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때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왜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그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것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