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Interview

오픈하우스서울이 올해부터 시작하는 <W Interview>는 건축, 조경, 도시 분야의 여성 전문가를 만난다. 한국의 현대 건축, 도시, 조경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오늘을 만들어가는 여성, 전문가를 위한 기록이다. 

전문가의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간혹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분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이 분류가 호출되는 이유는 기울어진 판에 대한 자각과 남성 중심의 서사가 놓치고 있는 전문 분야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이자 필요에 가깝다. 젊은 여성 건축인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는 중견 건축인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무엇보다 여성 건축인에 대한 기록과 작업에 대한 조망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성 건축가의 존재를 수면 위에 띄우고 재조명하면서 또 하나의 관점과 서사를 쌓아가는 이 과정은 한국 건축에 다른 시각의 타래를 더하고 한국 현대 건축 서사의 깊이와 켜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터뷰는 2009년 월간 <공간>과 네이버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편에 소개된 12명의 건축가 인터뷰를 연장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전문가로서 여성 건축가, 도시, 조경가를 주목하고 그 작업 세계를 만나는 자리로 마련된다. <W Interview>라는 이름은 이미 전시, 연구, 출판을 통해 디자인계의 ‘끊임없이 갱신되는 열린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를 선언한 <W 쇼>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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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한국에 오신 지 2년이 되어간다.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2003년과 2004년에 처음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4년 후인 2017년에 다시 왔을 때 변화한 서울의 모습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여러 고궁이 복원되고 녹지가 조성되어 수많은 매력적인 공간들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주한 영국대사로 부임하기 전, 2017년 하반기에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때 여러 장소를 방문하여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한 곳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사관 옆에 있는 덕수궁은 산책하기 매우 좋다. 생각에 잠겨야 할 때 종종 덕수궁을 걷곤 한다. 가끔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겨가서 덕수궁을 스케치하기도 한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청계천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자주 간다. 각 박물관의 특별전도 다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오기 전 옛 서울의 모습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돈의문박물관마을도 찾아가기 좋은 장소다. 광장시장과 같은 서울의 전통 시장도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동대문 시장의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의 종류는 갈 때마다 매번 놀랍다. 야구팬이기 때문에 잠실 야구경기장 또한 내 리스트의 상위 10위에 항상 포함돼 있다. 이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경험은 바로 인왕산 등산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의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그의 삶과 시를 감상하는 것 또한 매우 감명 깊었던 경험 중 하나다.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위치한 서울시 중구 정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과거 한국에서 영국대사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사관도 영국대사관이 유일하다. 정동이라는 장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의 수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중구 정동에서 살며, 또 일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다. 그 시대에 건축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대부분은 현재 박물관 또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여 영국의 선대 외교관들이 130여 년 전 사용했던 건물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정동에는 영국문화원도 있다. 한국 최초의 현대 교육 기관 중 한 곳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위치한 이곳에서 영국문화원은 다양한 연령층에 영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사관저가 1890년에 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이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흘렀고, 보기 드물게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건축, 디자인 강국으로 유명한 영국인데, 혹시 새로운 건축 디자인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영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자국의 디자인 및 건축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와 전통 또한 존중한다. 선대 외교관들이 한영 관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건물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우리의 파트너들을 환영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종종 서울시청 서소문 건물 13층에 올라 정동의 전경을 눈에 담는다.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 사이에 영국 관저가 자리한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건물을 현대식 건축물로 바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한국에 부임한 후부터 계속 살고 계실 텐데, 대사님과 가족들은 어느 공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불편함과 좋은 점은 무엇인지, 1890년에 지어진 건물에 산다는 것에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관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1층의 테라스와 2층의 발코니이다. 두 곳 모두 관저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이며, 2층 발코니에서는 남산도 조금 보인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욱 사랑받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테라스와 발코니는 복잡한 도시 속 휴식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다. 관저 인테리어는 현대 생활방식을 따라가기 위해 여러 차례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19세기 건축 양식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Interview “대사관은 일종의 무대이자 만남의 장소”, 리누스 폰 카스텔무르 주한 스위스 대사 한국에 오신 지 3년이 되어 가는데,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또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하다. 주한 스위스 대사로 정식 근무하기 전, 서울에 익숙해지고 또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짧게 머물다 간 적이 있다. 나에게 서울은 동북아시아가 아닌 매우 새로운 아시아였다. 서울은 흥미로운 도시라 좋아하는 장소를 꼽자면 매우 많다. 우리는 서울 안에서도 중심지에 살고 있어서 이 일대를 산책하듯 걸어 다니는 것을 즐긴다. 도시에서의 특권이자 가장 호사스러운 행위는 바로 시내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 같다. 나무와 빌딩 등 온갖 것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난 경험이다. 얼마 남아있지 않아 아쉽지만, 한국의 전통 건축도 좋아한다. 예를 들어 도시 안에 있는 종묘를 정말 좋아한다. 그 외에 인근의 작은 장소들도 좋아한다. 만약 사람들과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알고자 하고,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인상을 얻고자 한다면, 시내를 걸으며 관찰하는 것이 좋다. 비록 서울은 유럽의 소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도시지만, 도시산책자이면서 도시관찰자로서 서울 생활에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지난 5월 스위스대사관이 정식 개관했다. 초기에 신축이냐 이전이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 부지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새 건물을 짓게 된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항상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옵션도 있고 제약들도 있다. 당시 명백한 사실은 전임자들이 보기에 기존 대사관 건물이 너무 작고, 낡았으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만약 부지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건물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복원할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철거하고 새로운 대사관 건물을 지을 것인가? 더 나아가 이 부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대사관 부지의 경제적 가치가 높으니 그냥 땅을 팔고 심플하게 도심의 고층 오피스 건물 공간을 임대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거주지를 매입할 것인가? 그것들은 고민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결국, 기존 대사관 건물은 지속할 수 없고, 우리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양국 관계의 밀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고, 한국도 G20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점차 중요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한국은 스위스의 중요한 경제, 문화, 과학기술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한국 내 스위스의 존재를 업그레이드하고, 좀 더 강화하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축물에 투자하게 되었다. 또 스위스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대사관이 이 자리에 둥지를 튼 지 40년이 넘었고, 그동안 스위스는 한국과 우호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구축해왔을 뿐 아니라 좋은 파트너 관계도 형성해왔는데 왜 굳이 장소를 옮겨야 하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웃 환경이 그때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외부환경은 개발로 인해 바뀌고 있는데? 우리도 역시 변화할 거야.’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합의점은 부지를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건물을 짓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타워를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대사관은 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때마침 우리는 기존 건물의 디자인이 건축물로서 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소는 그대로 가져가되 건물을 바꾸자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국제현상공모를 시작했다. 스위스대사관 건물을 국제공모를 통해 짓는다. 모스크바도 그랬고, 베이징도 곧 그럴 것이다. 스위스는 물론이고, 유럽 국가, 아프리카, 미국, 아시아 건축가들이 참여해 경쟁한다. 서울 프로젝트의 경우 70명이 넘는 건축가들이 참여했었다. 스위스대사관의 주변은 급변하는 서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결과적으로 스위스대사관이 돈의문 일대 땅의 흔적을 기억하는 곳이 된 셈이다. 대사관과 변화된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일종의 대화, 과거와의 다이얼로그’라고 생각한다. 지금 건물은 모던한 빌딩이지만 과거의 일부를 여전히 반영하고 있다. 최종 당선작의 제목은 “스위스 한옥”이었는데, 재미있는 부분은 스위스에는 한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마당이 있는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스위스 건물인 것이다. 내 생각에 건축가는 한국에 한국과 아무런 상관없는 단순한 스위스 건축물을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설계 초기부터 주변 환경과의 다이얼로그를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들은 한국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스위스적이지만 동시에 한국적이면서도 이곳 환경과 잘 어울리는 것을 원했다. 보다시피 스위스대사관은 전통 한옥이 아니다.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축물이다. 나는 이곳의 다이얼로그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주변의 다양한 요소들과 서로 대위(counterpoints)를 이룬다는 것이 흥미롭다. 30-40년 전에는 이곳에 거의 비슷한 모양의 한옥 건물들만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모두가 변해가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있기도 하고 우리도 변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지를 경제적 논리로 접근할 생각이 없었고, 우리에게 충분할 정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의 가장 큰 호사는 주변에 고층빌딩이 없어서 머리 위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대적으로 변해야 했고, 다른 형태와 규모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획일적인 것은 싫었다. 결국, 우리의 새로운 시도가 언덕진 이곳의 지형이라든가 주변 개별 건물들, 도시를 향해 열려 있는 건물 배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작은 주변 동네 등등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치 바흐의 다성(polyphonic)이나 대위법(counterpoint) 같은 것이다. 즉 동일한 한 가지만 있는 것보다 다양한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고 건축물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당, 처마 등 한옥의 구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당선작이 인상적이다. 처음 당선안을 보셨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처음 건축물 모형을 봤을 때, 말굽 모양의 낮은 건축물이 아름다운 마당을 껴안고 있는 듯한 매우 보기 좋은 형상이었다. 일단 유기적인 형태가 마음에 들었고, 건축물이 가장 낮은 지점에서 상승하기 시작해 마치 위쪽을 동경하듯 천천히 상승하면서 높은 지점에서 끝나는 개념 또한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인터뷰 하고 있는 3층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과시적이지 않고 아주 미묘하게 가라앉은 매우 겸손한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재료 또한 마찬가지다. 콘크리트, 목재, 유리 등과 같은 건축 재료들도 겸손한 재료들이다. 결코, 화려한 재료가 아니다. 이 건축물의 화려한 점은 바로 전혀 화려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지점이다. 또한, 지난해 2월 이곳에 입주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곳이 매우 실용적이라는 점도 발견했다. 건축물의 기능성이 매우 뛰어났다. 앞마당도 공식 오픈 전에 다양하게 테스트해 봤는데, 정말 활용도가 높았다. 앞마당이 건물의 서로 다른 영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도 이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스위스 기업, 한국 대학 등등 정말 다양한 분야와의 다양한 배치 및 구성으로 많은 행사를 했는데, 매번 모두 다 잘 어울렸다. 정말 다기능적이며 효율적인 건축물이다. 이런 것이 매우 흡족했다. 대사관이 대상 국가의 지역성을 반영하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이 대사관은 스위스대사관인지만, 우리는 지금 서울에 있다. 그래서 주한 스위스대사관으로 스위스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서로 대화하는 건축물을 갖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자, 나를 타인에게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스위스 집을 짓지만, 그 집은 서울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을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주재하는 나라에 대한 일종의 존중의 표시라고 생각하며 주재국의 문화와 건축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사관에서 직접 생활하고 사용해보셨을 텐데, 가장 좋아하는 장소 혹은 풍경은 어디인가? 아주 많다. 그렇지만 이야기했듯이 나는 마당을 정말 좋아한다. 건물 안에 앉아 있으면 밖이 보이는 투명성도 좋아한다. 완전하게 노출된 것이 아니라, 보호받는 느낌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좋다. 또 벽 상층부가 트여 있어서 사무실이 부분적으로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좋다. ‘아 저기 불빛이 있네, 저기 누가 있구나’라고 알아채게 된다. 나는 팀원들을 상사로서 체크하고 통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는데, 이곳에선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우리 가족이 사는 대사관저 층도 좋아하는데, 다만 처음에 업무 공간과 우리 가족의 주거 공간이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적이 있었다. 어떤 경우는 그 가까움이 실이 되는 경우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지금 와서 보니 출퇴근 교통체증을 겪지 않아도 되니 좋다. 또한, 직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안심되면서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대사관과 대사관저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도시 안의 또 다른 영토이다. 어쩌면 도시 안의 섬일 수도 있을 텐데, 외교 공간이 도시와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에서 외교 공간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듣고 싶다. 나는 대사관이 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대(stage)라고 생각한다. 만남의 장소라고나 할까.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스위스인들과 한국인들이 만나는 곳, 그래서 서로 소통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스위스는 진지하고, 정중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는 한국과 친구가 되고 싶고, 또한 교류를 증가시키고 싶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등 다분야에 걸쳐 말이다. 물론 대사관이 한국의 도시 안 스위스 영토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어떤 의미에서는 열린 집, 다양한 교류를 위해 개방된 오픈하우스로 사용하고 싶다. 지금의 외교란 주재국에서 나의 관심사와 위치를 표현하고 최대한 효과 / 활동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사관도 사람들이 오가며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다. 이제 더는 대사관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닫힌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대사관이 비밀 정보를 다루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업무의 80% 정도는 공개 정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최대한 다가가고 싶고 그것이 대사관이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려있어야 하며,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무대이자 만남의 장소다. 개관식 때 인사말 중에서 “스위스대사관은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보루도 아니거니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피난처도 아니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보호되어야 할 공간이면서 또 교류를 위한 외교 공간의 성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다. 앞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듯, 스위스는 현대 국가며, 동시대 국가다. 물론 전통과 과거를 이어가면서 말이다.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동시대적이며 현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줄 건물을 원하지도 않는다. 물론 스위스는 19세기 하이디의 무대이긴 했지만 현재를 살아가고있으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존중받고, 책임감 있는 구성원으로서 한국과 함께 친구로서 쌍방향으로 역할 하고자 한다. 그것이 매우 기능적인 접근을 한 이유다.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또 다른 가치는 겸손함과 진정성이다. 스위스는 과시적인 국가가 아니며, 참된 가치를 지향한다. 보통의 재료들로 매우 정제된 미묘한 건축을 만들었고, 이것이 좋은 명함과 같다고 생각한다. 건축이 흥미롭다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다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고, 우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고 상호 협력과 활동을 위해 열린 대사관이고자 한다. 이번 행사는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열렸다. 외교에 대한 중요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시점에, 문화 외교 또한 중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공공의 영역에서 문화 교류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화란 다가가야 하며 서로 나누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생겨 일부러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처음은 다른 사람의 전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두렵지만, 알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서로 평행 하는 지점들이 보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과 스위스는 비록 문화적으로 매우 다르고, 지리학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예(craftsmanship) 같은 것은 한국인들에게도 스위스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전통을 매우 존중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엮는다. 크기로 따진다면 서울이 월등히 크고, 인구수도 스위스 전체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역사, 문화 등 극명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점들은 또 비슷하다. 그래서 스위스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자 이해당사자로서 공동의 입장을 구축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한국에선 한국의 친구들과 또 다른 나라에선 각 국가의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서로 배울 것들이 많다. 도시 경영, 어바니즘, 도시계획 등등 서로 다 다르지만, 그 다름에서 교차를 통해 새롭게 알고 배울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행복한 도시다. 안전하고, 기능적이며, 매력 있는 도시를. 그래서 서로 배울 것들을 배우며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번 오픈하우스를 통해 스위스대사관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험하기 위한 팁을 준다면 어떤 게 있을까? 앞서 건축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이드 투어를 4회 여는 동안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다이얼로그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또한, 앞으로 더 많은 스위스 건축가와 한국 건축가의 교류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두 나라 간 전문적인 네트워크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새 대사관 개관의 해를 축하하고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연말에는 파티를 계획 중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스위스 사이 민간, 전문, 기업 등을 비롯해 공식, 비공식 등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교류할 예정이다. 진행 OHS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② 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
Interview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 낸 삶의 형식”, 건축가 김승회 오픈하우스서울 2018의 미니 인터뷰 두 번째는 서울시 교육청 건축 자문을 통해 ‘꿈을 담은 교실’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건축가 김승회(서울대학교 교수)를 만났습니다. 공공 영역에서 기여한 건축 프로젝트, 또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 지, 또 건축의 근본적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보건소를 비롯해 공공 영역에서 여러 의료시설을 설계하셨는데, 최근 아프리카의 병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특히 의미가 깊을 듯해요. 공공의료시설은 시민의 건강과 행복에 가장 깊이 연관된 시설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학교와 더불어서요. 과거에 보건소, 의료시설을 하면서 공공보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그게 알려져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공공보건 병원 설계를 맡게 됐어요. 그곳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열악한 병원들의 사정을 직접 보면서 그들이 유지 관리 하고 스스로 가꿔나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직접 아프리카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의사나 병원장에게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어떤 병원장은 막 울어요.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안 했다면서요. 환자는 몰려오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인력도 없고, 해결해 나갈 방법이 너무 없어서 답답하니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의사선생님이 막 울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 분들이 좀 더 좋은 여건에서 환자를 볼 수 있고, 환자들도 동네 가까운 좋은 시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한 게 보람되죠. 그것이 90년대 제가 개업했을 때, 품었던 이상과도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간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건축은 삶의 형식이다(Architecture is life form)’라는 모토로 건축가의 삶을 살고 싶어요. 이것은 서양의 전통적인 ‘아키텍처’의 정의와는 상당히 다르거든요. 보통 아키텍처라고 하면 빌딩을 넘어선 이념을 갖고 있다고 정의하는데, ‘삶의 형식’이라고 하면 건축을 훨씬 더 바닥으로 끌어내린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든, 후암동이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식이 있잖아요. 그것이 고스란히 건축 안에 잘 작동하는 것(work), 그게 가장 기본이고 시작인 것 같아요. 또 건축가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빌딩 그 이상의 공간에 대한 야망도 있어요. 그 두 가지를 같이 이루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건축가로서 새로운 공간감, 새로운 물성에 대한 제안, 이런 것들이 삶의 형식(life form)과 부합이 되는 게 좋잖아요. 그 접점을 찾는 게 참 쉽지는 않아요. 늘 고민하면서 그 속에서 결과물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이전보다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 건축물을 감상할 때,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일반인에게 제공되는 건축 이야기들이 상당히 파편적인 경우가 많아요. 앞서 말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잖아요. 건축도 역시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건데, 매체를 보면 그 관계에 대한 담론보다는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주를 이루어요. TV나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가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오는 클라이언트들도 관계에 대한 얘기는 없고,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 그와 비슷한 느낌을 해달라고 해서 오히려 힘든 경우가 있어요. 건축을 보실 때, 시각적인 이미지 외에 집이 길과 어떻게 만날까, 이 공간에서는 밖의 어떤 것들이 보일까, 밖에서는 이 집이 어떻게 보일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 어떤 것을 느낄지, 촉각은 어떠한지 등 그런 풍부한 것들을 많이 느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건축에서 중요한 게 뭐냐라고 한다면 촉각인 것 같아요. 건물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어요. 직접 가면 촉각이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음식이 존재감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온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사진이나 TV로 사람들이 먹는 걸 봐도, 음식의 온도는 느끼지 못하잖아요. 건축에서는 그게 촉각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으로는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직접 가서 발바닥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촉각적 경험은 좋은 것 같아요. 그 이전에 건축은 관계의 예술이니까 왜, 어떤 관계가 이곳을 만들었는가를 보시면 좋겠어요.   서울시 교육청의 건축 자문을 통해 교육 시설 개선 프로젝트를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의미가 크셨을 것같아요 지난 2년 반 동안 열심히 해왔고 좋은 결과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도 많이 나오고 소개도 됐는데, 지난 달로 그 프로젝트가 끝나서 이제 정리를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성공적으로 된 것 같아서 오랜만에 공공의 일을 하면서 만족스럽게 끝난 것 같아요. 체계가 완전히 잡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공공 프로젝트는 공공기관에 건축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부터 어려움이 많은데요. 초반에 건축의 가치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은 부분일 것같습니다. 초반에는 힘들었죠. 교육청 관련 공무원들이 초반에는 저를 보고 ‘저 사람, 뭐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교육감 님이 건축에 대해서는 김승회 교수가 교육감이라고 생각하라며 힘을 실어 주셨어요. 한편으로는 교육청의 경우 시설 담당이 완전 비주류예요. 교육청은 교사가 중심이잖아요. 공무원들에게 이건 중요한 일이고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성과가 나오는 걸 보니까 다들 힘이 됐죠. 결과도 좋고 생각보다 잘 따라준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여러 일들은 생기겠지만, 짧은 기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변했어요. 여전히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크게 보면 변해가고 있고 대세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교육청 프로젝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역시 꿈을 담은 교실(꿈담교실)실이죠. 초등학교 교실인데 원래는 중학교 몇 개, 고등학교 몇 개 정도 고치자는 내용으로 입안되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만 하자고 했어요. 왜냐하면 초등학교 쪽 장학사들과 이야기 하다 보니, 유치원이라는 좋은 공간에 있다가 그보다 열악한 학교로 오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힘든 게 1학년 교실이었죠. 또 1, 2학년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실로 교육을 하기는 너무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든 예산을 거기에 몰았어요. 그건 잘 한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래프가 아래를 향하느냐, 위를 향하느냐인데, 어쨌든 더 나은 방향으로 전체적인 흐름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경영위치의 이 ‘소율’ 건축물을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명하셨는데요. 건축의 합리적인 시스템이 갖는 가치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건축이 개인의 특성을 분명히 닮는다고 생각해요. 건축가의 성격이나 취향이 암암리에 담길 수밖에 없거든요. 가치관도 그렇고요. 동시에 건축주의 입장도 담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언어나 윤리는 매우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언어나 글자가 필요한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요. 왜냐하면 우리 삶이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또 서로 공유하는 것도 많고 공통적인 게 참 많다고 생각해요. 건축은 특이성도 내세워야 하겠지만 동시에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기반으로 만들 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계할 때 보편적인 체계나 관점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요. 어떻게 빌딩이 합리적으로 도시와 관계를 맺는가를 주로 봐요. 예를 들어, 이곳 경영위치 건물의 경우 1층이 개방적이잖아요. 합리적인 이유예요. 1층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보이고 만나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주변과 적절한 높이를 가져야 하죠. 주변이랑 어울려야 하잖아요. 혼자 우뚝 있으면 주변에 그림자가 지고 불편해지겠죠. 할 수 있다면, 주변의 적정한 공간이나 건물의 크기들을 존중하는 걸로 가야해요. 공사를 할 때 10, 20년이 지나도 하자 없이 잘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도 합리적인 부분이죠.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건축물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갖는 관계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 또는 우리 도시가 갖는 특징이 있거든요. 골목이 있다든가, 필지가 불규칙하게 생겼다든가, 주변에 산이나 강이 있다든가, 이런 특성에도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이 갖는 관계를 찾아보는 거죠. 가령 산을 등진다든가 바라본다든가 또는 좁은 건물에 어울리게 건물의 스케일을 너무 크지 않게 좀 더 분절한다든가 등등 조금씩 하다보면 건축적인 언어들이 생성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 즉 1층은 열려야 하고, 주차가 돼야 하고, 지하층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많이 파야 하고, 위에서는 철저하게 도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면 지하부터 위로 올라가는 구조 체계가 다양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든가 하죠. 그 속에서 일반적으로 편한 해법을 찾는다든가, 어떤 때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도시, 어떤 때는 평면의 형식에 대한 것으로 발전해 나가죠. 그게 깊어지면, 어떤 디자인 이론(theory) 내지는 건축방법론이 되겠죠. 제 경우 ‘내가 좋아서 했다. 특이하게 형태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요. 물론 그게 어필하기는 쉬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심플하면 더 전달이 빠르고 간단하게 잘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제게는 의미도, 재미도 없어요. 감각 이상의 것, 즉 사람들은 삶의 형식을 찾는데, 그것은 수많은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형식이거든요. 건축도 결국 여러 형식들, 삶의 진실과 형식을 수정해 가면서 만들어지거든요. 솔직히 어려운 이야기죠.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는 건축가 사이에서도 논쟁적인 소재지만, 보건소, 병원을 많이 짓고, 또 학교 프로젝트도 많이 하면서 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OHS 진행 임진영   정리 이경희
Interview “모든 도시의 매력은 공존”, 건축가 켄민성진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미니 인터뷰를 통해 오픈하우스서울과 함께 하는 건축가를 만나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나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에 대한 이야기,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듣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SKM Architects 오픈스튜디오와 준오 아카데미 오픈하우스를 통해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납니다.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 Ananti Cove>가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컸고요. 아난티 코브에서 보여준 휴식 공간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어떤 공간 경험을 주고 싶으셨는지요.   <아난티 코브>는 하나의 호텔이나 리조트를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공장소를 제공하고자 했어요. 프라이빗한 콘도미니움도 있으면서 세미프라이빗한 힐튼호텔도 있고, 퍼블릭한 성격을 띠는 아난티 타운과 그 앞엔 공공 공원이 공존하고 있죠. 부산 시민은 주말에 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책도 보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이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도시에 새롭게 가볼 수 있는 장소를 하나 더 중첩한 거죠. 반면 호텔 투숙객 입장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즐길 수도 있고요. 호텔 리조트라는 기존의 프라이빗한 거대한 장소에 여러 성격의 공간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주요한 도전이었어요. 저는 모든 도시의 매력을 ‘공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이 중첩되고 켜가 계속 생기고 포개지는 것처럼, 아난티가 부산에 또 하나의 시간과 장소, 기억을 더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죠. 그 켜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고요. 저는 어떤 건물이든 그 지역에 켜를 하나 더한다는 생각으로 건축 설계를 하고 있어요.   아난티의 계단, 지하, 1, 2층의 숍의 경우, 기능적으로 끊임없이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근린생활의 모습을 반영하려 했어요. 5성급 호텔이지만 1층을 시민에게 열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거죠. 대부분 5성급 호텔들은 프라이빗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굉장히 열려 있고, 그런 면에서 다양한 쉼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쉼이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죠. 모든 건축가가 하는 노력인데 저평가받는 것 같아요. 건축가는 엄청난 혁신을 보여주기도 하고 공적인 작업도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건물을 더 낫게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고 생각해요.   소장님과 아난티 모두 휴식의 의미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신 거로 알고 있어요.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휴식은 무엇인가요.   휴식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쉼일 수도 있고, 집에서 온종일 누워 있는 것도 일탈이고 쉼이죠. 이제는 쉼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일탈과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많은 도시가 풍족하다고 생각해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곳, 걸을 수 있는 곳, 자전거 탈 수 있는 곳, 미술관 등 만약 오늘 하루 일을 안 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은 도시요. 사람들이 뉴욕 같은 도시를 가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의 욕구를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곳, <아난티 코브>에서 주요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한 부분이에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거죠.   아난티 부산의 경우, 서울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중요했어요. 많은 사람이 외국 나가서 관광을 즐기는데, 대부분 한국에는 왜 그런 멋진 곳이 없냐고 해요. 저희가 아난티와 계속 의미를 둔 것은 그 부분이었어요. 외국 가는 비행기 표 값으로 <아난티 코브>에서 3박 4일 즐기는 것이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외국인 관광객을 한국으로 유치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사계절 때문에 겨울에는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부산은 온천이 있고 여기에 쉼과 여행, 독서, 음악, 자전거, 바다 산책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은 항상 변하고 우리 삶은 진화하므로 쉼도 진화하죠. 선진국일수록 쉬는 방식도 다양해져요. 그런 고민을 건축주와 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장소란 과연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쉴 수 있는 장소는 다양성을 주는 장소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공간미가 회자되고 있는데,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장님이 좋아하는 공간도 궁금해요.   여러 장소가 있지만 몇 가지 건축적 시도가 있어요. 먼저 콘도 쪽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드롭 장소를 지하에 만들었어요. 힐튼호텔은 지상에 있고 지하에 콘도 드롭존을 만든다고 했을 때 다들 왜 콘도의 얼굴을 지하에 놓느냐고 했어요. 지하지만 멋지게 만들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지상 공간을 자동차가 점유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아난티 타운인데요. 보통 호텔은 지하에 아케이드 형식의 상점이 많잖아요. 그것들을 지상으로 꺼내서 작은 건물들로 만들고, 바다 풍경을 보게 해주면서 일반인에게 오픈했어요. 많은 분이 이런 방식의 상점은 장사가 안될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한번 해보자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한 거죠. 이제는 소비의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강제로 물건을 팔려고 해서 팔리는 게 아니라, 방문하고 싶은 곳을 만들고 선택권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즐길 수 있고 좋아하게 만들면 좋은데 역설적으로 힘든 일이죠. 아난티 타운은 그냥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일반적인 쇼핑몰에 대한 모든 통념, 가령 서비스 동선은 뒤에 있어야 한다는 등의 공식을 무시했어요. 서비스 동선 때문에 공간이 불필요하게 커지거든요. 멋진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거기 오고 싶게 하자 했고 장사가 되든 안 되든 그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바닷가이기 때문에 1층을 공공에 열어주고자 했고 이를 위해 프라이빗해야하는 호텔의 로비는 최상층으로 올려보냈죠. 스카이 로비를 두려면 인력이 더 필요하지만 말이에요. 부산에 새로운 레이어를 더해간다는 느낌으로 ‘스카이 로비란 무엇인가?’, ‘상점은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가?’, 하나하나 질문을 하면서 채워갔어요.   아난티 프로젝트가 알려지다 보니, 소장님의 작업이 리조트 프로젝트로만 주목받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소장님이 애착을 가지는 프로젝트는 어떤 게 있을까요? 평당 220만 원 정도의 매우 낮은 공사비로 지었던 엠파크 허브 매매단지가 있어요.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콘크리트 건물이고요. 금강산에 지은 아난티 클럽하우스도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목조건물인데, 구조적 실험을 하면서도 공사비를 맞추는 게 중요한 콘셉트였어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공간적인 임팩트를 가져가는 것이죠. 너무 시각적 임팩트만 있고 기능이 충실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좋은 건축물이 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결국 건축물은 특정 개인에 의해서 평가되기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요. 부산 아난티 코브 건물이 30도 정도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외관을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에요. 개별 발코니마다 수영장이 있기 때문에 발코니에 햇볕이 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어요. 테라스가 수직으로 올라가면 수영장에도 방에도 햇볕이 안 들기 때문에 리조트에서 기대하는 따뜻한 햇볕을 느끼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건물을 뉘면서 야외 테라스에서 햇볕과 바다를 즐길 수 있게 했죠.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도 있지만 하나 사서 오래 쓰고 클래식으로 남한테 물려주는 것이 있죠. 저희는 클래식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요. 디자인, 철학, 총체적 맥락이 맞을 때 비로소 클래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은 만들어지자마자 ‘멋지네!’라고 반응하지만, 곧 소비되고 잊혀지죠. 우리는 아난티를 통해 클래식을 만들려고 하죠. 사람들도 그런 가치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철학과 공간과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도시에서 긍정적인 일원이 되는 그런 건축물요. 그게 제가 가진 목표인데 사실 쉬운 건 아니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거죠. 100년 전에 나온 어떤 램프는 현재의 사무실에 놨을 때 어색하지 않아요. 그런 퀄리티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항상 생각해요.   저는 도시도 그렇게 보거든요. 역사와 맥락을 보면 무엇을 보존하고 싶은지 알잖아요. ‘아 저건 부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클래식이죠.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은 유명 건축가들이 한 거예요. 유명 건축가들이 했다고 해서 보존하겠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죠. 나중에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존해야겠네?’ 하는 마음이 들면, 그리고 그런 건물이 많아지면 저는 풍족한 도시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도 지금부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보존할 것하고, 없앨 것은 없애다 보면 만들 수 있어요.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 지어지는 건물 자체를 하나하나 도시의 일원이라는 마음으로 지어야겠죠. 삶도 그렇잖아요. 당신의 건물도 도시의 일원이라는 이야길 하고 싶어요. 도시의 기록에는 건축가의 이름도 남지만, 건축주의 이름도 항상 같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영향력 있는 행정가이고 꼭 한 가지를 해야 한다면 그 기록을 남기도록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난티 코브>에는 잘 보이는 광장에 그 기록을 넣었어요. 건축주의 이름도 물론 있고요. 그렇게 하면 많은 건축주가 달라질 것 같아요. 건축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도시 역사에 켜를 더하는 작업이거든요. 건물의 등기부 등본을 떼었을 때, ‘건축주 누구와 건축가 누가 언제 지은 거다’ 그리고 그걸 허가해준 공무원도 같이 기록되면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아요. 건물이 도시의 한 부분이고, 하나의 켜를 더하는 거로 생각하면 건물 하나하나가 중요한 거죠.      우리 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근시안적으로 바라본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도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중첩된 켜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가는 건축물이 새로운 켜를 더해 나가고 있는 것이죠. 서울은 큰 켜로 한강이 있고 북한산, 관악산이 있고 경복궁이 있고 창경궁, 시청, 청계천, 서울역이 있고 지하철 등등이 있죠. 많은 사람이 쓰는 공공 건축과 인프라를 잘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건축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결국 건축은 우리의 진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거죠. 그 화두는 영원한 거고, 우리는 끝없이 변화해요. 한시라도 가만있지 않잖아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재미있는 게,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원해요. 양면성을 갖고 있죠. 애증의 관계 같아요. 시간의 신이 절대적 존재예요. 그건 이길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건 소멸하지만 시간이 허락하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거죠. 하루살이에게는 신이 하루라는 시간을 준 거고, 인간에게도 한정된 시간을 줬지만, 산과 바다는 1만 년도, 지구에는 1억 년도 주어지죠.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데 그걸 잊으면 사람들이 오만해지고, 돈과 명예에 집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창의적인 우위(creative edge)를 잃는 것 같아요. 크리에이티브는 세상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사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예술가 집단이 가장 그러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던질 수 있는 거고요.   자신의 맥락을 찾아가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과 추구하는 삶과 시간과 공간, 도시와 건축을 보는 맥락이 통일되고, 그것을 본인이 디자인하는 건축물에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할 때 좋은 건축가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드물죠. 인간의 삶과 도시의 공통점은 좋건 싫건 끊임없이 레이어가 계속 중첩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시를 보는 관점은 그 계속되는 켜에 있어요. 도시에서 내가 짓는 건물도 하나의 켜가 되는 거고, 건축주도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니까 모두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하잖아요. 행동으로 이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잖아요. 서울시에 지어지는 건축물도 하나의 구성원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좀 더 풍부한 걸 하고 싶지 않을까요? 사람은 길게 100년을 살지만, 건축은 몇백 년 존재하며 도시의 한 구성원으로 켜를 만들고 있으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하고 만들어 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OHS  진행 임진영   정리 이경희  사진 SKM Architects 제공  
Interview W Interview 오픈하우스서울이 올해부터 시작하는 <W Interview>는 건축, 조경, 도시 분야의 여성 전문가를 만난다. 한국의 현대 건축, 도시, 조경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오늘을 만들어가는 여성, 전문가를 위한 기록이다.  전문가의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간혹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분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이 분류가 호출되는 이유는 기울어진 판에 대한 자각과 남성 중심의 서사가 놓치고 있는 전문 분야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이자 필요에 가깝다. 젊은 여성 건축인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는 중견 건축인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무엇보다 여성 건축인에 대한 기록과 작업에 대한 조망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성 건축가의 존재를 수면 위에 띄우고 재조명하면서 또 하나의 관점과 서사를 쌓아가는 이 과정은 한국 건축에 다른 시각의 타래를 더하고 한국 현대 건축 서사의 깊이와 켜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터뷰는 2009년 월간 <공간>과 네이버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편에 소개된 12명의 건축가 인터뷰를 연장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전문가로서 여성 건축가, 도시, 조경가를 주목하고 그 작업 세계를 만나는 자리로 마련된다. <W Interview>라는 이름은 이미 전시, 연구, 출판을 통해 디자인계의 ‘끊임없이 갱신되는 열린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를 선언한 <W 쇼>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OH
Interview 그리팅가든, 박 헬렌 주현 그리팅가든은 마임빌리지 단지의 중앙부를 이루는 연못과 아름다운 자연이 한눈에 인지되는 곳에 자리한다. 여주 마임빌리지(여주 인재원)의 방문자가 가장 먼저 방문하게 되는 공간으로 연수생 접수공간, 산책하는 이들을 위한 휴식 기능 그리고 전시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요구된 곳이다.  대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복잡한 요소들이 하나의 큰 조직을 이루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존 건물과 잔디마당으로 조성된 연수원의 1차 부지와 아직 활발히 조성되지 않은 2차 부지를 연결하는 부분이며, 크고 작은 동선이 교차하고, 대지의 높낮이가 얽혀 있는 곳이다. 남쪽 연못의 수면 높이와 지면 높이의 관계가 민감하였고, 옆 주차장과 기존 숙소건물의 관계도 복잡했다.  정문에서 그리팅가든에 이르는 진입로는 구불구불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지의 끝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서부터 접근과 배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차장과 연계된 열린 잔디공간에 돌 기단을 놓아 계단 하나의 높이와 재료 차이로 공간을 분리, 연결하고 싶었다. 이 기단은 지형의 높이 차이를 고려하며 접혀 올라갔고, 벽이 필요한 기능들은 돌상자, 나무상자, 거울 상자로 구성되어 기단에 올려졌다. 주변의 수려한 녹음과 시선이 끊기지 않도록 수평으로 긴 유리 상자가 작은 상자들을 덮은 안을 생각하였다.  연수원의 진입부에서 걸어 올라가는 방향과, 도착 후 돌아서서 본 전경의 방향 차이에서 유리상자와 돌 기단의 배치가 비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틈으로 출입구를 만들었으며, 유리상자를 둘로 나누고 연못과 연결되는 기단 쪽으로 통로를 두었다. 연못 너머로 여름에는 나무가 우거져 보이지 않는 꽃집이 겨울에는 잎이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이게 된다. 사무실 공간을 나누어주는 나무 벽은 높이가 달라지며 구부러지는 면으로 표현했고, 슬레이트석의 단면을 사용한 계단과 난로, 돌과 유리 그리고 백일홍이 비치는 거울 상자 등 재료와 표현의 고민이 계속되었다. 그리팅가든은 독립적인 요소들이 대지와의 관계에서 비껴지고 얽히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조직이다.  + 글 박헬렌주현  + 사진 김용관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③ 건축적 관심에 대해 여쭤볼게요. 작업 중에 공간이 부속으로 딸린 중심공간을 만드는 평면이나, 입면 구성에서 면의 분할, 목재를 활용하는 경향들이 흥미롭습니다. 설계할 때 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두고 전개하시는지 궁금해요. 우선 대지와 프로그램이 많은 것을 정해줘요. 건축 설계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법규도 변수를 줄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고맙죠. 다 펼쳐지면 계속 고민을 해야 하는데 다 끊어주니까. 아까 동은재 이야기를 하며 설명해 드린 것 같이 대지 분석에서 나오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문제를 풀 때가 가장 신나요. 너무 차가운 재료보다는 따뜻하고, 덜 가공된 재료를 쓰고 싶죠. 돌이면 돌, 재질이 확실히 느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목재가 재미있기는 해요. 시공도 빠르고 따뜻하고 좋은데 우리나라 기후에는 좀 힘들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할 수 없이 콘크리트를 써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단열과 냉방을 동시에 하는 게 쉽지 않죠. 앞으로 전기요금이나 미세먼지, 단열을 고민하다 보면 형태가 많이 바뀔 거 같아요. 미세먼지에 대비한 공조시스템이 발전해야 할 것 같고요. 우선은 정부 정책으로 공기를 개선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개개인이 다 공기청소기를 두고 있는데 이것도 다 쓰레기가 될 거 아니에요. 참 큰 문제에요. 여름에 더 덥고 겨울에 더 춥고, 이제 캘리포니아 스타일처럼 전면 유리로 마감하는 건 끝난 것 같아요. 건축에서 이 에어필터를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에너지와 친환경이 건물에서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땅에 어떻게 앉혀야 단열이 가장 잘되는지, 그런 프로그램이 디자인을 다시 지배하겠죠.   건축가로서, 전문가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으시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역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구조, 설비 등 전문가와 협업하는 자세도 중요해요. 하청이 아니라 파트너로, 같은 디자이너로서 협업할 수 있는 자세. 저는 건축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의뢰인의 요구가 있을 때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제안하지만 강요하지는 않거든요. 물론 완전히 잘못된 것을 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지만, 건축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내 미학적 고집(aesthetic persist)과 의뢰인의 요구가 부딪힌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맞춰드려야 할 것 같아요. 주거 공간 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걸 잊고 건축의 숭고함만을 배우면 안 될 것 같아요.   귀국하셨던 1990년대에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으셨나요? 건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지금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어떤 분은 자신만만하게 클라이언트를 야단쳤다고 하는데, ‘왜 야단을 치시지?’ 생각했어요. (웃음) 이해는 시켜드려야 하지만 서비스업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들어가야 해요. 그게 싫으면 클라이언트가 되어야죠. 그래서 힘들어요. 그렇다고 투자를 잘해서 커미션을 받는 게 아니라, 들어간 시간만큼 비용을 받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직업 같아요.   건축 설계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가가 좀 그래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대학원 예산을 보면, 디자인 대학과 교육 대학이 가장 예산이 적어요. (웃음) 졸업생들이 그만큼 기부를 못 해요. 너무 빠듯하니까요. 로스쿨이나 비즈니스스쿨은 기부를 많이 받으니까 살림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는데, 디자인 대학은 장학금을 주고 좋은 학생을 데려오고 싶어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림을 해야 하는 거죠.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에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은 노동 집약적(labor intensive)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의뢰인에게 정정당당하게 시급제로 비용을 청구해야 하고 함께 단합해야 하는데, 일을 놓고 경쟁하다 보면 그런 단합이 힘들기도 하죠. 아쉬운 부분이에요. 요즘은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의뢰인들도 많고, 작은 사무실에서 잘해나가는 것 같아요. 세대가 바뀌면서 좀 개선이 되지 않을까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건축가에 대한 인식이 넒어져서 집을 지을 때 건축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는데, 소규모 프로젝트의 예산이 너무 적은 경우도 많아요. 무리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까 젊은 건축가들도 출혈이 생기고요. 작업하더라도 유지가 안 되니 그런 작업을 반복하기는 힘들잖아요. 개개인의 의뢰인이 늘어나는 것보다, 제대로 돈을 쓰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맞아요. 그런 조언을 의뢰인에게 해야 해요. 무리하게 설계비를 150으로 낮추지 말고, 200을 주고 그 대신 제대로 서비스를 받으시라는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셨는데요. 개개인의 작업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스튜디오도 결국 사업체인데, 대부분의 건축가가 경영에는 익숙지 않죠. 사무실 운영은 어떠셨나요. 이태원 사무실이었는데 꽤 큰 공간에 식구는 적었지만 재미있게 있었어요. 제가 미국을 가게 되면서 정리를 해야 했죠. 운영은 안 좋았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직접 관리하는 수준의 작은 아뜰리에고, 프로젝트가 커지면 큰 사무실과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해놨어요. 그렇게 구조를 만들었지만, 목표(goal)가 너무 낮았던 거죠.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해야 하니까. 손실이 좀 나면 내 월급으로 메꾸는 차원에서만 생각했지, 사무실을 확대하고 더 큰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마케팅할 여력이 시간상으로 없었던 거예요. 여자나 남자나, 개소를 너무 일찍 해서 한계에 빠지는 선이 있을 거 같아요. 스스로 다룰 수 있는 오버헤드와 프로젝트 규모와의 간극(gap)이 있기 때문에요. 협업하면 좋은데 보통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정석은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설계비를 청구하고, 시공비를 제대로 받아서 의도한 건물이 만족하게 나오고, 그 건물을 기반으로 더 좋은 프로젝트 따고, 더 좋게 짓고, 더 좋은 의뢰인과 만나고, 이렇게 해야 해요. 저는 그것을 잘 못 했죠.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건축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싸게 지으면 결국 저렴한 건축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다음 단계를 보면 과연 더 나아갈 기회가 있을까 싶고요. 싸게 하려면 아이디어가 획기적이지 않고서는 안돼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욕심내면 오히려 화음이 아닌 소음이 되어 실패할 수 있어요. 물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아주 간단하고 획기적인 공간 아이디어로 명확하게 돋보여야 그걸로 다른 의뢰를 받을 수 있어요. 저렴한 프로젝트를 자주하면 진만 빠지고 발전이 없기 쉽죠.   지금 젊은 건축가들이 가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 스튜디오라는 낭만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죠. 저는 사실 제가 아프고 피곤하니까 학생들에게 점점 솔직해졌어요. 건축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을 못 하니까요. 이 공부를 하고 얼마나 힘들지 아니까. 멀쩡한 가장이 와서 전공을 바꾸어 건축대학원 지원할 때면 네가 진짜 원하는 거냐고, 힘들다고 말했어요. 학교에선 난감하겠지만 그 비싼 대학원 학비를 내고 오는데 정확하게 알려줘야겠더라고요. 정말 좋아서 하는 학생들은 해야 하고, 또 대형 건축사무소가서 괜찮은 수준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알아야겠더라고요.   일을 쉬고 계신데, 면역에 취약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과로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늦었던 것도 몸이 좀 안 좋아서였어요. 31살 정도에 아기를 낳았는데, 좀 아파서 임신을 늦추었다가 그 뒤로는 임신이 안 되어서 늦었죠. 그러다 겨우 생겼는데 유산기가 있어서 10개월을 누워 지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는 홀가분하게 활동을 하다가 2005년도에 다시 몸이 안 좋아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휴직했죠. 3번째 아픈 거였어요. 아이 낳기 전, 후 그리고 2005년. 이렇게 세 번 지병이 오다 보니까 의사인 사촌 언니가 ‘내가 너 같으면 쉬겠다.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니?’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때까지는 아무 의심 없이 몸이 아파도 좀 나으면 일을 했는데, 삼세번이 되니까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쉬어보자 하다가 아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뉴욕에 가게 되었어요. 저도 재충전을 하자 했죠. 그렇게 한 해 두 해 늘어나게 되니까 자꾸만 현장에서 멀어지게 된 거예요. 건강은 나아졌지만, 시간이 좀 걸렸어요. 한 가지 지병은 아직 관리하느라 병원에 왔다 갔다 하고 있죠.   건축 설계라는 분야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격무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미친 듯이 무리한 것 같아요. 좋아했으니까. 100만 원 받으면 딱 100만 원어치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다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싶잖아요. APAP나 그간 했던 전시도 판 하나 깔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꽤 많이 생각하고 모델을 만들곤 했죠. 과정이 참 좋았지만, 너무 무리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면에서 좀 그래요. 여행 가기 전에 집을 다 치워놓고 가는 성격 있죠? 갔다 오면 깨끗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더 막 괴롭히게 되죠. 살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하지 못하고 성에 차게 하니까 안 되죠.   모든 역할을 다 해내려 하신 거네요. 일하는 여성의 힘든 부분인 것 같아요. 저도 딸이 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눠야 해요. 제 딸은 저처럼 모든 것을 똑바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성격이에요. 저는 꼭 똑바로 해두어야 하거든요. (웃음) 처음에는 야단을 치다가 지금은 내버려 둬요. ‘네가 앞으로 커리어를 갖고 살려면 이런 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가야 안 아프지, 매번 정리하고 살면 이 아이가 아프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저도 좀 바뀌는 것 같아요.   건축 실무에서 의뢰인을 상대할 때 여성이라는 점은 전혀 영향이 없었나요. 현장에서 작업하셨을 때 장단점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여자와 남자는 달라요. 그 다른 점을 쓰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의뢰인은 여자라서 좋아하시는가 하면 어떤 분은 여자라서 불편해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건 사람의 취향이에요. 예를 들어 산부인과 갈 때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 선생님도 상관없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본인이 편한 쪽으로 가는 것에 대해 성차별이라고 얘기하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건축은 긴밀하게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요. 헤이리 북카페의 경우 건축주분께서는 여자라서 더 좋다고 했어요. 여자라서 더 요구 사항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과는 잘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현장은 어차피 현장 소장이 있고 그 관계만 원활히 하고,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밀리거나 할 말을 못 하진 않아요. 저는 교수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했죠. 하지만 거기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에 확실하게 알고 얘기를 해야겠죠. 그렇다고 밀리지 않으려고 너무 세게 나와도 곤란하고요. 그게 참 묘미인 거 같아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둘 다 힘들기 매한가지지만, 힘든 부분이 다른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사실 힘들죠. 완벽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하고, 일을 나누어야 해요. 혼자 다 못해요, 그리고 플랜 B가 많아야 해요. 일이 안 되었을 때 가동해야 하는 플랜 B, C를 준비해야 돌아갈까 말까 하죠.   사무실 운영 측면에서 말인가요? 사무실 운영, 아이 보는 것 모두요. 얼굴 보고 힘든 말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고 불필요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쓰더라고요. 직원을 하나 내보내야 하면 고민을 하지만 딱 얘기를 하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줘야 하고, 그런 판단을 빨리하는 연습을 하면 좋아요. 너무 많은 욕심을 내면 일을 그르치거나 건강을 그르치거나 하죠. 저는 건강을 그르친 나쁜 사례이고, 현명하게 하려면 일을 나눠서 해야 하고, 플랜 B가 많아야 하고, 자존감 있게 하나에 집중할 때에는 다른 건 안 해야 해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거 같아요.   이 인터뷰가 시작된 계기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50대 여성 건축가의 부재가 컸습니다. 공간 재직 시절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인터뷰를 했는데 동시대의 여성 건축가분들이 안 계신 거예요. 물론 개별적인 사정이나 건강 문제가 컸지만, 한편으로 과연 우리 사회는 여성 건축가에게 큰 프로젝트를 할 기회를 주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작은 프로젝트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형 프로젝트, 혹은 지명 공모전에 여성 건축가가 호출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여성 건축가들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선입견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큰 프로젝트를 하는 분들은 있는 데 보통 같이하시는 경우가 많죠. 규모 있게 사무실 운영하는 분으로 김용미 선생님도 있고요. 우리가 좋은 예가 못 돼서 아쉬워요. 그때 저와 민선주 씨, 서혜림 씨를 삼인방이라고 불렀는데, 선주 언니 아프시고 서혜림 씨도, 저도 아프고, 이런 상황이 참 안타까웠던 거 같아요. 서울대 후배들을 보면 사무실을 개소해서 열심히 운영하는데 얼마나 큰 프로젝트를 맡는지는 모르겠어요. 대형설계사무실에 임원진은 계시죠. 정말 더 나와야 할 텐데요.   건축에서 젠더 이슈를 크게 체감하지 않는 이유가 건축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여자든 남자든 큰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졸업생 성비, 젊은 여성 건축가가 배출되는 비율만큼 중견 건축가까지 그대로 유지가 되느냐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잘 안되죠.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육아를 하다 보면 쉬거나 파트너쉽으로 가죠. 어떻게 보면 나눠서 하는 게 현명한 거예요. 나눠서 하면 계속할 수는 있으니까. 자신의 이름 하나로 내거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둘 다 원하면 나눠서 하는 것도 좋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만약 올인하고 싶으면 희생할 것은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다 백 점으로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전 글에서 조경이나 건축이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으셨고, 그에 대해 ‘랜드아키텍처’라는 표현으로 관계 구성과 구축에 대해 정리하셨습니다. 건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사실 제 마음대로 생각했던 건축물을 충분히 지을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항상 랜드스케이프 스케일이 아니라 건축 스케일에서 땅을 더 적극적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건물을 잘 앉히면서도 그렇다고 땅속에 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요. 할 게 너무 많은데 목표는 세워놓고 많이 미달이 된 느낌이 들죠.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어요.   실현되지 못한 것을 담고 있어서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돼요. 지금은 일을 쉬고 계신데, 이후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작업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여건이 되면 하고 싶죠. 이전 프로젝트를 볼 때면 ‘왜이랬어, 더 잘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평창올림픽 폐막식 영상에 제 프로젝트가 나온 걸 보고도 ‘지붕 색으로 천장을 칠하는 건데’ 그러고 있어요. (웃음) OH  + 진행 임진영 + 사진 정멜멜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②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건 언제였나요? 1993년, 94년인 것 같아요.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바로 오신 건가요? 조금 있다가 왔죠. 대학원 도중에 결혼해서 상황이 좀 복잡했어요. 시집살이하면서 풀타임으로 사무실에 나가고 밤새우는 것은 무리였어요. 그래서 서울대 박사 과정을 시작한 거예요. 안 그러면 생각이 끊일까 봐. 또 미친 듯이 디자인을 해봤으니까 더 읽어야 하겠더라고요. 학교에서 보고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읽고 공부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부분이 느껴져서 서울대를 간 거죠.   아기를 낳은 시기도 그때인가요? 아기는 딱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니까 들어서더라고요. 그래서 아기 낳고 키우면서 방법을 모색했어요. 감사한 게 기회가 참 빨리 왔어요. 좋은 분들과 서울건축학교에 참여하기도 하고, 두물머리 워크숍도 참여했고요. 두물머리 워크숍은 백문기 선생님, 조병수 선생님 등이 참여하셔서 양평 숙소에서 직접 그리고 전시했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사람들 많이 만나다가 조병수 선생님이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민)선주 언니와 다른 작업을 하다가 연결된 프로젝트가 동은재 주택이에요 저는 참 감사해야 해요. 마케팅한 것도 아닌데, 교수직이 생겼고 좋은 의뢰인이 연결되어서 사무실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복잡했죠. 아이는 어리고 어른들이 편찮으신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어요.   한국에 들어와서 커리어가 바로 이어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사이 결혼과 출산, 박사 학위를 받고 실무를 시작하셨네요. 박사 논문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친한 친구가 불문학을 해요. 그 친구와 케임브리지에서 같이 그림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같이 초현실주의(surrealism) 미술을 좋아했어요. 친구는 문학으로 초현실주의 시(surrealism poetry)도 좋아해서 언젠가 이 주제로 뭔가 하자고 했는데, 친구는 보들레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썼어요. 저는 초현실주의 건축(surrealism architecture)에 관해서 쓰고 싶었어요. 회화는 초현실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3차원 집에서 이것이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 궁금했어요. 게리의 초기 건물들 그리고 아이젠만의 웩스너 예술센터(Wexner Center for the Visual Arts) 같은 작업과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이 네 사람의 작업을 비교분석 했어요.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면 타운하우스 앞에 가로등이 하나 켜있는데 대낮이잖아요. 언뜻 보면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 같죠. 하지만 가만히 보면 대낮 나무 그늘 안의 가로등 불이 켜져 있는 듯한데, 밤이면서 낮이 공존하는 초현실이에요. 초현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이성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초현실을 그려놓음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매개해 주잖아요. 프랭크 게리의 건축도 초현실주의적인 순간들(moment)이 있는 것 같아요. 부엌 바닥을 아스팔트로 마무리하는 것에서 안이냐, 밖이냐에 관한 이슈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초현실적인 면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같은 초현실이 아니라, 엄연히 익숙한 하늘과 집, 창문도 다 있는데 그것의 조합으로 이뤄진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순간들을 건축에 응용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요소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체(deconstruction)되는지, 다시 조합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슷한 현상들을 보고 싶었어요. 이런 주제에 관하여 실컷 읽고, 게리와 아이젠만의 작업을 직접 보고 건물 몇 개를 선정해서 마그리트와 에른스트의 그림들과 같이 비교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패스 패일로 성적을 바꿀 정도로 잘 못 했던 것을 논문으로 쓴 셈이에요. (웃음) 즐겁게 썼어요.     이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한 것이 있었나요? 어떻게 보면 오히려 너무 복잡하게 생각 안 하기. 이론에서 시작해 형태를 만든다기보다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생각을 전개해요. 게리가 초현실적인 생각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당시 뭔가 실험하고 싶어 한 맥락이 있잖아요. 그 시대에서 느끼는 실험하고 싶은 주제와 담론들, 어떻게 보면 시대성인 것 같기도 해요. 이론과 실무가 양쪽에서 다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담론과 작업을 보고 듣고 하다 보면, 그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를 들여다보게 되죠. 그렇게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탐구할 때에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론가들은 이런 것들을 이론적 배경으로 설명하고요. 제 경우 이론이 앞서면 디자인이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마치 스펀지의 물을 짤 때처럼 다 읽고 받아들이고 있다가, 물이 가득 차오를 때 원하는 방향으로 짜다 보면 거기에 맞는 나만의 디자인, 실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나오는 소재도 중요하지만 매일 신문 읽고 꾸준히 흡수하는(keep up)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것이 먼저라고 얘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새삼 느껴요. 요즘 나오는 건축 잡지를 열심히 봐서 짜깁기하는 것과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습득해서 나오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나. 요즘 그런 밑 작업을 너무 안 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요.   밑 작업도 부족하지만 동시에 한국 건축에 워낙 밑 작업이 될만한 연구가 충분치 않아서 토대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도 많이 보여요.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건축의 근현대 시기를 아카이빙하고 다큐멘테이션하는 작업과 움직임이 있어요.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건축큐레이터나 박정현 건축비평가와 같은 분들이 연구자로서 끊임없이 디딜 공간, 초석을 찾아 나서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의 현대 건축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 토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굉장히 빈약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해요. 옛 분들의 고민과 작업의 깊이는 항상 놀랍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대 미술만 따르며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휘트니 뮤지엄만 가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제대로 이해하려면 메트로폴리탄부터 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논문을 쓰고 나니까 예전에 배웠던 건축 역사 코스가 다르게 이해되는 거죠. 학생 때는 처음 접하기 때문에 해석이 돼서 입력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젊기 때문에 흡수력이 빠르잖아요. 그때 한번 봐놓으면 건축하는 사람은 시각적으로라도 기억을 하거든요. 그런 경험과 이론이 쌓여 작업하다 보면 거기에서 깊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모든 정보를 ‘구글’할 수 있으니까 전문 영역(expert)이라든지 자기의 무지에 대해 너무 자신감 있는 세대가 되어버려요. 전문가 필요 없이 다 내가 전문가이고 서로 다 잘 모르는 게 쿨한 분위기가 되는 게 아쉽죠. 특히 건축 분야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 위험하다고 느껴요. 제대로 많이 보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작업이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요. 기록이 부족해서 그렇지, 한국 근현대건축 또한 활발하고 정열적이었을 것 같아요. 전통건축의 장인들도 왕성하셨을 것 같고, 소수이지만 외국의 변화를 보고 듣고 한국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분들이 계셨을 거예요. 의뢰인일 수도 있고, 화가였을 수도 있고요. 건축 공간에서 느끼는 희열은 전염성이 아주 강해요.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매스로 공간을 구성했던 삼현여고 프로젝트가 거의 초기 작업이었죠? 1999년 작업이었어요. 그때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 조병수 씨, 민선주 씨가 계셨는데, 제가 한국에 나왔을 때 게스트 크리틱으로 불러주셨어요. 그 후, 인연이 돼서 겸임으로 나가다가 교수를 하게 되었죠. 그때 제 학생 아버님이 삼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그 학생이 저와 일하고 싶다고 해서 제 첫 번째 직원이 되었고 그 작업을 같이하면서 김은미 씨가 영입되어서 우리 셋이 삼현교사 프로젝트와 삼현생활관 두 건물을 설계한 거예요. 사무실은 그렇게 시작됐죠.   조병수 소장님과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같이 하셨죠? 하버드 대학원 다닐 때 조병수 선생님이 제 작업을 좋게 봐주셨어요. 리뷰할 때면 본인 수업도 아닌데 와서 들으시더라고요. 정말 고맙고 긴장됐죠. 강화도 우리마을 작업을 의뢰받으시고, 조병수 선생님께서 이건 거의 신의로 하는 작업(Bonafide work)인데 같이 디자인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좋다고 했죠. 아시다시피 정신지체아 시설인데, 저에게 기숙사를 맡아달라고 하시고 본인은 교실을 디자인하시겠다고 해서 우리마을 설계가 나온 거예요. 설계비를 거의 안 받고 했지만, 저에겐 의미 있는 초기 작업이었어요. 완공 후 2001년, 영국 건축지 The Architectural Review에서 주는 Ar+d Emerging Architecture 상을 받게 되어 저에게 많은 용기를 준 작업이기도 해요.    중간에 타일로 외부를 마감한 매스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렴한 마감이어도 나무 소재가 가지는 차분한 공간감도 있고, 원형 외부 공간이 갖는 임팩트가 강렬했어요. 왜냐하면 비가 오면 학생들이 놀 데가 없어요. 없어질 염려가 있어서 학생들이 갇혀 살아야 했죠. 그래서 비가 와도 옥외에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이 가방도 놓고 할 라운지가 필요해 추가되면서 진행되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참 의미 있어요. 원형 데크에서 옥외활동을 하고, 뛰어내리거나 밖에 나가면 안 되니까 창살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해서 제약이 많았지만 그래서 좋은 설계가 나온 것 같아요.   디자인에서 재료 마감까지 많이 고려해서 공사비를 최대한 절감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설계하기로 정한 후,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정신지체아 시설의 기준, 사례들을 연구해서 나름대로 우리마을 설계지침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뢰인의 요구사항들도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런데 예산 안에서 좋은, 지침에 맞는 설계를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은 조병수 선생님께 배웠어요. 모든 것에서 조금씩 빼면 예산이 금방 쑥 내려가요. 예를 들어 마지막에 마감을 합판으로 정했어요. 가장 바깥쪽(top layer)은 외장으로 가능한 것을 썼지만, 그래도 합판이에요. 처마를 꼭 만들어주고 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비용 절감은 많이 되죠. 원형 지붕 재료의 일부도 폴리카보네이트라서 지금 가면 많이 노랗게 변색해있을 거예요, 하지만 유리나 더 좋은 재료를 쓸 여지는 못 되었죠. 또 아이들이 타박상을 입을 수 있어서 마감을 가능한 한 나무로 해야 하는데, 거칠기는 하지만 예산 안에서 해결했어요. 조 선생님과 참 좋은 인연이에요. 제가 활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아까워하시고. (웃음) 그렇게 사이사이에 공모전이나 협업을 한 게 많아요. 민선주 선생님, 고 장림종 교수님과도 협업했었죠.   초기 작업 중에 주택인 동은재도 인상 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떤 부분에 집중하셨나요. 헌 운동화같이 편한 집, 저렴한 집을 원하셨어요. 대지가 길고 좁지만, 두 개의 축을 가진 특성을 의뢰인이 요구하신 프로그램과 맞추어 디자인했어요. 다만 중간에 시공업자의 문제가 있어서, 의뢰인이 저희에게 공사 마무리를 부탁하셨고 사무실의 김은미 씨가 현장을 맡으면서 끝낸 작업이에요. 현장에 상주하면서 마감을 하니 꼼꼼히 끝난 결과물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대지를 이해하는 축들을 찾아서 건물 배치 및 형태를 생각할 때 디자인이 잘 풀려요. 진입, 동선, 전망 등이 정리가 되면서 축들의 사이에서 좋은 공간들을 찾을 수 있어요. 소쇄원을 분석하여 논문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소쇄원을 이러한 축들로 이해할 수 있었고, 구조물과 건축물의 배치를 분석할 수 있었어요.   헤이리 아트밸리에서는 주택에서 상가까지 꽤 많은 작업을 진행하셨어요. 의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단독 건물의 형태로 디자인하여야 했지만, 헤이리 설계지침의 취지인 ‘한 단지로서의 헤이리’라는 목적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헤이리 한스갤러리 이후에 바로 옆에 있는 써니갤러리를 디자인할 기회가 주어졌죠. 연결해서 한 블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기회였고, 독립적으로 각 의뢰인의 목적에 맞는 맞춤 건축물이지만, 옆 건물과 조화로운 결과를 이룰 수 있어서 만족했어요. 헤이리아트밸리의 경우, 블록 단위로 디자인하면 좀 더 조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나란히 위치한 프로젝트들인데 개별적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화음이 안나요.   방주처럼 생긴 헤이리 북카페 프로젝트는 내부에서 본 목조 지붕이 인상적인데, 지붕 아래를 바로 유리로 처리해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게 기억에 남아요. 땅이 그렇게 생겼어요. (웃음) 지붕 부분은 저도 맘에 들어요. 그렇게 하느라 애를 썼죠. 그 프로젝트를 하신 목수가 알로에마임 야외 바를 만든 분이세요. 목공을 참 잘하시더라고요. 토탈미술관에서 이 작업을 보고 좋아서 전시도 해보라고 제안해주셨고, 안양 APAP에도 추천해주셔서 프로젝트를 했죠.     2002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에서 작가로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주제와 제안했던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2002년 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NEXT’였어요. 수디치 총감독의 방향은 진행 중인 또는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건축 작업의 전시로 현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건축적 활동과 디자인 방향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한국관의 총감독이셨던 김종성 교수님은 7팀의 작업을 선정하셔서 전시를 기획하셨고요. 저는 헤이리 한스갤러리 프로젝트를 전시했어요. 건축 모형을 반투명한 아크릴 재질로 만들고, 열 수 있게 제작하여서, 가운데 계단으로 분리되고 연결되는 건물 개념을 설명했어요.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한 사이트 모형을 세워서 전시함으로써 사이트의 이야기도 하지만, 모델을 통해서 보이는 재질의 특성 — 관람객의 눈 위치에서만 투과되는 관점 — 으로 건물이 보이고 건물을 통하여 보이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어요. 건물 모델과 사이트 모델에 각각 소형카메라와 작은 화면을 설치해서, 화면에 화면을 보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의 관찰되는 것과 관찰자(observed & observer)의 관계를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대표작으로 마임 빌리지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에게 마임 빌리지가 갖는 의미가 클 것 같아요. 파빌리온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도 여러 개 진행하셨는데, 처음엔 파빌리온으로 시작하셨나요. 그렇죠.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는 정영선 선생님이 먼저 관여하고 계셨어요. 이곳에 주택을 하나 짓는 제안이 있을 때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부지에 갔는데, 제 생각에는 대지 위치가 주택으로 적당하지 않아서 다른 곳에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런 와중에 기숙사도 짓자고 해서 위치를 잡고, 그리팅가든이 필요하다고 해서 대지 위치를 잡아드렸죠. 그렇게 프로젝트가 늘어가니 정영선 선생님이 기술 좋다고 웃으셨어요. (웃음) 프로젝트의 위치가 적당할 것 같아서 아이디어를 던진 건데 하나씩 실현된 거예요. 어떤 곳은 빈 공간을 놔두고 싶고, 또 다른 곳에는 랜드아키텍처처럼 앞은 정원이고 뒤에 집이 숨어있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 안은 받아들여 지지 않아서 우선 그 위치에 야외스테이지처럼 파빌리온을 만들기로 했어요. 건물 설계, 시공이 진전되는 와중에 이벤트를 할 공간이 필요해서 작은 프로젝트가 먼저 진행되었죠. 정 선생님이 야외 원형극장을 디자인하시면 제가 다과를 할 수 있는 냉장고가 들어간 바를 디자인해서 짓고, 한쪽에서는 건축 시공이 진행됐어요.     마임 빌리지 일대는 말 그대로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콘텍스트 없이 자연 속에 놓이면 오히려 난감할 수도 있을 텐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더 친숙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곳은 원래 연수원 부지였어요. 클라이언트가 조경에 관심이 깊으시고 부지를 하나의 정원같이 가꾸셔서, 건축물의 자리를 잡는데 더욱 신중했어요. 기존의 스웨덴식 목조 건물과 비슷한 건물들을 원하셨는데, 그리팅가든은 현대적인 건물로 제가 좀 고집을 부렸죠. 다행히 그리팅가든 아이디어는 좋아하셨어요. 조금 더 땅과 과감하게 어우러진 랜드아키텍쳐로 다른 건물들을 설계하고 싶었는데, 잘 받아들여 지지 않아 아쉬웠죠. 그래도 그리팅가든은 건물의 특성상 잘 풀렸어요.     그리팅가든은 배치나 주변 자연과의 관계, 글래스하우스에 대한 해석까지 다양한 면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인데요. 설계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팅가든은 연수원에 당도한 손님들이 처음 도착하는 공간이에요. 숙소 열쇠를 나눠주기도 하고 화장실, 휴식 공간 등의 프로그램이 있어요. 제가 ‘Greeting Garden’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손님을 반기는 ‘정원‘으로 설계하고 싶어서였어요. 위치도 단지 초입보다는 버스나 차량으로 정문을 지나 아름다운 단지를 어느 정도 가로질러 중심에 있는 위치를 선정했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넓은 마당에 놓인 하나의 플랫폼(platform)에 올라서고, 사방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원했어요. 유리 상자로 바람과 온도를 조절하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한 판의 지붕으로 비를 막으며, 그 지붕도 위에는 식재를 한 녹색 지붕(green roof)이죠. 화장실과 에어컨 등은 플랫폼 위에 놓인 돌상자, 나무상자, 거울 상자 형태로 표현하고 한 지붕 아래에 놓아서 사방이 틀어진 느낌을 해치지 않으려 했어요. 비를 피하고 온도가 조절되는 공간이지만 정원 일부로 설계하고 싶었어요. 연못의 경계로 놓인 돌, 플랫폼에 놓인 상자들이에요.   조경 작업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CJ 필동 연수원은 박진(Jean Park) 소장님이 설계한 건물이에요. 조경을 맡아달라고 해서 제가 조경가 김용택 씨와 함께 뒤늦게 참여했어요. 엔트리 가든, CJ 마크 식재, 물 정원(water garden), 아트리움, 루프탑과 소나무 공간 등을 디자인했어요. 알로에마임이 땅이 넓은 연수원이라면 이건 도시 한가운데(urban) 있는 연수원이라서 나무와 야생화, 코르텐 스틸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거예요. 각각의 공간들을 분리해서, 코너를 돌 때마다 소나무, 자작나무를 두어 다른 공간에 와있는 변화를 주고 싶었죠. 지붕에서는 남산이 보이는 전망이 좋아서 식재는 야생화로 낮게 하고 남산 자체를 바라보게 했어요.   마임 빌리지는 조경과 협업하는 건축으로, CJ 연수원에서는 건축과 협업하는 조경으로 작업하셨는데, 태도나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나요? CJ연수원의 경우, 건축적으로 손댈 여지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빈 공간 채우기(fill in the blank)였어요. 수종과 코르텐 스틸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연못 가장자리라든지 그 공간 안에서 건물 재료와 맞춰가는 식으로 풀어드리는 것이었지, 과격하게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데크를 더 납작(flat)하게 한다든지 건축가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제안을 해서 그게 받아들여 진 건 좋았어요. 조경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단순히 빈 공간 채우기보다는 나름대로 더하고 싶은 게 있죠.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조경이 들어갔는데, 지붕에 사이프러스를 흐드러지게 심었어요. 잘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여지가 없을 것같아도 재미있는 공간이 생겨요. 시대에도 맞고요.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 같아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가 1987-97년 사이의 한국 건축운동을 주목했는데,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의 움직임도 다루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작업과 분위기는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해외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분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오면서 스튜디오를 통해서 그 에너지와 정보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이끌면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기 체계를 잘 잡았던 것 같아요. 전적인 자유(total freedom)! 학생과 공간이 있고, 큰 설계프로그램은 김준성 교수님이, 정진원 교수님은 행정을 맡으셨고 각 선생님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셨어요. 선생님들은 자유자재로 가르칠 수 있고, 스튜디오 학생들도 열심히 하고 굉장히 좋았어요. 부담 없이 건축 실무를 하면서 스튜디오를 할 수 있도록 겸임 체계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곳에서 선배들을 만나는 것뿐 아니라 국내에서 활동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어요. 제가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그 열정이 다 모여서 스튜디오 크리틱을 하고 전시를 했죠.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스튜디오 시스템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처음이라, 모두 그것을 정착시켜 보자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선생님들끼리도, 학생과도 재미있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참 좋았어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튜디오 공간이 열악했어요.   함께 강의했던 분들과 공유하는 생각과 정보도 많았을 것 같아요. 굉장히 다양했어요. 백문기 선생님, 김헌 선생님, 김헌태 선생님, 토마스 한 등 국내파, 국외파 다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큰 크리틱 마다 외부 건축가분들을 초빙해서 늦는 줄 모르며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여러 선생님이 있다 보니 좋았죠.   여름 워크숍 형식으로 열렸던 서울건축학교에도 튜터로 참여를 하셨나요. 네. 서울보다는 여름에 열렸던 무주 워크숍에 합류했었고, 강의처럼 단편적으로 참여했었죠.   당시 여러 활동을 하면서 한국 건축의 담론이라고 할 만한 이슈가 있으셨나요? 그런 논의는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서울건축학교가 공간 건물에서 수업했을 때인데, 그때는 제가 크리틱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어요. 무주 워크숍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한예종 민현식 교수님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고 이종호 선생님과 의견이 달라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보는 각도가 다른 게 흥미로워요.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어떤 담론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보다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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