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다이얼로그
2018.8.30.-12.1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2전시실과 중앙홀
www.mmc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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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자 한국에서는 유일한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건축가 김수근의 라이벌로 불리지만 그와 달리 국가로부터 추방을 당한 비운의 건축가. 이 말들은 김중업을 설명하는 낯익은 수식어다. 시인을 꿈꾸다 건축가로 전향한 그에게 건축은 낱말 대신 조형으로 빚은 시였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1979년, 오랜 외국생활 뒤 귀국해 가진 대담에서 오십대 후반에 이른 김중업은 이런 말을 한다. “시대는 많이 변했어요. 좀 더 적극적으로 사인을 보내야 되겠고 좀 더 소란해져야 되겠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시를 써 오던 건축가들이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거지요.” 이 전시는 김중업의 말대로 그의 건축이 ‘시’에서 점차 ‘산문’의 태도로 흘러갔음에 주목했다. 이 문장은 김중업 타계 30주기를 맞는 지금 그를 한국 건축계의 신화적 존재로 바라보기보다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물에 근거해 동시대 문화예술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이번 전시의 의도를 뒷받침해 준다. 또한 지금까지 그의 상징적 건축물의 조형성을 신화적 이미지로 주목해 왔다면, 시대와 분투하며 구현했던 도심 빌딩, 주택, 문화 및 상업공간, 후기의 유토피아적 계획안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러한 그의 넓은 이야기를 담고자 기획된 전시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을 관통하는 사유의 여러 측면들을 넘나들면서 그의 건축과 새로운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이다. 그의 작품을 조형 언어로 분석하는 데서 나아가 1950년대부터 88서울올림픽 직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시대에 보냈던 ‘소란스러운 사인’을 읽어 보려는 시도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의 작품을 단선적 연대기 순으로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싼 사회문화 전반의 복합적인 관계망을 펼쳐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이 전시는 그의 초기 작업 안에 공존했던 상반된 가치인 ‘세계성과 지역성’에 먼저 주목했다. 그리고 항상 김중업 건축의 개념적 중심에 있던 ‘예술적 사유와 실천’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그의 건축을 ‘도시’라는 문맥을 통해 보다 넓은 시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도시와 욕망’이라는 주제어를 설정했고, 마지막으로 ‘기억과 재생’이라는 이슈로 지어진 지 삼십여 년이 모두 넘은 그의 건축을 건축의 수명, 도시 재생, 현대적 문화유산의 보존 문제 등 건축의 시간성을 둘러싼 최근의 중요한 논의들로 짚어 보려 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일부는 이미 철거되어 사라졌거나 처음 기능과는 다른 용도로 리노베이션되었다. 지금 이 전시가 열리는 순간에도 변화는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건축물의 수명은 삼십 년이 채 되지 못하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그의 작업은 이제 또 다른 기로에 서 있다. 공교롭게 김중업이 떠난 지 삼십 년이 되는 지금, 그가 남긴 건축은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위태롭게 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운 좋게 김중업이라는 건축가를 새롭게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김중업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 재빠르게 흘러가는 ‘재생’이라는 화두 속에서 1세대 작가들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그 과제를 푸는 하나의 시작점으로서 건축,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관계망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단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글 김형미, 정다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이 글은 10월 중 출판사 열화당에서 발간 예정인 『김중업 다이얼로그』(가제) 책에 수록될 기획의 글을 일부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김중업(1922-1988)
건축가 김중업은 1922년 평양 출생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 에콜 데 보자르 식의 건축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마츠다 히라다 사무실에서 일한 뒤 귀국하여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부산에 머무르며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그에게 1952년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베니스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 그곳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그는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일했다. 귀국하여 서울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부산대학교 본관, 주한 프랑스 대사관 등을 설계한다. 귀국 후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던 그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들을 한 것을 계기로 1971년 프랑스로 추방을 당한다. 이 직전에 발표했던 삼일빌딩은 김중업 건축 후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서울의 위상을 상징하는 작업이었다. 1978년 귀국한 그에게 서울은 너무나 급변하는 장소였고, 그 속에서 삼일빌딩의 뒤를 이은 고층의 유리 건물들을 설계하며 건축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그의 작업도 전과는 다른 미래주의적 면모를 띄게 되었다. 유토피아적 이상을 꿈꾸었던 그의 말년 계획안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올림픽 평화의 문이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2014년 김중업의 가족이 김중업건축연구소의 자료 대부분을 안양시에 기증하는 것을 계기로 김중업건축박물관이 개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