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
신행정수도팀은 구성원도 상당히 파워풀했지만 도시 계획에서도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건축 쪽은 그렇게 큰 계기가 없었다고 봐요. 그런데 도시 쪽의 변화를 보면 신행정수도 팀의 작업 자체가 말하자면 도시계획의 새로운 오프닝을 만들어준 거예요. 기관이 만들어지고, 학교도 많이 만들어졌죠. 저도 그때 도시계획이라는 걸 처음 경험했어요. KIST ‘신행정수도 팀’에 가서 일한 약 열 달 정도가 말하자면 엄청나게 신나는(mind-blowing) 경험이었죠. ‘저 분야에 목을 멜 만도 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처음으로 공부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된 거죠.
당시 기억나는 구성원들이 있으신가요?
강홍빈 팀장은 물론이고 안건혁, 우규승, 황기원 선생님도 그때 뵈었어요. 당시 권력에 있는 사람들도 몇몇 봤고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보고하는 걸 보면서 흥미로웠어요. 대학원 때도 지도교수님이 발표하실 때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알던 쟁쟁한 교수들이 단장에게 막 야단을 맞는 거예요. 너무 웃기는 일이죠. 물론 업계에 있다 보면 권력이 바뀔 때마다 안이 바뀌거나 프로젝트가 바뀌는 일들을 저절로 알게 되지만, KIST에서 그걸 생생하게 배운 거예요. 신행정수도팀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면서 없어졌잖아요? 그사이에 이런 저런 관계와 권력 게임이 다 보였는데 매우 흥미로웠어요.
KIST에서 일하고 나니 공부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학 간 건 남편이 가기 때문에 나도 간 거예요. (웃음) 대학원 다닐 때 결혼했으니까. 사람들은 제가 굉장한 야심으로 MIT를 갔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고, 남편이 하도 MIT 가고 싶어 해서 저도 따라간 거예요. (웃음) 그냥 공대인 줄만 알고 갔어요. 게다가 강홍빈 박사가 MIT 출신이라, 그거 보고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건축과 도시 분야에서 MIT에서 유학하신 분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꽤 있지만, MIT 출신 중에 강홍빈 박사와 제가 좀 특이한 편이에요. 오지랖이 넓은 편이고, 의지, 추진력이 강한 편이에요. 솔직히 제 모든 공부는 MIT 가서 다 깨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MIT는 학교라기보다 월드 클래스의 ‘공부 생태계’라고 봐요. 교육과 연구와 비즈니스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요. 연구 조교도 다 돈과 연관돼 있고, 그런 현장성을 같이 배울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좋았어요. 제 기질에 맞는 학교에 간 거예요.
MIT 학교 자체도 오지랖이 넓어요. 하버드 대학은 가번먼트 스쿨이나 건축대학원이 세계의 패권을 가르는 행정가, 건축가를 키우는 목적이 뚜렷해 보여요. MIT는 그보다는 좋은 건축, 인류에 기여하는 것,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좀 더 사회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도시계획가 케빈 린치나, ‘아키텍처 머신(Architecture Machine)을 창안한 디지털 혁신가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티 등, ‘기본이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에요. 그런 게 저와 정말 잘 맞았던 거죠.
박사는 남편이 공부하느라 오래 있으니 나도 할 수 없이 한 것이지만 (웃음), 사실 MIT에서 석사 하면서 공부에 대한 무한 열정을 깨달았습니다. 첫 1년의 열정은 날개 돋는 것 같고 막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박사 학위를 선택한 것도, 학위를 딴 것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박사 과정이 한 3년 지나니까 하기 싫어져서 한국에 돌아가서 일할까도 했어요. 그런데, ‘박사 학위 없으면 누가 붙여줄 줄 알아?’라는 선배 말에 정신을 차렸어요. (웃음) 2년 더 논문 쓰고 졸업했죠. 제 많은 배움은 모두 MIT에서 배운 거예요. 남의 언어로 배운 게 불행이기도 하고, 좋은 점이기도 하지만.
MIT의 분위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곳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유학 후 돌아오자 사람들이 저에게 꽤 놀랐던 건, 제가 우리 사회에서 오래 사회생활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돈 문제나 행정과 같은 실무(practice)에 굉장히 빠삭하다는 거예요. 또 추진력도 놀랍다고 해요. 다른 게 아니에요. 엮어내는 능력인데, 무언가 필요하면 사람들 모으고 펀딩하고 일 코디하는 등, 이런 것을 모아내는 거죠. 그걸 MIT에서 배웠어요. 거긴 일상의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요. 당시 MIT에 ‘Lab of architecture and planning’이 있었는데, 그 랩에서 3~4년 일을 했어요. 그곳의 디렉터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마지막에는 앉아서 영수증 하나하나 붙여가며 정산까지 하더라고요. 정산을 어떻게 하는지, 세금 보고서는 어떻게 쓰는지, 제안서는 어떻게 쓰는지, 프레젠테이션은 어떻게 하는지, 네트워킹은 어떻게 하는지 다 그때 배웠어요. 그런 것을 다 알고 오니 만만한 박사가 아닌 거죠.
실무적인 훈련도 하셨지만, 그 시기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영향을 받은 한나 아렌트의 책을 언급하셨어요. 영향을 받은 학자, 건축가가 있을까요?
제인 제이콥스와 한나 아렌트는 책으로 접한 사람들이고, 학자와 건축가는 특별히 없어요. 좋아하는 건축가는 당연히 몇 사람 있지만,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아본 적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못마땅하게 보이는 게 많았어요.
건축가 강연은 MIT가 아니라 하버드 가서 듣곤 했어요. 거긴 건축가 강연이 많았고 이미 그때부터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 씨앗이 있었던 때였으니까요. 그렇게 건축가 강연을 들어도 별로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다만 한 사람, 렘 콜하스는 유일하게 강연도 책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네덜란드 사람과 통하는 게 있는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면서 이상주의적면서도 굉장히 사업가적이에요. 그 점을 괜찮게 느꼈지만, 굉장히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였어요. 물론 알바 알토, 루이스 칸, 카를로 스카르파의 건축물을 보고 감탄한 적은 당연히 있죠. 여전히 건축은 엄청나게 위대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당대의 건축가들이 평소에 주창하는 것 중에서 들을 가치가 있는 건 귀하다는 생각을 하죠. (웃음)
건축 혹은 건축가에 대한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하셨는데, 같은 의미일까요?
늘 갖고 있던 생각인데, MIT 가서 이걸 재확인했다고 봐요. 대학 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도 이야기할 수는 없었어요. 너무 반란하는 것 같아서요. 건축의 목적은 ‘좋은 건축, 좋은 건축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위대한 건축, 탁월한 건축가’가 아니라요. 좋은 건축가는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환경적으로 괜찮은 건축을 만들면 되는 거예요. 대신 탁월한 건축가는 교육을 통해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0.000001%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좋은 건축의 토대가 꽤 많이 이루어지면 거기서 누구도 모르게 나올 수 있어요. 그게 제 사회관이자 세계관이에요. 전체적으로 좋게 끌어 올리고, 그 안에서 탁월한 건축가가 나오는 거예요. 탁월한 건축가란 열심히 키워낸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훌륭한 건축가를 만든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판타지예요. 그 판타지는 지금도 여전해요. 더군다나 지금 시대의 ‘스타 마케팅’도 작용하고요. 스타 마케팅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바가 아니에요. 저는 스타 마케팅을 질색하지만, 요즘 사회는 그렇게 자신을 홍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게 딜레마죠.
여전히 제 철학은, 건축가든 도시계획가든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작업을 하겠다는 야심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사회에 괜찮은, 사람에게 좋은,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적으로도 환경적으로 자연에 죄를 덜 짓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위대함이 어디에선가 튀어나온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보면 위대함에 대한 에고 강한 남자들이 좌지우지해서 사회를 꽤 망쳐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비판하는 거죠. 에고가 강한 것은 무지 싫어요.
박사 논문을 공공 공간의 민영화에 관해 쓰셨어요. 한국에서는 꽤 이른 주제를 다루셨는데요.
미국에서는 전혀 이르지 않았어요. 1980년대가 민영화에 관해서 얘기하던 때였어요. 제가 조금 특이했던 것은 한국이 아닌 미국 사례로 논문을 썼다는 거예요. 보통 미국 박사학위의 경우에도 유학생들은 한국을 사례로 많이 쓰잖아요? 저는 정면승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 주제로, 미국 헌법까지 깊이 공부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어요. 미국에서는 ‘freedom of speech’, ‘freedom of space’ 등 공공(public)과 관련된 건 전부 헌법에 걸려 있어요. 헌법에 대한 해석과 헌법 자체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 나오는 판결들, 우리말로 하면 헌법소원 같은 거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조금 조금씩 나아지는 거예요. 법 자체는 바뀌지 않더라고 관행이 나아지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민영화가 시작되지 않았나요? 한국의 본격적인 변화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본격적으로는 2000년대 이후에 벌어졌어요. 이야기가 시작된 건 1998년, IMF 이후라고 보면 되어요. 어쩔 수 없이 민영화가 고려돼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는 생각했어요.
1980년대에는 세계자본주의라던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어서 MIT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그때 큰 딜레마가 이른바 글로벌리즘과 지역주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었거든요. 그 이슈에 신경 안 쓸 수 없었고요. 또 MIT는 항상 기술 혁신의 최전방에 서 있는 곳이라 ‘힘이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어디에 가 있느냐?’,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가 많았을 때였어요. 민영화는 그 논제 중 하나였고요. 저는 민영화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편은 아니었고 그게 우리의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꾸기 때문에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민영화 자체가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요. 민영화에도 여러 레벨이 있기 때문에, 공공성이 필요한 부분에서 민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운용의 원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사회의 민영화는 너무 급하게 진행된 점이 있기는 해요.
한국의 민영화 과정에서 놓친 게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놓친 건 엄청나게 많죠. 도시 분야에 관해서만 이야기합시다. 가령 이명박 정부 때 SRT는 지금 KTX와 구분되어 있지만, 당시 코레일이 철도시설공단과 나누고 난리였잖아요. 그런 경우는 누군가에게 먹을거리를 해주려고 한 거라고 봐요. 가령 메커리와 함께 지하철 민영화도 많이 진행하고, 나중에는 학교 시설까지도 민간자본과 턴키로 많이 진행하고요. 그게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건축가를 아주 불쌍하게 생각해요. 앞으로 더욱더 힘들어질 거예요. 주문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건축업이 너무 저주스럽다고 얘기했잖아요. 앞으로는 주문자도 명확지 않은 시대가 될 거예요. 특정 권력자나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의 흐름에 따라 먹고 튀는 부동산 개발이 너무 많은 거예요. 지금도 시행사, 건설회사라고 하지만 자신이 주인이 아닌 경우도 매우 많아요. 대게 은행 펀딩으로 하는 거죠. 모르는 사람들, 즉 자본이 주인인 경우가 너무 많아요, 물론 점점 더 상업적으로 될 것이고, 스타 마케팅이 더 횡행할 겁니다. 그런 사회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많은 부분 더 힘들어질 거예요. 운영 방식도, 경쟁력도, 면역력도, 정치력도 크게 달라져야 하지요.
귀국 후 대한주택공사에서 주택연구원으로 일을 하셨어요. 손에 꼽는 프로젝트가 무엇인가요?
가장 재미있게 작업했던 것은 오자마자 참여했던 밀라노 트리엔날레 서울전시관이었어요. 서울시가 발주한 프로젝트인데, 이미 완료된 줄 알았더니 이탈리아 주최 측에서 연기해서 무려 1년 반이 미뤄졌어요. 그래서 제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유학 갔다 오면 한국에 대해 다시 연구한다는 게 꽤 적응 시간이 걸리는데, 저는 다행스럽게도 돌아오자마자 열 달 동안 서울에 대해서만 생각했어요. 그때 완전히 새로운 공부를 했습니다. 10개월 동안 우리의 자료를 들여다보고, 다시 찾았던 시간이 저에게는 정말 좋았어요. 또 그렇게 공부한 것을 개념화해서 공간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나중에 서울포럼이라는 이름 짓게 된 것도 아마 그 영향이었을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준비하는 동안 거의 이혼당할 뻔했죠. (웃음) 정말 징그럽게 일을 했으니까. 끝나고 나서 한숨 돌리는데, 또 신도시 프로젝트가 바로 시작됐죠.
1기 신도시 도시 계획은 한국에 본격적인 신도시 설계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지 않나요?
글쎄,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그리 중요했던 것 같지 않아요. 솔직히 신도시 프로젝트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라 그리 힘들지는 않아요. 다만 정책결정자들에게 보고하는 일이나, 국토부(그때는 건설부)에 가서 설명해야 하는 것, 심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 힘든 점이었죠. 그 외에는 아주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매우 집중적으로 우리 도시개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던 점은 전문가로서 아주 좋았죠. 알다시피 신도시 프로젝트는 설계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분양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수요를 어떻게 따져봐야 할지 마케팅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따져 보게 되니까 ‘아,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를 알게 되는 거죠.
‘산본 신도시’는 제 고향 땅에 신도시를 만든 거라서 그 과정에서 감정도 이입되었고, 이렇게 고향 땅을 뒤집어엎어도 되나 하는 윤리적인 딜레마도 겪었고요, 그래서 좀 더 설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도시가 자라고 나이 먹는 과정을 계속 모니터하게 돼요. 무엇보다도 주민들로부터 괜찮은 평을 받아서, 기분 좋죠. ‘부동산값이 막 오르는 도시’는 아니더라도 ‘살기 좋은 도시’라는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산본 신도시를 끝내고 드디어 연구다운 연구를 약 2년간 했습니다. 바로 ‘도시형 아파트’, 그리고 ‘임대조건부 분양 주택’이에요. 요새 이야기하는 반공공 임대주택(민간임대주택)이에요. 몇십 년 전에 그런 연구 제안을 했으니까, 연구로서는 훌륭했어요. 영구임대주택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왜 연구를 했다 하면 히트를 칠까요? (웃음) 그때 2년간 한 연구가 화제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국토부가 저를 찾아오고 신문에 발표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경제 신문 쪽에서도 저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밀라노 트리엔날레 관련해서 주류 언론들이나 문화계 쪽에서도 제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또 흥미로운 프로젝트로는, 당시 과학기술부에서 원천기술개발을 했어요. 그중 건축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꽤 적극적으로 주도하게 됐어요. 일본의 경우는 ‘센추리 하우징(백 년 주택)’같은 프로젝트들이 많이 진행되었죠. 이런 일은 과학기술부와 국토부가 절대적으로 함께 연결되어서 일해야 해요. 알다시피 우리나라 건설기술 분야는 다 과학기술에 포함돼 있거든요. 이런 일들은 여러 부서들을 함께 엮어서 해야 하는 일이었거든요. 저는 그렇게 엮어서 하는 걸 정말 재미있어했어요.
제가 일했던 대한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소가 이 분야 사람들을 엄청나게 배출했어요. 그 사람들이 지금 중진들이 되었죠. 김진애를 배출한 것만으로도 위대하지 않아요? (웃음)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다음 인터뷰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