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5월, 김진애 박사를 만났다. 그가 2000년에 설계했던 인사동길에서다. 검은 전벽돌 바닥과 골목을 상징했던 많은 장치는 사라졌고 인사동길의 성격도 달라졌지만, 석물과 간판, 골목길 안의 이야기들은 이제 인사동길의 일부가 되었다. 표구방과 필방 대신 호객을 위한 입간판과 플랜카드가 내걸린 인사동길 사이로, 김진애 박사의 힘 있는 목소리가 흘렀다.
서울대 공대의 유일한 여학생, 도시건축가, 기획자, 편집자이자 발행인, <타임>지 선정 차세대 리더 100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까지, 김진애 박사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전문가로서 폭넓은 행보를 보여준다. 도시와 건축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가 보여준 연구와 설계, 그리고 전시와 출판도 의미 있지만, 건축기본법과 건축도시공간연구소를 만든 것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국회의원으로서 4대강 곳곳을 누비며 전문가의 역할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성 전문가의 아카이빙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김진애 박사가 던진 방향은 명확했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강조하기보다 전문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것. “전문가의 역할은 왜 필요한가? 또 그런 역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 앞길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가?” 건축계의 영웅적 서사와 과잉된 자아를 비판하면서도, 인터뷰 곳곳에는 건축이 외연을 넓혀 더 넓은 세계와 만나길 바라는 바람이 묻어 있었다. 건축과 도시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말했던 ‘자라기 시리즈’는 이제 한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가 되고 성장해 시민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건축이지만, 세상을 향해 큰 걸음을 걸어온 그의 세상은 도시를 넘어 사회와 전방위로 만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인사동길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라디오 애청자들, 그의 책을 좋아한 팬들이 악수를 청해왔다. “요즘은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야 성공을 한 거예요. (웃음)” 전문가의 엄격함은 종종 까칠함처럼 보이지만, 그런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김진애 박사의 필살기는 ‘귀여움’이다. 여전히, 지금도 김진애 박사는 인생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여러 책에서 어릴 적 낙산 창신동 달동네를 언급하셨어요. 집과 동네에 대한 첫인상인가요?
<이 집은 누구인가>라는 책에 썼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계속 꿈에 나오고 머릿속에 맴돌아요. 나중에 커서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전쟁 끝나고 서울 와서 처음 살던 곳이 창신동 달동네였다고 해요. 세 살 때였는데 그 기억이 강렬해요.
창신동보다 더 이전 기억이 있어요. 바위 위에 하얀 빨래들이 쫙 널려 있는 걸 내려다보는 기억이에요. 그게 바로 수원천입니다. 예전에 수원천은 돌이 자연스럽게 깔려 있어서 온 동네 아줌마들이 나와 빨래하고 바위 위에 널었다고 해요. 그때 흰옷을 많이 입었던 모양이죠? 그 기억이 강렬해요. 초등학생일 때 할머니 집에 가는 데 와본 기억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엄마에게 우리 여기 산 적이 있냐고 물으니, 수원 외갓집에서 몇 개월 얹혀산 적이 있다고 해요. ‘네가 (만)두 살 때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하더라고요. 공간에 대한 기억이 매우 좋았던 모양이에요. 당시 살던 곳의 사진이 남아있던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 남아 있고 꿈에 가끔 나타나요. 그것이 첫 기억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던 기억을 어른이 되어서 확인하셨네요.
사람마다 특정 기억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뛰어나거나, 인물에 대한 기억이 확실한 사람이 있어요. 확실히 저는 장면, 공간 체험에 대한 기억이 강한 것 같아요. 영화를 볼 때 저곳은 어디라고 바로바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놀라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게 감성과 배움이 같이 얽혀 있는 거잖아요? 그게 저에게 체질화돼 있는 것 같아요.
집에 대해 기억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오장동의 이층집에서 오래 살았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스물다섯 평 집에서 열 명이 우글우글 살 때였어요. 사춘기였기 때문에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았고, 꿈에도 자주 나오는 집이에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 집을 찾으러 갔는데, 우리 집과 주변 골목까지 다 합쳐서 8층짜리 사우나 건물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집과 골목이 다 없어지고 이상한 건물이 서 있었는데, 파괴의 현장에 대해 충격적으로 느끼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이후부터 뭔가 뒤숭숭하면 그 사우나 건물이 꿈에 나타나요. (웃음)
아버님이 일하시던 종로통의 가게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에요. 도시에 대해 인식한 장면이었다고 하셨죠.
맞아요. 2층 한옥. 유치원 졸업하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못 오시고, 졸업식 끝나고 엄마랑 나랑 중국집에 축하파티를 하러 갔어요. 난자완스란 것을 처음 먹어본 날이에요. 종로에 전차가 다녔고 눈도 막 뿌리던 날, 그때 2층 한옥을 처음 봤어요. 아버지가 무척 커 보이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종로통에 대한, 2층 한옥에 대한 그 기억이 공간 중에서도 강렬해서 <도시 읽는 CEO>에서 그 장면을 묘사했어요. 아마 도시에 대한 제 첫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시장에 대한 내 애정이나 사랑도 아버지가 광장시장 바로 앞에서 가게를 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광장시장은 제 어렸을 적 공간 중 하나거든요. 많이 다녔고 요새도 많이 가요.
공간에 대한 경험이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왜 건축과를 갔느냐에 대해서는 질문을 많이 받아서 공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일부러 답을 안 했어요. ‘그래서 건축과를 갔구나’라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유일하게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이화여중·고를 다녔던 걸 거예요.
이화여중에 처음 갔는데, 거기에는 원형극장이 있습니다. 그 당시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원형극장 같은 게 거의 없던 시기였잖아요. 하얀 돌이 동그랗게 반원으로 있고 가운데는 파란 잔디밭이 깔린 그 모습은 처음 보는 공간이자 기하학적인 영감이었어요. 말하자면 나보다 더 크고 숭고한 무언가를 처음 느낀 것 같아요. 강렬한 체험이었어요.
이화여중고 캠퍼스가 원래 역사가 길어서 다른 학교들보다 스토리가 매우 많아요. 어떤 곳은 귀신 나올 것 같고, 도깨비도 나올 것 같고요. 여러 종류의 스토리가 많은 공간에서 사춘기를 보냈다는 게 영향을 미쳤을 거로 생각해요. 이화여중고에 다닌 것 때문에 건축과를 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공간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좋죠.
중고등학교 때 많은 책을 읽으신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셨나요?
지금도 상처받지만, 그때 받았던 큰 상처는 ‘넌 참 이상하구나’라는 말이었어요. 어렸을 때 제가 참 많이 물어봤다는 거예요. 그걸 이상하다고 하니, 상처받아서 아예 입을 다물었어요. 그리고 책으로 도망갔어요. 책을 읽으면 어른들이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터득해서, 책으로 제 주변에 벽을 쌓았죠. 그게 도움이 됐어요. 책 속에서는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고, 마음대로 물어볼 수 있으니까.
또 그때는 동화를 보던 시대가 아니었어요. 어른 책을 막 읽을 때니까 도움이 됐어요. 더군다나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책을 수십 번씩 읽습니다. 50번, 100번 읽고 줄줄 외웠던 책이 세 권 있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 <플루타르크 영웅전>, <공자 이야기>. 이 책들은 에피소드도 많고 나중에 보니 그 안에 철학적, 미학적, 역사적, 신학적, 인간상의 욕정과 탐욕, 배신, 불륜, 응징 등등 인간의 스토리가 다 엮어져 있어요. 그것을 어렸을 적에 터득한 덕분에, 컨텍스트나 핵심을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진 것 같아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그건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커지는 거거든요. 어렸을 때 그걸 체험했다는 것이 좋죠. 요새 어린이들에게 다독을 권장하지만, 저는 ‘그러지 말라, 좋아하는 것만 읽고 또 읽으라’고 해요.
책뿐만 아니라 영화, 만화 등등 문화 콘텐츠를 많이 즐기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는 한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화나 만화를 보는 게 노는 거만은 아니에요. 영화는 특히 좋아했어요. 이화여중 시절, 머리를 풀면 어른스러운 외모였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생인 줄 알고 남학생들이 쫓아오고 했으니까요. 그때 영화관을 많이 갔어요. 학교에서는 제가 모범생으로 통했지만, 이상한 짓은 다 하고 다녔어요. 여러 극장을 다녔지만, 그 중에도 특히 대한극장 앞에 있는 아테네 극장에 자주 갔어요.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을 텐데, 거기서 일주일에 영화 하나씩은 꼭 봤어요.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착한 딸인 줄 알지. 그때는 반란하듯 나 혼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막 친 거죠.
영상 매체가 주는 강렬함이 있잖아요. 당시 봤던 영화 중 지금도 꼽는 게 있으신가요?
제 성향과도 결부된 이야기인데,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잖아요. 제 경우 남들보다는 약간 더 자존감이 높고 호기심은 많았던 것 같아요. 곱게, 부유하게 자랐을 거로 생각하지만, 어렸을 때 갈등을 많이 겪으며 자란 사람이에요. 1남 6녀 중 셋째인데, 집안에서는 대우받고 자란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차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넌 참 이상하구나’라는 말도 여자라서, 딸이라서 그랬고요. ‘네가 아들 역할 한다’라는 말이나, 아버지가 “있는 건 딸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도 듣기 싫었어요. 무엇보다 어렸을 때는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롤모델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갖는 딜레마와 갈등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 책 등을 많이 봤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면서도 ‘이걸 좋아하면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중 정말 이상했던 건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에 빠진 거예요. 대단한 영화예요. 지금도 꼭 봐야 하는 고전 중 하나예요. 영국인이 사막에 갔다가 전쟁이 일어나면서 아랍인 편을 들며 싸우지만, 결국에는 열강들에 의해서 쪼개지고 배신당하죠. 사막 영화인 데다가 여자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아요. 다정한 장면은 요만큼도 없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그 영화를 혼자서 세 번이나 봤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죠. 그 영화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도 이상했고, 혼자 가서 다시 본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런가 하면 고1 때 본 프랑스 영화 <다시 한번 그대 품에(La Motocyclette, 1968)>도 있어요.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결혼 전 애인이 사준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에 남자를 만나러 가는 영화예요. 그때로써는 정말 에로틱한 영화였죠. 지금 봐도 그래요. 징그럽게 잘생긴 알랭 들롱과 이상하게 매력적인 마리안 페이스풀이라는 여자가 목 밑에서 자크로 쭉 내릴 수 있는 가죽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는데, 무지하게 관능적인 영화예요. 그 영화에 또 홀딱 빠졌어요. 몇 번을 보러 갔어요. 이건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거예요. (웃음) 그땐 관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저에게 여러 가지 성향이 있었어요.
그 영화에 왜 매료되었을까요?
<아라비아 로렌스>에서 배운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에요. 결단이란 정말 멋있는 것이구나. 밤이 되면 사막 바람에 모래가 물결치며 일렁이잖아요. 한 남자가 밤을 새우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그 모래사막을 배경으로 ‘아카바(를 쳐야겠다)!’라고 말하며 나오는데, 완전히 매혹당했어요. 그 남자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 보이는 결단에 대한 의지에 반한 거예요. 저에게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는 관능적인 것, 말하자면 일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빠진 것 같아요. 도덕과 인간성과의 관계 등에 관해 관심이 컸어요.
나중에 보니 이런 것들이 제 성향을 드러내 주는 거예요. 여자 중에서 <아라비아 로렌스>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명작이긴 하나, 재미는 없다고 말해요. 특히 피터 오툴(Peter O'Toole)이라는 배우는 눈이 새파랗고 머리는 금발인데, 그 거친 사막에서 새파란 눈과 금발, 그리고 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저는 불길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그때부터 ‘아, 혁명이란 불길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고1 때 건축과를 진학하겠다고 택했지만, 끝까지 사회학이나 심리학은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특히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에 굉장히 매혹됐었어요. 보니까 제게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요. 만약 건축과를 안 가고 다른 곳을 갔으면 만만찮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농담을 합니다. (웃음)
그럼에도 건축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성향도 성향이지만 공부도 이것저것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학도 무척 재밌어했어요. 특히 기하학. 인생에서 갑자기 눈이 깨어서 다른 차원이 보이는 때가 있잖아요. 중2 때 처음 기하학을 배우는데 그랬어요. 마침 담임선생님도 기하학 선생님이었는데,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아서 나를 높이 띄워주시는 거예요. 다른 친구들은 40점을 못 받았는데. (웃음) 제가 기하학에 능하다는 것, 동시에 공간 추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전공을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으로 독립을 꼽으셨어요.
독립이란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사는 것, 그게 유일하게 자존심을 지키면서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10살 무렵에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독립이었어요. ‘의대는 돈은 벌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남 아픈 거 보기 싫어’ 하면서 OX를 쳐갔어요. 건축과는 고1 때부터 맘에 두었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를 잘하면 많이 권하기도 했고, 다른 전공도 많았지만 저를 매혹시키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는 고1 말에 이과, 문과를 정해요. 솔직히 이과 중에 마음에 드는 학과가 없었어요. 수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천재 같지 않았고요. 그러나 먹고 살기에는 이과가 유리해 보였죠. 그래서 그중에 열심히 고른 것이 건축과였어요.
박사님이 쓰신 글에서 건축은 애증의 대상처럼 보여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과는 제가 잘 몰랐기 때문에 택했다는 거예요. 저는 건축을 ‘축복이자 저주’라고 정의해요. 작업 자체로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이만한 게 없어요. 인간의 본능, 지능, 감성, 이성, 시간, 미래 등을 다 이야기하고 만들 수 있는 기막힌 작업이에요. 그런데 업이 되면 완전 저주예요. 권력의 앞잡이, 자본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아마 건축과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야가 없긴 하죠.
그런데 건축에는 주문자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거예요. 40대에 실무를 할 때, 건축업이 정말 싫다는 생각을 꽤 했어요. 주문자들의 수준이 너무 낮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변덕을 바꿔 나가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다품종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면 100개 중 한 개만 성공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고요.
나보다 상당히 위인 언니가 미대를 다녔는데, 작가 생활을 하는 걸 봤어요. 그때 어렴풋이 작품을 팔고자 저렇게 자기 세일즈에 목매는 건 절대 안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건축에도 그런 홍보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죠. 오빠는 경영학과를 나와서 사업을 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 건축과를 가게 된 거예요. 돌이켜보면 굉장히 잘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잘 알았더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건축, 건축가에 대한 정보, 혹은 알만한 사람들은 없었나요?
전혀, 정보가 하나도 없었어요. 더군다나 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더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즈음이면 김수근, 김원, 김중업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랬다고 해요. 저는 하나도 몰랐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죠. 유일하게 형부가 인테리어 건축가였을 뿐이고, 집안에도 공대 나온 사람도 없고, 특별하게 좋아한 사람도 없었고요. 그런데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니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또 고1 때 미술을 하러 다녔는데, 그때 미술 선생님이 건축과를 못 가서 미술을 했다고 했어요. 아마 그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래? 그럼 내가 해봐도 괜찮겠구나.’ 싶었죠.
당시 건축과 컷트라인은 상당히 높은 편 아니었나요?
맞아요. 특히 제가 들어간 71학번 건축과가 공대에서 가장 높았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최초이자 마지막이라고 해요. 그때는 고3 때 딱 한 번만 원서를 넣을 수 있었는데 위험 부담이 매우 크잖아요. 솔직히 저는 홍대에 가고 싶었어요. 언니가 홍대를 다니기도 했고, 예술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였죠. 보니까 그곳이 2차더라고요. ‘그래? 그럼 떨어지고 2차로 홍대 가지 뭐’ 그랬어요. (웃음)
공부를 잘해서 나올 수 있는 여유 같아 보이는데요? (웃음)
사실 마지막에 건축과를 정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그때 서울대 건축과에 가겠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다 반대했어요. 어쩌면 그렇게까지 반대를 하는지.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남자예요. 아버지, 삼촌,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오빠, 담임선생님 등등 다들 의대에 가라고 했어요. 사실 그때는 건축과라기보다는 ‘공대’라고 이야기했어요. 여자가 왜 공대를 가냐는 거죠. 의대는 더 어려워도 여자들이 많잖아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건축과를 간 것도 있어요. 또 홍대에 가려면 서울대 떨어져서 갔다고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어요. 당시 제 성적이 학교에서 꽤 괜찮았는데, 공대는 전체를 대조할 수가 없었어요. 모르고 한 거죠.
김광현 교수님, 승효상 소장님과 동기이시죠?
동기예요. 우리 동기들이 저를 무시 못 하는게 커트라인이 높기 때문이에요. (웃음) 전혀 관심 없었는데, 졸업 후 한참 뒤에 한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제가 입학 성적이 상당히 좋았대요. 그러니 나를 무시 못 하지. (웃음) 게다가 제 분위기가 만만하게 보이진 않잖아요?
그런 분위기는 선생님의 타고난 성격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외부에 대한 대응이라고 보시나요? 세상을 향해서 늘 기 싸움을 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신 게 기억에 남아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두 가지 다 아닐까요? 평생에 걸쳐서 느끼기도 한 것인데, 이런 거예요.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다 있죠. 저는 그게 남들보다 좀 더 강한 편인 것은 분명해요. 내 시간과 결정을 남에게 통제받지 않겠다는 것은 제 강한 의지 중 하나예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 말투나 모든 것에 그것이 녹아 있어요. 그래서 누구나 그걸 다 압니다. 제 마음과 생각을 통제한다는 것은 조금 봐주겠는데, 제 시간을 통제하려 들면 딱 질색하거든요. 저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게 굉장히 강하죠.
그런데 ‘나이스’ 하지는 않지만, 직접 만나면 남들에게 잘 대해줘요. 모든 사람이 필살기가 있는데, 제 필살기는 남을 잘 웃겨 준다는 거예요. 유쾌하게 해준다는 거죠. 이야기하다 보면 나와 논다는 느낌이 드나 봐요. 많이들 저에게 와서 카운셀링을 받기도 해요. 지금도 저를 괜찮아 하는 남자들은 다 ‘이 여자는 재미있다’라는 거예요. ‘피곤하다, 까칠하다 그러나 재미는 있다’죠.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다음 인터뷰 ②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