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①, 건축가 이성관
‘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때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왜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그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것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INTERVIEW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②, 건축가 이성관
귀국하고 바로 전쟁기념관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당선되셨습니다. 40대 건축가에게 정말 큰 사건이었을 텐데요.
내가 43살에 그 일을 했어요. 공모전 신청할 때는 정림건축에 있을 때였어요. 신청하고 나오면서 그 담당자에게 심사가 공정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당선되는 사람은 아주 신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왔죠. 당선되고 싶다기 보다는 최우수작이나 우수작 6팀 안에 들면 귀국 신고로 괜찮은 거 아닌가 싶었어요.
전쟁기념관이라는 표현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요. 낯설지는 않으셨나요?
내용이 중요한 거죠. 영어로는 ‘War Memorial’이라 괜찮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념’이라는 말이 잘못하면 마치 호전성을 기념한다는 오해를 사는 거죠. 옛 사전을 보면 기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기억한다는 것과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여기서는 망자를 기억하다(remember)는 뜻이죠. 기념이 기억한다는 뜻으로 잘 안 쓰게 되고 축하하는 의미로만 쓰이다 보니 언어적인 불일치가 있었죠. 그것 때문에 공청회도 했어요. ‘전쟁 기념’이 ‘전쟁처럼 좋지 않은 것을 왜 기념하느냐’ 이런 의미로 이야기되니까 논란이 있었죠. 결국 영어로 ‘War Memorial’이라는 의미로 전쟁기념관이 되었어요.
어쩌면 기념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겠네요.
기억이죠. 전쟁이란 힘든 것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어떻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선열들처럼 몸 던져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 정신을 기리는 것이죠.
항구적 평화를 지키는 것이 바로 기념관의 존재 이유라고 하셨는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전쟁기념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당시에도 예상했던 게 이곳은 문화 시설이라는 것이었어요. 당시 전쟁에 대해 전시할 게 뭐 있냐며 비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문화 시설은 일단 넉넉하게 잡아놓고, 나중에 국제 정세가 변하면 여러 가지 비밀문서나 공개될 자료가 많을 거라고 봤어요. 지금 안목으로 어떻게 20~30년을 예단하나 생각해서 규모나 예산을 줄이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열주를 둔 회랑과 중심부 좌우 대칭이 큰 특징입니다. 회랑과 수공간 그리고 좌우 대칭의 엄격함을 지키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힘이죠. 많은 거룩한 희생이 있었고 엄숙한 생명을 바쳐서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장소에 그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외 공간은 느슨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지엄함 앞에서는 우리가 옷깃을 여밀 수 있어야 하지, 껌 씹고 슬리퍼 끌고 반바지 입고 오는 곳은 아니라는 약간의 부담을 주려는 게 있었어요. 관람이 끝나고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요.
박물관에 이르는 진입 동선에서 전통건축의 과정적 공간을 염두에 두기도 했는데요.
은연중에 프로젝트에 전통적인 게 깔려 있어요. 박물관 같은 걸 설계할 때, 어떤 확신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성격 자체가 일상의 연장이 아니거든요.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산다면, 방풍실 지나서 바로 물건이 앞에 전시돼 있어도 일상의 연장이기 때문에 금방 대화가 가능해요.
그런데, 기념관에 녹슨 철모가 있으면 그걸 단순히 고철로 보이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 세월과 전쟁, 희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관람이 되는 거예요. 기념관은 관찰이 아니라,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일상의 연장이 아니잖아요. 전쟁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마음의 준비 없이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입하는 과정에 텅 빈 공간을 만들어서 서울에 없는 풍경을 주는 거예요. 텅 비었을 때 사람이 받는 정서적 충격 혹은 낯섦을 주어서 마음을 흔든 다음에 비일상적 영역으로 가는 거죠. 마음의 준비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1989년에 전쟁기념관 이후 2001년 양구전투기념관을 설계하셨어요. 시간 차가 있는 두 프로젝트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다르셨나요?
전쟁기념관의 경우 군사 문화, 군사 잔재라고 했지만,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월 지나면 오히려 다른 각도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개관 전에 전쟁기념관을 박물관으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문의가 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이라면 이 땅에 이런 식으로 안 짓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너무 불편하고 멀잖아요. 추모를 위한 공간을 거친 다음에는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개념이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녹슨 철모를 볼 수 있도록 동선을 길게 잡은 거죠.
양구는 지자체에서 조성한 기념관이라 지명도도 다르고 규모도 달라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땅이 120평이라는 거예요. 누가 이 평화로운 장소에 고지전을 일으켰는지, 왜 자기 몸을 던져서 죽어야 하는지 명분이 없는 곳이잖아요. 이 땅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데서 죽는 게 너무 허망하죠. 그런데 그 전쟁이 없었다면 이게 북한에 있을 땅이에요. 기념관에서 이런 내력을 이야기 안 하면 누가 알겠느냐는 거죠. 더구나 양구전투기념관은 전쟁의 현장이자 죽음의 현장이었어요. 그 현장과 연관 짓는 게 중요했어요. 훨씬 더 밀도 있게 주변 지리에 관계되어서 디자인되었어요. 고지가 다 보이도록 한다거나 그 고지 위로 죽은 자의 이름이 유리에 뜨도록 한 것이나, 지형학적으로 친밀하게 짜인 거예요.
전쟁기념관은 그렇지 않아요. 실은 양구보다는 장소적 의미가 약하지요. 그때 거대주의라는 말이 있었어요. 짓기만 하면 저렇게 크게 만든다고요. 다리도 성수교 하면 될 일을 성수대교 하죠. 그 연장선에서 전쟁기념관 건물이 너무 규모가 크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전쟁기념관은 6.25 전쟁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 대한민국에 있었던 강토 수호 전쟁을 다 망라한 거니까요.
건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하셨는데, 흥미롭게도 기념관과 종교적인 공간을 많이 하셨어요. 상징과 기념을 담아내는 방식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념,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라 합리성이 약간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합리적으로 접근했을 뿐이에요. 되도록 은유적인(metaphoric) 방법으로 건물을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양구전투기념관 설계할 때 철모를 이야기하고 형상을 그린 것은 일종의 유추적인 방법이에요. 철모로 표현하는 순간 많은 가능성이 거기에 국한돼 버리잖아요. 주관적인 것으로 전체의 형상이나 예산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기념관의 속성은 일상에서 비일상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사이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 속을 거치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움 되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거리감을 주기 위해서 수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거죠. 물을 쓰면 거리감이 생겨서 공간의 확장 개념을 저절로 얻을 수 있고요. 또 물이라는 게 아주 섬세해서 바람 불면 사르르 반사되면서 민감한 미디어잖아요. 그래서 간간이 즐겨 써요.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에서도 불교의 사상이나 탄허 스님의 사상을 잘 담아내고자 하셨는데요. 박물관에서 고민하셨던 부분이 궁금합니다.
그린벨트 내에서 이미 허가를 받은 설계안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보고 아쉬운 것을 이야기했더니 설계를 바꿔 달라고 의뢰가 들어왔어요. 북향 진입이라는 단점 외에는 불교 사찰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처음부터 공간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공간을 시차적으로 전용해서 빌려오는 것으로 풀어내고자 했어요. 자동 개폐되는 문을 펼쳐서 가변적으로 넓게 쓰기도 하고 줄여서 따로 쓰는 걸 전제했어요.
또 일반 사찰에서 선형으로 길게 뻗은 동선을 입체적으로 담았어요. 공간을 선형적으로 배열해서 의미 있게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집의 안방은 가장 안쪽에 있지만, 사실 뒤쪽 담에서는 가장 가깝잖아요. 이런 역설적인 장치가 재미있어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법당은 들어가자마자 밖에서 보이지만 접근은 안 되도록 했어요. 중립적인 공간에 불교 사찰의 상징적인 의미를 압축해서 공포와 단청을 넣고 의미를 부여했어요.
데이콤 사옥이나 강남 사옥처럼 소장님이 설계한 오피스 빌딩은 안정된 비례와 치수를 보여줍니다. 고전적인 질서를 볼 수 있는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는지요?
치수(dimension)는 기본이에요. 요즘에는 치수개념이 없죠. 저는 오래전 공간론으로 바닥까지 뼈저리게 훑은 입장이고,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그걸 가르쳐요. 김종성 씨나 김태수 씨, 우규승 씨 같은 분들의 건물은 그런 원칙이 다 녹아 들어가 있어요. 요즘은 그런 게 없죠. 그냥 시원하고 큰 게 좋다는 식이어서 스케일이 크고 시원한 건 있는데 안정감은 많이 약화되어요.
거여 3단지 아파트부터 수입777, 반포 577, 최근에 홍지36까지 주택 프로젝트도 많이 하셨습니다. 삶을 담는 주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주택은 한 개인이 24시간 함께 할 동반자를 찾는 것과 같아요. 미팅 파트너를 정하는 것과는 다르죠. 여러 덕목을 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맞는 자질을 갖춰야 하니 주택을 근생 건물이나 상점처럼 칼같이 디자인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택 할 때도 외부 재료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요. 몰라서가 아니에요. 그러면 집에 만만한 게 없고 좀 징그럽지. 너무 미적인(aesthetic) 것만 찾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일부러 투박함을 적당히 그사이에 끼우고 구분되는 정도로 해요. 의도적으로 한 것이지 그 디테일이 비싸서 안하는 건 아니에요.
섬세한 디테일이 삶을 더 긴장하게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한울건축 출신들이 한국 건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울건축에서 지향했던 원칙 혹은 강조하셨던 태도는 무엇이었나요?
한 번 지어지면 영원히 고치기 힘들고 남는다. 설계를 옳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미팅 날짜도 사정해서 미루기도 했어요. 그래야 매듭을 잘 지을 수 있어요. 스케줄은 사람이 만드는 건데, 건축주가 좋은 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시간 가지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거죠. 돈은 그다음 문제였어요. 운영에는 좀 좋지 않지요. 또 직원들이 밤새우면서 고생하는 상황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니까 날짜를 조금 연기해 달라고 하는 거죠.
또, 일할 때는 디테일이나 큰 개념 잡는 건 똑같다고 해요. 디테일은 사소한(trivial) 게 아니고, 전체의 역할을 다 이야기해 주는 거라는 거죠. 범죄에서 살인 장면이 안 보이더라도 실오라기 같은 증거(clue)를 가지고 우리가 전체를 짐작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디테일이 작은 게 아니고 그것을 네가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해요. 또 중요한 건 유도 심문 하듯이 하나에서 열까지 자꾸 질문을 던져서 깨닫게 하는 것. 그러면서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건축가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로 무엇을 꼽으시나요?
너무나 당연한 건데 경험해 본 바로는 건축주의 존재예요. 우리는 전문성을 가지고 관념, 습관이 된 부분이 있지만, 건축주는 돈이 들어가니 절박해요. 또 주방 같은 곳을 설계할 때 건축주는 본인이 사용하기 때문에 명확해요. 본인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서 행동(behavior)이라는 걸 다 생각해본다고요. 건축가는 설계할 때 시간 개념이 없어요.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레이아웃이나 동선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정작 사용하는 사람들은 달라요. 공간을 사용하는 데 굉장히 구체적이고 시간 개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서 많이 깨닫고 배워요.
직원한테도 사용자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은 집 짓는 것에 꿈도 있고 모든 재산을 투자하기 때문에 아주 구체적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고요. 우리는 그냥 공간에서만 머물고, 그 시퀀스 안에 들어가지 못해요. 그 부분이 중요해요.
40년이 넘게 건축을 해오셨는데, 건축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건축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의 스펙트럼은 넓은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하고 싶어요. 건축은 순수 예술과 달라요. 순수 예술은 장소나 주변 관계에서는 벗어나 있어서 면죄부를 받는 반면에, 우리는 건물을 어느 영역, 시간에 짓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값을 내요. 작업의 성격으로 보면 순수 예술과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장르적 속성상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 놓이는 관계에서 판정되는 거죠. 건축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요. 그 이후에도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문제, 책임 의식이 따르죠. 그래서 우리가 사명 의식을 갖고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VISIT YOURSELF
여주박물관, 이성관
마암과 남한강, 여주 역사의 근원
여주는 과거에 황려현으로 불렸는데, 이는 남한강 물살이 바위에 부딪혀 솟아오르는 모습이 누런 말(황마), 검은 말(여마)과 닮았다고 하는 고전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 바위를 마암이라 불렀다. 대지 앞을 흐르는 남한강과 그 건너에 있는 마암은 여주 역사와 정체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축으로 주변과 관계 맺기
기존 박물관은 남한강을 향해서 배치돼 있고, 전면이 남한강으로 트여있다. 신축 박물관은 이를 해치지 않기 위해 축에서 비켜나 있고, 강 건너편 마암과의 연결축을 형성하면서 배치되어있다.
풍경 속 조형물로서의 박물관
확 트인 경관 속에서 건물이기보다 풍경 속 조형물로 인지되도록 하였다. 여주, 남한강 이곳, 유유한 시간의 누적을 퇴적층으로 보고 건물은 퇴적층 수면 위로 드러난 검은 상자로 은유시켰다.
시민의 쉼터, 일상 속의 문화공간
건물 로비와 홀에 접한 메인 공간에 카페를 배치함으로써 일상에서 휴식을 찾아온 사람들이 자연스레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조경 경계를 개방해서 박물관이 열린 쉼터가 되도록 하였다.
남한강 전경 끌어들이기
수공간에 접한 카페의 상부는 켄틸레버로 들려 있어서 가로로 긴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남한강과 여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여주의 존재와 역사를 되새기도록 하였다.
박스 속 역동적 공간
카페에 접해서 3개 층으로 뚫린 메인 홀이 있다. 홀 내 관람 동선을 입체적으로 계획함으로써 자칫 정적일 수 있는 입방체 공간 속에서 관람자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느껴지도록 하였다.
물과 하늘, 유리의 반사
검은 유리면은 하늘을 반사해 여주의 현재와 미래를 드러내려 했고, 남서쪽 모서리의 잘린 삼각면은 여주의 근원인 남한강 상류를 비추어 여주의 과거 시간을 유감 시키려 하였다.
글, 사진_이성관
위치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6-12
용도 문화 및 집회시설(Cultural Facility)
구조 철근콘크리트
층수 지상 3층, 지하 1층
대지면적 12,339㎡
건축면적 1,150㎡
연면적 1,918.35㎡
건폐율 9.32%
용적률 12.25 %
외부마감재 마천석 버너구이, 코르텐, 개비온
시공사 주식회사 연우
준공일자 201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