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삶을 담은 단독 주택

홍지36, 이성관 / 사진_윤준환
진진가, 김연희 / 사진_노경
HANNAM 777-2, 이성관 / 사진_윤준환
부암동 주택, 최두남 /사진_김종오
오선지가 五線之家_음악가의 집
협소주택 세로로(seroro), 최민욱 / 사진_변종석
파주주택, 정재헌 / 사진_박영채
ITCH HOUSE, 정진욱, 이유림 / 사진_김재윤
홍지36, 이성관 / 사진_윤준환
꾸준히 사랑받는 오픈하우스서울의 주택 오픈하우스는 주거의 선택지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건축적인 아이디어로 최소의 조건을 극복해낸 협소주택부터 주변 환경에 대응하고 가족의 바람을 담은 단독 주택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소우주가 된다. 구조, 재료부터 공간 구성까지 오늘의 집을 만나는 오픈하우스를 통해 집의 의미를 함께 나눠본다.
TOP LIST
OPENHOUSE 면적과 여백의 게임, 근린생활시설 임대 공간의 우선 가치가 면적에서 공간의 정체성으로 바뀌면서, 근린생활시설의 지향점도 바뀌고 있다. 공간 경험은 이제 사람들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공간 기획은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있다. 최적화된 임대 공간과 여백의 틈새에서 건축 경험을 끌어내고 있는 건축물을 오픈하우스를 통해 만나본다.
OPENHOUSE 효율과 정체성의 모색, 오피스/사옥 오피스와 사옥은 사무 공간의 효율성과 정체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면적의 극대화를 노리던 시장은 이제 여백을 두고 소통의 공간을 고려하며 조금씩 공간의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올해 소개하는 오피스/사옥은 소규모 빌딩에서 면적의 최적화와 여백의 균형을 모색하는 건축물을 오픈하우스로 만나본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수한 건축분투기 ③,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대전차 다음에 당선된 게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이다. 서울서진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당선이 되었는데, 준공까지 오래 걸린 편이다. 김빈 설계도 그렇지만, 공사가 한동안 멈춰 있었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는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역 연결 통로가 함께 있다. 관리 주체도 다르고 건축 허가 사항도 달라서 거기서 오는 복잡함이 있었다. 공사 시작하고 나서 상수도관 문제로 거의 한 1년 정도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유종수 설계 기간이 3배 늘어났고 계약 연장이 6회차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하를 연결하는 부분에서 협의할 부분이 많으셨을 것 같다. 그 과정은 좀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김빈 대표적인 예로 건물과 통로가 같은 벽이다. 그 벽을 SH와 지하철 교통공사가 어떻게 나누어 소유할 것인가부터 시작했다. 단일 벽의 소유에서부터 설계를 시작한 거다.   그다음은 관리 문제인데, 그 통로는 지하철 일부가 되고 관리는 시설공단에서 하니까 멋지게 하려고 해도 관리 주체나 소유 주체는 ‘관리가 불편하다, 통로가 이래서 되느냐’는 의견을 낸다. 우리는 SH 공사와 협의했기 때문에 끝까지 의사 표현을 하고 디자인해서 설계하긴 했는데, 시공이 원하는 만큼 되지는 않았다. 디자인이 조금 변경되었지만 큰 틀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갔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나 서진학교도 재료와 팟(POD) 같은 요소가 공간을 풍부하게 한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도 공기업이 갖기 힘든 외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제안을 했고 또 발주처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사람들이 가장 빨리 인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재료와 낯선 창의 패턴 같은 것이다. 공공건축이라고 해도 당연히 건축가로서 시도하고 싶은 것이 있다. 더군다나 이 대지의 경우 바로 옆에 큰 주차장과 건너편 대형쇼핑몰이 있어서 그 덩어리들과 싸우려면 훨씬 도드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경치가 워낙 좋은 이말산이라는 북한산 자락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형이 나왔다. 김빈 처음 공모전에 제안했던 안은 더 단순했다. 중요했던 것은 루버와 사이사이 있는 판들이 전체 매스를 분절하는 것이었다. SH 담당 부서가 설계를 잘 아시는 분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실시설계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의견도 받아주고 입면을 바꿀 기회가 왔다. 예쁘게 하려고 바꾸었다기보다, 유 소장님 말처럼 주차장과 광장 사이에서 더 세져야겠다는 생각에 이 디자인으로 진행되었다.   사용하는 건축 언어는 단순하지만 특별한 장면을 만든다. 모든 프로젝트가 단순한 언어를 쓰는데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건축을 표현하는데 지향하거나 친숙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유 소장님은 타고난 것 같다. 형태를 잘 다룬다. 반면 저는 선을 하나 그어도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잘 안 된다. 사선 하나, 재료나 형태, 볼륨을 전체로 확장할 때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결과적으로 납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종수 모든 건축가가 그럴 것 같은데, 저 자신만 놓고 봤을 때 아직 건축 어휘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지는 않다. 20년 가까이 건축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생님의 건물을 봤겠나. 내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했든 이미지로 머리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저는 그게 무의식중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한편 다른 사람이 한 건 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의 차이를 두고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는 둘이 같이해서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는데 적절하게 도움이 된다. 많은 시간이 쌓이고 접점이 많이 생겨서 동의하는 부분도 많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김빈 그래도 다행히 1+1이 2까지는 못 가도 1.2 정도 되는 것 같다. 당장 프로젝트를 딸 수 있을지 앞일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지난 10년을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유종수 앞서 말씀하신 계보나 좌표에 대해 우리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건축적인 태생이 어디냐고 한다면, 한국건축에 대해서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제가 본 건 다 현대 건축이고 한옥에서 무언가를 느낄 만한 기회도 없었다. 단지 좋은 건물을 많이 접하거나 건축을 하면서 학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무언가를 정해 놓기보다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에 대한 기준이나 혹은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일단 콘셉트가 명확한 게 좋다. 우리도 그런 방향을 지향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건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명쾌하면 좋을 것 같고 재료도 항상 새로웠으면 좋겠다. 건축 산업 전체가 진보하는 기술력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루이스 칸의 건물처럼 그 자체로 압도하는 빛, 공간 등 건축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중요하다. 결국, 그것을 취하는 태도가 조금씩 다른 거 같다. 김빈 공간도 좋고, 빛도 좋고, 명쾌함도 당연한 부분인 것 같다. 제가 더 끌리는 부분이라면 절제된 것을 좋아한다. 미니멀하다거나 재료가 단순하다는 차원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자하 하디드의 DDP를 보면서도 절제돼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명쾌하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과도한 제스처가 나오지 않는 절제된 건물을 좋아한다.    사무실을 처음 열면서 건축의 새로운 유형 탐구에 관해 관심을 적었다. 결국, 불명확한 관념을 걷어내고 건축 자체의 구성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유종수 예를 들어 신설동 한옥(2016)을 보면 건물 위로 철골 구조를 올렸다. 한옥을 좋아하는 분들이 보면 한옥을 모르는 사람이 건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좋은 점은 많은데, 저희는 새로운 유형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좋고 나쁘다를 떠나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고 가능성을 확장해줄 계기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문제작이 오히려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도 있다. 김빈 유형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하고자 했다기보다 조금씩 새롭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신설동 한옥은 우리에게 파격적인 업무였다. 통상적인 한옥 위에 증축하는데 띄워서 올렸다. 결과적으로 기존 한옥을 덜 해치는 방식이 되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증축했다면 많은 부분을 해체하거나 기와를 다 부셔야 했을 거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기둥만 뚫고 내려갔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한옥의 많은 부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을 거다.      건축의 요소가 풍부하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과하지 않다. 과감한 요소를 절제해서 쓰는 태도가 코어건축의 특징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어 당선된 것이 광나루 수난구조대, 망우119안전센터, 한강공원 양화지구 매점인가? 김빈 2018년도에 서울시 스케이트장, 광나루 수난구조대, 돈의문박물관 수직 정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망우 119안전센터가 당선되었다. 이때 사무실이 조금 배고팠다. 2020년도에 다시 공모전에 엄청나게 참여했다. 한 해 동안 15개 정도 했고 마감은 13~14개 정도 했다. 내내 낙선하다가 연말에 일산직업능력개발원이 당선되고 해를 넘겨 1월에 2개의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21년 하반기에 민간 지명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다.  유종수 한강공원 양화지구 매점은 공모전이 아니라, 광나루 수난구조대를 하면서 협력했던 특수구조 업체의 제안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서울광장스케이트장은 해마다 젊은 건축가가 공모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때도 지명 공모였나? 김빈 그렇다. A3 세 장 정도 제출하는, 지명 공모 중에서도 가장 간소화한 공모전이었다. 스케이트장이 시간이 촉박하고 빨리 지었다가 빨리 없어지니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유종수 대지를 1년 중 3개월 정도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부분이 재미있어서 참여했는데, 어떻게 하면 예산을 아끼고 공사 기간도 수월하게 할까 고민해서 공기막 구조를 제안했다. 가벼운 재료를 쓰고자 했다. 시청 광장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다. 제안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김빈 구조물이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거라, 빨리 짓고 빨리 없앨 수 있는 게 가장 좋다. 그리고 재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으로 이중 공기막을 제안했다. 구현하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기도 금방 넣었다가 철거할 때도 금방 뺄 수 있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형태적인 것도 있지만 그 공간의 원형을 사람들이 한 바퀴 돈다는 공간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고려했다. 공기막 구조는 단열에 대한 장점도 있다. 유종수 시청 광장은 3면이 도로라서 접근이 좋지는 않다. 시청광장에 약 80m 지름의 원형경기장을 만드는 것이고, 조명까지 고려하면 그 안에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장면이 시민들에게 일종의 공공미술처럼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광장을 광장답게, 이벤트 공간으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광나루 수난구조대는 부유하는 건물이라서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외관의 질서도 인상적이다. 김빈 뜨는 구조는 기술적인 부분이고 사실은 놓였을 때를 생각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잔디밭에 있는 장면을 처음 생각했고 부유체라고 두께가 약 1.8m정도 되는 덩어리가 밑에 있는데 땅을 파서 그걸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 번 떴다가 내려오면 파인 땅에 진흙이 가득 차서 기술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디자인의 형태는 사실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다. 한강을 관리하는 소방서니까 상주하는 사람이 있고 먹고 자야 한다. 체력 단련을 하는 시설도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쓰이지 않는데, 지침에는 시민들을 교육할 수 있는 안전교육장을 담겠다고 했다. 그래서 계단식 강당도 필요했다. 이곳은 필지가 아니니 땅도 직사각형으로 주어졌다. 그 안에 필요한 요소를 넣어보니 형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숙소와 대피 동선, 1, 2층을 연결하는 출입 동선이 필요해서 동선 따로, 매스를 따로 배치하면서 만들어졌다. 향을 고려해 숙소를 배치하고 재료는 단순하게 쓰고 싶었다. 유종수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시청 광장도 그렇고 낙산도 그렇다. 한강도 서울에서 너무 중요한 공간이다. 그런 곳에 무언가를 한다는 게 굉장히 끌렸다. 장소적인 측면에서 끌리는 게 있었고, 부력체를 이용한 특수구조인데, 홍수 때 수난 구조를 하기 위해서 땅에 있어야 하는 것도 난센스 같았다. 1년 중 비 오는 기간은 얼마 안 되는데, 사용하는 사람을 위하면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플로팅 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광나루 수난구조대는 건물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건물이 아니라 시설물이다. 한강에는 건축이 없다. 시설물밖에 안 된다. 그리고 철골콘크리트로 지을 수 없다 보니 재료도 철물 같은 거로 조립할 수 있는 것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터디할 때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재료도 있었는데 비용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해머로 누른 콘티 타공을 썼는데, 현장에서 햇살이 딱 한강에 비치면 울렁이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한강에 뭔가를 할 때, 한강공원을 이용하는 많은 시민이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 주변의 다른 건물을 보면 예전 서울시 디자인과에서 화장실을 매뉴얼화해서 노란색으로 만든 게 있다. 그 이후에 건축가들이 만든 전망대도 있어서 조금 일반적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필요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4면의 표정이 다르다.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김빈 우리 작업을 보면 기본적으로 재료를 많이 쓰지 않는다. 쓰더라도 하나의 재료로 강조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면서 변화를 주는 건데 광나루의 경우는 긴 면과 짧은 면의 프로그램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메인 프로그램은 짧은 면에 다 몰려 있고 긴 쪽으로는 서비스-헬스장이나 이런 동선이 붙어 있다. 그러면 접근할 때 한쪽 재료를 다르게 표현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키네틱으로 접근했다가 그곳이 창이 많아야 하는 곳과 적어도 되는 곳이 있어서 피하고, 그럼 뭐가 좋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철골 구조라 물에 떠야 해서 무거운 재료를 배제하고 나니 금속으로 점점 좁혀졌다. 금속 표면이 울렁거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마다 재료를 통일하려고 애쓰고 그걸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접근하는 것 같다. 망우 119안전센터에서는 콘크리트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김빈 덩어리를 스터디하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어긋나게 하면서 복합적으로 아이디어가 생긴 것 같다. 3.9라는 세팅을 해놓고 3분의 1씩 끊어내면서 외부에서 조경이 되는 면이 생기고 어느 곳은 안에서 쓰기 좋은 공간이 생기도록 조합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보면 한 층에 재료 세 개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사이 공간에 대한 비례감이나 공간감이 인상적이다. 망우 119안전센터나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이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공을 들이는 부분이 있는가? 김빈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공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세팅할 때 적당한 치수를 가지고 접근한다. 예를 들어 망우 119안전센터의 조그만 테라스 같은 경우, 숙소 사이에서 한 사람이 바람 쐬러 나왔을 때 적절한 공간이다. 어느 정도 크기라면 이곳을 쓸 수 있냐는 접근을 하고, 이것을 입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지 살펴본다. 결국, 치수나 스케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치수의 기준은 무엇인가? 치수가 아니더라도 외부 공간이나 연결 공간을 만들 때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듣고 싶다. 김빈 당연히 감이 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를 들어 외부 공간이 있다면 거기에 접한 복도나 실이 있다. 그 둘의 관계로 정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전체 볼륨에서 테라스가 디자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볼륨을 조정하기도 하는데, 시작은 평면의 치수이고 이를 조정해나간다.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유종수 처음 설계할 때 항상 콘셉트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 방향을 어떻게 잡을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놀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주어진 조건에만 만족한다면 그냥 단순한 건물이 될 거다. 처음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건 결국 그런 부분들인 것 같다. 적정하게 부분마다 스케일, 비례감을 잘 찾아가면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김빈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같은 경우 튀어나온 볼륨과 들어간 부분이 요철을 이룬다. 튀어나온 부분은 책상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폭에서 조금 넓다. 그곳이 주 사무 공간이었기 때문에 마주 보는 책상이거나 책상 하나 정도 용납할 수 있는 최소 폭이었고, 그런 기준으로 폭을 조정해나갔다.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태도에서 ‘직업인으로서 건축가의 의미’를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직업인으로서 건축가는 무엇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일단 직업으로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직원들을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사회는 계속 나아지고 있어서 우리도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하고, 한편 아무리 하려고 해도 뒷받침이 안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고 시스템 문제도 있고, 저희 때와 생각이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씩 변화해 가면서 바꿔야 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의 대가를 미루면 안 되고,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노동 시간과 근무 기준은 맞추고 싶은 게 우리의 큰 방향인데, 아직 우리도 그걸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실천을 함으로써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을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   김빈 ‘직업으로서의 건축가’라는 표현은 이런 거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가진 속성이 있다. 본질은 당연히 도시와 사회에 좋은 건물을 만들고 도시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냥 직업으로서 속성이 있다. 건축가는 클라이언트가 있어야 존재한다. 의뢰인의 요구에 충실하다는 의미 보다는 직업이 가진 속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공공 건축이든, 민간 건축이든, 일이 들어오면 제한된 조건에서 우리가 가진 전문성과 타고난 감각, 재능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직업적 본질이다. 그것을 최대한 집중해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당연히 중요한데 건축가의 속성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차원에서 한 이야기이다.   건축가로서 서울에 대응하는 태도도 궁금하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건축가로서 서울의 속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여쭤보고 싶다. 김빈 사실 서울을 바라본다고 할 때 건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빨리 변하는 것도 맞고 그 와중에 오래된 것을 남기려고 하는 반작용도 너무 강하다. 거기에 부동산이라는 경제 현상이 서울을 지배하고 있어서 건축적인 시각으로만 보기 어렵다. 어쩌면 지금 용광로 같은 상황 자체가 서울의 모습이 아닐까? 변화의 속도에 대응한다기보다 서울에서 계속 작업을 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져와야 할 콘텍스트는 서울의 역사라기보다 지금 주어진 상황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때그때 주변에서 취할 수 있는 걸 취하면서 자유롭게 접근하면 좋겠다. 유종수 깊게 생각해본 것이 아니라서 조심스럽다. 단지 내가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실 건축하면서 속도감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단지 대전차기지처럼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불과 50년 전에 황무지였던 곳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는 자료를 보면 정말 빠르게 변하는 도시구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도 그냥 관념 중 하나인 것 같다. 그저 내게 주어진 건축에서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저는 건물 하나로 도시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50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는데, 과연 50년 이후에는 우후죽순 들어선 아파트들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를 우리 모두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조심스러운 게 건축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와 도시 계획대로 조성되는 도시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만든 도시 중에서 좋은 도시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완성도를 만들기 가장 어려운 공공 건축 분야에서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미 증명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금 진행하시고 있는 민간 프로젝트 소개도 부탁드린다. 김빈 제주도에 300㎡(90평) 주택을 하고 있다. 또 성수동에 복합문화시설을 설계하고 있다. 기존 공장을 남기면서 위로 새롭게 증축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남산에 네리앤후 상하이 중국 건축가와 로컬 아키텍트로 협업하고 있다.   코어건축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김빈 건축적인 부분과 회사 시스템이 아닐까? 회사의 시스템은 상식적인 회사 운영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아틀리에라는 게 시간을 많이 들이니까 당연히 시스템이 필요하다.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게 의미 있는 건 알지만 일반적인 회사 운영의 관점에서 보면 비상식적인 부분이 많다. 상식적인 근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직원들이 아직 야근을 많이 해서 안타깝지만 덜 하게 하고 싶다.   유종수 최근 민간 지명공모전에서 우리가 선택된 것은 건축주의 요구를 잘 받아들여 줄 수 있겠다는 이유였다. 안을 고집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바뀔 수도 있다. 그게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과물로 만들어 보여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부탁드린다. 유종수 시민들에게 쉽게 얘기한다고 해도 건축가의 이야기가 잘 와닿지도 않을 수 있다. 건축이라는 게 꼭 어려운 게 아니고, 오픈하우스서울에서 시민들에게 많은 건축을 알리면서 건축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오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저희 작업도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 김빈 순간순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 애쓰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이 건축이니까 좋은 걸 만들려고 한다. OHS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OPENHOUSE 삶을 담은 단독 주택 꾸준히 사랑받는 오픈하우스서울의 주택 오픈하우스는 주거의 선택지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건축적인 아이디어로 최소의 조건을 극복해낸 협소주택부터 주변 환경에 대응하고 가족의 바람을 담은 단독 주택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소우주가 된다. 구조, 재료부터 공간 구성까지 오늘의 집을 만나는 오픈하우스를 통해 집의 의미를 함께 나눠본다.
SPECIAL 오래된 집 집에 대한 탐색을 이어온 오픈하우스서울의 올해 두번째 테마는 <오래된 집>이다. 이번 테마에서는 시간의 축적뿐만 아니라, 집의 오래된 내력을 주목하고, 손님을 맞고 환대하는 집의 공간을 탐색한다. 그 시대 삶의 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오래된 집을 통해 TV가 거실을 점령한 ‘게으르고 나태한 거실’이 아닌, 아직 응접과 환대가 이루어지던 1960~80년대의 주거 공간 구성을 탐색하려는 의도이다. 특히 이번 <오래된 집>에서는 건축가 김수근의 초기 주택인 청운동 주택과 그의 마지막 주택 설계가 된 고석공간이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 처음 공개된다. 두 집은 건축가 김수근의 시작과 마지막에 놓여 있지만, 애착을 가진 새 주인을 만나 오늘의 일상을 쌓아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1968년에 완공된 청운동 주택은 외부와 내부 마감재는 변형되었지만, 강한 조형성을 가진 외관과 기본 공간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김수근의 초기 건축을 탐구할 기회를 주고 있다. 고석공간은 건축가 김수근의 누나인 김순자 여사와 한국 화단의 대표 작가인 박고석 화백의 아틀리에이자 집으로, 현대적인 평면 구성 안에 한식 공간의 정갈한 공간감을 담고 있다. 배형민 교수는 고석공간을 통해 모듈 구성을 탐색하던 김수근의 후기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평한다. 1966년에 지어진 장충동 까치내는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한 집으로 4대에 걸친 대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면서 지역 어른으로서 많은 친척과 청년들을 맞아주던 환대의 공간이었다. 2000년대 집을 수리하면서 내부 마감재 등 일부가 바뀌었지만, 응접실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과 계단실은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이 집의 내력을 보여준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목재 마감의 흔적은 수공예에 가까운 당시 제작 방식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은 오래된 집들의 가장 깊은 곳에 집의 청사진이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집주인에게 건네는 건축가의 마지막 선물인 청사진과 허가 도면은 집의 출생신고서처럼 기록물로 남아 있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에서는 청운동 주택 청사진과 고석공간의 도면 일부를 최초로 공개하고, 동백꽃 까치내 건축주가 제공하고 건축가 임태병이 기록화한 건축가 나상진의 청사진과 외부 투시도를 공개한다. 또한 모래내주택 허가도면을 통해 교수촌이라 불리던 모래내 일대에 그 시절 전형적인 2층 주거를 설계했던 건축가 김종호를 추적한다. 1~2세대 건축가가 활동한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주택부터, 당시 보편적인 주거 양식을 짐작하게 하는 교수촌의 2층 주택, 적산 가옥으로 지어진 후 오랜 시간 덧대고 개조되며 새롭게 활용되고 있는 삼청동 주택까지, 집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본 새 주인을 맞은 집들과 문화공간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옛집까지, 오래된 집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오픈하우스서울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①, 건축가 이성관           ‘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때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왜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그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것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수한 건축분투기 ②,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첫 당선작인 대전차방호시설까지 몇 개의 공모전에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열 몇 개였던 것 같다. 2015년에 둘이서 거의 한 달 반 정도 간격을 두고 공모를 했다. 2014년 그해만 9개 정도 한 것 같다. 그중 단 하나가 당선되었다. 2015년 즈음 공공건축가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설계비 1억 원 미만의 프로젝트는 지명 공모전을 했다. 선정위원회에서 젊은 신진 그룹 5팀을 선정했고 거기에 운 좋게 지명되었다. 금액을 떠나서 프로그램이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너무 하고 싶었고, 바라던 대로 당선이 됐다. 우리에게는 큰일이었다. 서울시에서 연락을 받고 너무 좋아서 조그만 사무실 책상을 쳤을 정도였다.   대전차 방호기지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유종수 벙커에 담긴 히스토리가 있다. 군사시설을 위장하기 위해 시민 아파트가 있었고 그게 무너져서 철거해 폐허처럼 남아 있다. 그곳을 다시 창작 공간을 만드는 재생 사업이었다. 건축하면서 벙커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접해보기 힘들 것 같았다. 군사시설이니까. 최근 DMZ 안에 있는 군사시설도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프로젝트로 진행된 건 대전차 방호기지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선유도공원 프로젝트나 김광수 선생님이 설계한 소각장(아트벙커 B39)이 산업시설이라면, 군사시설이 문화시설로 리모델링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차이점도 있는가? 김빈 실제 군 작전 시설의 경우 그 자체가 너무 낯설고 특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현장 설명회 때 또 한 번 더 공간에서 보고 느끼는 게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았다고 하니, 복합적인 느낌을 받았다. 유종수 이게 벙커였다는 걸 느낀 것은 두께 1m짜리 방호벽을 봤을 때다. 서울시에서도 벽을 보존하길 원했다. 나머지 건물은 안전 등급이 2등급이어서 대부분 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벽을 존치하고 나머지를 건드려보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현장 답사 때는 방호벽을 일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쓰레기 더미 창고에 잡초가 무성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선 후 착공하면서 쓰레기를 다 걷어내니 그때 이 골조들이 다 살아나더라. ‘여기가 대전차 기지였구나!’ 싶을 정도로 방호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벙커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종수 이곳에 벙커가 필요했던 이유는 서북부 전선에서 서울에 진입하기 위한 루트이기 때문이다. 옛날 ‘다락원 터’라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68년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들어오면서 1969년부터 서울 요새화 작업 진행되어 이런 벙커를 만들었다. 서북부 쪽으로 도봉구, 경기 고양시 일산 쪽의 유진상가도 같은 배경이다. 나중에 건물을 무너뜨려서 막겠다는 의도다. 유진상가가 지어질 당시 건물을 보면 길게 장벽처럼 만들었는데 대전차도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도봉구 지역의 군사작전 지도를 보면 아파트 5개 동이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서는 1층 벙커 전체가 다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파트만 5동처럼 보였던 거다. 결국, 이 구조물은 도봉산과 수락산 전체를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아파트는 철거가 된 것인가? 김빈 항공사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 시점이 있다. 1999까지 건물이 있었는데, 2006년 사진을 보면 아파트가 없어진다. 1층만 남겨놓고 2004년에 철거가 됐다. 그리고 길이 없다가 2009년에 창포원이라는 공원이 조성되면서 길이 생긴다. 그때 길이 연장되면서 아파트 절반 정도가 잘려나갔다.   설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무엇인가. 김빈 그 길에 5개 동의 아파트가 있었다. 1층은 쭉 연결되고 2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고 3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다. 밖에서는 2개나 3개, 5개짜리 동으로 보이는 건물인데, 안에서는 하나로 쭉 연결돼 있다는 걸 데이터로 알고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긴 건물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접근했다. 250m가 수평으로 누워 있는 긴 건물이다. 그래서 이 평평한 수평 건물 그리고 장벽을 만들고 있는 서울과 의정부의 경계라는 포인트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무엇을 남기고 혹은 없애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앞부분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와 누워있는 건물의 관계도 고려한 것인가? 김빈 타워는 원래 함께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군사시설이 문화 창작 시설로 변모하지만, 40% 정도의 공간은 국방부가 여전히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말은 평상시에는 문화시설이지만 유사시에는 군사시설이 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군부대의 의견이 중요했다.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군부대와 계속 협의를 했고, 군부대 의견이 계속 반영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군부대와 협의하는 중에 인근 군부대에서 일정 높이의 관측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총알을 방어할 수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하나 올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관측소를 만들되, 평상시에는 전망대처럼 쓸 수 있도록 시작했다. 진행 중에 관측소가 필요 없게 되어 온전히 전망대로 바뀌었다. 건축적인 관계보다는 여러 발주처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수직 타워이다.   첫 번째 당선작이자 첫 번째 공공 프로젝트이다. 현실의 공공 건축 프로세스가 어렵진 않았는지. 유종수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도봉구 측에서 저희 안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지지해주었다. 김빈 공공 프로세스는 원래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하지 않은가. 공공 프로젝트마다 특별한 점이 있는데 대전차 기지에서 다른 점은 군부대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저희가 직접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도봉구청에서 잘 정리해 주시기는 했는데, 함께 협의할 부분이 많았다. 또 이 사업은 서울시가 먼저 추진한 것이 아니라, 2014년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민추진단이 있었다. 시민들이 모여서 이곳을 어떻게 해보자고 계속 제안해서 서울시가 수락한 거라서, 서울시민추진단과도 협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러 주체와 이해관계가 있다는 게 달랐던 점이고 어렵다면 어려운 점이었다.   보통 공공건축물은 기획 단계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바뀌어 어려움을 겪는다. 프로그램은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프로그램은 정해지지 않았다. 공모전 지침에는 예시만 있었고 저희가 제안하게 돼 있었다. 공모전에서 중요했던 것은 앞서 말한 1m 두께의 방호벽이었다. 방호벽을 무조건 존속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프로그램은 창작 공간, 공방, 시민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큰 틀에서 주어졌다. 공방, 세미나실, 카페, 사무실 그다음에 군사시설로 작전 지휘소가 구석에 있다. 무엇보다 이 구조물 하나뿐만 아니라,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어서 공원도시계획시설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설 면적을 조정하면서 대전차 기지 리모델링의 면적이 많이 늘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때 주어진 원래 대전차 기지 면적을 거의 유지했던 것 같다. 김빈 모형에서 검은색 ‘ㄷ’자로 되어 있는 부분이 군사시설이다. 실제 탱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ㄷ’자들은 무조건 군사시설로 써야 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를 창작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게 출발점이었다.   협의 주체가 많다는 건 원하는 목적이나 방향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각기 다른 주체들과 협의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군부대는 사실 기능적이다. 지금 이 시설의 목적이 무엇이든 적이 침투했을 때 탱크가 들어가고 방어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군부대와 협의하면서 결정된 부분이 많다. 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반영해야 했다. 그런 건 괜찮다. 언제 군부대와 협의를 해보겠나?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빈 서울서진학교 인터뷰할 때 그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나요?”라고. 사실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공공 건축은 당연히 협의해가야 하는 스트레스가 있다. 특별히 점이라면 군부대처럼 보수적이고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다른 부분이었다.   당선 후 완공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설계를 한 1년 정도 했다. 시공은 2015년부터 2017년 초반까지 한 것 같다. 리모델링 건물이 항상 그렇듯, 이곳도 기존 도면이 없었다. 그래서 실측하면서 철거하고, 또 현장에서 보나 계단을 살려야겠다는 요구가 있어서 현장에서 설계가 바뀐 부분이 있었다. 철거하면서 발견된 것도 있었다. 구조물 밑에 있던 연결 통로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철거 중 발견해서 살려내고자 했다.     대전차 기지 당선 이후, 어떤 공모전을 진행했는가. 김빈 많이 했다. 2015년에 대전차 기지 공모전 이후 2016년만 해도 한 달에 하나씩 공모전에 참여했다. 떨어진 것도 있었는데 그 중 당선된 것이 양남시장이었다. 계획 설계까지 다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사이 입상을 하나 하고 그렇게 계속해왔다.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를 포함해서 개선된 공모전 제도가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제한된 인원을 지명 공모전을 진행한 것, 서울시에서 선정한 심사위원이 실무를 하는 건축가 위주로 포진되었던 것, 또 제출물을 간소화해준 것이 괜찮았다.   공공 건축 실현 과정의 어려움을 꼽는다면 운영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공모전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다. 기획 따로, 운영 따로, 설계 따로 진행되면서 프로그램이나 요구사항이 계속 바뀐다. 기획, 운영, 주체가 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공공 건축의 의사결정 과정을 대하는 건축가의 태도가 궁금하다. 김빈 세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처음부터 건물 지을 때까지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건축가밖에 없다. 말씀하신 대로 중간에 담당자도 바뀌고 기획한 사람도 다르고, 시공자는 설계 후에 참여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게 우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발주처에 그 사실을 인지시켜드리고자, 필요할 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끝까지 이걸 진행하니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라고. 그런 근거로 이야기하면 많이 도움이 된다. 신선한 발상이다. 김빈 물론 훨씬 더 에둘러서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인식을 환기시키는 거다. 유종수 그렇지만, 저희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서울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의 각 구 지자체도 있고 SH 같은 지방 공기업도 있는데, 그래도 이곳은 건축가의 당선안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지방은 더 보수적이고 아직 인식도 부족한 것 같아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주로 줄다리기를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유종수 오늘도 설계의도 구현법 때문에 계약이나 과업의 조건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공무원은 당연히 법적 기준을 가지고 접근한다. 제도가 처음 시행될 때 시행착오를 겪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접근하는 태도가 너무 갑을 관계로 접근한다.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항목도 넣어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도 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한 번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해서 일부는 수정되기도 하지만, 또 발주처 입장에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 부분이 행정 프로세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유종수 건축을 해본 기술직은 대화가 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보통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일반 보직 순환제로 일한다. 그래서 더 힘든 부분이 있다. 건물이 설계하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행정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그것도 태도의 문제일 수 있는데, 당연히 공무원은 내부 논리가 있다. 감사도 생각해야 하고 시스템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결국 결과물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게 맞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사실 건물이 어떻게 지어지든지 상관없다는 공무원이 의외로 많다. 건물이 좋다 아니다 보다 행정적인 절차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건물을 짓는 것이니, 프로젝트가 제대로 지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전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행정적인 절차를 바꾼다고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그런 대전제가 공유된다면 보직이 중간에 바뀌어도 그대로 가면 된다.   공공건축물을 설계할 때 건축가로서 두 분의 목표도 있을 텐데, 무엇을 어디까지 이루고 싶다는 목표나 얻고자 하는 바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공공 건축도 시스템이 다른 것뿐이지 하나의 프로젝트다. 물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가야 한다는 과정은 짜여 있다. 민간 프로젝트는 모호한 경우가 많고 오히려 클라이언트 한두 명에 휘둘리기도 한다. 공공 건축은 그래도 여러 사람이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목표가 어느 정도 구체화하여 있다. 그래서 그 구체화한 목표에 동의하면 저희도 맞춰 가는 게 기본적인 코드다. 결국, 프로젝트이니까, 그 안에서 멋있고 좋은 건물을 만들어내는 거다. 공공 건축의 다른 점이라면 그냥 저에게 주어졌을 때의 바탕, 기준이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그 외에 저희 생각은 크게 차이가 없다. 유종수 공공 건축은 그 범위가 넓어서 선택의 기회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저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었다. 당선작 중 다 완공하지는 못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로그램이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민간 프로젝트를 할 때 한 프로그램을 잘해놓으면 같은 프로그램이 계속 들어오곤 한다. 예를 들어 체육관을 잘 지어 놓으면 체육관만 설계하거나, 주택을 하면 주택만 계속 들어오거나, 4~5층 근린생활시설이 홍보가 잘 되면 그런 프로젝트만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수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거꾸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었다. 김빈 확률은 좀 낮지만, 선택권은 있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볼 수 있다. 공공 건축끼리도 다르고, 민간건축끼리도 다르다. 의뢰인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려 한다.   건축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거나 갈등이 노출될 때 어떻게 해결하는 편인가?    김빈 할 때까지 한다. 끝까지 최대한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안 되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수긍한다. 그 프로젝트를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종수 당선되든 수의 계약으로 하든, 그런 부분은 다 수행했던 것 같다. 협의 과정에서 서로 맞춰 가면서 밀고 당기면서 끝까지 갔다. 다만 시범사업으로 당선된 양남시장 같은 경우는 공모할 때부터 기본 설계까지 하는 게 조건이었다. 조합의 요구와 관의 사정으로 중지되었다가 새 조합이 들어서서 다시 시작되었을 때, 조합에서 원래 안 대신 일반적인 주상복합 건물로 설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면 저희는 안 하겠다고 했다. 김빈 그렇게 극단적으로 사업이 접히는 경우가 아니면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산으로 가다가 그래도 산 중턱까지 못 가게 하는 과정인 거다. 그래도 수도권 발주처들은 대체로 건축가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셨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도 있었지만, 조정 가능한 상황에서 대응했고 갈등이 아주 심한 경험은 별로 없다.   이치훈 소장님이 말한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결과물’이라는 표현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공공 프로젝트의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건축가의 전략은 무엇인가? 김빈 우리가 책임진다. 건축가가 책임진다. 돌아보면 그런 전략이 있었다. 그냥 잘 만들려고 한 거다. 유종수 발주처가 공공일 때는 어쨌든 확보한 예산이기 때문에 그들도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큼 설계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율을 잘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것은 설계 기간 안에 끝내는 것과 공사비 문제가 가장 크고, 바꿔 달라는 요청은 잘 설명을 하면 대부분 이해한다. 또 공공 프로젝트는 보고 절차가 많아서 윗선의 의견이 나왔을 때 잘 반영해주면 대부분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김빈 생각을 해보면 책임 회피 시스템을 돌파하는 전략이 있다기보다, 저희가 조율을 잘했던 것 같다. 공무원 설득을 잘했거나. 그래서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요구사항은 있지만, 공모전 당선안은 또 공모전 안대로 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많이 흔들 생각을 안 하기도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소소하게 바뀌는 것은 저희가 대안을 제시하든가 아니면 더 좋게 제안하는 식으로 풀었다. 그게 방법이라는 방법이다. 유종수 공모전 안이 완전할 수 없고, 의견을 들어보면 맞는 것도 있다. 그것이 또 바꿀 기회라고 생각한다. 서울서진학교의 중정 같은 경우도 사실 처음에 식당으로 계획했는데, 심의 때 나왔던 의견을 받아들여서 북카페로 만들었다. 의견을 반영해서 그런 디자인이 나온 것이어서, 꼭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힘들긴 하지만, 그건 민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올해는 민간 프로젝트밖에 없는데 민간도 힘들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픈하우스서울 2022>의 주제가 공공 건축이지만, 저희의 태도 자체는 민간과 공공을 구별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건축을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이라고 생각한다.   공공 공간에서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코어건축의 여러 공공 프로젝트는 자체의 완결성을 잘 이루고 있다. 설계할 때 포기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도 궁금하다. 김빈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보편성이다. 어차피 디자인은 주관적이고 다양한 시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공공 건축에서는 보편성을 절대 놓을 수 없다. 그 보편성이 흔히 말하는 동선일 수도 있고 공간의 사이즈, 스케일일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기 시작하면 서진학교의 넓은 복도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들여다보려 애를 쓴다. 사실 코어건축의 프로젝트를 보고 심미적인 질문을 하면 대답을 잘 못 하겠다. 왜 그런 형태가 나왔는지 물어보면, 미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만큼 필요하고 그렇게 곡선을 두어야 내부가 좋아지니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드릴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말씀하신 대로 공공 건축은 행정, 운영이 모두 익명의 주체들이다. 또 당선 후에 많은 경우 예산이나 조건도 바뀐다. 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기 완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김빈 참 힘들고 어렵다. 주변 건축가와 이야기해봐도 공공 건축을 하면 다 힘들어한다. 다만 그 힘들어하는 지점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저희는 이 정도 힘든 상황은 어느 작업에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접근하는 편이다.   행정적인 어려움을 대하는 자아와 건축가로서 자아를 분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요구에는 이렇게 대응하지만 나는 이렇게 만들 거야’라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닐까? 유종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면 그들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이견이 없다. 김빈 발주처 담당자도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선의로 하는 거다.  물론 진짜 화가 나면 싸우기도 하는데, 결국 그분들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접점을 잘 찾아가면서 풀었던 것 같다. 힘들기는 하지만 해결을 해내야지 어떻게 하겠나.   결국, 어떻게 하면 공공 건축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일 것 같다.   유종수 많은 건축가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명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어디에 맞춰야 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짜깁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계속 좋아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다만 법이 구체화하면 좋겠다. 설계의도 구현법도 아직 구체적인 시행령이 없어서 국토교통부와 건축사협회에서 협의하고 조절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구체화하면 어려움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공공 건축 공모전을 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발주처에 계속 의사 표현을 하는 이유도 이걸 관철하겠다기 보다는 담당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도 있다.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담당자가 알아야 다음 사람이 프로젝트를 했을 때 조금이라도 변한다고 생각한다. 건축가들도 발주처에서 요구하는 것에 그냥 사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의견을 내야 한다. 저희는 의사 표현을 하면 늘 발주처에서 ‘너희는 왜 유난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건축가들이 현장에서 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들은 사실 일반 수의 계약으로 하는 프로젝트도 많다. 이렇게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을 제대로 하려는 건축가는 천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들도 같은 설계 방식으로 보이는 거다. 너무 다르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설계안을 잘 마무리하더라도 시공 입찰 방식은 또 다른 영역이다. 규정되지 않은 재료를 쓰기 힘들 때도있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가는지 궁금하다. 김빈 시공사 입찰이야 운을 바랄 수밖에 없다. 재료는 시스템적으로 제한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전제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재료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기술위원회를 연다든가, 자재 선정위원회를 열어서 선정하는 절차도 있다. 발주처와 협의가 잘 되면 발주처가 건축가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조달청 시스템에 있는 제품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시스템은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다. 시공사나 감리사가 알아서 제안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타이밍이 되면 샘플을 들고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샘플 시공도 가능하다. 그러면서 재료도 바꾸고 페인트 샘플 색상도 여러 개 칠해본다. 필요하면 계속 부탁하고 요청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 구현해 왔던 것 같다.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③로 이어집니다.     
OPENHOUSE 다양성을 품은 학교 건축 서울서진학교뿐만 아니라 올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받은 신길중학교 등 학교 건축의 새로운 유형이 등장하고 있다. 기능과 관리 감독 위주의 기계적인 평면으로 복제되던 학교 건축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는 오래되었지만, 이제 비로소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듯하다. 교육 공간 개선에 대한 오랜 바람은 자라나는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출발한다. 최근 등장한 학교 건축은 이런 공감대를 토대로 새로운 공간 제안을 담고 있다. 6개의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은 앞으로의 교육 공간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별한 건축분투기 ①,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올해 건축가특집은 공공 건축에 주목하는 주제에 맞추어 공공 프로젝트의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코어건축(유종수, 김빈)을 소개한다. 코어건축의 대표작인 서울서진학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풍부한 표정을 지닌 학교 공간은 오랜 시간 이어진 지역의 사회적 갈등을 위로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일반 학교 건축에서도 보기 힘든 팟(POD), 넓은 복도와 중정, 다채로운 재료가 만드는 공간은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에게도, 지역 주민들에게도 건축이 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의 방식으로 그러나 특별한 건축을 풀어내 온 코어건축의 작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공공 건축 영역에서 공모전에 참여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이를 건축가의 의도대로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의뢰인과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민간 시장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다. 최저 입찰과 조달청 시스템 안에서 비현실적인 일정과 기획의 부재를 만나게 되면, 설계안의 의도와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몇 배의 노력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코어건축은 이 고단한 공공 영역에서 공모전이라는 진검 승부로 프로젝트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건축 원칙을 지키며 공공 건축의 다양성을 만들어오고 있다.   대전차방호시설을 리노베이션해 예술창작공간과 문화공간으로 바꾼 평화문화진지, 공진초등학교를 개, 증축해 가장 보통의 특수학교를 만들어낸 서울서진학교, 한강 공원의 전망을 바라보는 한강 공원 양화지구 매점, 한강 수난구조대를 위한 광나루 119 수난구조대, 주변 대형 건축물 사이에서 분절된 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까지, 코어건축은 공공 건축의 질적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들만의 건축 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진행된 서울서진학교 영상과 함께 코어건축이 진행한 6개의 공공 건축을 만나보며, 인터뷰를 통해 공공 건축에 개입하는 건축가의 태도와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두 분이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하다. 유종수 태어난 곳은 곡성이라는 시골이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섬진강 17번 국도가 근처에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집은 툇마루가 있는 허름한 세 칸짜리 시골 농가 주택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루에서 안개 낀 강이 보이고 산도 보이고, 두루미가 날아가던 기억이 있다. 건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그런 곳에서 보내서인지 정서적으로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김빈 아버지가 토목 분야에서 일하셨다. 동남아, 중동 건설 붐일 때 해외 현장 소장으로 발령이 나셨다. 그래서 태국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은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6살에 한국에 와서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강남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어릴 적 기억은 완전히 다르다. 도로 옆에 바나나 나무가 있고 나무에 칼 꽂기를 하며 놀곤 했다.   서울의 초기 아파트 단지는 동간 거리도 멀고 나무도 크게 자라서 지금과 다른 풍경이었을 것 같다. 김빈 완전히 다르다. 주차장은 공공재 개념이었다. 차가 한 집에 한 대도 없을 때였으니까. 보통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장까지 녹지가 있는데, 그 단지에 사는 몇 가족이 어쩌다 한 번씩 녹지 앞 통로에서 놀곤 했다. 엄마들이 옆에서 수다 떨고 우리는 또래끼리 거기서 놀면, 그게 너무 좋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아파트 단지 앞 공간이 커뮤니티 공간이었던 셈이다.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         유종수 건축을 좋아했다거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대학을 가면서 건축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오히려 건설 쪽에 가까운 이미지로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타고난 능력이나 손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설계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료를 찾아보고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며 체득했던 것 같다. 지금도 건축을 배우면서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4.3그룹 선생님들이 SA(서울건축학교)를 꾸려 활동했고, 경기대 전문대학원이 생기면서 설계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해외 건축가들이 방한해서 강의도 많이 했고, 그런 것을 통해서 건축에 재미를 붙였다. 김빈 자신의 전공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저도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 지레 아들도 재주가 있겠거니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한번은 식사 자리에서 ‘건축과라는 게 있다. 한번 생각해봐라’ 이 정도로 말씀하셨다. 중학교 때쯤인데,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단단히 박혀서 슬슬 관심을 두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진로를 좀 더 다양하게 고민해 볼 걸 그랬다.(웃음)   유종수 소장님은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다니셨는데, 심화한 건축 교육이 막 시도하던 시기였다. 유걸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모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2002년에 입학했는데,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가기 전에 SA를 다녔다. 좋은 건축을 배우고 싶어서 이곳저곳 찾아보다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도 알게 되었다. 경기대 전문대학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SA는 정규 학교는 아니었지만, 실무를 하시는 선생님이 많았다. SA를 한 학기 다니다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 그만두고, 이후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걸 보고 찾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유걸 선생님이 계셨다. 또 그때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내세운 게 ‘실용’이었다. 다른 방향을 지향하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 첫해에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을 선택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전문대학원에 그전에도 좋아했던 김헌 선생님이 오셨고, 비슷한 시기에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하셔서 세 분을 경희대에서 만났다. 이후 매스스터디스에서 조민석 소장님을 만나 10년 가까이 실무를 한 것까지, 이분들을 만난 게 지금까지 건축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유걸 선생님이나 김헌 선생님, 김찬중 교수님은 어떤 면이 좋으셨나.  유종수 4.3 그룹 선생님들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게 있는데, 유걸 선생님은 연배가 훨씬 높지만,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 같다. 건축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업 시대의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앞으로의 건축, 건축가는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대공간이 가지는 힘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결이 달랐다. 김헌 선생님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저는 경희대 건축대학원의 첫 번째 졸업생, 첫 제자였다. 건축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김헌 선생님은 정신적인 지주 같은 존재였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해서 연 첫 스튜디오에 참여했는데, 항상 시스템을 강조했다. 학생들이 말랑말랑하게 사고하고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고 지도해 주셨던 것이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대학원 건물도 유걸 선생님이 직접 설계하셨는데 사용할 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아주 좋았다. 이런 걸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원래 있는 건물의 공간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비 오면 천장에서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 공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은 자기 영역을 만들곤 하는데, 유걸 선생님은 다 열어놓았다. 심지어 강의실도 반투명하게 열린 공간을 만들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전혀 다른 환경을 접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김빈 소장님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다니셨다. 건축 교육의 붐이 일어날 때 학교가 주목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개성 있게 활동하는 연세대 출신 건축가가 굉장히 많다. 김빈 그게 신기하긴 하다. 저는 처음부터 건축과는 아니었다. 토목과를 졸업하고 다시 건축과에 들어가서 선후배를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다. 첫 설계 수업을 김광수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그게 저에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처음 배운 설계 수업에서 공간 스터디를 하는 데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첫 단추를 잘 끼운 것 같고, 그 인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김광수 선생님 권유로 참여했던 게 <SA 강경 워크숍>이었다.   SA 워크숍은 당대 건축가가 총출동하던 워크숍이었다. 분위기는 어땠나?  김빈 워크숍이 스튜디오 별로 움직이니까 결국 6~7명의 학생과 김광수 선생님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워크숍이 끝나고 학교 체육관 강당을 빌려서 결과물을 펼쳐 놓았는데, 기억에 남는 건 무대 위에 튜터들이 걸터앉아 이야기하던 장면이었다. 당시 가장 잘나가는 건축가들이 모여 있는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그 사진을 남기지 않은 게 지금도 아쉽다. 아무튼, 보통 건축은 건물만 생각하는데, 도시를 탐험한다는 것도 처음이었고, 낯설고 적응하기 힘든 면도 있었지만 재미있었다. 도시에 대한 주제, 목적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강경은 일본강점기 때 잘나가던 수로 수상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던 곳인데, 현대에는 완전히 박제된 도시로 남아있다. 그런데 도시 구조는 여전히 살아있는 게 흥미로웠다. 거기에 학생들을 데려다 놓으니, 기발한 것도 나오고 말도 안 되는 것도 나오고 재미있었다.   저는 계보와 좌표에 관심이 많아서 그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고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온 기록이 아닐까 싶어서다. 두 분은 또 매스스터디스의 초창기를 함께 하셨다. 언제 들어가셨나? 김빈 제가 2003년도 후반, 유 소장님은 2004년도 중반 정도였다. 첫 회사를 나와서 잠깐 쉬고 있을 때 김헌 선생님 소개로 다니게 되었다. 직원이 3명 정도였던 완전 초창기였다. 매스스터디스에 큰일이 들어오기 시작한 2004년 초부터 사람을 많이 뽑았는데, 유 소장님도 김헌 선생님 소개로 합류하게 되었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첫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 김빈 헤이리 주택들 – 이끼집하고 비틀린 집(Torque House), 너와를 붙인 깍여진 집(Chipped House) 로 시작했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의 계획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계획안을 만드는 과정에 처음 참여했는데, 일반적인 아파트나 주상복합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처음 계획안부터 재밌고 신선했다. 당시 시행사 프로젝트를 그렇게 접근하고 또 충분히 사업성 있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는 작업량이 엄청나서 도면을 쌓으면 사람 키가 훌쩍 넘는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유종수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축 자체도 어려웠고, 저층부와 상부 주거 타입도 아주 많아서 스터디도 많이 필요했다. 거기에 적용할 시스템도 처음 해보는 게 많았다. 또 규모가 커지니 컨설팅 회사들이 아주 많았다. 그것들을 건축가가 어떻게 핸들링 해야 하는지, 설계부터 공사 현장까지 참여하면서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조민석 소장님이 보여주신 태도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한 인터뷰를 보았다. ‘이것은 일이고 우리는 프로고 여긴 학교가 아니다’라는 멘트도 언급했는데, 매스스터디스의 시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매스스터디스의 실무는 저에게도 중요하지만, 독립해서 활동하다 보니 그냥 저희가 하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입견을 주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매스스터디스에서의 실무는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나 건축에 올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계획할 때부터 치밀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 건물을 짓다 보면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데, 그때마다 유연하게 잘 풀어가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김빈 늘 조민석 소장님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유종수 소장님과 비슷하다. 건축 프로젝트 하나에 끊임없이 집중하고 매달려야 하는데, 사실 힘든 일이다. 한편으로는 기준이 너무 명확해서 편한 것도 있다. 집중해서 일하면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힘들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명확한 건축적 아이디어를 지키면서 시행사나 여러 사업체와 협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빈 조민석 소장님은 굉장히 유연하다. 지키고자 하는 것도 분명하지만, 관계자분들과 대화를 굉장히 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민석 선생님이 해준 명언들이 있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태도인데, ‘가려운 데를 긁어줘야지, 아픈 데를 긁어주면 안 된다.‘라는 거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나 에스트레뉴 같은 경우 시행사가 있었지만, 건축가 안을 존중해줬다. 그러면 둘 다 원래 계획안대로 지어졌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처음에 제안했던 안에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상황에 유연함이 있는 것 같다. 발주처나 건축주가 엄청난 시간을 들인 일을 변경하자고 하면 저희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 발전시켜 좋은 안으로 만들기 위한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 같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실무를 쌓는 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유종수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저는 지금도 부족한 것 같지만 말이다. 퇴사한다고 했을 때 조 소장님이 같이 밥을 먹으며 해준 얘기가 있었다. 나가서 뭐 할 거냐고 물으셨다. 김빈 소장님과 같이 사무실을 하기로 한 상태에서 나왔는데, 뭘 할지는 모르겠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어떻게든 버텨라. 뭐든 하고 싶으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네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위해서 신문팔이를 하더라도 버텨라’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말들이 아직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독립하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김빈 제가 먼저 나왔는데, 우스갯소리로 ‘여기서 운을 다했구나, 내 시대는 끝나가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맨땅에 헤딩 한번 해봐야겠다 했다. ‘정 힘들면 또 취직하면 되지’라고 가볍게 나왔다. 필운동에서 사무실을 열었고, 종종 유종수 소장님을 볼 때마다 열심히 설득했다.(웃음)   할 만큼 했다는 건 내 것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나? 김빈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무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가 보였고,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해도 결국 비슷할 것 같았다. 내 것을 하겠다기 보다는 그냥 해보지 뭐 이런 마음이었다. 대단한 건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간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했다. 만만치 않았는데 맨몸으로 버텼다. 유종수 저희는 서로 회사 다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 술친구 중 한 명이었다. 마흔에 사무실을 열었는데, 그 나이 정도면 건축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직장에서 계속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그곳에서 얼마나 더 확장성이 있을지 고민하는 때인 것 같다. 한편으로 훨씬 젊은 사람들이 자기 건축을 하는 걸 보고 가능성을 봤던 것 같다. 언젠가 해야 할 거라면 지금이 적정한 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 소장님이 먼저 상을 차려놨기 때문에 저는 그냥 숟가락만 얹었다. . 김빈 책상하고 의자 하나밖에 없었다.(웃음)   2010년 즈음만 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성장할 만한 건축 시장이 없었다. 처음 독립해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셨나? 김빈 당연히 저희처럼 일천한 사람들이 일을 따는 유일한 방법은 공모전이다. 처음 시작은 다 비슷하다. 매스스터디스의 인연으로 속초에 조그마한 주택을 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민간 프로젝트가 바로 <상상가>였다. 그다음은 공모전을 시작했다. 유종수 보통 독립을 하면 지인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 하지만 저희는 사실 그런 게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공모전이었다. 2014년 2월에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3개월 동안 준비한 공모전이 운 좋게 2등으로 입상했다. 이렇게 계속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 떨어졌다. 저희가 공모전을 많이 참여했는데, 어떻게 보면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다. 선배 건축가들이 공모가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조금씩 마련해 주셨다. 정책과 우리의 시기가 운 좋게 맞았던 것 같다.   당시 공공 건축가 제도가 시작되고, 공모전 제도가 시스템을 갖춰가는 시점이었다. 공모전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문턱이 조금 낮아졌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복합적이다. 공공건축가 제도나 지명 공모전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사 과정이 공정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모전 내용이나 심사위원, 지침을 보았을 때 공정하게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있다. 그런 신호를 계속 주어야 규모가 작은 설계사무소도 덤벼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시스템이 정비되면서 제출물도 간소화되는 추세였다. 공모전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다.   그런데도 공모전은 당선이 보장되지 않는다. 공모전을 계속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조율했나? 김빈 초창기와 지금은 조금 다르다. 대전차방호시설 공모전에 처음 당선됐을 당시에는 공모전 선택할 때 프로젝트를 가릴 단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통장 잔고가 없으니까. 다만 공모전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라든가, 심사위원 정도는 당연히 본다. 그렇다고 ‘이번엔 좀 쉬어 갈까?’ 이런 여유는 없었다. 뭐든 공모전이 나오면 계속 도전을 해야 하는데, 그걸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 유종수 당선된 것도 있지만 입상을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앞으로 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서 희망 고문이 된다. 그런 것 때문에 계속 공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민간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허가 직전까지 갔다가 멈추고, 민간 공모에 당선되어도 계약 후 진행이 안 되는 것을 겪어보니까, 민간으로 안 되나 공공 공모전으로 안 되나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거구나 싶었다. 김빈 하다가 지칠 만 하면 한 번씩 입상을 하고 어쩌다가 당선도 되고. 그러다 보니 공모전이 나름대로 일을 따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거다. 설계사무소마다 경험이 다를 텐데 저희는 운이 좋았는지 공모전을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쪽으로 자꾸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공모전 첫 당선 프로젝트가 평화문화진지: 대전차방호시설 리모델링이었다. 이 공모전은 해봐야겠다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 김빈 그것도 시스템 덕분이다. 설계비 1억 이하 프로젝트는 공공건축가 중에서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공정함도 그렇고 참여할 사람들을 지명한 것도 시스템화되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선 프로젝트가 너무 특이하잖은가? 대전차방호시설은 그냥 구경하기도 힘든 시설인데, 그걸 바꾼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또 당시에는 8천~ 9천만 원의 설계비도 저희에게는 귀한 돈이어서 지원했다. 물론 리모델링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누구나 흥미를 느꼈을 것 같다.   코어건축사사무소의 웹사이트에 소개된 프로젝트를 보면 당선작보다 2등작이 더 많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도전하고 어느 정도 비율로 당선되셨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작년 서울시건축상 대상을 받아서 올해 건축문화제에서 특별전을 했다. 전시하면서 그동안 공공 공모전에 지원했던 폴더를 다 열어봤더니 한 90개 정도가 되더라. 김빈 2014년부터 시작했으니까 만 9년이 되어간다. 2019년과 2020년이 가장 많았다. 유종수 그때 아마 15개에서 20개 정도의 공모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말은 거의 한 달에 한 개의 공모에 참여했다는 거다. 물론 두 팀으로 나눠서 했지만.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지치기도 했다. 적정한 기간을 두고 당선이 되면 좋은데, 사실 공모는 언제 당선될지 모른다. 재작년처럼 1월부터 10월까지 당선되지 않다가 11월부터 동시에 3곳이 당선되는 바람에 올해는 공모를 거의 안 하기도 했다.   90개 정도 되는 공모전에서 당선된 것은 몇 개인가? 유종수 당선은 한 10개 전후인 것 같다. 지어진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납품까지 했는데 발주처 상황으로 잠시 멈춘 것도 있다. 김빈 당선율로 보면 10% 정도다.   절차가 간소해졌다고 하더라도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공모전인데 어렵진 않았나? 공모전에 주력하면서 내부에서 가진 원칙이나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간소해졌다는 건 상대적인 거다. 간소해졌다는 게 간단해졌다는 건 아니니 에너지는 많이 써야 한다. 유종수 지금은 저희만 일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같이 일한다. 가능하면 직원들이 공모전만 하기보다,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현장까지 온전하게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공모뿐만 아니라 교육청의 ‘꿈담 교실’이나 ‘찾아가는 동사무소’도 참여했는데, 가능하면 처음 입사한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작을수록 다루기 쉬우니까. 공모전을 할 때 일단 좋은 공모전인가를 먼저 판단하고,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시작한다. 방향을 잡고 직원들이 작업하면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다. 제출물도 비효율적인 것은 제외하려 한다.   2015년부터 서울시 공모전 제도도 꾸준히 개선됐다. 다른 도시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공공 건축에 대한 제도가 초창기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지, 여전히 어려움으로 꼽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유종수 처음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프로젝트 서울>이라는 웹사이트도 만들었지만, 그때는 서울시 기획과에서 주관했다. 그러다가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고 도시공간개선단이 생기면서 서울시에서 공공 건축을 전체적으로 주관하며 공모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공모전이 공개되고 심사위원도 공개되고 전자화 문서로 간소화시키는 등 제도를 잘 만드신 것 같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공모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빈 기본적으로 서울시의 방향, 지자체별로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는 큰 흐름이 있고, 그 덕분인지 건축가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건축가의 의견이 조금씩 반영되고 있다. 공모전은 결국 공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는 관행적으로 받던 자료도 간소화하려 하고 공모의 기획 단계에서 건축가들의 참여가 많아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어서 저희가 편해지는 것 같다.   제출물이 많은 큰 규모의 공모전도 참여하나? 김빈 공모전을 고를 때 규모가 크거나 제출물이 많은 것보다, 공정함에 대한 의심이 있다. 공모전을 하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데 우리가 한 노력을 공정하게 심사받지 못한다면 안타까우니까. 규모가 큰데 괜찮을 것 같다 싶으면 당연히 덤벼든다.   공공 건축은 사업의 목적과 풀어내야 할 숙제도 분명하고 사업의 종류도 다양하다. 주어진 조건이 흥미롭거나 인상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유종수 대전차기지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시 스케이트 광장, 양남시장도 그렇다. 지어지지 않았지만, 낙산전망대도 있었다. 이번 오픈하우스서울에서 소개하는 한강 변 플로팅 건물처럼 장소적인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저희는 프로그램이 특수한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김빈 공공이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민간사업에서는 잘 접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다 그런 성격이다. 한강에 떠오르는 건축물을 언제 해보겠나.   공간지에 이치훈 소장님의 비평이 흥미로웠다. 기념비성을 가지면서도 과하지 않는 특성을 언급했다. 공모전의 전략으로도 유리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건축 유형이나 형식에서 디자인 전략이 있는지, 어떻게 그 균형감을 찾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저희에게 균형감은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다 하고 싶은 바이고 그래서 어떤 때는 2등 안이 더 좋은 안이라고도 한다. 저희는 둘이 함께 작업하기 때문에 그 균형감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프로젝트를 할 때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다. 직원들과도 함께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왜 좋고 안 좋은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합리적인 걸 찾아가려고 할 때 항상 김빈 소장님이 균형을 잡고 잘 유도해 준다. 기념비성이나 유형은 각 프로젝트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김빈 공공 건축이고 공모전이니까 사실 보편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르게 말하면 합리성일 수도 있고 보편성일 수도 있고, 편리성, 효율성 등이 담보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매스스터디스에서 배운 게 아닐까 싶다. 보편성의 끈, 합리적인 것을 놓지 않는 분이었다. 더구나 공공은 합리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형태가 어떻게 보이든 간에 일반적인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쓴다.   민간 건축과 비교해도 설계한 공공 프로젝트 대부분, 건축물의 캐릭터가 선명하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유 소장님 말씀하신 거로 설명이 될 것 같다. 결국, 민간이든 공공이든 ‘건축은 똑같다’라는 대전제가 있다. 민간, 공공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이 달라서 대응은 달리 하지만, 그래도 건축은 보편성, 합리성, 재료나 볼륨, 동선과 공간을 짤 때도 결국 그냥 건축인 거다.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설계하다 보면 벽돌 건물도 나오고 철판 건물도 나오는 거다. 그냥 건축으로 접근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OHS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