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포장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건축의 본질이 마치 철학이나 정신적 가치인 것처럼 대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저는 건축의 본질은 결국 하나라고 봐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나약한 인간을 척박한 환경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는 기능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아무리 멋져도 무너져서 사람이 죽으면 소용이 없는 거고요. 나머지는 다차원적으로 파생된 거죠.
팔기 위한 집도 등가의 가치를 갖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자기만을 위한 것 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지점은 꼭 있어야 하고요. 예를 들어 넘지 못하게 담을 치는 것은 그 기능에 충실한 것이지만, 접근도 못 하게 송곳을 박아놓는 건 관계성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상업 시설이건, 뭐건 공공의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어요. 그것의 많고 적음이 건축의 좋음과 나쁨의 판별 기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죠. 기술의 발전, 새로운 실험, 그런 여러 가지 가치가 공공성에 영향을 줘요. 건축 심사를 해보면 공공성의 개념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려 오히려 그 깊이나 진실성을 느끼기 힘든 것 같아요.
특히 젊은 건축가들에게 주는 상에서 공공의 영역에 이바지해야 인정받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향이 있었죠.
맞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미래 공공의 가치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저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건축물을 ‘공공적’ 이라 보고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실무를 쌓았는데, 첫 직장을 선택한 기준이 있었나요?
첫 직장으로 SOM에 갈지, KPF에 갈지 고민을 조금 했어요. 그러나 전 제가 없으면 망하는 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기여(Contribution)였어요. ‘내가 없으면 우리 회사는 힘들어’라고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야심가의 면모가 보이는데요?(웃음)
스스로에 대한 존재 가치의 문제였어요. 이미 모든 것이 세팅된 환경에 있기보다는 개척하고 싶었어요. 이바지할 바가 없는 직장이라면 내가 그 직장을 다닐 이유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고른 회사가 ‘Chan Krieger Associates’라는 도시설계 회사였어요. GSD나 MIT 출신의 12~13명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부 도시설계를 전공했더라고요. 도시설계, 블록설계 하다 보면 버리기 아까운 건축 설계의 부분이 필요했는데,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회사의 건축 설계는 혼자 도맡아 했어요. 엄청난 자유도 있었지만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죠. 그로 인해 많이 성장했지만, 고생을 사서 한 거예요. 거기서 <Brigham & Woman’s Hospital>이라는 설계비 300억 규모의 공모를 당선시켰어요.
그런데 결국 그 프로젝트에 교수님의 크레딧이 나오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이해는 가요. 당시 사무소에서 한국인 PM은 유태인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 불리한 상황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이유가 더 화가 나더라고요. 당시 이러한 상황이 소문이 나서, 우규승 선생님의 부름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어요. 당시 우규승 건축사무소에는 10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고 매번 1명은 한국 사람이 있었어요. 서울대학교 최두남 교수님부터 시립대 이선영 교수님, 서울대학교 최춘웅 교수님이 나가고 나서 제가 들어갔죠. 그다음이 최상기 교수, 그리고 그다음 권경원 씨였어요.
그곳에서 우규승 선생님이 미국인들에게도 존경받는 모습을 보고 더 존경스러웠어요. 평생 우규승 선생님을 보필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평생 옆에 있겠다고 하니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아래 있을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나라고요. 그래서 지금 경희대학교 교수로 오게 되었어요.
실무를 쌓은 설계사무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이성관 소장님이나 우규승 소장님 사무실에서 건축가로서 실무를 쌓은 경험은 어땠나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튀어나오는 갈증은 없었나요?
우규승 선생님은 작업의 전반적인 방향, 즉 마스터 플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가장 초기 블록 단계에서의 사고, 즉 건물을 어떻게 앉힐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결국엔 모든 디테일까지 풀지만, 초기 단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셨어요.
그곳에서 일할 때 우규승 선생님이 양재동 납골당 설계를 하고 계셨는데, 이미 배치가 어느 정도 나와 있었던 단계였어요. 제가 보조했던 프로젝트예요. 전반적인 움직임, 합리적인 매스의 방향성도 있겠지만 건물을 경험하기까지의 시퀀스 설계를 많이 하셨죠. 한번은 제가 단면을 끊어서 건물 전체에 전동 스크린 시스템을 넣자는 제안을 보여드렸어요. 매스가 완전히 솔리드해질 수도 있고, 투명해질 수 있다는 걸 렌더링으로 보여드렸죠.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설득이 어려운 분이신데, 이렇게 오케이 하신 적은 처음이라고 동료 직원들이 놀라더라고요. 설명보다 렌더링부터 보여드렸기 때문에 빠르게 판단하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규승 선생님이 이 프로젝트를 200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 출품했는데 “다음엔 김찬중 선생이 해야지”하셨어요. 그런데 4년 뒤 정말 참여하게 되어서 2006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 납골당 설계를 출품하게 되었죠.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게 가당치도 않지만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절 일개 막내 직원으로 본 것이 아니라 건축가로 인정해 주신 느낌이었거든요.
각 실무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방향의 건축을 구체화할 수 있었나요?
사실 제가 선택한 사무실들은 건축 언어가 중심인 곳은 아니었어요. 건축을 정공법으로 해결하시려는 분들이었고, 결과도 굉장히 탄탄한 느낌이었어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힘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지금 제 작업에 대한 레퍼런스로 지난 사무실의 작업을 언급하는 것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정통적인 구축 논리에 집중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 작업의 여러 카테고리 중 하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죠. 사람들은 익숙한 것들에 대해 반응을 잘 하지 않으니까요.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은 서양건축과 문화를 접하면서 다시 본인의 정체성, 한국 건축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한 화두로 마주하게 된 경험이 있어요. 교수님은 그런 고민이 없었나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민해 본 기억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차피 한국 사람인데 그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지, 한국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 이상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한국인임을 떠나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었어요. 저는 건축가 - 인공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환경과 공간에 관한 문제 해결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지, 제 개인적인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작업에 발현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페셔널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죠.
작업에서도 정체성이 문제가 된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구름애 리조트> 프로젝트에서는 전통건축으로 리조트나 숙박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의 문제 해결에 집중했지, 전통이라는 키워드나 ‘한국의 미’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글쎄요. 종교시설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해당 프로젝트가 가진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지, 한국적인 방식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제적인 반응이에요. 국제 콘퍼런스에서 작품 발표를 할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굉장히 신선하다.’, ‘그동안 보던 방식과 다른데, 굉장히 한국적인 것 같다’라는 뉘앙스가 있었어요. “So Korean”이라고요. 그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적극적 문제 해결의 방식이 한국적이라고 느껴진 것 같아요. 한국이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다이내믹하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한국의 상황에 가장 근접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한국적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겠네요.
그렇죠. 지금은 버네큘러나 로컬에 대한 인식 문제가 많이 대두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시장을 모두 열어놓고 생각해 보면, 조직의 역량은 정체성보다는 문제를 어떻게 인지하고 해결하느냐와 관계된 문제예요. 건축 언어(language)가 정체성으로 생각되는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전 세계의 안도 다다오 건축물들은 순전히 그의 정체성 덕분에 만들어진 경우니까요. 그 정체성 안에는 일본의 정체성, 일본적이라는 개념도 있고, 안도는 그 건축 언어에 가장 강한 것이고요. 가끔 그가 주로 사용하던 재료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해요. 저도 나오시마를 다녀와서 역시 안도 다다오라고 감동했는데,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 한 작업은 조금 실망스러워요.
결국 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굉장히 종합적이고 총체적인데, 지역성과 육체가 융화되어있던 것을 몸체(건축물)만 떼어 놓으면 약해지게 되는 거죠. 결국, 선택의 문제예요. 오퍼레이션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발주처의 방향성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때,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게 완성되는 것은 일본에서만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스타일만 해외로 나간 것 뿐인 거죠.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