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기념/전쟁기념관
전쟁을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전쟁의 상대적 개념인 평화와 관련된 도덕적 가치의 관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전쟁은 평화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가 평화를 위하려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만일 그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먼저 알고 이해하라.” 등 전쟁의 리얼리티를 알리고 전쟁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전쟁을 절대 잊지 않는 민족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곳이 바로 전쟁기념관이다.
이곳 전쟁기념관에서의 전쟁이란 인류사에 나타나는 포괄적 의미의 전쟁이 아닌 이 땅, 이 나라, 이 민족이 치러 왔던 전쟁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사 이래 근대까지의 강토 수호 성격의 호국 전쟁들과 한국전쟁 그리고 월남전쟁을 현재까지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성격이 상이한 적어도 세 가지 유형 이상의 전쟁을 하나의 포괄적인 “우리가 치른 전쟁”으로 개념화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국회 의결을 거쳐 1988년 12월 31일 자로 제정 공포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설립된 전쟁기념사업회의 그 설립목적을 보면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의 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이바지하는 데 둔다.”라고 하였다. 추진사업의 일환으로 전쟁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으며 건립의의 밑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호국 안보 의식의 고취와 도장화, 둘째, 전쟁박물관 및 전쟁자료의 센터화, 셋째 사실 그대로의 객관적 전시라고 하였다. 이는 본 전쟁기념관이 기념관의 기능과 박물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명칭은 전쟁기념관이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곳은 ‘00전쟁추모기념관 + 전사박물관’인 셈이다.
6공 초 착수되었던 전쟁기념관이 문민 시대의 시작과 함께 완성, 개관되면서 그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한때 있었다. 일부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 사용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보통 기념이란 말은 “어떤 뜻깊은 일에 대하여 잊지 않고 기억하며 회상한다.”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원가 크게 기쁘고 좋은 것을 잊지 않고 오래 기린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뜻이라면 고통스럽고 싫은 것의 대명사인 전쟁이란 말과는 서로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을 왜 기념하는가?”라든가, “전쟁은 그 자체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는 나아가 “일천억이라는 돈을 들여 치욕의 동족상잔과 떳떳지 못한 베트남전쟁을 기념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강변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기념의 의미는 그것이 만약 치욕적이고 떳떳지 못한 전쟁일수록 두 번 다시 이 땅에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전쟁 기념이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보다 적절한 작명을 위한 논란은 사업 초기부터 있었고 그 당시 최종확정을 위해 시민회관에서 공청회까지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기억하며(REMEMBER)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함(LEST WE FORGET)이라는 건립목적에 부합되는 의미를 지닌 적합한 용어를 달리 찾아내지 못하고 전쟁기념관으로 그 당시 잠정 확정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전체배치/ 진입축
근세까지 유서 깊은 군사 주둔지였고 구 육군본부 자리이기도 한 이곳 부지는 3면이 용산 공원의 넓은 녹지 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부지 서편은 조만간 재개발될 지역으로 남측 전면도로와 함께 도심의 일상성과 과밀함이 만나는 곳이 된다. 본 부지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영역- 일상 영역과 상징영역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상징영역은 본 기념관의 주요시설부로 부지의 중앙에 놓이며 일상 영역은 녹지휴식공간으로서 옥외전시장과 부대시설 및 주차장을 포함하는 녹지공원, 그리고 두 곳을 구분시키는 수공간으로 구성된다. 상징영역은 다시 추모 기능 위주인 전면의 기념관과 전시기능 위주인 후면의 박물관으로 나뉜다. 기념관은 호국추모관을 정점으로 원형광장에서 시작하는 중심축 상의 과정적 공간들로 구성된다. 전쟁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장소로서 더욱 경건하고 상징적이며 추모적인 분위기를 갖고 비일상적 체험을 하도록 구성된다. 박물관의 후면에서 동측와 서측에 각각 독립적인 아트리움을 가지는 두 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며 그 사이로 호국추모관에 이르는 상징축이 관입 되게 된다. 전쟁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돕기 위한 장소로서, 더욱 일상적인 분위기를 갖고, 관람의 효율을 우선으로 하는 기능적 공간으로서 편의성, 친밀감, 리듬감이 중요시되는 곳이다.
원형광장은 전면 차로로부터 2.4m 높게 하여 가로로부터 접근할 때 그 극적인 의외성을 더 하려 하였고, 다시 주 건물의 2층에 있는 중앙홀까지는 자연스럽게 6m 더 높게 함으로써 감정의 고조와 함께 공간적 수직 이동에 따라 관람자의 감정도 이에 비례하여 고조시키려 했다. 이 방법은 또한 전시관이 3개 층에 걸쳐 있게 되는 동선상의 불합리한 점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게 한다. 즉, 주 진입 층이 2층에 놓이게 함으로써 선택 동선 시 1개 층씩만 상하로 이동하게 되면 전 층이 접근된다는 이점을 갖는다.
좌우 전시관의 중앙 아트리움은 각 전시실의 중심을 이루면서 지속적인 방향감을 줌은 물론, 전시실 간 이동 시 밝음과 어두움, 과거와 현재 간의 끊임없는 이동에 리듬감을 줄 뿐만 아니라 긴 전시 동선에 따르는 관람자의 피로감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도록 배려되었다.
공간구성 기법으로는 가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대지의 북단부에 호국관을 두고 일련의 공간들을 중심축 선상에 놓고 중심부로 접근함에 따라 공간의 밀도를 점층적으로 고조시키고 지면의 레벨도 이에 따라 고조시키도록 하여, 가장 안측이자 의미의 중심부인 호국관에서는 관람자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도록 하였다.
과정적 공간
전쟁기념관의 직능적 존재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희구하는 항구적 평화에 있으며 그것은 전쟁의 우선적 이해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의미작용은 하드웨어인 건물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인 전시물을 통해 이루어지기 진다. 전시를 통한 의미전달은 전시물과 관찰자 간의 대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지금은 전쟁 시와는 다른 평화시이며 삶과 일상의 영역에 속해 있다. 반면 이곳에 전시되는 내용은 전쟁, 죽음, 기념, 비일상, 과거의 영역에 속하기에 상이한 두 영역 간의 급작스러운 이동에는 이들을 조절하고 준비시켜줄 공간적, 시간적 짬이 필요하게 된다.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요소로서 과정적 공간이 도입되었다.
전통 가람 배치 등에 나타나는 과정적 공간 -하마비/일주문/천왕문/불이문/누하진입/대웅전에 이르는 일종의 선형적 경험에서처럼 여기서도 그 역할이 비슷하다. 가령 우리가 대웅전을 진입하는데 도심 한가운데 느닷없이 대웅전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와 이러한 과정적 공간을 거치면서 만나게 되는 대웅전에서의 불가의 만남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상의 생활권에서 기념관 같은 비일상적 영역 간 이동에서는 이러한 과정적 공간의 도입이 보편적 기법이기도 하다.
반면 이곳 용산 전쟁기념관은 이 같은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선형 상의 과정적 공간을 도입하지 못하고, 면형 상의 광장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 광장에서는 통상 선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감성적 효과를 면형으로 압축하여 정서적 충격을 줄 필요가 있었다. 이곳 서울이라는 도심의 성격과는 사뭇 대비되는 경관 연출이 도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곳은 그 주변과는 느닷없이 다른, 넓고 광활한, 나무 한 그루, 벤치 하나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원형광장/회랑
건물 전면의 원형광장은, 외부로부터 호국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적 공간 중 첫 번째의 공간으로서 중심축 구성상 가장 의미 있는 곳이 된다. 통상 과정적 공간의 선형적 형태가 이곳에서는 면형의 광장 형태로 압축, 단순화되어 나타나게 하였다. 전통 가람 배치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선형적 공간이 일상적 영역에서 비일상적 영역으로의 전이를 수월하게 한다면 이곳 도심 속의 기념관이 일상을 벗어나 비일상적 영역인 이곳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어떤 유의 정서적 충격을 얻고자 하였다.
전사자명비가 안치된 좌우 회랑으로 위요된, 텅 빈, 어쩌면 황량한 공터 같은 이 공간은 그 비워진 의미를 나름대로 되새겨 볼 수 있는 여백 같은 곳이다. 도심 속에서 예기치 않은 밀도로써 나타난 광활한 스케일의 이 비워진 곳은, 단순화된 사면의 잔디 면과 함께 그늘보다는 그림자를 담는 곳이다. 좌우 회랑의 그림자가 단순화된 이 광장에 길게 드리워질 때, 그 기념성은 더욱 고조되게 되어 비워질수록 공간감의 효력은 증대되는 곳이다. 광장 중앙에서 박석으로 포장된 이 영역은 넓은 광장 가운데서도 공간의 위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주변보다 약간 솟아 있으며, 거칠고 질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소위 예기에서 말하는바 지극히 공경스러운 것에서 문양을 두지 않는다는 지경무문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원형광장의 안쪽과 바깥쪽을 규정하는 좌우의 경계 선상에 회랑이 놓이며 이곳에는 15만 명에 달하는 창군 이래의 국내 전사자들과 수많은 유엔참전국들의 전사자들의 명비가 안치된 숙연한 곳이다. 동서 대지 방향의 진입 동선을 자연스레 주입구로 연결하고, 텅 빈 광장과 주변의 옥외전시와 남산 그리고 일상적 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시각적 산책로의 역할을 한다. 대비되는 두 경관이 좌우에 펼쳐지면서 깊이감이 강조되는 회랑선상의 이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태양광선의 유희로 무한히 다양한 표정을 얻는다. 기둥과 명비가 이루는 그림자는 공허부의 빛과 함께 교차하면서 죽음과 삶, 성스러움과 속스러움, 과거와 현재를 지금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묵시적으로 반복시킨다. 만약 원형광장이 한적한 도시 외곽의 허허로운 자연 속에 위치한다면 이 회랑의 도움 없이 비석의 열주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여기에서 회랑은 입지상의 여건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부침하는 주변의 일상적 실루엣을 지우기 위해 차단을 목적으로 선택한 건축적 요소이며, 이 장소를 이차원적으로 구획 한정하면서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담이나 궁궐의 회랑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수공간은, 전면의 원형광장과 그 주변의 녹지를 시각적, 의미상으로 구분시키고 해자로서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요소는 옥외공간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상 당선안 확정 당시 일부 심사위원으로부터 수공간 삭제를 조건으로 당선에 동의한 바 있기도 하였다. 이 정도 규모의 수공간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애초의 우려와는 달리 얻게 되는 효과에 비해 관리상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입장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건축주로부터 수질 개선방안까지 자체 개발되어 이곳의 명물이 되는 데 커다란 이바지하고 있다.
하나의 원치 않는 이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다. 우리 몸은 이 이물질과 함께 세월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 언젠가는 우리 몸의 일부가 될 것이고, 먼 날 하나로, 구분 없는 일체가 될 것이다. 하나의 건물이 세워진다고 함은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우리 삶 속에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곳은 우리 스스로가 애착과 관심을 두고 만들어 나아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글, 사진_이성관
*이 글은 전쟁기념관 10주년을 맞아 쓴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건축주 전쟁기념관장
용도 문화 및 집회시설
위치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1가
규모 지하 2층, 지상 4층
건축면적 18,835.90m2
연면적 184,130.90m2
구조 철근콘크리트
준공년도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