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고 바로 전쟁기념관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당선되셨습니다. 40대 건축가에게 정말 큰 사건이었을 텐데요.
내가 43살에 그 일을 했어요. 공모전 신청할 때는 정림건축에 있을 때였어요. 신청하고 나오면서 그 담당자에게 심사가 공정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당선되는 사람은 아주 신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왔죠. 당선되고 싶다기 보다는 최우수작이나 우수작 6팀 안에 들면 귀국 신고로 괜찮은 거 아닌가 싶었어요.
전쟁기념관이라는 표현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요. 낯설지는 않으셨나요?
내용이 중요한 거죠. 영어로는 ‘War Memorial’이라 괜찮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념’이라는 말이 잘못하면 마치 호전성을 기념한다는 오해를 사는 거죠. 옛 사전을 보면 기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기억한다는 것과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여기서는 망자를 기억하다(remember)는 뜻이죠. 기념이 기억한다는 뜻으로 잘 안 쓰게 되고 축하하는 의미로만 쓰이다 보니 언어적인 불일치가 있었죠. 그것 때문에 공청회도 했어요. ‘전쟁 기념’이 ‘전쟁처럼 좋지 않은 것을 왜 기념하느냐’ 이런 의미로 이야기되니까 논란이 있었죠. 결국 영어로 ‘War Memorial’이라는 의미로 전쟁기념관이 되었어요.
어쩌면 기념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겠네요.
기억이죠. 전쟁이란 힘든 것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어떻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선열들처럼 몸 던져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 정신을 기리는 것이죠.
항구적 평화를 지키는 것이 바로 기념관의 존재 이유라고 하셨는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전쟁기념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당시에도 예상했던 게 이곳은 문화 시설이라는 것이었어요. 당시 전쟁에 대해 전시할 게 뭐 있냐며 비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문화 시설은 일단 넉넉하게 잡아놓고, 나중에 국제 정세가 변하면 여러 가지 비밀문서나 공개될 자료가 많을 거라고 봤어요. 지금 안목으로 어떻게 20~30년을 예단하나 생각해서 규모나 예산을 줄이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열주를 둔 회랑과 중심부 좌우 대칭이 큰 특징입니다. 회랑과 수공간 그리고 좌우 대칭의 엄격함을 지키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힘이죠. 많은 거룩한 희생이 있었고 엄숙한 생명을 바쳐서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장소에 그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외 공간은 느슨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지엄함 앞에서는 우리가 옷깃을 여밀 수 있어야 하지, 껌 씹고 슬리퍼 끌고 반바지 입고 오는 곳은 아니라는 약간의 부담을 주려는 게 있었어요. 관람이 끝나고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요.
박물관에 이르는 진입 동선에서 전통건축의 과정적 공간을 염두에 두기도 했는데요.
은연중에 프로젝트에 전통적인 게 깔려 있어요. 박물관 같은 걸 설계할 때, 어떤 확신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성격 자체가 일상의 연장이 아니거든요.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산다면, 방풍실 지나서 바로 물건이 앞에 전시돼 있어도 일상의 연장이기 때문에 금방 대화가 가능해요.
그런데, 기념관에 녹슨 철모가 있으면 그걸 단순히 고철로 보이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 세월과 전쟁, 희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관람이 되는 거예요. 기념관은 관찰이 아니라,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일상의 연장이 아니잖아요. 전쟁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마음의 준비 없이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입하는 과정에 텅 빈 공간을 만들어서 서울에 없는 풍경을 주는 거예요. 텅 비었을 때 사람이 받는 정서적 충격 혹은 낯섦을 주어서 마음을 흔든 다음에 비일상적 영역으로 가는 거죠. 마음의 준비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1989년에 전쟁기념관 이후 2001년 양구전투기념관을 설계하셨어요. 시간 차가 있는 두 프로젝트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다르셨나요?
전쟁기념관의 경우 군사 문화, 군사 잔재라고 했지만,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월 지나면 오히려 다른 각도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개관 전에 전쟁기념관을 박물관으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문의가 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이라면 이 땅에 이런 식으로 안 짓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너무 불편하고 멀잖아요. 추모를 위한 공간을 거친 다음에는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개념이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녹슨 철모를 볼 수 있도록 동선을 길게 잡은 거죠.
양구는 지자체에서 조성한 기념관이라 지명도도 다르고 규모도 달라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땅이 120평이라는 거예요. 누가 이 평화로운 장소에 고지전을 일으켰는지, 왜 자기 몸을 던져서 죽어야 하는지 명분이 없는 곳이잖아요. 이 땅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데서 죽는 게 너무 허망하죠. 그런데 그 전쟁이 없었다면 이게 북한에 있을 땅이에요. 기념관에서 이런 내력을 이야기 안 하면 누가 알겠느냐는 거죠. 더구나 양구전투기념관은 전쟁의 현장이자 죽음의 현장이었어요. 그 현장과 연관 짓는 게 중요했어요. 훨씬 더 밀도 있게 주변 지리에 관계되어서 디자인되었어요. 고지가 다 보이도록 한다거나 그 고지 위로 죽은 자의 이름이 유리에 뜨도록 한 것이나, 지형학적으로 친밀하게 짜인 거예요.
전쟁기념관은 그렇지 않아요. 실은 양구보다는 장소적 의미가 약하지요. 그때 거대주의라는 말이 있었어요. 짓기만 하면 저렇게 크게 만든다고요. 다리도 성수교 하면 될 일을 성수대교 하죠. 그 연장선에서 전쟁기념관 건물이 너무 규모가 크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전쟁기념관은 6.25 전쟁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 대한민국에 있었던 강토 수호 전쟁을 다 망라한 거니까요.
건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하셨는데, 흥미롭게도 기념관과 종교적인 공간을 많이 하셨어요. 상징과 기념을 담아내는 방식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념,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라 합리성이 약간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합리적으로 접근했을 뿐이에요. 되도록 은유적인(metaphoric) 방법으로 건물을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양구전투기념관 설계할 때 철모를 이야기하고 형상을 그린 것은 일종의 유추적인 방법이에요. 철모로 표현하는 순간 많은 가능성이 거기에 국한돼 버리잖아요. 주관적인 것으로 전체의 형상이나 예산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기념관의 속성은 일상에서 비일상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사이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 속을 거치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움 되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거리감을 주기 위해서 수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거죠. 물을 쓰면 거리감이 생겨서 공간의 확장 개념을 저절로 얻을 수 있고요. 또 물이라는 게 아주 섬세해서 바람 불면 사르르 반사되면서 민감한 미디어잖아요. 그래서 간간이 즐겨 써요.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에서도 불교의 사상이나 탄허 스님의 사상을 잘 담아내고자 하셨는데요. 박물관에서 고민하셨던 부분이 궁금합니다.
그린벨트 내에서 이미 허가를 받은 설계안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보고 아쉬운 것을 이야기했더니 설계를 바꿔 달라고 의뢰가 들어왔어요. 북향 진입이라는 단점 외에는 불교 사찰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처음부터 공간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공간을 시차적으로 전용해서 빌려오는 것으로 풀어내고자 했어요. 자동 개폐되는 문을 펼쳐서 가변적으로 넓게 쓰기도 하고 줄여서 따로 쓰는 걸 전제했어요.
또 일반 사찰에서 선형으로 길게 뻗은 동선을 입체적으로 담았어요. 공간을 선형적으로 배열해서 의미 있게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집의 안방은 가장 안쪽에 있지만, 사실 뒤쪽 담에서는 가장 가깝잖아요. 이런 역설적인 장치가 재미있어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법당은 들어가자마자 밖에서 보이지만 접근은 안 되도록 했어요. 중립적인 공간에 불교 사찰의 상징적인 의미를 압축해서 공포와 단청을 넣고 의미를 부여했어요.
데이콤 사옥이나 강남 사옥처럼 소장님이 설계한 오피스 빌딩은 안정된 비례와 치수를 보여줍니다. 고전적인 질서를 볼 수 있는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는지요?
치수(dimension)는 기본이에요. 요즘에는 치수개념이 없죠. 저는 오래전 공간론으로 바닥까지 뼈저리게 훑은 입장이고,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그걸 가르쳐요. 김종성 씨나 김태수 씨, 우규승 씨 같은 분들의 건물은 그런 원칙이 다 녹아 들어가 있어요. 요즘은 그런 게 없죠. 그냥 시원하고 큰 게 좋다는 식이어서 스케일이 크고 시원한 건 있는데 안정감은 많이 약화되어요.
거여 3단지 아파트부터 수입777, 반포 577, 최근에 홍지36까지 주택 프로젝트도 많이 하셨습니다. 삶을 담는 주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주택은 한 개인이 24시간 함께 할 동반자를 찾는 것과 같아요. 미팅 파트너를 정하는 것과는 다르죠. 여러 덕목을 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맞는 자질을 갖춰야 하니 주택을 근생 건물이나 상점처럼 칼같이 디자인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택 할 때도 외부 재료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요. 몰라서가 아니에요. 그러면 집에 만만한 게 없고 좀 징그럽지. 너무 미적인(aesthetic) 것만 찾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일부러 투박함을 적당히 그사이에 끼우고 구분되는 정도로 해요. 의도적으로 한 것이지 그 디테일이 비싸서 안하는 건 아니에요.
섬세한 디테일이 삶을 더 긴장하게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한울건축 출신들이 한국 건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울건축에서 지향했던 원칙 혹은 강조하셨던 태도는 무엇이었나요?
한 번 지어지면 영원히 고치기 힘들고 남는다. 설계를 옳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미팅 날짜도 사정해서 미루기도 했어요. 그래야 매듭을 잘 지을 수 있어요. 스케줄은 사람이 만드는 건데, 건축주가 좋은 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시간 가지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거죠. 돈은 그다음 문제였어요. 운영에는 좀 좋지 않지요. 또 직원들이 밤새우면서 고생하는 상황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니까 날짜를 조금 연기해 달라고 하는 거죠.
또, 일할 때는 디테일이나 큰 개념 잡는 건 똑같다고 해요. 디테일은 사소한(trivial) 게 아니고, 전체의 역할을 다 이야기해 주는 거라는 거죠. 범죄에서 살인 장면이 안 보이더라도 실오라기 같은 증거(clue)를 가지고 우리가 전체를 짐작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디테일이 작은 게 아니고 그것을 네가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해요. 또 중요한 건 유도 심문 하듯이 하나에서 열까지 자꾸 질문을 던져서 깨닫게 하는 것. 그러면서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건축가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로 무엇을 꼽으시나요?
너무나 당연한 건데 경험해 본 바로는 건축주의 존재예요. 우리는 전문성을 가지고 관념, 습관이 된 부분이 있지만, 건축주는 돈이 들어가니 절박해요. 또 주방 같은 곳을 설계할 때 건축주는 본인이 사용하기 때문에 명확해요. 본인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서 행동(behavior)이라는 걸 다 생각해본다고요. 건축가는 설계할 때 시간 개념이 없어요.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레이아웃이나 동선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정작 사용하는 사람들은 달라요. 공간을 사용하는 데 굉장히 구체적이고 시간 개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서 많이 깨닫고 배워요.
직원한테도 사용자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은 집 짓는 것에 꿈도 있고 모든 재산을 투자하기 때문에 아주 구체적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고요. 우리는 그냥 공간에서만 머물고, 그 시퀀스 안에 들어가지 못해요. 그 부분이 중요해요.
40년이 넘게 건축을 해오셨는데, 건축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건축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의 스펙트럼은 넓은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하고 싶어요. 건축은 순수 예술과 달라요. 순수 예술은 장소나 주변 관계에서는 벗어나 있어서 면죄부를 받는 반면에, 우리는 건물을 어느 영역, 시간에 짓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값을 내요. 작업의 성격으로 보면 순수 예술과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장르적 속성상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 놓이는 관계에서 판정되는 거죠. 건축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요. 그 이후에도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문제, 책임 의식이 따르죠. 그래서 우리가 사명 의식을 갖고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