면서 이해하게 된 측면이 있어요. 모던에 비해서 이론적으로는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정말 좋았던 건 만들기였어요. 한국의 건축 교육에서는 뭘 만들어본 경험이 없죠. 모형과 도면 그리기는 생각의 만들기이지, 실제 만들기는 아니니까요. 예일대학에 갔을 때 지하 작업실에 내려가니 학교 자체가 공장인 거에요. ‘와, 드디어 내가 왔다’ 했죠. (웃음) 그때 설계 스튜디오 못지않게 지하실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만큼 너무 좋았어요. 그때 만든 게 까오 의자(Kao chair)예요. 재료도 직접 많이 다뤄봤어요. 조각 수업이 듣고 싶어서 미대 수업도 듣고 했거든요. 몸을 써서 만들어보는 걸 상대적으로 많이 해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경험 덕에 현장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아요. 예일대에는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끈질긴 개인주의자(diehard Individualist)’를 키우려는 정신이 있어요. 그게 특정 시점에서 그 학교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하는 것이기도 해요. 좀 고루하게 보이거든요. 길게 보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긴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좋은 학풍을 가진 학교예요. 올 초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지적 풍토가 좀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저한테는 좋은 양분을 많이 준 학교예요. 그 대신 너무나 서양 학교죠. 예일은 지금도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거든요. 까오 의자의 경우 의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 구현하고 제작해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당시 그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라고 뉴욕에서 온 건축가였는데 로버트 벤투리 계열이에요. 어떤 스타일인지 짐작이 가시죠?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구를 디자인했어요. 대신 가구의 역사에 대해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죠. 제 의자는 작동도 안 될 거라고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1학기 디자인, 2학기 제작인데 그 선생님이 2학기 때는 저 가르치기 싫다고, 수업 듣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친구 하나는 제가 들으면 듣겠다고 했고요. 뉴욕에서 온 그 선생님에게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다가 학기 말에 완성품을 가져갔는데 앉아보고 시연해 보니 ‘내가 틀렸네, 열심히 했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평상시 갖고 있었던 소위 ‘이성적 만들기’에 대한 욕구가 그 의자에 다 담겨 있어요. 당시 친구들이 저를 ‘체어맨’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웃음) 적절한 별명이네요. (웃음) 이성적 만들기라는 표현처럼, 까오 의자는 탱크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잖아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과 소재가 갖는 견고한 매력이 있어요. 그런 작업이 건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럼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내가 건축가가 되겠구나,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죠.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이 길을 가자고 허락하는 계기였죠. 그런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학부 때 졸업 설계였고 다른 하나가 그 의자였어요.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구나,  인간이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기능이 있고 생각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구나 했죠. 그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아직도 무한 애정으로 그 의자를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재료를 다루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도 그때 알았고요. 합판으로 틀을 다 짜고 라미네이팅하고, 목공에 대한 책이며 잡지며 다 섭렵하며 실험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현재 작업에서 물성에 대한 실험을 양껏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이게 아쉬운 부분인데, 남을 통해서만 그걸 한다는 게 싫어요. 가끔 설계 다음으로 시공에 들어가면 누를 때마다 오작동하는 리모컨으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산업체와 건축가가 더 긴밀히 연결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면 훨씬 용이하겠죠. 현재로서는 그 욕구가 잘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하셨는데, 그 외에 인상적인 건 무엇이었나요? 지금도 예일대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그 학교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거예요.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정식 과목에 <History of New Haven Architecture and Urbanism>라는 게 있었어요. 물론 뉴헤이븐이 근대건축에서 유명한 도시이긴 해요. 하지만 우리로 치면 연세대에서 신촌 건축학개론을, 서울대에서 신림동 지역의 건축과 역사를 가르치는 셈이잖아요. 게다가 수업을 들어보니 매우 재미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역의 역사에 거시적 관점의 건축사와 세계사가 편입이 돼가는, 부분 안에 전체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학교가 몸소 실천하는 거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죠. 우리는 빨리 지역(local)을 벗어나서 세계로 나가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세계 건축의 중심 중 하나에 갔더니 자기 동네를 가르치더라는 거죠.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들도 지역 전통(local tradition)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들과 특히 잘 지냈고요. 한국에서 김종성 선생님을 통해 받았던 전형적인 모더니즘 교육과는 상반되지만, 보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공통적인 거고요. 김종성 교수님도 한국에서는 가장 서구적인 건축가지만, 대학원 당시 수업에서는 근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사찰이나 종묘 같은 전통 건축의 공간을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요. <공간건축 구성론>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너무나 잘 찍은 슬라이드로 종묘의 맞배 지붕을 설명하는데, ‘맛배 지붕은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왕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작지붕과 같은 단정적인 형식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런 경우에 만들어진 비례는 결과적인 것이다. 인간의 조형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비례에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스 신전도 사람들은 보통 파르테논이 백미라고 하지만 파에스툼의 묵직함에도 나름의 미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모든 길과 문을 열어주셨어요. 너무나도 신선하게 다가왔죠. 예일대를 졸업하고 김태수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하셨잖아요. 미국과 한국 중 실무를 어디서 할 것인지 고민은 없었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가길 원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학교냐 실무냐, 미국 유학 시절에도 박사과정이냐 설계 사무소냐 등 경력의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번민은 없었어요. 이 길로 가겠다는 확실한 자기 선언을 했죠. 졸업하고 보통 설계사무소를 가는데, 저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미국에서 오래 사는 게 싫었어요. 결국 노마드는 못 되는 사람이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김태수 선생님이었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시지만, 한국에 계셔서 직접 뵐 수 있었는데, 김태수 선생님은 멀리 계셔서 경원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실무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셨고, ‘나는 상자(Box)의 건축가다’라는 선언적인 말들도 대단했어요. 작품의 물성도 너무 좋고요. 김태수 선생님의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교보 천안연수원이었어요. 처음 사진으로 보고 근대건축의 어휘를 다 갖고 있으면서 한국의 산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보며 이런 고수가 있을 수 있구나 했죠. 한국에 잠시 오셨을 때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예일을 가게 됐다고 했더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미국 사무실에 좀 있다 가라고 하셨어요. 신나서 바로 갔죠. 거기서 인턴을 하면서 용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그곳으로 갈 거로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참 행복하게 학교에 다닌 셈이죠. 대선배도 옆에 계셨고요. 그렇게 유학 생활과 입대했을 때가 가장 철없지만 즐겁게 산 때였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3년 반 정도 다녔는데 선생님이 서울에 사무소를 내셨어요. 그런데 사람이 계속 바뀌니까 저에게 한국에 가서 그 사무소를 좀 맡을 수 있겠느냐 하셔서 ‘언제든지요. 어차피 갈 거였어요’라고 했는데 뜻밖이셨나 봐요. 그렇게 1996년 연말에 한국으로 왔어요. 김태수 선생님의 서울 사무실을 3, 4년 맡다가 IMF 사태 후 독립을 한 거죠. 독립은 불경기에 하는 거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용기를 얻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에게서는 어떤 영향은 받으셨나요? 김종성 선생님보다 복잡해요. 김종성 선생님은 명확한 철학적 입장에서 건축의 중요한 지점을 말씀하시길 좋아하시는 분이고 그 외에는 이야기 안 하시죠. 두 분은 기본적으로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과묵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두 분에 비하면 저는 뭐든지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편이죠. 차이가 있다면 김종성 선생님은 본인이 철저한 모더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활동한 대한민국 또한 알고 보면 아주 모더니스트 국가였던 거죠. 박해천 교수가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 이야기를 하면서 서북 모더니즘이라고 했듯이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은 모더니즘이 꽃피었던 나라였던 건 맞아요. 심층적으로든 피상적으로든 그걸 받아들여서 우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과 딱 맞는 곳에 계셨던 거죠. 특히 대한민국 대기업을 상대하면서 거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요. 절대적인 시공 퀄리티라는 당시 시대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동조해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계셨던 것이죠. 반면 김태수 선생님은 미국은 물론 아마 전 세계적으로 건축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하셨어요. 그곳은 모든 건축허가가 우리나라의 문화재 심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런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이 갖고 있던 것을 펼치려면 고도의 능숙한 플레이가 필요하죠. 그래서 김태수 선생님의 어휘가 훨씬 다양해요. 저는 서울건축을 다닐 때나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다닐 때나 제 보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도 어떤 회사에서 최대한 배우고 나가려면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기도 하니까요. 서울건축이야 워낙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었던 회사고, 제가 다닐 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지하실이 아카이빙 룸이었어요. 그때 회사 허락 받고 청사진도 굽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아름다운 손도면이 많았으니까요. 제가 두 분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두 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저는 상대적으로 김태수 선생님의 작품을 더 많이 알았어요. 젊은 시절에 하신 주택은 다시 봐도 정말 감동적이에요. 뉴잉글랜드라는 토양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맘껏 펼치지 못했을 거고요. 결국 그 출구를 한국에서 찾은 거죠. 한국에서 초기에 하신 것 중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인데, 어찌 보면 절충식에 가까워요. 김태수 선생님은 그만큼 담론의 범위가 넓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건축의 단서를 찾는 분이 아니신데, 김태수 선생님은 그런 부분이 있으시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태수 선생님이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추상적인 건축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대덕의 엘지연구소 같은 건 전혀 로맨틱한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죠. 여전히 김태수 선생님은 땅과 한판 붙는 태도, 그런 감각이 인상적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압도적인 경우죠. 땅을 추상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물성을 읽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디테일에 대한 집념은 두 분이 다 똑같고요. 시차를 두고 두 분을 겪었던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처럼 성향이 아주 다른 두 분도 아니었고요. 실무 건축가로서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에서 일했기 때문에 배운 게 더 많았죠. 지금도 제 회사 운영의 일정 부분은 김태수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매주 월요일에 전체가 모여 주간회의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는 방식이랄까요. 김태수 선생님이 그리 사교적인 분은 아닌데 깊이 있는 교우 관계를 통해서 건축가로 계속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봤으니 까요. 미국 사회에서 그분의 지위가 대단해요.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호흡이 길게 활동하시죠. 소장님의 초기작 중 몇몇 도면을 보면 질서를 찾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본인의 성향일 수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고 할까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무심하게 긋는 선은 없어야 한다.’ 제 편견일 수 있는데 도면을 보면 질서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벽이 가기로 했으면 가야 하는 거에요. 자신이 부과한 틀과 질서 속에서 스스로 제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게 건축이지, 질서를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줄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거죠. 그 극단의 작업을 해본 게 바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예요. 연습공간인 배구 코트와 숙소를 한 건물에 담으면서 정방형 공간을 설정하고 원형을 품고, 지붕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조로 풀었어요. 엄청나게 고생했죠. 정방형의 공간 안에 고도의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에 부여한 정방형, 원, 대각선 틀 안에서 그걸 다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도면을 죽어라 많이 그리면 해결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공간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에 필요한 절대적인 기하학적 규칙이라는 건 없어요. 대부분 공간은 건축가가 스스로 부여한 질서 안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③으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오픈하우스서울 2018은 해마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문을 열어 그 흐름을 직접 체험할 기회다. 건축가와 함께 건축물을 직접 경험하고 강연과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건축가가 추구하는 철학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올해는 서울 사대문 안의 복잡한 골목의 조건을 풀어가고, 한옥의 텍토닉을 재해석하고, 작가로서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어내며, 영추포럼, 답사 등의 문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건축가 황두진을 만난다. 다공성, 구축술,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로 전개하고 있는 황두진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건축가 황두진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고와 물성을 가진 결과물의 연결고리를 탐색해본다.    이북, 서울, 사대문 서울에서 나셨지만, 이북에 대한 관심이 높아 보여요. 부모님이 실향민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다 실향민인 경우는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연고가 없는 집단을 실향민이라고 생각해요. 퉁쳐서 문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사람들’ 그리고 부제처럼 ‘자유대한의 품으로’라는 말이 따라오죠. 엄격하게 실향민은 네 그룹 정도가 있다고 봐요. 제1그룹은 일제 강점기 때 내려오신 분들이에요. 단순 이사죠. 어찌 보면 그 그룹이 사상적으로는 가장 다양해요. 다음 제2그룹이 해방 이후부터, 즉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오신 분들이에요.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그야말로 자유대한의 품으로 오신 분들이죠. 성향으로는 반공적이고 당연히 지주, 자본가, 지식인, 기독교도가 많죠. 서울 교회의 상당수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설립했다는 게 그것을 반증하죠. 제3그룹은 한국 전쟁 당시에 내려오신 분들인데, 이분들도 사상적으로는 다양해요. 당시 미국이 북한을 엄청나게 폭격하던 시기였고 핵폭탄 투하설도 있어서 그냥 경황 중에 난리를 피하려고 내려오신 분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제4그룹으로는 탈북자가 있죠.   탈북자를 실향민으로 함께 분류하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그건 제가 분류한 거예요. 거대한 흐름에서 보자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이든 자기가 태어난 곳이 떠나온 사람들은 실향민의 연장으로 보는 거죠. 이 네 그룹 중 저희 아버지는 제1그룹, 어머니는 제3그룹인데, 어릴 땐 그걸 신경 쓰지 않았고요. 나이 들면서 ‘우리 집안이 그렇구나’를 깨달았고, 더 나이가 든 요즘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이 좀 다를 수 있겠구나 해요. 예를 들면, 다른 분들보다는 북한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향의 설움에 목이 메어’ 같은 레토릭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 대해 오직 적대감이나 친근감만 느끼는 것도 아니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복잡한 입장이죠. 아직 건축가로서 행동으로 옮긴 건 없지만 그런 점에서 생각이 남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해요.   한번은 페이스북에서 만우절 농담으로 ‘황두진건축사사무소 평양 지점’을 내셨다는 글과 사진을 올리신 적이 있어요.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북한에 대한 관심이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을 거예요. 북한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문화에서 크신 분들이 보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한국전쟁에 대한 문헌을 폭넓게 보는 편인데,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건축가로서의 경력이 후반기로 가면서 제 삶에 주어진 소명이라면, 북한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건축가협회 ‘남북교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셨죠? 제가 단체활동을 열심히 해온 편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도 모아야 하고요. 위원회 활동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은, 북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빨리 내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우선 국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북한의 도시와 건축> 콜로키엄을 하고 있어요. 저 못지않게 위원회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거였어요. 좀 신중해지자는 거죠.   양가 부모님이 기억하는 이북의 도시 공간을 기록하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부모님이 의식적으로 과거 도시 공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은 아니고, 흘러가는 말씀을 하신 거죠. 아버지는 제가 대학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쓰려지셨고 이후 2004년에 돌아가셔서 이야기가 많진 않아요. 가령 냉면은 겨울 음식이라는 이야기, ‘돌싸움’, 그야말로 투석전으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이야기, 평양 사람들의 거친 성향 등에 대해서 들은 정도예요. 반면 어머니는 원산 분이신데, 어머니가 기억하는 원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 같아요. 실향민인 부모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하려 하진 않으셨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장모님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은 독특하게 사돈 안주인 두 분이 함경도 출신인 경우에요. 장모님이 함흥 분인데, 아까 구분한 실향민 중 제2그룹이에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은 아니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북한이 고향인 기독교 사람들을 모두 보수적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실향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매우 투박하다는 거고요. 장모님은 오빠가 함흥 학생만세운동에 관여했어요. 공산당 치하에서 기독교계가 주도한 학생 사건에 연루된 것이니 그 이유만으로도 북한에서 살 수가 없죠. 감시가 있으니 주변에는 시골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고 말하고 경원선을 타고 오다가, 철도가 끊어진 철원에서 내려 한탄강을 맨발로 건너왔다고 해요. 얼마 전에 그 장소도 가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장모님이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해요. 물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서울이 수도라는 개념은 없었겠죠. 하지만 임금이 살던 조선의 수도였고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 것 아니에요?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모님이 서울 와서 보니, 집들이 게딱지처럼 산 능선까지 있었다고 해요. 제 생각에 그게 피난민 지역은 아니고 자연 지형을 따라 언덕이 집으로 다 가려진 걸 보고 그러신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내려오니 조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더라는 거에요. 때가 어느 땐데 조상을 찾나 싶어서라고요. 그래서 함흥은 어떤지 여쭤보니, 공산 치하에서 살다 오신 분이라 봉건시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아요. 함흥은 워낙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개발했던 공업 도시에요. 길이 넓고 도시계획을 반듯하게 하고 건물들이 크고 천장이 높고 깨끗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서울은 계획도시의 느낌이 없고, 건축적으로 좋게 얘기하면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유기적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질서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성향이 신기했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소장님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양가 부모님의 고향도 멀지 않게 느끼겠네요. 저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생각하죠. 평양이나 원산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신 곳이니 관심이 있는 거고요. 은연중에 제게 사대문 중심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마침 사는 곳이 여기(서촌)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기는 해요. 하지만 삶의 궤적을 보면, 우리 가족은 사대문 안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구질서 핵심세력에 한 번도 편입된 적이 없어요. 변방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버지를 너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7, 8년 전에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어요. 부모님이 서울 와서 사신 곳, 즉 제가 태어난 곳은 한양대학교 근처의 경원선 철도 변 한옥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지번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의 고향이 원산인 것을 알고 좀 뭉클하더라고요. 고향 가는 기찻길 옆에 산 거잖아요. 그러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정릉의 개량 한옥에 살았고 이후 결혼 전까지 2, 3번 이사했고, 그다음 신도시로 구분도 안 되는 0기 신도시인 과천에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도 과천에 있었어요. 집안 내력이나 제가 살아온 현장으로 보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성장했던 거죠. 요즘 옛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1950~60년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사대문 안에 있는 한옥에 산다는 걸 새삼 느껴요. 1950년대 후반에 부모님이 결혼하셨는데, 이때 왕십리, 정릉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울의 외곽에 살았던 것이죠.   어렸을 때도 이북이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나요? 어린 애들은 잔인한 측면이 있어요. 순수함의 이면에 있는, 판단력 부족에서 오는 잔인함이죠. 저희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오셔서 친가 쪽 친척이 많은데, 어머니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오신 분이라 외가가 없었어요. 북한 집안들이 또 좀 짜요? 설 이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제가 받은 세뱃돈이 절반도 안 됐어요. 친구들이 시골 종가에 다녀온 얘기를 하는데 제가 ‘종가가 뭐야?’ 하니까 갑자기 애들이 ‘너 종가가 뭔지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 사는 기와집 없어?’ 하는데 아마도 좀 사는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너 족보는 있냐?’ 하고 저를 놀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집에 와서 ‘왜 우리는 종가가 없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엄마가 그제야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주신 거예요.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학교에서 도깨비가 있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때인데, ‘그럼 우리가 그런 집안인 거냐?’ 하고요. 어머니는 그전에도 우리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어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왜 우리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한테 인사 안 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둘러는 데야 했고, 당시 세계지도가 집에 걸려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코펜하겐이 있더래요. (웃음) 그래서 저희한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코펜하겐에 사신다 한 거에요. 또 마침 무역 일을 하셨던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어요. 유럽 출장을 가시면 아버지 회사 동료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을 대신 보내게 해서 저는 정말 유럽에 외가가 있는 줄 알았죠. 사실은 이북에 계셨던 거죠. 그 일로 ‘이 사회에서 뿌리박고 살아오던 집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박혔어요. 코펜하겐 이야기는 제게 여운이 남아 있어요.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코펜하겐에 갔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티볼리 공원에 앉아 있으니 곱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중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나고 자랐던 경원선 근처 집에 대한 기억은 있으신가요? 전혀 없어요. 기억이 있다면 그다음 정릉에서 살던 집이 전형적인 ㄷ자 도시형 한옥이었는데, 그 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흑백으로 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기억하는 첫 장면이라 몇 년 전 스케치한 적이 있어요. ㄷ자 한옥이니까 빛이 네모로 딱 떨어질 것 아니에요? 그게 대청마루의 끝과 댓돌, 시멘트 바른 앞마당에 떨어졌죠. 대신 실내는 굉장히 어두웠어요. 집에 웅크린 어두운 구석들과 대청, 어릴 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매우 무서웠어요. 지금 건축가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밝은 집을 짓기보다는 비교적 빛을 분산하는 데 관심이 있는데, 어두운 구석에 대한 공포가 강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다락에서 노는 것은 좋아했어요. 다락의 빛은 밑에서 올라오니 포근했거든요. 생각해보면 개량한옥에 살았지, 소위 부흥주택에도 살았지, 어머니가 유치원을 하시느라 당시 엄이건축에서 설계한 주택 겸 유치원에 살면서 직주근접의 삶도 처음 체험해 봤고, 결혼해서 아파트에 살아봤으니, 나름 초고층 주상복합 제외하고는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본 거죠.     지금 통의동 목련원은 집과 사무실이 붙어 있는데, 경복궁 서측으로 온 계기가 있었나요? 경복궁 서측으로 온 것은 성인이 되어서예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경비가 삼엄했어요. 동네가 1970년대에서 멈춰진 타임캡슐 같았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죠. 19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난 다음에 이 동네 경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에요. 효자로가 부암동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는데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하문로를 낸 것이죠.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정도에 멈춰져 있고, 2000년 초반쯤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려서 효자로 변에 <열린책들> 건축물을 설계했어요. 그때 이 동네를 알게 되어 결국 이사를 오게 되었죠. 어릴 때 살았던 정릉처럼 서울의 외곽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았고 서촌이란 말도 없었고요. 지금은 다르게 볼 수 있어도, 당시 저는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찾아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많이 누워있었다는 기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거의 죽은 거였어요. 급상 신장염으로 학기 초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래저래 학교를 못 다닌 게 방학을 포함해 10달 정도였어요. 절대 안정을 해야 하거든요. 오래 누워있어서 퇴원 당시에는 다리 근육이 다 빠졌어요. 걸음마부터 다시 배웠죠. 당시 입원했던 성모병원이 명동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요. 1호 터널로 가다보면 명동 입구에 면한 건물 3층이에요. 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니 수녀님들이 저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갔었는데 그때도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웅장하고 근사하지만 컴컴하잖아요. 당시 입원해 있으면서 얻은 게 있다면, 시간이 안 가니까 침대에 누워 뭔가 집중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천장의 금이 커지나 안 커지나를 매일 봤고, 자연학습도감을 가져다 열심히 보고, 그 와중에 오탈자 찾아 출판사에 보내면 기특하다고 선물을 보내주고 했던 기억도 나고요. 또 배운 게 있다면, 저 혼자 잘 노는 거예요.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요. 물론 옆에서 많이 돌봐주셨지만,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진 때가 있었는데, 누워 있는데 시야가 점점 좁아졌어요. ‘이게 뭐지’하고 조바심은 나도 마음은 편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손이 하나 내려오더니 ‘두진아 안돼!’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잡아채는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으니 제가 정신을 잃어 뺨도 치고 하셨다고 해요.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거죠. 그게 1971년 일이에요. 용감무쌍하게 세상에 돌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는 너무 눈치 안 보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평소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영향도 있을까요? 선천적인 것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변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해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병약했던 유년 시절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건축가는 대부분 부모님의 뜻을 꺾고 건축을 선택한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건축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건축가가 된 계기는 초라해요. 일단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건축과를 생각한 적이 없고, 대학 입시 때도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아무래도 적성과 무관한 것에 빠지는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물리학자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될 거로 생각했어요. 특히나 중고등학교에 가니 물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을 잘 못 했으니 물리학을 안 한 건 다행이죠. 수학을 도구로 하지만 물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만들어요.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세상에 뭔가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매력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점에서는 건축도 다르지 않죠. 대학은 자연과학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입시제도의 희한한 상황 때문에 어느 날 보니 공대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당시 응용과학을 시시하게 생각했거든요. 양자역학에 대한 영웅시대 책도 엄청나게 봤고, 당시 씨엔 양이라는 중국계 물리학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고등학생인데도 들으러 갔으니까요. 어쨌든 당시 대학교에서 공대 신입생을 과 별로 안 뽑고 공과대학으로 뽑았는데, 700명 중의 한 명이 된 거죠.   참 신기한 게 전공이 아닌 단과대별로 뽑으니까 우리가 소속감이 없는 걸 보고, 공대 17개 과에 신입생들을 매칭시킨 거예요. 그때 공대 1반이었는데 가나다순으로 하면 건축과가 제일 앞이잖아요. 그래서 제 지도교수님이 건축과 교수님이었어요. 3월 중순이 되니 면담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교수님이 어려우니 면담 30분 전에 갔는데,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공대 건물이 서울대 35동 4층엔가 있었는데 복도를 들어가니까 그 전해의 졸업작품 도면과 모형들이 있는 거예요.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안건축의 윤세한 소장님 졸업작품이었어요. (웃음) 그때 면담이라는 건 ‘너 데모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자리였는데, 저는 교수님께 솔직히 얘기했어요. 건축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복도에 있는 걸 보니 근사하게 보인다고요. 이런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당시 김진균 교수님이셨는데, 그분 멋있잖아요. 웃으시면서 ‘삶에 우연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뜻일 수 있다’ 하면서,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과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셨어요. 감사하다 하고 나가면서 ‘내년에 뵙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는 1학년 학점을 가지고 입시를 한 번 더 했거든요.   학번이 어떻게 되시죠? 82학번입니다. 공대 1반이었는데 자매반이 건축과였던 것이고 건축과는 다행히 포용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대 축제에도 우리 1학년들을 초대해줬고, 그래서였는지 공대 1반에서 건축과 간 친구들이 많았어요. 촌극 할 때도 우리에게 출연하라 해서 저도 출연했어요. 내용이 중동에 한국 건설회사가 가서 부실공사로 난리 난 이야기였는데, 제가 아랍인 건축주였어요. (웃음) 문제는 그렇게 해서 2학년이 되어 건축과에 들어가니, 소위 즉흥적으로 건축과에 온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학기 초 신입생환영회에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했는데 제가 황 씨라 거의 마지막에 했어요. 앞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가령 이런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 마르셀 브로이어의 ‘밤과 낮의 주택’을 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내는 것에 매료되어 건축과에 왔다’ (웃음) 내 순서는 점점 다가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해서 솔직히 얘기했어요. 앞의 친구들과 같은 건 없고, 원래 자연과학대학에 가려 했는데 우연히 공대 왔다고요. 그러다가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 건 대단한 일인데, 만든 결과가 심지어 쓸모도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인 거 같다, 그래서 만들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소개했던 것 같아요.   80년대는 데모도 많고 학교가 어수선했죠? 저는 전형적인 데모 안 한 386입니다. 그건 솔직하게 얘기해야죠. 그게 저에게 두 가지의 흔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부채의식이고요, 또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전두환을 옹호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나설 게 아니라면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면 하고 말면 말고죠. 아마 누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3형제의 막내인데 누나는 정말 열심히 데모했어요.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형이 2학년, 누나가 4학년, 이렇게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인데 사상 교육을 조직적으로 많이 받았는지, 이미 고등학교 때 집에 소위 불온서적이 많았어요. 그때 다 읽었으니 대학 와서는 새삼스럽게 뭘 읽지 않았죠. 광주를 보면서는 솔직히 두려웠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남아있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지만, 저에게는 남북문제인 것 같다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대학 2학년에 들어가면서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바로 은퇴하셔서 22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2004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집 아이였는데, 인생에 처음 시련이 온 거죠. 50대에도 암벽등반을 하셨던 분인데 그렇게 자기 육신의 감옥에 갇혀 계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괴로웠어요. 당연히 아버지 본인이 가장 괴롭고, 어쩌면 어머니가 더욱 괴로웠을 수 있죠. 매우 활달하신 분인데, 한창나이에 항상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해야 했으니까요. 대학교 때 열심히 놀고 연애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때 기억이 썩 좋지도 않고, 생각만큼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학점도 들쑥날쑥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회사 직원 뽑을 때는 학점을 안 봐요. 의리상, 제가 별로 안 좋아서. (웃음)   설계 전공 수업에 충분히 만족하셨나요? 4학년 졸업 때가 되어서 대학을 너무 부실하게 다닌 걸 깨달았어요. 집중도 안 했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졸업 설계를 잘 해보자 했어요. 당시 팀으로 하던 분위기였는데, 평소에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한 번 열심히 해보자 했고, 논의 끝에 주제를 잡은 게 북창동 재개발이었어요. 수직입체 도시로 만들어 저층부에 데크, 위에 주상복합이 올라가는 계획을 했어요. 그게 그해 졸업 전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아마 제 동기들에게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에요. 저는 꼭 끝에 가서 열심히 하더라고요.(웃음) 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는데, 당시 영향을 받으셨나요? 대학생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게 쉽진 않죠. 대학원 가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시원찮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게 왜 나왔는지는 알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을 대체할 만한 핵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결국 모더니즘의 가장 심원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겠어요? 모더니즘의 단점을 이야기하거나 부분적인 보완을 할 뿐이죠. 자주 하는 비유 중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부적을 붙이는 사람보다 세콤을 설치하는 사람이 많다면 모더니즘은 퇴조하지 않는다는 게 제 믿음이에요. 그런 면에서 저는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해요. 모더니즘이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로 김종성 건축상을 받은 것도 옛 생각으로 돌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국의 학교 분위기가 디자인에 강한 사람을 키우는 건 약했지만, 오히려 사회적 관점을 많이 키워준 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장서서 데모를 안 했다 뿐이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북창동을 대상으로 재개발 설계를 하며 고민했던 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도 해요. 단순히 조형예술이 아닌 사회적 측면이 건축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원 시절의 자료 중 가회동 한옥 실측작업 드로잉이 인상 깊었어요. 당시 실측 작업이 중요한 출발점이 된 건축가도 여럿 계시고요. 근대 한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때에 실측 작업은 의미 있는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학창 시절의 사건 하나를 뽑자면 가회동 한옥 실측 작업이죠. 제 건축가 경력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니까요. (웃음) 제 기억에 당시에 그뿐 아니라 농촌 마을, 농촌 주택처럼 다양한 분야의 실측이 있었어요. 가회동 한옥은 이광노 교수님 무애연구실에서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사실 실측에 처음 참여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 실측에 대한 공고가 붙었는데 학부생도 지원을 받아주어서 무슨 생각에선지 덜컥 지원했어요. 제가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고 했잖아요. 고백하자면 그중 한국 건축사가 가장 낮았거든요.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윤장섭 교수님이 ‘자네가 한옥에 대한 책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야!’ 하셨으니까요. (웃음)   그때는 그 실측 작업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지금도 당시 참여했던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시작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애연구실은 서울대와 홍대가 같이 참여했거든요. 금요세미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다른 학교 학생도 많이 알게 됐죠. 대학원에선 강원도 민가 조사에도 참여했죠. 보고서의 실측 도면 중에 과도하게 그린 그림이 하나 있어요. 당시 기준에서는 열심히 한 건데, 야단도 맞았죠. (웃음). 개도 그리고 개집도 그리고 개가 다니는 범위도 그렸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때 실측하러 들어갔는데, 한국 건축사에서 배우고 고건축답사(당시는 그렇게 불렀어요) 때 돌아다녔던 그런 집의 풍경이 아닌 거예요. 도시형 한옥은 창고 같더라고요. 그때 뭔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이야기하던 한옥에서의 정갈한 삶과 너무 다른 거예요. 당시 4.3그룹 등 선배 건축가들이 한옥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는데, 실제 실측하면서 보니 뭔가 그분들 말씀이나 현대인의 삶과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변해야 하는 건 한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②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Interview W Interview 오픈하우스서울이 올해부터 시작하는 <W Interview>는 건축, 조경, 도시 분야의 여성 전문가를 만난다. 한국의 현대 건축, 도시, 조경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오늘을 만들어가는 여성, 전문가를 위한 기록이다.  전문가의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간혹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분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이 분류가 호출되는 이유는 기울어진 판에 대한 자각과 남성 중심의 서사가 놓치고 있는 전문 분야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이자 필요에 가깝다. 젊은 여성 건축인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는 중견 건축인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무엇보다 여성 건축인에 대한 기록과 작업에 대한 조망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성 건축가의 존재를 수면 위에 띄우고 재조명하면서 또 하나의 관점과 서사를 쌓아가는 이 과정은 한국 건축에 다른 시각의 타래를 더하고 한국 현대 건축 서사의 깊이와 켜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터뷰는 2009년 월간 <공간>과 네이버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편에 소개된 12명의 건축가 인터뷰를 연장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전문가로서 여성 건축가, 도시, 조경가를 주목하고 그 작업 세계를 만나는 자리로 마련된다. <W Interview>라는 이름은 이미 전시, 연구, 출판을 통해 디자인계의 ‘끊임없이 갱신되는 열린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를 선언한 <W 쇼>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OH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③ 건축적 관심에 대해 여쭤볼게요. 작업 중에 공간이 부속으로 딸린 중심공간을 만드는 평면이나, 입면 구성에서 면의 분할, 목재를 활용하는 경향들이 흥미롭습니다. 설계할 때 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두고 전개하시는지 궁금해요. 우선 대지와 프로그램이 많은 것을 정해줘요. 건축 설계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법규도 변수를 줄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고맙죠. 다 펼쳐지면 계속 고민을 해야 하는데 다 끊어주니까. 아까 동은재 이야기를 하며 설명해 드린 것 같이 대지 분석에서 나오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문제를 풀 때가 가장 신나요. 너무 차가운 재료보다는 따뜻하고, 덜 가공된 재료를 쓰고 싶죠. 돌이면 돌, 재질이 확실히 느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목재가 재미있기는 해요. 시공도 빠르고 따뜻하고 좋은데 우리나라 기후에는 좀 힘들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할 수 없이 콘크리트를 써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단열과 냉방을 동시에 하는 게 쉽지 않죠. 앞으로 전기요금이나 미세먼지, 단열을 고민하다 보면 형태가 많이 바뀔 거 같아요. 미세먼지에 대비한 공조시스템이 발전해야 할 것 같고요. 우선은 정부 정책으로 공기를 개선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개개인이 다 공기청소기를 두고 있는데 이것도 다 쓰레기가 될 거 아니에요. 참 큰 문제에요. 여름에 더 덥고 겨울에 더 춥고, 이제 캘리포니아 스타일처럼 전면 유리로 마감하는 건 끝난 것 같아요. 건축에서 이 에어필터를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에너지와 친환경이 건물에서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땅에 어떻게 앉혀야 단열이 가장 잘되는지, 그런 프로그램이 디자인을 다시 지배하겠죠.   건축가로서, 전문가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으시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역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구조, 설비 등 전문가와 협업하는 자세도 중요해요. 하청이 아니라 파트너로, 같은 디자이너로서 협업할 수 있는 자세. 저는 건축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의뢰인의 요구가 있을 때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제안하지만 강요하지는 않거든요. 물론 완전히 잘못된 것을 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지만, 건축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내 미학적 고집(aesthetic persist)과 의뢰인의 요구가 부딪힌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맞춰드려야 할 것 같아요. 주거 공간 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걸 잊고 건축의 숭고함만을 배우면 안 될 것 같아요.   귀국하셨던 1990년대에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으셨나요? 건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지금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어떤 분은 자신만만하게 클라이언트를 야단쳤다고 하는데, ‘왜 야단을 치시지?’ 생각했어요. (웃음) 이해는 시켜드려야 하지만 서비스업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들어가야 해요. 그게 싫으면 클라이언트가 되어야죠. 그래서 힘들어요. 그렇다고 투자를 잘해서 커미션을 받는 게 아니라, 들어간 시간만큼 비용을 받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직업 같아요.   건축 설계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가가 좀 그래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대학원 예산을 보면, 디자인 대학과 교육 대학이 가장 예산이 적어요. (웃음) 졸업생들이 그만큼 기부를 못 해요. 너무 빠듯하니까요. 로스쿨이나 비즈니스스쿨은 기부를 많이 받으니까 살림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는데, 디자인 대학은 장학금을 주고 좋은 학생을 데려오고 싶어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림을 해야 하는 거죠.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에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은 노동 집약적(labor intensive)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의뢰인에게 정정당당하게 시급제로 비용을 청구해야 하고 함께 단합해야 하는데, 일을 놓고 경쟁하다 보면 그런 단합이 힘들기도 하죠. 아쉬운 부분이에요. 요즘은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의뢰인들도 많고, 작은 사무실에서 잘해나가는 것 같아요. 세대가 바뀌면서 좀 개선이 되지 않을까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건축가에 대한 인식이 넒어져서 집을 지을 때 건축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는데, 소규모 프로젝트의 예산이 너무 적은 경우도 많아요. 무리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까 젊은 건축가들도 출혈이 생기고요. 작업하더라도 유지가 안 되니 그런 작업을 반복하기는 힘들잖아요. 개개인의 의뢰인이 늘어나는 것보다, 제대로 돈을 쓰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맞아요. 그런 조언을 의뢰인에게 해야 해요. 무리하게 설계비를 150으로 낮추지 말고, 200을 주고 그 대신 제대로 서비스를 받으시라는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셨는데요. 개개인의 작업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스튜디오도 결국 사업체인데, 대부분의 건축가가 경영에는 익숙지 않죠. 사무실 운영은 어떠셨나요. 이태원 사무실이었는데 꽤 큰 공간에 식구는 적었지만 재미있게 있었어요. 제가 미국을 가게 되면서 정리를 해야 했죠. 운영은 안 좋았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직접 관리하는 수준의 작은 아뜰리에고, 프로젝트가 커지면 큰 사무실과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해놨어요. 그렇게 구조를 만들었지만, 목표(goal)가 너무 낮았던 거죠.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해야 하니까. 손실이 좀 나면 내 월급으로 메꾸는 차원에서만 생각했지, 사무실을 확대하고 더 큰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마케팅할 여력이 시간상으로 없었던 거예요. 여자나 남자나, 개소를 너무 일찍 해서 한계에 빠지는 선이 있을 거 같아요. 스스로 다룰 수 있는 오버헤드와 프로젝트 규모와의 간극(gap)이 있기 때문에요. 협업하면 좋은데 보통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정석은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설계비를 청구하고, 시공비를 제대로 받아서 의도한 건물이 만족하게 나오고, 그 건물을 기반으로 더 좋은 프로젝트 따고, 더 좋게 짓고, 더 좋은 의뢰인과 만나고, 이렇게 해야 해요. 저는 그것을 잘 못 했죠.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건축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싸게 지으면 결국 저렴한 건축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다음 단계를 보면 과연 더 나아갈 기회가 있을까 싶고요. 싸게 하려면 아이디어가 획기적이지 않고서는 안돼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욕심내면 오히려 화음이 아닌 소음이 되어 실패할 수 있어요. 물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아주 간단하고 획기적인 공간 아이디어로 명확하게 돋보여야 그걸로 다른 의뢰를 받을 수 있어요. 저렴한 프로젝트를 자주하면 진만 빠지고 발전이 없기 쉽죠.   지금 젊은 건축가들이 가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 스튜디오라는 낭만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죠. 저는 사실 제가 아프고 피곤하니까 학생들에게 점점 솔직해졌어요. 건축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을 못 하니까요. 이 공부를 하고 얼마나 힘들지 아니까. 멀쩡한 가장이 와서 전공을 바꾸어 건축대학원 지원할 때면 네가 진짜 원하는 거냐고, 힘들다고 말했어요. 학교에선 난감하겠지만 그 비싼 대학원 학비를 내고 오는데 정확하게 알려줘야겠더라고요. 정말 좋아서 하는 학생들은 해야 하고, 또 대형 건축사무소가서 괜찮은 수준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알아야겠더라고요.   일을 쉬고 계신데, 면역에 취약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과로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늦었던 것도 몸이 좀 안 좋아서였어요. 31살 정도에 아기를 낳았는데, 좀 아파서 임신을 늦추었다가 그 뒤로는 임신이 안 되어서 늦었죠. 그러다 겨우 생겼는데 유산기가 있어서 10개월을 누워 지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는 홀가분하게 활동을 하다가 2005년도에 다시 몸이 안 좋아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휴직했죠. 3번째 아픈 거였어요. 아이 낳기 전, 후 그리고 2005년. 이렇게 세 번 지병이 오다 보니까 의사인 사촌 언니가 ‘내가 너 같으면 쉬겠다.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니?’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때까지는 아무 의심 없이 몸이 아파도 좀 나으면 일을 했는데, 삼세번이 되니까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쉬어보자 하다가 아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뉴욕에 가게 되었어요. 저도 재충전을 하자 했죠. 그렇게 한 해 두 해 늘어나게 되니까 자꾸만 현장에서 멀어지게 된 거예요. 건강은 나아졌지만, 시간이 좀 걸렸어요. 한 가지 지병은 아직 관리하느라 병원에 왔다 갔다 하고 있죠.   건축 설계라는 분야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격무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미친 듯이 무리한 것 같아요. 좋아했으니까. 100만 원 받으면 딱 100만 원어치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다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싶잖아요. APAP나 그간 했던 전시도 판 하나 깔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꽤 많이 생각하고 모델을 만들곤 했죠. 과정이 참 좋았지만, 너무 무리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면에서 좀 그래요. 여행 가기 전에 집을 다 치워놓고 가는 성격 있죠? 갔다 오면 깨끗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더 막 괴롭히게 되죠. 살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하지 못하고 성에 차게 하니까 안 되죠.   모든 역할을 다 해내려 하신 거네요. 일하는 여성의 힘든 부분인 것 같아요. 저도 딸이 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눠야 해요. 제 딸은 저처럼 모든 것을 똑바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성격이에요. 저는 꼭 똑바로 해두어야 하거든요. (웃음) 처음에는 야단을 치다가 지금은 내버려 둬요. ‘네가 앞으로 커리어를 갖고 살려면 이런 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가야 안 아프지, 매번 정리하고 살면 이 아이가 아프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저도 좀 바뀌는 것 같아요.   건축 실무에서 의뢰인을 상대할 때 여성이라는 점은 전혀 영향이 없었나요. 현장에서 작업하셨을 때 장단점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여자와 남자는 달라요. 그 다른 점을 쓰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의뢰인은 여자라서 좋아하시는가 하면 어떤 분은 여자라서 불편해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건 사람의 취향이에요. 예를 들어 산부인과 갈 때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 선생님도 상관없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본인이 편한 쪽으로 가는 것에 대해 성차별이라고 얘기하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건축은 긴밀하게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요. 헤이리 북카페의 경우 건축주분께서는 여자라서 더 좋다고 했어요. 여자라서 더 요구 사항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과는 잘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현장은 어차피 현장 소장이 있고 그 관계만 원활히 하고,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밀리거나 할 말을 못 하진 않아요. 저는 교수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했죠. 하지만 거기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에 확실하게 알고 얘기를 해야겠죠. 그렇다고 밀리지 않으려고 너무 세게 나와도 곤란하고요. 그게 참 묘미인 거 같아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둘 다 힘들기 매한가지지만, 힘든 부분이 다른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사실 힘들죠. 완벽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하고, 일을 나누어야 해요. 혼자 다 못해요, 그리고 플랜 B가 많아야 해요. 일이 안 되었을 때 가동해야 하는 플랜 B, C를 준비해야 돌아갈까 말까 하죠.   사무실 운영 측면에서 말인가요? 사무실 운영, 아이 보는 것 모두요. 얼굴 보고 힘든 말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고 불필요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쓰더라고요. 직원을 하나 내보내야 하면 고민을 하지만 딱 얘기를 하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줘야 하고, 그런 판단을 빨리하는 연습을 하면 좋아요. 너무 많은 욕심을 내면 일을 그르치거나 건강을 그르치거나 하죠. 저는 건강을 그르친 나쁜 사례이고, 현명하게 하려면 일을 나눠서 해야 하고, 플랜 B가 많아야 하고, 자존감 있게 하나에 집중할 때에는 다른 건 안 해야 해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거 같아요.   이 인터뷰가 시작된 계기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50대 여성 건축가의 부재가 컸습니다. 공간 재직 시절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인터뷰를 했는데 동시대의 여성 건축가분들이 안 계신 거예요. 물론 개별적인 사정이나 건강 문제가 컸지만, 한편으로 과연 우리 사회는 여성 건축가에게 큰 프로젝트를 할 기회를 주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작은 프로젝트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형 프로젝트, 혹은 지명 공모전에 여성 건축가가 호출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여성 건축가들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선입견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큰 프로젝트를 하는 분들은 있는 데 보통 같이하시는 경우가 많죠. 규모 있게 사무실 운영하는 분으로 김용미 선생님도 있고요. 우리가 좋은 예가 못 돼서 아쉬워요. 그때 저와 민선주 씨, 서혜림 씨를 삼인방이라고 불렀는데, 선주 언니 아프시고 서혜림 씨도, 저도 아프고, 이런 상황이 참 안타까웠던 거 같아요. 서울대 후배들을 보면 사무실을 개소해서 열심히 운영하는데 얼마나 큰 프로젝트를 맡는지는 모르겠어요. 대형설계사무실에 임원진은 계시죠. 정말 더 나와야 할 텐데요.   건축에서 젠더 이슈를 크게 체감하지 않는 이유가 건축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여자든 남자든 큰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졸업생 성비, 젊은 여성 건축가가 배출되는 비율만큼 중견 건축가까지 그대로 유지가 되느냐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잘 안되죠.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육아를 하다 보면 쉬거나 파트너쉽으로 가죠. 어떻게 보면 나눠서 하는 게 현명한 거예요. 나눠서 하면 계속할 수는 있으니까. 자신의 이름 하나로 내거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둘 다 원하면 나눠서 하는 것도 좋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만약 올인하고 싶으면 희생할 것은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다 백 점으로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전 글에서 조경이나 건축이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으셨고, 그에 대해 ‘랜드아키텍처’라는 표현으로 관계 구성과 구축에 대해 정리하셨습니다. 건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사실 제 마음대로 생각했던 건축물을 충분히 지을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항상 랜드스케이프 스케일이 아니라 건축 스케일에서 땅을 더 적극적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건물을 잘 앉히면서도 그렇다고 땅속에 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요. 할 게 너무 많은데 목표는 세워놓고 많이 미달이 된 느낌이 들죠.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어요.   실현되지 못한 것을 담고 있어서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돼요. 지금은 일을 쉬고 계신데, 이후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작업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여건이 되면 하고 싶죠. 이전 프로젝트를 볼 때면 ‘왜이랬어, 더 잘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평창올림픽 폐막식 영상에 제 프로젝트가 나온 걸 보고도 ‘지붕 색으로 천장을 칠하는 건데’ 그러고 있어요. (웃음) OH  + 진행 임진영 + 사진 정멜멜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②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건 언제였나요? 1993년, 94년인 것 같아요.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바로 오신 건가요? 조금 있다가 왔죠. 대학원 도중에 결혼해서 상황이 좀 복잡했어요. 시집살이하면서 풀타임으로 사무실에 나가고 밤새우는 것은 무리였어요. 그래서 서울대 박사 과정을 시작한 거예요. 안 그러면 생각이 끊일까 봐. 또 미친 듯이 디자인을 해봤으니까 더 읽어야 하겠더라고요. 학교에서 보고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읽고 공부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부분이 느껴져서 서울대를 간 거죠.   아기를 낳은 시기도 그때인가요? 아기는 딱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니까 들어서더라고요. 그래서 아기 낳고 키우면서 방법을 모색했어요. 감사한 게 기회가 참 빨리 왔어요. 좋은 분들과 서울건축학교에 참여하기도 하고, 두물머리 워크숍도 참여했고요. 두물머리 워크숍은 백문기 선생님, 조병수 선생님 등이 참여하셔서 양평 숙소에서 직접 그리고 전시했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사람들 많이 만나다가 조병수 선생님이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민)선주 언니와 다른 작업을 하다가 연결된 프로젝트가 동은재 주택이에요 저는 참 감사해야 해요. 마케팅한 것도 아닌데, 교수직이 생겼고 좋은 의뢰인이 연결되어서 사무실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복잡했죠. 아이는 어리고 어른들이 편찮으신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어요.   한국에 들어와서 커리어가 바로 이어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사이 결혼과 출산, 박사 학위를 받고 실무를 시작하셨네요. 박사 논문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친한 친구가 불문학을 해요. 그 친구와 케임브리지에서 같이 그림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같이 초현실주의(surrealism) 미술을 좋아했어요. 친구는 문학으로 초현실주의 시(surrealism poetry)도 좋아해서 언젠가 이 주제로 뭔가 하자고 했는데, 친구는 보들레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썼어요. 저는 초현실주의 건축(surrealism architecture)에 관해서 쓰고 싶었어요. 회화는 초현실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3차원 집에서 이것이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 궁금했어요. 게리의 초기 건물들 그리고 아이젠만의 웩스너 예술센터(Wexner Center for the Visual Arts) 같은 작업과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이 네 사람의 작업을 비교분석 했어요.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면 타운하우스 앞에 가로등이 하나 켜있는데 대낮이잖아요. 언뜻 보면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 같죠. 하지만 가만히 보면 대낮 나무 그늘 안의 가로등 불이 켜져 있는 듯한데, 밤이면서 낮이 공존하는 초현실이에요. 초현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이성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초현실을 그려놓음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매개해 주잖아요. 프랭크 게리의 건축도 초현실주의적인 순간들(moment)이 있는 것 같아요. 부엌 바닥을 아스팔트로 마무리하는 것에서 안이냐, 밖이냐에 관한 이슈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초현실적인 면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같은 초현실이 아니라, 엄연히 익숙한 하늘과 집, 창문도 다 있는데 그것의 조합으로 이뤄진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순간들을 건축에 응용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요소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체(deconstruction)되는지, 다시 조합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슷한 현상들을 보고 싶었어요. 이런 주제에 관하여 실컷 읽고, 게리와 아이젠만의 작업을 직접 보고 건물 몇 개를 선정해서 마그리트와 에른스트의 그림들과 같이 비교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패스 패일로 성적을 바꿀 정도로 잘 못 했던 것을 논문으로 쓴 셈이에요. (웃음) 즐겁게 썼어요.     이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한 것이 있었나요? 어떻게 보면 오히려 너무 복잡하게 생각 안 하기. 이론에서 시작해 형태를 만든다기보다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생각을 전개해요. 게리가 초현실적인 생각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당시 뭔가 실험하고 싶어 한 맥락이 있잖아요. 그 시대에서 느끼는 실험하고 싶은 주제와 담론들, 어떻게 보면 시대성인 것 같기도 해요. 이론과 실무가 양쪽에서 다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담론과 작업을 보고 듣고 하다 보면, 그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를 들여다보게 되죠. 그렇게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탐구할 때에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론가들은 이런 것들을 이론적 배경으로 설명하고요. 제 경우 이론이 앞서면 디자인이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마치 스펀지의 물을 짤 때처럼 다 읽고 받아들이고 있다가, 물이 가득 차오를 때 원하는 방향으로 짜다 보면 거기에 맞는 나만의 디자인, 실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나오는 소재도 중요하지만 매일 신문 읽고 꾸준히 흡수하는(keep up)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것이 먼저라고 얘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새삼 느껴요. 요즘 나오는 건축 잡지를 열심히 봐서 짜깁기하는 것과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습득해서 나오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나. 요즘 그런 밑 작업을 너무 안 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요.   밑 작업도 부족하지만 동시에 한국 건축에 워낙 밑 작업이 될만한 연구가 충분치 않아서 토대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도 많이 보여요.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건축의 근현대 시기를 아카이빙하고 다큐멘테이션하는 작업과 움직임이 있어요.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건축큐레이터나 박정현 건축비평가와 같은 분들이 연구자로서 끊임없이 디딜 공간, 초석을 찾아 나서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의 현대 건축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 토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굉장히 빈약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해요. 옛 분들의 고민과 작업의 깊이는 항상 놀랍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대 미술만 따르며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휘트니 뮤지엄만 가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제대로 이해하려면 메트로폴리탄부터 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논문을 쓰고 나니까 예전에 배웠던 건축 역사 코스가 다르게 이해되는 거죠. 학생 때는 처음 접하기 때문에 해석이 돼서 입력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젊기 때문에 흡수력이 빠르잖아요. 그때 한번 봐놓으면 건축하는 사람은 시각적으로라도 기억을 하거든요. 그런 경험과 이론이 쌓여 작업하다 보면 거기에서 깊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모든 정보를 ‘구글’할 수 있으니까 전문 영역(expert)이라든지 자기의 무지에 대해 너무 자신감 있는 세대가 되어버려요. 전문가 필요 없이 다 내가 전문가이고 서로 다 잘 모르는 게 쿨한 분위기가 되는 게 아쉽죠. 특히 건축 분야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 위험하다고 느껴요. 제대로 많이 보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작업이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요. 기록이 부족해서 그렇지, 한국 근현대건축 또한 활발하고 정열적이었을 것 같아요. 전통건축의 장인들도 왕성하셨을 것 같고, 소수이지만 외국의 변화를 보고 듣고 한국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분들이 계셨을 거예요. 의뢰인일 수도 있고, 화가였을 수도 있고요. 건축 공간에서 느끼는 희열은 전염성이 아주 강해요.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매스로 공간을 구성했던 삼현여고 프로젝트가 거의 초기 작업이었죠? 1999년 작업이었어요. 그때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 조병수 씨, 민선주 씨가 계셨는데, 제가 한국에 나왔을 때 게스트 크리틱으로 불러주셨어요. 그 후, 인연이 돼서 겸임으로 나가다가 교수를 하게 되었죠. 그때 제 학생 아버님이 삼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그 학생이 저와 일하고 싶다고 해서 제 첫 번째 직원이 되었고 그 작업을 같이하면서 김은미 씨가 영입되어서 우리 셋이 삼현교사 프로젝트와 삼현생활관 두 건물을 설계한 거예요. 사무실은 그렇게 시작됐죠.   조병수 소장님과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같이 하셨죠? 하버드 대학원 다닐 때 조병수 선생님이 제 작업을 좋게 봐주셨어요. 리뷰할 때면 본인 수업도 아닌데 와서 들으시더라고요. 정말 고맙고 긴장됐죠. 강화도 우리마을 작업을 의뢰받으시고, 조병수 선생님께서 이건 거의 신의로 하는 작업(Bonafide work)인데 같이 디자인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좋다고 했죠. 아시다시피 정신지체아 시설인데, 저에게 기숙사를 맡아달라고 하시고 본인은 교실을 디자인하시겠다고 해서 우리마을 설계가 나온 거예요. 설계비를 거의 안 받고 했지만, 저에겐 의미 있는 초기 작업이었어요. 완공 후 2001년, 영국 건축지 The Architectural Review에서 주는 Ar+d Emerging Architecture 상을 받게 되어 저에게 많은 용기를 준 작업이기도 해요.    중간에 타일로 외부를 마감한 매스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렴한 마감이어도 나무 소재가 가지는 차분한 공간감도 있고, 원형 외부 공간이 갖는 임팩트가 강렬했어요. 왜냐하면 비가 오면 학생들이 놀 데가 없어요. 없어질 염려가 있어서 학생들이 갇혀 살아야 했죠. 그래서 비가 와도 옥외에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이 가방도 놓고 할 라운지가 필요해 추가되면서 진행되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참 의미 있어요. 원형 데크에서 옥외활동을 하고, 뛰어내리거나 밖에 나가면 안 되니까 창살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해서 제약이 많았지만 그래서 좋은 설계가 나온 것 같아요.   디자인에서 재료 마감까지 많이 고려해서 공사비를 최대한 절감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설계하기로 정한 후,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정신지체아 시설의 기준, 사례들을 연구해서 나름대로 우리마을 설계지침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뢰인의 요구사항들도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런데 예산 안에서 좋은, 지침에 맞는 설계를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은 조병수 선생님께 배웠어요. 모든 것에서 조금씩 빼면 예산이 금방 쑥 내려가요. 예를 들어 마지막에 마감을 합판으로 정했어요. 가장 바깥쪽(top layer)은 외장으로 가능한 것을 썼지만, 그래도 합판이에요. 처마를 꼭 만들어주고 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비용 절감은 많이 되죠. 원형 지붕 재료의 일부도 폴리카보네이트라서 지금 가면 많이 노랗게 변색해있을 거예요, 하지만 유리나 더 좋은 재료를 쓸 여지는 못 되었죠. 또 아이들이 타박상을 입을 수 있어서 마감을 가능한 한 나무로 해야 하는데, 거칠기는 하지만 예산 안에서 해결했어요. 조 선생님과 참 좋은 인연이에요. 제가 활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아까워하시고. (웃음) 그렇게 사이사이에 공모전이나 협업을 한 게 많아요. 민선주 선생님, 고 장림종 교수님과도 협업했었죠.   초기 작업 중에 주택인 동은재도 인상 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떤 부분에 집중하셨나요. 헌 운동화같이 편한 집, 저렴한 집을 원하셨어요. 대지가 길고 좁지만, 두 개의 축을 가진 특성을 의뢰인이 요구하신 프로그램과 맞추어 디자인했어요. 다만 중간에 시공업자의 문제가 있어서, 의뢰인이 저희에게 공사 마무리를 부탁하셨고 사무실의 김은미 씨가 현장을 맡으면서 끝낸 작업이에요. 현장에 상주하면서 마감을 하니 꼼꼼히 끝난 결과물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대지를 이해하는 축들을 찾아서 건물 배치 및 형태를 생각할 때 디자인이 잘 풀려요. 진입, 동선, 전망 등이 정리가 되면서 축들의 사이에서 좋은 공간들을 찾을 수 있어요. 소쇄원을 분석하여 논문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소쇄원을 이러한 축들로 이해할 수 있었고, 구조물과 건축물의 배치를 분석할 수 있었어요.   헤이리 아트밸리에서는 주택에서 상가까지 꽤 많은 작업을 진행하셨어요. 의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단독 건물의 형태로 디자인하여야 했지만, 헤이리 설계지침의 취지인 ‘한 단지로서의 헤이리’라는 목적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헤이리 한스갤러리 이후에 바로 옆에 있는 써니갤러리를 디자인할 기회가 주어졌죠. 연결해서 한 블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기회였고, 독립적으로 각 의뢰인의 목적에 맞는 맞춤 건축물이지만, 옆 건물과 조화로운 결과를 이룰 수 있어서 만족했어요. 헤이리아트밸리의 경우, 블록 단위로 디자인하면 좀 더 조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나란히 위치한 프로젝트들인데 개별적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화음이 안나요.   방주처럼 생긴 헤이리 북카페 프로젝트는 내부에서 본 목조 지붕이 인상적인데, 지붕 아래를 바로 유리로 처리해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게 기억에 남아요. 땅이 그렇게 생겼어요. (웃음) 지붕 부분은 저도 맘에 들어요. 그렇게 하느라 애를 썼죠. 그 프로젝트를 하신 목수가 알로에마임 야외 바를 만든 분이세요. 목공을 참 잘하시더라고요. 토탈미술관에서 이 작업을 보고 좋아서 전시도 해보라고 제안해주셨고, 안양 APAP에도 추천해주셔서 프로젝트를 했죠.     2002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에서 작가로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주제와 제안했던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2002년 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NEXT’였어요. 수디치 총감독의 방향은 진행 중인 또는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건축 작업의 전시로 현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건축적 활동과 디자인 방향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한국관의 총감독이셨던 김종성 교수님은 7팀의 작업을 선정하셔서 전시를 기획하셨고요. 저는 헤이리 한스갤러리 프로젝트를 전시했어요. 건축 모형을 반투명한 아크릴 재질로 만들고, 열 수 있게 제작하여서, 가운데 계단으로 분리되고 연결되는 건물 개념을 설명했어요.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한 사이트 모형을 세워서 전시함으로써 사이트의 이야기도 하지만, 모델을 통해서 보이는 재질의 특성 — 관람객의 눈 위치에서만 투과되는 관점 — 으로 건물이 보이고 건물을 통하여 보이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어요. 건물 모델과 사이트 모델에 각각 소형카메라와 작은 화면을 설치해서, 화면에 화면을 보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의 관찰되는 것과 관찰자(observed & observer)의 관계를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대표작으로 마임 빌리지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에게 마임 빌리지가 갖는 의미가 클 것 같아요. 파빌리온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도 여러 개 진행하셨는데, 처음엔 파빌리온으로 시작하셨나요. 그렇죠.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는 정영선 선생님이 먼저 관여하고 계셨어요. 이곳에 주택을 하나 짓는 제안이 있을 때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부지에 갔는데, 제 생각에는 대지 위치가 주택으로 적당하지 않아서 다른 곳에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런 와중에 기숙사도 짓자고 해서 위치를 잡고, 그리팅가든이 필요하다고 해서 대지 위치를 잡아드렸죠. 그렇게 프로젝트가 늘어가니 정영선 선생님이 기술 좋다고 웃으셨어요. (웃음) 프로젝트의 위치가 적당할 것 같아서 아이디어를 던진 건데 하나씩 실현된 거예요. 어떤 곳은 빈 공간을 놔두고 싶고, 또 다른 곳에는 랜드아키텍처처럼 앞은 정원이고 뒤에 집이 숨어있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 안은 받아들여 지지 않아서 우선 그 위치에 야외스테이지처럼 파빌리온을 만들기로 했어요. 건물 설계, 시공이 진전되는 와중에 이벤트를 할 공간이 필요해서 작은 프로젝트가 먼저 진행되었죠. 정 선생님이 야외 원형극장을 디자인하시면 제가 다과를 할 수 있는 냉장고가 들어간 바를 디자인해서 짓고, 한쪽에서는 건축 시공이 진행됐어요.     마임 빌리지 일대는 말 그대로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콘텍스트 없이 자연 속에 놓이면 오히려 난감할 수도 있을 텐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더 친숙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곳은 원래 연수원 부지였어요. 클라이언트가 조경에 관심이 깊으시고 부지를 하나의 정원같이 가꾸셔서, 건축물의 자리를 잡는데 더욱 신중했어요. 기존의 스웨덴식 목조 건물과 비슷한 건물들을 원하셨는데, 그리팅가든은 현대적인 건물로 제가 좀 고집을 부렸죠. 다행히 그리팅가든 아이디어는 좋아하셨어요. 조금 더 땅과 과감하게 어우러진 랜드아키텍쳐로 다른 건물들을 설계하고 싶었는데, 잘 받아들여 지지 않아 아쉬웠죠. 그래도 그리팅가든은 건물의 특성상 잘 풀렸어요.     그리팅가든은 배치나 주변 자연과의 관계, 글래스하우스에 대한 해석까지 다양한 면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인데요. 설계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팅가든은 연수원에 당도한 손님들이 처음 도착하는 공간이에요. 숙소 열쇠를 나눠주기도 하고 화장실, 휴식 공간 등의 프로그램이 있어요. 제가 ‘Greeting Garden’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손님을 반기는 ‘정원‘으로 설계하고 싶어서였어요. 위치도 단지 초입보다는 버스나 차량으로 정문을 지나 아름다운 단지를 어느 정도 가로질러 중심에 있는 위치를 선정했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넓은 마당에 놓인 하나의 플랫폼(platform)에 올라서고, 사방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원했어요. 유리 상자로 바람과 온도를 조절하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한 판의 지붕으로 비를 막으며, 그 지붕도 위에는 식재를 한 녹색 지붕(green roof)이죠. 화장실과 에어컨 등은 플랫폼 위에 놓인 돌상자, 나무상자, 거울 상자 형태로 표현하고 한 지붕 아래에 놓아서 사방이 틀어진 느낌을 해치지 않으려 했어요. 비를 피하고 온도가 조절되는 공간이지만 정원 일부로 설계하고 싶었어요. 연못의 경계로 놓인 돌, 플랫폼에 놓인 상자들이에요.   조경 작업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CJ 필동 연수원은 박진(Jean Park) 소장님이 설계한 건물이에요. 조경을 맡아달라고 해서 제가 조경가 김용택 씨와 함께 뒤늦게 참여했어요. 엔트리 가든, CJ 마크 식재, 물 정원(water garden), 아트리움, 루프탑과 소나무 공간 등을 디자인했어요. 알로에마임이 땅이 넓은 연수원이라면 이건 도시 한가운데(urban) 있는 연수원이라서 나무와 야생화, 코르텐 스틸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거예요. 각각의 공간들을 분리해서, 코너를 돌 때마다 소나무, 자작나무를 두어 다른 공간에 와있는 변화를 주고 싶었죠. 지붕에서는 남산이 보이는 전망이 좋아서 식재는 야생화로 낮게 하고 남산 자체를 바라보게 했어요.   마임 빌리지는 조경과 협업하는 건축으로, CJ 연수원에서는 건축과 협업하는 조경으로 작업하셨는데, 태도나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나요? CJ연수원의 경우, 건축적으로 손댈 여지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빈 공간 채우기(fill in the blank)였어요. 수종과 코르텐 스틸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연못 가장자리라든지 그 공간 안에서 건물 재료와 맞춰가는 식으로 풀어드리는 것이었지, 과격하게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데크를 더 납작(flat)하게 한다든지 건축가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제안을 해서 그게 받아들여 진 건 좋았어요. 조경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단순히 빈 공간 채우기보다는 나름대로 더하고 싶은 게 있죠.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조경이 들어갔는데, 지붕에 사이프러스를 흐드러지게 심었어요. 잘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여지가 없을 것같아도 재미있는 공간이 생겨요. 시대에도 맞고요.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 같아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가 1987-97년 사이의 한국 건축운동을 주목했는데,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의 움직임도 다루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작업과 분위기는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해외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분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오면서 스튜디오를 통해서 그 에너지와 정보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이끌면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기 체계를 잘 잡았던 것 같아요. 전적인 자유(total freedom)! 학생과 공간이 있고, 큰 설계프로그램은 김준성 교수님이, 정진원 교수님은 행정을 맡으셨고 각 선생님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셨어요. 선생님들은 자유자재로 가르칠 수 있고, 스튜디오 학생들도 열심히 하고 굉장히 좋았어요. 부담 없이 건축 실무를 하면서 스튜디오를 할 수 있도록 겸임 체계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곳에서 선배들을 만나는 것뿐 아니라 국내에서 활동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어요. 제가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그 열정이 다 모여서 스튜디오 크리틱을 하고 전시를 했죠.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스튜디오 시스템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처음이라, 모두 그것을 정착시켜 보자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선생님들끼리도, 학생과도 재미있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참 좋았어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튜디오 공간이 열악했어요.   함께 강의했던 분들과 공유하는 생각과 정보도 많았을 것 같아요. 굉장히 다양했어요. 백문기 선생님, 김헌 선생님, 김헌태 선생님, 토마스 한 등 국내파, 국외파 다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큰 크리틱 마다 외부 건축가분들을 초빙해서 늦는 줄 모르며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여러 선생님이 있다 보니 좋았죠.   여름 워크숍 형식으로 열렸던 서울건축학교에도 튜터로 참여를 하셨나요. 네. 서울보다는 여름에 열렸던 무주 워크숍에 합류했었고, 강의처럼 단편적으로 참여했었죠.   당시 여러 활동을 하면서 한국 건축의 담론이라고 할 만한 이슈가 있으셨나요? 그런 논의는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서울건축학교가 공간 건물에서 수업했을 때인데, 그때는 제가 크리틱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어요. 무주 워크숍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한예종 민현식 교수님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고 이종호 선생님과 의견이 달라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보는 각도가 다른 게 흥미로워요.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어떤 담론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보다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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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① 2006년 이후 꼭 12년 만의 인터뷰다. 봄비치고는 제법 빗줄기가 거셌던 3월, 이태원 아파트 자택에서 박헬렌주현을 만났다.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은 우연히 들은 건축 역사 수업에서 18세기 블레, 르듀의 거대한 상상의 공간에 열광하며 건축을 찾아 나선다. 조경을 탐닉하고 다시 건축 분야까지 전공하면서 얻은 것은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 시각의 확장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연한 태도이다. 초현실주의와 해체주의건축에 대한 관심, 땅과 건축이 갖는 관계 구성과 구축,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 작업과 전시 참여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박헬렌주현은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실험을 이끌었던 일원이자,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건축을 만들어가던 젊은 건축가였다. 2006년 이후 건강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한 이후에도 건축가 박헬렌주현의 대표 프로젝트인 ‘그리팅가든’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부터 최근 <김비서가 왜그럴까>까지, 꾸준히 드라마와 광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간혹 영상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볼 때마다 “천정을 지붕 색으로 칠했어야 했는데” 한다는 건축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남은 갈증을 전해준다. 자신이 직접 리노베이션한 자택에서 여전히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물리학, 조경, 건축   이 집의 인테리어도 초기 작업(1999년)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접이식 문이 인상적이에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절할 공간이 부족해서 만든 거예요. 다행히 이 아파트는 벽 구조가 아니라서 거실과 서재를 구분하는 벽을 튼 거예요. 서재의 책상 앞에 병풍을 치고 상을 놓으면 딱 접이식 문 위치까지 상이 놓여요. 그 앞 거실 공간에 돗자리를 놓고 교회 다니시는 분은 뒤에 서 계시고, 절하시는 분만 앞으로 오면 대충 수용돼요. 평소에는 접이문을 닫고, 현관 쪽 중간 유리문을 닫으면 저 서재는 반-공적인(semipublic) 공간이 되어서 독립적으로 외부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실용적인 공간 활용이네요. 사무실은 2006년에 정리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10여 년 만의 인터뷰네요. 그렇죠? 2006년에 미국에 가고, 남은 일 정리는 2007~2008년까지 한 것 같아요.   1964년에 서울에서 나셨습니다. 아버님이 교육자시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래는 아니지만 영어 선생님이셨어요.   교육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학교라는 분위기, 선생님이 되어 가르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은어머니도 스웨덴 분이셨지만, 유치원 원장으로 몬테소리를 처음 도입하셨죠. 우리 집은 할머니가 더 활동적이셨어요. 교육 열정이 많으시고 여자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저에겐 할머니가 큰 롤모델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도 어렸을 때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신여성이었죠. 자전거 타고 스타킹에 하얀 드레스 입고, 그런 사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하셨겠네요. 제 기억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보다 더 바쁘셨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도 아들보다 계속 할머니하고 지내시길 원했고. 가부장적인 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집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집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셨고,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해 그곳에서 시집살이하셨어요. 아빠가 둘째 아들이셨는데, 셋째 아들 내외분도 거기 계셨고, 사촌들도 있었어요. 대가족이죠. 집은 큰 기와집이었어요. 종로경찰서 대로변 쪽으로 기와지붕을 한 2층 벽돌 건물이 더해졌는데,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안쪽 한옥에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해요. 한옥은 문간방 있는 옛날집이니라 옛날식으로 대문, 중문, 사랑채, 안채로 되어 있고요. 원하시는 대로 개조하셔서 앞은 한옥인데 뒷면은 복도로 다 연결해서 화장실도 붙이시고 부엌도 붙이시고, 희한하게 개조가 된 한옥에 벽돌 상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내신 건가요? 관훈동 일대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많이 남아 계실 것 같아요. 초등학교 2~3학년까지 살았죠. 그러고 나서는 진짜 계단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인사동 생각이 많이 나요. 그때는 인사동에 차가 못 들어가서 똥지게로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하는 좁은 골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그 골목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도약국. 아프면 늘 수도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인사동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뒷길의 도시 구조(Urban fabric)는 아직 있어요. 옛날 같지는 않지만요.   당시 인사동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고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는데, 그 동네의 인상도 남아있나요? 대학 방학 때, 한국에 나오면 관훈동 집에 있었어요. 그제서 고미술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 많이 들어갔죠. 그때는 오래된 표구사들이 참 많았어요. 어머니께서 표구할 게 있으시면 같이 따라가서 비단 구경도 하고 그랬는데 다 없어졌어요. 요즘 가면 인사동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 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하와이에는 1978년에 갔어요. 그때가 중2 때였어요. 처음에는 식구들이 다 같이 하와이로 갔다가,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시게 되었어요. 저희는 한국에서 다 자퇴하고 하와이에서 학교를 시작한 상태라 애매하잖아요.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로 바뀐 거죠. 하와이에 살 때는 지루했죠. 사실 휴양지가 은퇴한 분들에게는 좋은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루면 섬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곳이니까요. ‘나는 눈 내리는 곳으로 다시 갈 거야, 대학은 서부도 안 본다, 동부만 본다.’(웃음) 그렇게 되었죠.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없으셨나요? 있었죠. 다행인 것은 하와이에는 동양인이 많아요. 영어를 하지만 동양인이었고 하와이 사람들은 굉장히 따뜻했어요. 하와이에서는 가족과 같이 있었고, 모든 게 느리고 다 웃어주고, 고등학교도 작은 학교로 가서 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대학교에 갔을 때 서양인이 더 많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면서 미국,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전공이 물리학입니다. 건축, 설계라는 분야와 물리학은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데,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건축을 몰랐어요. 수학, 과학을 잘했고요. 물리가 진짜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물리 선생님이 캘리포니아의 천문학 캠프에 가보라고 팸플릿을 주시는 거예요. 본토에 가보자 했죠. 비교하자면 거제도 섬에서 서울도 아닌 부산에 가는 거잖아요. (웃음)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게 좋았어요. 그래서 더 물리학에 빠졌고, 고등학교 4학년 때는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기 때문에 하와이주립대(UH)에 가서 수학과 물리과목을 더 들었어요. 재미있더라고요. 하버드대학교에 갔을 때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물리 공부만 생각했어요. 다 이과 코스에 교양과목만 넣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하버드대학에서는 다양하게 해보라는 분위기가 있어요. 너무 한쪽만 파지 말고 ‘뷔페에서 다 먹어보고 나서 싫은 거 좋은 거 가려보라’는 조언이 좋았죠. 그래서 건축 역사 수업(History of Architecture)을 들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에드워드 세클러 교수라고, 빈(Vienna)에서 오신 역사학자였어요. 아인슈타인처럼 중력을 따르지 않는 머리와 커다란 안경을 쓰신 분이었는데, 옛날 유리로 만든 슬라이드를 보여줬어요. 유리 슬라이드는 해상도가 참 좋아요. 특히 크게 확대했을 때, 엄청났죠. 그 슬라이드들을 프로젝터 두 대로 계속 보여주면서 강의하시는데, 제가 완전히 넘어갔어요. 그때 블레(Etienne Louis Boullee, 1728~99년), 르듀(Claude Nicholas Ledoux, 1736~1806년) 등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의 작업과 앙리 라브르스트(Henri Labrouste)의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 같은 건물이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그런 건물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서울에서 하와이에 가서 살다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교 건물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서 펼쳐지는 건물과 상상의 공간들이 너무 좋아서 이 코스를 들어야겠다 결심했죠. 신청해서 가보니 GSD 대학원생과 같이 듣는 코스였어요.   대학생도 같이 들을 수 있었나요? 과목은 대학원 코스였는데 학부 학생들이 같이 들을 수 있었어요. 뭣도 모르고 좋으니까 들어간 거죠. 그곳에 박승홍 씨, 고 장림종 씨 다 앉아 계시더라고요. 한국분들 같아서 인사하고 제가 건축이 재미있다고 하니까 놀러 오라고 하시고, 놀러 가니까 당시 GSD에서 학생으로 계셨던 서혜림 씨에게 저를 소개해주고. (웃음) 서혜림 씨는 졸지에 저를 데리고 구경시켜주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 코스의 중간고사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선생님께 중간고사를 못 본 것 같다고 아무래도 패스 패일(pass-fail)로 해야겠다고 이야길 했죠. 왜냐하면 그런 시험을 처음 쳐봤거든요. 성적을 보시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사인을 해주시는 거예요. (웃음) 그 때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패스 패일이니까 패일은 안 하겠지’ 하면서 즐겁게 수업을 들었어요. 그다음부터 전공을 바꾸려고 했는데, 당시 하버드 학부에는 건축전공이 없었어요. 물리학 전공으로 졸업을 하지만 건축 쪽으로 대학원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대학원에서 같이 듣는 건축 역사 코스를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학부에 시각 환경 스터디(Visual Environment Study)가 있어서 비쥬얼 아트 분야 과목을 들으면서 신이 났었죠.   물리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것도 흥미롭지만,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학 석사도 받으셨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같은 시점에 제가 물성물리학 연구실(Material Science Lab)에 가서 지도교수님 밑에서 물리학 개별 연구(independence study research)를 했어요. 그 교수님은 정말 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고, 연구실에서 사시는 거예요. 물론 물리가 좋았지만, 교수님처럼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게 되니까, 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알았죠. 거기서 결단을 내렸어요. 대학교 3~4학년 사이 여름에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 조경 분야가 적성에 맞는지 시도해볼 수 있는 ‘커리어 디스커버리’ 여름학교에 응모했어요. 그때 제가 건축이 좋다고 난리니까 기숙사를 책임지시는 교수님이 자신이 아는 여자 건축가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기숙사에서는 학생이 쿠폰을 내면 선생님을 기숙사 다이닝룸으로 초대할 수 있었어요. 비싼 식사는 못 하니까, 만날 방법을 가르쳐주신 거죠. 그런데 소개해주신 분이 조경 교수님이셨어요. 제 마스터가 잘못 아셨던거예요. (웃음) 그때 그분이 조경에 대해서 완전히 전도를 하셔서, 커리어 디스커버리는 조경 분야로 갔어요. 거기서 교수님들이 제 작업을 좋아해 주시고, 원서 내라고 해주시니 즐겁게 조경 프로그램으로 GSD를 간 거죠. 가서 보니 건축이 또 있는 거예요. 하면 할수록 역사나 여러 체계를 보았을 때 건축을 같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다시 지원했죠. 건축을 2학년(second year)부터 했는데 당시에는 두 가지 학위를 같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제가 제안을 해야 했어요. 필수과목(required subject)은 다 하되, 선택과목(elective)의 경우 겹치는 것을 같이 인정해주면, 조금만 더 하면 되었죠. 그런 식으로 제안하고 허락을 받아서 공동 학위(joint degree)를 할 수 있었어요.   묘한 인연이 이어졌네요. 그렇죠. 대학교 3학년 때는 건축 코스를 패스 패일했는데, GSD에서는 성적이 좋아서 상을 받고 졸업을 했어요. (웃음) 처음엔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하고 사인을 해줄 정도였는데, 배우고 터득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낙심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리를 좋아해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 조경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전혀 다른 전공을 공부하면서 물리에 접근할 때의 사고방식과 창작 과정의 사고방식에 차이를 느끼셨나요? 테크닉컬하게 배운 면이 직접 응용되는 건 구조 계산을 빨리하고 숫자에 익숙하다는 것과 공간 개념이지만, 큰 부분이 아닌 것 같고요. 중요한 건 한 분야(field)를 깊게 공부하고 나면, 문제 해결 방식으로써 한 방법은 터득했다는 거예요. 한 가지 규율(discipline)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하면, 거기에서 배운 디스플린이 다른 분야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적용되어서 훨씬 빨리 풀어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전공이라고 해도 점프가 가능하다고 봐요. 문제 해결방식을 알고 다른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GSD 같은 곳에서는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싶어 하죠. 그래야 같은 스튜디오 프로젝트에서 같은 선생님이 가르치더라도 전혀 다른 접근이 나오니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각도가 더 달라지니까요.   건축의 경우 도면을 그리거나 읽어내는 등 스킬이 필요한 분야라서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너무 모르고 가서 디테일 같은 것은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많았죠. 정말 잘 그리는 선배를 보면 입이 벌어지는데, 그런 건 열심히 물어보고 어깨너머로 연습하면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미술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미적인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어요. 비례와 시각적인 감각은 있어야 해요. 전공을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그동안 못 봤던 건물 보러 다녔죠. 더 잘 그리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할 것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때는 포스트모던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잖아요. 당시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게 큰 영향을 준 건 라파엘 모네오 교수님이에요. 그때 GSD 건축과 학장이셨어요. 그분이 하신 건, 정말 다양한 건축가를 학교에 불러 모은 거예요. 스페인 사람만 부른 것이 아니라 당시 논의가 되고 있던 사람, 대립점에 있는 여러 사람까지요. 포스트모던과 같은 담론에 맞는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로버트 벤투리도 있었고, 헤르초크 드 뫼롱이 초기 작품을 소개하는 렉쳐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피터 아이젠만의 웩스너 센터(Waxner Center) 같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 작업도 많이 나올 때였고 자하 하디드의 홍콩 프로젝트도 ‘와 이럴 수가!’하며 보았죠. 로비 전시장에는 안도 다다오의 초기 주택 청사진 도면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모네오가 준 첫 번째 과제는 학교에 있는 옛날 벽돌 건물을 실측한 후 도면 작업을 하는 것이었어요. 19세기의 미학(aesthetic)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모네오는 그 시대에 건축가는 어떤 그림이 필요했고, 그 그림을 통해 그때의 건축물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기회를 준 거였어요. 굉장히 전통적이고 촉각적인(tactile) 벽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벽 뒤에 있는 디테일을 상상해서 그려보라고 했죠. 그래서 세 사람이 한 팀이 돼서 큰 테이프자로 건물을 직접 재면서 입면을 그려야 했어요. 그리고는 데리다, 푸코의 철학을 말하는 헤이즈 교수의 강의실로 뛰어가고요. 매우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론도 이론이지만 건축은 지어야 하는 공간임을 체득한 게 참 좋았어요. 매우 개념적이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힘들게 만들어내는 조형 작업인 스튜디오, 또 현실적인 건축물을 도시와 사회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스튜디오 등 스튜디오도 다양해서 여러 접근(approach)을 체험했어요.   당시 함께 공부하셨던 한국 건축가분들도 많으셨죠. 조병수 선생님은 도시 계획(urban planning)에 계셨어요. 제가 초년병으로 논문 도면을 보조했던 분이 민선주 선생님, 박승홍 씨는 제가 너무 초보라서 그림에 손을 못 대게 하셨어요. (웃음) 서혜림 씨, LA에서 활동하시는 앨리스 김, 조경 쪽으로는 박도경 씨가 계셨고. 현재 조경가로 활약하는 김미경은 제 룸메이트였어요.   그 시기에 같이 작업하셨던 분들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입니다. 유학을 본격적으로 가게 된 세대라서 동시대의 건축 흐름을 책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얻고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요. 네, 굉장히 운이 좋았죠. 한 학파가 아닌 다양한 생각과 접근법을 가진 건축가들과 공부할 기회였기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죠. 물론 발품을 팔아서 열심히 보러 다니기는 해야 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빨리 흡수할 수 있던 게 좋았어요.   반면에 그 세대는 동시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한국성이라는 화두가 나오기도 하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건축은 뭐가 특징이지?’라는 고민을 결국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혹시 선생님은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개별적인 관심사를 끌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한쪽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저의 경험은 한옥에서 산 경험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찰이나 고택 정도이지만 깊게 연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는 윤장섭 교수님께서 은퇴하셨을 때라서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공부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사람, 한국 사람을 다 떠나서 그냥 짬뽕 된 사람으로 저 자신을 편하게 받아들였어요. 요즘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태어나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컴퓨터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세계인이라는 공감대가 생길 수 있죠. 한국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서양 공간이든 한국 공간이든 내가 좋아하는 공간,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었을 때 그걸 바라보고 배워서 응용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분류하지(categorize)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외국에서 생활하고, 교육 과정도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그 경계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당시 조경과 건축이라는 분야는 경계가 명확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둘 다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한 지붕 세 가족이었어요. (웃음) 도시 계획, 조경, 건축 다 달라요. 다 그 분야가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다 같이 시작해야 한다고 하죠. (웃음) 건물을 지어놓고 조경을 채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건물 다 짓고 나서 어반 플래너에게 작업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건축과 조경을 동시에 했던 두 번째 학생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복수전공이 많아져서 나아졌대요. 아직 과목이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은 다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양쪽에 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요. 팀워크로 디자인한다는 게 원래 힘들어요. 다만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둘 중 하나의 전공(specialty)은 있어야 해요. 제 경우, 건축 쪽으로 더 했고요.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를 할 때도 저는 건축, 조경 다 전공이었지만 건축 쪽으로 더 작업했고요. 예를 들어 그리팅가든 뒤 연못을 디자인할 때 과감하게 연못을 넓혀서 다리를 제안하신 분은 정영선 선생님이셨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결과물이 훨씬 더 잘 나오는 거예요. 건물 옆에 있는 수목도 선생님 생각이 너무 잘 맞았고, 연못 물도 다리 쪽은 탁한 물이고 반대편은 맑은 물인데, 그런 디테일은 전문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죠. 그렇게 협업해야 해요. 학교에서 기초를 습득하고 실무에서 같이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 되기까지 노력을 해야 하죠.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개 다 잘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하나의 전공을 가지되 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업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구조도 건축을 알아야 아름다운 구조가 나오고요.   대학원 작업 중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게 있나요? 사무엘 베켓의 연극 ‘Text for Nothing’의 무대장치(stage set)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기억나요. 그 연극에는 무대 장치가 명시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읽고 무대 장치를 제안하는 과제였어요. 모래 위에서 배우 한 명이 나와서 모놀로그를 하는데, 저는 ‘무대‘의 영역을 1막, 2막, 3막,…, 막마다 배우가 모래에 발자국으로 그리면서 걷는 길(path)이 무대가 되도록 했어요. 선에서 타원형, 다시 원으로 가는 개념이죠. 베켓의 이 연극은 초현실적(surrealism)이잖아요. 자신이 여기 있으면 저쪽에서 자신의 손이 막 가는 게 보이는, 자신이 하나의 존재인데 분리되어 보이는 내용처럼, 타원의 초점(foci)이 가장 멀었을 때는 선이고, 같았을 때는 원이지만 그 사이에는 여러 모양의 타원이 나오는 특성이 이 연극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타원의 점과 두 초점(foci)과의 거리의 합은 항상 같기 때문이죠. 무대 초점(foci)에 위치한 두 조형물은 막이 바뀌며 무대가 다시 그려질때마다 움직이고, 관중이 동그랗게 앉아있으니까 관객의 관점에서 연극 도중 한번은 겹쳐 보이게 돼요. 그 보이는 순간들이 원과 타원이 되는 임계점(critical point)과 맞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떨어져 보이고, 어느 순간은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죠. 평이 좋았어요, 저도 그 작업이 재밌었고요. 한국의 것을 해보겠다고 시도한 졸업논문 작업도 있었어요. 오행을 공부해서 나름대로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보고, 개념 모델을 만들어, 졸업 작품의 시작으로 삼았어요. 이 초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도 스튜디오를 했어요. 학생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토탈미술관에서 제가 건축 전시를 큐레이팅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토마스 한이 이 아이디어를 빌려서 작품을 내기도 했죠.   대학원 작업 초기 작업이 완공된 작업보다 표현이 더 강렬한 것 같아요.  대학원 가서 그렇게 밤을 많이 샌 적이 없어요. (웃음) 샌드위치 하나 사면 그게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었죠. 당시에 3D 프린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손으로 잘라서 풀칠하고. 서혜림 선생님이 모델용 종이 껍질 벗겨서 페인트칠하는 걸 가르쳐줘서 칠하던 기억도 나고, 재밌었어요. OH
Report Report 아이뜰 유치원, 손진 아파트 단지들에 의해 잠식된 평지들 중 가까스로 남겨진 몇 안되는 계곡의 북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뜰 유치원입니다. 도회적 느낌과 자연속에 녹아드는 감성이 공존하는 아이뜰 유치원, 답사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보세요. 사진_오픈하우스서울
OpenStudio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유현준 10월 29일 2:00PM
OpenStudio 삶것, 양수인 10월 29일 2: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