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④

다공성, 구축술, 기하학의 중첩
 
춘원당의 경우 한의원의 오랜 역사, 종로의 복잡한 뒷골목, 모텔 밀집 지역에 대응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특히 한약방의 탕전기를 끄집어내자고 설득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건축가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통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획자로서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으로 접근하는 건 제가 잘하는 일인 것 같아요. 다만 제안을 할 때는 프로젝트가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해요. 결정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니까요.
처음 탕전기를 전면에 내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클라이언트가 도면을 보고는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힘드니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셨어요.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굉장히 깜짝 놀라셨다고 해요. 당시 저는 프로젝트가 날아갔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은 열광하든 아니든 둘 중 하나지, 중간의 타협 지점이 없는 아이디어니까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 ‘나에게도 힘든 결정인데,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라고 하셨어요. 그분도 이해하신 거예요.
 
그 안은 시각적 투명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투명성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 무렵에 한방계가 필요로 했던 것인데, 사회적으로 한방에 대한 불신이 커질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도 ‘이것은 우리 집안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7대째 한방을 해 오던 집안이었으니까요. 일단 안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그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보이는 건 세련된 기계지만, 실현하는 과정은 아주 지난했어요. 그 약 다리는 기계, 즉 탕전기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원래 모습은 그리 비주얼하지 않았어요. 탕전기를 만드는 회사가 대구에 있었는데 거기 분들이 서울에 오셔서 우리 도면과 그분들 제작도를 펼쳐놓고 함께 회의했어요. ‘이 재료 바꿀 수 있냐, 이거 이렇게 바꿔도 되냐’ 하면서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계가 갖는 자연스러운 거친 느낌, 날 것의 느낌을 없애거나 패키지 디자인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보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시각적 감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지금도 제가 건축가로서 갖는 큰 강점은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서 그런 걸 활용하지 못하면 건축가로서 제 능력의 일부만 쓰는 거죠. 본인이 뭘 하고자 하는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심지어 답도 정해져 있는 건축주에게는 그냥 친절하고 효율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별로 자신이 없고요.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한 건 좋은데, 다만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지는 열어줘야죠. 그래야 건축가가 잘릴 각오를 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경우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도 있었죠. 훈련하는 공간과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는데, 그런 형식은 선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제안은 받아들이는 건축주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합니다. 아이디어가 작동되어야 하니까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기회를 많이 얻길 원해요. 처음에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즉흥적인 생각이나 감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관찰과 일련의 합리적인 생각 끝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게 구현이 되면 결과가 즐거운 거죠.
결국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건축이란 것도 연장하면 기계인데, 이 기계를 어떻게 인간적으로,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느냐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그 두 건물에서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또 오기를 바라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처음으로 광활한 대지에 나갔다’는 표현으로 그 프로젝트의 성격을 설명하셨죠. 조건 많은 도심 골목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일종의 직주근접 프로그램인데 프로젝트 초기의 접근 태도, 그 공간을 만들어갈 때 주의 깊게 고민하셨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사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두 배의 시간이 걸렸어요. 설계를 두 번 했거든요. 천안 시청 옆 부지를 정해 설계를 마치고 착공 직전까지 했다가, 부지가 바뀌었어요. 사실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앞이 캄캄하긴 했어요.
다행히 몇 개월 후 기회가 다시 왔어요. 그때 이전 설계안을 다시 보면서 내적 크리틱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좀 더 객관적으로 내 설계를 보게 된 거죠. 보통 내 설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순간, 건물은 이미 지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머릿속에서 원래 설계했던 건물의 이미지와 생각의 잔상이 남은 상태에서 다른 대지에 설계하니까 또 다른 생각을 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현대캐피탈 쪽에서도 당연히 원래 부지에 설계했던 내용을 조금 손봐서 새 대지에 잘 앉힐 거로 생각했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뭔가 미진한 거예요. 실무적으로야 효율적일 수 있고 세부적인 어휘(vocabulary) 같은 것은 물론 가져올 수 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개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단면을 보고 있었어요. 배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스포츠이다 보니 코트의 천장이 높아야 합니다. 최소 8m, 보통은 16m 정도 있으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코트 주변은 그렇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요. 그러면 거기다가 숙소를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이렇게 코트와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면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다 보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주변에는 발코니석이 있는 것 같은 구조가 되더라고요.

 
훈련공간과 숙소가 한 건물에 있는 것에 대해 사용자의 부담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나왔을 것 같아요.
그 안을 제안했을 때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은 김호철 감독님이셨어요. 본인과 코치진의 가장 큰 고민은 선수들이 이동하면서 감기 걸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운동능력은 좋으나 의외로 면역력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면 심리적으로 좀 답답하고 압박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우려하셨죠. 그 부분은 저희도 고민하던 내용이라 저층부는 구심적으로 풀지만, 상층부는 주변 경관이 좋으니 밖을 향해 발코니를 내고 원심적으로 풀려고 생각했어요. 숙소에 있는데 코트에서 보이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구심에서 원심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건물 짓고 나서 비평 글을 몇 번 받았는데, 예상대로 판옵티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전형적으로 도면만 보고 도상학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죠. 그 건물을 직접 경험해봤다면 판옵티콘이라고 이야기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판옵티콘은 중심에서는 주변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중심이 안 보여야 하거든요. 즉 감시의 시선이 한 방향이어야 해요. 하지만 여긴 시선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공간이라서 상황이 다르죠.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체육계 분들과 인연이 생겼는데 김성근 야구 감독님께 이 건물 도면과 사진을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제게 ‘스포츠 시설 설계를 안 해보셨죠?’라고 묻더라고요. 이게 첫 건물이라고 했더니, 어쭙잖게 경험이 있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뭔가 근본적인 걸 생각한 결과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관습적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코치진의 고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물론 저도 매우 반가웠어요.
 
처음에 선수들도 이 안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선수단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한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내가 집과 사무실을 합쳐 산 지가 10년(지금은 16년)인데, 그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직업은 70, 80세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스포츠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대 40세면 은퇴한다. 프로 생활이 길어 봐야 십몇 년 남짓이다. 그동안 힘들게 선수 생활 해서 아주 좋은 결과를 안고 사회로 돌아가는 것과 인간적으로는 재미있게 살았는데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전자를 원할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리고 이 설계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최종 판단은 구단에서 할 테니 저는 최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전달했다고 했죠. 지금은 그 건물을 어떻게 쓰냐 하면, 합숙하건 말건 선수 개인의 자유에요. 지금의 최태웅 감독님이 그렇게 풀어줬어요. 그런데 본인들이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가 김종성 건축상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거대 공간을 싱글 레이어로 지지하는 기술적 성취도 있었죠.
네, 대각선 방향으로 50m에 달하는 거대한 지붕을 트러스 없이 싱글 레이어(single layer)로 해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구조 엔지니어 황경주 교수(서울시립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죠. 당시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와서 그동안 자기가 해온 일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체육 시설 프로젝트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제가 제안했어요. 황경주 교수와는 통인시장 등 다른 프로젝트도 몇 개 했었는데 이분과 같이 일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마치 건축가하고 이야기하듯이 하면 되는데 다만 이분은 계산을 할 줄 알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지붕 말고도 36m 길이의 벽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조 시스템들이 총망라되는, 구조의 역할이 큰 건물입니다. 저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건축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을 했고요. 아마 그런 점에서 김종성 건축상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나 합니다.
최근에야 깨달은 게 있는데, 이 건물의 레퍼런스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중정식 건물의 역사적인 선례들이 염두에 있었어요. 루이 칸의 필립스 엑세터 도서관이나 군나 아스플란트의 스톡홀름 도서관, 심지어 비잔틴 건축인 성 소피아 성당, 중세의 성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아마도 가장 심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김종성 선생님의 작품인 <올림픽 역도경기장>이었건 것 같습니다. 거대 경간을 해결하는 방법, 하중이 전달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단순한 외관 속에 복잡한 기능을 담는 과정 등에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대한 오마주 적인 측면이 있어요. 같은 스포츠 시설이기도 하구요. 우연 같은 필연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제가 여전히 모더니즘이라는 큰 흐름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의 기획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신가요?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제안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칼을 쥐여주고 내 목을 들이미는 거예요. 일반적인 디자인은 ‘이거 어떠세요, 저건 어떠세요’라고 제안할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획은 선택되느냐, 잘리느냐인 거예요.
이런 태도는 교보생명의 신용호 (1917-2003) 회장님에게 배웠어요. 제가 개업하기 이전,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실의 현지 법인장을 할 때인데, 회사의 주된 고객이 교보생명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저를 사전에 교육하셨죠. 그분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요. 다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황두진 소장이 직접 가서 부딪히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에 온 이후에 신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한번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김태수 씨가 믿고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냐’ 그러셔서 ‘네, 그렇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1980년대에 지은 교보생명 천안연수원이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전면 리노베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셨어요.
 
그 프로젝트를 서울 사무실과 미국 사무실이 같이 하는데, 강당과 공용공간은 미국에서 김태수 선생님이 하시고, 숙실은 제가 서울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예전 설계 당시에 김태수 선생님은 기본 계획을 하시고 숙실 등 세세한 것은 교보에서 상황에 따라 현지에서 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에 평면이 좀 이상했어요. 각 방의 화장실이 방 가운데 있어서 전체적으로 ㄷ자 평면이다 보니 침대 위치도 이상하고, 게다가 3인 1실이 기본이더라고요. 방의 갯수는 백 몇 십 개고요. 당시 IMF 사태가 한창일 무렵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교보라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기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화장실 하나 털어서 다시 만드는 것도 엄청난 일이잖아요. 이 ㄷ자 형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모형도 만들고 도면을 그려보고 계속 바꿨어요. 계속 퇴짜를 맞았고요. 물론 신용호 회장님은 제게 잘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도 불안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화장실 다 털어버리고 획기적으로 안을 바꾸어 갔더니 회장님이 보시고는 ‘이제 됐군’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 황 소장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화가 나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습니까’ 하시는 거예요. 임원들의 얼굴빛이 죄 어두워졌죠. 그래서 ‘방이 백 개가 넘어서 이대로 다 뜯어고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러시더군요. ‘그 고민은 내가 하는 겁니다. 물론 건축가가 그런 고민을 해주는 건 건축주로서는 고마운데, 그 고민 때문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안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라고요. 그러면서 크게 격려해주셨어요. ‘당신이 앞으로 오래 일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서 배워갈 수 있는 건 이거다. 건축주가 결국 판단할 거니까 당신이 믿는 대로 얘기하는 거다. 건축주가 힘들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대안을 찾지 않겠느냐. 좋은 게 있으면 소신 있게 보여줘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놀랍게도 정말 모든 방을 그렇게 고쳤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죠. 당시 제가 서른여섯, 일곱 즈음이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그 뒤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신껏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획가의 역할이 건축가의 영역을 확장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무적으로 보면 건축가의 작업에 여러 단계가 있는데, 기획, 디자인(개념을 위한 디자인과 실무적 디자인), 인허가, 공사 기간 중 감리, 완공 후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건물 관리가 있겠죠. 하드웨어 측면의 관리는 집주인이 하겠지만 의미상으로 유통하는 건축가가 한다고 보면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기획 단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 건축주든 제삼자든 누가 더 잘 한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설계나 인허가는 건축가밖에 할 사람이 없겠죠. 건축 설계에서 남이 가져갈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지 않아요. 다만 그 남은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곳에선가 ‘건축가의 게임’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최종 프리젠테이션이 끝나면 실시설계 납품하는 과정까지 누가 별로 개입하지 않아요. 바로 그 부분이 ‘건축가의 게임’인데 그게 많을수록 건축적으로 좋아지죠.
그런데 기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획은 건축가가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다만 건축가가 기획을 잘하면 작업에 연속성이 생기니까 좋아요. 건축가가 진심으로 기획의 의도를 최종 디테일까지, 의미 있는 소통까지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건축가에게 기획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나중에 의미적 소통으로 넘어갔을 때 양손이 묶인 채로 임할 수밖에 없게 되죠. 종종 건축주가 ‘사실 설계는 내가 했고, 그 사람(건축가)은 도면만 그렸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매우 많잖아요? 건축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엄격히 따지면 건축주가 기획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건축가가 도면 열심히 그리고, 모형 열심히 만들고, 대지에 열심히 간다고 기획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분명 아니에요. 거듭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 건축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초기 단계의 기획을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의식적으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건축가가 아니어도 좋은 기획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획을 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하게 될 게임의 룰을 제가 쓰고 싶은 거지요.
기획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매일 같이 훈련을 해야 해요. 우리 사무실에서 16년째 영추포럼을 하잖아요? 사실 기획을 해 보자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저나 우리 사무실의 기획 역량을 테스트하고 키워볼 좋은 기회를 스스로 갖고 싶기 때문이에요. 물론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독서로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들과 직접 대화 나누고, 어떤 주제로 누구를 초대할까 하는 고민하는 과정 모두가 기획이니까요. 일단 재미있어서 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획 능력이 배양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절대로 건축가이기 때문에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고도 건축과 관련한 기획을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획은 다들 하고 싶어 하는 거라 경쟁도 치열하고요.   

 
최근 공간 기획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죠.
중요하죠. 제가 보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넓은 스케일의 기획을 한 사람들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걸 제안하는 거죠. 대표적으로 르코르뷔지에가 그렇고, 렘 콜하스도 기획하고 조직하는 게 뛰어난 건축가고요. 다만 저는 개념적으로 큰 성격을 결정하는 것을 잘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을 원해요. ‘아이디어는 나에게 다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구현해 줄 건축가 없나’하는 건축주에게 저는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닐 거예요. 다만 ‘이 사람의 생각을 내가 높이 사겠다. 일은 당연히 성실하게 할 거다. 그러므로 결과물도 남다르고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축주와는 궁합이 착착 잘 맞죠. 단순 기능인으로서의 건축가는 매력이 없는 직업이에요. 기획하고 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한옥이 돌아왔다> 등 책을 통해 건축가로서 생각을 전하고 도시에 대한 제안을 해오셨는데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도시에 대한 주제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결국 그것도 기획에 해당하는 노력입니다. 일단 제가 하는 직업으로서의 건축과 글쓰기는 매우 상보적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죠. 제가 기획하고 설계하고 싶다고 해서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그 기회를 스스로 얻고 싶으면 공모전 같은 것을 해야 하죠. 아쉽게도 공모전은 좋은 아이디어를 원한다기보다는 무난한 아이디어를 세련되게 잘 풀어주기를 원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가진 생각이나 뜻을 건축을 통해서 전달하기 이전에 일단 글로 풀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죠. 글은 건축과 달라서 남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잖아요.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내면 되니까요. 그런 게 저는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다 할 수도 없고 기회도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글쓰기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제 성격이 온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내적인 욕구가 큰 사람이니까요. 사실 건축계에서 동료, 선후배들을 봤을 때 무언가 별도의  분출구가 없으면 답답함에 시달리는 현상을 종종 감지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 다른 기회도 많이 가져다줘요. 무엇 보다 앉아서 조용히 글 쓰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주로 일과 시간 외에 글을 씁니다. 대부분 퇴근을 해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밥은 먹었고, 와인이나 위스키가 있고, 그렇게 글을 쓰다가 잠을 자러 가면 되는 상황이죠. 그 시간이 주는 물성을 최대한 즐긴다고나 할까요. 건축은 회의, 현장 방문 등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같이해야 하는데, 글쓰기는 혼자 할 수 있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전환이 너무 좋죠.
미술계에 보면 작가정신이 투철해서 평생 개인전을 한 번도 안 했다 하는 분도 있던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이나 작품을 공개하는 것에는 일단 자신이 어느 정도 여물었기 때문에 세상에 꺼내놓는다는 측면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완성되고 성숙한 인생이라도 매 단계에서 새로 배울 게 있는 건데, 자기 인생이 다 끝난 다음에 배운다면 그걸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정 기간 내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서 사회를 향해 끄집어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도 그렇죠.
그리고 글을 쓰면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세상과 접하게 돼요. 출판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나오면 강연을 하게 되니까, ‘이런 데서도 나를 부르나?’, ‘세상에 이런 모임도 있나?’ 하면서 삶의 우연에 저를 맡긴다고 할까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한 번 저를 굴려 보는 건데 그러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기도 하거든요. 하여간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 앉아서 내 생각을 겉으로 꺼내는 상황을 즐기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무지개떡’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가주택은 한국의 도시에 남아있는 건축 유형이자 실제 건축물이잖아요. 사실 ‘무지개떡’이라는 표현도 건축적으로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들어간 건물인데,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고자 한 건가요?
물론 그렇죠. 건축계에서 흔히 하는 유형적 분류대로 한다면 상가주택이나 상가아파트라고 했겠죠. 그런데 그건 너무 오염된 단어라고 생각했고 뉘앙스가 별로 안 좋았어요. 당시 그런 식의 건물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도 썩 좋지 않아서 그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소비자가 엄청나게 데인 상품명이 있다면 그걸 또 쓸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것 중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진화 발전시킬 부분이 있죠. 그러면 리브랜딩을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상가아파트, 상가주택을 리브랜딩 하는 거죠.
그리고 이름만 바꾼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향점이 다르니까요.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디테일도 당연히 중요하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책도 써볼까 싶어요. 좋은 무지개떡 건축이 되기 위한 각종 디테일에 대해서요. 가령 1층에 레스토랑이 들어온다면 환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음식 냄새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렇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사전처럼 정리해서 ‘실무 디테일 사전’을 써볼까 하고 있어요. 엔트리가 한 200개 정도 되는 책이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실제 건축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지만, 답이 항상 하나는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말씀대로 16년째 직주근접의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고, 아주 의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한 거예요. 그전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굉장히 오래, 많이 했어요. 대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어마어마한 거리를 매일 왕복했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어요. 서울건축에 다닐 때 과천에서 여의도로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 처음 유학가서는 학교 옆 아파트에 살았지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아예 다른 도시였어요. 매일 편도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다녔죠. 당시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한국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차 때문에 집에 일거리를 싸서 가곤 했어요.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고요. 그때 가장 싫었던 건 ‘아차 이거 회사에 두고 왔는데’, ‘아, 이거 집에 있는데’ 하는 거였어요.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돼서, 집과 사무실을 아예 붙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를 알게 됐고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숙달이 되어 괜찮아졌지만 처음 왔을 때는 몸이 많이 상했죠. 너무 앉아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도 많이 했어요. 아침에 집을 나와 골목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서 다시 출근하고 저녁에는 그 반대로 한다든가. 소위 말하는 직주근접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익힌 건 이사 후 2, 3년 후에나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무조건 걷기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고요. 나름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앉아있는 시간이 긴 것은 여전히 사실이에요.

 
페이스북에 소장님의 생각을 풀어내고 계시죠. 관심사에 대해 적은 글의 정보량이 웬만한 자료 조사를 뛰어넘기도 해요. 무언가 발굴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신다고 할까요?
SNS는 제가 일과를 다 마치고 마실나가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성향이 조사하고 앞뒤 관계 맞춰보는 걸 좋아하니까, 어떤 분들이 보기에는 좀 ‘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페이스북에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안 올립니다. 일은 일이니까요.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건 많지만요.

 
카약을 타시거나, 캠핑하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하는 취미를 갖고 계시죠. 모두 고독을 즐기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웃음)
요새는 SNS가 취미가 됐죠. (웃음) 역시 그것도 글을 쓰는 것이죠. 건축이나 글쓰기 모두 생각도 많이 하고 머리도 많이 써야 하는데 그래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NS는 저의 직업과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잘 조율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아직은 즐겁게 하고 있고요.
사실 제가 카약을 타든, 글을 쓰든, 답사하든 SNS를 통해 일부 드러나기 때문에 착시현상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건축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몸을 험하게 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중 카약이 참 좋고, 요즘은 답사로도 그런 욕구를 많이 풀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니까요. 특히 답사는 여러 사람과 같이 다닐 수 있으니 나름 즐겁죠.
음악과 관련해서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은 전원이 노래하고 전원이 악기 하는 밴드에요. 그러니까 제가 의외로 남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요. 다만 선택권이 있어야 하겠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요. 그래서 지금도 남들과 어울리다 굉장히 늦게 들어올 때도 바로 안 자고 한 시간 정도 혼자 있다가 자는 버릇이 있어요. 여러 사람과 있다가 바로 집에 들어와서 자는 건 저한테 안 좋더라고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단체여행을 못 가요. 몇인 1실을 주잖아요. 부부가 아니면 성인은 같이 자는 거 아니라며. (웃음)  

 
앞서 한옥을 다루면서 다공성, 중첩된 기하학 등 건축 개념으로도 이어졌다고 하셨는데요. 한옥의 고유한 가치가 반영된 현대 건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저 자신의 관심을 넘어서, 크게 얘기하면 한국 건축계의 관심이죠. 한국 건축계에는 메시아 신앙이 있어요. 누군가 나타나서 통쾌하게 국제적으로 한국 건축의 위상을 높여주는 거죠. 다만 소위 일반적인 글로벌 아키텍처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DNA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건축으로요. 그걸 보면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좋고 외국인도 보면 경탄해 마지않는, 그런 건축가의 등장에 대한 메시아 신앙이죠.
일본은 그 길을 갔어요. 일본의 근대화도 우리 못지않게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발전이라는 게 원래 자기 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일본도 그 이전에 해온 많은 일을 부정해야 했으니까요. 다만 일본은 탈근대화 과정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소위 ‘젠’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을 글로벌 스탠다드의 단계까지 올려놨죠. 수많은 건축가가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건축을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다만 한국 건축이 과연 그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 건축가 왕슈만 해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왕슈의 건축이 직설적인 요소를 너무 눈에 보이게 차용한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왕슈는 하는 말과 만들어낸 작품 사이의 괴리가 큰 사람이죠. 말은 농경사회의 전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그런 그도 도시 상황으로 들어오면 별수 없어요. 강연을 들었는데 그 괴리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더군요. 좋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서 말을 가리는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현실을 직시하는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인이 그렇게 자기의 속내를 숨겨가면서 교묘한 이중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릭터인가? 한국인은 좀 순진하게 솔직한 면이 있어요. 그게 미덕이건 아니건 한 특성이죠.  
 
글로벌한 측면에서 봤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 문화(local culture)는 문화 다양성의 요소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각 지역은 자기들의 문화에서 무언가 근사한 것을 끄집어내서 글로벌한 문화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어요. ‘나는 지역 문화나 역사와 상관없다, 오로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만 관여하겠다’하는 원초적 근대주의자가 아직도 많은데,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진화라고 믿고요.
 
모더니즘 초기 단계에는 가장 근저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종교나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격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가 안 되는 거죠. 인간이 100% 합리주의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 제시는 못 하고 있죠. 그래서 모더니즘은 폐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 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좀 넓은 접근, 다양한 관점이 필요해요. 지역 문화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걸 할 수 있으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어요. 저는 예전부터 한국 전통건축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지, 이것을 들고나와 오직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식의 접근은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말하는 ‘다공성’이나 ‘중첩된 기하학’ 같은 것은 한국 사람에게만 어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일 수 있어요. 생각의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 개념을 잘 받아들여서 유용하게 쓰면 됩니다. 막연하게 그것을 만들어낸 상황이 한국에 있었구나 하는 정도가 족하지, 마치 국가 브랜딩 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한 건축가가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주장을 할 수는 없어요. 제 경우 무지개떡 건축은 도시 건축의 기본 유형에 관한 문제고,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다공성’(벤야민의 다공성과는 다른 의미로)과 ‘중첩된 기하학’이 건축가로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될 확률이 높아요. 앞으로 제가 제3, 제4의 이론을 또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이론 안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건축의 세계를 실물로 펼쳐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 될 거로 생각해요.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의 제 경력에서 말이죠. 이미 무지개떡 이론이 예일 대학교에서 펴내는 계간지에, 개성공단의 미래와 관련된 복합도시의 가능성에 대한 논문이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저널에 소개되는 등 제 작품뿐 아니라 생각이 외국에도 여러 경로로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가져왔던 생각들이 점점 집대성 되는 과정이지요. 거기에 공감하는 분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사진_박영채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모형사진, 2013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2013 사진_박영채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코너 모형 사진_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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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 김중업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은 상시 방문 가능합니다. 가이드 투어를 원하시는 경우,  MMCA(국립현대미술관)의《김중업 다이얼로그》전시 연계 문화프로그램 <MMCA 건축기행-김중업>으로 신청가능합니다.   참가신청 링크 바로가기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입구에 소재한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3,120㎡의 철골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다. 1986년 설계해서 1988년 9월 12일 준공했으나, 김중업은 준공 4개월을 앞둔 5월 11일에 작고해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세계평화의 문은 올림픽정신을 구상적으로 표현하고 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세 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전통적인 문(門) 개념을 도입,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의 조화를 이루게 한 설계안이 준공되었다.  높이 24.111m, 지붕길이 62.111m, 폭 37m의 거대한 규모로 몸체는 철근콘크리트에 화강석판을 붙여 만들었고, 지붕은 철골트러스구조에 동판 덮개를 씌워 제작했다. 지붕 아래쪽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가 판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백금남에 의해 단청으로 입혀 있다. 세계평화의 문 앞쪽 마당에는 괴면 두상 조각을 얹은 열주가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미술작가 이승택이 제작했다. 글 MMCA(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익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Special 부산대학교 본관(현 인문관), 김중업 *부산대학교 인문관은 상시 방문 가능합니다. 가이드 투어를 원하시는 경우,  MMCA(국립현대미술관)의《김중업 다이얼로그》전시 연계 문화프로그램 <MMCA 건축기행-김중업>으로 신청가능합니다.  참가신청 링크 바로가기  김중업은 1950년대에 세 개의 대학건물을 설계했는데, 부산대학교 본관은 그 중 첫 번째로 설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경사가 심한 계곡 중턱에 위치한 지형적 특징을 반영했고, 캠퍼스의 전체 건물들을 통합하는 상징적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계단이 조형적 요소로 강조되었는데 계단실 전면은 유리로 처리되어 주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1956년 설계를 시작으로 1957년 9월 착공하였으며 1959년 10월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2,631㎡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금정산의 지형에 따라 자 형태이며 1층 대부분을 필로티로 처리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게 했다. 규칙적인 모듈에 의한 평면 구성과 높은 층고, 전면 계단실의 넓은 유리를 통한 파노라마 경관, 후면부의 모자이크 창 구성 등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 드러난다.  준공 당시 1층은 문리대, 2층은 총장실 및 대학본부와 법대, 3층은 상대 등으로 사용되었다. 1996년 내부 개보수 공사, 2004년 8월부터 2년간 원형복원 개념의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현재는 부산대학교 인문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12년 ‘부산시 근대 건조물’로 지정되었다.   글 MMCA(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익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OpenHouse 필운동 홍건익 가옥 필운동 홍건익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은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와 후원이 있는 구조이다. 자연 지형을 살려 건물을 앉혔으며, 일각문과 우물 같은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지 면적은 740.5㎡, 건물 면적은 154.6㎡,이다. 사랑채에 중문을 두어 바깥채와 안채를 구분하였고, 안채에서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협문과 일각문을 두어 공간을 구분하였다. 후원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며, 후원 끝에는 단차를 이용하여 빙고(氷庫)를 만들었다. 쪽마루와 대청에 설치한 유리문과 처마에 설치한 차양은 근대 시기 한옥의 특징이다. 화강석, 적벽돌, 시멘트, 철제 난간 같은 여러 가지 재료로 담장을 쌓거나 집을 보수한 흔적이 시기별로 달라 집의 역사와 특징을 보여준다. 홍건익 가옥은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 보기 드문 규모의 집으로, 근대 시기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홍건익 가옥은 서울시에서 매입하고 전문가 자문을 거쳐 2015년 보수를 마친 뒤 2017년부터 일반에 개방되었다. 살림집에서 공공한옥으로 집의 기능이 바뀌며 대문채는 관리실, 행랑채는 화장실, 사랑채는 전시실과 사무실, 별채는 관람객 공간으로 쓰인다. 안채는 모임 장소로 대관하거나 강연과 음악회 같은 문화프로그램을 개최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소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1길 14-4 이용시간 10: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공휴일 이용요금 무료 문의 02-735-1374 https://blog.naver.com/00hanok http://instagram.com/00hanok    글 사진 내셔널 트러스트
OpenHouse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 동양화가 청전(靑田) 이상범이 살았던 집이자 화실인 이곳은 2005년 등록문화재(제17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가옥은 서울시가, 화실은 종로구가 소유해 관리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이 방문 가능하도록 개방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가옥은 1930년대 누하동을 비롯하여 경복궁 서쪽 지역에 형성되었던 도시형 한옥 건물로 이상범 화백이 43년간 거주한 곳이며 희소성에서도 그 가치가 인정된다. 또한 화실은 이상범 화백이 화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상범 화백이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있어 가옥과 함께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청전양식’이라는 자신만의 화법을 전개하던 산수화가인 이상범은 1942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누하동 가옥에서 살았으며 배렴과 박노수 등이 배출되었고 그의 전성기 작품이 거의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주택은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이지만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상의집, 최근 종로구립미술관으로 변신한 박노수 가옥과 함께 서촌의 근대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다. 글 서울시 사진 문화재청 장소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31-7, 31-8 (누하동) 이용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30-17:30,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전화 02-733-2038 +참고자료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79,01710000,11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2860&contents_id=76052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④ 다공성, 구축술, 기하학의 중첩   춘원당의 경우 한의원의 오랜 역사, 종로의 복잡한 뒷골목, 모텔 밀집 지역에 대응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특히 한약방의 탕전기를 끄집어내자고 설득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건축가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통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획자로서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으로 접근하는 건 제가 잘하는 일인 것 같아요. 다만 제안을 할 때는 프로젝트가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해요. 결정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니까요. 처음 탕전기를 전면에 내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클라이언트가 도면을 보고는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힘드니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셨어요.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굉장히 깜짝 놀라셨다고 해요. 당시 저는 프로젝트가 날아갔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은 열광하든 아니든 둘 중 하나지, 중간의 타협 지점이 없는 아이디어니까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 ‘나에게도 힘든 결정인데,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라고 하셨어요. 그분도 이해하신 거예요.   그 안은 시각적 투명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투명성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 무렵에 한방계가 필요로 했던 것인데, 사회적으로 한방에 대한 불신이 커질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도 ‘이것은 우리 집안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7대째 한방을 해 오던 집안이었으니까요. 일단 안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그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보이는 건 세련된 기계지만, 실현하는 과정은 아주 지난했어요. 그 약 다리는 기계, 즉 탕전기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원래 모습은 그리 비주얼하지 않았어요. 탕전기를 만드는 회사가 대구에 있었는데 거기 분들이 서울에 오셔서 우리 도면과 그분들 제작도를 펼쳐놓고 함께 회의했어요. ‘이 재료 바꿀 수 있냐, 이거 이렇게 바꿔도 되냐’ 하면서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계가 갖는 자연스러운 거친 느낌, 날 것의 느낌을 없애거나 패키지 디자인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보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시각적 감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지금도 제가 건축가로서 갖는 큰 강점은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서 그런 걸 활용하지 못하면 건축가로서 제 능력의 일부만 쓰는 거죠. 본인이 뭘 하고자 하는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심지어 답도 정해져 있는 건축주에게는 그냥 친절하고 효율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별로 자신이 없고요.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한 건 좋은데, 다만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지는 열어줘야죠. 그래야 건축가가 잘릴 각오를 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경우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도 있었죠. 훈련하는 공간과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는데, 그런 형식은 선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제안은 받아들이는 건축주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합니다. 아이디어가 작동되어야 하니까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기회를 많이 얻길 원해요. 처음에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즉흥적인 생각이나 감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관찰과 일련의 합리적인 생각 끝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게 구현이 되면 결과가 즐거운 거죠. 결국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건축이란 것도 연장하면 기계인데, 이 기계를 어떻게 인간적으로,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느냐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그 두 건물에서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또 오기를 바라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처음으로 광활한 대지에 나갔다’는 표현으로 그 프로젝트의 성격을 설명하셨죠. 조건 많은 도심 골목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일종의 직주근접 프로그램인데 프로젝트 초기의 접근 태도, 그 공간을 만들어갈 때 주의 깊게 고민하셨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사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두 배의 시간이 걸렸어요. 설계를 두 번 했거든요. 천안 시청 옆 부지를 정해 설계를 마치고 착공 직전까지 했다가, 부지가 바뀌었어요. 사실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앞이 캄캄하긴 했어요. 다행히 몇 개월 후 기회가 다시 왔어요. 그때 이전 설계안을 다시 보면서 내적 크리틱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좀 더 객관적으로 내 설계를 보게 된 거죠. 보통 내 설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순간, 건물은 이미 지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머릿속에서 원래 설계했던 건물의 이미지와 생각의 잔상이 남은 상태에서 다른 대지에 설계하니까 또 다른 생각을 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현대캐피탈 쪽에서도 당연히 원래 부지에 설계했던 내용을 조금 손봐서 새 대지에 잘 앉힐 거로 생각했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뭔가 미진한 거예요. 실무적으로야 효율적일 수 있고 세부적인 어휘(vocabulary) 같은 것은 물론 가져올 수 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개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단면을 보고 있었어요. 배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스포츠이다 보니 코트의 천장이 높아야 합니다. 최소 8m, 보통은 16m 정도 있으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코트 주변은 그렇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요. 그러면 거기다가 숙소를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이렇게 코트와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면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다 보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주변에는 발코니석이 있는 것 같은 구조가 되더라고요.   훈련공간과 숙소가 한 건물에 있는 것에 대해 사용자의 부담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나왔을 것 같아요. 그 안을 제안했을 때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은 김호철 감독님이셨어요. 본인과 코치진의 가장 큰 고민은 선수들이 이동하면서 감기 걸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운동능력은 좋으나 의외로 면역력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면 심리적으로 좀 답답하고 압박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우려하셨죠. 그 부분은 저희도 고민하던 내용이라 저층부는 구심적으로 풀지만, 상층부는 주변 경관이 좋으니 밖을 향해 발코니를 내고 원심적으로 풀려고 생각했어요. 숙소에 있는데 코트에서 보이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구심에서 원심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건물 짓고 나서 비평 글을 몇 번 받았는데, 예상대로 판옵티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전형적으로 도면만 보고 도상학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죠. 그 건물을 직접 경험해봤다면 판옵티콘이라고 이야기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판옵티콘은 중심에서는 주변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중심이 안 보여야 하거든요. 즉 감시의 시선이 한 방향이어야 해요. 하지만 여긴 시선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공간이라서 상황이 다르죠.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체육계 분들과 인연이 생겼는데 김성근 야구 감독님께 이 건물 도면과 사진을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제게 ‘스포츠 시설 설계를 안 해보셨죠?’라고 묻더라고요. 이게 첫 건물이라고 했더니, 어쭙잖게 경험이 있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뭔가 근본적인 걸 생각한 결과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관습적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코치진의 고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물론 저도 매우 반가웠어요.   처음에 선수들도 이 안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선수단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한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내가 집과 사무실을 합쳐 산 지가 10년(지금은 16년)인데, 그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직업은 70, 80세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스포츠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대 40세면 은퇴한다. 프로 생활이 길어 봐야 십몇 년 남짓이다. 그동안 힘들게 선수 생활 해서 아주 좋은 결과를 안고 사회로 돌아가는 것과 인간적으로는 재미있게 살았는데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전자를 원할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리고 이 설계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최종 판단은 구단에서 할 테니 저는 최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전달했다고 했죠. 지금은 그 건물을 어떻게 쓰냐 하면, 합숙하건 말건 선수 개인의 자유에요. 지금의 최태웅 감독님이 그렇게 풀어줬어요. 그런데 본인들이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가 김종성 건축상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거대 공간을 싱글 레이어로 지지하는 기술적 성취도 있었죠. 네, 대각선 방향으로 50m에 달하는 거대한 지붕을 트러스 없이 싱글 레이어(single layer)로 해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구조 엔지니어 황경주 교수(서울시립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죠. 당시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와서 그동안 자기가 해온 일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체육 시설 프로젝트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제가 제안했어요. 황경주 교수와는 통인시장 등 다른 프로젝트도 몇 개 했었는데 이분과 같이 일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마치 건축가하고 이야기하듯이 하면 되는데 다만 이분은 계산을 할 줄 알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지붕 말고도 36m 길이의 벽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조 시스템들이 총망라되는, 구조의 역할이 큰 건물입니다. 저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건축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을 했고요. 아마 그런 점에서 김종성 건축상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나 합니다. 최근에야 깨달은 게 있는데, 이 건물의 레퍼런스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중정식 건물의 역사적인 선례들이 염두에 있었어요. 루이 칸의 필립스 엑세터 도서관이나 군나 아스플란트의 스톡홀름 도서관, 심지어 비잔틴 건축인 성 소피아 성당, 중세의 성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아마도 가장 심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김종성 선생님의 작품인 <올림픽 역도경기장>이었건 것 같습니다. 거대 경간을 해결하는 방법, 하중이 전달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단순한 외관 속에 복잡한 기능을 담는 과정 등에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대한 오마주 적인 측면이 있어요. 같은 스포츠 시설이기도 하구요. 우연 같은 필연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제가 여전히 모더니즘이라는 큰 흐름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의 기획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신가요?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제안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칼을 쥐여주고 내 목을 들이미는 거예요. 일반적인 디자인은 ‘이거 어떠세요, 저건 어떠세요’라고 제안할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획은 선택되느냐, 잘리느냐인 거예요. 이런 태도는 교보생명의 신용호 (1917-2003) 회장님에게 배웠어요. 제가 개업하기 이전,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실의 현지 법인장을 할 때인데, 회사의 주된 고객이 교보생명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저를 사전에 교육하셨죠. 그분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요. 다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황두진 소장이 직접 가서 부딪히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에 온 이후에 신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한번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김태수 씨가 믿고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냐’ 그러셔서 ‘네, 그렇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1980년대에 지은 교보생명 천안연수원이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전면 리노베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셨어요.   그 프로젝트를 서울 사무실과 미국 사무실이 같이 하는데, 강당과 공용공간은 미국에서 김태수 선생님이 하시고, 숙실은 제가 서울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예전 설계 당시에 김태수 선생님은 기본 계획을 하시고 숙실 등 세세한 것은 교보에서 상황에 따라 현지에서 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에 평면이 좀 이상했어요. 각 방의 화장실이 방 가운데 있어서 전체적으로 ㄷ자 평면이다 보니 침대 위치도 이상하고, 게다가 3인 1실이 기본이더라고요. 방의 갯수는 백 몇 십 개고요. 당시 IMF 사태가 한창일 무렵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교보라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기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화장실 하나 털어서 다시 만드는 것도 엄청난 일이잖아요. 이 ㄷ자 형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모형도 만들고 도면을 그려보고 계속 바꿨어요. 계속 퇴짜를 맞았고요. 물론 신용호 회장님은 제게 잘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도 불안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화장실 다 털어버리고 획기적으로 안을 바꾸어 갔더니 회장님이 보시고는 ‘이제 됐군’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 황 소장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화가 나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습니까’ 하시는 거예요. 임원들의 얼굴빛이 죄 어두워졌죠. 그래서 ‘방이 백 개가 넘어서 이대로 다 뜯어고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러시더군요. ‘그 고민은 내가 하는 겁니다. 물론 건축가가 그런 고민을 해주는 건 건축주로서는 고마운데, 그 고민 때문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안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라고요. 그러면서 크게 격려해주셨어요. ‘당신이 앞으로 오래 일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서 배워갈 수 있는 건 이거다. 건축주가 결국 판단할 거니까 당신이 믿는 대로 얘기하는 거다. 건축주가 힘들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대안을 찾지 않겠느냐. 좋은 게 있으면 소신 있게 보여줘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놀랍게도 정말 모든 방을 그렇게 고쳤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죠. 당시 제가 서른여섯, 일곱 즈음이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그 뒤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신껏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획가의 역할이 건축가의 영역을 확장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무적으로 보면 건축가의 작업에 여러 단계가 있는데, 기획, 디자인(개념을 위한 디자인과 실무적 디자인), 인허가, 공사 기간 중 감리, 완공 후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건물 관리가 있겠죠. 하드웨어 측면의 관리는 집주인이 하겠지만 의미상으로 유통하는 건축가가 한다고 보면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기획 단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 건축주든 제삼자든 누가 더 잘 한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설계나 인허가는 건축가밖에 할 사람이 없겠죠. 건축 설계에서 남이 가져갈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지 않아요. 다만 그 남은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곳에선가 ‘건축가의 게임’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최종 프리젠테이션이 끝나면 실시설계 납품하는 과정까지 누가 별로 개입하지 않아요. 바로 그 부분이 ‘건축가의 게임’인데 그게 많을수록 건축적으로 좋아지죠. 그런데 기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획은 건축가가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다만 건축가가 기획을 잘하면 작업에 연속성이 생기니까 좋아요. 건축가가 진심으로 기획의 의도를 최종 디테일까지, 의미 있는 소통까지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건축가에게 기획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나중에 의미적 소통으로 넘어갔을 때 양손이 묶인 채로 임할 수밖에 없게 되죠. 종종 건축주가 ‘사실 설계는 내가 했고, 그 사람(건축가)은 도면만 그렸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매우 많잖아요? 건축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엄격히 따지면 건축주가 기획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건축가가 도면 열심히 그리고, 모형 열심히 만들고, 대지에 열심히 간다고 기획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분명 아니에요. 거듭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 건축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초기 단계의 기획을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의식적으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건축가가 아니어도 좋은 기획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획을 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하게 될 게임의 룰을 제가 쓰고 싶은 거지요. 기획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매일 같이 훈련을 해야 해요. 우리 사무실에서 16년째 영추포럼을 하잖아요? 사실 기획을 해 보자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저나 우리 사무실의 기획 역량을 테스트하고 키워볼 좋은 기회를 스스로 갖고 싶기 때문이에요. 물론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독서로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들과 직접 대화 나누고, 어떤 주제로 누구를 초대할까 하는 고민하는 과정 모두가 기획이니까요. 일단 재미있어서 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획 능력이 배양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절대로 건축가이기 때문에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고도 건축과 관련한 기획을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획은 다들 하고 싶어 하는 거라 경쟁도 치열하고요.      최근 공간 기획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죠. 중요하죠. 제가 보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넓은 스케일의 기획을 한 사람들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걸 제안하는 거죠. 대표적으로 르코르뷔지에가 그렇고, 렘 콜하스도 기획하고 조직하는 게 뛰어난 건축가고요. 다만 저는 개념적으로 큰 성격을 결정하는 것을 잘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을 원해요. ‘아이디어는 나에게 다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구현해 줄 건축가 없나’하는 건축주에게 저는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닐 거예요. 다만 ‘이 사람의 생각을 내가 높이 사겠다. 일은 당연히 성실하게 할 거다. 그러므로 결과물도 남다르고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축주와는 궁합이 착착 잘 맞죠. 단순 기능인으로서의 건축가는 매력이 없는 직업이에요. 기획하고 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한옥이 돌아왔다> 등 책을 통해 건축가로서 생각을 전하고 도시에 대한 제안을 해오셨는데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도시에 대한 주제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결국 그것도 기획에 해당하는 노력입니다. 일단 제가 하는 직업으로서의 건축과 글쓰기는 매우 상보적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죠. 제가 기획하고 설계하고 싶다고 해서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그 기회를 스스로 얻고 싶으면 공모전 같은 것을 해야 하죠. 아쉽게도 공모전은 좋은 아이디어를 원한다기보다는 무난한 아이디어를 세련되게 잘 풀어주기를 원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가진 생각이나 뜻을 건축을 통해서 전달하기 이전에 일단 글로 풀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죠. 글은 건축과 달라서 남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잖아요.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내면 되니까요. 그런 게 저는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다 할 수도 없고 기회도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글쓰기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제 성격이 온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내적인 욕구가 큰 사람이니까요. 사실 건축계에서 동료, 선후배들을 봤을 때 무언가 별도의  분출구가 없으면 답답함에 시달리는 현상을 종종 감지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 다른 기회도 많이 가져다줘요. 무엇 보다 앉아서 조용히 글 쓰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주로 일과 시간 외에 글을 씁니다. 대부분 퇴근을 해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밥은 먹었고, 와인이나 위스키가 있고, 그렇게 글을 쓰다가 잠을 자러 가면 되는 상황이죠. 그 시간이 주는 물성을 최대한 즐긴다고나 할까요. 건축은 회의, 현장 방문 등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같이해야 하는데, 글쓰기는 혼자 할 수 있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전환이 너무 좋죠. 미술계에 보면 작가정신이 투철해서 평생 개인전을 한 번도 안 했다 하는 분도 있던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이나 작품을 공개하는 것에는 일단 자신이 어느 정도 여물었기 때문에 세상에 꺼내놓는다는 측면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완성되고 성숙한 인생이라도 매 단계에서 새로 배울 게 있는 건데, 자기 인생이 다 끝난 다음에 배운다면 그걸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정 기간 내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서 사회를 향해 끄집어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도 그렇죠. 그리고 글을 쓰면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세상과 접하게 돼요. 출판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나오면 강연을 하게 되니까, ‘이런 데서도 나를 부르나?’, ‘세상에 이런 모임도 있나?’ 하면서 삶의 우연에 저를 맡긴다고 할까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한 번 저를 굴려 보는 건데 그러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기도 하거든요. 하여간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 앉아서 내 생각을 겉으로 꺼내는 상황을 즐기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무지개떡’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가주택은 한국의 도시에 남아있는 건축 유형이자 실제 건축물이잖아요. 사실 ‘무지개떡’이라는 표현도 건축적으로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들어간 건물인데,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고자 한 건가요? 물론 그렇죠. 건축계에서 흔히 하는 유형적 분류대로 한다면 상가주택이나 상가아파트라고 했겠죠. 그런데 그건 너무 오염된 단어라고 생각했고 뉘앙스가 별로 안 좋았어요. 당시 그런 식의 건물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도 썩 좋지 않아서 그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소비자가 엄청나게 데인 상품명이 있다면 그걸 또 쓸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것 중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진화 발전시킬 부분이 있죠. 그러면 리브랜딩을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상가아파트, 상가주택을 리브랜딩 하는 거죠. 그리고 이름만 바꾼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향점이 다르니까요.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디테일도 당연히 중요하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책도 써볼까 싶어요. 좋은 무지개떡 건축이 되기 위한 각종 디테일에 대해서요. 가령 1층에 레스토랑이 들어온다면 환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음식 냄새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렇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사전처럼 정리해서 ‘실무 디테일 사전’을 써볼까 하고 있어요. 엔트리가 한 200개 정도 되는 책이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실제 건축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지만, 답이 항상 하나는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말씀대로 16년째 직주근접의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고, 아주 의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한 거예요. 그전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굉장히 오래, 많이 했어요. 대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어마어마한 거리를 매일 왕복했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어요. 서울건축에 다닐 때 과천에서 여의도로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 처음 유학가서는 학교 옆 아파트에 살았지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아예 다른 도시였어요. 매일 편도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다녔죠. 당시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한국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차 때문에 집에 일거리를 싸서 가곤 했어요.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고요. 그때 가장 싫었던 건 ‘아차 이거 회사에 두고 왔는데’, ‘아, 이거 집에 있는데’ 하는 거였어요.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돼서, 집과 사무실을 아예 붙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를 알게 됐고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숙달이 되어 괜찮아졌지만 처음 왔을 때는 몸이 많이 상했죠. 너무 앉아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도 많이 했어요. 아침에 집을 나와 골목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서 다시 출근하고 저녁에는 그 반대로 한다든가. 소위 말하는 직주근접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익힌 건 이사 후 2, 3년 후에나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무조건 걷기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고요. 나름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앉아있는 시간이 긴 것은 여전히 사실이에요.   페이스북에 소장님의 생각을 풀어내고 계시죠. 관심사에 대해 적은 글의 정보량이 웬만한 자료 조사를 뛰어넘기도 해요. 무언가 발굴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신다고 할까요? SNS는 제가 일과를 다 마치고 마실나가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성향이 조사하고 앞뒤 관계 맞춰보는 걸 좋아하니까, 어떤 분들이 보기에는 좀 ‘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페이스북에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안 올립니다. 일은 일이니까요.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건 많지만요.   카약을 타시거나, 캠핑하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하는 취미를 갖고 계시죠. 모두 고독을 즐기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웃음) 요새는 SNS가 취미가 됐죠. (웃음) 역시 그것도 글을 쓰는 것이죠. 건축이나 글쓰기 모두 생각도 많이 하고 머리도 많이 써야 하는데 그래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NS는 저의 직업과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잘 조율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아직은 즐겁게 하고 있고요. 사실 제가 카약을 타든, 글을 쓰든, 답사하든 SNS를 통해 일부 드러나기 때문에 착시현상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건축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몸을 험하게 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중 카약이 참 좋고, 요즘은 답사로도 그런 욕구를 많이 풀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니까요. 특히 답사는 여러 사람과 같이 다닐 수 있으니 나름 즐겁죠. 음악과 관련해서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은 전원이 노래하고 전원이 악기 하는 밴드에요. 그러니까 제가 의외로 남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요. 다만 선택권이 있어야 하겠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요. 그래서 지금도 남들과 어울리다 굉장히 늦게 들어올 때도 바로 안 자고 한 시간 정도 혼자 있다가 자는 버릇이 있어요. 여러 사람과 있다가 바로 집에 들어와서 자는 건 저한테 안 좋더라고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단체여행을 못 가요. 몇인 1실을 주잖아요. 부부가 아니면 성인은 같이 자는 거 아니라며. (웃음)     앞서 한옥을 다루면서 다공성, 중첩된 기하학 등 건축 개념으로도 이어졌다고 하셨는데요. 한옥의 고유한 가치가 반영된 현대 건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저 자신의 관심을 넘어서, 크게 얘기하면 한국 건축계의 관심이죠. 한국 건축계에는 메시아 신앙이 있어요. 누군가 나타나서 통쾌하게 국제적으로 한국 건축의 위상을 높여주는 거죠. 다만 소위 일반적인 글로벌 아키텍처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DNA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건축으로요. 그걸 보면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좋고 외국인도 보면 경탄해 마지않는, 그런 건축가의 등장에 대한 메시아 신앙이죠. 일본은 그 길을 갔어요. 일본의 근대화도 우리 못지않게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발전이라는 게 원래 자기 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일본도 그 이전에 해온 많은 일을 부정해야 했으니까요. 다만 일본은 탈근대화 과정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소위 ‘젠’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을 글로벌 스탠다드의 단계까지 올려놨죠. 수많은 건축가가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건축을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다만 한국 건축이 과연 그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 건축가 왕슈만 해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왕슈의 건축이 직설적인 요소를 너무 눈에 보이게 차용한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왕슈는 하는 말과 만들어낸 작품 사이의 괴리가 큰 사람이죠. 말은 농경사회의 전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그런 그도 도시 상황으로 들어오면 별수 없어요. 강연을 들었는데 그 괴리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더군요. 좋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서 말을 가리는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현실을 직시하는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인이 그렇게 자기의 속내를 숨겨가면서 교묘한 이중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릭터인가? 한국인은 좀 순진하게 솔직한 면이 있어요. 그게 미덕이건 아니건 한 특성이죠.     글로벌한 측면에서 봤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 문화(local culture)는 문화 다양성의 요소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각 지역은 자기들의 문화에서 무언가 근사한 것을 끄집어내서 글로벌한 문화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어요. ‘나는 지역 문화나 역사와 상관없다, 오로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만 관여하겠다’하는 원초적 근대주의자가 아직도 많은데,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진화라고 믿고요.   모더니즘 초기 단계에는 가장 근저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종교나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격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가 안 되는 거죠. 인간이 100% 합리주의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 제시는 못 하고 있죠. 그래서 모더니즘은 폐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 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좀 넓은 접근, 다양한 관점이 필요해요. 지역 문화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걸 할 수 있으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어요. 저는 예전부터 한국 전통건축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지, 이것을 들고나와 오직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식의 접근은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말하는 ‘다공성’이나 ‘중첩된 기하학’ 같은 것은 한국 사람에게만 어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일 수 있어요. 생각의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 개념을 잘 받아들여서 유용하게 쓰면 됩니다. 막연하게 그것을 만들어낸 상황이 한국에 있었구나 하는 정도가 족하지, 마치 국가 브랜딩 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한 건축가가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주장을 할 수는 없어요. 제 경우 무지개떡 건축은 도시 건축의 기본 유형에 관한 문제고,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다공성’(벤야민의 다공성과는 다른 의미로)과 ‘중첩된 기하학’이 건축가로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될 확률이 높아요. 앞으로 제가 제3, 제4의 이론을 또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이론 안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건축의 세계를 실물로 펼쳐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 될 거로 생각해요.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의 제 경력에서 말이죠. 이미 무지개떡 이론이 예일 대학교에서 펴내는 계간지에, 개성공단의 미래와 관련된 복합도시의 가능성에 대한 논문이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저널에 소개되는 등 제 작품뿐 아니라 생각이 외국에도 여러 경로로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가져왔던 생각들이 점점 집대성 되는 과정이지요. 거기에 공감하는 분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Special 김중업을 만나다 with MMCA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 타계 30주년을 맞아 건축가 김중업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다. 오픈하우스서울 2018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협력해 <MMCA 건축기행-김중업>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다. 평소 방문 가능한 김중업의 대표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사적 공간인 주택 2채의 오픈하우스를 진행한다. 전시와 연계해 직접 건축물을 탐색해보는 자리이다.  --------------------------------------------------------------------------- 김중업 다이얼로그 2018.8.30.-12.1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2전시실과 중앙홀 www.mmca.go.kr ---------------------------------------------------------------------------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자 한국에서는 유일한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건축가 김수근의 라이벌로 불리지만 그와 달리 국가로부터 추방을 당한 비운의 건축가. 이 말들은 김중업을 설명하는 낯익은 수식어다. 시인을 꿈꾸다 건축가로 전향한 그에게 건축은 낱말 대신 조형으로 빚은 시였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1979년, 오랜 외국생활 뒤 귀국해 가진 대담에서 오십대 후반에 이른 김중업은 이런 말을 한다. “시대는 많이 변했어요. 좀 더 적극적으로 사인을 보내야 되겠고 좀 더 소란해져야 되겠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시를 써 오던 건축가들이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거지요.” 이 전시는 김중업의 말대로 그의 건축이 ‘시’에서 점차 ‘산문’의 태도로 흘러갔음에 주목했다. 이 문장은 김중업 타계 30주기를 맞는 지금 그를 한국 건축계의 신화적 존재로 바라보기보다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물에 근거해 동시대 문화예술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이번 전시의 의도를 뒷받침해 준다. 또한 지금까지 그의 상징적 건축물의 조형성을 신화적 이미지로 주목해 왔다면, 시대와 분투하며 구현했던 도심 빌딩, 주택, 문화 및 상업공간, 후기의 유토피아적 계획안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러한 그의 넓은 이야기를 담고자 기획된 전시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을 관통하는 사유의 여러 측면들을 넘나들면서 그의 건축과 새로운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이다. 그의 작품을 조형 언어로 분석하는 데서 나아가 1950년대부터 88서울올림픽 직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시대에 보냈던 ‘소란스러운 사인’을 읽어 보려는 시도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의 작품을 단선적 연대기 순으로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싼 사회문화 전반의 복합적인 관계망을 펼쳐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이 전시는 그의 초기 작업 안에 공존했던 상반된 가치인 ‘세계성과 지역성’에 먼저 주목했다. 그리고 항상 김중업 건축의 개념적 중심에 있던 ‘예술적 사유와 실천’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그의 건축을 ‘도시’라는 문맥을 통해 보다 넓은 시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도시와 욕망’이라는 주제어를 설정했고, 마지막으로 ‘기억과 재생’이라는 이슈로 지어진 지 삼십여 년이 모두 넘은 그의 건축을 건축의 수명, 도시 재생, 현대적 문화유산의 보존 문제 등 건축의 시간성을 둘러싼 최근의 중요한 논의들로 짚어 보려 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일부는 이미 철거되어 사라졌거나 처음 기능과는 다른 용도로 리노베이션되었다. 지금 이 전시가 열리는 순간에도 변화는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건축물의 수명은 삼십 년이 채 되지 못하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그의 작업은 이제 또 다른 기로에 서 있다. 공교롭게 김중업이 떠난 지 삼십 년이 되는 지금, 그가 남긴 건축은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위태롭게 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운 좋게 김중업이라는 건축가를 새롭게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김중업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 재빠르게 흘러가는 ‘재생’이라는 화두 속에서 1세대 작가들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그 과제를 푸는 하나의 시작점으로서 건축,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관계망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단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글 김형미, 정다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이 글은 10월 중 출판사 열화당에서 발간 예정인 『김중업 다이얼로그』(가제) 책에 수록될 기획의 글을 일부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김중업(1922-1988) 건축가 김중업은 1922년 평양 출생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 에콜 데 보자르 식의 건축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마츠다 히라다 사무실에서 일한 뒤 귀국하여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부산에 머무르며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그에게 1952년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베니스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 그곳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그는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일했다. 귀국하여 서울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부산대학교 본관, 주한 프랑스 대사관 등을 설계한다. 귀국 후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던 그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들을 한 것을 계기로 1971년 프랑스로 추방을 당한다. 이 직전에 발표했던 삼일빌딩은 김중업 건축 후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서울의 위상을 상징하는 작업이었다. 1978년 귀국한 그에게 서울은 너무나 급변하는 장소였고, 그 속에서 삼일빌딩의 뒤를 이은 고층의 유리 건물들을 설계하며 건축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그의 작업도 전과는 다른 미래주의적 면모를 띄게 되었다. 유토피아적 이상을 꿈꾸었던 그의 말년 계획안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올림픽 평화의 문이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2014년 김중업의 가족이 김중업건축연구소의 자료 대부분을 안양시에 기증하는 것을 계기로 김중업건축박물관이 개관하게 되었다.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③ 동네, 골목, 그리고 한옥   2000년에 독립하셨는데, 처음엔 이곳 통의동이 아니셨지요?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소가 서초동에 있었는데 그 사무소를 정리하고 제가 독립하면서 공간과 집기를 승계하는 프로세스를 밟았어요. 지금도 2000년 5월 31일 퇴근하면서 TSK 건축사사무소 간판을 떼고 6월 1일 출근하면서 제 간판을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 막판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했어요. 당시 제가 대표였지만 개업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김태수 선생님이 많이 배려해주신 거죠. 공간이 다 필요하지 않으니 일부는 집주인에게 돌려줬고 작게 시작했어요.   경복궁 서측 이곳 통의동으로 오시게 된 게 <열린책들> 프로젝트가 계기가 되셨는데요. 그게 첫 프로젝트였나요? 정확하게 말하면 첫 프로젝트는 동대문 시장의 한 상가를 리노베이션하는 프로젝트였어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 시절에 제가 수주하면 제한적으로 일부 프로젝트는 제 이름으로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때 동대문 시장 한 상가의 전면을 고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개업할 무렵 근처 더 큰 상가의 전면 리노베이션을 의뢰받았어요. 그때는 실망감도 있었어요. 온갖 큰 꿈을 갖고 내 사무소를 시작하는데 상가를 고치고 있다니 싶었죠. 하지만 건축가로서 살아가는 것에는 냉엄한 리얼리즘이 있다는 걸 그때 배웠죠. 동대문 상인들과 일하면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열린책들’ 홍지웅 대표와 연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시더군 요. 오래된 적산가옥을 사옥으로 쓰고 있었는데 불이 나서 새로 짓고 싶다고요. ‘위치가 한갓지고 좋아요’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경복궁을 마주하고 있는 땅이었어요. 건축가로서는 큰 도전인 거죠. 개인적으로 조선왕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경복궁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건축가로서 첫 작업인데 그 위치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김태수 선생님의 금호미술관과 대칭점에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복잡한 서울 사대문 안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네요 아직도 <열린책들> 사옥이 저에게 시사하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골목길 인파이팅(infighting)이 시작된 거예요. 그 건물은 대로에 있지만 뒤편으로는 지적(地籍)이 꼬여 있는 골목길에 접하다 보니까 본격적인 ‘골목의 애환’, 즉 ‘앨리 블루스(alley blues)’가 시작됐어요. 그때 건물의 외연은 컨텍스트를 고려한 방향으로 가는데 내용으로는 지적도 따져야 하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공간은 앞서 말한 기하학적 질서를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가지를 병행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경제학에 ‘globally asymmetric; locally symmetric’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그 말처럼 전체 시스템은 비대칭인데, 부분적으로는 대칭인 방식을 채택하게 된 거죠. 그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플레이(geometric play)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한옥을 하면서 더 힘들어졌죠. 한옥 평면에는 곡선이 없고 직각밖에 없잖아요. 부드럽게 휠 수도 없고요. 결국 이 동네로 오면서 내적 질서를 갖는 단위 공간을 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건축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열린책들> 이후 한동안 저 자신도 사무실 안에서도 <열린책들>은 넘어야 하는 벽이었는데, <춘원당>을 하면서 넘었어요. 인파이팅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그런 저를 해방해 준 프로젝트고요.   건축적으로 <열린책들>의 인파이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열린책들> 전면의 효자로는 넓고 반듯하고 의전적인 길이잖아요. 앞의 경복궁 돌담은 개념적으로도 일자의 벽이고요. 하지만 대림미술관 뒤쪽으로 가보시면 골목이 꼬불꼬불하고 복잡해요. 그러면 골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그 안에서도 사각형을 고집할 것이냐 아니면 유연해질 것이냐는 갈등이 생겨요. 그 부분에서 저는 질서 있는 유연함을 찾겠다는 거였죠. 저는 지금도 자유 형태(free form)는 절대로 못 할 사람이고요. 그다음 마당을 전면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 놓았어요. 원래 그 건물은 골목이 뒤로 연결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개념이었죠. 자동차도 뒤로 진입하는 방식이었는데 민원 때문에 할 수 없이 앞으로 다니도록 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파이터의 기질을 보여준 것은 카리프트예요. 카리프트는 양쪽으로 문이 열려서 뒤로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놨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예를 들어 그 민원인이 이사를 가면 가능하도록 열어놓은 거죠.   복잡한 골목과 사연이 얽힌 땅에서 건축하면서 무엇이 달랐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복잡한 땅에 건물을 앉혀 봤는데 그다음부터는 그런 프로젝트를 정말 많이 하게 되었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김태수 선생님이 한판 붙듯이 땅을 다루는 대가인데, 비유하자면 선생님은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서, 저는 비슷한 게임을 굉장히 좁은 링에서 하는 거죠. (웃음) 거기다 한옥의 경우 심의와 민원이 달라붙으면서 종합선물세트가 됩니다. <열린책들> 프로젝트가 남겨준 또 다른 유산이라면, 제가 본격적으로 도시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는 거에요. 도대체 이 건물 뒤는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그 일대가 옛날 동양척식회사 사택 단지였더군요. 해방 이후에 동척 사택이 민간에게 적산가옥으로 풀려 나온 거죠. 원래 단지 내 도로는 법적 도로가 아니잖아요? 그 때문에 보기엔 도로인데 그 가운데로 대지 경계선이 지나가는 거죠. 그래서 민원도 발생했던 거고요. 그런 역사를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된 거죠. 우리 도시에는 아직도 지나간 시대의 흔적이 족쇄처럼 남아 있다가 21세기에도 발목을 잡는구나, 그게 재미있었고 공부해야겠구나 했어요. 글 쓰는 건축가가 된 계기이기도 하죠. 아시겠지만 지금도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 자체에 굉장히 관심 있어요. 제 정체성이기도 하죠.   어떤 건축주가 “복잡한 골목은 황두진이 최고”라고 했다는 표현이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연결된 것이 <춘원당>이에요. 춘원당에 저를 소개해준 분이 ‘골목은 이 사람이 제일 잘해요’라고 했다더군요.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웃음)   골목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보다는 골목에 대응하는 건축을 풀어낼 때의 태도나 접근방식이 섬세해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도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내겠다는 욕심은 제가 버린 적이 없죠. 골목이 이런 상황이니 여긴 찌그러져도 된다고 하는 건 용납 안 했던 것 같아요. 건축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질서 잡힌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춘원당>의 도면은 지금 봐도 그런 생각이 강박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주변은 찌그러질지언정 건물은 똑 떨어져야 하고요.   건축가 황두진의 작업에서 한옥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옥 프로젝트를 연달아 하면서 한옥 건축가로 알려진 부분이 흥미로워요. 제가 보기엔 현대 건축가로서 한옥의 시스템을 해체해서 텍토닉을 탐구하는 자세가 더 강한데, 사회에서는 한옥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아름다운 전통으로 포장되거든요. 반대로 건축계에서는 당시 문화재로서 한옥의 가치는 말하면서도 건축가가 다뤄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의식도 팽배했습니다. 미묘한 줄타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가 한옥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는 건축가인데, 그에 못지 않게 관심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옥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역시 사람이죠. 나무와 벽돌의 윤형주 씨가 계기를 만들어주었어요. 귀국하고 나서 개업할 무렵에 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구 소장을 만났어요. 그런데 원서동의 한옥 현장에서 만나자는 거에요. 그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야?’ 하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가서 보니까 참 재미있더라고요. 조 소장이 신기한 일을 하네, 생각했죠. 그러다가 윤형주 사장님이 북촌에 한옥을 하나 사서 고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제 첫 반응은 ‘그걸 왜 제가 해요?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닌데’였죠. 실무로 다룰 생각도 안 했고, 오히려 하면 안 된다고 배웠고, 그래서 잘 모른다고 했어요. 결국 그분이 저를 설득하셨죠. 그런데 한두 채 해보니까 놀랍더라고요. 한옥 건축이 굉장히 체계적인 거에요. 심지어 말로 지을 수 있을 정도로요. 지금 그 어떤 현대건축도 한옥만큼 체계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ㄷ자 집인데 정면 몇 칸, 측면 몇 칸, 경간 얼마에, 지붕은 팔작이나 맞배로 하면 대충 집의 얼개가 만들어지잖아요. 그런 건축이 어디 있겠어요?   초기에는 기존 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점점 과감한 시도가 이어져요. 내부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에서 나아가 나중엔 한옥 지붕에 유리를 얹는 시도도 하고요. 처음 한두 채는 기존 도시형 한옥 본연의 방식대로 접근했어요. 집주인도 그걸 원했고요. 크게 보면 제 한옥 클라이언트는 둘로 나뉘어요. 하나는 원형에 충실하되 살기 편하게 해달라는 분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요소가 들어가도 괜찮고 제 생각대로 해달라는 분들이에요. 후자는 해방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프로젝트 규모가 커져서 휘닉스스프링스 컨트리클럽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한옥을 하게 됐는데, 물론 그분들도 재현(representation)한 한옥을 원했죠. 주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 정도 규모인데, 처음에는 대들보를 목철 합성으로 하는 안을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주 건물은 전통 방식대로 갔으면 좋겠지만 나머지 한 군데는 황 선생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두 건물을 잇는 회랑에 유리 지붕을 덮겠다고 했고 재미있어하셨어요.   유리와 목구조의 결합이 신선했어요. 실제 짓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기술적으로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시공 현장의 한옥 대목과 유리 다루는 사람이 실무적으로 다른 체계로 일하는 사람이어서 현장 소장이 이를 결합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결국은 우리가 설계 감리자로서 그 역할을 했는데, 모형을 만들어 설명해준 다음에야 진행됐어요. 그런데 한옥은 주초 위에 그냥 올려놓은 집이잖아요. 위에서 육중한 지붕으로 누르는 건데 우리가 설계한 구조에서는 지붕이 유리라서 연처럼 날아간다는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한 번도 집이 날아간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주춧돌에 앵커를 넣어 기둥을 모두 볼트로 붙들어 맸어요. 못 날아가게. (웃음) 그전에는 비유적으로만 지붕이 날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날개로구나 하는 생각이 재미있었고요. 나중에 그런 생각들이 합쳐진 게 통인시장 프로젝트예요.   통인시장 입구의 지붕에서 앞서 제안하셨던 목철 합성의 부재를 활용하셨잖아요. 덕분에 부재가 가늘어지고 유리 지붕과도 견고하게 연결되었어요. 처음에는 시각적으로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통인시장 프로젝트는 우리 사무실의 한옥 연표에서 완전 초기는 아니고 중간보다 조금 앞쪽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념적으로는 아직 그 이상으로 확장이 안 되고 있죠. 그 개념이 확장되면 저는 한옥이라는 타이틀도 필요 없다고 봐요. 또 다른 관점은 한옥 무지개떡 건축을 해보는 거죠. 이미 대학교 3학년 때 그려봤어요. 당시 ‘3층이면 굳이 나무로 할 필요 없잖아?’ 하면서 콘크리트로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나 봐요. 강봉진 씨가 설계한 국립박물관(현 민속박물관)은 4.3 그룹 등으로부터 완전히 평가 절하되었잖아요. 지금 봐도 희한한 건물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콘크리트로 한옥을 만든 게 그리 몹쓸 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조건축의 전통이 있던 나라에서 다층화되면서 목조를 콘크리트가 대체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에서도 볼 수 있어요. 우리만 그리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꼭 그럴 필요가 있냐는 거죠. 싱가포르에 강의하러 갔다가 마침 현지 체류 중이던 정인하 교수님과 차이나타운에 갔었어요. 그곳의 헤리티지 뮤지엄이 원래 상가주택이었어요. 그걸 박물관으로 개조했는데 골격이 콘크리트더군요. 다시 지었냐고 물어보니 오리지널이라는 거예요. 원래 목조 아니냐 물어봤더니 그 박물관 사람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시대가 바뀌었는데 신재료를 쓰는 게 뭐가 이상해, 하더군요. 저도 동의해요. 안동대 정연상 교수님이 자택을 철골조 한옥으로 지으셨는데 정말 신선했어요.   목구조에서 다층화가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콘크리트로 목구조를 흉내 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목재를 탄화시키고 철골과 합성하고 기기묘묘한 재주를 피우면 고층 목조가 가능하겠죠. 그런데 한옥을 다루면서 어느 순간부터 건축의 보편성에 눈을 뜬 것 같아요. 물론 특정한 사람을 위해 어쩌다 짓는 건축도 있지만, 결국은 그런 건물조차도 보편성의 토대에 있잖아요. 소위 ‘랑그(langue)’의 토대에서 ‘파롤(parole)’이 있는 거죠. 굳이 얘기하자면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의 문화적 관습인지도 모르겠어요. 부채의식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경험이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한옥의 형태를 지우고 추상적인 공간 요소만 다루는 접근이 4.3 그룹으로 대표되는 경향이라면, 한편에는 한옥의 원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소장님 작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한옥의 시스템 혹은 목구조의 체계, 구성 요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다음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통인시장이 그런 경우죠. 물론 어느 지점에 가면 정말 철학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한옥을 놓아야 하는 지점이에요. 그때가 되면 정말 한옥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옥에서 뭔가 얻어왔으면 된 거죠. 다시 말해 한옥 그 자체의 작업이 있고 한옥의 개념과 가치가 있는데, 한옥이 아니면서 한옥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부분적으로는 거기까지 갔다고 생각하고요. 그 이상은 누가 기회를 줘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보니 기다리는 중이고요. 사실 과학적 합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한옥은 말이 안 돼요. 너무 재료를 많이 쓰고, 구조로서의 효율이 떨어져요. 게다가 미국식 경량목구조 건축과 비교하면 여염집이라기엔 너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는 구조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한옥의 경우 과연 어디까지 구조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예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렇다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가, 그건 또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나름대로 해답을 준 건 건축계가 아닌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이석재 교수였어요. 제 딜레마를 얘기하니 ‘그럴 땐 둘 다 잡고 가는 거예요’ 라고 하더라고요. 답이 바로 안 나온다는 거죠. 전 세계 건축을 봤을 때 지금 관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형상, 비례, 체계 등에 담겨 있는 집단의 기억이 소중하지 않다고 하면 건축에 뭐가 남냐는 거죠. 인류 문명 전반이 사실 그런 것일 텐데 말이죠. 분명 냉엄한 이론가 입장에서는 양립이 안 되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작업하는 사람으로서는 둘 다 안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게 이야기해준 것이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론 논쟁이었어요. 퇴계는 안동에 있으면서 중앙정계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기대성은 훨씬 어리지만 중앙정계에서 놀던 전라도 출신의 신진이었죠. 사단칠정론은 외국에서도 유명해서 ‘Four-Seven Debate’라고 하거든요. 한국 주자학의 대표적인 논쟁으로 동양 철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요. 겉보기에는 퇴계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구조래요. 그런데 퇴계가 ‘당신 말이 맞고, 내가 수세에 몰린 것도 맞는데 그래도 나는 못 놓는 게 있다’라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다고 해요. 그게 굉장히 감동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석재 교수도 내게 끝까지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영원히 승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놓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한옥 작업은 저를 독특하게 혹은 어떤 각도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제 커리어에서 하나의 특별한 요소인데 돌이켜보면 아마 그걸 안 했으면 무지개떡 건축을 추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단층 저밀도 건축인 한옥의 한계에서 시작된 생각이었으니까요. 물론 무지개떡은 프로그램에 대한 개념이지만, 저의 또 다른 건축 개념인 ‘다공성’과 ‘중첩된 기하학’은 한옥을 실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경영학에서 말하는 ‘우회를 통한 축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한옥 작업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한옥을 원하는 사회의 일차적 요구에 부응한 거죠. 다만 그 과정에서 제가 얻은 것은 나름대로 완성도 있게 만든 일련의 작업 결과물과는 별도로 앞에서 말한 다공성과 중첩된 기하학, 이 두 가지 개념이에요. 한옥 실무가 없었다면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겠죠. 앞서 한옥은 말로도 건축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일반 설계 과정과 다를 텐데요. 더군다나 한국건축 고유의 미는 섬세해서 설계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예측해 구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처마의 곡면처럼 말이죠. 최근 지어진 한옥 중에서 비례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된 장면들이 있거든요. 한옥의 실현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혹은 느끼신 점은 없는지 궁금해요. 영원한 과제예요. 시스템의 특성이 개별 케이스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그걸 가장 많이 느끼는 게 한옥 작업이죠. 일단 좋은 대목을 만나야 하고요. 이제는 도면을 많이 그려봐서 뭐가 되고 뭐가 안 되겠다는 것을 대강 알죠. 다만 조형이 복잡해서 전부를 예상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역사적 레퍼런스를 근거로 삼아가며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한옥이 갖는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것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어요. 다만 사람의 삶이 풍성하게 담기기 위해서는 한옥 이외의 다른 요소들도 많이 필요한데, 저는 거기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어요. 그냥 필요하면 하는 거죠. 아마도 조만간 한옥 지붕 위에 태양광 패널을 어떻게 접목할까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한옥의 역사가 한번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그런 시도를 어렵게 하죠. 그 사실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기억처럼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게 좀 과장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서양의 고전건축도 근대로 넘어오면서는 다 중단됐잖아요. 근대란 인류 역사상 보통의 사건이 아니었으니까요. 그 단절로 인해 우리가 한옥을 바라보는 시각이 편향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제게 그런 강박관념은 적어도 2000년부터 20년 동안 실무 과정을 통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형이상학적으로는 남아있을지 몰라도요. 우리 사회가 한옥을 짓지 않은 것이 1970년대 정도라고 아는데 그러다가 2000년 전후해서 다시 짓기 시작했으니 그 기간이 30년밖에 안 된 거고요.   가회헌의 별채로 지형에 맞게 틀어진 ㅅ자 형 한옥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옥이 만약 진화해서 변형을 시작한다면 여기가 출발점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임팩트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저도 유리 지붕과 ㅅ자 평면은 이제 현존하는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또 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한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빈 공극(cavity)들, 즉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안에 다양한 현대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에요. 한참 한옥 프로젝트를 할 때 저 자신도 ‘내가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을까?’ 생각했는데, 그때 그 프로세스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면서 가장 핵심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 건축가 조민석 소장이에요. 신기하다고 하면서, ‘황소장님 이야기대로 한다면 동그라미 한옥도 된다는 거잖아요?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 등이 하듯 기둥 쭉 박은 한옥 유니버설 스페이스가 가능하단 거잖아요?’라고 묻기에 ‘그렇죠’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보통 구축술을 가지고 한옥이라고 하는 거지, 공간의 집합을 두고 한옥이라 하지 않는다고, 그걸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한옥이 돌아왔다> 책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어요. 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한옥으로 지어놓고 이게 한옥이냐 하면 누가 봐도 한옥이라 하겠지만, 사실 그 건물의 공간 개념은 한옥이랑 상관없어요. 그래서 구축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거죠. 근대주의자들은 자꾸 공간의 집합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건 이제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이야기죠. 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나오긴 하지만 안채, 사랑채란 단어를 이제는 거의 안 쓰잖아요. 그래서 구축술과 공간의 집합을 구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옥과 관련된 이론에 기여를 했다면 그런 부분이겠죠.   한옥의 재해석에 대해 반발도 많았다고 하셨잖아요. 초기에 한옥의 원형에 충실하다가 가회헌 ㅅ자 한옥처럼 변형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대전제를 깔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일반 현대건축은 구체적으로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규정이 많지 않아요. 이 경우 설계란 열린 답을 찾아가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면, 설계를 시작할 때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한옥은 아무래도 기존 관념이라는 게 강하게 작용하는, 소위 장르적 특성이 있는 건축이죠. 그러면서도 모든 관습적 기존 관념을 100% 인정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요. 당시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것은 대지에 어떻게 적응하는가 하는 거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한옥에서는 건물에 대해서는 완고하고 외부 공간의 이형은 관대하게 봐줍니다.   마당과 같은 비어있는 공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비어 있는 외부 공간은 얼마든 변형되어도 좋고, 심지어 거기서 새로운 논의를 찾으려고도 하죠. 예를 들면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조경(landscape)에서 보이는 외부 공간의 기하학적 질서만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세계는 아니란 말이에요. 굳이 얘기하자면, 경복궁처럼 내외부 공간이 똑같은 기하학 질서로 조율된 세계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가 이해하는 한국적 특징은 창덕궁처럼 집 자체의 질서는 양보하지 않는데 외부 공간은 양보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평지보다는 산이 많은 조건이기 때문에 ‘지형에 순응한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경복궁과 창덕궁 중에 무엇이 한국적이냐고 한다면 압도적으로 후자일 텐데, 하지만 그것도 그만큼 외부 공간이 풍성할 때나 쓸 수 있는 방식이죠. 일반적인 도시형 한옥은 입체적으로는 고밀도가 아니지만, 평면적으로는 고밀도잖아요. 북촌의 경우도 대지의 형상이 네모반듯하지 않고 제각각인데, 그런 곳의 한옥에 양보 없는 직교좌표계만 적용하면 너무나 많은 외부 공간이 낭비되죠. 도시 건축에서 그것을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집을 조적으로 짓든, 콘크리트로 짓든, 철골로 짓든, 유연하게 각을 만들 수 있는데 한옥은 그런 가능성이 없었던 거죠. 앞에서도 이야기한 질서있는 유연함이 필요했어요. 만약 한옥에 대해 문화재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면 둔각을 갖는 ㅅ자 형태는 절대로 안 했을 일이죠.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형태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텍토닉 차원에서 너무 말이 안 된다면 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대목과 상의하니 가장 먼저 나오는 답이 ‘뭐 팔각정도 있는데요’ 였어요. 결국 문제없다는 거죠. 건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제 문제지만, 대목의 입장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거였어요. 다만 그 판단이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거죠. 사실 대지를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게 큰 명분이었고요.   새로운 평면 형태를 도입하는 것이니 한옥 심의 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북촌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수많은 심의 장벽을 통과해야 하는 걸 말하는데, 특히 그때는 비교적 이른 시기였어요. 뭐든 새로운 것은 그냥 통과되는 법이 없고 난항을 겪는 거죠. 그걸 다 알고 했고요. 사무실의 정상적인 운영 내지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너무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죠. 아니나 다를까 심의를 세, 네 번은 받은 것 같아요. 심지어는 심의가 부결되면서 선례를 찾아오라는 주문이 주어졌어요. 그래서 동궐도(東闕圖)나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같은 것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서 돋보기를 들고 찾아보기도 했어요. 물론 그런 예는 없죠. 북촌이나 서촌을 다녀보면 이상하게 찌그러진 집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거고요. 사실 선례를 찾아오라는 건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모욕을 주는 건데, 아마도 심의하는 분 입장에서는 그런 새로운 시도가 역사적 근거 없이 이루어지는 걸 될 수 있는대로 막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 다음 심의에서 ‘선례 없는 걸 아시면서 찾아오라고 한 거 아니냐,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없었고, 굳이 있다면 팔각정이 있는데 그렇게 구차하게 선례를 들이대서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시대가 변했으니까 내가 21세기 ㅅ자 한옥의 창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런 기회를 한번 주시면 좋겠다. 한번 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안 하겠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분들도 논리적으로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아요. 한옥의 미래에 관해 쓴 수많은 글 중 어느 것도 한옥을 있는 그대로 박제해서 재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아요. 다들 변화해야 한다고 써요. 하지만 막상 변화가 이루어진 걸 보면, 머리로는 이해하려 하지만 몸은 거부해요. 일단 눈이 싫어하고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런데 설계자가 의지를 가지고 설득을 하면 굳이 못 하게 할 이유도 없는 거죠. 가회헌 ㅅ자 한옥을 하고 나니 ㅅ자 한옥이 주는 독특한 내부공간의 운동성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외부적 제약이 없을 때 순전히 건축공간 구성이라는 차원에서 그 방법을 쓴 적은 없어요. 건축적으로는 사례를 하나 만든 것이니 앞으로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현대 건축가의 시선에서 한옥을 바라봤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나온 게 아닐까요? 결국 그런 거죠. 조적식 건물이 예각이나 둔각을 가졌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듯이, 한옥이 좀 더 많은 레퍼런스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적어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 이후에도 한옥을 지으시면서 몇몇 시도들이 이어졌어요. 창호의 분할, 주차장, 그리고 지하 공간 등 말이죠. 1회전이 ㅅ자 한옥이었다면, 2회전은 지하주차장을 만드는 거였어요. 그것도 저는 보편적인 건축의 테두리에서 생각했었죠.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은 70%가 산과 언덕인데, 경사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은 마땅히 가져야 해요. 건축의 종류를 따지기 이전에 말이죠. 축대를 쌓아서 평지를 구성하는 방식은 한옥도 조선 시대부터 쓴 건데, 그 밑에 주차장과 약간의 생활공간을 집어넣으면, 현대인의 삶을 지원할 수 있는 건축이 될 수 있는 거죠. 보통 이런 경우 돌아오는 반응은 ‘원래 한옥에는 지하실이 없거든요’ 예요. 심의위원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자꾸 뭘 하겠다고 하나,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야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집주인이 자동차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럼 골목길에 차를 세우겠군요. 뭐가 더 좋은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넘어갔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무의미한 논쟁이에요. 적절한 지하 개발은 우리 사회의 공간 자원을 확보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한다고 봐요. 요즘의 한옥 심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열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관습적으로 된 부분도 있어요. 그때는 새로운 시도에 반대하다가도 이쪽이 열심히 설득하면 들어보려는 태도가 있었죠. 지금 한옥 심의를 들어가 보면 오히려 대화 자체가 일방적인 경향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일까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첫째 전통한옥이라는 느슨한 범위 내에서 이를 지키는 것과 둘째 소위 한옥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과 셋째 한옥의 가치만 가져오는 것을 구분해야 해요. 첫 번째에서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게 맞지, 이거 아니면 안 돼 라는 식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특히나 주거건축에서는요.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가회동 엘주택을 설계할 때 어느 심의위원이 자기 사무실로 도면을 갖고 와서 검수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 들고 갔더니, ‘당신네 황두진 소장이 하는 건 한옥도 아니니 제발 북촌에서 일을 안 하면 좋겠다’라고 저에게 전해달라고 했대요. 어차피 이런 일을 할 때는 보수적인 반응을 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어요.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고요. 북촌에서 이런 것은 더 만들지 말라고 했던 그 집은 그해 처음으로 생긴 대한민국한옥대상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궁극적으로는 넓은 세상이 판단을 해주는 것이죠. 지금도 경관, 외부공간 구성 방식 등 소수의 의견 대립은 항상 일어납니다. 저는 한옥이 목표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충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한옥의 과거 레퍼런스를 열심히 찾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가령 경기도 한옥의 특징이 뭔가 하는 방식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후도 사람이 사는 방식도 모두 변했잖아요. 다만 저는 현재를 잘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옥의 구법을 빌려오는 거죠. 그 동네의 상황, 살아가는 삶의 방식, 집을 짓는 방식, 집주인의 생각과 제 생각이 중요합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크고 작은 대립이 있고, 그것은 아마 한옥이라는 이름으로 심의를 받는 한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해요.   한옥 작업은 최근에도 하고 계시죠? 계속하고 있죠. 일 년에 2개, 많으면 3개 정도예요. 작업량이 많지 않아요.   한옥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것 때문에 다소 감상적인 부분도 있고 모호하게 뭉뚱그려지는 대상들이 있잖아요. 여전히 한옥에 대한 선입견 혹은 기대, 고정관념도 크고요. 그래서 한옥을 규정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크죠. 한 달 전에도 어떤 분이 전화로 ‘거기 한옥 수리하는 황두진 씨 사무실 맞죠?’ 하시기에 한숨 푹 쉬고 ‘네, 접니다’ 그랬어요. (웃음) 그런 의뢰가 오면 거절하지는 않지만 다만 제 입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한옥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 개의 카테고리 정도로 나눠서 봐주면 전 불편하지 않아요. 첫째, 소위 한옥 보존지역에 지어지는, 한옥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한 재현(representation)된 한옥이 가야 할 길이 있고, 둘째, 보존지역이 아닌 곳에서 실험해볼 수 있는 한옥, 하지만 여전히 한옥이란 타이틀의 범위 내에서요. 셋째는 한옥에서 어떤 유전자나 교훈을 가져와 전혀 다른 건축을 하는 거죠. 이 세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 세 가지 게임을 다 하고 있는 거죠.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한옥이 진화한다고 할 때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한옥의 정의라고 할까요? 이런 부분을 지켰을 때 한옥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한옥에 대해 한 마디로 보편적 정의를 내리는 건 제 역량을 넘어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한옥이 뭐냐고 물으면, 지붕이 조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중요하고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목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전통 목구조의 변형이죠.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 재료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한국 전통건축에서 보편적 가치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두 가지로 귀결이 되더라고요. 하나는 다공성이에요. 아무리 디테일이 좋고 비례가 훌륭해도 일체의 다공성이 없는 한옥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내외부 공간이 그냥 만날 수는 없고 그사이 전이 공간이라는 게 있어야 하고요. 전통 한옥이 근대화되면서 전이 공간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죠. 방을 넓히려고 처마 끝까지 벽을 내고, 소위 내외부 공간이 없어지면서 지붕에다가 유리를 씌우는 게 근대 한옥이에요. 결국 모더니즘 상자에 한옥 입면을 붙인 건물이 되잖아요? 그럼 그건 다공성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한옥적 가치는 없다고 봐요. 분류상으로 한옥일지는 모르지만요. 한마디로 저에게 ‘한옥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다공성이에요’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다공질 건축이죠. 문제는 기후예요. 다공성은 내외부 공간의 원활한 소통 내지는 모드 전환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건데, 요즘 한서의 차이가 60도에 가까워요. 그러다 보니 여름엔 에어컨을, 겨울에는 보일러를 열심히 돌려야 하죠. 이 상황에서 과연 이 다공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가 과제가 됐어요. 저는 문과 창을 다공성 밸브라고 이름 붙였는데, 다공성 밸브를 세련되게 디자인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봐요. 오로지 기후에 실용적으로만 대응해서 다공성이 현저히 낮은 건축을 하기에는 아까운 날들이 많아요. 요즘 같은 날씨 말이죠. 예를 들어 실내, 반외부, 그리고 외부가 있으면, 예전에는 실내와 반외부 사이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창호지문 하나로 다공성 조절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기밀성이 높고 단열이 잘 되는 알루미늄 슬라이딩 문으로 대치할 수 있어요. 심지어는 실내와 반외부, 반외부와 외부 사이에 한 번의 켜를 더해서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여닫을 수 있는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하나의 세팅으로 1년 내내 살겠다는 접근은 한국에서는 아쉬워요. 자연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너무 놓치는 거죠. 여름과 겨울에는 적절히 보호하되 봄, 가을에는 좋은 날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다공성 밸브가 다양하고 세련되게 확장하는 건축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다른 하나는 ‘중첩된 기하학’인데, 그 역시도 제가 한옥을 관념적, 도상학적으로 접근했으면 느끼지 못했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실무 과정에서 깨달았으니까요. 한옥은 수직적으로도 직교좌표계의 목조 가구와 3차원 곡면의 지붕, 누적적 쌓기인 기단 등 서로 다른 시스템이 공존하잖아요. 그리고 그걸 잘 연결해주는 고도의 시스템이 있어요. 그냥 만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래서 입면보다는 단면이 중요합니다. 전 세계 건축 중에 중첩된 기하학의 원리를 가진 건물들이 있습니다. 비잔틴 건축이 그 예죠. 평면은 정사각형, 직사각형, 반구, 팔각형 등의 조합인데 거기 올라가는 지붕은 곡면이에요. 고딕도 마찬가지죠. 이처럼 다른 나라에도 유사 사례가 있지만 그런데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봐요. 고딕이나 비잔틴과 같이 서구의 조적식 건축에서 중첩된 기하학은 아래 시스템과 위 시스템이 굉장히 심층적으로 연결이 된 구조에요. 펜던티브(pendentive)도 사각형이 원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고요. 그에 반해 한옥은 굉장히 엄격한 직교 좌표로 구성된 칸의 세계와 그 위에 자유 곡선에 가까운 지붕의 3차원 곡면이 올라가 있어요. 서구건축 시스템보다 이질성이 큰 두 시스템이 붙어있어요. 그걸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없으면 작동이 안 되는 거죠. 사각형과 원이 공존하려면 서구건축의 펜던티브에 해당하는 게 필요한데, 한옥은 고도로 복잡한 고급기술 - 공포, 추녀, 서까래 등 - 을 사용해야만 하는 거예요. 서로 간에 쉽게 전이되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너무나 이질적인 시스템을 서로 연결한다는 거죠. 이질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것, 그것이 제게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걸 받아들이며 세련된 연결의 논리를 만드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에요. 왜냐하면 네모반듯한 건물은 지겹잖아요. 우리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이 있어요. 벽은 모르겠지만 천정이 평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죠. 우리가 모더니즘을 열광하며 받아들였던 나라지만, 문화적 유전자로는 항상 무언가 미진했을 거로 생각해요. 여염집인데도 풍성한 기하학적 질서가 있었던 문화적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니까요.   현대 건축으로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소장님을 한옥 건축가로 통칭하곤 하잖아요. <한옥이 돌아왔다>에서 소장님의 태도는 고증보다는 적극적인 실험에 가까웠어도 말이죠.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현실적으로는 제가 컨트롤 할 수 없는 혹은 무의미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옥 작업에 대해 한 말과 글이 100% 그대로 전달될 거라고 믿는다면 제가 바보죠. 어차피 불특정 다수를 상대할 때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감각이 있는 거고요. 건축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서는, 일단 제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껴요. 오히려 건축계가 한옥에 대해 고정관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완된 상태로, 그냥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죠. 저는 사람들이 건축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철학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많은 분이 건축 책을 읽고 관심도 커졌지만 여전히 감각적 스타일에 관심이 있는 거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는 관심이 많지 않아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하느냐를 알아야만 그 사람의 철학이 성장할 수 있고, 그 결과물을 건축주와 사회가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즉 진지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본능적 진지함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과 친환경이나 동물권이라는 차원에서 음식에 접근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건축가에게 표면으로 드러나는 스타일도 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명확한 방향도 있을 텐데, 그것에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삶의 중요한 모든 것에 심층적인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건축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개별 건축가들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뜻한 바를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④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② 과학적 합리주의와 모더니즘   대학원 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나요? 「근대건축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형태적 표현」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지금 제 건축에 대한 의식의 심층이 깔린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레이어도 있지만 가장 바닥에는 ‘과학 기술’이 있어요. 공예적인 건축이나 맥락적인 건축도 다 유효하고 좋을 수는 있는데, 적어도 저에게는 과학 기술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이론은 아니어도 논문을 쓰면서 이것저것 정리했는데, 합리주의라는 게 합리주의 그 자체(과학과 기술)가 있고, 건축으로 들어올 때는 건축가의 해석을 거치잖아요. 그래서 구조 엔지니어와 아키텍트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과학적 합리주의가 건축의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건축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문제가 있으며 건축가는 어떻게 조율해왔는지를 보자는 게 제 논문 주제였어요 당시 지도 교수님은 누구셨나요? 이광노 교수님이셨는데, 당시 교수님은 반대하셨어요. 실측 논문을 쓰거나, 근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원하셨죠. 지도 교수님 말을 안 들어가면서 주제를 정한 건데, 만약 그때 그런 논문을 썼다면 건축가가 안 됐을 확률이 높아요. 앞서 얘기했지만, 건축과에 온 이유도 ‘뭘 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였으니까요. 교수님도 지도 교수의 권한으로 제가 하려는 걸 못하게 하시는 스타일도 아니었고요. 대학원 때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한 거네요. 유학은 군대 이후 다녀오신 건가요? 네. 군대 가기 전에 6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서울시가 밀라노 트리엔날레에 초대받았는데,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전시에 최초로 초대받은 경우였어요.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주택공사 주택연구소로 갔고, 그 담당자가 김진애 박사님이었어요. 이분이 제 사회생활 최초의 보스시죠. 표현이 이상하지만, 보스가 똑똑할 때 겪는 걸 다 겪어봤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분이 일 처리 능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니까 많이 배웠죠. 학교는 마쳤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지금이야 근사한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김진애 박사님이 면접 때 원도를 들고 오라고 해서 둘둘 말아 가져갔죠. ‘내일부터 나와요’라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습니다’라며 구석에 가서 일했어요. 집이 멀기도 하니까요. 그날부터 야근했죠. (웃음) 입대 전날까지 야근하다가 술 한잔하고 심야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입대한 기억이 납니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 바로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건축에 갔죠. 당시 밀라노 트리엔날레의 한국관 주제가 ‘서울’이었잖아요.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것이나 진행 과정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택공사가 강남구에 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그 일대가 완전히 재건축되었는데, 지하철 학동역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 옆으로 AID 아파트 단지 안의 시범 주택 몇 동 중 하나가 사무실이었어요. 당시엔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업 환경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 강홍빈 박사님이 주택공사 연구소 소장이셨고 그분을 비롯해 여러 석학 밑에서 일한 것도 좋았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양질의 자료를 접해봤던 것이에요. 서울시 항공사진을 무제한으로 봤으니까요.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더라고요. 지금이야 건축계에 소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그때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형성된 때가 아니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다른 논리로 만들어진 강남과 강북, 서울이 성장해온 과정 등을 놀랍게 봤죠. 사대문 안에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피부로 느낀 것 같아요. 다음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까였어요. 그러한 생각들을 전시 도판에 담으면서 소위 전시라는 물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경험했죠. 그때 경험이 이후 <메가시티> 전시 기획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전시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유치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내용을 요약하고 생략하고 강조하다 보면, 현실의 미묘한 결을 전시에 다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전시의 가장 큰 과제는 최대한 명쾌하게 사람들에게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왜곡이 있고 유치할 수밖에 없구나, 책과 전시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리고 전시 하나에 정말 많은 분야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시 도판과 보고서는 안그라픽스에서 했어요. 자료 리서치에는 최종현(한양대) 교수님이 참여하셨고요. 보고서를 보면 제가 한 기초 스케치가 몇 개 있어요. 같이 일했던 팀 중에 더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외에도 상명대 백명진 교수님, 우규승 선생님 등 많은 분을 만나고 코멘트를 들으면서 배웠죠. 건국대 정태용 교수, 경기대 이영범 교수가 동기로 같이 들어가서 일했고요. 당시 주택공사 직원이었고 우리 팀을 지원해주신 현 토문건축 정경상 소장님, 그리고 주공에 계신 다른 분들이 계셨어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팀에 참여하셨다는 건 흥미로워요. 김진애 박사님도 그 전시가 이후 ‘서울포럼’을 설립하는데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거든요. 서울에 대해 확실히 접하셨을 것 같아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서울 역사의 대강을 훑어본 계기이고, 나중에 제가 더 깊이 관심 두게 된 단초가 됐죠.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예일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잘 모르고 갔죠.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원래는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쓰러지셔서 유학 갈 돈이 없었어요. 유학을 하러 가는 유일한 길은 국비 유학생 시험을 보는 것이었어요. 학생 때 두 번 시험을 봤는데 둘 다 1차는 되고 2차는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하고 서울건축에 다니던 어느 날 깨달았어요. 건축가가 되기 위한 디자인 교육의 기본량이 있는데 제게 그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유학을 가야겠다 하고 세 번째 국비 유학생 시험에 붙었어요. 1년 조금 넘게 회사 생활을 즐겁게 했지만 “죄송합니다”하고 나왔죠. 처음에는 유학 준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몰랐어요. 정보전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당시엔 좋은 학교라는 데는 다 지원했어요. 학교 특성도 모르고요. 더구나 예일은 한국 학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이 학교가 뭐 하는지도 몰랐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예일대학을 다니셨던 것은 알았어요. 한국에서는 이미 저명하셨고 대가셨으니 그 정도나 되어야 갈 수 있겠구나 했었죠.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예일에 합격해 당연히 좋았죠. 대학마다 그 시기의 학풍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예일에서는 어떠셨나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예일대학은 미국 대학 중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이 오래 가는 학교 중 하나였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이게 뭐지?’ 했어요. 당시 학장이 토마스 비비인데 이 사람은 미국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실무가 중 하나였어요. 드미트리 포르피리오스(Demetri Porphyrios)나 크리어 형제(Leon & Rob Krier)가 와서 강연하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논문 주제도 그렇고 서울건축 김종성 선생님께 불의 세례를 받아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한국에서 나름 모던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교육이라는 게 이런 거다, 다 겪어보자 했어요. 그래서 장식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모던은 예일에서 교육받으면서 이해하게 된 측면이 있어요. 모던에 비해서 이론적으로는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정말 좋았던 건 만들기였어요. 한국의 건축 교육에서는 뭘 만들어본 경험이 없죠. 모형과 도면 그리기는 생각의 만들기이지, 실제 만들기는 아니니까요. 예일대학에 갔을 때 지하 작업실에 내려가니 학교 자체가 공장인 거에요. ‘와, 드디어 내가 왔다’ 했죠. (웃음) 그때 설계 스튜디오 못지않게 지하실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만큼 너무 좋았어요. 그때 만든 게 까오 의자(Kao chair)예요. 재료도 직접 많이 다뤄봤어요. 조각 수업이 듣고 싶어서 미대 수업도 듣고 했거든요. 몸을 써서 만들어보는 걸 상대적으로 많이 해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경험 덕에 현장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아요. 예일대에는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끈질긴 개인주의자(diehard Individualist)’를 키우려는 정신이 있어요. 그게 특정 시점에서 그 학교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하는 것이기도 해요. 좀 고루하게 보이거든요. 길게 보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긴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좋은 학풍을 가진 학교예요. 올 초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지적 풍토가 좀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저한테는 좋은 양분을 많이 준 학교예요. 그 대신 너무나 서양 학교죠. 예일은 지금도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거든요. 까오 의자의 경우 의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 구현하고 제작해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당시 그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라고 뉴욕에서 온 건축가였는데 로버트 벤투리 계열이에요. 어떤 스타일인지 짐작이 가시죠?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구를 디자인했어요. 대신 가구의 역사에 대해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죠. 제 의자는 작동도 안 될 거라고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1학기 디자인, 2학기 제작인데 그 선생님이 2학기 때는 저 가르치기 싫다고, 수업 듣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친구 하나는 제가 들으면 듣겠다고 했고요. 뉴욕에서 온 그 선생님에게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다가 학기 말에 완성품을 가져갔는데 앉아보고 시연해 보니 ‘내가 틀렸네, 열심히 했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평상시 갖고 있었던 소위 ‘이성적 만들기’에 대한 욕구가 그 의자에 다 담겨 있어요. 당시 친구들이 저를 ‘체어맨’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웃음) 적절한 별명이네요. (웃음) 이성적 만들기라는 표현처럼, 까오 의자는 탱크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잖아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과 소재가 갖는 견고한 매력이 있어요. 그런 작업이 건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럼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내가 건축가가 되겠구나,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죠.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이 길을 가자고 허락하는 계기였죠. 그런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학부 때 졸업 설계였고 다른 하나가 그 의자였어요.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구나,  인간이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기능이 있고 생각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구나 했죠. 그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아직도 무한 애정으로 그 의자를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재료를 다루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도 그때 알았고요. 합판으로 틀을 다 짜고 라미네이팅하고, 목공에 대한 책이며 잡지며 다 섭렵하며 실험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현재 작업에서 물성에 대한 실험을 양껏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이게 아쉬운 부분인데, 남을 통해서만 그걸 한다는 게 싫어요. 가끔 설계 다음으로 시공에 들어가면 누를 때마다 오작동하는 리모컨으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산업체와 건축가가 더 긴밀히 연결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면 훨씬 용이하겠죠. 현재로서는 그 욕구가 잘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하셨는데, 그 외에 인상적인 건 무엇이었나요? 지금도 예일대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그 학교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거예요.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정식 과목에 <History of New Haven Architecture and Urbanism>라는 게 있었어요. 물론 뉴헤이븐이 근대건축에서 유명한 도시이긴 해요. 하지만 우리로 치면 연세대에서 신촌 건축학개론을, 서울대에서 신림동 지역의 건축과 역사를 가르치는 셈이잖아요. 게다가 수업을 들어보니 매우 재미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역의 역사에 거시적 관점의 건축사와 세계사가 편입이 돼가는, 부분 안에 전체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학교가 몸소 실천하는 거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죠. 우리는 빨리 지역(local)을 벗어나서 세계로 나가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세계 건축의 중심 중 하나에 갔더니 자기 동네를 가르치더라는 거죠.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들도 지역 전통(local tradition)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들과 특히 잘 지냈고요. 한국에서 김종성 선생님을 통해 받았던 전형적인 모더니즘 교육과는 상반되지만, 보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공통적인 거고요. 김종성 교수님도 한국에서는 가장 서구적인 건축가지만, 대학원 당시 수업에서는 근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사찰이나 종묘 같은 전통 건축의 공간을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요. <공간건축 구성론>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너무나 잘 찍은 슬라이드로 종묘의 맞배 지붕을 설명하는데, ‘맛배 지붕은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왕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작지붕과 같은 단정적인 형식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런 경우에 만들어진 비례는 결과적인 것이다. 인간의 조형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비례에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스 신전도 사람들은 보통 파르테논이 백미라고 하지만 파에스툼의 묵직함에도 나름의 미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모든 길과 문을 열어주셨어요. 너무나도 신선하게 다가왔죠. 예일대를 졸업하고 김태수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하셨잖아요. 미국과 한국 중 실무를 어디서 할 것인지 고민은 없었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가길 원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학교냐 실무냐, 미국 유학 시절에도 박사과정이냐 설계 사무소냐 등 경력의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번민은 없었어요. 이 길로 가겠다는 확실한 자기 선언을 했죠. 졸업하고 보통 설계사무소를 가는데, 저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미국에서 오래 사는 게 싫었어요. 결국 노마드는 못 되는 사람이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김태수 선생님이었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시지만, 한국에 계셔서 직접 뵐 수 있었는데, 김태수 선생님은 멀리 계셔서 경원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실무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셨고, ‘나는 상자(Box)의 건축가다’라는 선언적인 말들도 대단했어요. 작품의 물성도 너무 좋고요. 김태수 선생님의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교보 천안연수원이었어요. 처음 사진으로 보고 근대건축의 어휘를 다 갖고 있으면서 한국의 산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보며 이런 고수가 있을 수 있구나 했죠. 한국에 잠시 오셨을 때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예일을 가게 됐다고 했더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미국 사무실에 좀 있다 가라고 하셨어요. 신나서 바로 갔죠. 거기서 인턴을 하면서 용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그곳으로 갈 거로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참 행복하게 학교에 다닌 셈이죠. 대선배도 옆에 계셨고요. 그렇게 유학 생활과 입대했을 때가 가장 철없지만 즐겁게 산 때였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3년 반 정도 다녔는데 선생님이 서울에 사무소를 내셨어요. 그런데 사람이 계속 바뀌니까 저에게 한국에 가서 그 사무소를 좀 맡을 수 있겠느냐 하셔서 ‘언제든지요. 어차피 갈 거였어요’라고 했는데 뜻밖이셨나 봐요. 그렇게 1996년 연말에 한국으로 왔어요. 김태수 선생님의 서울 사무실을 3, 4년 맡다가 IMF 사태 후 독립을 한 거죠. 독립은 불경기에 하는 거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용기를 얻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에게서는 어떤 영향은 받으셨나요? 김종성 선생님보다 복잡해요. 김종성 선생님은 명확한 철학적 입장에서 건축의 중요한 지점을 말씀하시길 좋아하시는 분이고 그 외에는 이야기 안 하시죠. 두 분은 기본적으로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과묵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두 분에 비하면 저는 뭐든지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편이죠. 차이가 있다면 김종성 선생님은 본인이 철저한 모더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활동한 대한민국 또한 알고 보면 아주 모더니스트 국가였던 거죠. 박해천 교수가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 이야기를 하면서 서북 모더니즘이라고 했듯이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은 모더니즘이 꽃피었던 나라였던 건 맞아요. 심층적으로든 피상적으로든 그걸 받아들여서 우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과 딱 맞는 곳에 계셨던 거죠. 특히 대한민국 대기업을 상대하면서 거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요. 절대적인 시공 퀄리티라는 당시 시대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동조해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계셨던 것이죠. 반면 김태수 선생님은 미국은 물론 아마 전 세계적으로 건축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하셨어요. 그곳은 모든 건축허가가 우리나라의 문화재 심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런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이 갖고 있던 것을 펼치려면 고도의 능숙한 플레이가 필요하죠. 그래서 김태수 선생님의 어휘가 훨씬 다양해요. 저는 서울건축을 다닐 때나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다닐 때나 제 보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도 어떤 회사에서 최대한 배우고 나가려면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기도 하니까요. 서울건축이야 워낙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었던 회사고, 제가 다닐 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지하실이 아카이빙 룸이었어요. 그때 회사 허락 받고 청사진도 굽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아름다운 손도면이 많았으니까요. 제가 두 분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두 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저는 상대적으로 김태수 선생님의 작품을 더 많이 알았어요. 젊은 시절에 하신 주택은 다시 봐도 정말 감동적이에요. 뉴잉글랜드라는 토양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맘껏 펼치지 못했을 거고요. 결국 그 출구를 한국에서 찾은 거죠. 한국에서 초기에 하신 것 중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인데, 어찌 보면 절충식에 가까워요. 김태수 선생님은 그만큼 담론의 범위가 넓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건축의 단서를 찾는 분이 아니신데, 김태수 선생님은 그런 부분이 있으시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태수 선생님이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추상적인 건축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대덕의 엘지연구소 같은 건 전혀 로맨틱한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죠. 여전히 김태수 선생님은 땅과 한판 붙는 태도, 그런 감각이 인상적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압도적인 경우죠. 땅을 추상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물성을 읽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디테일에 대한 집념은 두 분이 다 똑같고요. 시차를 두고 두 분을 겪었던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처럼 성향이 아주 다른 두 분도 아니었고요. 실무 건축가로서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에서 일했기 때문에 배운 게 더 많았죠. 지금도 제 회사 운영의 일정 부분은 김태수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매주 월요일에 전체가 모여 주간회의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는 방식이랄까요. 김태수 선생님이 그리 사교적인 분은 아닌데 깊이 있는 교우 관계를 통해서 건축가로 계속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봤으니 까요. 미국 사회에서 그분의 지위가 대단해요.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호흡이 길게 활동하시죠. 소장님의 초기작 중 몇몇 도면을 보면 질서를 찾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본인의 성향일 수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고 할까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무심하게 긋는 선은 없어야 한다.’ 제 편견일 수 있는데 도면을 보면 질서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벽이 가기로 했으면 가야 하는 거에요. 자신이 부과한 틀과 질서 속에서 스스로 제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게 건축이지, 질서를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줄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거죠. 그 극단의 작업을 해본 게 바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예요. 연습공간인 배구 코트와 숙소를 한 건물에 담으면서 정방형 공간을 설정하고 원형을 품고, 지붕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조로 풀었어요. 엄청나게 고생했죠. 정방형의 공간 안에 고도의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에 부여한 정방형, 원, 대각선 틀 안에서 그걸 다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도면을 죽어라 많이 그리면 해결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공간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에 필요한 절대적인 기하학적 규칙이라는 건 없어요. 대부분 공간은 건축가가 스스로 부여한 질서 안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③으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오픈하우스서울 2018은 해마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문을 열어 그 흐름을 직접 체험할 기회다. 건축가와 함께 건축물을 직접 경험하고 강연과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건축가가 추구하는 철학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올해는 서울 사대문 안의 복잡한 골목의 조건을 풀어가고, 한옥의 텍토닉을 재해석하고, 작가로서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어내며, 영추포럼, 답사 등의 문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건축가 황두진을 만난다. 다공성, 구축술,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로 전개하고 있는 황두진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건축가 황두진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고와 물성을 가진 결과물의 연결고리를 탐색해본다.    이북, 서울, 사대문 서울에서 나셨지만, 이북에 대한 관심이 높아 보여요. 부모님이 실향민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다 실향민인 경우는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연고가 없는 집단을 실향민이라고 생각해요. 퉁쳐서 문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사람들’ 그리고 부제처럼 ‘자유대한의 품으로’라는 말이 따라오죠. 엄격하게 실향민은 네 그룹 정도가 있다고 봐요. 제1그룹은 일제 강점기 때 내려오신 분들이에요. 단순 이사죠. 어찌 보면 그 그룹이 사상적으로는 가장 다양해요. 다음 제2그룹이 해방 이후부터, 즉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오신 분들이에요.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그야말로 자유대한의 품으로 오신 분들이죠. 성향으로는 반공적이고 당연히 지주, 자본가, 지식인, 기독교도가 많죠. 서울 교회의 상당수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설립했다는 게 그것을 반증하죠. 제3그룹은 한국 전쟁 당시에 내려오신 분들인데, 이분들도 사상적으로는 다양해요. 당시 미국이 북한을 엄청나게 폭격하던 시기였고 핵폭탄 투하설도 있어서 그냥 경황 중에 난리를 피하려고 내려오신 분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제4그룹으로는 탈북자가 있죠.   탈북자를 실향민으로 함께 분류하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그건 제가 분류한 거예요. 거대한 흐름에서 보자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이든 자기가 태어난 곳이 떠나온 사람들은 실향민의 연장으로 보는 거죠. 이 네 그룹 중 저희 아버지는 제1그룹, 어머니는 제3그룹인데, 어릴 땐 그걸 신경 쓰지 않았고요. 나이 들면서 ‘우리 집안이 그렇구나’를 깨달았고, 더 나이가 든 요즘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이 좀 다를 수 있겠구나 해요. 예를 들면, 다른 분들보다는 북한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향의 설움에 목이 메어’ 같은 레토릭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 대해 오직 적대감이나 친근감만 느끼는 것도 아니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복잡한 입장이죠. 아직 건축가로서 행동으로 옮긴 건 없지만 그런 점에서 생각이 남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해요.   한번은 페이스북에서 만우절 농담으로 ‘황두진건축사사무소 평양 지점’을 내셨다는 글과 사진을 올리신 적이 있어요.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북한에 대한 관심이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을 거예요. 북한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문화에서 크신 분들이 보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한국전쟁에 대한 문헌을 폭넓게 보는 편인데,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건축가로서의 경력이 후반기로 가면서 제 삶에 주어진 소명이라면, 북한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건축가협회 ‘남북교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셨죠? 제가 단체활동을 열심히 해온 편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도 모아야 하고요. 위원회 활동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은, 북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빨리 내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우선 국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북한의 도시와 건축> 콜로키엄을 하고 있어요. 저 못지않게 위원회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거였어요. 좀 신중해지자는 거죠.   양가 부모님이 기억하는 이북의 도시 공간을 기록하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부모님이 의식적으로 과거 도시 공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은 아니고, 흘러가는 말씀을 하신 거죠. 아버지는 제가 대학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쓰려지셨고 이후 2004년에 돌아가셔서 이야기가 많진 않아요. 가령 냉면은 겨울 음식이라는 이야기, ‘돌싸움’, 그야말로 투석전으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이야기, 평양 사람들의 거친 성향 등에 대해서 들은 정도예요. 반면 어머니는 원산 분이신데, 어머니가 기억하는 원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 같아요. 실향민인 부모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하려 하진 않으셨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장모님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은 독특하게 사돈 안주인 두 분이 함경도 출신인 경우에요. 장모님이 함흥 분인데, 아까 구분한 실향민 중 제2그룹이에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은 아니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북한이 고향인 기독교 사람들을 모두 보수적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실향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매우 투박하다는 거고요. 장모님은 오빠가 함흥 학생만세운동에 관여했어요. 공산당 치하에서 기독교계가 주도한 학생 사건에 연루된 것이니 그 이유만으로도 북한에서 살 수가 없죠. 감시가 있으니 주변에는 시골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고 말하고 경원선을 타고 오다가, 철도가 끊어진 철원에서 내려 한탄강을 맨발로 건너왔다고 해요. 얼마 전에 그 장소도 가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장모님이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해요. 물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서울이 수도라는 개념은 없었겠죠. 하지만 임금이 살던 조선의 수도였고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 것 아니에요?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모님이 서울 와서 보니, 집들이 게딱지처럼 산 능선까지 있었다고 해요. 제 생각에 그게 피난민 지역은 아니고 자연 지형을 따라 언덕이 집으로 다 가려진 걸 보고 그러신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내려오니 조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더라는 거에요. 때가 어느 땐데 조상을 찾나 싶어서라고요. 그래서 함흥은 어떤지 여쭤보니, 공산 치하에서 살다 오신 분이라 봉건시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아요. 함흥은 워낙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개발했던 공업 도시에요. 길이 넓고 도시계획을 반듯하게 하고 건물들이 크고 천장이 높고 깨끗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서울은 계획도시의 느낌이 없고, 건축적으로 좋게 얘기하면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유기적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질서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성향이 신기했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소장님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양가 부모님의 고향도 멀지 않게 느끼겠네요. 저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생각하죠. 평양이나 원산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신 곳이니 관심이 있는 거고요. 은연중에 제게 사대문 중심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마침 사는 곳이 여기(서촌)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기는 해요. 하지만 삶의 궤적을 보면, 우리 가족은 사대문 안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구질서 핵심세력에 한 번도 편입된 적이 없어요. 변방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버지를 너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7, 8년 전에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어요. 부모님이 서울 와서 사신 곳, 즉 제가 태어난 곳은 한양대학교 근처의 경원선 철도 변 한옥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지번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의 고향이 원산인 것을 알고 좀 뭉클하더라고요. 고향 가는 기찻길 옆에 산 거잖아요. 그러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정릉의 개량 한옥에 살았고 이후 결혼 전까지 2, 3번 이사했고, 그다음 신도시로 구분도 안 되는 0기 신도시인 과천에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도 과천에 있었어요. 집안 내력이나 제가 살아온 현장으로 보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성장했던 거죠. 요즘 옛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1950~60년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사대문 안에 있는 한옥에 산다는 걸 새삼 느껴요. 1950년대 후반에 부모님이 결혼하셨는데, 이때 왕십리, 정릉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울의 외곽에 살았던 것이죠.   어렸을 때도 이북이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나요? 어린 애들은 잔인한 측면이 있어요. 순수함의 이면에 있는, 판단력 부족에서 오는 잔인함이죠. 저희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오셔서 친가 쪽 친척이 많은데, 어머니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오신 분이라 외가가 없었어요. 북한 집안들이 또 좀 짜요? 설 이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제가 받은 세뱃돈이 절반도 안 됐어요. 친구들이 시골 종가에 다녀온 얘기를 하는데 제가 ‘종가가 뭐야?’ 하니까 갑자기 애들이 ‘너 종가가 뭔지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 사는 기와집 없어?’ 하는데 아마도 좀 사는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너 족보는 있냐?’ 하고 저를 놀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집에 와서 ‘왜 우리는 종가가 없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엄마가 그제야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주신 거예요.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학교에서 도깨비가 있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때인데, ‘그럼 우리가 그런 집안인 거냐?’ 하고요. 어머니는 그전에도 우리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어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왜 우리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한테 인사 안 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둘러는 데야 했고, 당시 세계지도가 집에 걸려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코펜하겐이 있더래요. (웃음) 그래서 저희한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코펜하겐에 사신다 한 거에요. 또 마침 무역 일을 하셨던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어요. 유럽 출장을 가시면 아버지 회사 동료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을 대신 보내게 해서 저는 정말 유럽에 외가가 있는 줄 알았죠. 사실은 이북에 계셨던 거죠. 그 일로 ‘이 사회에서 뿌리박고 살아오던 집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박혔어요. 코펜하겐 이야기는 제게 여운이 남아 있어요.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코펜하겐에 갔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티볼리 공원에 앉아 있으니 곱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중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나고 자랐던 경원선 근처 집에 대한 기억은 있으신가요? 전혀 없어요. 기억이 있다면 그다음 정릉에서 살던 집이 전형적인 ㄷ자 도시형 한옥이었는데, 그 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흑백으로 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기억하는 첫 장면이라 몇 년 전 스케치한 적이 있어요. ㄷ자 한옥이니까 빛이 네모로 딱 떨어질 것 아니에요? 그게 대청마루의 끝과 댓돌, 시멘트 바른 앞마당에 떨어졌죠. 대신 실내는 굉장히 어두웠어요. 집에 웅크린 어두운 구석들과 대청, 어릴 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매우 무서웠어요. 지금 건축가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밝은 집을 짓기보다는 비교적 빛을 분산하는 데 관심이 있는데, 어두운 구석에 대한 공포가 강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다락에서 노는 것은 좋아했어요. 다락의 빛은 밑에서 올라오니 포근했거든요. 생각해보면 개량한옥에 살았지, 소위 부흥주택에도 살았지, 어머니가 유치원을 하시느라 당시 엄이건축에서 설계한 주택 겸 유치원에 살면서 직주근접의 삶도 처음 체험해 봤고, 결혼해서 아파트에 살아봤으니, 나름 초고층 주상복합 제외하고는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본 거죠.     지금 통의동 목련원은 집과 사무실이 붙어 있는데, 경복궁 서측으로 온 계기가 있었나요? 경복궁 서측으로 온 것은 성인이 되어서예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경비가 삼엄했어요. 동네가 1970년대에서 멈춰진 타임캡슐 같았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죠. 19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난 다음에 이 동네 경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에요. 효자로가 부암동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는데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하문로를 낸 것이죠.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정도에 멈춰져 있고, 2000년 초반쯤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려서 효자로 변에 <열린책들> 건축물을 설계했어요. 그때 이 동네를 알게 되어 결국 이사를 오게 되었죠. 어릴 때 살았던 정릉처럼 서울의 외곽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았고 서촌이란 말도 없었고요. 지금은 다르게 볼 수 있어도, 당시 저는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찾아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많이 누워있었다는 기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거의 죽은 거였어요. 급상 신장염으로 학기 초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래저래 학교를 못 다닌 게 방학을 포함해 10달 정도였어요. 절대 안정을 해야 하거든요. 오래 누워있어서 퇴원 당시에는 다리 근육이 다 빠졌어요. 걸음마부터 다시 배웠죠. 당시 입원했던 성모병원이 명동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요. 1호 터널로 가다보면 명동 입구에 면한 건물 3층이에요. 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니 수녀님들이 저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갔었는데 그때도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웅장하고 근사하지만 컴컴하잖아요. 당시 입원해 있으면서 얻은 게 있다면, 시간이 안 가니까 침대에 누워 뭔가 집중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천장의 금이 커지나 안 커지나를 매일 봤고, 자연학습도감을 가져다 열심히 보고, 그 와중에 오탈자 찾아 출판사에 보내면 기특하다고 선물을 보내주고 했던 기억도 나고요. 또 배운 게 있다면, 저 혼자 잘 노는 거예요.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요. 물론 옆에서 많이 돌봐주셨지만,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진 때가 있었는데, 누워 있는데 시야가 점점 좁아졌어요. ‘이게 뭐지’하고 조바심은 나도 마음은 편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손이 하나 내려오더니 ‘두진아 안돼!’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잡아채는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으니 제가 정신을 잃어 뺨도 치고 하셨다고 해요.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거죠. 그게 1971년 일이에요. 용감무쌍하게 세상에 돌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는 너무 눈치 안 보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평소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영향도 있을까요? 선천적인 것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변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해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병약했던 유년 시절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건축가는 대부분 부모님의 뜻을 꺾고 건축을 선택한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건축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건축가가 된 계기는 초라해요. 일단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건축과를 생각한 적이 없고, 대학 입시 때도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아무래도 적성과 무관한 것에 빠지는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물리학자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될 거로 생각했어요. 특히나 중고등학교에 가니 물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을 잘 못 했으니 물리학을 안 한 건 다행이죠. 수학을 도구로 하지만 물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만들어요.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세상에 뭔가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매력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점에서는 건축도 다르지 않죠. 대학은 자연과학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입시제도의 희한한 상황 때문에 어느 날 보니 공대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당시 응용과학을 시시하게 생각했거든요. 양자역학에 대한 영웅시대 책도 엄청나게 봤고, 당시 씨엔 양이라는 중국계 물리학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고등학생인데도 들으러 갔으니까요. 어쨌든 당시 대학교에서 공대 신입생을 과 별로 안 뽑고 공과대학으로 뽑았는데, 700명 중의 한 명이 된 거죠.   참 신기한 게 전공이 아닌 단과대별로 뽑으니까 우리가 소속감이 없는 걸 보고, 공대 17개 과에 신입생들을 매칭시킨 거예요. 그때 공대 1반이었는데 가나다순으로 하면 건축과가 제일 앞이잖아요. 그래서 제 지도교수님이 건축과 교수님이었어요. 3월 중순이 되니 면담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교수님이 어려우니 면담 30분 전에 갔는데,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공대 건물이 서울대 35동 4층엔가 있었는데 복도를 들어가니까 그 전해의 졸업작품 도면과 모형들이 있는 거예요.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안건축의 윤세한 소장님 졸업작품이었어요. (웃음) 그때 면담이라는 건 ‘너 데모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자리였는데, 저는 교수님께 솔직히 얘기했어요. 건축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복도에 있는 걸 보니 근사하게 보인다고요. 이런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당시 김진균 교수님이셨는데, 그분 멋있잖아요. 웃으시면서 ‘삶에 우연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뜻일 수 있다’ 하면서,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과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셨어요. 감사하다 하고 나가면서 ‘내년에 뵙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는 1학년 학점을 가지고 입시를 한 번 더 했거든요.   학번이 어떻게 되시죠? 82학번입니다. 공대 1반이었는데 자매반이 건축과였던 것이고 건축과는 다행히 포용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대 축제에도 우리 1학년들을 초대해줬고, 그래서였는지 공대 1반에서 건축과 간 친구들이 많았어요. 촌극 할 때도 우리에게 출연하라 해서 저도 출연했어요. 내용이 중동에 한국 건설회사가 가서 부실공사로 난리 난 이야기였는데, 제가 아랍인 건축주였어요. (웃음) 문제는 그렇게 해서 2학년이 되어 건축과에 들어가니, 소위 즉흥적으로 건축과에 온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학기 초 신입생환영회에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했는데 제가 황 씨라 거의 마지막에 했어요. 앞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가령 이런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 마르셀 브로이어의 ‘밤과 낮의 주택’을 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내는 것에 매료되어 건축과에 왔다’ (웃음) 내 순서는 점점 다가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해서 솔직히 얘기했어요. 앞의 친구들과 같은 건 없고, 원래 자연과학대학에 가려 했는데 우연히 공대 왔다고요. 그러다가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 건 대단한 일인데, 만든 결과가 심지어 쓸모도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인 거 같다, 그래서 만들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소개했던 것 같아요.   80년대는 데모도 많고 학교가 어수선했죠? 저는 전형적인 데모 안 한 386입니다. 그건 솔직하게 얘기해야죠. 그게 저에게 두 가지의 흔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부채의식이고요, 또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전두환을 옹호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나설 게 아니라면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면 하고 말면 말고죠. 아마 누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3형제의 막내인데 누나는 정말 열심히 데모했어요.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형이 2학년, 누나가 4학년, 이렇게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인데 사상 교육을 조직적으로 많이 받았는지, 이미 고등학교 때 집에 소위 불온서적이 많았어요. 그때 다 읽었으니 대학 와서는 새삼스럽게 뭘 읽지 않았죠. 광주를 보면서는 솔직히 두려웠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남아있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지만, 저에게는 남북문제인 것 같다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대학 2학년에 들어가면서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바로 은퇴하셔서 22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2004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집 아이였는데, 인생에 처음 시련이 온 거죠. 50대에도 암벽등반을 하셨던 분인데 그렇게 자기 육신의 감옥에 갇혀 계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괴로웠어요. 당연히 아버지 본인이 가장 괴롭고, 어쩌면 어머니가 더욱 괴로웠을 수 있죠. 매우 활달하신 분인데, 한창나이에 항상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해야 했으니까요. 대학교 때 열심히 놀고 연애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때 기억이 썩 좋지도 않고, 생각만큼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학점도 들쑥날쑥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회사 직원 뽑을 때는 학점을 안 봐요. 의리상, 제가 별로 안 좋아서. (웃음)   설계 전공 수업에 충분히 만족하셨나요? 4학년 졸업 때가 되어서 대학을 너무 부실하게 다닌 걸 깨달았어요. 집중도 안 했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졸업 설계를 잘 해보자 했어요. 당시 팀으로 하던 분위기였는데, 평소에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한 번 열심히 해보자 했고, 논의 끝에 주제를 잡은 게 북창동 재개발이었어요. 수직입체 도시로 만들어 저층부에 데크, 위에 주상복합이 올라가는 계획을 했어요. 그게 그해 졸업 전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아마 제 동기들에게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에요. 저는 꼭 끝에 가서 열심히 하더라고요.(웃음) 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는데, 당시 영향을 받으셨나요? 대학생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게 쉽진 않죠. 대학원 가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시원찮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게 왜 나왔는지는 알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을 대체할 만한 핵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결국 모더니즘의 가장 심원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겠어요? 모더니즘의 단점을 이야기하거나 부분적인 보완을 할 뿐이죠. 자주 하는 비유 중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부적을 붙이는 사람보다 세콤을 설치하는 사람이 많다면 모더니즘은 퇴조하지 않는다는 게 제 믿음이에요. 그런 면에서 저는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해요. 모더니즘이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로 김종성 건축상을 받은 것도 옛 생각으로 돌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국의 학교 분위기가 디자인에 강한 사람을 키우는 건 약했지만, 오히려 사회적 관점을 많이 키워준 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장서서 데모를 안 했다 뿐이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북창동을 대상으로 재개발 설계를 하며 고민했던 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도 해요. 단순히 조형예술이 아닌 사회적 측면이 건축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원 시절의 자료 중 가회동 한옥 실측작업 드로잉이 인상 깊었어요. 당시 실측 작업이 중요한 출발점이 된 건축가도 여럿 계시고요. 근대 한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때에 실측 작업은 의미 있는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학창 시절의 사건 하나를 뽑자면 가회동 한옥 실측 작업이죠. 제 건축가 경력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니까요. (웃음) 제 기억에 당시에 그뿐 아니라 농촌 마을, 농촌 주택처럼 다양한 분야의 실측이 있었어요. 가회동 한옥은 이광노 교수님 무애연구실에서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사실 실측에 처음 참여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 실측에 대한 공고가 붙었는데 학부생도 지원을 받아주어서 무슨 생각에선지 덜컥 지원했어요. 제가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고 했잖아요. 고백하자면 그중 한국 건축사가 가장 낮았거든요.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윤장섭 교수님이 ‘자네가 한옥에 대한 책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야!’ 하셨으니까요. (웃음)   그때는 그 실측 작업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지금도 당시 참여했던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시작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애연구실은 서울대와 홍대가 같이 참여했거든요. 금요세미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다른 학교 학생도 많이 알게 됐죠. 대학원에선 강원도 민가 조사에도 참여했죠. 보고서의 실측 도면 중에 과도하게 그린 그림이 하나 있어요. 당시 기준에서는 열심히 한 건데, 야단도 맞았죠. (웃음). 개도 그리고 개집도 그리고 개가 다니는 범위도 그렸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때 실측하러 들어갔는데, 한국 건축사에서 배우고 고건축답사(당시는 그렇게 불렀어요) 때 돌아다녔던 그런 집의 풍경이 아닌 거예요. 도시형 한옥은 창고 같더라고요. 그때 뭔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이야기하던 한옥에서의 정갈한 삶과 너무 다른 거예요. 당시 4.3그룹 등 선배 건축가들이 한옥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는데, 실제 실측하면서 보니 뭔가 그분들 말씀이나 현대인의 삶과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변해야 하는 건 한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②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