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Seoul GOODS

BAG, BADGE

오픈하우스서울 본행사 기념 굿즈입니다. 
굿즈를 통한 수익금은 오픈하우스서울 2022의 준비비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디자인 : 워크룸

오픈하우스서울 에코백 OPENHOUSE Seoul ECO BAG 
오픈하우스서울 뱃지 OPENHOUSE Seoul  BADGE

 
구매 방법 
  • 한정판(limited edition)으로 제작된 굿즈의 ** 배송은 11월 15일 일괄 발송됩니다.

굿즈 구성 

후원 1 -- 6,000원 : 뱃지  [구매 바로가기]

후원 2 -- 15,000원 : 에코백  [구매 바로가기

후원 3 -- 20,000원 : 뱃지 + 에코백  [구매 바로가기]
굿즈 소개

OPENHOUSE SEOUL ECO BAG 
 
오픈하우스서울 에코백은 
타이벡이라는 방수,항균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타이벡은 미국 듀폰(Dupont)사가 개발한 합성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섬유로 유연성이 높고 강도가 우수하여 찢어지지 않습니다. 타이벡은 연소시 물과 이산화탄소로만 분해가 되며 플라스틱으로 재활용이 되는 친환경 소재 입니다.
 
COLOR : SILVER
SIZE : 360 x 440mm
MATERIAL : Tyvek
  

OPENHOUSE SEOUL BADGE

오픈하우스서울 로고가 박힌 금속 뱃지
오픈하우스서울 한정판 뱃지의 소장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SIZE : 20*20mm

유의사항
- 교환 & 환불이 불가능한 상품으로 신중한 구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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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HOUSE Seoul GOODS, BAG, BADGE 오픈하우스서울 본행사 기념 굿즈입니다.  굿즈를 통한 수익금은 오픈하우스서울 2022의 준비비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디자인 : 워크룸 오픈하우스서울 에코백 OPENHOUSE Seoul ECO BAG  오픈하우스서울 뱃지 OPENHOUSE Seoul  BADGE   구매 방법  한정판(limited edition)으로 제작된 굿즈의 ** 배송은 11월 15일 일괄 발송됩니다. 굿즈 구성  후원 1 -- 6,000원 : 뱃지  [구매 바로가기] 후원 2 -- 15,000원 : 에코백  [구매 바로가기]  후원 3 -- 20,000원 : 뱃지 + 에코백  [구매 바로가기]
OPENHOUSE Seoul BAG X 2개 2021년 10월 16일 4:46AM
SPECIAL 건축가 정재헌, 오픈하우스서울×기린그림 건축가의 여러 작업을 돌아보면서 건축 세계를 탐색해온 건축가특집으로 올해는 건축가 정재헌을 만납니다.  건축가 정재헌은 기하학적 절제미를 통해 내외부 공간을 엮어내며 간결하면서도 여백이 담긴 건축을 펼쳐내는 건축가입니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살로몽은 그의 건축을 '수학적 감성의 구현'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섬세하게 조율된 비례를 통해 몸의 감각으로 건축의 치수와 재료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공간감을 주목한 말입니다. 마치 선방의 공간 같은 그의 건축은 급진적인 파격은 없지만, 몸으로 경험하는 공간의 편안함을 전해줍니다. 다수의 집 프로젝트로 알려졌지만, 그의 건축은 주거 뿐만 아니라 호텔, 사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전위지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가 정재헌의 수학적인 구조와 몸의 경험, 삶과 밀접한 장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 영상/영화 제작 스튜디오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3개의 건축 영상과 1개의 오픈하우스 프로그램, 라이브로 진행될 오픈스튜디오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글 임진영(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사진 이강석 온라인 프로그램   영상  운중 디바인-1 영상  디파이 사옥 영상  운중동 친구네 집 Live 오픈스튜디오 정재헌(모노건축사사무소) 현장 프로그램 (10월 22일 오후 2시 예약 오픈)  10월 31일 오후 2시  나무 호텔  
OPENHOUSE Seoul BAG 2021년 10월 18일 4:53AM
OPENHOUSE Seoul BADGE X 2개 2021년 10월 19일 12:00AM
OPENHOUSE Seoul BADGE 2021년 10월 20일 12:00AM
OPENHOUSE Seoul BAG + BADGE SET 2021년 10월 21일 5:29AM
Interview 신체 치수와 비례로 구현한 여백의 미, 건축가 정재헌 ① 어릴 적 산골에서 나고 자라 한옥에서 사셨다고 들었어요. 경북 군위라는 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어요. 보통 경북 군위라고 하면 대구 옆에 있는 존재감 없는 소읍이어서 잘 몰라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1.5 km 떨어진 이웃 동네에서 나셔서 군위를 많이 알게 됐죠.    저는 읍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전기도, 문화도, 자동차도 없고, 문명과 거의 단절된 곳에 살았어요.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들은 모두 산이고 들판이고 개울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몸으로 자연을 체험하지 않았나 싶어요. 가장 큰 즐거움은 여름 되면 개울가에 가서 멱 감고 친구들과 같이 산에 소 몰러 다니고 쇠꼴 베러 다닌 것이었어요. 지금도 저는 낫질, 삽질, 모든 농기구를 잘 다룹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농사지으면서 사과 과수원을 하셔서 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나무 키우는 일을 같이 도와드리면서 몸으로 익혔죠. 지금도 저는 청계산에서 텃밭 농사를 잘 짓고 있어요. 흙에 대한 느낌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대한 느낌, 나무들의 생육에 대한 것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기억나는 풍경들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학교까지 4km, 왕복 20리를 걸어서 다녔어요. 봄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무 색깔에서 알았어요. ‘물이 오른다’라고 하죠. 봄철에 물이 쭉 올라서 보라색으로 바뀌는 것들이 보입니다. 여름이 온다는 것은 태양이 작열한다는 거였어요. 학교 마치고 집까지 가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뜨겁고 진공 같은 상태와 풍경을 지나 가을이라는 걸 느꼈을 때는 빛이 기울어지는 것이 기억나요. 겨울은 온도를 모르잖아요. 근데 물체를 만지고 경험한 거로 추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건축을 하고 풍경을 담는 데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몸으로 느꼈던 것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한옥에서 자랐다고 하셨는데, 어떤 집이었나요? 집을 설계하면서 항상 저의 집을 떠올려요. 아니면 우리 동네에 있었던 집들을 떠올립니다. 땅이 산으로 막혀 있어서 분지처럼 둘러싸여 있었는데, 큰길에서 3~40m 논 사이로 들어가면 우리 집이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위채와 아래채, 행랑채가 있는 전형적인 ㄷ자 집이었어요. 바깥으로 논이 있고, 그 옆에 허드레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농가형 주택이었어요. 가장 인상적인 건 대청마루 공간이었어요. 또 기억에 남는 집의 공간으로 ‘뒤안’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호기심 많은 사내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지였죠. 개구리 잡아 키운다든가 아니면 새를 잡는다든지, 친구들과 함께 그 공간에서 썼던 기억이 나요. 여름날 문을 열면 맞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기억들이 나고요. 지금 와서 보면 어렸을 때 그런 집에서 자랐던 게 가장 큰 행복이지 않았나 싶어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50년 전 시골집 풍경이 다 떠올라요. 많이 바뀌었지만, 다행히 워낙 오지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도 좋고요.      중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니셨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막내 외아들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너무 자연 속에서 놀고 공부하는 건 뒷전이니까 어머님이 걱정되셨나 봐요. 셋째 누님이 서울로 시집가니까 같이 생활하게끔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 생활이 시작됐던 거죠.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충격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말을 하면 모든 친구가 웃었어요. 그러면서 제 성격이 내향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가장 무서웠던 것은 친구들과 싸워서 ‘너희 어머님 모셔와라’라는 말을 듣는 거였어요. 어머님이 시골에 계시는데 어떻게 오시겠어요. 어린 마음에 그런 부분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 안 일으키고 조용조용히 살았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어느 동네에서 사셨나요? 종로 6가 효제동 그리고 충신동 언저리에 살았습니다. 저희는 양옥집에 살았고 그 밑으론 전부 한옥이었어요. 지금도 가보면 종로 5, 6가는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때 제 가장 큰 놀이터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였어요.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 가면 큰 운동장이 있었고,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교수님께 집을 의뢰했던 동창분들이 바로 그때 중고등학교 친구들이신 거군요. 그렇죠. 부모와 떨어져서 서울에 와서 산다는 것, 그 어린 나이에 유학했다는 것이 좀 불행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나중에 파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 문화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골목 다니면서 혼자 조용히 지내는 걸 가장 좋아했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사물을 관찰하거나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길거리 다니면서 ‘이렇구나, 저렇구나’ 관심 있게 주변 사물들을 봅니다. 아마 그런 것에 민감했던 것 같아요.   건축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그 놀이터가 없어졌어요.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이 다 부서져 버리더라고요. 당시엔 그곳이 문리대인지도 몰랐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운동장이 있길래 공차고 놀았는데, 어느 날 그 좋은 나무들을 다 베어버리고 좋은 건물들과 운동장도 없애 버렸어요. 길을 만들고 하더니 단독주택지를 만들더라고요. 그곳에 근사한 집들이 들어오는 거죠. 저는 보성중학교에 다녀서 항상 학교 갈 때 혜화동으로 갔어요. 대학로에서 걸어서 가다 보니 항상 공사장 옆으로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짙고 빨간 벽돌 건물이 샘터 사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옆에 굉장히 유명한 주택들이 있었던 거예요. 3년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 건물을 짓는 과정들을 보며, 그때 받은 인상이 몇 년 동안 강렬히 지속됐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보니 김수근 선생님 작업이었죠. 그 길로 다니면서 한국 해외개발공사 건물이 지어지는 현장을 구경했어요.    건축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저는 82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요,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학과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촌 형이 화공과를 나왔는데 “야, 요즘 건축학과랑 건축공학과가 취업도 잘 되고 괜찮은 것 같아.” 라고 지나가듯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습니다. 제가 동검리 주택을 지어드렸던 고3 담임 선생님이 계세요. 그 선생님께서 “정재헌, 너는 건축공학과 가면 안 돼.”라고 하셨어요. “왜요?” 그랬더니, “현장 소장으로 가서 인부들 직접 만나면 큰소리 내고 해야 하는데, 너 그럴 수 있어?”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진학 지도를 하던 선생님들께서는 건축 설계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 했어요. 우리나라는 건설 공화국이었잖아요. 건축공학과 나오면 무조건 건설 현장을 가는 것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큰 생각 없이 건축공학과에 갔는데 그게 삶을 규정짓게 된 것 같아요.   성균관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성균관대에 들어가서 좋았던 것은 저와 비슷한 시골 친구들이 서울에 와서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저와 고향도 비슷해서 자유롭게 보냈고요.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성균관대는 디자인에 집중된 학교는 아니었어요. 졸업 후 직장 다니면서 홍익대나 서울시립대 동료들을 만나면 저보다 훨씬 더 잘했어요. 손도 빠르고, 건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죠. 대학 다닐 때 중요한 부분은 학교 분위기에요. 그래서 ‘내가 4년 동안 뭐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열심히 뭔가를 하기는 했는데 인상적인 건 없었어요. 대신 건축 사진 찍는 것은 아주 좋아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건축가가 학교 다닐 때 이미 빼어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학교 다닐 때 재능 있게 잘하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재능보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항상 해요.   그래도 설계의 재미라고 할까요.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나요? 물론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좋아했어요. 잘하지는 못했는데 명료한 것을 좋아해서, 설계하고 도면 그리고 모형 만들면서 며칠 밤을 새워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해가 떠오를 때 정신이 맑아지면서 행복을 느꼈죠. 건축을 즐기고 좋아했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 ‘이게 행복이구나.’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건축을 하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어디셨나요? 1987년에 첫 직장을 다녔는데, ‘정일엔지니어링’이라고 서울역 뒤편에 큰 사무실이 있습니다. 전기설비팀도 있고 10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월급도 주는 것이 참 행복했어요. 그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정보가 부족한 시기였지만 시대별 분위기가 있었을 듯해요. 당시 기억에 남거나 관심을 가졌던 건축가나 혹은 이론이 있으셨나요? 우리나라는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고 유행을 많이 타잖아요. 은사님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시면 미국에서 학습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가르치기 때문이죠. 은사님들이 공부하셨던 미국의 경향이, 예를 들어 ‘모던은 갔어.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야.’ 그러면 저희는 다 포스트모던처럼 했어요. 포스트모던이 문화적으로 왜, 어떤 환경에서 나왔는지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이야.’ 하는 식으로 무늬만 따라 했던 것 같아요. 유학 가서야 ‘아, 이게 포스트모던이고, 모던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거구나.’하고 본질적인 것을 느꼈어요. 스스로 단편적으로 학습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저도 교육자로서 그런 부분을 굉장히 조심해요. 제한된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는 거니까요. 교육자로서 제일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실무를 하는 중에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때는 유학 가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권을 잘 만들어주지 않았고 시험을 몇 번 쳐야만 입학 허가서 받고 여권을 받아서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서양건축사, 현대건축사를 배울 때 교재에 있는 조그만 사진을 보고 상상을 해요. ‘야 이게 정말 지금 남아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났어요. 상상만 해도 좋았죠. 저 어릴 때는 TV도 없고 전기도 없는데 유일하게 트랜지스터, 정확히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친구들과 귀 기울여서 들었어요. 그게 유일한 문명이었으니까요. 라디오 드라마 연속극 장면을 들으며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서양건축사 책에 나온 정보가 마치 라디오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럽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속 갈증이 굉장히 강했어요. 마침 당시 성균관대 김용부 교수님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유학을 할 수 있다는 공지문을 내셨어요.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으셨는데 저까지 세네 명이 모였죠. 선생님께서 프랑스는 학비가 거의 없고 생활비 얼마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불어 공부를 시작했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4년 불어 공부를 하고 유학을 떠났던 겁니다. 1987년에 1년 동안 제가 설계사무실을 다니면서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 당시 많은 사무실이 현상 설계를 하고 작업을 하는데, 설계 프로세스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블랙박스형 설계였죠. ‘이런 게 아주 좋다더라’, 누가 한마디 하면 그 말을 따라서 그냥 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지가 없었어요. 프로세스 없이 그냥 결과물만 있는 가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프로세스를 좀 배웠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 생각의 과정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궁금했던 거예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문화적 충격이었죠. 환경적인 것은 그랬지만 파리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불어를 그렇게 잘하진 못했는데 수업 시간에 프랑스 친구들이 저에게 ‘톨레랑스’를 보여줬어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명료했고 그걸 많이 느끼게 해줬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어요.   그 시기에 많은 분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나요? 제가 갔을 때보다 3~4년 이후, 저희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하던 때에 많이 갔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있었을 때는 학생이 열 명도 채 안 됐던 것 같아요.   파리에 지내시면서 자주 가던 곳이 있으신가요? 항상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그 좋은 곳을 즐기지 못했어요. 당시 부모님 연세가 일흔을 넘기셨고, 제가 외아들이어서 부모님과 3년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래도 자주 갔던 곳은 있습니다. 프랑스가 좋은 점은 건축을 공부한다고 하면 박물관, 미술관 등 모든 게 무료였어요. 그래서 항상 시간 날 때마다 퐁피두센터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와 강연을 보러 다녔어요. 저는 지금도 루브르박물관이나 퐁피두센터가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건축을 하려면 메트로폴리탄에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이 있는 뉴욕이라든가, 런던이라든가, 파리 같은 곳에 가서 했으면 좋겠다고요. 아주 많은 전시와 강연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기억나는 것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퐁피두센터에 와서 강연한 거예요. 항상 1년 치 강연을 다 들었던 것 같아요. 아라타 이소자키나 리차드 마이어,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거장들이 와서 강연했어요. 그런 기회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멋있었던 건, 프랑스 건축가들이 와서 초청한 강연자를 소개를 해주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것들이 문화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당시 프랑스는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대였어요. 건축이나 예술 분야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였죠. 그때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다양한 도시 재건축이 일어났고,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도 활성화되던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루벤스가 사용하던 유화 물감을 써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그 물감이 쌓여 있는 거예요. 마음대로 쓸 수 있었어요. 그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어마어마했어요. 학교 암실도 제가 꿈꿔왔던 곳이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지원금도 많았어요. 매력적이었던 건 학교 다니면서 돈 안 들이고 유럽 답사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수업 차원에서 답사하는데 정부에서 교통편과 숙식까지 거의 다 지원해줬어요. 저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받은 거죠.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이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 벨빌 대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앙리 시리아니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앙리 시리아니는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유학 갈 시점에 88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건축이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당시 「꾸밈」 지의 김성환 선배가 파리 특파원으로 계시면서 프랑스 건축에 대한 많은 양의 정보로 연재를 했어요. 굉장히 고맙죠. 그 기사를 보고 파리 8대학 교수이면서 건축가인 앙리 시리아니를 알았죠.   앞서 말한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갈증을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 단번에 풀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에게는 그분이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감성과 감각이 있거나 세련되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감성을 다 일깨워 주셨던 것 같아요. 굉장히 엄한 분이고, 말씀하시는 것도 명징했어요. 지금도 그분과 가끔 교류하는데, 저에겐 아직도 스승입니다. 아마 그 스승님 때문에 저도 지금 학교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아, 그런 스승처럼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죠.   유학을 통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제대로 접했다고 하셨는데요. 서양 건축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흡수하셨는지요. 당시 벨빌 대학에서 좋은 스승님을 많이 만났어요. 요즘은 그런 분들이 다 미국에 있는 학교나 다른 지역에 가신 것 같아요. 그때 저희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분은 베르나 유에(Bernard Huet)라는 석학이었습니다. 자크 뤼캉(Jacques Lucan)이 현대 건축을 가르치셨고, 또 미술을 가르쳤던 분들도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 만한 대가들이셨어요. 그분들을 통해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었어요. 현대 건축에서는 자크 뤼캉 선생님이 계몽주의가 어떻게 나왔는지, 르코르뷔지에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건축의 규율은 어떻게 이어졌는지 일 년 동안 수업을 해주셨어요. 그 수업이 저에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건축과의 관계,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것 같아요. 설계 스튜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었죠. 명료한 것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바닥이 뭐고, 벽이 뭐고, 천장이 뭔지, 하나하나 요소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시작해, 건축가의 도덕성, 사회적인 책무에 관한 문제, 집합 주거와 사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들, 건축이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철학적인 문제까지도 질문을 던지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분은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였어요. 그래서 사회에서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공간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주셨어요.   유학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과 그에 대한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학교에서 뛰어나거나 건축을 아주 많이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주변에 좋은 환경을 만나서 지금 그런 가치를 알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앎의 방법은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철저히 했던 것 같아요.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께 그런 걸 배웠습니다. 또 아주 학습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미셸 카강이 한 건축물을 보게 됐어요. 파리의 고속도로변에 근사한 게 지어졌더라고요. ‘도대체 건축가가 누굴까?’해서 찾아보니 미셸 카강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편지를 써서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답이 안 왔습니다. 전화해서 ‘왜 당신은 답을 안 주냐’고 했더니 지금 보자는 거예요. 일하고 싶어서 제가 작업한 걸 들고 갔죠. ‘그럼 내일부터 나와’ 그러는 거예요. 그분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장점을 아주 좋아했어요. 시리아니 선생님과 달리, 그 젊은 나이에 비례라든가, 형태에 훨씬 더 섬세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감동이었죠. 거기서 같이 일하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항상 메모하고 다녔어요. 밥 같이 먹을 때라든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기회가 되면 수첩을 들고 항상 질문했어요. 좋았던 건 질문을 하면 시리아니 선생님이나 미셸 카강이나 아주 쉽고 진지하게 설명을 해줬어요. 미셸 카강과는 그 인연을 계속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한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굉장히 멋졌던 게 국가에서 1박 2일 동안 미셸 카강의 추모 행사를 해주더라고요. 미셸 카강의 부인이 초청하고 싶은 사람 리스트를 만들어서 저도 프랑스에서 초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추모식에 가서 제가 30분 동안 추모사를 했어요.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Interview 신체 치수와 비례로 구현한 여백의 미, 건축가 정재헌 ② 한국에 들어와서 하신 첫 프로젝트가 양수리 두물머리주택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지금까지 주택을 계속하게 된 이유가 이 첫 집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군위 오지에서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그 동네에서 상경해 성공하신 분이 저에게 집 설계를 의뢰하셨어요. 우리 누님 친구분이시고 우리 집안과 알고 계시니까, 요즘 땅값으로 치면 몇십억 되는 거대한 집을 서른 살 초반 젊은 건축가에게 맡긴 거예요. 제가 알고 있었던 게 별로 없더라고요. 건축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까 작은, 실제 치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게 맞을까? 틀릴까?’ 다시 공부했어요. 모든 것을 건축가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두물머리주택은 경사진 땅을 다루면서 지형을 살린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셨는지요?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가 유전적으로 그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프랑스적인 사고를 했다면 르코르뷔지에처럼 필로티를 만들었겠죠. 그런데 유학 갔다 와서 처음에는 다들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잖아요. 우리 강토를 바로 알려고 지방을 많이 다녔어요. 전통건축도 많이 보러 다니고 우리나라 땅의 색깔은 어떤지, 우리 식물은 어떤 게 있는지도 보고요. 전라도의 흙 색깔은 어떻고 경상도는 어떤지를 느끼고 배웠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산 능선의 풍경에 따라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예를 들어 경북의 북부 지방은 가파른데, 남부는 조금 느려집니다. 지형뿐만 아니라 거기에 지어진 집들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두물머리주택은 어떻게 하면 우리 환경에 적합한 집을 만들고 제가 습득했던 것을 담을 수 있을까 고민 했던 작업이었어요.     경사지를 그대로 살리면서 풍경이 그 높이에 따라서 다르게 설정된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랬죠. 처음에 택지 개발을 하면서 대지가 기단처럼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 기단을 없애고 땅의 흐름과 선을 살리려고 의뢰인을 설득했고, 쌓아놓은 기단을 다시 없앴습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내재한 그런 풍경, 경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형에 대한 해석과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후 연이어서 했던 작업이 모두 다 경사지였어요. 평지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죠.   경사지에 짓는 집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고민한 것은 땅에 어떻게 강하게 반응할 것인가였어요. 예를 들어 르코르뷔지에의 경우 필로티로 집을 들어 버리잖아요. 지면은 지면이고 건축면은 따로 존재해요. 빌라 사보아나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는 원래 지형과 다르게 추상화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건축을 보면 대지의 지형 변화에 따라 지면의 높이 또한 바뀝니다. 마당과 외부 공간이 같이 읽히는 거죠. 경사지의 가장 단순한 장점이라면 투영된 대지 면적보다 땅이 넓어진다는 거예요. 투영면적은 작은데 경사지의 실제 표면적은 큰 거죠. 그게 물리적인 부분이고요. 우리나라 경사지의 장점은 땅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건축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 주면 훨씬 더 색깔 있는, 그 땅에만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땅에 대한 조력자예요. 제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이 뭘 원하는지 읽어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땅이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고 해요. 땅에 답이 있고 제가 그에 대한 응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반면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평지보다 경사지가 훨씬 더 성격이 강해요. 레벨을 맞춰서 만들어야 하니 설계는 분명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땅을 보면 도심에도 지형 기복이 심하잖아요, 평지로 만들어놔도 지형이 있습니다. 그 미세한 차이를 담는 것이 공간의 차이를 만들어요. 예를 들어, 도천 라일락집 같은 경우도 지형 변화에 따라 마당에 다양한 레벨을 만들어 주었어요. 훨씬 더 공간이 입체적이고 풍부하고 넓어 보이는 거죠. 위에서 아래로 본다든가, 아래채에서 위채를 본다든가 할 수 있어요. 아래채와 위채를 넣으면서 아래채를 낮추고 위채를 쓱 올리면 빛이 잘 들어오면서 개방감이 있어요. 물리적으로는 작지만, 실제 느끼는 공간은 훨씬 더 입체적으로 커 보이죠. 땅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담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두물머리주택은 저에게도 기억에 남는 작업입니다. 현장에 방문했을 때 ‘이 공간이 너무나 편안하다’라고 각인이 된 집이었어요.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데, 건축가 로랑 살로몽이 교수님에 대한 비평에서 쓴 ‘수학적 감성’, ‘신체가 기억하는 비례’라는 단어를 보고 나니 분명해지더라고요. 저 역시 제가 생각했던 것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공간을 이렇게 만들면 이렇게 되는구나.’ 반대로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것도 많이 느꼈어요. 어제 지어진 집이 가르침이고 스승입니다. 백색을 쓴 이유도 처음에는 다른 재료를 쓸 만한 경험이 없었어요. 요즘 젊은 건축가들도 백색으로 많이 마감하죠. 르코르뷔지에도 젊은 시절에 백색 건축을 했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조형성이 잘 드러나기도 하고, 또 하나는 그만큼 축적된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건축은 쌓는다든가, 디테일이라든가, 모듈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건축이 행해야 할 치수, 고려해야 할 삶에 대한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까지 손이 못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두물머리주택을 하고 나니 ‘백색이 폼은 나는데 우리 환경에는 안 맞는구나,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다음 프로젝트인 전주 자운당 주택을 하면서 재료를 분명히 써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우리 땅에 맞는 물성(material)이 무엇이고, 무엇이 어울릴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명료했던 건 제가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했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던 것 같아요. 시리아니 선생이나 미셸 카강 선생에게 배운 비례나 감성적인 접근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땅에 대한 경험을 총체적으로 집합한 게 그 첫 작업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 주택 작업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1년에 한 채씩 꾸준히 집을 지으시면서 판교, 동백 등 다양한 주택 단지들을 접하셨을 텐데요. 교수님이 보시기에 주택 단지들에서 느꼈던 특성과 아쉬움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불행한 건 동백이든 판교든 전주든, 땅을 깎은 다음에 동일한 방법으로 확 눌러버리는 거예요. 지구 단위 계획을 만들어서 담장의 유무 같은 지침도 만들잖아요. 그럼 필지는 필지, 건물은 건물, 길은 길, 하천은 하천, 각각 개별적 개체로 읽히는 거예요. 하나로 통합이 되지 않는 거죠. 집, 도로, 개울, 상점이 다 따로 노는 부분을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요. 또 도시계획에서 땅을 만들 때는 모든 곳이 똑같습니다. 판교에서도 본 걸 전주에서도 봐요.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는 게 참 안타까워요. 그래도 최근에 파주의 주택지는 지형을 조금 살리고 언덕 그대로 대지선을 땅에 맞춘다고 해요. 진화된 부분이 있더라고요. 지구 단위 도시계획은 안 바뀌는데 이런 부분이 바뀌고 있구나 싶어서 참 좋았습니다.   주택 단지들이 바뀌면서 거기에 대응하는 교수님의 설계도 바뀌었나요? 우리나라 주택 단지는 땅이 가지고 있는 큰 속성이 없어요. 70평에서 80평, 외곽으로 나가면 120평 정도 면적만 차이 날 뿐 똑같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필지를 잘랐을 때 땅의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곳에 어떤 건물이 지어지면 좋을지에 대해 탐구를 하고 필지를 배분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신도시 계획을 했던 일산, 분당, 판교 등등 기존 주택 단지의 필지 나누기에 대한 피드백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필지를 어떤 방법으로 나누고 길을 어떻게 내야 하는 건지 고민해야 하는데, 과거에 했던 것이 그냥 정답이 돼버려요. 주택이 인기 있으니까 전국적으로 전파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세종문화회관은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접근해 들어가잖아요. 사실 다른 목적 때문에 그렇게 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그것이 원형인 것처럼 받아들여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죠.  도시계획에서도 필지 나누기와 같은 부분이 조금 변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개별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크기도 다양했으면 좋겠죠. 판교가 대표적인데, 설계할 때마다 항상 어려웠어요. 땅이 꼭 한 평 모자라요. 동백주택을 설계할 때도 한 30cm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죠. 신도시 주택 단지에 설계할 때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이에요. 또 하나는 공개 공지와 같은 규정으로 토지 낭비가 심합니다. 어떤 토지는 도로율이 너무 높아요. 도로율이 높다 보니 집이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땅을 도로로 다 잘라버렸어요. 그러니 단지에 깊이가 없어요.   주택에서 늘 진입부에 깊이감 있는 공간을 만드시는데요. 동네와 접점을 만드는 ‘이웃 만들기’라는 표현도 쓰셨습니다. 집의 진입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늘 이웃의 중요성, 동네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다 보니까 잘 모르지만, 사실 집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집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정작 집에 들어가면 집의 모습은 없어져요. 그리고 보이는 건 이웃이죠. 동네가 중요한 것은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집에 가느냐, 어떤 풍경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리조트도 똑같을 거예요. 경험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해요. 아파트처럼 문을 열자마자 바로 집이 나오는 게 아니라 깊이 있는 집을 만드는 것, 과정적 공간 다음에 전이가 일어나고 집 안에 들어가면 심리적으로 아주 편안할 거라는 거죠. 어떻게 하면 한 장면에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공간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인가. 길을 바로 가는 게 아니고 길게 가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두물머리주택부터 시작해 여러 주택을 진행하면서 중간 영역도 진화한 것 같습니다. 두물머리 주택은 집 안에서의 이동 경로나 시점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내외부 공간의 관계가 더 선명해 보입니다. 집의 전이 공간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기에 서양에서 집은 어떤 의미에서 빌라 사보아처럼 오브제 중심적이에요.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은 집의 형상이 없습니다. 한옥에서 존재하는 건 비어 있는 것들이에요. 서양화와 동양화의 가장 다른 면이라면, 서양은 오일로, 동양화는 잉크로 그린다는 점이에요. 흰색을 칠하려면 비워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중간 영역이 동양화의 그림처럼 근경과 중경, 원경을 표현할 때 그 사이의 비어 있는 흰색과 같다고 생각해요. 집 양쪽에 비어 있는 공간 그 자체는 집의 중심이 됩니다. 집 안으로도 통합돼서 느껴지고 외부에서도 통합되어서 아주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과거에 집을 지을 때는 사람들이 실내 면적에 대해 배고파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밥을 먹고 나서 배가 조금 부른 상태랄까요. 그런 표현이 좀 우습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아파트 발코니를 확장했잖아요. 몇 평형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넓은 게 좋은 거였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테라스 하우스가 더 선호된다고 해요. 아파트도 변하는 거죠. 인식의 변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실내 면적보다는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거라고 이야기해요. 요즘은 그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단독주택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고 내부도 외부도 아닌 중간 영역이 집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동시에 집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초기 작업부터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사용자에 대한 배려와 애정 같아요. 하나하나 배려하고 친절하게 고려된 치수라든가 공간을 상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키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용자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나이 들었을 때는 어떨지,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거죠.    저는 기능적인 것보다 디테일을 하나하나 손수 만들어가는 편인 것 같아요. 알바 알토의 집이 그렇거든요. 알바 알토의 집은 그냥 보면 너무 평범한데, 가만히 뜯어서 보면 ‘아, 어떻게 이렇게 지었나?’ 싶습니다. 폼 잡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집을 짓기 때문에 그런 배려가 더 크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도 사실 여름에 몹시 덥고 겨울에는 무진장 춥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해 어떤 배려를 해줄 것인지, 볕도 들어오면서 환기도 되면서,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물의 그 시원한 느낌은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죠. 그런 고민이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경력이 쌓이면서 깊어지는 것 같아요.   교수님이 설계한 공간에서 복도와 계단은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 사이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가 항상 있어요. 복도와 계단을 어떻게 고려해 쓰시는지요. 거창하게 말하면 건축은 4차원의 작업인 것 같아요. 만약 시간성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건축은 고정되어 버릴 거예요. 결국, 어떻게 체험하느냐의 그 시간, 내가 걸어가는 시간과 움직임 속에서 공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작업에서는 대문과 같은 공간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전이 공간을 어떻게 느끼게 할까, 어떻게 비를 안 맞게 할까, 마당에 들어간 뒤 현관에 갈 때는 어떤 전이를 일어나게 할까를 생각해요. 말씀하신 계단과 복도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전이가 가장 강력한 부분이 현관인 것 같아요. 서양에서는 신발을 안 벗습니다. 우리나라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가 일어나고 많은 수납공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런 공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강한 전이가 일어나죠. 계단이라는 건 몸의 중력을 이기는 것이에요. 다리에 힘이 드는 거죠. 전이는 사람을 상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전이를 경험하고 나면 기대치가 올라가서 그다음 공간에서도 쉽고 편하게 지내게 돼요. 저는 집의 계단을 만들 때 천정이 낮지 않으면서 어떻게 단수를 줄일까 고민합니다. 일상에서 단수가 많으면 불편해지거든요.   복도의 경우, 지나갈 때 풍경의 변화가 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움직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집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전이되는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현대 건축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그것이 곧 우리나라 전통건축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설계한 집은 모두 홑집이라고 하셨어요. 왜 홑집을 만들고자 하셨는지요? 일단 겹집이면 통풍이 힘들고 햇볕을 잘 받으려면 집이 길어야 해요. 우리나라 전통주거에서 겨울에 햇볕을 잘 받으려면 집을 길게 만드는 환경적인 이유가 있는 것과 같아요. 두 번째로, 우리나라 전통주거는 대부분 홑집이에요. 한옥을 보면 비어 있는 것들을 담기 위해 집채가 외곽으로 나오고 마당을 안에 품고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외부 환경에 대해 내향적이고 거주성을 높이려면 집이 마당으로 열려 있어야 해서 자연스럽게 선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다란 집을 환경에 따라서 접으면 컨트롤이 잘 됩니다. 집을 만들면서 크게 느꼈던 우리나라 집에 매력이 있다는 거예요. 창덕궁 연경당에 가보면 집이 아주 얇아요. 앞에서 뒤를 볼 때의 그 투과성은 굉장히 강력한 것 같아요. 거꾸로 이야기하면 르코르뷔지에가 썼던 투명성과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투명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르코르뷔지에와 같은 근대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투명성은 물질에 의한 투명성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은 ‘불투명성에 의한 투명성’의 표현입니다. 채와 채 사이가 대각선으로 열린다든가 하는 것이죠. 불투명 속에서 투명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깊이가 있고 훨씬 더 편합니다. 제가 요즘 그런 접근을 하고 있어요. 채가 있고 채 뒤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접근이 우리 건축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그것이 투명성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꾸준히 주택 작업을 해오면서 주거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실 것 같아요. 제가 첫 집을 한 지 20년이 넘도록 매년 집을 설계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것은, 제가 실험하면서 업데이트하고 바뀌는 것도 있지만 의뢰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의뢰인들은 제가 한 작업이 좋아서 찾아오는 분들이 99.9% 예요. 그분들이 먼저 작업을 보고 경험하고 오는 거죠. 또 집이 변화하고 있어요. 방이나 거실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보조 공간(servant space)이 커집니다. 루이스 칸이 주 공간(served space)과 보조 공간(servant space)을 구분하잖아요. 방과 거실이 작동하기 위해서 보조해야 하는 공간이 생기는 거죠.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방이 줄어들고 현관과 화장실, 드레싱룸, 창고, 부엌과 같은 주 기능을 위한 보조 공간이 커지는 것입니다. 집이 편안하려면 우리나라 아파트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의 경우 전용 면적을 줄이고 공용 면적을 늘리듯이 말이죠. 두 번째는 같은 이유로 면적에 대한 갈증은 사라진 것 같아요. “우리는 몇 자에 몇 자 방이야, 몇 평형이야.” 하는 게 없어졌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거죠. 또 기본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거실이 많이 축소되고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엌이 굉장히 커지고 바깥으로 나와서 아일랜드 부엌에 식탁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집에서 음식을 할 때 서양 집과 다른 점이 있어요. 서양의 경우, 장을 본 뒤 부엌에서 바로 요리를 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내놓는 시간이 30분이면 돼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몇 년이 걸립니다. 몇 년 된 묵은지와 장을 다 보관해야 하고 김치 같은 저장 음식이 많잖아요. 그리고 한식 요리는 재료를 다 자른 다음에 요리하니까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려요. 즉, 저장 음식이 많고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서양 집의 주방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팬트리와 다용도실도 필요하고요. 그 부분이 큰 차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주방 공간에 공을 들이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오면 가장 크게 바뀌는 것이 큰 주방의 큰 식탁에서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이라고 해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나 집에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주택에서 중요한 부분이 배려도 있지만, 건축적인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 있어요. 요즘 편리하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기능적이고 편리한 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파트를 연상할 것 같아요. 인간이 손을 안 움직여도 작동되는 곳이죠.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손 하나만 까딱해도 불이 저절로 켜지는 곳이 과연 집일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가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주택과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진 주택이 큰 차이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로마에 가보니까 별 차이가 없더라고요. 2천 년 전 집에도 제가 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삶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달나라에 가서 살지 않는 한 지구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문화가 급변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편리함 너머에 있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편리함을 억제한다는 뜻에서 아파트의 대척점에 있는 ‘비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편리함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거죠. 결혼하지 않는 것을 요즘 ‘비혼’이라고 말하듯이,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택하는 것을 ‘비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계절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환경을 경험하고, 땅 냄새를 맡고, 공기를 맡는 것이 영구적으로 변치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주상복합을 좋아하는 분들이나 바쁜 삶을 사는 분들은 또 아파트에 사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분명히 다를 거라고 봐요. 단독주택의 ‘비편함’이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에요. 젊고 바쁜 맞벌이 부부들은 편리한 곳에 살아야 하겠죠. 다만 단독주택을 즐기겠다면 ‘비편함’이 있는 집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