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건축가특집은 공공 건축에 주목하는 주제에 맞추어 공공 프로젝트의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코어건축(유종수, 김빈)을 소개한다. 코어건축의 대표작인 서울서진학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풍부한 표정을 지닌 학교 공간은 오랜 시간 이어진 지역의 사회적 갈등을 위로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일반 학교 건축에서도 보기 힘든 팟(POD), 넓은 복도와 중정, 다채로운 재료가 만드는 공간은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에게도, 지역 주민들에게도 건축이 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의 방식으로 그러나 특별한 건축을 풀어내 온 코어건축의 작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공공 건축 영역에서 공모전에 참여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이를 건축가의 의도대로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의뢰인과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민간 시장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다. 최저 입찰과 조달청 시스템 안에서 비현실적인 일정과 기획의 부재를 만나게 되면, 설계안의 의도와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몇 배의 노력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코어건축은 이 고단한 공공 영역에서 공모전이라는 진검 승부로 프로젝트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건축 원칙을 지키며 공공 건축의 다양성을 만들어오고 있다.
대전차방호시설을 리노베이션해 예술창작공간과 문화공간으로 바꾼 평화문화진지, 공진초등학교를 개, 증축해 가장 보통의 특수학교를 만들어낸 서울서진학교, 한강 공원의 전망을 바라보는 한강 공원 양화지구 매점, 한강 수난구조대를 위한 광나루 119 수난구조대, 주변 대형 건축물 사이에서 분절된 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까지, 코어건축은 공공 건축의 질적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들만의 건축 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진행된 서울서진학교 영상과 함께 코어건축이 진행한 6개의 공공 건축을 만나보며, 인터뷰를 통해 공공 건축에 개입하는 건축가의 태도와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두 분이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하다.
유종수 태어난 곳은 곡성이라는 시골이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섬진강 17번 국도가 근처에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집은 툇마루가 있는 허름한 세 칸짜리 시골 농가 주택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루에서 안개 낀 강이 보이고 산도 보이고, 두루미가 날아가던 기억이 있다. 건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그런 곳에서 보내서인지 정서적으로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김빈 아버지가 토목 분야에서 일하셨다. 동남아, 중동 건설 붐일 때 해외 현장 소장으로 발령이 나셨다. 그래서 태국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은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6살에 한국에 와서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강남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어릴 적 기억은 완전히 다르다. 도로 옆에 바나나 나무가 있고 나무에 칼 꽂기를 하며 놀곤 했다.
서울의 초기 아파트 단지는 동간 거리도 멀고 나무도 크게 자라서 지금과 다른 풍경이었을 것 같다.
김빈 완전히 다르다. 주차장은 공공재 개념이었다. 차가 한 집에 한 대도 없을 때였으니까. 보통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장까지 녹지가 있는데, 그 단지에 사는 몇 가족이 어쩌다 한 번씩 녹지 앞 통로에서 놀곤 했다. 엄마들이 옆에서 수다 떨고 우리는 또래끼리 거기서 놀면, 그게 너무 좋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아파트 단지 앞 공간이 커뮤니티 공간이었던 셈이다.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
유종수 건축을 좋아했다거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대학을 가면서 건축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오히려 건설 쪽에 가까운 이미지로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타고난 능력이나 손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설계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료를 찾아보고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며 체득했던 것 같다. 지금도 건축을 배우면서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4.3그룹 선생님들이 SA(서울건축학교)를 꾸려 활동했고, 경기대 전문대학원이 생기면서 설계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해외 건축가들이 방한해서 강의도 많이 했고, 그런 것을 통해서 건축에 재미를 붙였다.
김빈 자신의 전공을 미리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저도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 지레 아들도 재주가 있겠거니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한번은 식사 자리에서 ‘건축과라는 게 있다. 한번 생각해봐라’ 이 정도로 말씀하셨다. 중학교 때쯤인데,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단단히 박혀서 슬슬 관심을 두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진로를 좀 더 다양하게 고민해 볼 걸 그랬다.(웃음)
유종수 소장님은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다니셨는데, 심화한 건축 교육이 막 시도하던 시기였다. 유걸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모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2002년에 입학했는데,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가기 전에 SA를 다녔다. 좋은 건축을 배우고 싶어서 이곳저곳 찾아보다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도 알게 되었다. 경기대 전문대학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SA는 정규 학교는 아니었지만, 실무를 하시는 선생님이 많았다. SA를 한 학기 다니다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 그만두고, 이후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걸 보고 찾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유걸 선생님이 계셨다. 또 그때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에 내세운 게 ‘실용’이었다. 다른 방향을 지향하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 첫해에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을 선택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전문대학원에 그전에도 좋아했던 김헌 선생님이 오셨고, 비슷한 시기에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하셔서 세 분을 경희대에서 만났다. 이후 매스스터디스에서 조민석 소장님을 만나 10년 가까이 실무를 한 것까지, 이분들을 만난 게 지금까지 건축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유걸 선생님이나 김헌 선생님, 김찬중 교수님은 어떤 면이 좋으셨나.
유종수 4.3 그룹 선생님들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게 있는데, 유걸 선생님은 연배가 훨씬 높지만,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 같다. 건축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업 시대의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앞으로의 건축, 건축가는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대공간이 가지는 힘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결이 달랐다.
김헌 선생님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저는 경희대 건축대학원의 첫 번째 졸업생, 첫 제자였다. 건축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김헌 선생님은 정신적인 지주 같은 존재였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김찬중 교수님이 부임해서 연 첫 스튜디오에 참여했는데, 항상 시스템을 강조했다. 학생들이 말랑말랑하게 사고하고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고 지도해 주셨던 것이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대학원 건물도 유걸 선생님이 직접 설계하셨는데 사용할 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아주 좋았다. 이런 걸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원래 있는 건물의 공간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비 오면 천장에서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 공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은 자기 영역을 만들곤 하는데, 유걸 선생님은 다 열어놓았다. 심지어 강의실도 반투명하게 열린 공간을 만들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전혀 다른 환경을 접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김빈 소장님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다니셨다. 건축 교육의 붐이 일어날 때 학교가 주목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개성 있게 활동하는 연세대 출신 건축가가 굉장히 많다.
김빈 그게 신기하긴 하다. 저는 처음부터 건축과는 아니었다. 토목과를 졸업하고 다시 건축과에 들어가서 선후배를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다. 첫 설계 수업을 김광수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그게 저에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처음 배운 설계 수업에서 공간 스터디를 하는 데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첫 단추를 잘 끼운 것 같고, 그 인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김광수 선생님 권유로 참여했던 게 <SA 강경 워크숍>이었다.
SA 워크숍은 당대 건축가가 총출동하던 워크숍이었다. 분위기는 어땠나?
김빈 워크숍이 스튜디오 별로 움직이니까 결국 6~7명의 학생과 김광수 선생님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워크숍이 끝나고 학교 체육관 강당을 빌려서 결과물을 펼쳐 놓았는데, 기억에 남는 건 무대 위에 튜터들이 걸터앉아 이야기하던 장면이었다. 당시 가장 잘나가는 건축가들이 모여 있는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그 사진을 남기지 않은 게 지금도 아쉽다. 아무튼, 보통 건축은 건물만 생각하는데, 도시를 탐험한다는 것도 처음이었고, 낯설고 적응하기 힘든 면도 있었지만 재미있었다. 도시에 대한 주제, 목적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강경은 일본강점기 때 잘나가던 수로 수상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던 곳인데, 현대에는 완전히 박제된 도시로 남아있다. 그런데 도시 구조는 여전히 살아있는 게 흥미로웠다. 거기에 학생들을 데려다 놓으니, 기발한 것도 나오고 말도 안 되는 것도 나오고 재미있었다.
저는 계보와 좌표에 관심이 많아서 그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고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온 기록이 아닐까 싶어서다. 두 분은 또 매스스터디스의 초창기를 함께 하셨다. 언제 들어가셨나?
김빈 제가 2003년도 후반, 유 소장님은 2004년도 중반 정도였다. 첫 회사를 나와서 잠깐 쉬고 있을 때 김헌 선생님 소개로 다니게 되었다. 직원이 3명 정도였던 완전 초창기였다. 매스스터디스에 큰일이 들어오기 시작한 2004년 초부터 사람을 많이 뽑았는데, 유 소장님도 김헌 선생님 소개로 합류하게 되었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첫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
김빈 헤이리 주택들 – 이끼집하고 비틀린 집(Torque House), 너와를 붙인 깍여진 집(Chipped House) 로 시작했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의 계획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계획안을 만드는 과정에 처음 참여했는데, 일반적인 아파트나 주상복합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처음 계획안부터 재밌고 신선했다. 당시 시행사 프로젝트를 그렇게 접근하고 또 충분히 사업성 있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부티크 모나코 프로젝트는 작업량이 엄청나서 도면을 쌓으면 사람 키가 훌쩍 넘는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유종수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축 자체도 어려웠고, 저층부와 상부 주거 타입도 아주 많아서 스터디도 많이 필요했다. 거기에 적용할 시스템도 처음 해보는 게 많았다. 또 규모가 커지니 컨설팅 회사들이 아주 많았다. 그것들을 건축가가 어떻게 핸들링 해야 하는지, 설계부터 공사 현장까지 참여하면서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조민석 소장님이 보여주신 태도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한 인터뷰를 보았다. ‘이것은 일이고 우리는 프로고 여긴 학교가 아니다’라는 멘트도 언급했는데, 매스스터디스의 시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매스스터디스의 실무는 저에게도 중요하지만, 독립해서 활동하다 보니 그냥 저희가 하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입견을 주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매스스터디스에서의 실무는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나 건축에 올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계획할 때부터 치밀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 건물을 짓다 보면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데, 그때마다 유연하게 잘 풀어가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김빈 늘 조민석 소장님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유종수 소장님과 비슷하다. 건축 프로젝트 하나에 끊임없이 집중하고 매달려야 하는데, 사실 힘든 일이다. 한편으로는 기준이 너무 명확해서 편한 것도 있다. 집중해서 일하면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힘들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명확한 건축적 아이디어를 지키면서 시행사나 여러 사업체와 협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빈 조민석 소장님은 굉장히 유연하다. 지키고자 하는 것도 분명하지만, 관계자분들과 대화를 굉장히 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민석 선생님이 해준 명언들이 있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태도인데, ‘가려운 데를 긁어줘야지, 아픈 데를 긁어주면 안 된다.‘라는 거다.
유종수 부티크 모나코나 에스트레뉴 같은 경우 시행사가 있었지만, 건축가 안을 존중해줬다. 그러면 둘 다 원래 계획안대로 지어졌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처음에 제안했던 안에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상황에 유연함이 있는 것 같다. 발주처나 건축주가 엄청난 시간을 들인 일을 변경하자고 하면 저희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 발전시켜 좋은 안으로 만들기 위한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 같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실무를 쌓는 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유종수 조민석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저는 지금도 부족한 것 같지만 말이다. 퇴사한다고 했을 때 조 소장님이 같이 밥을 먹으며 해준 얘기가 있었다. 나가서 뭐 할 거냐고 물으셨다. 김빈 소장님과 같이 사무실을 하기로 한 상태에서 나왔는데, 뭘 할지는 모르겠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어떻게든 버텨라. 뭐든 하고 싶으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네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위해서 신문팔이를 하더라도 버텨라’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말들이 아직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독립하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김빈 제가 먼저 나왔는데, 우스갯소리로 ‘여기서 운을 다했구나, 내 시대는 끝나가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맨땅에 헤딩 한번 해봐야겠다 했다. ‘정 힘들면 또 취직하면 되지’라고 가볍게 나왔다. 필운동에서 사무실을 열었고, 종종 유종수 소장님을 볼 때마다 열심히 설득했다.(웃음)
할 만큼 했다는 건 내 것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나?
김빈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무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가 보였고,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해도 결국 비슷할 것 같았다. 내 것을 하겠다기 보다는 그냥 해보지 뭐 이런 마음이었다. 대단한 건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간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했다. 만만치 않았는데 맨몸으로 버텼다.
유종수 저희는 서로 회사 다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 술친구 중 한 명이었다. 마흔에 사무실을 열었는데, 그 나이 정도면 건축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직장에서 계속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그곳에서 얼마나 더 확장성이 있을지 고민하는 때인 것 같다.
한편으로 훨씬 젊은 사람들이 자기 건축을 하는 걸 보고 가능성을 봤던 것 같다. 언젠가 해야 할 거라면 지금이 적정한 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 소장님이 먼저 상을 차려놨기 때문에 저는 그냥 숟가락만 얹었다. .
김빈 책상하고 의자 하나밖에 없었다.(웃음)
2010년 즈음만 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성장할 만한 건축 시장이 없었다. 처음 독립해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셨나?
김빈 당연히 저희처럼 일천한 사람들이 일을 따는 유일한 방법은 공모전이다. 처음 시작은 다 비슷하다. 매스스터디스의 인연으로 속초에 조그마한 주택을 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민간 프로젝트가 바로 <상상가>였다. 그다음은 공모전을 시작했다.
유종수 보통 독립을 하면 지인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 하지만 저희는 사실 그런 게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공모전이었다. 2014년 2월에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3개월 동안 준비한 공모전이 운 좋게 2등으로 입상했다. 이렇게 계속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 떨어졌다.
저희가 공모전을 많이 참여했는데, 어떻게 보면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다. 선배 건축가들이 공모가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조금씩 마련해 주셨다. 정책과 우리의 시기가 운 좋게 맞았던 것 같다.
당시 공공 건축가 제도가 시작되고, 공모전 제도가 시스템을 갖춰가는 시점이었다. 공모전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문턱이 조금 낮아졌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복합적이다. 공공건축가 제도나 지명 공모전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사 과정이 공정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모전 내용이나 심사위원, 지침을 보았을 때 공정하게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있다. 그런 신호를 계속 주어야 규모가 작은 설계사무소도 덤벼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시스템이 정비되면서 제출물도 간소화되는 추세였다. 공모전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다.
그런데도 공모전은 당선이 보장되지 않는다. 공모전을 계속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조율했나?
김빈 초창기와 지금은 조금 다르다. 대전차방호시설 공모전에 처음 당선됐을 당시에는 공모전 선택할 때 프로젝트를 가릴 단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통장 잔고가 없으니까. 다만 공모전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라든가, 심사위원 정도는 당연히 본다. 그렇다고 ‘이번엔 좀 쉬어 갈까?’ 이런 여유는 없었다. 뭐든 공모전이 나오면 계속 도전을 해야 하는데, 그걸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
유종수 당선된 것도 있지만 입상을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앞으로 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서 희망 고문이 된다. 그런 것 때문에 계속 공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민간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허가 직전까지 갔다가 멈추고, 민간 공모에 당선되어도 계약 후 진행이 안 되는 것을 겪어보니까, 민간으로 안 되나 공공 공모전으로 안 되나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거구나 싶었다.
김빈 하다가 지칠 만 하면 한 번씩 입상을 하고 어쩌다가 당선도 되고. 그러다 보니 공모전이 나름대로 일을 따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거다. 설계사무소마다 경험이 다를 텐데 저희는 운이 좋았는지 공모전을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쪽으로 자꾸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공모전 첫 당선 프로젝트가 평화문화진지: 대전차방호시설 리모델링이었다. 이 공모전은 해봐야겠다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
김빈 그것도 시스템 덕분이다. 설계비 1억 이하 프로젝트는 공공건축가 중에서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공정함도 그렇고 참여할 사람들을 지명한 것도 시스템화되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선 프로젝트가 너무 특이하잖은가? 대전차방호시설은 그냥 구경하기도 힘든 시설인데, 그걸 바꾼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또 당시에는 8천~ 9천만 원의 설계비도 저희에게는 귀한 돈이어서 지원했다. 물론 리모델링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누구나 흥미를 느꼈을 것 같다.
코어건축사사무소의 웹사이트에 소개된 프로젝트를 보면 당선작보다 2등작이 더 많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도전하고 어느 정도 비율로 당선되셨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작년 서울시건축상 대상을 받아서 올해 건축문화제에서 특별전을 했다. 전시하면서 그동안 공공 공모전에 지원했던 폴더를 다 열어봤더니 한 90개 정도가 되더라.
김빈 2014년부터 시작했으니까 만 9년이 되어간다. 2019년과 2020년이 가장 많았다.
유종수 그때 아마 15개에서 20개 정도의 공모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말은 거의 한 달에 한 개의 공모에 참여했다는 거다. 물론 두 팀으로 나눠서 했지만.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지치기도 했다. 적정한 기간을 두고 당선이 되면 좋은데, 사실 공모는 언제 당선될지 모른다. 재작년처럼 1월부터 10월까지 당선되지 않다가 11월부터 동시에 3곳이 당선되는 바람에 올해는 공모를 거의 안 하기도 했다.
90개 정도 되는 공모전에서 당선된 것은 몇 개인가?
유종수 당선은 한 10개 전후인 것 같다. 지어진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납품까지 했는데 발주처 상황으로 잠시 멈춘 것도 있다.
김빈 당선율로 보면 10% 정도다.
절차가 간소해졌다고 하더라도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공모전인데 어렵진 않았나? 공모전에 주력하면서 내부에서 가진 원칙이나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간소해졌다는 건 상대적인 거다. 간소해졌다는 게 간단해졌다는 건 아니니 에너지는 많이 써야 한다.
유종수 지금은 저희만 일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같이 일한다. 가능하면 직원들이 공모전만 하기보다,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현장까지 온전하게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공모뿐만 아니라 교육청의 ‘꿈담 교실’이나 ‘찾아가는 동사무소’도 참여했는데, 가능하면 처음 입사한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작을수록 다루기 쉬우니까.
공모전을 할 때 일단 좋은 공모전인가를 먼저 판단하고,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시작한다. 방향을 잡고 직원들이 작업하면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다. 제출물도 비효율적인 것은 제외하려 한다.
2015년부터 서울시 공모전 제도도 꾸준히 개선됐다. 다른 도시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공공 건축에 대한 제도가 초창기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지, 여전히 어려움으로 꼽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유종수 처음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프로젝트 서울>이라는 웹사이트도 만들었지만, 그때는 서울시 기획과에서 주관했다. 그러다가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고 도시공간개선단이 생기면서 서울시에서 공공 건축을 전체적으로 주관하며 공모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공모전이 공개되고 심사위원도 공개되고 전자화 문서로 간소화시키는 등 제도를 잘 만드신 것 같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공모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빈 기본적으로 서울시의 방향, 지자체별로 총괄건축가 제도가 생기는 큰 흐름이 있고, 그 덕분인지 건축가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건축가의 의견이 조금씩 반영되고 있다. 공모전은 결국 공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는 관행적으로 받던 자료도 간소화하려 하고 공모의 기획 단계에서 건축가들의 참여가 많아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어서 저희가 편해지는 것 같다.
제출물이 많은 큰 규모의 공모전도 참여하나?
김빈 공모전을 고를 때 규모가 크거나 제출물이 많은 것보다, 공정함에 대한 의심이 있다. 공모전을 하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데 우리가 한 노력을 공정하게 심사받지 못한다면 안타까우니까. 규모가 큰데 괜찮을 것 같다 싶으면 당연히 덤벼든다.
공공 건축은 사업의 목적과 풀어내야 할 숙제도 분명하고 사업의 종류도 다양하다. 주어진 조건이 흥미롭거나 인상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유종수 대전차기지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시 스케이트 광장, 양남시장도 그렇다. 지어지지 않았지만, 낙산전망대도 있었다. 이번 오픈하우스서울에서 소개하는 한강 변 플로팅 건물처럼 장소적인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저희는 프로그램이 특수한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김빈 공공이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민간사업에서는 잘 접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다 그런 성격이다. 한강에 떠오르는 건축물을 언제 해보겠나.
공간지에 이치훈 소장님의 비평이 흥미로웠다. 기념비성을 가지면서도 과하지 않는 특성을 언급했다. 공모전의 전략으로도 유리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건축 유형이나 형식에서 디자인 전략이 있는지, 어떻게 그 균형감을 찾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저희에게 균형감은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다 하고 싶은 바이고 그래서 어떤 때는 2등 안이 더 좋은 안이라고도 한다. 저희는 둘이 함께 작업하기 때문에 그 균형감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프로젝트를 할 때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다. 직원들과도 함께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왜 좋고 안 좋은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합리적인 걸 찾아가려고 할 때 항상 김빈 소장님이 균형을 잡고 잘 유도해 준다. 기념비성이나 유형은 각 프로젝트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김빈 공공 건축이고 공모전이니까 사실 보편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르게 말하면 합리성일 수도 있고 보편성일 수도 있고, 편리성, 효율성 등이 담보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매스스터디스에서 배운 게 아닐까 싶다. 보편성의 끈, 합리적인 것을 놓지 않는 분이었다. 더구나 공공은 합리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형태가 어떻게 보이든 간에 일반적인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쓴다.
민간 건축과 비교해도 설계한 공공 프로젝트 대부분, 건축물의 캐릭터가 선명하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유 소장님 말씀하신 거로 설명이 될 것 같다. 결국, 민간이든 공공이든 ‘건축은 똑같다’라는 대전제가 있다. 민간, 공공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이 달라서 대응은 달리 하지만, 그래도 건축은 보편성, 합리성, 재료나 볼륨, 동선과 공간을 짤 때도 결국 그냥 건축인 거다.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설계하다 보면 벽돌 건물도 나오고 철판 건물도 나오는 거다. 그냥 건축으로 접근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OHS