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최욱을 만나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 2017에서는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소개하고 이를 직접 방문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자리다.
올해의 특집은 건축가 최욱. 현대카드 HQ3,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디자인 라이브러리, 1964빌딩, 백남준 기념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등 총 8개의 대표작 오픈하우스와 함께 건축가 최욱의 프로젝트 오픈하우스 중 4개를 참가한 분들에 한해 신청을 받은 후 초청자를 선정하는 부암동 주택 오픈하우스가 이벤트로 진행된다.
한국 건축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기단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 건축의 내외부를 구축하며, 1소점 투시도를 벗어나 공간의 편안함, 빛에 대한 컨트롤, 외부와의 소통을 공간에 담아내려는 작업을 펼쳐내고 있는 건축가 최욱의 작업.
본 인터뷰는 최욱이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에서 건축가로서 갖는 태도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 일상성에 주목하고 깨어있는 개인이고자 한 건축가의 생각을 나누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진행되었다. OHS
합리주의적 태도와 비평으로서의 역사
사무실 건물의 외관은 평범하지만 건물의 앞뒤가 모두 녹음을 마주하고 있어요. 이곳은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2000년도에 독립해서 처음 단독으로 차린 사무실은 한옥이에요. 그러다가 광화문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최대 수용 인원이 15명이라 작았어요. 사무실을 본격적으로 찾는데, 세 군데를 찍었어요. 신문로 경희궁터 쪽, 유엔빌리지 근처 단독주택, 그리고 연세대 동문 근처. 공통의 컨텍스트는 ‘도심인데 자연 경관이 있는 곳’이에요.
특히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사이는 구글 지도를 보고 확신을 했어요. 된다.(웃음) 그래서 직원을 풀어서 여러 곳을 알아봤죠. 그렇게 발견했는데 처음에 두 층으로 시작했다가 임대공간이 날 때마다 확장했어요.
건물의 앞뒤 창문으로 녹음이 둘려싸여 있어서 전혀 서울 한복판 같지 않아요. 장소를 보는 안목이 다르다보니 건축가들은 좋은 장소를 잘 찾아내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자연이죠. 학교 부지에 언덕배기이니까. 부동산은 안 맞는데, 아지트는 잘 찾아요.(웃음)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렸을 적에 집에서 주로 생활을 했어요.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그러다보니 편안한 의자가 주는 편안함이 정말 좋았어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장난감도 만들어보고, 나무도 만져보고. 초등학교 들어가서 발견한 단어가 목수였어요. 건축가라는 단어는 몰랐고. 처음 쓴 장래 희망이 목수였죠.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가라는 단어, 또 무대미술이나 자동차 디자이너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건축가도 굉장히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대학 진학 때 내가 가려는 과가 정말 건축과가 맞나하는 의문에 많이 갈등했어요. 건축은 사고와 철학이 같이 갈 수 있는 학문인 것 같았는데, 당시 한국의 건축 교육이 과연 그럴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를 별로 안했거든요. 그런데 두 권의 책을 읽었어요. 지오 폰티(Gio Ponti)의 『건축예찬』과 S.E 라스무센(Steen Eiler Rasmussen)의 『건축 예술의 체득(Experiencing Architecture)』. 내용을 완벽히 숙지하지는 못했지만 둘 다 건축이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엔지니어링이나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 느끼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직업인 것 같았어요. 특히 라스무센은 ‘리듬, 소리로서의 건축’에 대한 이야기했거든. 그래서 건축과 중에서도 홍대를 선택해서 들어갔는데, 바로 후회했지. 다시 미대를 가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미대를 가신다면 순수미술을 생각하신 건가요?
그보다 영화나 무대미술, 자동차 디자인을 했을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서는 미대로 입학했다가 다시 건축으로 옮긴 거예요. 미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했었죠. 이탈리아에는 영화 찍으러 갔었거든. 영화감독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군대가 미필이었어요. 학교를 빨리 졸업해야 군대를 안 가는데 이탈리아는 영화학교가 없더라고. 영화과는 아예 없어요. 이탈리아에서 학교는 학문을 하는 곳이고, 영화감독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 일종의 개인의 영역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였어요 지금도 그렇죠.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으셨어요?
영화감독, 무대미술은 내가 주인공이 안 돼도 되니까요.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거든.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건 좋아했어. 생각하기에 그 학문들은 내가 주인공이 안 돼도 되지만 주변에 사람들은 많아요. 지금 우리 사무실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닌 분위기거든요. 나서지도 않고. 비슷해요.
이웃이죠.(웃음)
이웃이지.(웃음) 이웃에 끼어들어서 같이 작업하는 분위기, 그게 내가 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가 건축계에서 말을 아낀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나서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지금은 사무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고, 이런 인터뷰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게 효율적일 거 같아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영화에서 건축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베니스 건축대학은 같은 시기 다른 학교와 어떤 점이 달랐나요.
그 시절 베니스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 하나였어요. 당시에는 학교가 좋은 줄을 몰랐어요. 사촌형님이 대학에 있었는데, 베니스 건축대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대학이라고 추천하시더라고. 베니스는 상상도 안 해봤는데. 그 때 내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1974년도인가, 중2 때 본 스포츠신문에 세계윈드서핑대회에서 1등한 베니스 미대 여학생 인터뷰가 실렸어요. 학교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더니 예술학교가 섬에 있어서 배를 타고 들어간대. 나에게 이 장면은 환상이었어요. 사촌형이 베니스에 알도 로시가 있다고는 했지만, 어렸을 적에 느꼈던 그 환상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당장 간다고 했지.
그 당시에는 소련, 중국도 다 건재했을 때인데, 막상 가보니 이 학교가 유럽 내에서 대표적인 좌파학교였어요. 당시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좌파였고, 건축가들 중에도 좌파가 많았어요. 그래서 만프레도 타푸리, 알도 로시, 비토리오 그레고티 이런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어요. 그때는 이탈리아 건축계 이론이 상당히 강했거든요. 그 학교를 중심으로 피터 아이젠만, 제임스 스털링, 마리오 보타, 알바로 시자와 같은 건축가가 학교에 와있었죠.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혜택을 받았죠. 황금기가 살짝 지날 무렵에 그 학교에 있었으니까.
건축을 설계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토대를 흡수한 건가요.
당시에는 베니스 건축대학이 건축 설계 학교로도 유명했어요. 타푸리 때문에 이론이 강했고, 희한하게도 철학의 중심지가 철학대학이 아니라 베니스 건축대학이었어요. 타푸리를 중심으로 인문학자들을 많이 모시고 왔어요. 포스트모던이나 이론을 제공하는 프랑코 렐라, 마시모 카차리, 스콜라리 같은 사람들이 학교에 포진해 있어서 역사, 미학, 건축 수업이 어마어마했어요. 그리고 베니스 건축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도시 계획과가 생긴 곳이에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분위기를 경험한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소위 말해서 합리주의자인거예요. 논문 하나 복사하는데 4개월이 걸렸어요. 논문은 출판되기 전의 학문적 업적이잖아요. 아직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저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복사를 못하는 거예요. 어떤 논문 중 몇 페이지를 복사해야 하는데,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원저자를 찾으래.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잖아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는데. 그래서 4개월 만에 그 사람을 찾아서 3페이지를 복사했어요. 그런 게 합리주의자였죠. 그렇게 엄격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려고 했던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원칙이 몸에 베이셨겠네요.
합리주의자의 태도를 봤죠. 내가 영향을 받은 건 그런 태도 같아요. 알도 로시같은 사람들 때문에 신합리주의자들이 많은 학교라고 했는데, 막상 신합리주의자들 중 이론이나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어요, 이 사람들은 현실을 이야기 했어요. 대신 엄격한 태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그리신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포스트모던 교육이 한창이었던 시대에, 보자르 시대에도 그리기 힘든 클래식한 정교한 그림을 그리셨더라구요. 역사와 디자인을 같이 배우신 거죠?
그렇죠. 역사도 타푸리 영향으로 ‘비평으로서의 역사’였던 것 같아요. 우리 때에는 찰스 젠크스가 유명했었거든요. 젠크스 같으면 연대기순으로 배우잖아요. 그런데 타푸리식의 서술은 연대가 없어요. 문제의식이 있죠. 문제의식이 있다는 것은 도시가 이런 문제가 있는데, 도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미국 도시를 봐야 하고, 중국 도시를 봐야 하고, 유럽 도시를 봐야 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비평적인 의식에서 분석이 되는 거죠. 연대기순으로 배운 적은 없다구요. 다른 교육을 받았던 것 같아요. 굉장히 비평적인 관점에서 역사 해석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카차리같은 사람들은 철학자이기도 하고 미학자잖아요. 이탈리아에서 개념을 추구하는데 어원인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중국어처럼 다의적으로 해석이 돼요. 그 어원을 새롭게 해석하면 현대의 언어까지 새롭게 해석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미(beauty)의 정의도 과거로부터 돌아가서 라틴어, 그리스어부터 시작해서, 칸트의 정의가 있고 거기서부터 현대의 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전개돼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수업은 다 없어졌죠. 현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OHS
진행 임진영, 최춘웅
사진 정유진
+ 인터뷰 ②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홍보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참고문헌: 와이드건축 통권 55호 건축가 최욱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