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오픈하우스서울 2018은 해마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문을 열어 그 흐름을 직접 체험할 기회다. 건축가와 함께 건축물을 직접 경험하고 강연과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건축가가 추구하는 철학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올해는 서울 사대문 안의 복잡한 골목의 조건을 풀어가고, 한옥의 텍토닉을 재해석하고, 작가로서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어내며, 영추포럼, 답사 등의 문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건축가 황두진을 만난다. 다공성, 구축술,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로 전개하고 있는 황두진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건축가 황두진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고와 물성을 가진 결과물의 연결고리를 탐색해본다.
이북, 서울, 사대문
서울에서 나셨지만, 이북에 대한 관심이 높아 보여요. 부모님이 실향민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다 실향민인 경우는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연고가 없는 집단을 실향민이라고 생각해요. 퉁쳐서 문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사람들’ 그리고 부제처럼 ‘자유대한의 품으로’라는 말이 따라오죠.
엄격하게 실향민은 네 그룹 정도가 있다고 봐요. 제1그룹은 일제 강점기 때 내려오신 분들이에요. 단순 이사죠. 어찌 보면 그 그룹이 사상적으로는 가장 다양해요. 다음 제2그룹이 해방 이후부터, 즉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오신 분들이에요.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그야말로 자유대한의 품으로 오신 분들이죠. 성향으로는 반공적이고 당연히 지주, 자본가, 지식인, 기독교도가 많죠. 서울 교회의 상당수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설립했다는 게 그것을 반증하죠. 제3그룹은 한국 전쟁 당시에 내려오신 분들인데, 이분들도 사상적으로는 다양해요. 당시 미국이 북한을 엄청나게 폭격하던 시기였고 핵폭탄 투하설도 있어서 그냥 경황 중에 난리를 피하려고 내려오신 분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제4그룹으로는 탈북자가 있죠.
탈북자를 실향민으로 함께 분류하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그건 제가 분류한 거예요. 거대한 흐름에서 보자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이든 자기가 태어난 곳이 떠나온 사람들은 실향민의 연장으로 보는 거죠.
이 네 그룹 중 저희 아버지는 제1그룹, 어머니는 제3그룹인데, 어릴 땐 그걸 신경 쓰지 않았고요. 나이 들면서 ‘우리 집안이 그렇구나’를 깨달았고, 더 나이가 든 요즘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이 좀 다를 수 있겠구나 해요. 예를 들면, 다른 분들보다는 북한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향의 설움에 목이 메어’ 같은 레토릭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 대해 오직 적대감이나 친근감만 느끼는 것도 아니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복잡한 입장이죠. 아직 건축가로서 행동으로 옮긴 건 없지만 그런 점에서 생각이 남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해요.
한번은 페이스북에서 만우절 농담으로 ‘황두진건축사사무소 평양 지점’을 내셨다는 글과 사진을 올리신 적이 있어요.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북한에 대한 관심이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을 거예요. 북한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문화에서 크신 분들이 보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한국전쟁에 대한 문헌을 폭넓게 보는 편인데,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건축가로서의 경력이 후반기로 가면서 제 삶에 주어진 소명이라면, 북한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건축가협회 ‘남북교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셨죠?
제가 단체활동을 열심히 해온 편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도 모아야 하고요. 위원회 활동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은, 북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빨리 내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우선 국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북한의 도시와 건축> 콜로키엄을 하고 있어요. 저 못지않게 위원회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거였어요. 좀 신중해지자는 거죠.
양가 부모님이 기억하는 이북의 도시 공간을 기록하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부모님이 의식적으로 과거 도시 공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은 아니고, 흘러가는 말씀을 하신 거죠. 아버지는 제가 대학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쓰려지셨고 이후 2004년에 돌아가셔서 이야기가 많진 않아요. 가령 냉면은 겨울 음식이라는 이야기, ‘돌싸움’, 그야말로 투석전으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이야기, 평양 사람들의 거친 성향 등에 대해서 들은 정도예요. 반면 어머니는 원산 분이신데, 어머니가 기억하는 원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 같아요. 실향민인 부모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하려 하진 않으셨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장모님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은 독특하게 사돈 안주인 두 분이 함경도 출신인 경우에요. 장모님이 함흥 분인데, 아까 구분한 실향민 중 제2그룹이에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은 아니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북한이 고향인 기독교 사람들을 모두 보수적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실향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매우 투박하다는 거고요. 장모님은 오빠가 함흥 학생만세운동에 관여했어요. 공산당 치하에서 기독교계가 주도한 학생 사건에 연루된 것이니 그 이유만으로도 북한에서 살 수가 없죠. 감시가 있으니 주변에는 시골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고 말하고 경원선을 타고 오다가, 철도가 끊어진 철원에서 내려 한탄강을 맨발로 건너왔다고 해요. 얼마 전에 그 장소도 가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장모님이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해요. 물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서울이 수도라는 개념은 없었겠죠. 하지만 임금이 살던 조선의 수도였고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 것 아니에요?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모님이 서울 와서 보니, 집들이 게딱지처럼 산 능선까지 있었다고 해요. 제 생각에 그게 피난민 지역은 아니고 자연 지형을 따라 언덕이 집으로 다 가려진 걸 보고 그러신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내려오니 조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더라는 거에요. 때가 어느 땐데 조상을 찾나 싶어서라고요. 그래서 함흥은 어떤지 여쭤보니, 공산 치하에서 살다 오신 분이라 봉건시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아요. 함흥은 워낙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개발했던 공업 도시에요. 길이 넓고 도시계획을 반듯하게 하고 건물들이 크고 천장이 높고 깨끗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서울은 계획도시의 느낌이 없고, 건축적으로 좋게 얘기하면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유기적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질서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성향이 신기했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소장님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양가 부모님의 고향도 멀지 않게 느끼겠네요.
저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생각하죠. 평양이나 원산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신 곳이니 관심이 있는 거고요. 은연중에 제게 사대문 중심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마침 사는 곳이 여기(서촌)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기는 해요. 하지만 삶의 궤적을 보면, 우리 가족은 사대문 안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구질서 핵심세력에 한 번도 편입된 적이 없어요. 변방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버지를 너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7, 8년 전에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어요. 부모님이 서울 와서 사신 곳, 즉 제가 태어난 곳은 한양대학교 근처의 경원선 철도 변 한옥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지번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의 고향이 원산인 것을 알고 좀 뭉클하더라고요. 고향 가는 기찻길 옆에 산 거잖아요.
그러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정릉의 개량 한옥에 살았고 이후 결혼 전까지 2, 3번 이사했고, 그다음 신도시로 구분도 안 되는 0기 신도시인 과천에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도 과천에 있었어요. 집안 내력이나 제가 살아온 현장으로 보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성장했던 거죠.
요즘 옛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1950~60년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사대문 안에 있는 한옥에 산다는 걸 새삼 느껴요. 1950년대 후반에 부모님이 결혼하셨는데, 이때 왕십리, 정릉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울의 외곽에 살았던 것이죠.
어렸을 때도 이북이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나요?
어린 애들은 잔인한 측면이 있어요. 순수함의 이면에 있는, 판단력 부족에서 오는 잔인함이죠. 저희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오셔서 친가 쪽 친척이 많은데, 어머니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오신 분이라 외가가 없었어요. 북한 집안들이 또 좀 짜요? 설 이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제가 받은 세뱃돈이 절반도 안 됐어요. 친구들이 시골 종가에 다녀온 얘기를 하는데 제가 ‘종가가 뭐야?’ 하니까 갑자기 애들이 ‘너 종가가 뭔지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 사는 기와집 없어?’ 하는데 아마도 좀 사는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너 족보는 있냐?’ 하고 저를 놀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집에 와서 ‘왜 우리는 종가가 없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엄마가 그제야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주신 거예요.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학교에서 도깨비가 있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때인데, ‘그럼 우리가 그런 집안인 거냐?’ 하고요.
어머니는 그전에도 우리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어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왜 우리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한테 인사 안 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둘러는 데야 했고, 당시 세계지도가 집에 걸려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코펜하겐이 있더래요. (웃음) 그래서 저희한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코펜하겐에 사신다 한 거에요. 또 마침 무역 일을 하셨던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어요. 유럽 출장을 가시면 아버지 회사 동료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을 대신 보내게 해서 저는 정말 유럽에 외가가 있는 줄 알았죠. 사실은 이북에 계셨던 거죠. 그 일로 ‘이 사회에서 뿌리박고 살아오던 집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박혔어요.
코펜하겐 이야기는 제게 여운이 남아 있어요.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코펜하겐에 갔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티볼리 공원에 앉아 있으니 곱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중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나고 자랐던 경원선 근처 집에 대한 기억은 있으신가요?
전혀 없어요. 기억이 있다면 그다음 정릉에서 살던 집이 전형적인 ㄷ자 도시형 한옥이었는데, 그 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흑백으로 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기억하는 첫 장면이라 몇 년 전 스케치한 적이 있어요. ㄷ자 한옥이니까 빛이 네모로 딱 떨어질 것 아니에요? 그게 대청마루의 끝과 댓돌, 시멘트 바른 앞마당에 떨어졌죠.
대신 실내는 굉장히 어두웠어요. 집에 웅크린 어두운 구석들과 대청, 어릴 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매우 무서웠어요. 지금 건축가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밝은 집을 짓기보다는 비교적 빛을 분산하는 데 관심이 있는데, 어두운 구석에 대한 공포가 강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다락에서 노는 것은 좋아했어요. 다락의 빛은 밑에서 올라오니 포근했거든요.
생각해보면 개량한옥에 살았지, 소위 부흥주택에도 살았지, 어머니가 유치원을 하시느라 당시 엄이건축에서 설계한 주택 겸 유치원에 살면서 직주근접의 삶도 처음 체험해 봤고, 결혼해서 아파트에 살아봤으니, 나름 초고층 주상복합 제외하고는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본 거죠.
지금 통의동 목련원은 집과 사무실이 붙어 있는데, 경복궁 서측으로 온 계기가 있었나요?
경복궁 서측으로 온 것은 성인이 되어서예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경비가 삼엄했어요. 동네가 1970년대에서 멈춰진 타임캡슐 같았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죠. 19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난 다음에 이 동네 경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에요. 효자로가 부암동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는데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하문로를 낸 것이죠.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정도에 멈춰져 있고, 2000년 초반쯤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려서 효자로 변에 <열린책들> 건축물을 설계했어요. 그때 이 동네를 알게 되어 결국 이사를 오게 되었죠. 어릴 때 살았던 정릉처럼 서울의 외곽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았고 서촌이란 말도 없었고요. 지금은 다르게 볼 수 있어도, 당시 저는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찾아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많이 누워있었다는 기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거의 죽은 거였어요. 급상 신장염으로 학기 초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래저래 학교를 못 다닌 게 방학을 포함해 10달 정도였어요. 절대 안정을 해야 하거든요. 오래 누워있어서 퇴원 당시에는 다리 근육이 다 빠졌어요. 걸음마부터 다시 배웠죠.
당시 입원했던 성모병원이 명동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요. 1호 터널로 가다보면 명동 입구에 면한 건물 3층이에요. 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니 수녀님들이 저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갔었는데 그때도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웅장하고 근사하지만 컴컴하잖아요.
당시 입원해 있으면서 얻은 게 있다면, 시간이 안 가니까 침대에 누워 뭔가 집중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천장의 금이 커지나 안 커지나를 매일 봤고, 자연학습도감을 가져다 열심히 보고, 그 와중에 오탈자 찾아 출판사에 보내면 기특하다고 선물을 보내주고 했던 기억도 나고요. 또 배운 게 있다면, 저 혼자 잘 노는 거예요.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요. 물론 옆에서 많이 돌봐주셨지만,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진 때가 있었는데, 누워 있는데 시야가 점점 좁아졌어요. ‘이게 뭐지’하고 조바심은 나도 마음은 편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손이 하나 내려오더니 ‘두진아 안돼!’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잡아채는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으니 제가 정신을 잃어 뺨도 치고 하셨다고 해요.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거죠. 그게 1971년 일이에요. 용감무쌍하게 세상에 돌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는 너무 눈치 안 보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평소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영향도 있을까요?
선천적인 것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변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해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병약했던 유년 시절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건축가는 대부분 부모님의 뜻을 꺾고 건축을 선택한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건축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건축가가 된 계기는 초라해요. 일단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건축과를 생각한 적이 없고, 대학 입시 때도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아무래도 적성과 무관한 것에 빠지는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물리학자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될 거로 생각했어요. 특히나 중고등학교에 가니 물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을 잘 못 했으니 물리학을 안 한 건 다행이죠. 수학을 도구로 하지만 물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만들어요.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세상에 뭔가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매력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점에서는 건축도 다르지 않죠.
대학은 자연과학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입시제도의 희한한 상황 때문에 어느 날 보니 공대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당시 응용과학을 시시하게 생각했거든요. 양자역학에 대한 영웅시대 책도 엄청나게 봤고, 당시 씨엔 양이라는 중국계 물리학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고등학생인데도 들으러 갔으니까요. 어쨌든 당시 대학교에서 공대 신입생을 과 별로 안 뽑고 공과대학으로 뽑았는데, 700명 중의 한 명이 된 거죠.
참 신기한 게 전공이 아닌 단과대별로 뽑으니까 우리가 소속감이 없는 걸 보고, 공대 17개 과에 신입생들을 매칭시킨 거예요. 그때 공대 1반이었는데 가나다순으로 하면 건축과가 제일 앞이잖아요. 그래서 제 지도교수님이 건축과 교수님이었어요. 3월 중순이 되니 면담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교수님이 어려우니 면담 30분 전에 갔는데,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공대 건물이 서울대 35동 4층엔가 있었는데 복도를 들어가니까 그 전해의 졸업작품 도면과 모형들이 있는 거예요.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안건축의 윤세한 소장님 졸업작품이었어요. (웃음)
그때 면담이라는 건 ‘너 데모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자리였는데, 저는 교수님께 솔직히 얘기했어요. 건축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복도에 있는 걸 보니 근사하게 보인다고요. 이런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당시 김진균 교수님이셨는데, 그분 멋있잖아요. 웃으시면서 ‘삶에 우연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뜻일 수 있다’ 하면서,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과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셨어요. 감사하다 하고 나가면서 ‘내년에 뵙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는 1학년 학점을 가지고 입시를 한 번 더 했거든요.
학번이 어떻게 되시죠?
82학번입니다. 공대 1반이었는데 자매반이 건축과였던 것이고 건축과는 다행히 포용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대 축제에도 우리 1학년들을 초대해줬고, 그래서였는지 공대 1반에서 건축과 간 친구들이 많았어요. 촌극 할 때도 우리에게 출연하라 해서 저도 출연했어요. 내용이 중동에 한국 건설회사가 가서 부실공사로 난리 난 이야기였는데, 제가 아랍인 건축주였어요. (웃음)
문제는 그렇게 해서 2학년이 되어 건축과에 들어가니, 소위 즉흥적으로 건축과에 온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학기 초 신입생환영회에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했는데 제가 황 씨라 거의 마지막에 했어요. 앞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가령 이런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 마르셀 브로이어의 ‘밤과 낮의 주택’을 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내는 것에 매료되어 건축과에 왔다’ (웃음) 내 순서는 점점 다가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해서 솔직히 얘기했어요. 앞의 친구들과 같은 건 없고, 원래 자연과학대학에 가려 했는데 우연히 공대 왔다고요. 그러다가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 건 대단한 일인데, 만든 결과가 심지어 쓸모도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인 거 같다, 그래서 만들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소개했던 것 같아요.
80년대는 데모도 많고 학교가 어수선했죠?
저는 전형적인 데모 안 한 386입니다. 그건 솔직하게 얘기해야죠. 그게 저에게 두 가지의 흔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부채의식이고요, 또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전두환을 옹호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나설 게 아니라면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면 하고 말면 말고죠.
아마 누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3형제의 막내인데 누나는 정말 열심히 데모했어요.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형이 2학년, 누나가 4학년, 이렇게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인데 사상 교육을 조직적으로 많이 받았는지, 이미 고등학교 때 집에 소위 불온서적이 많았어요. 그때 다 읽었으니 대학 와서는 새삼스럽게 뭘 읽지 않았죠. 광주를 보면서는 솔직히 두려웠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남아있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지만, 저에게는 남북문제인 것 같다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대학 2학년에 들어가면서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바로 은퇴하셔서 22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2004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집 아이였는데, 인생에 처음 시련이 온 거죠. 50대에도 암벽등반을 하셨던 분인데 그렇게 자기 육신의 감옥에 갇혀 계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괴로웠어요. 당연히 아버지 본인이 가장 괴롭고, 어쩌면 어머니가 더욱 괴로웠을 수 있죠. 매우 활달하신 분인데, 한창나이에 항상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해야 했으니까요.
대학교 때 열심히 놀고 연애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때 기억이 썩 좋지도 않고, 생각만큼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학점도 들쑥날쑥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회사 직원 뽑을 때는 학점을 안 봐요. 의리상, 제가 별로 안 좋아서. (웃음)
설계 전공 수업에 충분히 만족하셨나요?
4학년 졸업 때가 되어서 대학을 너무 부실하게 다닌 걸 깨달았어요. 집중도 안 했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졸업 설계를 잘 해보자 했어요. 당시 팀으로 하던 분위기였는데, 평소에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한 번 열심히 해보자 했고, 논의 끝에 주제를 잡은 게 북창동 재개발이었어요. 수직입체 도시로 만들어 저층부에 데크, 위에 주상복합이 올라가는 계획을 했어요. 그게 그해 졸업 전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아마 제 동기들에게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에요. 저는 꼭 끝에 가서 열심히 하더라고요.(웃음)
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는데, 당시 영향을 받으셨나요?
대학생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게 쉽진 않죠. 대학원 가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시원찮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게 왜 나왔는지는 알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을 대체할 만한 핵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결국 모더니즘의 가장 심원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겠어요? 모더니즘의 단점을 이야기하거나 부분적인 보완을 할 뿐이죠. 자주 하는 비유 중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부적을 붙이는 사람보다 세콤을 설치하는 사람이 많다면 모더니즘은 퇴조하지 않는다는 게 제 믿음이에요. 그런 면에서 저는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해요. 모더니즘이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로 김종성 건축상을 받은 것도 옛 생각으로 돌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국의 학교 분위기가 디자인에 강한 사람을 키우는 건 약했지만, 오히려 사회적 관점을 많이 키워준 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장서서 데모를 안 했다 뿐이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북창동을 대상으로 재개발 설계를 하며 고민했던 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도 해요. 단순히 조형예술이 아닌 사회적 측면이 건축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원 시절의 자료 중 가회동 한옥 실측작업 드로잉이 인상 깊었어요. 당시 실측 작업이 중요한 출발점이 된 건축가도 여럿 계시고요. 근대 한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때에 실측 작업은 의미 있는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학창 시절의 사건 하나를 뽑자면 가회동 한옥 실측 작업이죠. 제 건축가 경력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니까요. (웃음) 제 기억에 당시에 그뿐 아니라 농촌 마을, 농촌 주택처럼 다양한 분야의 실측이 있었어요. 가회동 한옥은 이광노 교수님 무애연구실에서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사실 실측에 처음 참여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 실측에 대한 공고가 붙었는데 학부생도 지원을 받아주어서 무슨 생각에선지 덜컥 지원했어요. 제가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고 했잖아요. 고백하자면 그중 한국 건축사가 가장 낮았거든요.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윤장섭 교수님이 ‘자네가 한옥에 대한 책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야!’ 하셨으니까요. (웃음)
그때는 그 실측 작업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지금도 당시 참여했던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시작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애연구실은 서울대와 홍대가 같이 참여했거든요. 금요세미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다른 학교 학생도 많이 알게 됐죠. 대학원에선 강원도 민가 조사에도 참여했죠.
보고서의 실측 도면 중에 과도하게 그린 그림이 하나 있어요. 당시 기준에서는 열심히 한 건데, 야단도 맞았죠. (웃음). 개도 그리고 개집도 그리고 개가 다니는 범위도 그렸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때 실측하러 들어갔는데, 한국 건축사에서 배우고 고건축답사(당시는 그렇게 불렀어요) 때 돌아다녔던 그런 집의 풍경이 아닌 거예요. 도시형 한옥은 창고 같더라고요. 그때 뭔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이야기하던 한옥에서의 정갈한 삶과 너무 다른 거예요. 당시 4.3그룹 등 선배 건축가들이 한옥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는데, 실제 실측하면서 보니 뭔가 그분들 말씀이나 현대인의 삶과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변해야 하는 건 한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②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