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SEOUL 2O19
OHS
Archive
Notice
Login
Join
SPECIAL
SPECIAL O1 건축가 김찬중
SPECIAL O2 대학의 원형을 만나다
OPENHOUSE 2O19
OPENHOUSE
집은 진화한다
사옥, 브랜드가 되다
상업, 교육, 문화의 공간
이타미 준의 서울
김중업을 만나다
근현대 유산의 재해석
숭고의 미학, 종교 건축
VISIT YOURSELF
OPENSTUDIO
2O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도시 안의 영토, 국제 교류 공간> 2O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 오픈하우스서울 2O19
SPECIAL O1 현대의 국제 교류 공간
SPECIAL O2 근대 및 왕실의 국제 교류 공간
SPECIAL O3 VISIT YOURSELF
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DDP 포럼 <위기 시대, 사회적 돌봄과 공간 변화>
DDP 포럼 <도시 전략, 접점을 확장하다>
DDP 개관5주년 기념 다시 보는 하디드의 공간, DDP 서울디자인재단+오픈하우스서울
About 2O19
HowTo
Interview
TimeTable
Map
Report
Archive
Notice
Login
Join
OHS
2O19.1O.12-1O.2O
SPECIAL 01 건축가 김찬중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건축가 김찬중 ①
OPENHOUSE
7377 House, 김우상 + 이대규
2019년 10월 12일 11:00AM
OPENHOUSE
대양 역사관, 스티븐 홀, 이인호
2019년 10월 12일 2:0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2019년 9월 21일 2:45PM
OPENHOUSE
온도, 조성욱
2019년 10월 12일 1:30PM
OPENHOUSE
소설호텔, 윤근주, 황정환
2019년 10월 14일 3:0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 9월 16일 오후 2시부터 참가 신청 가능 * 이 프로그램은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연계한 스페셜 프로그램입니다. * 프로그램 신청 시 오픈하우스홈페이지 회원가입이 필수(가입 시 휴대폰 본인 인증)이며 신청한 본인만 참여 가능합니다. 참가비는 무료이나 노쇼 방지를 위해 예약금 결제 후 참석 시 반환합니다. 자세한 방법은How to를 참고해주세요. * 이 프로그램은 대사관 보안관리 규정 상, 신청자 명단과 신분증으로 본인 대조 후 입장이 가능하므로 신분증(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학생증)을 반드시 지참해 주십시오. * 대사관 사진 촬영은 일부 제한되는 곳이 있으며, 보안 상 동선과 이동이 제한될 수 있으므로 현장에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협조바랍니다. * 대사관 오픈하우스 신청 완료후 참가자 분들에 한해 개별적으로 영문 이름 등 추가 정보를 요청드릴 예정이오니 꼭 회신해 주십시오. 2019년 9월 20일 (금) 09:30 / 11:00 2019년 9월 21일 (토) 13:30 / 14:45 / 16:00 2019년 9월 22일 (일) 09:15 / 10:30 프로그램 예상 시간 : 50분 프로그램 진행 고은미(김중업건축박물관 학예연구사),정인하(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강준구(매스스터디스 소장), 정다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주한 프랑스대사관은1959년 로제 샹바르 대사 재임 당시 김중업이 설계한 것이다. 김중업의 회고에 따르면, 1959년 봄 미국 출장 중 대사관 설계를 제안 받아 뉴욕의 한 호텔에서5일간 기본설계를 마쳤고, 그 해 가을 최종 설계안을 제출하여 같은 해 연말 무렵 최종안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1960년 가을 공사를 시작하여1962년 봄 완공된 프랑스대사관은‘한국 전통건축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평을 받는데, 이는 김중업 자신도 한옥의 무게감 없는 지붕처럼 사뿐히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지붕을 표현한 것이라 긍정한 바 있다. 대사관의 경사진 부지에는 대사관저, 대사 집무동, 직원 업무동 등의 건물이 중앙에 위치한 정원을 품고 부채꼴로 배치되어있어, 건물과 정원 사이의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시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건축과 자연경관의 조화를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다. 건물의 구조체는 노출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그 구축체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었으며, 벽체는 다양한 물성을 지닌 재료로 표현하였다. 특히 대사관저 벽체의 질그릇, 옹기,백자, 기와, 타일 등으로 제작된 모자이크 벽화는 화가 윤명로와 김종학이 제작한 것이다. 이 건물은 완공 이후 한국과 프랑스의 교류 증대에 따른 증개축과 대사관저 지붕의 변형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으나, 2016년 프랑스대사관은 복원을 동반한 신축을 추진하기로 하고 프랑스 사티 설계사무소(Sathy Agency)와 한국 매스스터디스의 안을 채택하였다. 대사관저의 변형된 지붕은 다시 사뿐히 하늘을 떠받치고자 한 김중업의 설계의도를 되살려 복원하고,기존건축과 어우러지는 타워동과 갤러리동을 신축할 예정이다. 이 새로운 계획안은, 르 꼬르비지에의 제자인 김중업의 건물과 땅을 통해 전해지는 근대건축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이어가고 있다. 완공 당시의 건물 외관이 잘 관리되어 있는 ”레지당스(Residence, 공관)”는 현재 상태대로 보전하고, 김중업의 최종 디자인을 고쳐 사용하고 있는 사무동은 완공 당시의 지붕과 필로티 형식 디자인으로 구조를 복원한 후 “파비용(Pavillon, 정자)”이라는 이름의 기념비적 다목적 홀로 활용될 예정이다. 주로 공공프로그램을 소화하게 될 “라 주떼(la Jetée, 방파제)” 건물이 추가되는데, 파비용 옆 낮은 대지의 동쪽 끝자락까지 자리하며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파비용 및 라 주떼의 기하학적 언어를 공유하는 사무실 기능의 “라뚜르 드 프랑스(la Tour de France, 프랑스의 타워)”의 수직성이 새로운 매스로 추가될 예정이다. 이 새로운 건물들에 적용되는 재료 및 색상은 여러 단계의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는 중에도, 기존 건물과 새로운 설정 사이에서 그 본질이 명확하게 구별되게 한다. 기존 건물들의 콘크리트 등 밝은 색상의 구조와 마감재는 본래 디자인에 따라 복원될 것이고, 새로운 건물들은 어두운 색상의 철골구조와 마감재로 표현됨으로써, 그들 사이에 시각적으로 명쾌한 구분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글: 고은미, 매스스터디스 사진 및 자료: 프랑스대사관,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김중업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서 건축교육을 받은 뒤 마쓰다히라다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르코르뷔지에를 만나,파리에 있는 그의 연구소에서1955년까지 근무하며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익혔다. 1956년 귀국하여‘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세워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 현대건축의 기반을 닦았다. 1988년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자신만의 작품과 가치를 남기고자 일생을 노력한 건축가이다. 대표작으로는 주한 프랑스대사관,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 삼일빌딩, 서강대학교 본관, 유유산업 안양공장 등이 있으며 이 중 유유산업 안양공장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체부동 성결교회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
1931년 건축된 체부동성결교회를 리모델링한 체부동생활문화지원센터는 시대적 변화 따른 프랑스식과 영국식 두 가지 벽돌쌓기 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서울시가 2014년 매입해 재생사업을 거쳐 2017년 우수건축자산 제1호로 등록했다. 근대 서양 건축기법의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미래유산이자, 제1호 우수건축자산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체부동생활문화지원센터는 지역주민과 생활문화동호회에게 문화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지역을 연결하는 생활문화의 허브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출처 :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 사진 : 서울시미래유산 제공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나길 3-2 이용 시간 10:00 – 22:00 휴관일 월요일/1월 1일/설날/추석 연휴 휴무 이용요금 무료, 프로그램에 따라 일부 유료 문의 http://www.ccasc.or.kr/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아서 딕슨, 김원
2019년 9월 25일 1:15PM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②
대학 시절에 선경스튜디오도 참여하셨는데요. 설계에 대한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해준 곳이 아닐까 싶어요. 선경스튜디오는 설계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어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참여했는데, 당시 구성원들은 다들 개성이 강했어요. 저는 소위 정통 건축 교육이나 선배가 있는 작업실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 저는 야생에서 온 사람이었고요. 정체성이 강한 친구들이었기에 많은 자극도 되고 부러웠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고대 다니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면학 분위기를 부러워했으나, 동시에 그 한계, 패턴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다들 졸업 후에 개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지만, 학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있었어요. 패널 디자인도 책에서 나온 형식이 많았고요. 정보가 곧 스킬로 정착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객관적 정보를 얻는 데에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길찾기를 하게 되었어요. 전환점이 되었죠. 한울건축에서 2년의 실무 후에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한울건축의 스타일도 체계적이고 사무적인 틀을 가진 곳이 아닌가 싶어요. 집중도에 관해서는 어느 곳보다 세고 밀도가 매우 높았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성관 소장님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디테일, 비례, 전통적인 건축의 판단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퀄리티가 매우 높았어요. 오히려 첫 직장으로써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대신 새벽 3~4시 퇴근은 기본이었어요. 사람들이 못 견디고 나가기도 하는데, 진정성 하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버드(GS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색이 없다는 점이 컸어요. 5곳에 지원해서 4개 대학에 붙었는데, 색이 너무 강한 학교는 고민이 됐어요. 예를 들면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당시 그레그 린을 필두로 프리 폼(free form)이 유행하고 있었고, 엔지니어링 기반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MIT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일은 실용주의 노선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데 GSD는 강사(instructor)도 다양했고 이렇다 할만한 색깔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 ‘학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막상 가보니 색은 있더라고요. GSD는 리더 양성소예요. 리더십 양성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서 경쟁이 매우 심했어요. 정치나 헤게모니같은 것도 있고요. 단순히 디자인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실무에서 겪게 될 싸움의 마이크로 버전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유학 시절,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스 맨(‘this’ man)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어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세세하게 만든 모형과 도면으로 보여주었다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실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말로 하는 설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결과물을 실체 과다로 받아들였어요. 일단 물량에 놀라워했죠. 개별적인 컴포넌트들을 만들어서 프로세스대로 하나씩 끼워가며 설명하곤 했죠. 보통 핀업이라 하면, 학생당 한 개 정도인데 저는 핀업룸을 도배하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 갔어요. 양도 그렇지만 제 모델은 훨씬 더 많은 전달력이 있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거든요. 지금도 사무실에서 3D작업을 많이 해요. 보여줄 장면(scene)도 많이 잡고요.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확신을 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우리는 조감도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하는 시점이 아니니까. 그래서 눈높이에서 투시도를 많이 만들어서 설계와 경험을 체크하고 건물을 미리 다 지어본다는 생각을 해요. 실체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마이크로센터, 홈디포, 제 언어적 한계, 이 3가지의 융복합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컴포넌트가 명확해야 했고, 컴포넌트들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체계까지 모두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받은 거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라는 일반 상점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흥미로워요. 유학생 시절, 너무 외로웠어요. 홈디포를 구경하거나 마이크로센터에 가서 부품을 사고 컴퓨터를 분해하고 새로 조립하기를 반복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컴퓨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겐 컴포넌트였고, 계속 그것으로 놀다 보니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죠. ‘홈디포(The Home Depot)’는 건축, 조경에 관련된 하드웨어를 파는 창고형 마트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종류의 건물도 홈디포에 있는 상품으로 다 지을 수 있다”라는 게 이 마트가 표방하는 바죠. 홈디포에서 모든 것들이 부품화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며, 결국 건물도 하나의 거대한 조립 체계라는 것을 느꼈어요. 요소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 – 이건 피터 아이젠만의 영향이지만 -가 저로 하여금 설계와 프로세스의 단계적 과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무실에서도 너무 멋진 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아요. 최단 시간에 이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동선을 잡으라는 식의 요청을 할 때는 있어요. 발주처에 설명할 때도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막연히 말하지 않게 되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 타당성을 갖고 말하게 돼요. 이런 관점들이 그때 만들어졌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를 통해 건축이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반대로 실제 건축 산업은 워낙 보수적이죠. 그 때문에 건축에 적용 가능하기 위해 부딪혔던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건축은 선발 산업이 아니라 후발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종합 산업이죠. 종합 예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는 예술이 산업이던 때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예술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죠. 물론 지금의 산업은 그때와는 다른 산업이고요. 건축이 후발 산업이라는 의미는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에요. 건축은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부품들이 다른 분야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축에 통합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건축에서 유리 접합부를 개스킷(gasket)으로 막는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음과 빗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해법이 건축에 적용된 거예요. 건축은 시대의 주력산업에서 파생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건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찾으려고 한다면 많이 힘들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을 생각하고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하다 보면, 5~10년 뒤에는 건축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해요. 즉, 다른 산업에서 안정성을 인정받고 검증된 것이 건축에 합쳐지게 되는 거죠. 주력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는 건축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해요. 건축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앞당길 수는 없지만, 건축은 후발 산업인 대신 종합산업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한국에선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모더니즘 신화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모더니즘은 정치적인 상황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건축 자체로 말하기보다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쟁 이후였고. 사회주도세력 중 정치적 신념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부분들이 녹아 들어갔던 거죠. 여전히 지금도 그때의 잔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집권당이 바뀌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거나 사라져버린다거나.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건축물이 의미하는 게 크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바꾸고 싶어 하는데,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토목, 건축, 환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부분에 건축가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사실 건축은 누군가 자본을 대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다 보니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성향에 건축이 편향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다’라고 투쟁하면 더는 일을 주지 않겠죠. 그러면 건축을 실제로 구현하지 못하는 페이퍼 아키텍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건축주가 신념보다 공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공성도 요즘은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은 미학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이나 개념일 수도 있어요. 여러 방법을 통해 공공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공공의 사람들이 바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편협하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 자체로 공공재의 성격을 피할 수 없어서 다양한 사고와 실험의 적용에 높은 가치가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많이 받는 포퓰리즘적 방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요. 건축계를 지배하는 신화적 시각에서는 컴포넌트와 조립식 시스템을 통해 건축을 산업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볍다고 비판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전의 건축은 철학적 사고와 연동된 체계이거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표현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주냐 아니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우리나라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인 것 같고요. 건축은 쉽게 이야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고뇌하고 어렵고 고차원의 문제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