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공성, 구축술, 기하학의 중첩
춘원당의 경우 한의원의 오랜 역사, 종로의 복잡한 뒷골목, 모텔 밀집 지역에 대응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특히 한약방의 탕전기를 끄집어내자고 설득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건축가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통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획자로서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으로 접근하는 건 제가 잘하는 일인 것 같아요. 다만 제안을 할 때는 프로젝트가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해요. 결정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니까요.
처음 탕전기를 전면에 내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클라이언트가 도면을 보고는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힘드니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셨어요.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굉장히 깜짝 놀라셨다고 해요. 당시 저는 프로젝트가 날아갔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은 열광하든 아니든 둘 중 하나지, 중간의 타협 지점이 없는 아이디어니까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 ‘나에게도 힘든 결정인데,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라고 하셨어요. 그분도 이해하신 거예요.
그 안은 시각적 투명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투명성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 무렵에 한방계가 필요로 했던 것인데, 사회적으로 한방에 대한 불신이 커질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도 ‘이것은 우리 집안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7대째 한방을 해 오던 집안이었으니까요. 일단 안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그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보이는 건 세련된 기계지만, 실현하는 과정은 아주 지난했어요. 그 약 다리는 기계, 즉 탕전기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원래 모습은 그리 비주얼하지 않았어요. 탕전기를 만드는 회사가 대구에 있었는데 거기 분들이 서울에 오셔서 우리 도면과 그분들 제작도를 펼쳐놓고 함께 회의했어요. ‘이 재료 바꿀 수 있냐, 이거 이렇게 바꿔도 되냐’ 하면서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계가 갖는 자연스러운 거친 느낌, 날 것의 느낌을 없애거나 패키지 디자인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보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시각적 감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지금도 제가 건축가로서 갖는 큰 강점은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서 그런 걸 활용하지 못하면 건축가로서 제 능력의 일부만 쓰는 거죠. 본인이 뭘 하고자 하는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심지어 답도 정해져 있는 건축주에게는 그냥 친절하고 효율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별로 자신이 없고요.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한 건 좋은데, 다만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지는 열어줘야죠. 그래야 건축가가 잘릴 각오를 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경우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도 있었죠. 훈련하는 공간과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는데, 그런 형식은 선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제안은 받아들이는 건축주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합니다. 아이디어가 작동되어야 하니까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기회를 많이 얻길 원해요. 처음에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즉흥적인 생각이나 감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관찰과 일련의 합리적인 생각 끝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게 구현이 되면 결과가 즐거운 거죠.
결국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건축이란 것도 연장하면 기계인데, 이 기계를 어떻게 인간적으로,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느냐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그 두 건물에서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또 오기를 바라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처음으로 광활한 대지에 나갔다’는 표현으로 그 프로젝트의 성격을 설명하셨죠. 조건 많은 도심 골목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일종의 직주근접 프로그램인데 프로젝트 초기의 접근 태도, 그 공간을 만들어갈 때 주의 깊게 고민하셨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사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두 배의 시간이 걸렸어요. 설계를 두 번 했거든요. 천안 시청 옆 부지를 정해 설계를 마치고 착공 직전까지 했다가, 부지가 바뀌었어요. 사실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앞이 캄캄하긴 했어요.
다행히 몇 개월 후 기회가 다시 왔어요. 그때 이전 설계안을 다시 보면서 내적 크리틱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좀 더 객관적으로 내 설계를 보게 된 거죠. 보통 내 설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순간, 건물은 이미 지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머릿속에서 원래 설계했던 건물의 이미지와 생각의 잔상이 남은 상태에서 다른 대지에 설계하니까 또 다른 생각을 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현대캐피탈 쪽에서도 당연히 원래 부지에 설계했던 내용을 조금 손봐서 새 대지에 잘 앉힐 거로 생각했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뭔가 미진한 거예요. 실무적으로야 효율적일 수 있고 세부적인 어휘(vocabulary) 같은 것은 물론 가져올 수 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개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단면을 보고 있었어요. 배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스포츠이다 보니 코트의 천장이 높아야 합니다. 최소 8m, 보통은 16m 정도 있으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코트 주변은 그렇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요. 그러면 거기다가 숙소를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이렇게 코트와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면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다 보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주변에는 발코니석이 있는 것 같은 구조가 되더라고요.
훈련공간과 숙소가 한 건물에 있는 것에 대해 사용자의 부담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나왔을 것 같아요.
그 안을 제안했을 때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은 김호철 감독님이셨어요. 본인과 코치진의 가장 큰 고민은 선수들이 이동하면서 감기 걸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운동능력은 좋으나 의외로 면역력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면 심리적으로 좀 답답하고 압박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우려하셨죠. 그 부분은 저희도 고민하던 내용이라 저층부는 구심적으로 풀지만, 상층부는 주변 경관이 좋으니 밖을 향해 발코니를 내고 원심적으로 풀려고 생각했어요. 숙소에 있는데 코트에서 보이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구심에서 원심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건물 짓고 나서 비평 글을 몇 번 받았는데, 예상대로 판옵티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전형적으로 도면만 보고 도상학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죠. 그 건물을 직접 경험해봤다면 판옵티콘이라고 이야기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판옵티콘은 중심에서는 주변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중심이 안 보여야 하거든요. 즉 감시의 시선이 한 방향이어야 해요. 하지만 여긴 시선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공간이라서 상황이 다르죠.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체육계 분들과 인연이 생겼는데 김성근 야구 감독님께 이 건물 도면과 사진을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제게 ‘스포츠 시설 설계를 안 해보셨죠?’라고 묻더라고요. 이게 첫 건물이라고 했더니, 어쭙잖게 경험이 있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뭔가 근본적인 걸 생각한 결과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관습적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코치진의 고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물론 저도 매우 반가웠어요.
처음에 선수들도 이 안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선수단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한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내가 집과 사무실을 합쳐 산 지가 10년(지금은 16년)인데, 그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직업은 70, 80세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스포츠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대 40세면 은퇴한다. 프로 생활이 길어 봐야 십몇 년 남짓이다. 그동안 힘들게 선수 생활 해서 아주 좋은 결과를 안고 사회로 돌아가는 것과 인간적으로는 재미있게 살았는데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전자를 원할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리고 이 설계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최종 판단은 구단에서 할 테니 저는 최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전달했다고 했죠. 지금은 그 건물을 어떻게 쓰냐 하면, 합숙하건 말건 선수 개인의 자유에요. 지금의 최태웅 감독님이 그렇게 풀어줬어요. 그런데 본인들이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가 김종성 건축상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거대 공간을 싱글 레이어로 지지하는 기술적 성취도 있었죠.
네, 대각선 방향으로 50m에 달하는 거대한 지붕을 트러스 없이 싱글 레이어(single layer)로 해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구조 엔지니어 황경주 교수(서울시립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죠. 당시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와서 그동안 자기가 해온 일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체육 시설 프로젝트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제가 제안했어요. 황경주 교수와는 통인시장 등 다른 프로젝트도 몇 개 했었는데 이분과 같이 일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마치 건축가하고 이야기하듯이 하면 되는데 다만 이분은 계산을 할 줄 알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지붕 말고도 36m 길이의 벽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조 시스템들이 총망라되는, 구조의 역할이 큰 건물입니다. 저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건축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을 했고요. 아마 그런 점에서 김종성 건축상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나 합니다.
최근에야 깨달은 게 있는데, 이 건물의 레퍼런스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중정식 건물의 역사적인 선례들이 염두에 있었어요. 루이 칸의 필립스 엑세터 도서관이나 군나 아스플란트의 스톡홀름 도서관, 심지어 비잔틴 건축인 성 소피아 성당, 중세의 성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아마도 가장 심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김종성 선생님의 작품인 <올림픽 역도경기장>이었건 것 같습니다. 거대 경간을 해결하는 방법, 하중이 전달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단순한 외관 속에 복잡한 기능을 담는 과정 등에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대한 오마주 적인 측면이 있어요. 같은 스포츠 시설이기도 하구요. 우연 같은 필연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제가 여전히 모더니즘이라는 큰 흐름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의 기획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신가요?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제안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칼을 쥐여주고 내 목을 들이미는 거예요. 일반적인 디자인은 ‘이거 어떠세요, 저건 어떠세요’라고 제안할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획은 선택되느냐, 잘리느냐인 거예요.
이런 태도는 교보생명의 신용호 (1917-2003) 회장님에게 배웠어요. 제가 개업하기 이전,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실의 현지 법인장을 할 때인데, 회사의 주된 고객이 교보생명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저를 사전에 교육하셨죠. 그분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요. 다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황두진 소장이 직접 가서 부딪히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에 온 이후에 신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한번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김태수 씨가 믿고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냐’ 그러셔서 ‘네, 그렇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1980년대에 지은 교보생명 천안연수원이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전면 리노베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셨어요.
그 프로젝트를 서울 사무실과 미국 사무실이 같이 하는데, 강당과 공용공간은 미국에서 김태수 선생님이 하시고, 숙실은 제가 서울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예전 설계 당시에 김태수 선생님은 기본 계획을 하시고 숙실 등 세세한 것은 교보에서 상황에 따라 현지에서 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에 평면이 좀 이상했어요. 각 방의 화장실이 방 가운데 있어서 전체적으로 ㄷ자 평면이다 보니 침대 위치도 이상하고, 게다가 3인 1실이 기본이더라고요. 방의 갯수는 백 몇 십 개고요. 당시 IMF 사태가 한창일 무렵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교보라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기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화장실 하나 털어서 다시 만드는 것도 엄청난 일이잖아요. 이 ㄷ자 형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모형도 만들고 도면을 그려보고 계속 바꿨어요. 계속 퇴짜를 맞았고요. 물론 신용호 회장님은 제게 잘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도 불안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화장실 다 털어버리고 획기적으로 안을 바꾸어 갔더니 회장님이 보시고는 ‘이제 됐군’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 황 소장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화가 나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습니까’ 하시는 거예요. 임원들의 얼굴빛이 죄 어두워졌죠. 그래서 ‘방이 백 개가 넘어서 이대로 다 뜯어고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러시더군요. ‘그 고민은 내가 하는 겁니다. 물론 건축가가 그런 고민을 해주는 건 건축주로서는 고마운데, 그 고민 때문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안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라고요. 그러면서 크게 격려해주셨어요. ‘당신이 앞으로 오래 일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서 배워갈 수 있는 건 이거다. 건축주가 결국 판단할 거니까 당신이 믿는 대로 얘기하는 거다. 건축주가 힘들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대안을 찾지 않겠느냐. 좋은 게 있으면 소신 있게 보여줘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놀랍게도 정말 모든 방을 그렇게 고쳤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죠. 당시 제가 서른여섯, 일곱 즈음이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그 뒤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신껏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획가의 역할이 건축가의 영역을 확장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무적으로 보면 건축가의 작업에 여러 단계가 있는데, 기획, 디자인(개념을 위한 디자인과 실무적 디자인), 인허가, 공사 기간 중 감리, 완공 후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건물 관리가 있겠죠. 하드웨어 측면의 관리는 집주인이 하겠지만 의미상으로 유통하는 건축가가 한다고 보면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기획 단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 건축주든 제삼자든 누가 더 잘 한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설계나 인허가는 건축가밖에 할 사람이 없겠죠. 건축 설계에서 남이 가져갈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지 않아요. 다만 그 남은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곳에선가 ‘건축가의 게임’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최종 프리젠테이션이 끝나면 실시설계 납품하는 과정까지 누가 별로 개입하지 않아요. 바로 그 부분이 ‘건축가의 게임’인데 그게 많을수록 건축적으로 좋아지죠.
그런데 기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획은 건축가가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다만 건축가가 기획을 잘하면 작업에 연속성이 생기니까 좋아요. 건축가가 진심으로 기획의 의도를 최종 디테일까지, 의미 있는 소통까지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건축가에게 기획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나중에 의미적 소통으로 넘어갔을 때 양손이 묶인 채로 임할 수밖에 없게 되죠. 종종 건축주가 ‘사실 설계는 내가 했고, 그 사람(건축가)은 도면만 그렸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매우 많잖아요? 건축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엄격히 따지면 건축주가 기획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건축가가 도면 열심히 그리고, 모형 열심히 만들고, 대지에 열심히 간다고 기획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분명 아니에요. 거듭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 건축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초기 단계의 기획을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의식적으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건축가가 아니어도 좋은 기획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획을 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하게 될 게임의 룰을 제가 쓰고 싶은 거지요.
기획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매일 같이 훈련을 해야 해요. 우리 사무실에서 16년째 영추포럼을 하잖아요? 사실 기획을 해 보자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저나 우리 사무실의 기획 역량을 테스트하고 키워볼 좋은 기회를 스스로 갖고 싶기 때문이에요. 물론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독서로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들과 직접 대화 나누고, 어떤 주제로 누구를 초대할까 하는 고민하는 과정 모두가 기획이니까요. 일단 재미있어서 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획 능력이 배양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절대로 건축가이기 때문에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고도 건축과 관련한 기획을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획은 다들 하고 싶어 하는 거라 경쟁도 치열하고요.
최근 공간 기획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죠.
중요하죠. 제가 보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넓은 스케일의 기획을 한 사람들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걸 제안하는 거죠. 대표적으로 르코르뷔지에가 그렇고, 렘 콜하스도 기획하고 조직하는 게 뛰어난 건축가고요. 다만 저는 개념적으로 큰 성격을 결정하는 것을 잘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을 원해요. ‘아이디어는 나에게 다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구현해 줄 건축가 없나’하는 건축주에게 저는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닐 거예요. 다만 ‘이 사람의 생각을 내가 높이 사겠다. 일은 당연히 성실하게 할 거다. 그러므로 결과물도 남다르고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축주와는 궁합이 착착 잘 맞죠. 단순 기능인으로서의 건축가는 매력이 없는 직업이에요. 기획하고 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한옥이 돌아왔다> 등 책을 통해 건축가로서 생각을 전하고 도시에 대한 제안을 해오셨는데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도시에 대한 주제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결국 그것도 기획에 해당하는 노력입니다. 일단 제가 하는 직업으로서의 건축과 글쓰기는 매우 상보적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죠. 제가 기획하고 설계하고 싶다고 해서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그 기회를 스스로 얻고 싶으면 공모전 같은 것을 해야 하죠. 아쉽게도 공모전은 좋은 아이디어를 원한다기보다는 무난한 아이디어를 세련되게 잘 풀어주기를 원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가진 생각이나 뜻을 건축을 통해서 전달하기 이전에 일단 글로 풀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죠. 글은 건축과 달라서 남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잖아요.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내면 되니까요. 그런 게 저는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다 할 수도 없고 기회도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글쓰기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제 성격이 온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내적인 욕구가 큰 사람이니까요. 사실 건축계에서 동료, 선후배들을 봤을 때 무언가 별도의 분출구가 없으면 답답함에 시달리는 현상을 종종 감지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 다른 기회도 많이 가져다줘요. 무엇 보다 앉아서 조용히 글 쓰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주로 일과 시간 외에 글을 씁니다. 대부분 퇴근을 해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밥은 먹었고, 와인이나 위스키가 있고, 그렇게 글을 쓰다가 잠을 자러 가면 되는 상황이죠. 그 시간이 주는 물성을 최대한 즐긴다고나 할까요. 건축은 회의, 현장 방문 등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같이해야 하는데, 글쓰기는 혼자 할 수 있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전환이 너무 좋죠.
미술계에 보면 작가정신이 투철해서 평생 개인전을 한 번도 안 했다 하는 분도 있던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이나 작품을 공개하는 것에는 일단 자신이 어느 정도 여물었기 때문에 세상에 꺼내놓는다는 측면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완성되고 성숙한 인생이라도 매 단계에서 새로 배울 게 있는 건데, 자기 인생이 다 끝난 다음에 배운다면 그걸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정 기간 내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서 사회를 향해 끄집어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도 그렇죠.
그리고 글을 쓰면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세상과 접하게 돼요. 출판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나오면 강연을 하게 되니까, ‘이런 데서도 나를 부르나?’, ‘세상에 이런 모임도 있나?’ 하면서 삶의 우연에 저를 맡긴다고 할까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한 번 저를 굴려 보는 건데 그러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기도 하거든요. 하여간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 앉아서 내 생각을 겉으로 꺼내는 상황을 즐기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무지개떡’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가주택은 한국의 도시에 남아있는 건축 유형이자 실제 건축물이잖아요. 사실 ‘무지개떡’이라는 표현도 건축적으로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들어간 건물인데,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고자 한 건가요?
물론 그렇죠. 건축계에서 흔히 하는 유형적 분류대로 한다면 상가주택이나 상가아파트라고 했겠죠. 그런데 그건 너무 오염된 단어라고 생각했고 뉘앙스가 별로 안 좋았어요. 당시 그런 식의 건물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도 썩 좋지 않아서 그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소비자가 엄청나게 데인 상품명이 있다면 그걸 또 쓸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것 중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진화 발전시킬 부분이 있죠. 그러면 리브랜딩을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상가아파트, 상가주택을 리브랜딩 하는 거죠.
그리고 이름만 바꾼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향점이 다르니까요.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디테일도 당연히 중요하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책도 써볼까 싶어요. 좋은 무지개떡 건축이 되기 위한 각종 디테일에 대해서요. 가령 1층에 레스토랑이 들어온다면 환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음식 냄새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렇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사전처럼 정리해서 ‘실무 디테일 사전’을 써볼까 하고 있어요. 엔트리가 한 200개 정도 되는 책이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실제 건축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지만, 답이 항상 하나는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말씀대로 16년째 직주근접의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고, 아주 의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한 거예요. 그전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굉장히 오래, 많이 했어요. 대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어마어마한 거리를 매일 왕복했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어요. 서울건축에 다닐 때 과천에서 여의도로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 처음 유학가서는 학교 옆 아파트에 살았지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아예 다른 도시였어요. 매일 편도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다녔죠. 당시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한국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차 때문에 집에 일거리를 싸서 가곤 했어요.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고요. 그때 가장 싫었던 건 ‘아차 이거 회사에 두고 왔는데’, ‘아, 이거 집에 있는데’ 하는 거였어요.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돼서, 집과 사무실을 아예 붙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를 알게 됐고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숙달이 되어 괜찮아졌지만 처음 왔을 때는 몸이 많이 상했죠. 너무 앉아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도 많이 했어요. 아침에 집을 나와 골목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서 다시 출근하고 저녁에는 그 반대로 한다든가. 소위 말하는 직주근접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익힌 건 이사 후 2, 3년 후에나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무조건 걷기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고요. 나름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앉아있는 시간이 긴 것은 여전히 사실이에요.
페이스북에 소장님의 생각을 풀어내고 계시죠. 관심사에 대해 적은 글의 정보량이 웬만한 자료 조사를 뛰어넘기도 해요. 무언가 발굴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신다고 할까요?
SNS는 제가 일과를 다 마치고 마실나가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성향이 조사하고 앞뒤 관계 맞춰보는 걸 좋아하니까, 어떤 분들이 보기에는 좀 ‘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페이스북에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안 올립니다. 일은 일이니까요.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건 많지만요.
카약을 타시거나, 캠핑하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하는 취미를 갖고 계시죠. 모두 고독을 즐기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웃음)
요새는 SNS가 취미가 됐죠. (웃음) 역시 그것도 글을 쓰는 것이죠. 건축이나 글쓰기 모두 생각도 많이 하고 머리도 많이 써야 하는데 그래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NS는 저의 직업과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잘 조율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아직은 즐겁게 하고 있고요.
사실 제가 카약을 타든, 글을 쓰든, 답사하든 SNS를 통해 일부 드러나기 때문에 착시현상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건축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몸을 험하게 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중 카약이 참 좋고, 요즘은 답사로도 그런 욕구를 많이 풀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니까요. 특히 답사는 여러 사람과 같이 다닐 수 있으니 나름 즐겁죠.
음악과 관련해서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은 전원이 노래하고 전원이 악기 하는 밴드에요. 그러니까 제가 의외로 남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요. 다만 선택권이 있어야 하겠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요. 그래서 지금도 남들과 어울리다 굉장히 늦게 들어올 때도 바로 안 자고 한 시간 정도 혼자 있다가 자는 버릇이 있어요. 여러 사람과 있다가 바로 집에 들어와서 자는 건 저한테 안 좋더라고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단체여행을 못 가요. 몇인 1실을 주잖아요. 부부가 아니면 성인은 같이 자는 거 아니라며. (웃음)
앞서 한옥을 다루면서 다공성, 중첩된 기하학 등 건축 개념으로도 이어졌다고 하셨는데요. 한옥의 고유한 가치가 반영된 현대 건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저 자신의 관심을 넘어서, 크게 얘기하면 한국 건축계의 관심이죠. 한국 건축계에는 메시아 신앙이 있어요. 누군가 나타나서 통쾌하게 국제적으로 한국 건축의 위상을 높여주는 거죠. 다만 소위 일반적인 글로벌 아키텍처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DNA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건축으로요. 그걸 보면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좋고 외국인도 보면 경탄해 마지않는, 그런 건축가의 등장에 대한 메시아 신앙이죠.
일본은 그 길을 갔어요. 일본의 근대화도 우리 못지않게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발전이라는 게 원래 자기 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일본도 그 이전에 해온 많은 일을 부정해야 했으니까요. 다만 일본은 탈근대화 과정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소위 ‘젠’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을 글로벌 스탠다드의 단계까지 올려놨죠. 수많은 건축가가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건축을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다만 한국 건축이 과연 그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 건축가 왕슈만 해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왕슈의 건축이 직설적인 요소를 너무 눈에 보이게 차용한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왕슈는 하는 말과 만들어낸 작품 사이의 괴리가 큰 사람이죠. 말은 농경사회의 전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그런 그도 도시 상황으로 들어오면 별수 없어요. 강연을 들었는데 그 괴리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더군요. 좋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서 말을 가리는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현실을 직시하는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인이 그렇게 자기의 속내를 숨겨가면서 교묘한 이중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릭터인가? 한국인은 좀 순진하게 솔직한 면이 있어요. 그게 미덕이건 아니건 한 특성이죠.
글로벌한 측면에서 봤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 문화(local culture)는 문화 다양성의 요소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각 지역은 자기들의 문화에서 무언가 근사한 것을 끄집어내서 글로벌한 문화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어요. ‘나는 지역 문화나 역사와 상관없다, 오로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만 관여하겠다’하는 원초적 근대주의자가 아직도 많은데,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진화라고 믿고요.
모더니즘 초기 단계에는 가장 근저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종교나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격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가 안 되는 거죠. 인간이 100% 합리주의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 제시는 못 하고 있죠. 그래서 모더니즘은 폐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 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좀 넓은 접근, 다양한 관점이 필요해요. 지역 문화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걸 할 수 있으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어요. 저는 예전부터 한국 전통건축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지, 이것을 들고나와 오직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식의 접근은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말하는 ‘다공성’이나 ‘중첩된 기하학’ 같은 것은 한국 사람에게만 어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일 수 있어요. 생각의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 개념을 잘 받아들여서 유용하게 쓰면 됩니다. 막연하게 그것을 만들어낸 상황이 한국에 있었구나 하는 정도가 족하지, 마치 국가 브랜딩 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한 건축가가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주장을 할 수는 없어요. 제 경우 무지개떡 건축은 도시 건축의 기본 유형에 관한 문제고,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다공성’(벤야민의 다공성과는 다른 의미로)과 ‘중첩된 기하학’이 건축가로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될 확률이 높아요. 앞으로 제가 제3, 제4의 이론을 또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이론 안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건축의 세계를 실물로 펼쳐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 될 거로 생각해요.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의 제 경력에서 말이죠. 이미 무지개떡 이론이 예일 대학교에서 펴내는 계간지에, 개성공단의 미래와 관련된 복합도시의 가능성에 대한 논문이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저널에 소개되는 등 제 작품뿐 아니라 생각이 외국에도 여러 경로로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가져왔던 생각들이 점점 집대성 되는 과정이지요. 거기에 공감하는 분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