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산골에서 나고 자라 한옥에서 사셨다고 들었어요.
경북 군위라는 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어요. 보통 경북 군위라고 하면 대구 옆에 있는 존재감 없는 소읍이어서 잘 몰라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1.5 km 떨어진 이웃 동네에서 나셔서 군위를 많이 알게 됐죠.
저는 읍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전기도, 문화도, 자동차도 없고, 문명과 거의 단절된 곳에 살았어요.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들은 모두 산이고 들판이고 개울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몸으로 자연을 체험하지 않았나 싶어요. 가장 큰 즐거움은 여름 되면 개울가에 가서 멱 감고 친구들과 같이 산에 소 몰러 다니고 쇠꼴 베러 다닌 것이었어요. 지금도 저는 낫질, 삽질, 모든 농기구를 잘 다룹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농사지으면서 사과 과수원을 하셔서 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나무 키우는 일을 같이 도와드리면서 몸으로 익혔죠. 지금도 저는 청계산에서 텃밭 농사를 잘 짓고 있어요. 흙에 대한 느낌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대한 느낌, 나무들의 생육에 대한 것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기억나는 풍경들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학교까지 4km, 왕복 20리를 걸어서 다녔어요. 봄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무 색깔에서 알았어요. ‘물이 오른다’라고 하죠. 봄철에 물이 쭉 올라서 보라색으로 바뀌는 것들이 보입니다. 여름이 온다는 것은 태양이 작열한다는 거였어요. 학교 마치고 집까지 가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뜨겁고 진공 같은 상태와 풍경을 지나 가을이라는 걸 느꼈을 때는 빛이 기울어지는 것이 기억나요. 겨울은 온도를 모르잖아요. 근데 물체를 만지고 경험한 거로 추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건축을 하고 풍경을 담는 데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몸으로 느꼈던 것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한옥에서 자랐다고 하셨는데, 어떤 집이었나요?
집을 설계하면서 항상 저의 집을 떠올려요. 아니면 우리 동네에 있었던 집들을 떠올립니다. 땅이 산으로 막혀 있어서 분지처럼 둘러싸여 있었는데, 큰길에서 3~40m 논 사이로 들어가면 우리 집이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위채와 아래채, 행랑채가 있는 전형적인 ㄷ자 집이었어요. 바깥으로 논이 있고, 그 옆에 허드레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농가형 주택이었어요.
가장 인상적인 건 대청마루 공간이었어요. 또 기억에 남는 집의 공간으로 ‘뒤안’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호기심 많은 사내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지였죠. 개구리 잡아 키운다든가 아니면 새를 잡는다든지, 친구들과 함께 그 공간에서 썼던 기억이 나요.
여름날 문을 열면 맞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기억들이 나고요. 지금 와서 보면 어렸을 때 그런 집에서 자랐던 게 가장 큰 행복이지 않았나 싶어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50년 전 시골집 풍경이 다 떠올라요. 많이 바뀌었지만, 다행히 워낙 오지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도 좋고요.
중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니셨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막내 외아들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너무 자연 속에서 놀고 공부하는 건 뒷전이니까 어머님이 걱정되셨나 봐요. 셋째 누님이 서울로 시집가니까 같이 생활하게끔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 생활이 시작됐던 거죠.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충격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말을 하면 모든 친구가 웃었어요. 그러면서 제 성격이 내향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가장 무서웠던 것은 친구들과 싸워서 ‘너희 어머님 모셔와라’라는 말을 듣는 거였어요. 어머님이 시골에 계시는데 어떻게 오시겠어요. 어린 마음에 그런 부분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 안 일으키고 조용조용히 살았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어느 동네에서 사셨나요?
종로 6가 효제동 그리고 충신동 언저리에 살았습니다. 저희는 양옥집에 살았고 그 밑으론 전부 한옥이었어요. 지금도 가보면 종로 5, 6가는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때 제 가장 큰 놀이터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였어요.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 가면 큰 운동장이 있었고,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교수님께 집을 의뢰했던 동창분들이 바로 그때 중고등학교 친구들이신 거군요.
그렇죠. 부모와 떨어져서 서울에 와서 산다는 것, 그 어린 나이에 유학했다는 것이 좀 불행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나중에 파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 문화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골목 다니면서 혼자 조용히 지내는 걸 가장 좋아했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사물을 관찰하거나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길거리 다니면서 ‘이렇구나, 저렇구나’ 관심 있게 주변 사물들을 봅니다. 아마 그런 것에 민감했던 것 같아요.
건축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그 놀이터가 없어졌어요.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이 다 부서져 버리더라고요. 당시엔 그곳이 문리대인지도 몰랐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운동장이 있길래 공차고 놀았는데, 어느 날 그 좋은 나무들을 다 베어버리고 좋은 건물들과 운동장도 없애 버렸어요. 길을 만들고 하더니 단독주택지를 만들더라고요. 그곳에 근사한 집들이 들어오는 거죠.
저는 보성중학교에 다녀서 항상 학교 갈 때 혜화동으로 갔어요. 대학로에서 걸어서 가다 보니 항상 공사장 옆으로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짙고 빨간 벽돌 건물이 샘터 사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옆에 굉장히 유명한 주택들이 있었던 거예요. 3년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 건물을 짓는 과정들을 보며, 그때 받은 인상이 몇 년 동안 강렬히 지속됐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보니 김수근 선생님 작업이었죠. 그 길로 다니면서 한국 해외개발공사 건물이 지어지는 현장을 구경했어요.
건축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저는 82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요,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학과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촌 형이 화공과를 나왔는데 “야, 요즘 건축학과랑 건축공학과가 취업도 잘 되고 괜찮은 것 같아.” 라고 지나가듯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습니다. 제가 동검리 주택을 지어드렸던 고3 담임 선생님이 계세요. 그 선생님께서 “정재헌, 너는 건축공학과 가면 안 돼.”라고 하셨어요. “왜요?” 그랬더니, “현장 소장으로 가서 인부들 직접 만나면 큰소리 내고 해야 하는데, 너 그럴 수 있어?”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진학 지도를 하던 선생님들께서는 건축 설계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 했어요. 우리나라는 건설 공화국이었잖아요. 건축공학과 나오면 무조건 건설 현장을 가는 것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큰 생각 없이 건축공학과에 갔는데 그게 삶을 규정짓게 된 것 같아요.
성균관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성균관대에 들어가서 좋았던 것은 저와 비슷한 시골 친구들이 서울에 와서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저와 고향도 비슷해서 자유롭게 보냈고요.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성균관대는 디자인에 집중된 학교는 아니었어요. 졸업 후 직장 다니면서 홍익대나 서울시립대 동료들을 만나면 저보다 훨씬 더 잘했어요. 손도 빠르고, 건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죠. 대학 다닐 때 중요한 부분은 학교 분위기에요. 그래서 ‘내가 4년 동안 뭐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열심히 뭔가를 하기는 했는데 인상적인 건 없었어요. 대신 건축 사진 찍는 것은 아주 좋아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건축가가 학교 다닐 때 이미 빼어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학교 다닐 때 재능 있게 잘하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재능보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항상 해요.
그래도 설계의 재미라고 할까요.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나요?
물론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좋아했어요. 잘하지는 못했는데 명료한 것을 좋아해서, 설계하고 도면 그리고 모형 만들면서 며칠 밤을 새워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해가 떠오를 때 정신이 맑아지면서 행복을 느꼈죠. 건축을 즐기고 좋아했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 ‘이게 행복이구나.’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건축을 하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어디셨나요?
1987년에 첫 직장을 다녔는데, ‘정일엔지니어링’이라고 서울역 뒤편에 큰 사무실이 있습니다. 전기설비팀도 있고 10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월급도 주는 것이 참 행복했어요. 그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정보가 부족한 시기였지만 시대별 분위기가 있었을 듯해요. 당시 기억에 남거나 관심을 가졌던 건축가나 혹은 이론이 있으셨나요?
우리나라는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고 유행을 많이 타잖아요. 은사님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시면 미국에서 학습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가르치기 때문이죠. 은사님들이 공부하셨던 미국의 경향이, 예를 들어 ‘모던은 갔어.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야.’ 그러면 저희는 다 포스트모던처럼 했어요. 포스트모던이 문화적으로 왜, 어떤 환경에서 나왔는지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이야.’ 하는 식으로 무늬만 따라 했던 것 같아요.
유학 가서야 ‘아, 이게 포스트모던이고, 모던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거구나.’하고 본질적인 것을 느꼈어요. 스스로 단편적으로 학습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저도 교육자로서 그런 부분을 굉장히 조심해요. 제한된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는 거니까요. 교육자로서 제일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실무를 하는 중에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때는 유학 가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권을 잘 만들어주지 않았고 시험을 몇 번 쳐야만 입학 허가서 받고 여권을 받아서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서양건축사, 현대건축사를 배울 때 교재에 있는 조그만 사진을 보고 상상을 해요. ‘야 이게 정말 지금 남아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났어요. 상상만 해도 좋았죠. 저 어릴 때는 TV도 없고 전기도 없는데 유일하게 트랜지스터, 정확히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친구들과 귀 기울여서 들었어요. 그게 유일한 문명이었으니까요. 라디오 드라마 연속극 장면을 들으며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서양건축사 책에 나온 정보가 마치 라디오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럽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속 갈증이 굉장히 강했어요.
마침 당시 성균관대 김용부 교수님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유학을 할 수 있다는 공지문을 내셨어요.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으셨는데 저까지 세네 명이 모였죠. 선생님께서 프랑스는 학비가 거의 없고 생활비 얼마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불어 공부를 시작했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4년 불어 공부를 하고 유학을 떠났던 겁니다.
1987년에 1년 동안 제가 설계사무실을 다니면서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 당시 많은 사무실이 현상 설계를 하고 작업을 하는데, 설계 프로세스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블랙박스형 설계였죠. ‘이런 게 아주 좋다더라’, 누가 한마디 하면 그 말을 따라서 그냥 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지가 없었어요. 프로세스 없이 그냥 결과물만 있는 가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프로세스를 좀 배웠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 생각의 과정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궁금했던 거예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문화적 충격이었죠. 환경적인 것은 그랬지만 파리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불어를 그렇게 잘하진 못했는데 수업 시간에 프랑스 친구들이 저에게 ‘톨레랑스’를 보여줬어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명료했고 그걸 많이 느끼게 해줬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어요.
그 시기에 많은 분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나요?
제가 갔을 때보다 3~4년 이후, 저희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하던 때에 많이 갔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있었을 때는 학생이 열 명도 채 안 됐던 것 같아요.
파리에 지내시면서 자주 가던 곳이 있으신가요?
항상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그 좋은 곳을 즐기지 못했어요. 당시 부모님 연세가 일흔을 넘기셨고, 제가 외아들이어서 부모님과 3년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래도 자주 갔던 곳은 있습니다. 프랑스가 좋은 점은 건축을 공부한다고 하면 박물관, 미술관 등 모든 게 무료였어요. 그래서 항상 시간 날 때마다 퐁피두센터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와 강연을 보러 다녔어요. 저는 지금도 루브르박물관이나 퐁피두센터가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건축을 하려면 메트로폴리탄에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이 있는 뉴욕이라든가, 런던이라든가, 파리 같은 곳에 가서 했으면 좋겠다고요. 아주 많은 전시와 강연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기억나는 것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퐁피두센터에 와서 강연한 거예요. 항상 1년 치 강연을 다 들었던 것 같아요. 아라타 이소자키나 리차드 마이어,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거장들이 와서 강연했어요. 그런 기회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멋있었던 건, 프랑스 건축가들이 와서 초청한 강연자를 소개를 해주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것들이 문화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당시 프랑스는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대였어요. 건축이나 예술 분야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였죠. 그때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다양한 도시 재건축이 일어났고,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도 활성화되던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루벤스가 사용하던 유화 물감을 써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그 물감이 쌓여 있는 거예요. 마음대로 쓸 수 있었어요. 그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어마어마했어요. 학교 암실도 제가 꿈꿔왔던 곳이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지원금도 많았어요. 매력적이었던 건 학교 다니면서 돈 안 들이고 유럽 답사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수업 차원에서 답사하는데 정부에서 교통편과 숙식까지 거의 다 지원해줬어요. 저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받은 거죠.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이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 벨빌 대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앙리 시리아니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앙리 시리아니는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유학 갈 시점에 88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건축이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당시 「꾸밈」 지의 김성환 선배가 파리 특파원으로 계시면서 프랑스 건축에 대한 많은 양의 정보로 연재를 했어요. 굉장히 고맙죠. 그 기사를 보고 파리 8대학 교수이면서 건축가인 앙리 시리아니를 알았죠.
앞서 말한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갈증을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 단번에 풀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에게는 그분이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감성과 감각이 있거나 세련되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감성을 다 일깨워 주셨던 것 같아요. 굉장히 엄한 분이고, 말씀하시는 것도 명징했어요.
지금도 그분과 가끔 교류하는데, 저에겐 아직도 스승입니다. 아마 그 스승님 때문에 저도 지금 학교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아, 그런 스승처럼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죠.
유학을 통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제대로 접했다고 하셨는데요. 서양 건축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흡수하셨는지요.
당시 벨빌 대학에서 좋은 스승님을 많이 만났어요. 요즘은 그런 분들이 다 미국에 있는 학교나 다른 지역에 가신 것 같아요. 그때 저희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분은 베르나 유에(Bernard Huet)라는 석학이었습니다. 자크 뤼캉(Jacques Lucan)이 현대 건축을 가르치셨고, 또 미술을 가르쳤던 분들도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 만한 대가들이셨어요. 그분들을 통해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었어요.
현대 건축에서는 자크 뤼캉 선생님이 계몽주의가 어떻게 나왔는지, 르코르뷔지에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건축의 규율은 어떻게 이어졌는지 일 년 동안 수업을 해주셨어요. 그 수업이 저에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건축과의 관계,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것 같아요.
설계 스튜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었죠. 명료한 것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바닥이 뭐고, 벽이 뭐고, 천장이 뭔지, 하나하나 요소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시작해, 건축가의 도덕성, 사회적인 책무에 관한 문제, 집합 주거와 사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들, 건축이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철학적인 문제까지도 질문을 던지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분은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였어요. 그래서 사회에서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공간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주셨어요.
유학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과 그에 대한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학교에서 뛰어나거나 건축을 아주 많이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주변에 좋은 환경을 만나서 지금 그런 가치를 알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앎의 방법은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철저히 했던 것 같아요.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께 그런 걸 배웠습니다.
또 아주 학습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미셸 카강이 한 건축물을 보게 됐어요. 파리의 고속도로변에 근사한 게 지어졌더라고요. ‘도대체 건축가가 누굴까?’해서 찾아보니 미셸 카강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편지를 써서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답이 안 왔습니다. 전화해서 ‘왜 당신은 답을 안 주냐’고 했더니 지금 보자는 거예요. 일하고 싶어서 제가 작업한 걸 들고 갔죠. ‘그럼 내일부터 나와’ 그러는 거예요. 그분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장점을 아주 좋아했어요. 시리아니 선생님과 달리, 그 젊은 나이에 비례라든가, 형태에 훨씬 더 섬세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감동이었죠.
거기서 같이 일하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항상 메모하고 다녔어요. 밥 같이 먹을 때라든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기회가 되면 수첩을 들고 항상 질문했어요. 좋았던 건 질문을 하면 시리아니 선생님이나 미셸 카강이나 아주 쉽고 진지하게 설명을 해줬어요.
미셸 카강과는 그 인연을 계속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한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굉장히 멋졌던 게 국가에서 1박 2일 동안 미셸 카강의 추모 행사를 해주더라고요. 미셸 카강의 부인이 초청하고 싶은 사람 리스트를 만들어서 저도 프랑스에서 초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추모식에 가서 제가 30분 동안 추모사를 했어요.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